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클래스
- 작성일 2024-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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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클래스
박현정
등장인물
마에스트로 80대 남, 거장 지휘자, 지휘과 교수
시안 33세 여, 한국인, 지휘과 대학원생
맥시밀리언 21세 남, 독일인, 지휘과 대학원생
무대
마에스트로의 개인 연습실
그랜드 피아노 한 대, 책장을 채운 악보들, 보면대와 지휘봉,
삼인용 소파와 일인용 소파, 그 가운데 거대하지만 낡은 의자 하나
배경
2020년대, 독일 베를린의 음악학교 지휘과
| 1장 | |
| 맥시밀리언, 시안에게 악수를 청한다. | |
| 어정쩡하게 악수하는 둘. | |
| 맥시밀리언, 시안에게 일인용 소파에 앉으라고 에스코트한다. | |
| 시안, 자리에 앉고, | |
| 맥시밀리언, 떨어진 곳에 앉는다. | |
| 맥시밀리언 | 중국이었나? |
| 사이 | |
| 시안 | 한국. |
| 맥시밀리언 | (민망해하며) 아, 한국. 맞다, 한국이랬지. |
| 시안 | 응, 한국. |
| 맥시밀리언 | 헷갈려서. |
| 시안 | 내 이름이 좀 그래. |
| 맥시밀리언 | 이름도 그렇고, 워낙 중국 애들이 많으니까. |
| 시안 | 한국 애들도 많아. |
| 맥시밀리언 | 중국 애들이 더 많잖아.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너 영어 잘한다. |
| 시안 | 너도. |
| 맥시밀리언 | 나도? |
| 시안 | 응, 너도.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나한테 영어 잘한다는 사람은 처음인데? |
| 시안 | 너 미국인 아니잖아? 영국인도 아니고. |
| 근데 네가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하고, | |
| 내가 영어를 잘하는 건 칭찬받을 일이야? | |
| 맥시밀리언 | 너 좀 공격적이다. ··· 내가 싫어? |
| 시안 | 싫지 않아. |
| 맥시밀리언 | 나도 네가 싫지 않아. |
| 시안 | 아니! 솔직히 좀 싫어. |
| 맥시밀리언, 어이없다는 듯 일어서서 | |
| 맥시밀리언 | 왜? 내가 왜 싫어? |
| 시안 | 나는 네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까지도 싫어. |
| 맥시밀리언 |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 |
| 시안 | 넌 영영 이해 못 해.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그럼 알 필요 없겠네. |
| 맥시밀리언, 자리로 가 앉는다. |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가 너랑 나, 둘만 따로 불렀어. |
| 시안 | 부지휘자를 정하려는 거겠지. |
| 맥시밀리언 | 난 엄마 없이 와 있어서 불편해. |
| 시안 | 언제까지 엄마랑 다닐 건데? |
| 맥시밀리언 | 엄만 내 매니저야. 그냥 엄마가 아니라고. 마마보이 취급하지 마. |
| 시안 | (웃으며) 너 안경 안 쓰면, 잘 안 보이잖아. |
| 맥시밀리언 | 그게 뭐? |
| 시안 | 지난번에 리허설 끝나고, 안경 안 쓴 채로 포디움에서 내려와서, |
| ‘어, 우리 엄마 어디에 있죠? 엄마?’ | |
| 맥시밀리언 | 지금 날 놀리는 거야? |
| 시안 | 귀여웠다고. |
| 맥시밀리언 | 넌 늙었어. |
| 시안 | 알아, 난 늙었지. |
| 맥시밀리언 | 스물··· 다섯이었나? |
| 시안 | 짜증 나면서 한편으로는 고마운데 서른이거든? |
| 맥시밀리언 | 말하는 것마다 틀리네. |
| 시안 | 넌 나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
| 맥시밀리언 | 너한테만 그런 건 아니야. |
| 시안 | 맞아. 나한테만 그렇진 않지. 넌 세상 모든 일에 그다지 관심 없잖아. |
| 맥시밀리언 | 나쁜 거야? |
| 시안 | 아니? 누가 나쁘대? 난 좋다고 생각해. |
| 음악에만 빠져있는 삶, 나쁠 거 없지. | |
| 맥시밀리언 |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 |
| 시안 | 넌 어떤데? 그렇게 사는 게? |
| 맥시밀리언 | 그렇지 않게 살아본 적 없어서 몰라. |
| 시안 | 여자 친구 있어? |
| 맥시밀리언 | 나 좋아해? |
| 시안 | 오 마이 갓. |
| 맥시밀리언 | 그건 아닌가 보네. |
| 시안 | 그럼 남자 친구가 있어? |
| 맥시밀리언 | 뭐? (크게 반응하며) 아니? |
| 시안 | 요즘은 그렇게 반응하면 안 돼. |
| 맥시밀리언 | 알 게 뭐야.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볼 사람 아무도 없어. |
| 시안 | 너 네가 남자를 좋아하는지 여자를 좋아하는지 고민해 본 적 있어? |
| 맥시밀리언 | 내가 남자를 왜 좋아해? |
| 시안 | 난 어때 보여?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 듣고 보니까 모르겠어. |
| 시안 | 안타깝게도 남자를 좋아해. |
| 맥시밀리언 | 그게 왜 안타까운 일이야? |
| 시안 | 나 같은 포지션은 레즈비언인 게 낫거든. |
| 맥시밀리언 | 뭐? |
| 시안 | 내가 너무 퀴어 혐오스러운 발언을 했나? |
| 맥시밀리언 | 이해가 안 돼서 그래. |
| 시안 | 어떤 사람들은 내가 레즈비언이길 바라. |
| 그렇다고 내가 패션 레즈비언이 될 수는 없잖아. | |
| 맥시밀리언 | 날 이해시켜 줘. 설명을 해달라고. 너 지금 폭력적이야. |
| 시안 | (웃으며) 폭력적? |
| 맥시밀리언 | 그래, 폭력적.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넌 지금 말로 날 때리고 있어. |
|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로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 | |
| 난 이 자리에 다른 어떤 마음도 아니고, | |
| 오직 음악을 위해, 지휘를 하고 싶다는 마음, 그거 하나만을 위해 왔어. | |
| 그런데 너는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을 하면서 | |
|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어. | |
| 이게 바로 폭력이야. | |
| 넌 네가 아는 것들을 모르는 나를 무지한 인간으로 만들어. | |
| 그게 폭력이야. 그게, 그게 바로 폭력이야. | |
| 네가 뭔가를 알고 있다면 모르는 사람을 위해 | |
| 아주 약간은 친절하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 거야! | |
| 사이 | |
| 시안 | 그랬다면 미안해. |
| 맥시밀리언 | 그리고 내가 엄마한테 배운 건 이럴 때 써야 하는 말은 |
| ‘그랬다면 미안해’가 아니고, 그냥 ‘미안해’라는 거야. | |
| 시안 | 미안해. |
| 맥시밀리언 | 알겠어. |
| 짧은 사이 | |
| 시안 | 넌 스무 살이었나? |
| 맥시밀리언 | 스물하나야. |
| 시안 | 나도 틀렸네. |
| 맥시밀리언 | 됐어, 생일 지난 지 며칠 안 됐으니까. |
| 시안 | 모차르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기분이 어때? |
| 맥시밀리언 | 어떻긴 어때? 쪽팔리지. |
| 시안,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오고 참지 못한다. | |
| 맥시밀리언 | 봐, 이러니까 쪽팔리다는 거야. |
| 시안 | (겨우 웃음을 참으며) 미안, 미안. |
| 맥시밀리언 | 머리도 겨우 잘랐잖아. |
| 시안 | 그래! 너 머리. |
| 맥시밀리언 | 머리 얘기하지 마. |
| 시안 | (웃으며) 너 그 긴 머리 왜 잘랐어. |
| (자기 머리를 만지며) 그게 음악의 원천인데! | |
| 맥시밀리언 | 나는 확신해. |
| 우리 엄마는 내가 그 머리를 자르면 | |
| 우리 아빠처럼 대머리가 될까 봐 무서웠던 거야. | |
| 그래서 머리를 못 자르게 한 거야. | |
| 시안 | (더 크게 웃으며) 뭐어? 너 진짜 웃긴다. |
| 맥시밀리언 | 웃지 마. 페이스북에서 사람들이 뭐라는지 알아? |
| ‘오, 이 큐트 걸이 지휘도 잘하네요!’ | |
| 그럼 우리 엄마가 댓글을 달지. ‘오, 큐트 보이랍니다.’ | |
| 이모티콘 웃음, 웃음! 추가. | |
| 시안 | 너 진짜 재밌다. |
