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아연정(雅演亭)

  • 작성일 2024-07-24

아연정(雅演亭)

박남준


조선 선조의 치세 그리고 현대


등장인물

아연정 (대한민국 유형문화재)

이승호 (여행작가)

김학손 (조정의 고위관료)

유회 (조정의 고위관료)

보수반장 (문화재보수반장)

노비 (김학손의 노비)

인부1, 2 (문화재보수반 보수공)

경찰1, 2 (문화재 훼손을 조사하는 경찰)

가면 쓴 대신들 (조정의 관료들)


무대

무대 한편에 아연정과 그 옆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다른 한편은 나무 군락이 모여 있다.



1장


도시와 멀리 떨어진 곳, 건너편 독산이 보이는 아연정. 가방을 멘 이승호, 등장. 산책하듯 주변을 둘러보다 아연정에 도착한다.


이승호 (공기 내음을 들이마시며) 공기 좋다! 모든 게 예술이네. 이런 데서 글 쓰면 잘 쓸 것 같은데.


이승호,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건너편 독산과 아연정을 찍는다. 아연정, 등장. 사진을 찍는 이승호를 째려보며 경계한다. 이승호는 갑작스레 등장한 아연정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승호 (긴장한 말투로) 누구세요?
아연정 (계속 째려보며 예의주시한다.)
이승호 전 그냥 방문객이에요.
아연정 (여전히 예의주시한다.)
이승호 (해명하며) 사진만 찍으려고 했어요. 경치가 아름다워서. 근데 거기 계시면 안 되지 않을까요? 문화재에 함부로 올라가면···
아연정 순진한 표정이네.
이승호 (살짝 겁먹은 듯)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아연정, 정자에서 내려와 이승호를 빤히 쳐다본다.


아연정 맞네.
이승호 전 여행 작가예요. 아연정을 책에 담고 싶어서 왔어요. 혹시 김학손 선생 후손이셔서 거주하고 계신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마루에 자연스레 오르시길래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연정 순하게 생긴 놈이 행동은 완전 딴판이네. 어젠 일부러 무시한 거냐?
이승호 (당황한 듯) 예?
아연정 (무시하며 날카롭게) 여기 왜 왔어?
이승호 아까 말씀드렸는···
아연정 (말을 자르며) 진짜 이유를 대 보란 말이야! 순진한 표정 지으면 내가 모를 것 같아? 어제 여기 왔었잖아!
이승호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아연정 밤마다 찾아와서 때리고 부수고 흔들고. (기단을 가리키며) 어젠 기단 부분을 망치로 부쉈잖아. 체형만 봐도 알아. 내 눈은 못 속여. 불안정한 상태로 서 있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네 몸으로 따지면 걸을 때마다 균형이 상실한 거랑 똑같은 거라고. (승호의 정강이를 발로 찬다.)
이승호 (정강이를 부여잡고) 악!
아연정 아프지? 내가 어제 그런 심정이었다, 이놈아!


아연정이 승호를 마구 때리자 승호는 아연정과 실랑이를 벌인다.


이승호 (아연정을 떼어 내며) 에이, 진짜! 책 쓰러 왔다니까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잠깐 구경한 것뿐이에요. 할아버지야말로 대체 누구세요? 누구신데 자기 소유처럼 행동하고 괜히 생사람 잡냐고요.
아연정 (당당하게) 나? 아연정.


사이.


이승호 아연정이요?
아연정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마. 이래 봬도 여기서 수백 년 살면서 오랜 세월 목도했어. 너 같은 애송이들, 한두 번 본 줄 알아?
이승호 (어이없다는 듯) 그럼 성이 아고, 이름이 연정이세요?
아연정 이름이 아연이고 성이 정이지! (현판을 가리키며) 한자 못 읽어?
이승호 (아연정을 위아래 훑어보더니 깊은 한숨) 어디 사세요?
아연정 어디 살긴 어디 살아. 내가 아연정이라니까.
이승호 (어르며) 당연히 알죠. 말씀하시는 거 다 알아요. 그래도 가족분들 계신 곳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분들이 걱정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연고가 없으세요?
아연정 (답답한 듯) 말귀 못 알아들어? 나 아연정이라고. 여기가 내 집이고 안방이라고!
이승호 (최대한 수긍하는 척) 예예, 알겠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전화를 한다.) 거기 경찰이죠? 여기 무연고자가 계셔서요. 할아버지요.
아연정 (기가 찬 듯) 뻔뻔한 놈. 어제는 철두철미하더니 오늘은 어리바리한 가면을 쓰고 왔네. 근데 자기편을 부르는 건가? 비겁한 놈.


아연정은 괘씸한 듯 손뼉을 치자 무대가 어두워진다. 1575년, 조선. 김학손과 유회가 담소를 나무며 등장하고 그 뒤에 노비가 뒤따라온다. 아연정, 코웃음을 치고 퇴장. 이승호는 등장하는 김학손, 유회, 노비를 보고 당황한다. 무대가 다시 밝아진다.


김학손 (건너편 독산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내려오니 좋구만. 변한 게 없어.
유회 여기가 바뀐 게 있겠나. 우리가 바뀐 거지. 이봐, 재준(齋濬, 김학손의 호). 기억나나? 어릴 때 저기서 물놀이하고 놀았잖아. 여름만 되면 시원한 물가에 푹 빠졌었는데.
김학손 그리고 어머니한테 혼나기 일쑤였지. 그땐 공부보다 노는 게 즐거웠으니까. 우리가 넘긴 책장보다 물줄기가 더 많았을 거야.
유회 난 그 물줄기만큼 맞았어.
이승호 재준? 재준 김학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뭔가 떠오른 듯)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연정 할아버지!


이승호, 퇴장.


김학손 역시 고향이 제일 편하고 좋아. (노비에게) 걸레를 가져와라.
노비 예.


노비, 주머니에서 걸레를 꺼내 김학손에게 공손히 건네준다. 김학손, 아연정에 올라가 현판을 닦는다.


유회 이걸로 만족하나?
김학손 (현판을 닦으며) 가장 원하는 일일세. 시끌벅적한 조정보다 제자를 가르치는 게 더 잘 맞는 것 같아.
유회 자네가 정 원하면 그래야지. 하지만, 언젠가 다시 올라오게. 한양에 나 혼자 둘 셈인가?
김학손 (여전히 현판을 닦으며) 인맥도 많은 사람이 혼자는.
유회 마음 나눌 친구는 자네밖에 없어서 그래. 다들 여우 같은 구석이 있어서 속내는 털어놓을 수도 없네. 특히 사헌부1)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게 입이야. 시답지 않은 이야기도 화근이 되니까 늘 함구해야 하네. 자네 앞에서 말이 많은 걸 이제 알겠나?


김학손, 아연정에서 내려온다. 노비에게 걸레를 건네주고 노비는 공손히 받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유회 (한숨을 쉬며) 이제 누구랑 노나.
김학손 장례원2) 사람들은 자네 좋아하던데.
유회 됐어. 작년에 술 먹었을 때 이미 질렸네. 다들 술고래가 따로 없었다니까. 다음날 아침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쫓겨날 뻔했어. 그때 이후로 잘 안 가.
김학손 (의아해하며) 난 자네가 자주 오길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유회 내가?


사이.


유회 아무튼 마음 정리되면 올라와. 솔직히 여긴 구석진 느낌이 좀 있어. 자네는 그렇다 쳐도 가족들은 다르겠지. 한양에서 잘 살다가 갑자기 내려와 봐. 놓고 온 게 얼마나 많겠어.
김학손 좋게 설득했어.
유회 자네 고집에 못 이긴 거겠지. (노비에게) 안 그러냐?
노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회 (구슬리듯) 솔직하게 말해 봐. 너도 여기보다 한양이 낫지?
노비 (임기응변으로) 나리께서 가시는 곳이 제가 가고 싶은 곳입니다.
유회 꽤 돌려서 말하는구나.
김학손 돌려서 말하긴. 당연한 말을 했구만.
유회 주변 반응이 딱 이놈 반응이네. 옛날 별좌 어른도 봐. 자네 없으면 일은 누가 하냐고 물으시잖아. 군기시하면 자네 아니냐고 말이야.
김학손 그분이 과장하신 거야. 무기 관리 체계를 나만 바꿨나? 다 같이 고생한 거지.
노비 (치켜세우며) 아닙니다, 나리. 항상 밤새시며 고민하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분들께서 물음을 찾고자 오신 걸 한두 번 본 게 아닙니다. 저도 눈치는 있습니다.
유회 (웃으며) 이제야 좀 진실되네!
김학손 (노비에게 은근히 눈치 주며) 쓸데없는 얘길···
노비 (눈치를 채고 고개를 푹 숙인다.)
유회 그저 친구로서 아쉬워서 그랬네. 능력 썩히는 게 아쉬워서. 그만 가지. 해가 곧 떨어지겠어.


유회, 퇴장.


김학손 동진(東津, 유회의 호), 거긴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자네도 알잖아.
노비 (눈치를 보며) 나리, 가시지요.
김학손 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늘 옆에 있으면서 그렇게 모르냐?


김학손이 나가자 노비도 뒤따라간다. 모두 퇴장. 이승호, 허둥지둥하며 등장.


이승호 (울먹이며)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원래대로 보내 주세요. 여긴 말도 안 통하고 절 보지도 못해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구요. 원래 세계로 되돌려 주세요!


무대 어두워지더니 다시 밝아진다. 아연정, 등장.


