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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를 캐는 봄

  • 작성일 2024-09-05
  • 조회수 319

   조개를 캐는 봄

최지안


   4월의 바다가 앞섶을 풀어 헤쳤다. 뻘이 드러났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들이 작은 웅덩이에서 파닥거리고 몽돌에는 널브러진 연초록 해초가 햇빛에 반짝인다. 고둥처럼 뻘에 붙어 호미질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남해의 앵강만. 꾀꼬리 앵(鶯) 자가 들어가는 바다는 아기자기하다. 동그랗게 앵강만을 끼고 멀리는 다랭이마을부터 옆구리로 원천, 신전 화계, 용소마을이 이어져 있다. 음력 다섯 물. 뻘이 드러나면 마을 사람들은 양동이와 호미를 들고 와 조개를 캔다. 

   나는 용소 아주머니를 따라 물기 빠진 뻘로 들어선다.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햇볕이 따뜻해도 바닷바람은 얼얼하다. 아주머니가 준비해 주신 호미와 양동이를 들고 몽돌밭을 걷는다. 발보다 큰 장화를 신어서 걷기가 수월치 않다. 

“왔나? 늦었네. 퍼뜩 캐라. 몽돌이라 캐기가 되다.”

   미리 와서 자리 잡은 동네 아주머니가 우리를 맞는다. 옆 동네에서 캐는 조개보다 여기 용소 조개가 맛이 더 깊다고 한다. 어제도 조개를 캤던 용소 아줌마도 조갯살이 포실한 것이 맛 난다고 했다. 나도 그들 틈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호미질을 시작한다. 

   뻘 때문에 조개인지 몽돌인지 구별이 어렵다. 뻘이 뭍은 조개처럼 분간이 가지 않는 일이 있다. 지나고서야 알게 되는 것. 한곳에 오래 있을 땐 몰랐다. 남쪽에 내려와 보니 위쪽의 삶이 보였다. 바쁘게 돌아가던 도시의 일상과 천천히 흘러가는 이곳의 삶. 무엇이 조개이며 무엇이 돌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내게 남을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들의 구분이 확연해진다. 

   몽돌을 헤집어 보니 동글동글한 조개가 나오기 시작한다. 신기하다. 처음엔 조개가 잘 안 보이다 좀 지나니 조개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바닷물에 씻으니 무늬가 예쁜 바지락이다. 여기 사람들은 ‘반지락’이라고 부른다.

   왼쪽으로 작은 섬이 보인다. 지도상 이름으로는 목단섬.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몰개’섬이라고 했다. 이 작은 섬은 가까워서 수영으로 오가기도 했다고 하는데 몰개섬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자신들도 모른다 했다.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불러 왔다며 ‘목단섬’은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라 한다. 나도 그럴듯한 ‘목단섬’보다는 ‘몰개섬’이라는 말이 더 친근하고 좋다. 

   뚝방 오른쪽으로는 ‘형제 바위’가 있다. 이것은 섬이 아니라 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다. 형제가 손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난히 평소보다 바위가 더 커 보인다. 물이 차 있을 때는 작아 보이지만 물이 빠지면 물 밑으로 가려졌던 여가 드러난다. 그 바닷속으로 더 숨어 있는 ‘여’는 얼마나 더 클까. 물 위로 나온 바위만 보고는 그 밑의 여를 가늠하기 어렵다.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모습이 정겹다. 그 두 형제는 좋겠다. 늘 같이 있어서. 나도 내 피붙이랑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같은 지역에 살 때는 몰랐는데 이사 오고 나니 가족들이 더 자주 생각난다. 형제 바위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물속에서는 같은 몸이 아닐까 싶다. 각각 달리 살아도 원래는 한 핏줄인 피붙이처럼. 

   이젠 그립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움은 ‘여’처럼 가슴 속으로 잠긴 커다란 덩어리다. 말은 안 하지만 누구나 그리움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멀리 있어도 그립고 가까이 있어도 그립다. 가까운 사람들은 가깝기 때문에 외로워서 더 그립다.         

   벌써 한 양동이 가득 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뒤늦게 온 사람도 있다. 망에 든 조개를 바닷물에 씻어 나가는 사람, 아이들과 작은 게나 물고기를 잡는 사람도 있다. 저 너머 멀리 여수의 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곳 바닷가의 시계는 도심보다 느리게 간다. 푸른색에 미쳐 남쪽까지 내려왔다. 바다는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매일매일 다른 색이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밭일하던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가끔 주변에서 푸성귀도 얻는다. 어떤 날은 부녀 회장님이 ‘쫑쫑 쓸어 간장에 넣어 드이소’라며 쪽파를 갖다주시고 어떤 날은 용소 아주머니가 보드라운 깃털이 묻은 달걀을 갖다주신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바닷가 삶이 낯설다. 

   호미질을 하다 힘들어 그만둔다. 조개가 든 양동이를 들여다본다. 양동이 가득 채워 가리라고 생각했는데 반도 못 채웠다. 조개를 캐는 비용으로 2만 원을 지불했으니 2만 원어치는 캐야 하지만 1만 원어치만 캔다. 2만 원 냈다고 2만 원을 넘겨야 한다는 법은 없다. 조금 헐거운 것이 편하다. 꽉꽉 채워서 살려면 몸도 마음도 그만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니까. 

   바다가 풀었던 옷깃을 여미기 시작한다. 파도가 재촉하듯 하얗게 밀려온다. 밀물이 더 들어오기 전에 나가야 한다. 바닷가 마을의 하루도 그만 기울어 간다. 해는 서쪽 다랭이마을 쪽으로 건너가고 나는 양동이를 들고 집으로 간다. 소금물에 담갔다가 용소 아줌마가 준 달래를 넣고 조개탕을 끓여야겠다. 

 봄 바지락은 맛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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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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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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