바람이 사람을 세운다
- 작성일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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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사람을 세운다
이혜숙
며칠 만에 제주도에 내려왔다. 공항버스 종점에 내리자마자 바람이 양팔 벌려 맞이한다. 앞을 막고 포옹하자 하고, 한 걸음도 못 걷게 발목을 휘감는다. 격해도 너무 격한 환영 인사. 휘청대는 걸음으로 주차한 자동차에 도달해서 문을 여니, 이번엔 문짝을 뜯고 들어와 앉을 기세다. 양손으로 힘껏 끌어당겨 겨우 닫자 차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큰소리로 외친다.
“나 보고 싶었으면서 왜 보자마자 내빼려고 해?”
마음을 들킨 것 같지만 보고 싶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상대. 마주 서려 해도 뒷걸음질 치게 하는 존재. 나보다 기가 센 사람을 만나면 피하기부터 하는데, 제주의 바람이 그렇다. 그러니 숨 막히도록 달려드는 바람을 피해 차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바람을 피하자 비로소 바람이 느껴진다.
‘역시 제주 바람!’
용인 집에 있는 동안 왠지 자꾸 가라앉는 기분이 그거였다. 바람이 불지 않아 움직이지 않는 나무며 풀이 시르죽어 보였던 것. 걸어 다니는 사람조차 축 처져 보였다. 나도 생기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무슨 일을 해도 의욕 없이 하는 기분이었다. 왜 그랬는지를 제주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어느새 제주의 바람이 익숙해졌음을.
그러면서도 강풍이 부는 날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안에서 보기만 했다. 나무를 사정없이 흔드는 바람, 바닥에 떨어진 비닐을 하늘 높이 올려 버리는 바람, 구름을 흩뜨리는 바람, 밤에 들으면 파도 소리로 착각하게 하는 바람···. 육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바람이었다. 두려우면서도 역동성에 감탄하곤 했다.
용인 집과 제주의 거처를 오가면서 며칠만 지나면 산소 부족이기라도 한 듯 답답하다가 제주에 도착한 순간 결이 다른 바람에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감당할 자신이 없는 상대에게 알게 모르게 끌리듯이···.
다음 날 종달리에 갔다. 수국 철이면 해안도로 양쪽에 파랑, 보라, 분홍의 수국이 수국수국 피는 곳이다. 제주의 여름이 종달리 수국에서 시작하기라도 하듯. 우도 가는 선착장 가까이에 있는 ‘오늘 종달’이 내가 자주 가는 카페다.
“오늘만 살 작정으로 지은 상호 같네요.”
내가 농담을 건네자 주인 여자가 웃으면서 답했다.
“오늘 하루 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지나간 어제도 오지 않은 내일도 오늘 없이는 있을 수 없을 터. 주인의 강단 있는 성격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날 우리는 바람에 관해 이야기했다.
“제주에서 오십 년 산 사람이 서울로 이사 가서 가장 먼저 느낀 게 풍경이 죽은 것 같더래요. 바람이 바람 같지 않다더니,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하겠어요.”
“섬 바람이 다르긴 다르죠. 사방이 바다라 막아 줄 무엇도 없으니. 센 날은 세게 부는 대로 약한 날은 약하게 부는 대로 바람을 따를 수밖에요.”
바다의 일도 바람이 주관하는 일이니 토속 신앙이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거스르지 않으려 자세를 낮춘다는 말이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바람에 밀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겠어요? 저절로 다리에 힘을 줄 수밖에요, 아무래도 근육이 붙겠죠. 사람만 그러겠어요? 나무는 뿌리에 힘을 줄 거고 새도 날개에 힘을 싣겠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죠. 바람이 강하니 섬에 사는 생명들은 맞서 강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게 섬사람들의 기질이죠. 육지 사람들 눈엔 억세 보일 테지만.”
그동안 만난 제주 사람들이 마치 한 사람인 양 닮아 보였던 이유를 알 듯했다. 무뚝뚝하고 데면데면 대하는 태도에 처음엔 타지 사람이라 배척한다고 생각했다. ‘육지 사람, 육지 것’이라는 말에서 도저히 좁혀지지 않을 거리를 느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정 많고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공것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베푸는 마음을 많이 받았다. 외강내유라고 할까.
육지 사람들은 제주의 자연과 풍광에 반해서 여행을 오거나 이주하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이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들은 확실히 다른 점이 많다. 늘 보아 온 풍광이라 별로 감탄하지 않는다. 낭만, 감성, 사랑··· 같은 말은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 가슴에 담지 않는지도 모른다. 후회 같은 단어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오늘이 중요하다는 카페 주인도 영락없는 제주 사람이다. 그들은 자립심과 생활력이 강하고 자존감이 높다. 바람과 함께 살아온 내력 때문일까. 바람이 그들을 꿋꿋하게 세웠기 때문일까. 겉모습은 바람을 맞서는 생존의 모습이고, 안에 감춰진 것은 바람을 섬길 줄 아는 낮은 자세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아직 바람 앞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말과 머리로만 살려고 하지 몸을 써서 살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일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앞으로의 일에 마음을 쓰면서도 정작 ‘오늘’ 하루는 대충 넘어가는 것 또한.
그러니 제주 바람을 제대로 맞아 보려면 아직 멀었다. 허약한 다리에 힘을 실어 줄 요량으로 먼저 다가선 바람의 큰 뜻조차 헤아리지 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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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숙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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