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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진행 중, 우리는

  • 작성일 2024-10-15

여전히 진행 중, 우리는

최해인


<등장인물>

현실 김기훈 – 소설 속 다른 인물을 대역한다

소설 김기훈

교수


<무대>

현실 김기훈의 지도교수 연구실 및 소설 속의 여러 공간


<때>

현재



  1장.
   
  무대 중앙을 기준으로 끝에서 끝까지 세로로 긴 책상 두 개가 있다. 책상 사이로 한 사람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책상 위에는 연극 포스터가 깔려 있고, 그것을 긴 유리가 덮고 있다. 마치 박물관 같다. 긴 책상을 기준으로 하수는 지도교수의 공간, 상수는 소설 속의 공간이다. 하수 아래에는 지도교수 책상이 있고, 지도교수는 객석을 향해 앉아 있다. 하수 위에는 책장이 있고, 안에는 각종 책이 가득 꽂혀 있다. 상수에도 의자가 있다. 노크 소리가 들린다.
   
교수 들어오세요.
   
  현실 기훈이 등장한다. 교수는 기훈을 쳐다보지 않는다.
   
교수 거기 앉아 있어.
   
  현실 기훈, 의자에 앉는다.
   
교수 포스터 나왔어?
현실기훈 아직이요.
교수 거기 자리 있으면 하나 넣어놔. (사이) 근데 지난 학기 힘들었어? 갑자기 제주도 다녀오고. 기훈아 이 바닥은 박사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선물은 안 사 왔지? 받고 싶어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세상에는 비밀이 없어요.
현실기훈 교수님, 제가 보내드린 거 읽어 보셨어요?
교수 뭐?
현실기훈 금수일보에서 당선된 소설이요. 메일로 보내드렸는데요.
교수 아 뭐 하나 왔던데 소설이었어? 그런 걸 읽을 시간이 어딨니.
현실기훈 그렇군요. 사실 그거 때문에 온 거예요.
교수 할 말이 있다는 게?
현실기훈 교수님께 답을 듣고 싶어서요.
교수 뭔데 그래?
현실기훈 (가방에서 인쇄한 소설을 꺼내며) 소설 읽어 보실래요?
교수 시간 없다니까. 빨리 말해.
현실기훈 누가 제 얘기를 썼습니다.
교수 무슨 소리야?
현실기훈 (소설을 들며) 이거 제 얘기입니다.
교수 (그제야 기훈을 쳐다보며) 자세히 얘기해봐.
현실기훈 소설 주인공 이름이 김기훈입니다. 소설의 김기훈도 대학원을 다닙니다. 그리고 소설의 김기훈은 일광시에서 주관하는 희곡상을 받았고요.
교수 잠시만, 너잖아.
현실기훈 말씀드렸잖아요.
교수 누가 썼어? 당선작가 이름이 뭐야?
현실기훈 가까이에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교수 우리 가까워, 다 들리니까 거기서 얘기해.
현실기훈 그쪽으로 갈게요.
   
  현실 기훈, 교수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교수 여기는 못 들어온다고 했지? 어디 건방지게, 당장 안 나가!
현실기훈 제발 제대로 좀 들어보세요.
   
  교수, 현실 기훈의 큰소리에 당황한다. 무대 상수에 소설의 기훈이 등장한다. 소설 기훈은 통화를 하고 있다. 현실 기훈은 교수에게 소설을 읽어준다.
   
현실기훈 주민등록증과 통장 사본을 보내 달라는 전화였다. 시상식 날짜는 추후 공지하겠다 하고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소설의 기훈을 보며) 혹시 필명이 있으신가요?
소설기훈 아니요, 없는데요.
현실기훈 만드실 생각 있으신가요?
소설기훈 아니요, 없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현실기훈 상패 제작 전에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전화를 끊는다. 소설 기훈은 의자에 앉아 생각하고 있다.
   