이승호 (반갑게 웃으며) 할아버지!
아연정 (가소로운 듯 웃으며) 정신이 번쩍 들지? 이것보다 더한 것도 보여 줄 수 있어. 산속 호랑이도 험한 날씨도 다 봤으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여기 얼씬도 하지 마, 알았어?
이승호 정말 아연정이에요? 아무리 봐도 이상한 할아버진데.
아연정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말랬지! 이건 내가 빚은 환상이야. 어디서 자꾸 말대꾸야?
이승호 (억울한 듯) 아무리 통찰력 있는 사람도 이런 상황을 믿기 힘들 거예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문화재랑 대화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리고 전 정말 아니에요. (가방에서 여행책을 건네준다.)
아연정 (책 표지를 보며) 문화예술기행?
이승호 개정판을 새로 내는데 이번에 아연정을 담고 싶어서 온 거라구요.
아연정 (책에 담긴 사진과 이승호를 번갈아 보며 비교한다.) 왜 말 안 했어.
이승호 (말대꾸하며) 말했거든요.
아연정 (나무라며) 처음부터 말을 똑 부러지게 해야지. 젊은 놈이 줏대가 없어. 그리고 체구가 비슷해 보였어. 걷는 것도 그렇고.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응? (책을 돌려준다.)
이승호 근데 훼손이 얼마나 심한 거예요?
아연정 (기단 쪽으로 이동해) 여기 봐. 거의 열 군데나 금이 갔어. 그젠 저 소나무까지 베려고 했어.
이승호 (기단을 보고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새로 보수를 해야겠네요. 뭐랄까? 허름한 집 같달까?
아연정 (살짝 불쾌한 듯) 허름하진 않아.
이승호 (진정시키며) 비유적인 표현이에요. 그만큼 오래됐다구요. 근데 아연정은 무슨 뜻이에요?
아연정 맑을 아, 펼 연, 정자 정. 맑은 소리가 펼쳐지는 정자야.
이승호 (생각에 잠기며) 맑은 소리··· 무슨 뜻이죠?
아연정 그러니까··· (뭔가 떠오른 듯 웃으며) 궁금해?
이승호 당연히 궁금하죠.
아연정 나한테 좋은 게 있는데. 어제처럼 해코지당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손쓸 방도가 없어. 걘 너처럼 날 못 보니까 쫓아낼 수가 없거든. 만약 날 도와주면 책 쓰는 거 도와줄게.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보다 그 이면이 궁금하지 않아? 예를 들면 김학손 대감은 왜 아연정으로 지었을까.
이승호 (잠시 고민한다.)
아연정 (일부러 자극하며) 거절하면 넌 작가도 아냐. 작가가 탐구 정신이 없어서야 글 한 자루 쓰겠어? 그저 똑같은 책만 생산하지.
이승호 (의심스런 눈초리로 아연정을 본다.)
아연정 왜?
이승호 사기치는 거 아니죠?
아연정 (발끈하며) 야, 너 문화재가 사기 치는 거 봤어? 봤으면 얘기해 봐.
이승호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해요. 이야기를 함부로 실을 수는 없어요. 글은 눈앞에 남는 거예요. 그걸 입증해 줄 다른 문건이나 현장이 남아 있어야 한다구요. 근데 그런 것도 없이 어떻게 믿어요.
아연정 나만큼 확실한 게 어딨어. 내가 말하는 게 곧 역사고 증거야.
이승호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죠.
아연정 (약간 짜증나는 듯) 그렇게 깐깐하게 나와야 해? 너보다 오래 살았고 이 땅을 가꾸는데 밑거름이 됐어. 모진 세월 겪으면서 이곳을 지켰다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좀 도와줘.
이승호 봉사는 강요가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전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요. 만약 제가 다치면 책임질 거예요? 그리고 이야기만 달랑 듣는 건 무익이에요. 그걸 누가 믿겠어요? 역사를 함부로 대하는 놈, 그런 취급이나 받겠죠.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아연정 경찰보다 네가 훨씬 나으니까 그러지. 할 일이 태산 같은 양반들이 여길 어떻게 지켜. 참사만 예견된 거지. 내 지시대로 움직이면 다칠 일 없을 거야.
이승호 (시큰둥하며) 사진이나 찍고 갈래요.


이승호가 카메라를 들고 아연정을 찍으려 하자 아연정은 카메라를 뺏는다.


이승호 무슨 짓이에요!
아연정 (퉁명스럽게) 나도 초상권이 있거든. 허락 없이 촬영 금지야.
이승호 치사하게.
아연정 사진을 지우든가 아님 나랑 협력하던가.
이승호 이런 식이면 절대 도와줄 수 없어요. 아연정도 책에 안 실을 거야!


아연정이 손뼉을 치자 무대가 어두워진다. 이승호 주변에 벼락이 내리친다. 이승호는 벼락을 피한다.


이승호 할아버지!
아연정 죽진 않아. 조금 따끔하지. 내가 이 정도로 절박하다는 거야.
이승호 (원망한다는 어조로) 할아버지! 아, 따거!


이승호는 벼락을 피하기 바쁘다. 아연정은 이승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다. 이승호는 아연정 마루 위로 올라가 자신을 쫓아오는 벼락을 아연정 쪽으로 유도한다.


아연정 앗, 따거!
이승호 한 번 똑같이 당해 봐요.
아연정 앗, 따거!


이승호는 아연정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다. 결국, 아연정이 다시 손뼉을 치자 벼락이 멈춘다. 무대가 밝아진다.


아연정 (째려보며) 치사하게.
이승호 (지지 않으려고) 누가 먼저 했는데요.


사이.


아연정 (나지막이) 도와줘.
이승호 (잠시 고민하다) 대신 책 쓰는 거 확실히 도와줘요.
아연정 믿을 수 있어?
이승호 문화재는 사기 친 적 없다면서요.
아연정 (미소를 띄우며) 이름이 뭐냐?
이승호 이승호요.
아연정 (생각에 잠기며) 승호··· 호걸의 기운을 계승한 사람이네.
이승호 이젠 놀랍지도 않네.


암전.



2장


텅 빈 아연정. 멀리서 엔진 소리가 난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아연정이 뛰쳐나온다.


아연정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며) 왜 갑자기 밭을 갈아? 괜히 뛰쳐나왔네.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 저건 이름도 이상한 게 소리도 이상해. 트랙터? 대체 뭔 뜻이야?


아연정이 다시 들어가려 하자 이승호와 보수반장이 등장한다. 아연정, 보수반장을 자세히 관찰한다.


보수반장 (아연정을 눈대중으로 보며) 한눈에 봐도 문제가 있네.
이승호 네. 특히 기단이요.


보수반장, 아연정 곳곳을 살펴보며 확인한다.


아연정 보수반이구나?
이승호 반장님이세요.
아연정 (보수반장을 유심히 지켜본다.)
이승호 의심하시는 거예요?
아연정 (당연하다는 듯이) 없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어떤지 알아야지.
이승호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업계에 오래 종사하셨고 문화재청 직원들도 인정한 분이세요. 삐뚤거나 고약하진 않으세요.
아연정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승호 오면서 대화를 나눠 봤죠. 확실히 깊이가 묻어 나오더라고요. 뭔가 책임감도 있으신 거 같으시고.
아연정 (어린아이 보듯) 아직 순수하네. (보수반장을 돌아보며) 저 눈은 밑바닥에 뭔가 깔린 눈빛이야. 확언은 못 하지만 돌다리는 두드려 봐야지. 이게 다 신뢰를 위한 길이야.
이승호 (말도 안 된다는 듯) 의심이 어떻게 신뢰가 될 수 있어요?
아연정 의심만 가지고 있으면 절대 누구도 믿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 의심을 확인하면 비로소 상대가 보이는 거야. 그럼 그때부터 시작이야. 내 편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어. 의심은 믿음을 깨트리는 게 아니라 정확한 안목을 길러 주는 거야.
이승호 염세적이에요.
아연정 현실적인 거야.
보수반장 (이승호를 보며)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이승호, 보수반장 쪽으로 간다. 아연정, 조금 떨어져서 듣는다.


보수반장 생각보다 일이 커지겠네요. 큰 공사가 필요합니다. (지붕 하단을 가리키며) 저기 나무, 보이시죠? 심하지 않지만 썩어 가고 있어요. 기단 균열만 아니라 벽은 층 분리, 뒤쪽 기와는 박락. 현판도 느슨해서 떨어지겠네. 발견부터 이랬나요?
이승호 네.
보수반장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공사까진 시간이 걸립니다. 심의도 거쳐야 하고 자재 구매도 해야 하거든요. 거기다 담당하는 다른 공사도 많아서요. 일단 조치는 취했으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신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승호와 보수반장은 서로 목례로 인사한다. 보수반장 퇴장.


아연정 (갸웃거리며) 아닌가?
이승호 제가 뭐랬어요.
아연정 아직 속단하지 마.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야. 근데 도대체 무슨 조치를 취했다는 거야? 현판 고정한 거밖에 없구만. (체념한 듯) 일하는 태도를 보니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겠다. 시대가 변해도 똑같아. 다 본인만 생각하지.
이승호 건강검진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몸이 건강하면 그만이죠.
아연정 (지적하며) 저런 이기적인 마음이 자신을 고립시키는 거야. 세상은 꼭 고무줄 같거든. 그에 비해 넌 솔직해서 좋다. (얼굴 옆면을 부여잡으며 통증을 느낀다.)
이승호 왜 그러세요?
아연정 나무가 약하다고 생각했지 썩고 있는 줄 몰랐어. 그동안 방치했는데 이젠 아프네.
이승호 (의아한 듯) 고개만 올리면 볼 수 있는데 모를 수 있어요?
아연정 넌 윗니가 썩은 걸 볼 수 있냐?
이승호 (이해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연정 (아련한 눈빛으로 정자를 보며) 빨리 예전처럼 돌아갔으면 좋겠다. 반듯하고 단아하던 모습으로. 이런 모습 보이면 대감께서 속상해하실 거야.
이승호 김학손 선생과 무슨 관계였어요?
아연정 부모일 수도 있고 스승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지. 하나로 정하지 않았어.
이승호 그런 모호한 관계가 어딨어요. 인간관계는 딱 하나지.
아연정 (가르치려고 하며)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그럼 퇴계 선생과 율곡 선생은 서로 사제이자 선후배였어. 그건 어떻게 설명할래?
이승호 (대답하지 못한다.)
아연정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아연정과 이승호는 근처 나무 군락으로 이동한다.


이승호 (감탄하며) 분위기가 완전 다르네요. (건너편 독산을 보며) 독산도 친구가 있었네.
아연정 (나무를 살펴보며) 경치에 눈 돌리지 말고 쓸 만한 나무 좀 찾아 봐.
이승호 무슨 나무요?
아연정 (답답한 듯) 하단을 만들 나무. 척하면 척해야지 일일이 얘기해야겠어?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 중에 괜찮은 게 있으면 눈으로 표시해 놔. 두껍고 표피에 이상이 없는 걸로. (다시 나무를 살펴본다.)
이승호 (눈치를 보며) 보수반에 맡기는 건 어때요? 그래도 전문간데.
아연정 (나무를 만져 보며) 어른이 말하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이게 해결돼야 너도 책을 쓰지.
이승호 (혼잣말로) 그냥 부려먹는 거 같은데.
아연정 뭐?
이승호 (발뺌하며) 행복해요.


아연정과 이승호는 나무를 하나씩 확인한다.