| 맥시밀리언 | 전부 사실이야. 놀리지 마. |
| 시안 | 머리 잘라서 엄마가 아쉬워하셨겠다. |
| 맥시밀리언 | 우리 엄마 울었어. 지난번에 마에스트로랑 엄마랑 싸운 날···.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그다음날에 내가 혼자 가서 잘랐어, 머리. |
| 아마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 혼자 결정하고 혼자 해버린 일일 걸. | |
| 내가 머리 자르고 가니까 엄마가 펑펑 울었어. | |
| 엄마가 펑펑 우니까 나도 엄마랑 같이 울었어. | |
| 엄마가 우니까 나도 슬퍼졌거든. | |
|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마에스트로 말이 맞았으니까. | |
| 나는 어른이 되었고, 엄마 없이도 결정할 줄 알아야 하니까. | |
| 그래야만 지휘자가 될 수 있으니까···. |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모든 사람들이 봤잖아. 마에스트로랑 엄마가 무대에서 싸워서. 너도 봤고. |
| 시안 | 그래서 머리를 잘랐구나. |
| 맥시밀리언 | 자른 게 훨씬 낫지? |
| 시안 | 응, 훨씬 강해 보여. |
| 맥시밀리언 | 그럼 됐어.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그래도 엄마가 슬퍼하진 않으면 좋겠어. |
| 나는 그래서 좋은 지휘자가 될 거야. | |
| 아니, 엄청나게 유명하고 대단한 지휘자가 될 거야. | |
| 그게 우리 엄마가 원하는 거니까. | |
| 나는 우리 엄마가 행복해지길 원하니까. | |
| 나도 내가 그렇게 되길 원해. | |
| 짧은 사이 | |
| 맥시밀리언 | 그리고 난 강해지고 싶거든.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넌? 넌 왜 지휘자가 되고 싶어? |
| 시안 | 나? ··· 글쎄, 난···. |
| 긴 사이 | |
| 시안 | ··· 난 모르겠네. |
| 2장 | |
| 마에스트로, 무대에 등장한다. | |
| 시안과 맥시밀리언, 일어선다. | |
| 마에스트로 | 앉아, 앉아. 늙은이 취급 그만해. |
| 마에스트로, 낡은 의자에 앉고, | |
| 시안과 맥시밀리언, 마에스트로를 따라 앉는다. | |
| 마에스트로 | 나 없는 동안 둘이 얘기 좀 했어? |
| 맥시밀리언 | 그냥 평범한 얘기 했습니다. |
| 마에스트로 | 그냥 평범한 얘기? |
| 맥시밀리언 | 네, 그냥 평범한 얘기요. |
| 마에스트로 | 그냥 평범하지 않은 자리에서 그냥 평범한 얘기를 했어? |
| 시안 | 맥시밀리언이 머리를 자른 일에 대해 얘기했어요. |
| 마에스트로 | 아, 머리. 머리 얘기. 좋군. |
| (긴 머리를 흩날리는 척하며) 긴 머리의 천재 모차르트! | |
| 맥시밀리언 | 절 놀리시는 건가요,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아니, 놀리는 게 아니야. 부러워서. 너 머리숱이 참 많던데? |
| 맥시밀리언 | (진지하게) 저희 어머니는 제가 아버지처럼 될까 봐 걱정이셔서 |
| 제가 머리를 자르지 못하게 하신 겁니다. | |
| 시안,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린다. | |
| 마에스트로 | 이 봐, 여성 탈모도 조심해야 해. |
| 시안 | (웃음을 참으며) 네, 조심할게요. |
| 마에스트로 | 근데 대머리가 되면 뭐가 어때? |
| 맥시밀리언 | 어머니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셔서요. |
| 마에스트로 | 대머리가 만드는 음악도 아름다워. |
| 맥시밀리언 | 어머니는 제가 아름다운 걸 원하십니다. |
| 마에스트로, 가만히 맥시밀리언을 쳐다본다. | |
| 마에스트로 | 그럼 너희 어머니의 음악은 너로구나. |
| 맥시밀리언 | 비유를 하신다면 그렇겠죠. |
| 마에스트로 | 아냐, 아냐. 그렇게 말해서는 안 돼. 비유를 한다고 하지 마. |
| 넌 음악가야. 네 언어는 음악이야. 너는 말 대신 음악을 쓰지. | |
| 하지만 그건 단순히 독일어 대신 불어를 쓴다거나, | |
| 이탈리아어 대신 영어를 쓰는 문제가 아니야. | |
| 언어 안에도 수없이 많은 계층이 있어. | |
| 예술가의 언어는 거대해. 크고, 깊고, 넓어. | |
| 넌 비유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 | |
| 통역이나 치환이 없어야 한다고. | |
| 음악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언어야. | |
| 자, 너는 너희 어머니의 음악이야. 맞지? | |
| 맥시밀리언 | ··· 네. |
| 마에스트로 | 그 안에서 너는 뭐지? |
| 맥시밀리언 |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모차르트겠죠? |
| 마에스트로 | 틀렸어! |
| 맥시밀리언 | 모두가 절 그렇게 부르는데요? |
| 마에스트로 | 모두가 널 그렇게 부른다고 네가 그렇게 되는 건 아냐. |
| 넌 너를 찾아야 해. | |
| 모두가 너라고 부르는 그 거짓을 뚫고 지나 진짜 너를 찾아야 한다고. | |
| 맥시밀리언 | 음악가 중에 찾으란 말씀이신가요? |
| 마에스트로 | 이런! 시안, 네 생각은 어때? |
| 시안 | 작은 심장. |
| 사이 | |
| 시안 | 맥시밀리언은 맥시밀리언 어머니의 작은 심장. |
| 모두가 알죠, 맥시밀리언의 어머니가 맥시밀리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
| 또 그래서 얼마나 열성적인지. | |
| 마에스트로 | 지나치게 문학적이구만. |
| 맥시밀리언 | 우리 엄마가 좋아할 만한 말이네요. 엄마한테 전해줄래요. |
| 고마워, 시안. | |
| 마에스트로 | 네가 너희 엄마한테 안 전하는 말이 있니? |
| 맥시밀리언 | (당연하게) 없죠. |
| 마에스트로 | 그래, 난 지금도 넷이서 얘기하는 기분이란다. |
| 맥시밀리언 | 셋인데 넷이다, 좋네요. 하나 더 있으면 좋죠, 뭐. |
| 마에스트로 | 어이쿠, 저걸. |
| 시안, 옅게 웃으며 두 사람을 쳐다본다. | |
| 마에스트로 | (환기하듯) 시안! |
| 시안 | 네,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너희 어머니는 어떤 분이셔? |
| 시안 |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 마에스트로 | 그냥, 그냥 편하게 답하면 돼. |
| 시안 | 평범해요. ··· 못 본 지 꽤 돼서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요. |
| 마에스트로 | 모든 예술가에게 어머니만큼 중요한 존재는 없어. |
| 그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 |
| 시안 | 자기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 아이가 제가 하나인 것에 감사해요. |
| 다른 아이가 또 있었더라면 전 무척 슬펐을 거예요. | |
| 그 아이도 제 슬픔을 겪어야 할 테니까요. | |
| 나빠서가 아니라, 나쁘지도 좋지도 않아서요. | |
| 마에스트로 | 그럼 네 슬픔의 원천은 네 어머니야? |
| 시안 | 아뇨.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어요. |
|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제 어머니는 제 슬픔의 원천이 아녜요. | |
| 마에스트로 | 맥시밀리언, 슬퍼 본 적 있니? |
| 맥시밀리언 | 그럼요!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자신감 넘치는 걸? |
| 이토록 자신감 넘치게 슬퍼 본 적 있다는 말이 또 있을까? | |
| (맥시밀리언에게) 넌 참 귀여운 아이야. | |
| 맥시밀리언 | 전 곧 성인이에요. |
| 마에스트로 | 그래, 귀여운 성인아. |
| (시안에게) 맥시밀리언 같은 애를 보면 기분이 어때? | |
| 맥시밀리언 | 절 비난하시려는 거죠? |
| 마에스트로 | 가만히 좀 있어, 맥시밀리언. |
| 시안 | 부러워하기엔 전 너무 늙은걸요.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넌 여전히 너무 어려. 내 앞에서 늙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 |
| 시안 | 맥시밀리언에 비하면 늙었죠. |
| 맥시밀리언 | 하지만 지휘는 육십에도 시작한다잖아. |
| 시안 |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요. |