현실기훈 일광시에서 저한테도 똑같이 물어봤습니다.
교수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현실기훈 소설처럼요. 교수님은 아시죠? 왜 필명 만들 생각 없냐고 물어봤는지.
교수 그거야. 네 이름이 그 양반 극단을 떠올리니까. 금수일보에 물어봤어?
현실기훈 개인정보라 알려줄 수 없다고 하네요.
교수 그럼 잠시 기다려봐. 당선자들 사진 찍으면 올라오겠지. 의심 갈만한 사람은?
현실기훈 혹시 걔일까요? 대학원 들어왔다 한 학기만 하고 자퇴한 얘요.
교수 걔가 이걸 왜 써?
현실기훈 교수님이 붙여줘서 제 연극제 작품 각색한 거 기억하시죠? 나중에 연극제에서 상 받으니까 뒤풀이에서 그거 자기 작품이라고 난리 쳤던 것도. 만나는 사람들한테 그거 자기가 다 바꾼 거라고 했어요. 이후에도 제 욕을 그렇게 하고 다녔다고…….
교수 남의 글이나 고칠 줄 알지 자기 글은 못 써서 그래. 자격지심이고 피해의식이야. 그리고 실제로 걔 작품은 아니지. 너 그때 고맙다고 따로 돈까지 줬다며?
현실기훈 네, 50만 원요.
교수 근데 뭐가 불만이라서 이런 거까지 쓰겠어?
현실기훈 그 친구랑 연락돼요?
교수 얘기 꺼내지도 마, 나한테 배울 거 없다고 자퇴서 가져온 애야, 몰라?
현실기훈 전화했는데 없는 번호래요. (사이)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누가 이걸 썼냐가 아니라, 이걸 왜 썼냐는 거예요.
교수 왜 썼는데?
현실기훈 소설 읽어 보실래요?
교수 그냥 얘기해, 제대로 듣고 있어.
현실기훈 읽어 드릴게요.
   
   
   
  2장.
현실기훈 일광시에서 발간하는 잡지의 취재기자는 당선자와의 인터뷰는 관행이라며 연락했다. (소설의 기훈을 보며) 작품 의도가 어떻게 되죠?
소설기훈 대공분실을 설계했던 유명한 건축가들의 침묵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담았습니다. 기억을 지속시켜 주는 것은 공간뿐이라는 글을 보고, 이 작품을 쓰게 됐습니다.
현실기훈 그게 어디에 나오죠?
소설기훈 기억이 나질 않네요, 찾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사이) 왜 웃으시죠? 말씀하세요.
현실기훈 작품이 담고 있는 주제가 의미심장해서요. 기억을 지속시켜 주는 것은 공간뿐이라는 거요. 처음에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어요. 김기훈, 유명한 극작가 있었잖아요. 아시죠?
소설기훈 네, 알죠.
현실기훈 서로 아는 사이예요?
소설기훈 아니요, 그분은 저를 모릅니다.
현실기훈 이건 오프 더 레코드인데 얼마나 충격이었을까요. 자기 스승이 그런 파렴치한 성범죄자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소설기훈 모르고 있었을까요? 사실이 밝혀지니 연극판을 떠난 거죠. 작품으로는 정의와 진실, 평등과 자유를 말하고 있는데 실제 자신이 머물던 공간은 정반대였으니까요. 관객들이 그의 말을 더는 믿지 않을 테니 글을 쓸 이유도 사라진 겁니다.
현실기훈 그거 아시죠? 그 극단 단원들 여전히 연극하고 있는 거.
소설기훈 어디서요?
현실기훈 (교수에게) 소설의 기훈은 극단 단원들을 만나려고 제주도로 가요.
   
  소설 기훈은 퇴장한다.
   
교수 그래서 너도 제주도에 간 거였어? 소설이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현실기훈 네, 소설을 쓴 사람이 저한테 그곳으로 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어요.
교수 제주도까지 갔는데 이걸 누가 썼는지 모르는 거 보면, 작가를 만나지 못했네.
현실기훈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만났죠.
교수 그게 누군데?
현실기훈 우여진이요. 교수님도 아는 사람이에요.
교수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그 극단에 그런 이름은 없었는데.
   