아연정 (나무를 어루만지며) 이놈, 괜찮네.
이승호 근데 이건 무슨 나무에요?
아연정 팥배나무.
이승호 보통 소나무를 더 사용하지 않아요? 재질도 좋고 우수하잖아요.
아연정 그럼 정체성이 없잖아. 우리가 색깔이 있듯이 나무도 색깔이 있어.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양식이 정해진 거라고. 그걸 통일하면 전통을 위배하는 거야. 그리고 느낌이 비슷하면 매력이 있겠어? 사람으로 치면 전부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니는 거야.
이승호 매력? 그럼 기단을 현무암으로 만들면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아연정 (때리려는 시늉을 하며) 에라이, 미친놈. 전통을 지키는 게 매력이라 그랬지 누가 함부로 재료를 바꾸라고 했어!
이승호 제 말은 재료가 어떻든 문화재를 오래 보존해야 비용도 아끼고 건강함을 간직한다는 거예요. 전통을 유지하되 현대적인 시각으로 다가가면 훨씬 나아지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화학작용을 받지 않는 기단이 아연정 발밑에 있으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사자성어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온고지신.
아연정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시킨 거나 잘해.
이승호 (혼잣말로) 도와줘도 난리야.
아연정 혼잣말 하지 마. 다 들려.
이승호 (기계적으로) 네.


이승호, 나무를 확인하다 뭔가 궁금한 듯 아연정을 돌아보지만, 함구한다. 이승호의 표정을 본 아연정은 손뼉을 친다. 무대가 어두워진다.


이승호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왜요?
아연정 네 얼굴에 적혀 있어. 뭐가 궁금한지 말이야.


암전. 무대가 다시 밝아지고 1583년, 조선. 김학손과 유회가 아연정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신다.


김학손 안 본 사이에 얼굴색이 많이 변했네.
유회 워낙 바쁘니까.
김학손 쉬러 온 건 알겠는데 그래도 한양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직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유회 귀만 아프고 목만 아프네. 제자들 가르치는 건 좀 어때?
김학손 학구열이 성균관 못지않아. 토론을 펼치면 그 열정과 기세에 내가 따라갈 수가 없어. 뜀박질에서 지친 노인이 된 것 같아.
유회 (포기한 듯) 젊은 혈기를 우리가 따라갈 수 있나.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따라오게 만드는 거지. 우리까지 뛸 필요 없어.
김학손 (놀리듯) 참판 자리가 힘들긴 힘들었나 봐? 앞으로 판서는 어떻게 하려고?
유회 (귀찮은 듯) 몰라.


김학손과 유회, 차를 마신다.


유회 이야기 들었지? 회령 지방에 여진족 니탕개 말이야.
김학손 작은 성들을 점령했다고 들었네. 기세가 대단했다고. 우여곡절 끝에 막아서 다행이야.
유회 그동안 통제력이 엉망이었어. 그래도 신립 같은 용장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네. 기마 전술이 좋더군. 하지만 언제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
김학손 군사 체계를 확고히 다지면 돼. 병판께서 고생하시겠지.
유회 (사이) 남쪽 바다도 심상치 않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소란스러울 거야.
김학손 승자총통3) 같은 무기를 더 개발해 봐. 옛날에 여진족과 갈등하면서 화약 무기를 꽤 연구했을 거야. 그때 연구를 살펴보면 좀 도움이 되지 않겠나?
유회 재준, 내 말뜻 알잖아.


사이.


김학손 난 파벌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유회 피한다고 피할 수 있나? 때론 마주 보고 싸울 때도 필요해.
김학손 (날카롭게) 그래서 사역원4) 학생들까지 편 가르라고?
유회 (침묵)
김학손 이 시국에 올라가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나라의 재난보다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는 사람, 은근히 공명심을 운운하는 사람, 그런 눈으로 보겠지.
유회 (침묵)
김학손 그리고 이이 대감께서 충분히 잘하고 계시네.
유회 잘하긴 뭘 잘해! 조정의 합의도 없이 관료의 녹봉을 깎는 게5) 말이 되나? 군량이 부족하면 조정에 보고를 해야지.
김학손 상황이 긴박한데 어쩌겠어. 그럼 군사들과 백성들을 모두 죽여?
유회 잘못된 선례가 화를 부르는 거야. 나중에 누구나 이이를 꼬집겠지! 이봐, 재준. 내가 총대 메겠네. 같이 가세.
김학손 (차를 마신다.)
유회 재준!
김학손 (완곡하게) 총대는 자네나 열심히 메.
유회 우린 자네가 필요해.
김학손 (버럭 소리치며) 편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 거겠지! 이해관계만 따지는데 일은 어떻게 하라고! 군기시든 사역원이든 장례원이든 똑같아. 그딴 데 다신 안 가!
유회 조선이 위기에 직면했어!
김학손 그 위기를 누가 만들었어?


유회, 답답한 듯 차를 술처럼 마신다. 김학손, 아연정에 들어가 시조와 꽃 한 송이를 가지고 나와 자리에 앉는다.


김학손 (시조와 꽃을 건네주며) 선물이야. 호조판서가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하네.
유회 (꽃을 보며) 한결같은 건지 바보 같은 건지.
김학손 우리 아버지가 첨지사(僉知事)6)이신 거 알지?
유회 무관으로 자질이 높으신 분이었지. 그건 왜?
김학손 어렸을 때 팥배나무 꽃을 좋아해서 장난을 치곤 했어. 그러다 빨간 열매가 되면 손에 묻히고 말이야. 근데 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거야. 팥배나무 열매가 생각보다 쓰임이 많다고. 꽃일 때는 즐거움을 주더니 열매일 때는 약재와 먹이로 쓰인다고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장난을 멈췄어. 하지만 지금까지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말은 따로 있어. (유회를 바라보며) 너도 이 열매처럼 자라 도움을 주어라. 팥배나무 같은 사람이 되어라!
유회 (살짝 기분 나쁜 듯) 충고하는 건가?
김학손 아버지의 말을 전달했을 뿐이네. 우리 아버지는 틀린 말은 안 하시니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자 아연정을 팥배나무로 지었어. 여길 보며 다짐을 잊지 않으려고.
유회 (혀를 내두르며) 젊었을 때 유독 팥배나무만 좋아했던 걸 이제야 알겠군.


유회, 김학손이 준 시조를 눈으로 읽는다. 김학손은 차를 마신다.


유회 선물 고맙네.


유회, 시조와 꽃을 들고 나가려 한다.


김학손 저녁에 놀러 와. 한잔 하게.
유회 나 안주에 까다로운 거 알지?
김학손 알겠으니까 오기나 해.


유회, 손 인사를 하며 퇴장. 김학손, 아연정으로 들어간다. 무대가 어두워지고 아연정과 이승호, 등장. 무대가 밝아진다.


이승호 두 분 다 확고하시네요.
아연정 호락호락하게 봤다가 큰코다친 인물들이 몇 있지. 특히 우리 대감께선 가고자 하는 방향이 명확하셔서 제자들에게 엄했어.
이승호 시조는 어땠어요?
아연정 (시조를 읊는다.) 구름에 가린 달이 어찌 비출 수 있으며, 녹조가 있는 못이 어찌 투명할 수 있는가. 사물이 보아야 세상이 보이고 세상을 보아야 사람이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나.
이승호 어떤 분인지 짐작이 가네요.
아연정 이제 알겠지? 왜 팥배나무인지.
이승호 저보다 보수반이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아연정 (당당하게) 네가 설득해야지.
이승호 (당황하며) 예?
아연정 무조건 설득해야 돼. 이건 우리 대감의 의지가 담긴 거라고. 정 안 되면 떼라도 써.
이승호 (황당한 듯) 무슨 애도 아니고···
아연정 직업이 작가라며. 책도 출판했으면 뭔가 영향력이 있을 거 아냐. 그걸로 해결해 봐.
이승호 (난감해하며) 저 별로 안 유명해요.
아연정 (막무가내로) 몰라! 팥배나무가 안 되면 책 쓰는 일도 없는 거야.
이승호 (구시렁대며) 고집불통 노인네.
아연정 뭐, 임마!


아연정이 이승호를 잡으려 하자 이승호는 피한다. 어느덧 지친 아연정이 잠시 숨을 고르는데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아파한다. 이승호는 옷 겉에 기어다니는 벌레를 보고 놀란다.


이승호 (옷을 털며) 웬 벌레가···
아연정 (가슴을 부여잡고) 빨리 이리 안 와?
이승호 가면 또 때릴 거면서! 아!


이승호, 벌레에게 물린 것을 발견하고 몸을 마구 턴다. 아연정은 기어다니는 벌레를 집는다.


이승호 (몸을 이리저리 확인하며) 여긴 원래 벌레가 많아요? 하얗게 생긴 놈들이 무지하게 많네.
아연정 (벌레를 보며 벌벌 떤다.)


암전.



3장


1583년, 조선. 김학손은 아연정 마루에 앉아 유회의 편지를 조용히 읽는다.


김학손 (편지를 접으며) 우스갯소리를 엄청 적었구만. 근데 자네 의도도 훤히 보이네. 사실 나도 알고 있어. 사간원7)이 정철의 여론 주도8)를 보고했다는 거. (헛웃음) 웃기지도 않네. 보지도 않은 걸 어떻게 알아. 단지 의혹만으로 상대를 비방하면 우리 모두 똑같은 셈이야. 동진, 내가 사간원 관료들처럼 움직일 거라고 생각해?


가면 쓴 대신들, 등장. 괴상한 소리를 내며 서로를 손가락질하고 속닥거린다.


김학손 (노려보며) 쓰레기 같은 인간들··· 저리 꺼져!


가면 쓴 대신들은 김학손을 보며 손가락질하고 속닥거린다.


김학손 (벌떡 일어나) 내가 당신들한테 뭘 잘못했는데. 난 정당한 임무를 수행했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조용히 있었어. 나한텐 모두 소중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어!


가면 쓴 대신들의 괴상한 소리가 커진다.


김학손 그래. 나도 속으로 몇 번 했었지. 잘못된 점을 꼬집으며 때론 거리를 둔 적도 있어.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당파 싸움에 애꿎은 피해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괴상한 소리가 더욱 커진다.


김학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난 갈등이 싫어. 당신들이 싫어!


가면 쓴 대신들의 소리가 점점 커지며 김학손을 더욱 비난하자 김학손은 아연정에 들어가 칼을 꺼내 온다. 김학손이 칼을 뽑아 겨누자 가면 쓴 대신들은 고함을 치기 시작한다.