| 맥시밀리언 같은 애들을 보면 제가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 |
| 하지만 시간을 돌려도 어쩔 수 없는걸요. | |
| 그때의 저는 어떤 수를 써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를 얻을 수 없겠죠. | |
| 지금도 그래요. 지금 제가 그 나이여도 마찬가지예요. | |
| 여전히 단 한 번의 기회를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걸요. | |
|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
| 무사히 유학을 오고, 지휘과를 나오고, 불안정하지만 이 자리에 왔잖아요. | |
| 마에스트로 | 앞으로는 더 불안정할 텐데? |
| 시안 | 네, 알아요. |
| 사이 | |
| 시안 | 모든 게 불안해요. 독일에 오면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고, |
| 지휘 공부를 하면 어떻게 해서든 지휘자가 될 줄 알았고, | |
| 제 이름으로 된 집을 가질 줄 알았고, 멋진 남자와 결혼할 줄 알았고, | |
| 모든 게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는데, | |
| 마에스트로 |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지?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맥시밀리언에게) 무서워졌어? |
| 맥시밀리언 | ··· 조금요. |
| 마에스트로 | (고개를 저으며) 네 얘긴 아냐. 넌 아닐 거거든. |
| 맥시밀리언 | 네? |
| 마에스트로 | 너희 엄마의 작고 귀여운 아들인 너는 결코 작고 귀엽지가 않거든. |
| 넌 많은 걸 갖고 태어났고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아. | |
| 그 속에서 넌 운 좋게 많은 걸 갖고 태어난 쪽에 속하고. |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알겠니? 넌 앞으로 어떤 교향악단, |
| 혹은 여러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될 거고, | |
|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지휘를 하게 될 거야. | |
| 네 잘생긴 얼굴과 네 이름이 찍힌 포스터가 | |
| 서울, 도쿄, 베이징, 암스테르담, 베를린, 라이프치히, 프라하, | |
| 파리, 헬싱키, 소피아, 등등에 걸리겠지. | |
| 비즈니스석을 타고 일 년에도 수십 일씩 전세계에 연주를 다니겠지. |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그게 네 삶이야, 맥시밀리언. 모두가 알고 있어. |
| 어쩌면 너만 모를지도 모르지. | |
| 어쩌면 너만 오로지 네가 네 실력만으로 | |
| 그 자리에 올라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 |
| 네가 무엇을 가졌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 |
| 짧은 사이 | |
| 마에스트로 | (시안에게) 부럽니, 시안? 질투나? |
| 아니면 바꿔버리고 싶어? 이 모든 걸? | |
| 아니, 세상은 바뀌지 않아. 미안하지만, 시안. | |
| 네가 사는 세상과 맥시밀리언의 세상은 끝과 끝이야. | |
| 저기 서울과 부에노스아이레스만큼의 거리라고. | |
| 3장 | |
| 마에스트로 | 내가 오늘 너희 둘을 부른 건, 둘 다 이미 알고 있듯, |
| 둘 중 하나에게 부지휘자 자리를 주기 위해서야. | |
| 시안 | 알고 있습니다.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그래, 맥시밀리언.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는 저보다 시안을 더 좋아하지 않으시나요? |
| 마에스트로 | (웃으며) 뭐라고?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는 늘 저보다 시안을 더 좋아하셨잖아요. |
| 늘 시안을 칭찬하셨고요. | |
| 마에스트로 | 내가?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는 연기도 잘하시는군요. |
| 마에스트로 | 그래서 내가 시안에게 부지휘자 자리를 줄 거라는 거지? |
| 맥시밀리언 | 제게도 기회가 있길 바랄 뿐이에요. |
| 마에스트로 | 난 너 역시 내 아이로서 사랑한단다. |
| 맥시밀리언 | 거짓말. |
| 마에스트로 | 진짜야! |
| 너희 어머니처럼 네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녀야만 사랑이 아니야! | |
| 다 큰 남자아이한테 사랑한다고 고백이나 해야 한다니. | |
| 세상 꼴이 말이 아니군. | |
| 시안 | 마에스트로는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셔. |
| 맥시밀리언, 가만히 마에스트로를 바라본다. | |
| 마에스트로 | 부지휘자로 공연할 첫 번째 레퍼토리가 정해졌다. |
| 맥시밀리언 | 무슨 곡인가요? |
| 마에스트로 | 베토벤 교향곡 8번. |
| 맥시밀리언 | 8번이요? |
| 시안 | 왜 8번인가요? |
| 마에스트로 | 물어볼 줄 알았어. |
| 맥시밀리언 | 7번도 있는데 굳이 8번을요? |
| 마에스트로 | 8번, 제대로 들어보기는 했어? |
| 맥시밀리언 | 네, 들어봤죠. |
| 마에스트로 | 시안, 넌? |
| 시안 | 들어는 봤어요. 제대로는 아닌 것 같아요. |
| 마에스트로 | 좋지 않아?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의 취향이라는 말씀이신가요? |
| 마에스트로 | 아니, 아니, 그렇지는 않아. |
| 맥시밀리언 | 그래도 프로 교향악단에서 부지휘자로 첫 데뷔 무대인데···. |
| 마에스트로 | 그럼 8번이 안 되는 이유를 나한테 설명해 봐. |
| 맥시밀리언은 마에스트로에게, | |
| 시안은 관객에게 설명한다. | |
| 맥시밀리언 | 첫 번째, 1번은 1번이라서 좋고요. |
| 시안 | 입학시험 볼 때 1번으로 보잖아요. 하도 많이 들어서 워낙 익숙하고요. |
| 맥시밀리언 | 2번은··· 아시잖아요. 정말 열심히 연습한 곡인걸요. |
| 시안 | 2번은 지휘하기가 꽤나 까다로워서 다들 공부를 많이 하죠. |
| 맥시밀리언 | 3번은 그 유명한 영웅이라서 좋고요. |
| 시안 | 〈영웅 교향곡〉 들어보셨죠? 음악을 잘 몰라도 한 번쯤을 들어보셨을걸요. |
| 맥시밀리언 | 4번은··· 음, 4번은 8번과 비슷한 운명이죠. |
| 시안 | 그래도 4번은 미학적으로 아름답다는 평가가 꽤나 있다고요. |
| 아름다우면서 화려하고, 또 용맹한! | |
| 맥시밀리언 | 그런 의미에서 5번은 운명이라서 대단하고요. |
| 시안 | 따다다다! 따다다다! 운명이 다가온다! 따다다다! |
| 맥시밀리언 | 6번은 말할 것 없이 모든 지휘자들이 대결하는 곡이죠. |
| 시안 | 베토벤이 표제를 지었어요, ‘전원’이라고. |
| 맥시밀리언 | 7번은! 제가 이렇게 아쉬워하는 건요, |
| 제가 7번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거든요? | |
| 마에스트로 | 7번은 순진하거든. 딱, 맥시밀리언 너 같지. |
| 맥시밀리언 | 순진하다고요? |
| 마에스트로 | 나는 의견을 내면 안 되나? |
| 맥시밀리언 | 네, 존중합니다. 어쨌든요, 7번의 아름다움은 모두가 알아요. |
| 9번은··· 합창. (짧은 사이) 역작이죠. 8번은요? | |
| 시안 | (맥시밀리언에게) 8번도 그렇게 나쁘진 않아. |
| 맥시밀리언 | 넌 8번을 좋아해? |
| 시안 | 좋아하진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아. |
| 마에스트로 | 하나만 해.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
| 시안 | 좋아하기에는 부족하고 싫어하기에는 괜찮아서요. |
| 마에스트로 | 명확히 해. 좀 더 파고 들어가 보라고. |
| 왜 그렇게 뭉뚱그려서 얘기하는 거야? | |
|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안 돼? | |
| 조금만 더 생각을 물고 늘어지면 안 돼? | |
| 남의 생각이 내 머리를 치고 들어오기 전에 | |
| 내 생각을 좀 더 견고하게 만들면 안 돼? | |
| 시안 | 너무 급작스러운 면이 있어서요. 혼란스럽기도 하고요. |
| 그러다 갑자기 꺼져버리는 불꽃처럼 휙 끝나잖아요. | |