  현실 기훈은 휴대폰으로 포스터를 보여준다.
   
현실기훈 제주도에서 체홉 『갈매기』를 연출하고 있더라고요.
교수 (휴대폰으로 포스터를 다시 보며) 일광시에서 극단 정리하고 제주도로 갔나 보군. 배우들 몇 명은 이름을 알겠는데, 우여진은 처음 들어.
현실기훈 소설에는 제가 제주도에서 군 생활했었다는 것도 적혀 있었어요.
교수 그럼 너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썼다는 거잖아. (사이) 기훈아 이건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야.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야.
현실기훈 뭐가 사실이죠? 제 삶이요? 아니면 이 소설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한테는 누가 이걸 썼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걸 왜 썼냐는 거죠. 계속 말씀드리죠. 소설의 기훈처럼 저도 제주도로 갔어요. 그리고 공연 중인 소극장으로 갔죠. 커튼콜이 끝나고 객석 불이 켜졌고 저는 우여진 연출을 만나려고 로비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심장이 빨리 뛰었어요. 소설 때문에 여기 온 건 맞는데, 내가 진짜 소설의 기훈처럼 우여진한테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몸이 굳더라고요. 소설 속 기훈의 말은 제 말이 아니니까요. 포스터에서 극단 이름 보셨어요?
교수 프로젝트 그룹 고도. 우리는 오늘도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라. 그 양반을 기다린다는 건가?
현실기훈 잠시 후에 뜨레플레프 역을 맡은 배우가 로비로 나왔어요. 얼굴이 낯이 익었어요. 인터뷰 기사에서 봤던 게 생각났어요. 김기훈 작가 작품이 한국에서 받을 수 있는 연극상을 휩쓸었을 때 주연배우였거든요. 기억나시죠? 교수님이 작품 리뷰도 썼었잖아요. 그 배우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었어요. 기훈이 형이 저한테 늘 얘기해요. 배우는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형이 추천해 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트겐슈타인을 읽고 있어요. 『논리철학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하는. 그러나 저는 무엇이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인지는 말해봐야 안다고 생각하고, 그건 연극이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수 그래서 우여진을 만났어?
현실기훈 소설의 기훈은 우여진과 이런 대화를 나눠요.
   
   
   
  3장.
   
  소설 기훈 등장한다.
   
현실기훈 저를 찾으셨다고요?
소설기훈 우여진 연출님이세요? 연극 잘 봤습니다.
현실기훈 감사합니다. 곧 브레히트 작품도 올라가니 그때도 보러 와주세요.
   
  소설 기훈은 인사를 하고 퇴장한다.
   
교수 끝이야?
현실기훈 (가방에서 희곡을 하나 꺼낸다) 이거 아시죠?
교수 그 양반 작품이잖아.
현실기훈 미투로 구속된, 한때 연극계에서 신이라 불렸던 사람. 책 내지에 그 사람 사인이 있어요. 그 사람은 늘 이렇게 써줬어요. 연극 만세. 군대 휴가 때 일광까지 찾아가서 받은 거예요. 그때 싸인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선생님 존경합니다, 저도 희곡을 쓰고 있는데 언젠가 선생님과 꼭 작업해보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저한테 이름을 묻더군요. 저는 김기훈입니다. 희곡을 쓰면 다음에 가져오라고 했어요. 군대 복귀하고 다음 휴가 나갈 때까지 미친 듯이 희곡을 썼어요. 그런데 쓰면 쓸수록 이 정도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다음 휴가 때도, 그다음 휴가 때도 찾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 사이 저랑 이름이 같은 김기훈 작가가 그 사람이 심사위원인 공모전에 당선됐고 어느 순간부터 같이 작업을 하고 있더군요. 제가 제대할 때쯤 김기훈은 고윤석 이후 한국적 감수성을 가장 잘 드러낸 차세대 유망 극작가가 되어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이름을 바꿀까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랑 이름이 같은 작가보다 더 좋은 작품을 못 쓸 것 같았거든요. 김기훈 작가의 작품이 공연될 때마다, 희곡이 출간될 때마다 사람들은 저한테 김기훈이 요즘 잘나간다면서 놀렸죠. 저는 그래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니까.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교수 네 얘기는 조금 이따 하고, 그래서 소설이 어쨌다는 거야?
   