김학손 세상은 성찰하는 인간이 바꾸는 거야. 당신들은 절대 세상을 바꾸지 못해.


김학손이 그들에게 다가가 칼을 휘두르려 하자 가면 쓴 대신들은 도망치며 퇴장한다. 김학손, 그들을 쫓아가지 못하고 칼만 부여잡는다.


김학손 (자조적으로) 용기도 없는 대장부 같으니··· 나 같은 놈은···


정자 뒤에서 아연정 등장. 아연정은 떨어진 칼집을 주워 김학손에게 건넨다. 김학손은 칼을 집어넣는다.


김학손 날 공감하는 건 너밖에 없구나. 날 이해하는 건 너밖에 없어. 고맙다.


김학손, 터덜터덜 나가며 퇴장. 무대가 어두워지며 다시 밝아진다.


아연정 (김학손이 퇴장한 쪽을 보며) 대감···


아연정,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빗자루를 가져와 벌레를 쓸어 낸다. 아픔을 참으며 꿋꿋이 빗질한다.


아연정 (고통을 참으며) 흰개미 놈들··· 내가 죽을 성 싶으냐? 나 아연정이야. 아연정이라고. 다 없어져!


이승호, 빗자루를 들고 등장.


이승호 (아연정을 제지하며) 제가 할게요.


둘은 아연정과 그 주변을 마구 쓸며 흰개미를 없앤다. 아연정은 고통이 가신 듯 빗자루를 내려놓는다.


이승호 (소나무를 만진다.) 왜 아연정만 이러지? 흰개미가 어디서 왔을까요. 원래 서식지도 아니라면서요.
아연정 나도 몰라.
이승호 (갸웃거리며) 서식지를 옮겼나? 예전엔 이런 일 없었어요?
아연정 몇 번 있었어. 근데 이 정도는 아니었어.
이승호 (하늘을 올려다본다.) 날씨가 괴상해서 그런가. (아연정이 아무 말도 없자) 기죽을 필요 없어요. 방제 업체도 오고 조만간 공사가 시작되니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거예요. 우린 방문객을 맞이할 준비만 하면 돼요.
아연정 안 올 거야. 난 그리 대단한 평가를 받는 문화재가 아니거든. 하긴 임청각9)에 비하면 조연에 불과하지. 거긴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으니까. 난 그런 기록조차 없어서 보잘것없는 거야. 관심이 적으니까 보수도 늦어지는 거고.
이승호 (설득하듯이) 요즘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요. 역사를 큰 사건 위주로 공부하던 시대는 끝났어요. 그리고 제가 있잖아요. 아연정과 김학손을 기억하는 사람. 책 표지에 담을 거예요.
아연정 유명하지 않다며.
이승호 (큰소리치며) 유명해질게요!


사이.


아연정 (담담하게) 병 걸리다 죽으면 이런 느낌인가? 대감께선 나보다 더했을 텐데.
이승호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아연정 안방에서 서거하셨어. 전날까지 활기차셔서 다 나았구나 싶었는데 저 능선 넘어 통곡 소리가 들리는 거야.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보내 드렸어.


아연정, 마루에 앉아 김학손의 체취를 맡는다.


아연정 아직도 그분 냄새가 나. 그분의 꿈도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해.


아연정, 가슴의 통증을 느낀다. 이승호는 아연정에 올라 빗자루로 흰개미를 전부 쓸어 낸다.


이승호 (자세히 보며) 빗질만 하면 쏙 들어가고.
아연정 이미 깊숙이 파고 들어왔어. 그만해.
이승호 그래도···
아연정 할 수 있는 게 없어.


이승호, 어쩔 수 없이 빗자루를 놓고 마루에 앉는다.


아연정 (활기찬 척) 네 이야기도 해 봐.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네.
이승호 일만 시켰잖아요.
아연정 과거도 보여 줬어.


두 사람, 서로 피식 웃는다.


이승호 (곰곰이 생각하다) 글쎄요. 워낙 평범해서요. 일하고 여행하고 글 쓰고. 큰 사건이나 변화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봤자 돈? 아니면 결혼?
아연정 (이해가 안 되는 듯) 그렇게 사는 게 재밌냐?
이승호 인생을 재미로 사나요. 그냥 사는 거죠.
아연정 너야말로 염세적이다.
이승호 현실적인 거예요.
아연정 그래도 한 번쯤은 변곡점이 생기기 마련이야. 그걸 이겨 내는 게 인생이고. 그렇게 따분하게 살면 나중에 금방 지쳐.
이승호 아연정 눈엔 따분해 보이겠죠. 시대적으로 굵직한 사건을 마주했으니까. 우린 일상의 작은 변화를 보고 있어요. 아연정이 살았던 세상과 다르다구요.
아연정 (은근히 속상한 듯) 요즘 애들은 왜 이러는지 원. 문화재에도 이러는데 할머니 할아버지한텐 더 하겠네.
이승호 시대가 변한 거죠. 아연정이야말로 흐름을 읽지 못해요.
아연정 (어이없는 듯) 내가? 난 너와 동시대를 살고 있어. 그 과정에서 배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대감께서도 배움을 항상 중시하셨다고.
이승호 (혼잣말로) 아직도 고리타분하네.


군락 쪽에서 쿵 소리가 난다. 이승호는 빗자루를 들고 경계 태세를 취한다.


이승호 (아연정을 안심시키며) 여기 있어요. 혼자도 충분해요.


이승호, 조심스럽게 군락으로 이동한다. 아연정은 이승호를 가만히 지켜본다. 이승호는 주변을 탐색하다 쓰러진 나무들을 발견한다.


이승호 나무들이 쓰러져 있는데요. (자세히 보고 기피하며) 흰개미···


아연정, 가슴의 통증을 느낀다. 이승호는 눈치 채지 못한다.


이승호 이건 많은 정도가 아니라 대량 발생인데. 서식지가 갑작스레 커질 수 있나?
아연정 (가슴을 부여잡고 아무 말도 못 한다.)
이승호 여긴 나무 색이 이상해요.
아연정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한다.)
이승호 아연정, 아연정?


이승호, 정자로 돌아오는데 쓰러진 아연정을 발견하고 부축한다.


이승호 (다급하게) 정신 차려요! 아연정!
아연정 (작은 목소리로) 곧 환상이 사라질 거야. 아무 말도 못 할 거야.


무대가 어두워진다.


아연정 난 대감의 꿈을 지키기 위해 있는 거야. 근데··· 근데 이렇게 죽어 가면 그분의 꿈도 사라지는 거잖아.
이승호 꿈이 뭐길래··· 다시 지으면 되죠!
아연정 팥배나무도 없는데 무슨 수로. 너희 방식은 우리를 아무렇게 희석하는 거야.
이승호 (침묵)


암전. 무대가 밝아지고 1584년, 조선. 김학손은 아연정 마루에 앉아 서책을 보고 있다. 노비, 편지를 들고 등장.


노비 (조심스레) 나리.
김학손 (서책을 보며) 들어가자는 소릴 하려고?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
노비 그것이 아니고··· (편지를 건네며) 유회 대감의 편집니다.
김학손 보나 마나 엉뚱한 소리겠지. 저번엔 계단에서 넘어졌다던데. 암튼 조심성이 없어. 여기 두고 가거라.
노비 서신을 가져온 자가 답장을 꼭 가져가야 한답니다. 유회 대감께서 신신당부하셨답니다.
김학손 (노비에게 편지를 건네받고 읽는다.)


사이.


노비 그자의 표정을 보니 왠지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김학손 (편지를 접으며)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 없다고 전해라.
노비 (당황하며) 그게 답장이십니까?
김학손 얼른 안 가고 뭐 하냐, 이놈아.


노비, 김학손에게 인사한 뒤, 퇴장.


김학손 (사색하며) 병조판서라.


유회, 등장. 김학손과 같은 공간은 아니지만 소통이 가능하다.


유회 자네가 좀 도와줘. 마땅히 할 사람이 없어.
김학손 전하께서 허락하신 건가?
유회 사실상 그렇지. 내가 추천했어. 올 거지?
김학손 (비꼬며)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군. 그렇지 않나?
유회 (침묵)
김학손 이이 대감께서 서거10)하고 자네는 이조판서, 난 병조판서. 우리가 합치면 못 할 게 없겠군. 자네가 뭘 원하는지 알겠어.
유회 그래서 싫어?
김학손 거긴 나랑 안 맞아.
유회 권력에 맞고 안 맞고가 어딨어. 그냥 권력이지. 솔직히 자네도 원하잖아.
김학손 (살짝 욱하며) 그래서 멀리하고 있어. 권세에 눈 뒤집힐까 봐.
유회 (일부러 자극하며) 자네 제자는 그렇지 않던데?


사이.


유회 솔직히 좀 놀랐어. 자네한테 배워서 올곧고 강단 있을 줄 알았거든. 근데 누구보다 욕망에 솔직했어.
김학손 (괘씸한 듯) 배움이 부족한 거지.
유회 굉장히 똑똑한 친구야.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듣고. 지금은 내 예하에 있네.
김학손 (불편한 듯)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유회 새파랗게 젊은 친구도 아는데 자네는 왜 모르냐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르침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아니야. 한 발짝 나가기 위한 포석이지. 자네는 허울을 품고 있는 거야!
김학손 난 화평한 세상을 꿈꾸는 것뿐이야!
유회 그 원대한 꿈을 이루는데 어떻게 한 가지만 고집할 수 있나? 때론 굴복하고 타협하고 공격할 때도 있는 거야. 자네 뜻을 틀렸다고 단정하진 않겠네. 하지만 좋은 사람도 권력 앞에서 변해. 자네 제자를 봐!
김학손 그놈도 언젠가 느낄 거야.
유회 나도 자네와 같은 꿈을 가지고 있네. 그걸 실현하기 위해서 권세가 필요한 거야. 젊을 때부터 발톱을 기른 거라고. 급제했을 때 그랬었지? 결말은 함께하자고. 이제 곧 결말이야. 병조를 이끌어 줘.
김학손 (외면하며)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희생하는 법이야. 권세를 얻으면 나도 고관대작들처럼 변하겠지. 그리고 난 아직 결말에 다다르지 않았어.
유회 (실망한 듯) 더는 물어보지 않겠네.


유회, 퇴장.


김학손 (아연정을 어루만지며) 결국은 여기밖에 없구나. 온전히 내 세상, 나만의 세상.


이승호, 김학손을 바라보며 등장.


이승호 (자송하며) 아무것도 몰랐구나. 아연정이 김학손에게 어떤 건지.