| 맥시밀리언 | 전 브람스 하고 싶어요. |
| 마에스트로 | 넌 브람스는 안 돼. |
| 맥시밀리언 | 레퍼토리 확정인가요? |
| 마에스트로 | 응. |
| 맥시밀리언 | 고민이네. |
| 마에스트로 | 부지휘자는 되고 싶은데, 콘서트는 하기 싫다, 뭐 이런 건가? |
| 맥시밀리언 | 아뇨, 그럴 리가요···. |
| 시안 |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그래, 무엇이든. |
| 시안 | 베토벤을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하필 8번인 건 이해가 잘 안 돼요. |
| 마에스트로 | 그럼 내가 8번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할게. |
| 시안 | 네. |
| 마에스트로 | 완벽히 내 취향에 부합하진 않지만 좋은 곡임에 틀림없어. |
| 짧은 사이 | |
| 마에스트로 | 잘 이해가 안 되는 눈치들이네? ··· 진짜 이유를 말할게···. |
| 나에게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 |
| 작품을 알려야만 하는 의무가 있어. | |
| 나는 이름을 알렸고, 성공했고, 늙었고, 많은 걸 가졌지. | |
| 나는 그래야만 하는 거야. | |
| 그것이 베토벤의 것이라 해도, 덜 사랑받는 것이 있다면, | |
| 그것이 사랑받아야 함에도 덜 사랑받는다면 | |
| 그것이 사랑받을 수 있게 도와야만 하는 거야. | |
| 나는,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예술이든 어느 예술가든 | |
| 알려지고 사랑받게 만들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거야. |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그리고 너희에겐 그 곡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단다.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맥시밀리언! |
| 맥시밀리언 | 네! |
| 마에스트로 | 8번 틀어! |
| 맥시밀리언, 휴대전화를 만지는데, | |
| 마에스트로 | LP판으로! |
| 맥시밀리언 | 알겠어요. |
| 마에스트로 | 오자와 것으로! |
| 맥시밀리언, LP판을 올리면, | |
| 흘러나오는 베토벤 교향곡 8번 1악장 | |
| 마에스트로 | 꼭 너희들 같지 않아? |
| 숨 쉬잖아. 살아 숨 쉰다고. 숨이 차올라서 헐떡거린다고. | |
| 그러다 잠깐 쉴 때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 |
| 길게 쉴 순 없지. 다음 도약을 위해 아주 잠깐 숨을 고르는 거야. | |
| 예쁜이들. 그래, 그렇지, 그렇게 뛰어가. 더, 더 달려가라고! | |
| 저기 어둠이 쫓아 와. 저 악당들이 쫓아온다고, 달려. 쉴 새 없어. | |
| 젊음이란 그런 거야. 이런, 바로 뒤까지 쫓아왔어. | |
| 그러나 어둠아, 나는 절대로 지지 않아! | |
| 네가 내 바로 뒤까지 쫓아왔어도 나는 절대로 두렵지가 않아! | |
| 나는 오히려 환희로 가득 찼단다! 그래, 달려갈게. 쫓아와 봐! | |
| 마침내 나는 날게 되었고 너희 모두로부터 자유로워졌단다- | |
| 4장 | |
| 맥시밀리언 | 진정한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페라를 지휘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
| 유명한 지휘자들이 말하길, | |
| 어린 지휘자들이 오페라 극장에서 일하지 않아서 실력이 부족하다고. | |
| 마에스트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
| 마에스트로 | 그런 걸 묻는 걸 보니 뭔가 마음에 안 들지 않는가 보구나. |
| 맥시밀리언 | 전 오페라는 관심 없어요. 교향곡만 하기에도 벅차요. |
| 마에스트로 | 벅찬 게 싫다고? 그럼 벅찬 음악을 왜 하는 거야? |
| 맥시밀리언 |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
| 마에스트로 | 물론이지. |
| 맥시밀리언 | 전 집에서 말이 없어요. |
| 시안 | 와우. |
| 맥시밀리언 | 말하는 걸 싫어하거든요. |
| 시안 | 믿을 수 없어. |
| 맥시밀리언 | 비웃지 마. |
| 시안 | 놀란 거야. |
| 맥시밀리언 | 거짓말. |
| 시안 | 넌 모두가 널 놀린다고 생각해. |
| 맥시밀리언 | 너도 그렇잖아. |
| 시안 | 내가? |
| 맥시밀리언 | 모두가 너의 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잖아. |
| 마에스트로 | 늙은이 앞에서 싸우는 거야? |
| 맥시밀리언 | 시안이 먼저 시작했어요. |
| 시안 | 미안해. |
| 맥시밀리언 | 나도. |
| 마에스트로 | 너희 확실히 친하지 않구나. |
| 맥시밀리언 | 어떻게 아셨어요? |
| 마에스트로 | 치열하게 싸우지 않잖아. ‘미안해!’, ‘그래!’ 하면 끝나잖아. |
| 나쁠 것 없지. 하지만 기억해. 예술가는 외로워. | |
| 어느 때에나 예술가는 외로워. 친구라고는 대답 없는 악보뿐이야. | |
| 치열하게 치고받고 싸울 친구 한 둘쯤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아. | |
| 시안 | 그러기에 맥시밀리언은 너무 미성숙해요. |
| 맥시밀리언 | 스물하나한테 바라는 게 많아! |
| 시안 | (웃으며) 미안. |
| 맥시밀리언 | 전 말하는 거 안 좋아해요. ··· 의미가 달라지는 게 싫어요. |
| 마에스트로 | 아버지가 변호사셨나? |
| 맥시밀리언 | 네.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제가 음악이 좋은 건 음악은 음악 그대로니까요. |
| 함의, 저의, 악의를 갖지 않아도 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되니까요. | |
| 시안 | 말이 싫어서 오페라가 싫은 거야? |
| 맥시밀리언 | 그런 편이야. 음악이 있는데 대사가 왜 필요해? |
| 시안 | 재밌는 생각이다. |
| 마에스트로 | 맥시밀리언, 너의 언어는 음악임이 확실하구나. |
| 시안 | 하지만 지휘자는 음악을 위해 음악이 아닌 언어를 쓰죠. |
| 우리는 영어,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를 배우잖아요. | |
| 대부분의 지휘자가 이 언어들을 모두 할 수 있고요. | |
|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조금 더 잘 소통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 |
| 우리가 조금 더 좋은 오페라를 만들기 위해서 아닌가요? | |
| 마에스트로 | 시안 말도 맞지. |
| 좋은 지휘자는 교향곡과 오페라 모두 지휘할 수 있어야지. | |
| 맥시밀리언 | 하지만 제 생각에, 오페라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
| 음악은 오직 음악만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 시안 | 훌륭한 오페라 음악이 얼마나 많은데. |
| 오페라는 그 음악과 이야기를 더 빛나게 해줘. | |
| 마에스트로 | 그렇다면 맥시밀리언, 넌 성악가들을 싫어하겠구나? |
| 맥시밀리언 | 네, 좋아하지는 않아요. |
| 마에스트로 | 말을 쓰니까. |
| 맥시밀리언 | 네, 맞아요. |
| 시안 | 좋은 것에 좋은 것이 더해지면 더 좋아질 수도 있어. |
| 맥시밀리언 | 난 말로 하는 일에 지쳤어. 그게 내가 음악을 선택한 이유야. |
| (옅게 웃으며) 물론 내가 선택한 건 아니었지. | |
| 어쨌든 내가 음악을 계속 사랑하고 할 수 있었던 이유야. | |
| 마에스트로 | 시안은 오페라를 좋아해. 맞지? |
| 시안 | 네, 저는 오페라를 좋아해요. |
| 마에스트로 | 소년은 말이 싫어 오페라를 싫어하는데, |
| 너는 무엇이 좋아 오페라를 좋아하지? | |
| 시안 | 무엇이 좋아서 좋아한다기보다는 무엇이 싫어서 좋아해요. |
| 마에스트로 | 무엇이 싫어서 오페라를 좋아해? |
| 시안 | 현실이 싫어서요.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그래. |
| 시안 | 오페라는 꿈이잖아요. 현실이 아니고요. |
| 교향곡도 그렇지만 오페라는 더 큰 환상이잖아요. | |
| 맥시밀리언, 가만히 시안을 쳐다본다. | |
| 맥시밀리언 | 환상에서 깨어나면? |
| 시안 | 현실에서의 내가 더 굳건해지지. 그게 힘이야, 극장의 힘. |
| 사이 | |