  현실 기훈은 교수를 잠시 쳐다본다.
   
현실기훈 소설의 기훈은 극장으로 내려가서 다시 우여진을 마주해요.
   
  소설 기훈이 등장한다.
   
소설기훈 우여진 연출님이시죠?
현실기훈 아까도 물어보셨는데.
소설기훈 본명이 그거 아니시잖아요.
현실기훈 누구시죠?
소설기훈 왜 이름을 바꾸셨어요?
현실기훈 누구시냐고요. (사이) 제가 왜 그 쪽한테 그걸 얘기해야 하죠?
소설기훈 우여진. 우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서요. 뭘 진행 중인 거죠?
현실기훈 혹시 연극하세요? 누구한테 들은 거죠?
소설기훈 그게 중요해요?
현실기훈 저는 할 말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소설기훈 선생님, 저 선생님 공연 많이 봤습니다.
현실기훈 그럼 제 이름을 아시겠네요.
소설기훈 그래서 묻는 거예요. 왜 이름을 바꾸셨죠?
현실기훈 바꾼 거 아니에요. 이건, 그냥 우리예요. 그쪽은 이해 못 하겠지만.
소설기훈 우리라고요? 우여진이라는 이름이 우리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현실기훈 이해 못 할 거라고 했잖아요. (사이)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요? 낯이 익은데. 이름이 뭐죠?
소설기훈 김기훈입니다.
현실기훈 김기훈이라. 그렇구나, 알겠어요, 기억할게요.
소설기훈 선생님 본인 이름으로 하세요. 그거 말해주려고 왔습니다.
현실기훈 내 이름? 그게 뭐가 중요하죠?
소설기훈 속이지 말라고요! 왜 끝까지 사람들을 기만해요!
현실기훈 괜찮아, 나 아는 사람이야. 들어가서 정리하고 있어. (사이) 봤죠? 저 땀에 젖은 사람들. 우리는 오늘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어요. 매일 매일, 정직하게 무대에 서려고 노력하고 있다고요. 기만한다고요? 속인다고요? 진짜 기만하고 속이는 게 뭔지 아세요?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에요. 머릿속에는 온갖 잡생각이 가득한데, 무대에서는 있어 보이려고 기계처럼 대사를 뱉는 사람들이에요. 당신이 뭘 말하는지 알아요. 그래요, 우리는 잘못했죠.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무대에서만큼은 기만하고 속인 적 없어요. 내가 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냐고요? 내 이름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니까요. 나도 내 이름을 찾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우리의 길을 가야 할 때입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정처 없이 끝없는 사막을 걷고 있는 겁니다. 누가 우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죠? 거울 보고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순결한지. 내 이름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진 않는지. 우리는 여전히 진행 중이 무슨 뜻이냐고요? 우리는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공연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다음 공연을 만들겠습니다.
소설기훈 언제까지 용서를 구할 거예요?
현실기훈 그들이 용서해줄 때까지요.
소설기훈 그럼 평생 이름을 찾지 못하겠네요.
현실기훈 상관없어요, 연극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소설기훈 나는 당신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현실기훈 보이는 대로 보면 됩니다. 바라는 대로 바라면 됩니다. 그럼 언젠가 서로를 이해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소설기훈 프로젝트 그룹 고도. 우리는 오늘도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는 누구죠?
현실기훈 고도는 누굴까요?
소설기훈 (희곡을 꺼내서 주며) 이거요, 감옥에 있는 당신들의 고도가 쓴 희곡입니다. 돌려주려고요.
현실기훈 (앞장을 펼치며) 연극만세.
소설기훈 그럼 이만.
현실기훈 저기요, (희곡을 돌려주며) 가져가세요. 이건 우리가 쓴 게 아닌데요. 우리 글이 아닙니다. (사이) 나도 하나 물어봅시다. 당신은 누구죠? 우리가 그 쪽한테 잘못했어요?
   