암전.



4장


이승호, 아연정 주변을 서성거리며 전화를 한다.


이승호 예, 편집자님. 시간만 주시면 됩니다. 그 안에 꼭 보내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는다.) 이야기를 빨리 들어야 하는데.


보수반장, 인부1, 2, 아연정에서 나온다.


이승호 수고하셨습니다.
보수반장 방역 업체가 다 했죠. 흰개미가 거의 다 죽었습니다.
이승호 이제 공사만 남았나요?
보수반장 공사가 아니라 아예 개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승호 다시 짓는다고요?
보수반장 흰개미가 구석구석 있었더군요. 자기들끼리 부동산을 만들었어요. 지붕이고 지지대고 손상 없는 게 없습니다. 여기서 심해지면 무너질 수도 있어요.
이승호 그럼 개축은 언제쯤 될까요?
보수반장 글쎄요. 우리도 순서라는 게 있어서요. 여기 오는 길에 동진종택 있는 거 아시죠? 우리가 거기도 공사를 가요. 외벽이 무너져서 메꿔 줘야 하거든요. 아연정은 최근에 신고돼서 거의 마지막입니다.
이승호 순서를 바꿀 수 없나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보수반장 (넉살 좋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하라는 대로 하는 건데요. 그리고 순서가 바뀌어도 당장 못 합니다.
이승호 왜요?
보수반장 요즘 목재 수급이 어렵습니다. 기후가 바뀌어서 그런지 제대로 된 나무가 하나도 없어요. 아까 군락도 보니까 매미나방이 있더라고요. 다른 지역도 그렇거든요. 이상한 벌레들이 꼬이니까 목재가 귀해졌죠.
인부1 근데 반장님, 흰개미가 또 나오면 어떡하죠? 서식지를 못 찾았는데.
보수반장 (걱정스러운 듯) 그러게 말이다. 일단 안전펜스나 쳐 놔.
인부1,2 예.


인부1, 2, 퇴장.


보수반장 (너스레를 떨며) 작가 양반 덕분에 조치는 빠르게 했습니다만 완전히 해결되진 않네요.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그런데 글 쓰는 거 때문에 그래요? 아연정을 책으로 쓰려고?
이승호 예, 그런 것도 있고요···
보수반장 그러면 내가 아는 놈 하나 소개해 드릴게. 그 친구가 역사 연구원이거든.
이승호 (손사래 치며) 괜찮습니다.
보수반장 아냐. 사양할 거 없어.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이승호 전 아연정에게 들어야 할 게 있어요.
보수반장 듣는다고요?
이승호 (얼버무리며) 문학적 표현이죠. 아연정의 숨결을 듣다.
보수반장 (호탕하게 웃으며) 멋있는 말이네.
이승호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보수반장 마음은 알겠지만 이제 그만 와요. 잘못하다 진짜 다쳐요.


이승호, 아연정에 다가가 쓰다듬는다.


이승호 주변에 산밖에 없는데 얼마나 외롭겠어요. 저라도 있어야죠. 여긴 단순한 정자가 아니에요. 김학손 선생의 꿈이 투영된 공간이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수반장 혹시 후손이에요?
이승호 아뇨.
보수반장 근데 뭔가 다 아는 듯 얘기하네? 후손도 아닌데 어떻게 잘 알아요?
이승호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보수반장 뭔데요?
이승호 아연정을 꼭 팥배나무로 지어 주세요.
보수반장 왜요?
이승호 대부분 김학손 선생을 재준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호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고수(孤樹) 김학손. 외롭게 자라는 나무란 뜻이래요. 유회 선생께서 쓴 편지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저기 팥배나무가 있는 걸 보고 지어 준 게 아닌가 싶어요.
보수반장 (공감해 주며) 공부를 많이 하셨네. 근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그렇게 하겠죠. 결정은 내부 협의를 통해서 합니다.
이승호 (아무 말도 못 한다.)
보수반장 그리고 아연정은 이전시켜야 해요.
이승호 (놀라며) 이전이요?
보수반장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흰개미가 터를 잡은 거 같아요. 강 주변이라 습기도 있고 근처에 군락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겠죠. 방제가 끝났으니 아마 땅속에서 다시 올라올 겁니다.
이승호 이전은 안 돼요!
보수반장 그럼 이대로 방관해요?
이승호 여긴 아연정의 집이자 안방이에요. 집주인을 내쫓는 경우가 어딨어요?
보수반장 작가 양반, 이건 국가사업이야. 사업 정책상 필요한 부분이라고. 자네가 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이승호 (아무 말도 못 한다.)
보수반장 아연정이 뭔데 이러는 거야? 책만 쓰면 그만 아니야?
이승호 이 지경을 보고 어떻게 지나가요. 며칠간 방문객은 나 혼자고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데.
보수반장 그거 오지랖이야. 젊은 친구가 앞날이나 걱정해야지.
이승호 이게 제 앞날이에요. 제 생계기도 하고요.
보수반장 (포기하며) 알았어. 대신 작업만 방해하지 마.


인부1, 2, 안전펜스를 들고 등장. 아연정 앞에 안전펜스를 설치한다.


보수반장 (이승호를 슬쩍 보고) 얼른 가자.


보수반장, 인부1, 2, 퇴장.


이승호 미안해요, 아연정.


바람이 불며 군락 나무들이 춤추듯 흔들린다.


이승호 (약간 흥분하며) 방금 대답한 거 맞죠?


바람이 지나가고 고요해진다.


이승호 (낙심한 듯) 그냥 분 건가.


이승호, 소나무 밑에 앉는다.


이승호 그거 알아요? 출판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거. 초고를 시작해서 수정하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써요. 정말 고난이죠. 근데 난 아직 마지막 부분을 쓰지도 못했어요. 매듭이 안 지어졌거든요. 그 부분을 빼면 여기 온 이유가 없어요.


사이.


이승호 아까 들었죠? 다들 아연정이 말한 전통을 위배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 입장에선 아연정이 사람 기준을 위배하는 거겠죠.


다시 바람이 불며 군락 나무들이 춤추듯 흔들린다. 바람이 고요해진다.


이승호 (일어나며) 바람인지 대답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시원하네.


이승호, 아연정 마루 위에 올라 김학손을 따라해 본다.


이승호 (뒷짐을 지며) 이렇게 서서 독산을 바라봤을까? 걸음걸이도 여유가 넘쳤겠지? 뭐 하는 거냐고요? 김학손 선생의 시선을 따라가 보는 거예요. 이러면 안 보였던 게 보이더라고요. (현판을 마주 보며 닦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닦았을까? 그래도 다행이네요. 현판은 성한 데가 없어서.


이승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보수반장, 경찰1, 2를 대동해 등장.


보수반장 (이승호를 가리키며) 저 사람입니다!
경찰1 내려오시죠.
이승호 (당황하며) 무슨 일이시죠?
경찰2 (강압적인 어조로) 일단 내려오시라구요.


이승호, 아연정 마루에서 내려온다.


보수반장 (고자질하듯) 이 사람 맞습니다. 문화재 훼손범. 며칠 전에 기단이 손상됐다고 신고했어요. 근데 방문객이 자기밖에 없었다고 말하잖아요. 그리고 여길 계속 맴돌면서 우리 일도 방해하는데 좀 수상합니다.
이승호 아니에요!
경찰1 (이승호에게) 사실입니까?
이승호 방해하진 않았어요!
경찰2 (의심스런 눈빛으로) 그럼 나머진 맞다는 거군요. 방금 마루에 올라간 것도 혐의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여기 안전펜스 안 보여요?
이승호 (경혹하며 아무 말도 못한다.)
경찰1 일단 서로 가시죠. (승호를 붙잡는다.)
이승호 (경찰을 뿌리치며) 난 진짜 아니에요! 정말 아니라고요!
경찰2 가서 얘기해요!
경찰1 (진정시키며) 아직 혐의점이라 조사차 가는 겁니다. 따라오시죠.


경찰1, 2, 이승호를 데리고 나간다. 그 뒤를 따라가는 보수반장. 모두 퇴장. 암전.



5장


1592년, 조선. 피난길. 김학손과 노비, 등장. 김학손과 노비, 짐을 메고 있다.


김학손 다 챙겼냐?
노비 예. 마님과 도련님께서 대부분 챙겨서 먼저 가셨습니다.
김학손 미리 알아서 천만다행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마을이 쑥대밭이 됐을 거야. 민가까지 태웠어야 하는데.
노비 그걸 굳이 태워야 합니까?
김학손 적군이 사용하지 못하게 다 없애 버리는 거다. 우리도 못 쓰는데 왜놈들이 쓰면 좋겠느냐?
노비 싫습니다. 그럼 그것도 태우실 겁니까?
김학손 뭘 말이냐?
노비 나리께서 자주 가시는 곳 말입니다. 저는 이름을 몰라서···
김학손 (담담하게) 그래야겠지.


김학손, 아연정을 바라본다.


노비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김학손 내가 아둔했을까?
노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김학손 아니다. 움직이자.


김학손과 노비, 퇴장. 아연정, 등장.


아연정 또 나밖에 없네.


경찰1, 2, 등장. 안전펜스를 지나 훼손 부분을 카메라로 찍는다.


경찰2 (사진을 찍으며) 많이도 했네.
경찰1 아직도 실토를 안 한다며?
경찰2 증거가 확실한데 뭐 하러 거짓말하는지 모르겠어. 군락 근처에 흰개미를 묻은 것도 영상으로 찍혔는데 말이야.
경찰1 얼굴이 가려져 있던데. 분석해 봐야 하는 거 아냐?
경찰2 딱 봐도 그놈이지. 흰개미랑 시기도 비슷하고 여기 맴돌던 것도 이상하고. 암튼 지능범이야.
아연정 (애써 부정하며) 아냐.
경찰2 그놈 작가더라?
경찰1 작가?
경찰2 들어 보니까 실력은 없더라고. 근데 그런 작가랑 어떻게 출판 계약을 했지?
경찰1 출판사가 작나 보지.
경찰2 아냐. 이름 있는 출판사야. 우리 파출소 건너편에 있는 거기.
경찰1 (의심하는 듯) 냄새가 나는데.
경찰2 내 말이 그 말이야.


둔탁한 소리가 난다.


경찰1 (불안한 듯) 야, 빨리 하자.


경찰1, 2, 황급히 아연정 곳곳을 카메라로 찍고 퇴장.