| 시안 | 극장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나는 달라져. |
| 그걸 지휘하는 게 나야.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걸. | |
| 마에스트로 | 제일 좋아하는 오페라는? |
| 시안 | 〈나비부인〉이요. |
| 맥시밀리언 | (찡그리며) 〈나비부인〉? |
| 시안 | 응, 〈나비부인〉. |
| 맥시밀리언 | 넌 동양 여자잖아. |
| 시안 | 안 돼? |
| 맥시밀리언 | 동양 여자가 〈나비부인〉을 좋아한다고? |
| 시안 | 안 되냐고. |
| 맥시밀리언 | 안 될 건 없지만 이상하잖아. 동양 여자가 학대당하는 이야기잖아. |
| 마에스트로 | 나도 궁금하네. 예상 밖이라. |
| 시안 | 마에스트로도 궁금하세요? |
| 마에스트로 | 응, 무척. |
| 시안 | 아름다워서요. 기회가 되면 〈나비부인〉을 지휘할 거예요. 기꺼이. |
| 사이 | |
| 시안 | 지금이면 절대 못 나올 이야기겠지만,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서. |
| ··· 음악이 눈물 나게 아름다워서. | |
| 맥시밀리언 | 난 동의 못 해. |
| 시안 | 동의 못 하는 너에게 동의해. |
| 마에스트로 | 푸치니가 동양 여자를 비하하려고 그 이야기를 쓰진 않았겠지. |
| 맥시밀리언 | 비하한 꼴이긴 하죠. |
| 마에스트로 | 비하라기보다는 몰지각했다고 하자고. |
| 시안 | 그렇게 하죠.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요. |
| 시대는 바뀌었지만 쵸쵸상은 여전하다. 절 봐도 그렇잖아요. | |
| 맥시밀리언 | 네가 어때서? |
| 시안 | 난 말도 별로 없고, 조용하고, 순응적이잖아.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너 정말 이상해. ··· 그건 너 자신을 폄하하는 거야. |
| 시안 | 어쨌든 극의 내용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음악은 좋아한다구. |
|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건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부인. | |
| 마에스트로 | 넌 〈나비부인〉을 좋아해서는 안 돼, 시안. |
| 시안 | 전 음악을 좋아하는 건데요? |
| 마에스트로 | 싫어할 줄도 알아야지. |
| 시안 | 하지만 아름다운걸요. |
| 마에스트로 | 세상엔 더 아름다운 것들도 많아. |
| 세상에 아름다운 게 〈나비부인〉 하나는 아니야. | |
| 시안 |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싫어하기까지 해야 하나요? |
| 마에스트로 | 그럼, 싫어해야 할 건 싫어해야지. 네게는 그럴 권리가 있어. |
| 네가 동양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비부인〉을 싫어할 권리가 생기는 거야. | |
| 왜냐면 푸치니가 〈나비부인〉을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까. | |
| 그건 네 권리이자 의무야. | |
| 네가 그것을 싫어하지 않을 때, 너의 친구들은 길을 잃게 돼. 알겠니? | |
| 시안 | ··· 네, 하지만···. |
| 마에스트로 | (웃으며) 고집불통이로군. |
| 시안 | (웃으며)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마에스트로. |
| 맥시밀리언 | (크게 한숨을 쉬며) 어렵네요. |
| 마에스트로 | 너에게도 어려운 게 있었니? |
| 맥시밀리언 | (여전히 풀이 죽은 채) 네, 지금 이 순간이요. |
| 엄마가 잘하고 오랬는데···. | |
| 마에스트로 | (질린다는 듯) 또 엄마 얘기! |
| 너 오늘은 엄마 얘기 할당량 끝이야! | |
| 맥시밀리언 | 벌써요? |
| 5장 | |
| 마에스트로 | 왜 지휘자가 되고 싶지? |
| 맥시밀리언 | 드디어 그 질문을 하시는군요! |
| 마에스트로 | 네가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그 답을 골백번쯤 연습했나 보구나. |
| 맥시밀리언 | 꼭 그런 건 아니고요. |
| 마에스트로 | 맥시밀리언이 왜 지휘자가 되고 싶은지는 조금 있다 듣기로 하고. |
| 맥시밀리언 | 네? |
| 마에스트로 | 너희 엄마가 너 대신 나한테 얘기해 줬거든? |
| 맥시밀리언 | 아···. |
| 짧은 사이 | |
| 맥시밀리언 | 그런데 아까 엄마 얘기는 할당량이 끝났다고···. |
| 마에스트로 | 시안 얘기를 먼저 들어보고 싶은데. |
| 시안 | ··· 음악을 만드니까요. 작곡가의 영감과··· |
| 마에스트로 |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얘기 집어치워. 솔직히 말해. |
| 시안 | ··· 제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
| 모두가 제 음악에 따라야 하니까요. 반대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 | |
| 마에스트로 | 그렇지. |
| 시안 | 제가 해석하고 만난 작곡가의 음악이 저를 통해서 완성되니까요. |
| 오직 저를 통해서요. 제가 시작이고 끝이죠. | |
| 작곡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 |
| 무대에 있는 건 저예요, 작곡가가 아니고. |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그래서 작곡가를 이겨먹기 위해 악보를 두 개씩 가지고 다니나? |
| 사이 | |
| 시안 | 무슨 말씀이시죠? |
| 마에스트로 | 뻔하지. |
| 맥시밀리언 | 시안은 암보를 하는 걸요. |
| 마에스트로 |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암보하는 것 말고. 시안에게는 악보가 두 개야. |
| 맥시밀리언 | 정말? |
| 시안 | (차분하게) 어떻게 아셨죠? |
| 마에스트로 | 하나는 보여주기용. 리허설 때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지. |
| 내가 이만큼 공부했다, 이만큼 해석했다, 이만큼 알고 있다. | |
| 지나치게 깨끗하게 잘 그려져 있지. | |
| 마치 다른 책을 보고 적어야 할 것만 받아적은 것처럼. | |
| 시안 | 맞아요. |
| 마에스트로 | 다른 하나는 네 연습실에 있겠지. 치열하게 싸운 흔적 그대로. |
| 넌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 놓고 공부하지 않은 척하는 거야. | |
| 원래부터 알았던 척,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인 척. | |
| 작곡가의 의도? 악보만 훑으면 그 정도야 금방 알게 되는 척. | |
| 너에게 진실된 모습이 있긴 한 거니? | |
| 시안 |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
| 그리고 전 지휘자가 굳이 그런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 |
| 마에스트로 | 치열하게 싸운 모습을 조롱하는 건 악질이나 하는 짓이야. |
| 그건 음악가의 일이 아니야! | |
| 시안 | 음악가라고 악질이 아니란 법은 없죠. |
| 마에스트로 | 난 네가 포디움에 악보를 들지 않고 올라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
| 시안 | 제가 악보를 잊을까 봐 걱정돼서 그러시는 건가요? |
| 마에스트로 | 네가 잊긴 왜 잊어. 그렇게 똑똑한 머리로. |
| 시안 | 그럼 왜 제게 항상 악보를 들고 올라가라고 하시는 거죠? |
| 마에스트로 | 내려놓으라고. |
| 시안 | 무엇을요? |
| 마에스트로 | 음악을. |
| 시안 | 전 음악을 위해 그 자리에 서는 건데요? |
| 마에스트로 | 작곡가에게 맡겨. 하늘에 있을 작곡가에게 좀 맡겨봐. |
| ‘이봐, 모차르트. 난 이만큼만 할게. 당신이 나머진 맡아줘. | |
| 사람들은 나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니까.’ 이렇게 말할 순 없는 거야? | |
| 시안 | 제가 얻은 것들 중 치열하지 않고 얻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
| 지금 이 자리까지도요. | |
| 마에스트로 | 알아. 난 널 존중해. 그러니 너도 작곡가를 존중해. |
| 시안 | 그래도 놓으라는 말씀이시죠? |
| 마에스트로 | 그만하면 됐어. 놔줘. |
| 사이 | |