  현실 기훈은 책을 소설 기훈 가슴팍에 던진다.
   
소설기훈 김기훈 작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현실기훈 (웃으며) 여기 있네요.
   
  소설 기훈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줍는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현실기훈 제주도에 폭설이 내려 사이트 근무자들이 연장 근무 섰던 날이 있었어요. 끝없는 바다 위로 소나기처럼 눈이 내리고 사방으로 거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밖에 있던 후임이 저를 불렀어요. 김기훈 상병님, 밖에 눈 내리는 거 보십시오. 완전 예술이지 않습니까. 꼭 사람들이 춤추는 것 같습니다.
소설기훈 그렇게 보이니? 나는 총 맞고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것 같이 보인다.
현실기훈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초소에 있던 갱지에 글을 썼어요. 잊어버렸어요. 그때 무슨 말을 썼는지.
소설기훈 여전히 있어,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현실기훈 만약에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았으면, 저는 침묵하지 않았을까요?
소설기훈 차갑게 식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봤다.
   
  소설 기훈은 퇴장한다.
   
   
   
  4장.
교수 우여진이 그 사람이었어? 나는 정말 몰랐다. 참 문제적인 인간이네.
현실기훈 교수님, 저는 우여진을 보고 아무런 말도 못했어요. 소설의 기훈처럼 말하지 못했어요.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쳤어요. 역시 저는 글을 쓰면 안 되는 사람인가 봐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실된 말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너무 안전하게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으려고 글을 쓰고 있어요. 작가는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교수 기훈아, 그럼 이건 네 얘기가 아니다. 신경 쓸 필요가 없어.
현실기훈 그렇죠, 이건 우리 얘기죠.
교수 우리라고?
현실기훈 교수님은 왜 아무런 말을 안 하시는 거죠? 연구실 문에 붙어 있는 노란색 리본은 도대체 뭐죠?
교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보고 우여진에 대한 평론이라도 쓰라는 말이야? 나는 그 인간들이랑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
현실기훈 교수님은 미투가 개강 전에 나와서 다행이라고 했죠.
교수 다행이지. 그 양반이 강의하다 미투 터졌어 봐. 기훈아, 지금 너 뉘앙스가 너무 이상하다. 지금 나 취조하니? 아니면 뭐 훈계라도 하고 싶은 거야? (사이) 내가 알고 있었는지가 궁금한 거 같은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 양반이 밖에서 그런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몰랐어. 학교에 있는 사람이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떻게 아니? 내가 알았다면 못 하게 했을 거야. 진짜다.
현실기훈 그럼 우여진에 대한 글을 써주세요.
교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현실기훈 교수님 밑에서 배우는 제자들이 당당할 수 있게 해주세요.
교수 내가 글을 쓰면 그렇게 되니?
현실기훈 적어도 우리가 따르는 교수님은 침묵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교수 생각해보마.
현실기훈 아니요, 이건 생각의 문제가 아니에요. 결심의 문제입니다. 지금 답할 수 없다면 영원히 할 수 없어요.
교수 그렇다면 지금은 답할 수 없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건 내가 판단하는 거야. 네 말을 들을 이유는 없지. (사이) 나는 네 지도교수다. 학교에서는 아버지라고.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논문 준비나 하고 네 앞길이나 신경 쓰라는 거야. 너 최근에 작품 쓴 거 뭐 있어? 그래 네 말대로 작품으로 승부 볼 자신 없으면, 일찌감치 접고 평론으로 전향하든지 그것도 못 하겠으면 학교를 떠나. 나는 네가 대단한 극작가 되길 기대한 적 없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부 다 네 선택인 거야.
현실기훈 진실되게, 천천히, 선명히 보일 때까지. 교수님이 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이죠. (사이) 한 학기만 하고 자퇴했던 친구, 제 글 많이 고쳤어요. 거의 전부를 고쳤다고 할 만큼이요. 그때 저는 화가 났죠. 후배한테 무시 받는 기분이었거든요. 아니 치욕스러웠어요. 연출이랑 배우들이 얼마나 나를 깔볼까. 그래도 저는 참았어요. 화를 내면 진짜 내가 지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 교수님이 각색을 시켰으니 고친 거는 이해한다, 그래 교수님이 시킨 거니 교수님이 시킨 거니. 근데 그거 제 작품 아니에요. 그 친구 아버지 이야기였어요. 그때 우리가 그 친구한테 어떤 말을 해줬어야 했을까요? 저와 이름이 같은 김기훈이 극작가가 됐을 때, 그만뒀어야 했어요. 이제야 선명하게 보여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교수 어떤 사람인데?
   