아연정 (애써 믿으려고) 그럴 놈이 아니야. (사이) 나도 늙었구나. 사실을 계속 부정하고. 정신 차리자. 몸뚱이처럼 생각도 썩으면 안 돼!


보수반장, 인부1, 2, 등장.


보수반장 이상한 놈 때문에 일이 더 늘었네.
인부1 그래도 해결돼서 다행이에요.
인부2 엄밀히 말하면 계획대로 된 건 아니지. 동진종택 끝나면 오늘은 작업 쉬는 날이잖아.
보수반장 미리 한다고 생각하자. 아연정까지 끝내고 며칠 푹 쉬는 거야.


보수반장, 인부1, 2, 아연정으로 들어간다. 아연정, 그들을 쫓아 문을 거세게 두드린다.


아연정 (문을 쾅쾅 치며) 여긴 내 터야! 대감께서 낳아 주신 곳이라고! 내가 갈 것 같아?
인부1 (목소리만) 반장님, 여기도 잘라요?
인부2 (목소리만) 여긴 부숴야겠네. 거기 망치 좀 줘.
보수반장 (목소리만) 문짝은 조심히 다뤄. 재사용하게.
인부2 (목소리만) 이건 다 버려. 쓸모없는 거야.
아연정 쓸모없지 않아. 난 쓸모없지 않다고!
보수반장 (목소리만) 텅나무네, 텅나무야.
아연정 아둔한 놈들.


보수반장, 인부1, 2, 아연정에서 나온다.


아연정 야!
보수반장 나머지는 오후에 하자.
인부1 식사나 하시죠.


보수반장, 인부1, 2, 희희낙락거리며 퇴장.


아연정 난 일자리 만들어 주는 노리개가 아니야. 작은 각도 하나도 전부 이유가 있고 생각과 지혜의 집합체야. 너흰 대감까지 욕보이는 거라고! 역사까지 왜곡하는 거라고.


이승호, 등장.


이승호 (조심스레) 아연정.
아연정 이 배신자.
이승호 나아져서 다행이에요.
아연정 이번엔 뭘 뺏으려고? 저 독산도 차지하려고?


아연정, 정자에 들어가 그림을 가지고 나온다.


아연정 (그림을 던지며) 자, 가져가. 다 가져가.
이승호 아연정, 난 결백해요.
아연정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아.
이승호 날 봐요. 내 눈 안에 뭐가 담겼는지. 진심이에요.
아연정 넌 날 두 번이나 죽였어. 너 때문에 삶의 목표까지 박살 났다고, 알아!


아연정, 정자 안으로 들어간다. 이승호, 그림을 주워 문을 두드리지만 조용하다. 보수반장, 등장. 이승호, 보수반장과 눈이 마주치고 깜짝 놀란다. 이승호가 도망치자 보수반장은 그를 뒤쫓는다. 모두 퇴장. 아연정,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다.


아연정 (분한 듯 안전펜스를 발로 찬다.) 망할 놈.


트럭 후진 경고음이 들린다.


아연정 (건너편을 바라보며) 날 데리러 왔구나. (사이) 그래. 가자. 살기라도 하자.


아연정, 현판을 떼고 마루에 내려온다.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아연정 (주변을 둘러보며) 잘 있어라.


아연정, 퇴장. 1592년, 조선. 피난길. 짐을 멘 김학손과 노비, 등장.


노비 나리,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김학손 그러자. (멀리 마을을 보며) 여긴 아직 평화롭구나. 조용하고.
노비 왜놈들이 닿지 않아서 그런 거죠.
김학손 넌 꿈이 뭐냐?
노비 전 꿈이 없습니다.
김학손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 작은 것 하나도 목표가 있기 마련인데.
노비 그렇습니까? 그럼 제 꿈은 탈 없이 사는 겁니다.
김학손 그래서 어떻게 살고 있는데?
노비 나리 옆에서 말을 잘 듣죠. 이렇게만 살아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건 어째서 물어보십니까?
김학손 궁금해서 물어봤다. (사이) 사실 내가 아둔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비 도대체 아둔하다는 게 뭡니까?
김학손 똑똑하지 못하다고.
노비 (말도 안 된다는 듯) 예? 나리께서 똑똑하지 못하면 다른 분들은 뭐가 됩니까? 머리를 얼마나 쥐어뜯어야 하냐고요.
김학손 (농담조로) 아부가 늘었구나.
노비 정말입니다.
김학손 만약에 내가 가르침이나 배움 말고 다른 일에 몰두했으면 조금 달랐을까? 솔직히 관직에 있을 때도 재밌었거든. 자리에 있으면서 교류하고 웃고 떠들고. 무엇보다 어디에 소속돼 책임을 다하면 그만큼 뿌듯한 일이 없었어. 만약에 그랬다면 내가 바라던 세상에 갈 수 있었을까?
노비 후회하십니까?
김학손 (사이) 아니.
노비 그럼 된 거 아닙니까. 뭘 고민하시는 겁니까?
김학손 나도 잘 모르겠다. (능선을 가리키며) 저거 연기 맞지?
노비 (걱정스러운 듯) 예. 아무래도 불이 난 것 같습니다.
김학손 왜군일 거다. (사이) 후회가 맞는 것 같다.
노비 예?
김학손 그때가 좋으면서도 피하고 싶었어. 스스로 모순이라고 느껴질 때마다 아무 말도 못 했거든. 그래서 간신히 하나를 선택했어. 그런데 저 불을 보니까 뭔가 후회돼. 만약 국정에 힘을 보탰다면 조금은 원하는 바를 이뤘을지도 모르겠다고. 적어도 사람이라도 구했겠지. 동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노비 나리는 그동안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건 나리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김학손 나만 할 수 있는 일. (굳센 표정으로) 가자.


김학손, 노비, 퇴장. 암전.



6장


산 중턱 탁 트인 곳, 안전펜스로 둘러싸인 아연정. 아연정은 현판을 걸고 빗자루로 주변을 청소한다.


아연정 (절경을 바라보며) 대감, 보이십니까? 우리가 있던 곳이 한눈에 보입니다. 다들 잘 지내고 있네요. 차라리 안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연정이 손뼉을 치자 김학손과 유회, 노비 등장.


유회 재준, 날도 더운데 발이나 담글까?
김학손 좋지!


김학손과 유회가 신발을 벗자 노비는 둘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김학손, 유회, 다리를 쭉 펴고 나란히 앉는다.


유회 한양 가서도 이런 여유를 느끼고 싶어.
김학손 잠시 생각과 마음을 비워 놓고 가. 그래야 새로운 걸 채우지. 나중에 와서 찾으면 돼.
유회 맡겨 줄 수 있나?
김학손 뭔지는 알아야지.
유회 (일어나 돌을 집어 물수제비를 던진다.) 저기다 놓았으니까 아연정에서 지켜봐.
김학손 말 안 해 줄 거야?
유회 나중에 말해 줄게.
김학손 (일어나 돌을 집어 물수제비를 던진다.)
유회 자네도 맡길 게 있어?
김학손 (장난스런 웃음) 아니 자네보다 멀리 갔어.
유회 해보자는 거지?


김학손과 유회, 경쟁적으로 물수제비를 던진다. 유회가 물수제비에 실패하자 김학손에게 물이 튄다. 김학손이 유회에게 물을 튀기자 점점 물장난이 시작된다.


노비 누가 볼까 염려스럽습니다.
김학손 (물장구를 치며) 보면 어떻고 안 보면 어떠냐.
유회 (물장구를 치며) 체면 따위 저기 맡겨 놨다.


신나게 물장난을 치다 아연정과 마주친다.


김학손 너도 하지 않을래?
유회 재준, 한눈팔지 마!

김학손과 유회의 물장난에 아연정도 참여한다. 그러다 김학손과 아연정의 거센 물장난에 유회, 도망간다. 김학손, 유회를 뒤따라간다. 노비, 둘의 신발을 들고 따라간다. 모두 퇴장.

아연정 그때 같은 시간이 또 올까요?


보수반장, 인부1, 2, 등장해 아연정으로 들어간다.


아연정 이사도 끝났는데 아직 낯섭니다. 꽃이라도 가져올걸.


김학손, 등장.


아연정 (놀라며) 대감!


김학손, 빗자루로 주변을 청소한다.


아연정 대감은 분하지도 않으십니까!
김학손 (아연정을 보고 웃는다.)
아연정 이럴 땐 대감이 이해가 안 됩니다. 소중한 걸 빼앗겼는데 웃음이 나오십니까?
김학손 (아연정에게 빗자루를 건네주고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아연정 (김학손의 손길을 피하며 투정 부리듯) 전 이 옷이 싫습니다.
김학손 (다가가 아연정의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아연정 대감.
김학손 (매무새를 정리하고 벽면을 가리킨다.)
아연정 뭔데요?
김학손 족쇄를 풀고 마음속 수평선을 찾아.


김학손, 퇴장. (사이) 보수반장, 인부1, 2, 아연정에서 나온다. 이승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등장.


인부2 반장님, 입 찢어지겠어요.
보수반장 (싱글벙글하며) 찢어져도 괜찮아.
인부1 반장님은 진짜 천재세요.
보수반장 사는 거에 충실하면 너네도 할 수 있어. 물론 운도 좋았지. 작가 놈을 쉽게 처리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계획에 일등공신이야.
인부2 그놈은 우리한테 화도 못 낼 거예요. 우리가 한 건지 어떻게 알겠어요.
인부1 전 오히려 흰개미가 대단해요. 군락에 묻을 때는 긴가민가했거든요.
보수반장 다시 파야 돼. 이제 땅 관리해야지. 땅만 매입하면 약속한 금액은 바로 줄게.
인부2 다음에 저도 도와주세요. 돈 좀 모아서 반장님처럼 하게.
인부1 저도요.
보수반장 (거들먹거리며) 안전펜스나 치워.


보수반장, 인부1, 2, 안전펜스 들고 퇴장.


이승호 (혼잣말로) 나한테 누명을 씌운 거야?
아연정 (나지막이 운다.) 이래도 웃음이 나오십니까? 수평선을 찾아야 합니까? 차라리 없어지고 싶습니다, 대감!


이승호, 아연정에게 다가와 위로한다.


아연정 아둔한 놈은 나였어.
이승호 이대로 있을 거예요?
아연정 방법이 없잖아.
이승호 (단호하게) 이대로 못 끝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겠어요.
아연정 어떻게?
이승호 반장이 원하는 걸 뺏어야죠.
아연정 그렇다 해도 누명은 벗지 못할 거야.
이승호 땅 넘어가는 꼴도 못 봐요. 이제 이판사판이에요.
아연정 (사이) 묘책이 하나 있어.