| 시안 | 전 아직 어느 교향악단의 부지휘자 자리도 얻지 못했는데요? |
| 마에스트로 | 그걸 얻으면 어떻고 얻지 못하면 또 어때? |
| 시안 | 저는 지휘자가 되고 싶은데요? |
| 마에스트로 | 넌 지휘자가 되겠다는 열망을 사랑하고 있어! |
| 시안 | 무엇이 다른가요? |
| 마에스트로 | 지휘를 사랑하는 것과 지휘자를 사랑하는 것은 달라! |
| 시안 | 그럼 안 되나요? |
| 마에스트로 | 넌 지금 지휘자가 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어. |
| 그건 지휘를 사랑하는 것과 다른 일이라고! | |
| 시안 | 지휘를 사랑해서 지휘자가 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거예요! |
| 마에스트로 | 아니, 넌 지휘를 이용하고 있는 거야! |
| 그래, 이 시대를 타고 한 번 엎어보자! | |
| 내가 어디 필하모니, 어디 교향악단, | |
| 어디, 어디의 최초 여성 지휘자가 되어보자! 그게 내 시대니까! | |
| 넌 지금 여기에 빠져 있어! | |
| 시안 | (소리친다) 그럼 안 되나요? |
| 마에스트로 | 아니! 안 될 것 없지!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안 된다고 한 적 없어! |
| 대신에 넌 지휘할 때 행복할 수가 없는 거야. |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네 열망이 너를 가두는 거야. |
| 예술에 대한 열망이, 지휘를 더 잘해 내겠다는 욕심이 너를 가두는 거야. | |
| 네 몸짓을 더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 |
| 네 선율을 콘서트홀 안에서만 흐르게 막아두는 거야. | |
| 네 음악은 절대로 세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 |
| 시공간을 넘어, 저 드넓은 우주를 흐르는 음악은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 |
| 시안 | 잘하고 싶은걸요! 전 잘하고 싶어요. 최선을 다했어요. |
|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요. | |
| 마에스트로 말씀대로 전 맥시밀리언이 아니니까요. | |
| 마에스트로 | 널 배신하는 건 인간이지 예술이 아니야, 시안. |
| 시안 | 하지만 오직 사람만이 제게 예술 할 기회를 줍니다. |
| 사이 | |
| 시안 |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지휘자가 맞기는 한 걸까? |
| 나는 말로만 지휘자지, 지휘과를 나왔지 지휘자는 아닌데. | |
| 어디 가서 지휘자라고 명함도 못 내미는데. | |
| 나중에 청소년 오케스트라 지휘나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 |
| 마에스트로 | 그게 널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넌 지휘자가 될 자격이 없어! |
| 시안 | 전 어디 시골에 처박혀서 동네 조무래기들이나 지휘하고 싶지 않아요. |
| 피치도 맞지 않는 소리를 조율해줘 가 | |
| 면서 〈터키행진곡〉이나 연주하고 싶지 않다고요. | |
| 마에스트로 | 너에게 실망이다. 이제라도 솔직한 네 마음을 알려줘서 정말 고맙구나! |
| 시안 | 제게도 타이틀이 중요해요! |
| 맥시밀리언만 타이틀을 얻을 수 있나요? | |
| 저는 타이틀을 얻으려 하면 안 되나요? | |
| 마에스트로 | 음악은 결단코 타이틀이 아니야! |
| 시안 | 부지휘자가 되겠다고 마에스트로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할 수는 없어요. |
| 마에스트로는 지나치게 감상적이세요. 정답만을 원하시죠. | |
| 짧은 사이 | |
| 마에스트로 | ··· 늙어서 그래. |
| 마에스트로, 자리로 가 앉는다. |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시안에게로 가서) 죄송하다고 사과드려. |
| 긴 사이 | |
| 마에스트로 | 맥시밀리언, 〈브람스 2번〉이 듣고 싶구나. |
| 맥시밀리언, 〈브람스 교향곡 2번〉을 튼다. | |
| 6장 | |
| 마에스트로 | 지휘를 왜 하는 거야? 아니, 왜 지휘자가 되고 싶은 거지? |
| 지휘를 왜 하고 싶은 거지? 여기에서 옳은 질문은 뭘까? |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지휘를 하고 싶어서 지휘자가 되려는 건가, |
| 지휘자가 되고 싶어서 지휘를 하려는 건가? | |
| 맥시밀리언 | 지휘를 하고 싶어서 지휘자가 되려는 겁니다. |
| 마에스트로 | 정말? 그 권력과 화려함에 대한 일말의 동경도 없이? |
| 시안 | 권력을 바라면 안 되나요? |
| 맥시밀리언 | 넌 생긴 거랑은 다르게 되게 권력지향적이다. |
| 시안 | 너 그 말 엄청 위험한 발언인 거 알아? |
| 맥시밀리언 | 인종, 성별 빼고 그냥 너의 귀여움이. |
| 시안 | 나보다 열 살은 더 어리면서. |
| 맥시밀리언 | 너도 그거 위험한 발언이다?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일부러 밝게) 아까 시안처럼 권력에 대한 동경이 없이 |
| 지휘자가 되고 싶느냐는 말씀이신 거죠? | |
| 시안 | (밝게) 그래, 나처럼. |
| 마에스트로 | (밝게) 그래, 너처럼.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
| 마에스트로가 늘 말씀하셨잖아요. 그런 시대는 지났다고. | |
| 더 이상 어느 지휘자도 단원들에게 소리 지를 수 없다고. | |
| 시안 | 소리 지르는 건 확실히 미성숙하긴 해. 경험자로서 어떻게 생각해? |
| 맥시밀리언 | (소리친다) 내가 언제 그랬는데? |
| 시안 | 넌 분을 못 이겨서 보면대를 쾅쾅 치는 스타일일 것 같아. |
| 너 그때 왜 용서받은지 알아? | |
| 맥시밀리언 | 그 얘기는 하지 말아줄래. |
| 시안 | (웃으며) 그때 울었잖아. |
| 맥시밀리언, 화를 참는다. | |
| 맥시밀리언 | 얘기하지 말랬어. |
| 시안 | 쾅쾅 치면서 눈물을 후두두둑 흘렸지. |
| (따라하며) 아무도 내 얘기를 안 들어줘, 엉엉! 쾅쾅! | |
| 너 우는 게 웃기고 귀여워서 다들 봐준 거야. |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에게) 제가 콘서트마스터면요, |
| 전 절대로 시안 뜻대로 연주하진 않을 거예요. | |
| 마에스트로 | 너희 둘이 서로를 지휘할 수 없다는 게 다행이로구나. |
| 맥시밀리언 | 지휘자의 권력이란··· 비즈니스석에 앉는 거? |
| 공연하러 갔을 때 리무진이 마중 나오는 거? | |
| 마에스트로 | 그런 걸 바라고 있었구나? |
| 시안 | (연기하듯) 넌 바로 해고될 것이다! |
| 마에스트로 | 연주자는 좋은 연주를 보여주면 되지만 지휘자의 좋은 지휘란···. |
| 맥시밀리언 | 좋은 지휘자의 좋은 지휘란요?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좋은 지휘자는 어떤 지휘자지? |
| 시안 | 좋은 음악을 만드는 지휘자요. |
| 마에스트로 | 조금 더 구체적으로. |
| 시안 | 교향악의 경우 교향악단의 능력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겠죠. |
| 마에스트로 | 그것도 맞는 얘기긴 하지. |
| 맥시밀리언 | 좋은 지휘를 하는 지휘자 아닌가요? |
| 시안 | 다시 돌아가네. |
| 마에스트로 | 좋은 연주자의 연주는 좋은 연주야. |
| 좋은 지휘자란? 아니, 좋은 지휘란? 좋은 지휘자와 지휘는 동일해? | |
| 둘은 같은 의미일 수 있나? | |
| 맥시밀리언 | 잠깐, 잠깐! 마에스트로, 숨차요. |
| 시안 | (느리게) 좋은 지휘··· 좋은 지휘자···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좋은 지휘를 하는 사람이 좋은 지휘자겠죠. |
| 시안 | 하지만 좋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녜요. |
| 단원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좋은 지휘자는 아니겠죠. | |
| 마에스트로 | 좋은 사람이 쓸모없는 시대가 됐어. |
| 시안 | 사실인걸요.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래요. |
| 카리스마 있고 매력 있는 독재자, 따뜻하고 모두를 품어주는 좋은 사람. | |
| 당신의 선택은? | |
| 맥시밀리언 | 독재자. |
| 마에스트로 | 내가 어느 지휘자의 얘기를 시작할 건지는 알겠지? |