  현실 기훈, 교수의 연구실 책장에 꽂혀 있는 『고도를 기다리며』1) 를 꺼낸다. 펼쳐서 읽는다.
   
현실기훈 소설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으로 끝나요. 고고는 디디에게 말하죠. 우리는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닐까.
소설기훈 묶여 있다고?
현실기훈 그래, 묶여 있단 말이야. 손발이 다.
소설기훈 도대체 묶긴 누가 묶고, 누구에게 묶여 있다는 거야?
현실기훈 네가 말하는 그 작자에게.
소설기훈 고도에게? 고도에게 묶여 있다고? 무슨 소리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현실기훈 그자 이름이 고도라고?
소설기훈 그럴걸.
   
  현실 기훈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책장에 꽂는다. 책상을 덮고 있는 긴 유리를 살짝 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현실 기훈의 연극제 작품 포스터를 꺼낸다.
   
현실기훈 여기 오기 전에, 금수일보에서 전화 왔었어요. 작가한테 연락이 왔다고요.
교수 그래, 작가가 누군데? 도대체 이름이 뭐야?
현실기훈 저를 알고 있대요. 곧 찾아가겠대요.
교수 나한테도 꼭 알려줘.
현실기훈 수상을 거부하겠다고 했다네요.
교수 그럼...
현실기훈 이 소설도 사라지겠죠.
교수 그렇군.
현실기훈 저도 상을 반납해야 할까요?
교수 일광시에서 받은 상? 기훈아, 너 자꾸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현실기훈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교수 사람들은 이제 미투에 관심 없어. 철 지난 일이다. 연극하는 사람들도 이제 그 얘기 꺼내면 언제 적 미투냐고 하는 판에, 네가 무슨 책임감을 느껴서 이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네가 일광시에서 받은 상 때문에 그 극단이랑 뭔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어, 그렇지만 그건 다 피해의식이야. 네가 느끼는 부조리한 감정을 없애는 방법이 뭔지 알려줄게. 상을 받아. 그리고 더 유명해져. 유명해지고 나서 이런 죄책감을 느끼면 내가 할 말은 없는데, 지금 네가 나한테 이러는 거 그냥 작품도 못 쓰겠고 작가로서 유명해질 자신이 없으니 하는 변명이고 회피야.
   
  현실 기훈, 가방에서 자퇴서를 꺼낸다.
   
현실기훈 사인해 주세요.
교수 너 진짜 이럴 거야? 석사 졸업 앞두고 자퇴하겠다고? 제정신이야? 이건 나를 완전히 능멸하는 거야. 무시하는 거라고!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너 지금 그만두면 평생 글 못 쓴다.
현실기훈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2)
   
  현실 기훈, 포스터를 갈기갈기 찢는다. 현실기훈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연극적이라 미친 듯이 웃는다.
   
현실기훈 교수님, 고도는 오지 않아요. 신은 죽었어요.
   