암전. 무대가 밝아지고 1597년 조선. 정유재란 전쟁터. 갑주를 입은 김학손과 군복을 입은 노비, 헐레벌떡 등장.


노비 놈들이 따라올까요?
김학손 분명 올 거다. 약이 제대로 올랐거든. 나머지는?
노비 준비됐습니다.


김학손과 노비, 아연정 옆으로 숨는다.


노비 (조심스레) 근데 전쟁은 언제 끝나는 겁니까?
김학손 (엄하게) 쓸데없는 소릴. 작전에 집중해라!
노비 죄송합니다.


사이.


김학손 그냥 죽은 듯 살자. 그게 지금의 최선 아니겠어?


어두운 조명이 몰려온다.


김학손 죽음이 세상을 바꾸는 경우도 있는 거다. (일어나 칼을 치켜세우고) 공격하라!


밝은 조명이 켜지자 어두운 조명이 마구 흔들린다.


김학손 (어두운 조명을 지켜보다) 지금이다!


김학손과 노비, 어두운 조명 속에서 적들을 벤다. 칼을 휘두를수록 어두운 조명이 점차 사라진다.


노비 놈들이 도망칩니다.
김학손 아직 끝이 아니다. 전열을 정비하라!
노비 전열을 정비하라!


노비, 퇴장. 김학손, 무대에 남아 있는 어두운 조명들을 하나씩 베며 사라지게 만든다. 마지막 조명을 베려는데 조금씩 도망친다.


김학손 이게 최소한의 예의다. (벤다.)


조명이 멈춘다.


김학손 내가 원망스럽나? 우린 서로 대의를 위해 움직였을 뿐이다. 희생 없는 목표는 없으니까. 죽음으로 대의를 실현해라. (벤다.)


조명이 완전히 사라진다.


김학손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본다.) 끝내야 해.


노비, 황급히 등장.


노비 나리!


어두운 조명이 다시 몰려온다. 김학손, 그들과 대치한다.


김학손 끝을 보자.


밝은 조명과 어두운 조명이 뒤엉키고 그 속에서 김학손과 노비가 격렬하게 전투한다. 하지만, 밝은 조명이 점차 사라지더니 어두운 조명이 무대 전체를 휘젓는다. 김학손과 노비, 결국 포위당한다.


김학손 젠장.


김학손과 노비가 어두운 조명과 대치하는 사이, 밝은 조명이 켜진다. 어두운 조명이 물러난다.


노비 보십시오. 아군 화살입니다!


유회, 등장. 서로 같은 공간은 아니지만 소통이 가능하다.


유회 몰골이 말이 아니군.
김학손 동진!
노비 대감!
유회 부상병들을 데려와라.
노비 (넙죽 숙이며) 감사합니다!


노비, 퇴장.


김학손 몇 년 만이지?
유회 글쎄. 기억도 안 나.
김학손 고맙네.
유회 여기서 막아야 방어선을 구축하기 쉽거든.
김학손 (살짝 서운한 듯) 그게 다야?
유회 내가 맡긴 거 보러 온 것도 있어.


둘 다, 웃음을 짓는다.


김학손 있잖아.
유회 (말을 가로채며) 말할 거 없어. 다 아니까. 나도 자네랑 똑같아.
김학손 우리 둘 다 어리석었어.
유회 시간 없으니 특지부터 받게.
김학손 특지?
유회 이곳 수성장으로 부임해 주게. 이번엔 이해관계 따윈 없어.
김학손 뭐가 됐든 난 여기 있을 거야.
유회 얼른 끝내세.
김학손 그러세. 맡긴 거 가져가야지.
유회 아직 못 가져가.
김학손 대체 뭔데?
유회 편해지고 싶은 마음. 수습할 때까지 편할 수가 없어.
김학손 (웃음을 짓는다.)


김학손과 유회, 퇴장. 무대가 어두워졌다 밝아진다. 아연정과 이승호, 등장.


이승호 (흥분하며) 전투가 일어났다는 건 사적지라는 거고 사적지라는 건 국가지정문화재가 된다. 개인 소유가 될 수 없다.
아연정 맞아.
이승호 근데 왜 그동안 안 했던 거예요?
아연정 기록이 없으니까.
이승호 그럼 사실상 묘책이 아니잖아요.
아연정 (침묵)


이승호, 답답한 듯 아연정 벽면에 기대어 앉는데, 살짝 덜컹거린다.


이승호 (분한 듯) 망할 보수반 놈들. (벽면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아연정, 이승호를 보며 뭔가 생각난 듯 벽면을 두드리더니 열려고 애쓴다.


이승호 (놀라며) 뭐하는 거예요.
아연정 (이승호의 만류에도 벽면을 열려고 한다.)
이승호 아연정!


아연정, 뒤에서 소화기를 가지고 온다.


아연정 (소화기를 건네주며) 부숴.
이승호 네?
아연정 (단호하게) 부숴.


이승호, 머뭇거리다 소화기로 벽면을 강하게 내리친다. 아연정, 고통을 참는다.


아연정 멈추지 마!


이승호가 벽면을 몇 번 내리치자 벽면이 열린다. 이승호, 안에서 고서 한 권을 꺼낸다.


이승호 (고서를 건네준다.) 읽을 수 있어요?
아연정 (책을 펴서 눈으로 읽어 본다.) 대감의 필체야.


암전.



7장


보수반 휴게실. 보수반장과 인부1, 2가 경찰2 앞에 나란히 서 있다. 경찰1은 보수반장의 가방을 뒤적거린다.


경찰2 영상 분석은 끝났습니다. 얼굴 가린다고 모를 줄 알았습니까?
보수반장 (침묵)
경찰2 흰개미는 누가 했습니까?
인부1 (보수반장을 조심스레 가리키며) 반장님께서···
보수반장 네가 묻은 거잖아, 임마!
인부1 직접 시키셨잖아요!


경찰2가 인부2를 쳐다보자 인부2는 보수반장 쪽으로 눈짓한다.


경찰1 (서류를 확인하며) 이게 대체 몇 평이야. 하마터면 문화재 자체가 넘어갔겠네.
경찰2 (비꼬듯) 제 발에 넘어진 거지. 보수라도 제대로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냐.
보수반장 (애걸하며) 일부러 한 건 절대 아니고 먹고 살려고 한 겁니다. 이 나이가 되면 결국 내 것이 필요해요. 곧 오십이고 육십입니다. 늙는다는 게 얼마나 처절한지 아십니까? 정상참작 부탁드립니다.
인부1 전 시킨 대로 한 겁니다.
인부2 저도요.
경찰2 이 양반들이 정말. 문화재 훼손은 애당초 중범죕니다. 당신들은 최소 징역이에요. 금전 거래까지 약속하고 계획했으면 사실상 의도입니다. 같잖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따라와요.


경찰1, 2는 보수반장, 인부1, 2를 데리고 퇴장. 아연정과 이승호는 그 모습을 보며 등장.


아연정 기분이 어때?
이승호 몇 달간의 응어리가 부서진 듯해요. 경찰이 거의 피의자로 봤거든요. 독산이랑 소나무한테 인사했어요?
아연정 물론이지. 날 대신해서 여길 지켜 줬잖아. 고마운 존재들이야.
이승호 다 재준 선생 덕분이에요. 일기의 시발점이 여기까지 왔잖아요. 근데 속상하지 않아요?
아연정 뭐가?
이승호 팥배나무요.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결국은 다른 나무로 지었잖아요.
아연정 (빙그레 웃으며) 이젠 괜찮아.


김학손과 유회, 등장. 무대 정면을 보며 진지하게 상의한다.


아연정 (김학손을 보며) 전란과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느낀 것이 있다.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세상과 융화하니 어느새 모든 게 발전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과거의 난 고관대작들과 다를 게 없었다. 주장만 다를 뿐 똑같은 고집쟁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와 시대는 이런 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난 누구보다 진심이었다고. 그 진정성까지 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학손과 유회, 퇴장.


이승호 서거 전날 일기네요.
아연정 생각해 보면 죽음을 미리 준비하신 거 같아. 마지막 힘이 남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신 거지. 그분의 말과 행동을 상기하면 비로소 이해가 돼. 족쇄가 뭔지, 수평선이 뭔지.
이승호 대감의 뜻을 따르는 건가요?
아연정 그게 내가 있는 이유니까.
이승호 (뭔가 생각난 듯 가방에서 책을 꺼내 준다.)
아연정 (표지를 보고) 표지가 나네?
이승호 아연정만큼 좋은 사진이 없더라고요.
아연정 (조금 불평하며) 근데 왜 자는 사진을 올린 거야.
이승호 초상권 운운하면서 안 찍길래 몰래 찍었죠.
아연정 그건 그냥 하는 소리지. 우리 사이에 사진 한 장 못 찍어 주겠어? 카메라 꺼내 봐.
이승호 죄송한데 이미 출판돼서 못 바꿔요.
아연정 (정색한다.)
이승호 (얼버무리며) 보물이 잠들어 있다 깨어난다는 의미에서 자는 사진을 쓴 거예요. 함축적인 이미지죠. 그리고 책은 내용이에요. 아연정 이야기는 다른 거보다 훨씬 재밌어요.
아연정 정말?
이승호 (고개를 끄덕인다.)
아연정 (잠시 책을 읽어 보다 웃는다.) 고맙다.
이승호 마음에 들어요?
아연정 (책을 읽으며) 응. 여기 대감 초상화가 잘 나왔네. 이제 가는 거야?
이승호 네.
아연정 다음 책은 뭔데?
이승호 또 다른 역사를 탐구하는 거죠. 단순히 탐구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른들을 이해해 보려고요.
아연정 왜?
이승호 저도 언젠가 재준 같은 사람이 되려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힘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배우고 공부하며 어른들의 지혜를 얻으려고요. 그게 이십 대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아요.
아연정 기특한 놈. (책을 돌려준다.)
이승호 그건 아연정 거예요. 처음으로 인쇄된 책은 아연정 주려고 했어요.


아연정, 이승호에게 악수를 건네자 이승호, 악수를 받는다. 이승호, 나가려다 뒤돈다.


이승호 (손을 흔들며) 안녕 독산, 안녕 아연정! 잘 지내요!


이승호, 퇴장. 아연정, 건너편 독산을 바라보며 공기 내음을 들이마신다.


아연정 (환한 표정으로) 공기 좋다!


아연정, 정자 안으로 들어간다.