| 맥시밀리언 | 하지만 지휘자 지망생 백 명한테 물어보세요! |
| 시안 | 리스너들한테도 물어보세요! 누가 더 매력적인가요? |
| 마에스트로 | 매력, 중요하지. |
| 시안 | 좋은 사람과 좋은 예술가는 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요. |
| 오히려 예술가는 괴짜인 게 어울리죠. | |
| 자기만의 특별한 의식을 치른다거나, 버릇이 있다거나, 고집이 있거나. | |
| 마에스트로 | 하지만 얘들아, 너희가 곤경에 빠졌을 때 말야. |
| 시안 | 네. |
| 맥시밀리언 | 잘못 같은 거 말씀이시죠? |
| 마에스트로 | 아니, 아니. 법적 분쟁, 공적 잘못, 이런 거 말고. |
| 예술적 빈곤과 곤궁, 곤란에 빠졌을 때 말야. | |
| 시안 | 네. |
| 마에스트로 | 너희를 구해주는 건 사람들이 말하는 매력이나 카리스마가 아니야. |
| 그것들은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너희를 더 고립시킬 뿐이야. | |
| 시안 | 하지만 지휘자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필요하잖아요? |
| 마에스트로 | 그럼, 물론이지. 하지만 시안, 길게 봐. |
| 시안 | 길게요? |
| 마에스트로 | 길게. 그것들은 지나가는 것들이야. |
| 예술가인 너를 지탱해 주는 건 결국 애정이야. | |
| 인간에 대한 애정. 타인에 대한 애정. 타인을 향한 호의. 관용. | |
| 네 음악이 빈곤해진다면 그건 네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어서야. | |
| 네가 더는 좋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 |
| 사이 | |
| 시안 | 맞아요,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내가 또 너무 정답 같은 얘기를 했구만. |
| 맥시밀리언 | 좋은 지휘는··· 좋은 콘서트 그리고 리허설. |
| 마에스트로 | 그렇지. |
| 시안 | 맞아, 리허설! |
| 맥시밀리언 | 지휘자는 관객과 단원 모두에게 평가받는다. |
| 시안 | 지휘자는 음악가지만 음악을 만드는 과정을 심판받는 유일한 존재다. |
| 마에스트로 | 멋지네! |
| 시안 | 전 또 부족하네요. |
| 맥시밀리언 | 어째서? |
| 시안 | 난 리허설을 못하잖아. |
| 맥시밀리언 | 네가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자신감이 없어서 그렇잖아. |
| 시안 | 내가 언젠가 리허설을 했을 때, 베이시스트가 그랬어. |
| 4악장을 해야 했거든. 포쓰 무브먼트. | |
| 그래서 내가 그랬지. 포쓰 무브먼트! | |
| 그랬더니 그러는 거야. 퍼스트? 포쓰? | |
| 나는 다시 포쓰라고 할 자신이 없었어. | |
| 그래서 라스트 원이라고 했지! | |
| 맥시밀리언 | 라스트? 좋은 선택을 했는데, 왜! 똑똑해! |
| 마에스트로 | 아니지, 부딪혔어야지. 당당하게 소리쳤어야지. |
| 시안 | 그죠? 심지어 그 곡이 뭐였는지 알아? |
| 맥시밀리언 | 뭐였는데? |
| 시안 | 비밀. |
| 맥시밀리언 | 뭐야! 너 이상해. |
| 시안 | 갑자기 부끄러워졌어. 말 안 해줄래. |
| 맥시밀리언 | 이상해. 어쨌든 라스트라고 한 것도 멋진 선택이야. |
| 시안 | 아니야. 난 알아. 그때 난 붙잡고 늘어졌어야 했어. 포쓰! 포쓰 무브먼트! |
| 그 뒤로도 난 자주 도망쳤거든. | |
| 시안, 마에스트로를 쳐다본다. | |
| 마에스트로 | 내가 잘 알지. |
| 시안 | 또 그만큼 도망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
| 마에스트로 | 그것도 잘 알지. |
| 두 번 물러나면 한 번은 앞으로 전진. 그럼 됐어. 그렇게 가는 거야. | |
| 그렇게 물러나고 나아가다 보면 언젠간 분명 나아져 있겠지. | |
| 시안 | 어떤 일들을 시도하는 것도 그래요. |
| 마에스트로 | 너희 둘 다. 용기가 더 필요해. |
| 맥시밀리언 | 조금 더 완벽했을 때 보여드리고 싶은걸요. 그치, 시안? |
| 시안, 고개를 끄덕인다. | |
| 마에스트로 | 그렇게 해서는 영영 할 수가 없어. |
| (맥시밀리언에게) 그래도 곧잘 해내잖니. | |
| 맥시밀리언 | 안 하면 기회는 없잖아요. 지금이 지나면 기회는 없는걸요. |
| 이 시간이 지나면 이 시간의 기회는 사라져요. | |
| 마에스트로 | 음악처럼.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시안에게) 음악처럼.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이 순간과 함께 사라지는 음악처럼요. (짧은 사이) 맞아요. |
| 마에스트로 | 우리의 이 순간도 사라지고 있어. |
| ··· 나는 너무 늙고 수많은 순간을 흘려보냈는데도 아까워, 이 시간이. | |
| 그래서 너희와 더 치열하게 이야기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싶어. | |
| 시안 | 저희도요. |
| 맥시밀리언 | 저도요, 마에스트로. |
| 사이 | |
| 시안 | 좋은 지휘자는요, 내 안에 있는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 아닐까요? |
| 맥시밀리언 | 그건 많이 있는 말인데. |
| 시안 | 그렇긴 한데. 내 말뜻은 좀 달라. ··· 같을 수도 있지만. |
| 내 안에 흐르는 음악, 내 상상 속에만 있는 음악이 | |
| 내 지휘로 전달되는 거야. 내가 상상한 그대로 연주돼. | |
| 넌 안 그래? 정말 신기하게 내가 상상한 딱 그만큼만 연주가 돼. | |
| 맥시밀리언 | (옅게 웃으며) 알지. |
| 시안 | 내 말은 그 말이야. 그 음악이 내 지휘를 통해 |
| 내 안에서 나를 지나고 오케스트라를 지나 관객에게로 가는 거야. | |
| 누가 누구에게 지시를 받고, | |
| 누가 누구로부터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거야. | |
| 음악은 그런 거야. 투명한 순환. 나로부터 시작하는 순환. | |
| 내 안에서 시작하는··· 지휘자는 그걸 시작할 수 있잖아. 그래서 가치 있어. | |
| 맥시밀리언 | 벅차오른다. |
| 시안 | 그럼 우린 연결되는 거야.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야! |
| 우리 모두의 수없이 다른 모양새의 생들이 투명해져서 | |
| 단 하나의 음악만이 관통해. | |
| 우리는 하나의 순간과 하나의 감정을 느껴. | |
| 맥시밀리언 | 오직 이 순간에만 존재하고 사라지는, 그래서 아름다운. |
| 마에스트로, 옅은 웃음을 띤 채로 | |
| 가만히 시안과 맥시밀리언을 바라본다. | |
| 맥시밀리언과 시안, 서로를 가만히 바라본다. | |
| 마에스트로, 턴테이블로 가 LP판을 하나 꺼내 올려놓는다. | |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2악장이 흘러나온다. | |
| 7장 | |
| 맥시밀리언 | (관객에게) 아버지의 법정은 집입니다. |
| 이 법정에서 아버지는 변호사가 아니라 판사입니다. | |
|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 |
|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변호사의 일을 맡깁니다. | |
| 모두에게 싸움을 걸고 모두와 논쟁을 벌입니다. | |
| 그리고 그것을 지적 유희라 여깁니다. | |
| ··· 그러나 법정은 집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집이 없습니다. | |
| ··· 그래서 나는 음악을 사랑합니다. | |
| 흔한 말이지만 음악에는 말이 필요 없으니까요. |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그래, 맥시밀리언. |
| 맥시밀리언 | 저도 언젠가는 브람스를 지휘할 수 있겠죠? |
| 마에스트로 | 그럼.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우리 셋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
| 시안 | 뭐예요? |
| 마에스트로 | 작곡가 중 브람스를 가장 좋아한다는 거지. |
| 맥시밀리언 | 그렇네요. |
| 시안 | (웃으며) 우리 모두 브람스를 사랑하네요. |
| 마에스트로 | 브람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
| 맥시밀리언 | 없겠죠? 그게 저와 시안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인가요? |