   
   
  5장.
  현실 기훈, 소설 기훈에게 다가간다.
   
현실기훈 넌 누구지?
소설기훈 그게 중요해?
현실기훈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기훈 진실되게, 선명히 보일 때까지, 천천히, 다시.
현실기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소설기훈 이름을 바꿀 거니?
현실기훈 나는 내 글을 쓸 수 있을까? 정말 내 글 말이야.
소설기훈 이름을 바꾼다면.
현실기훈 그렇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사이) 그런데 그게 나일까?
소설기훈 기훈아, 다시 시작하자.
현실기훈 난 너처럼 쓸 수 없어.
소설기훈 나는 곧 사라져.
현실기훈 나도 사라지겠지.
소설기훈 기훈아, 절대 사라지지 않아 기억은.
현실기훈 그래, 여전히 진행 중이지.
   
  현실 기훈은 무대 중앙의 긴 책상 유리를 통로 쪽으로 뺀다. 그 위에 소설의 마지막 장을 올린다. 그리고 그 위에 반대쪽 긴 책상 유리를 빼서 덮는다. 현실 기훈, 객석으로 들어간다. 암전.
   
  막.


1)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민음사.
2)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공진호,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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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녀와 윤심덕과 그리고 나 신은수 등장인물 김우진. 이영녀. 오일삼. 윤심덕. 1925년, 늦은 저녁. 상성합명회사의 작은 사무실 안. 한쪽 벽면엔 업무 서류들이 쌓인 책장. 전화기가 놓인 책상에는 쓰고 있던 원고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사무실 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다.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김우진. 옆에 놓인 물컵과 약봉지. 김우진 하루하루 정말 미칠 지경이야··· 돈과 직위?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가꿔 이룬 것들이라면 애착이라도 있겠지만, 모두가 아버지 것들인데··· 난 그저 장남으로 태어난 책임으로 꼭두각시처럼 있는 거라고. 아무리 좋은 먹이를 매일 갖다 줘도··· 새장 속의 새가 행복하겠나. 지금 내 신세가 꼭 그래, 누구보다 자유로워야 할 예술가가 말이야. 이러다간 날개가 퇴화돼··· 어느 때부턴 나는 법조차 잃어버릴까 두렵다고. 약봉지를 힘겹게 뜯으며. 김우진 그래서 오늘도 쓰고 있다네. 이런 밤늦은 시간에 부친께서 앉힌 사장 역할이 끝나면, 나는 법을 잊지 않으려 말일세. 지금 쓰고 있는 것 말인가? 조선판 입센의 인형의 집, 노라인데··· 잘 풀리지가 않아. 막바지 3막으로 가고 있지만, 과연 지금의 조선 현실서 착취 속에 사는 궁핍한 여성이 자아를 찾아간단 것이 가능한 얘기인지··· 써 본들 사람들이 보고도 공감 못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뭐라 했나, 윤심덕? 당황해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김우진 이보게,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다고. 안 만날 걸세, 지금 윤심덕이가 어디 살고 있던 내 알 필요 없잖은가?! 그래, 그 추잡한 소문들을 여기서도 전부 다 듣고 있다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 밖을 향해서. 김우진 밖에 누군가. (수화기에) 잠시만··· 급하게 원고들을 구석에 숨겨 놓으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오는 오일삼. 오일삼 접니다, 사장님. 김우진, 안도하는 표정. 오일삼 아! 전화 중이신데··· 불쑥, 실례했습니다. 김우진 (수화기에) 회사 직원이야, 신경 안 써도 돼. 나도 잘 모르겠네··· 언제 완성될지는. 얘기했잖은가, 마지막 부분에 글이 막혔다고. 다 쓰면 우선은 자네가 있는 토월회 쪽으로 보낼 테니, 한번 읽어 보라고. 오일삼 하하하. 편하게 계속하십시오. 김우진 이영녀일세. 주인공 이름 그대로가

  • 신은수
  • 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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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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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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