-막-



1) 조선시대 언론 활동, 풍속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등을 관장하던 관서.
2) 조선시대 노비의 부적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
3) 조선시대 선조 때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가 만든 소화기.
4) 조선시대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 외국어 교육의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5) 선조 16년 5월 26일 변방이 시끄럽고 국저가 동이 났다는 이이의 아룀에 따라 용관을 태거하였다.
6) 조선시대 중추부의 정3품 관직.
7) 조선시대 언론, 국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 등을 관장하던 관서.
8) 선조 16년 9월 1일 사간원이 당파의 대립 원인을 극론하고, 정철이 여론을 주도했다고 아뢰었다.
9) 보물 제182호. 조선시대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이씨 이명이 지은 집.
10) 선조 17년 1월 1일 이조판서 이이가 졸기하였다.


추천 콘텐츠

문장, 콤마 희곡

이영녀와 윤심덕과 그리고 나

이영녀와 윤심덕과 그리고 나 신은수 등장인물 김우진. 이영녀. 오일삼. 윤심덕. 1925년, 늦은 저녁. 상성합명회사의 작은 사무실 안. 한쪽 벽면엔 업무 서류들이 쌓인 책장. 전화기가 놓인 책상에는 쓰고 있던 원고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사무실 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다.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김우진. 옆에 놓인 물컵과 약봉지. 김우진 하루하루 정말 미칠 지경이야··· 돈과 직위?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가꿔 이룬 것들이라면 애착이라도 있겠지만, 모두가 아버지 것들인데··· 난 그저 장남으로 태어난 책임으로 꼭두각시처럼 있는 거라고. 아무리 좋은 먹이를 매일 갖다 줘도··· 새장 속의 새가 행복하겠나. 지금 내 신세가 꼭 그래, 누구보다 자유로워야 할 예술가가 말이야. 이러다간 날개가 퇴화돼··· 어느 때부턴 나는 법조차 잃어버릴까 두렵다고. 약봉지를 힘겹게 뜯으며. 김우진 그래서 오늘도 쓰고 있다네. 이런 밤늦은 시간에 부친께서 앉힌 사장 역할이 끝나면, 나는 법을 잊지 않으려 말일세. 지금 쓰고 있는 것 말인가? 조선판 입센의 인형의 집, 노라인데··· 잘 풀리지가 않아. 막바지 3막으로 가고 있지만, 과연 지금의 조선 현실서 착취 속에 사는 궁핍한 여성이 자아를 찾아간단 것이 가능한 얘기인지··· 써 본들 사람들이 보고도 공감 못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뭐라 했나, 윤심덕? 당황해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김우진 이보게,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다고. 안 만날 걸세, 지금 윤심덕이가 어디 살고 있던 내 알 필요 없잖은가?! 그래, 그 추잡한 소문들을 여기서도 전부 다 듣고 있다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 밖을 향해서. 김우진 밖에 누군가. (수화기에) 잠시만··· 급하게 원고들을 구석에 숨겨 놓으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오는 오일삼. 오일삼 접니다, 사장님. 김우진, 안도하는 표정. 오일삼 아! 전화 중이신데··· 불쑥, 실례했습니다. 김우진 (수화기에) 회사 직원이야, 신경 안 써도 돼. 나도 잘 모르겠네··· 언제 완성될지는. 얘기했잖은가, 마지막 부분에 글이 막혔다고. 다 쓰면 우선은 자네가 있는 토월회 쪽으로 보낼 테니, 한번 읽어 보라고. 오일삼 하하하. 편하게 계속하십시오. 김우진 이영녀일세. 주인공 이름 그대로가

  • 신은수
  • 2024-11-21

문장, 콤마 희곡

떡갈나무

떡갈나무 하성민 장소 지방 도시 노인복지관 그리고 독거노인들의 집 배경 12월 중순. 추운 날씨다. 관내 노인복지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직원 민영과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조사원 준성, 도시에서 귀촌한 준성은 복지 대상자인 노인들을 한 명씩 만난다. 인물 박수환, 남자, 80대, 독거노인. 최장수, 남자, 70대, 독거노인. 김양희, 여자, 70대, 독거노인. 김준성, 남자, 32세, 독거노인 현황 조사원. 전민영, 여자, 52세, 노인복지관 직원. 무대 무대는 삼분할된다. 왼편은 민영의 사무실, 중앙은 준성이 다니는 길, 오른편은 노인들의 집 마당이다. 하수(무대 왼쪽), 사무실 출입구 상수(무대 오른쪽), 노인들의 집 [전막] 자연은 과연 아름다운가. 말없이 무심함을 내뿜는 자연을 우리는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나. 시골은 사람 없는 자연이다. 지금 여기 겨울을 지나는 시골은 그 어느 때보다 깊게 고요하고 서늘하다. 가랑잎나무가 조용히 흔들린다. 지난 시절 푸릇하던 잎 하나가 어느새 기력을 다하고 지면으로 툭 내려앉는다. 추위에 내려앉은 잎의 맥처럼 마을에 듬성듬성 자리를 지키는 노인들의 주름살도 그 결이 또렷하다. 마을을 지나는 구불한 길은 적막을 걸치고서 노인들을 생의 끝자락으로 안내하고 있다. 이곳은 그렇게 기운을 잃었다. 무겁게 발을 내디디며 쉭쉭 빠지는 노인들의 날숨은 시간이 지나며 더욱 짙어질 뿐이다. 준성, 무대 중앙에 있다.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빼고를 반복한다. 다른 손에는 서류뭉치가 들려 있다. 천천히 무대 좌우로 왔다 갔다 걷는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무대 중앙에 멈춰 선다. 3초 후 민영, 하수에서 등장. 손에는 종이컵이 들려 있다. 자리에 앉고 차를 마시며 모니터를 바라본다. 종이컵을 내려놓고 키보드를 두들긴다. 기지개를 켰다가 다시 차를 마시며 모니터를 바라본다. 준성, 민영 쪽으로 느리고 천천히 다가간다. 중간중간 숨을 고르기도 한다. 옷매무새를 다듬고서 민영 앞에 멈춘다. 준성 (서류 뭉치를 건네며) 여기요. 민영 (슬쩍 준성을 보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며) 네, 고생하셨어요. 거 두고 가시면 됩니다. 준성 ···뭐 다른 건 없나요? 민영 (모니터만 바라보며) 다음 주에 조사원들 다 같이 모이는 거 아시죠? 시간 정해서 연락드릴게요. 준성 네. (돌아가려 몸을 돌린다) 민영 몇 분 정도 남았죠? 준성 (다시 몸을 돌린다) 아, 다섯 명 정도? 민영 다섯 명, 그거 마치면 저번에 얘기 드린 기초조사에서 사백 명 분량이 필요하니까 부지런히 다니셔야겠어요. 준성 몇 명이요? 민영 사백 명 준성 사백 명이요? 민영 예예. 저번에 얘기 드렸잖아요. 추가 명단 있다고. 준성 아. 민영 어쨌거나 시간 없으니 얼른 돌아다니셔야겠어요. 언제 다 할라고. 준성 ·&midd

  • 하성민
  • 2024-10-22

문장, 콤마 희곡

여전히 진행 중, 우리는

여전히 진행 중, 우리는 최해인 현실 김기훈 – 소설 속 다른 인물을 대역한다 소설 김기훈 교수 현실 김기훈의 지도교수 연구실 및 소설 속의 여러 공간 현재 1장. 무대 중앙을 기준으로 끝에서 끝까지 세로로 긴 책상 두 개가 있다. 책상 사이로 한 사람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책상 위에는 연극 포스터가 깔려 있고, 그것을 긴 유리가 덮고 있다. 마치 박물관 같다. 긴 책상을 기준으로 하수는 지도교수의 공간, 상수는 소설 속의 공간이다. 하수 아래에는 지도교수 책상이 있고, 지도교수는 객석을 향해 앉아 있다. 하수 위에는 책장이 있고, 안에는 각종 책이 가득 꽂혀 있다. 상수에도 의자가 있다. 노크 소리가 들린다. 교수 들어오세요. 현실 기훈이 등장한다. 교수는 기훈을 쳐다보지 않는다. 교수 거기 앉아 있어. 현실 기훈, 의자에 앉는다. 교수 포스터 나왔어? 현실기훈 아직이요. 교수 거기 자리 있으면 하나 넣어놔. (사이) 근데 지난 학기 힘들었어? 갑자기 제주도 다녀오고. 기훈아 이 바닥은 박사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선물은 안 사 왔지? 받고 싶어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세상에는 비밀이 없어요. 현실기훈 교수님, 제가 보내드린 거 읽어 보셨어요? 교수 뭐? 현실기훈 금수일보에서 당선된 소설이요. 메일로 보내드렸는데요. 교수 아 뭐 하나 왔던데 소설이었어? 그런 걸 읽을 시간이 어딨니. 현실기훈 그렇군요. 사실 그거 때문에 온 거예요. 교수 할 말이 있다는 게? 현실기훈 교수님께 답을 듣고 싶어서요. 교수 뭔데 그래? 현실기훈 (가방에서 인쇄한 소설을 꺼내며) 소설 읽어 보실래요? 교수 시간 없다니까. 빨리 말해. 현실기훈 누가 제 얘기를 썼습니다. 교수 무슨 소리야? 현실기훈 (소설을 들며) 이거 제 얘기입니다. 교수 (그제야 기훈을 쳐다보며) 자세히 얘기해봐. 현실기훈 소설 주인공 이름이 김기훈입니다. 소설의 김기훈도 대학원을 다닙니다. 그리고 소설의 김기훈은 일광시에서 주관하는 희곡상을 받았고요. 교수 잠시만, 너잖아. 현실기훈 말씀드렸잖아요. 교수 누가 썼어? 당선작가 이름이 뭐야? 현실기훈 가까이에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교수 우리 가까워, 다 들리니까 거기서 얘기해. 현실기훈 그쪽으로 갈게요. 현실 기훈, 교수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교수 여기는 못 들어온다고 했지? 어디 건방지게, 당장 안 나가! 현실기훈 제발 제대로 좀 들어보세요. 교수, 현실 기훈의 큰소리에 당황한다. 무대 상수에 소설의 기훈이 등장한다. 소설 기훈은 통화를 하고 있다. 현실 기훈은 교수에게 소설을 읽어준다. 현실기훈 주민등록증과 통장 사본을 보내 달라는 전화였다. 시상식 날짜는 추후 공지하겠다 하고는 잠깐의 정적이

  • 최해인
  • 2024-10-1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