| 마에스트로 | 너희가 브람스를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건 아니지. |
| 그렇담 브람스를 가장 좋아하는 모든 지휘자가 여기에 있어야지. | |
| 맥시밀리언 | 그래도 브람스와 관련된 어떤 이유가 있는 거 아닌가요? |
| 마에스트로 | 그건 직접 찾아보는 게 어때? |
| 시안 | 난 네 브람스 정말 좋던데. |
| 맥시밀리언 | 정말로? 나도 네 브람스가 좋거든. |
| 시안 | 네 브람스, 정말 멋져. |
| ··· 그렇게 슬프고 아름다운 브람스는 정말로, 정말로 또 없어. | |
| 맥시밀리언, 시안의 말을 끊으며 마에스트로에게 | |
| 맥시밀리언 | 하지만 지금은 아니겠죠? 브람스요. |
| 마에스트로 | 아직은. |
| 맥시밀리언 | 왜요? |
| 마에스트로 | 넌 브람스에서만큼은 예외야. |
| 맥시밀리언 | 제가 브람스에 대해서 예외라는 말씀이신가요? |
| 마에스트로 | 응, 브람스를 대하는 너는 다른 작곡가를 대할 때와 달라. |
| 맥시밀리언 |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말씀이신 거죠? |
| 마에스트로 | 아냐, 그렇지 않아. 그렇게 쉽게 표현하지 마. |
| 맥시밀리언 | 제 생각엔 그런 것 같아서요. |
| 마에스트로 | 네가 브람스를 통해 보여주는 음악성은 풍부하고 아름다워. |
| 감상적이라는 말 따위로 폄하하지 마. | |
| 맥시밀리언 | 그런데 지휘를 할 수 없는 이유는요? |
| 마에스트로 | 시안 말대로 네 브람스, 아름답지. |
| 맥시밀리언 | 그리고요? |
| 마에스트로 | 지나치게 몰입했지.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넌 연주자가 아니야. 지휘자지. |
| 맥시밀리언 | 제가 이성을 잃는다는 말씀이신가요? |
| 마에스트로 | 넌 연주를 하고 있어. 거리를 둬야지. 전체를 보라고. |
| 네가 그 안에 빠져 있어. 그것도 지나치게. | |
| 맥시밀리언 | 지휘자도 음악가입니다. |
| 마에스트로 | 넌 사제야. 전달해야 한다고. 작곡가의 음악을 전달하는 거야. |
| 너를 지우고 음악을 전달할 임무를 갖고 있다고. | |
| 맥시밀리언 | 제가 만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
| 마에스트로 | 잠깐, 잠깐. 전부 틀렸어. |
| 맥시밀리언 | 전부요? |
| 마에스트로 | 지휘하는 동안 음악을 듣나? |
| 맥시밀리언 | 전 제 음악의 관객이 될 수 없는 건가요? 전 지휘자인걸요! |
| 마에스트로 | 아, 지휘자가 음악의 첫 번째 관객이다, 이런 말인가? |
| 맥시밀리언 | 안 될 것도 없죠! |
| 마에스트로 | 영화감독은 자기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이고, |
| 연극연출가도 자기 연극의 첫 번째 관객이고, | |
| 자, 그럼 이제 지휘자도 자기 음악의 첫 번째 관객일까요? | |
| 아, 그런데 나는 무대에 올라가네요? 이런 젠장! | |
| 영화감독이랑 연출가도 포디움으로 올라오라고 해 그럼! | |
| 맥시밀리언 | 지휘자는 음악을 듣습니다. |
| 마에스트로 | 정말? |
| 맥시밀리언 | 네? |
| 마에스트로 | 정말이냐고.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지휘자가 지휘하는 동안 정말 음악을 들어? |
| 맥시밀리언 | ··· 듣기는 하죠. |
| 마에스트로 | 넌 지금까지 뭘 배운 거야? |
| 맥시밀리언 | 듣지 말고 지휘하라는 말씀이시죠? |
| 마에스트로 | 지나가는 거지. |
| 맥시밀리언 | 네···. |
| 마에스트로 | 듣는 게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중이라고. |
| 빚는 중이야. 빚는 중인데 뭘 들어! | |
| 듣는 건 리허설에서 끝내! | |
| 맥시밀리언 | (웃으며) 알겠어요, 마에스트로. |
| 시안 | (덤덤하게) 브람스를 사랑하는 사람은 슬픔을 알거든요. |
| (웃으며) 맥시밀리언이랑 슬픔은 영 어울리지 않는데. | |
| 맥시밀리언 | 나도 마음속에 슬픔이 많은 사람이야, 왜 이래. |
| 마에스트로 | 그래, 맥시밀리언도 슬픔이 있어. |
| 맥시밀리언 | (가볍게) 역시 마에스트로는 알아보셨군요. |
| 마에스트로 | 그럼. 네 안에는 아주 깊은 슬픔이 있지.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 아주 깊지는 않습니다. |
| 마에스트로 | 아주 깊지는 않다? |
| 맥시밀리언 | 전 우울증 환자가 아녜요. |
| 마에스트로 | 난 너에게 우울증 환자라고 한 적 없어. |
| 시안 | 맥시밀리언. |
| 맥시밀리언 | 하지만 제 슬픔이 깊다고 하셨잖아요. |
| 마에스트로 | 네 슬픔은 깊은 게 맞구나.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전 슬플 이유가 없어요. 제가 왜 슬픈가요? |
| 전 전부 가진걸요. 마에스트로도 이미 아시잖아요. | |
| 전 키도 크고, 잘생겼고, 음악 영재에, 집안도 좋고, 부자죠. |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얘야, 지금 네가 내 마음을 찢어지게 하고 있단다. |
| 긴 사이 | |
| 시안 | 맥시밀리언, 네가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너를 사랑해. |
| 맥시밀리언 |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네가 나로 살아봤어?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 제가 슬플 때 누가 절 위로해 주나요? |
| 아무도 없어요. 인간이요? 아뇨, 전 인간 때문에 고통스러워요. | |
| 인간이 저를 죽게 만들어요. | |
| 근데 음악이 남아요. 인간이 만든 음악이 저를 살려요. | |
| 저를 죽이고 싶은 살의와 아무것도 나아질 수 없다는 절망. | |
| 매일 이 지독한 우울과 고통과 환멸이 지속될 거라는 또 절망. | |
| 거기에서 제가 만난 게 뭔지 아세요? 브람스예요. | |
| 제가 홀로 눈물 흘릴 때요, 저와 같이 울어준 건 브람스예요. | |
|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인 브람스가 만든 인간이 아닌 음악이에요. | |
| 제가 울음을 그친 건요! 그건 브람스 때문이에요. | |
| 저는 인간이 싫어요. 인간이 혐오스러워요. | |
| 단 한 명도 이 지구상에 제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요. | |
| 절망적이죠. 비극이고요. 괜찮아요. 브람스가 있잖아요. | |
| 브람스가 저를 대신해 울어주잖아요. | |
| 제가 이렇게 울고 있잖아요. | |
| 울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저와 같이 울어주잖아요. | |
| 저 대신 더 크게 울어주잖아요! | |
| 이 지독한 인간들 사이에서 죽지 말고 살아남으라고! | |
| 살아남아서 나를 만들어 전달하라고. | |
| 너를 닮아 슬픈 또 다른 인간에게 나를 보내라고. | |
| 브람스가 필요한 또 다른 사람에게 브람스를 보내주라고. | |
| 그래서 그 사람이 죽는 대신 살게 하라고···. |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살아서, 죽는 대신 살아남아서 다행이었다고, |
| 매일이 절망과 고통뿐인 삶이었지만, 죽는 대신 살아남아서 다행이었다고. | |
| 브람스가 나를 위해 노래해 주겠다고···. | |
| 긴 사이 | |
| 맥시밀리언, 조용히 턴테이블로 가 LP를 꺼내 올려놓는다. | |
| 흘러나오는 〈브람스 4번〉 2악장 | |
| 8장 | |
| 시안 | (관객에게) 잘하고 싶었습니다. |
| 전 무엇도 쉽게 가져본 적 없습니다. | |
|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엄마를 무척이나 졸라야 했고 | |
| 피아노를 사기 위해서는 더 졸라야 했고 | |
| 피아노를 더 배우기 위해서는 비굴해져야 했고 | |
| 음악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비참해져야 했습니다. | |
| (짧은 사이) 누군가에게는 음악이 마냥 잘해 내기만 하면 되는, | |
| 모든 가족의 지지와 응원을 받으면서, 대접받으면서 하면 되는, | |
| 그런 일이지만 제게는 아니었습니다. | |
| 사이 | |
| 시안 | (밝게) 저는 그래서 맥시밀리언이 아주 많이 부러웠어요. |
| 맥시밀리언 같은 부류들은 저와 다르다고 생각했거든요. | |
| 그런데 어쩌면요, 우리 삶의 모양새가 모두 다르듯 | |
| 우리 슬픔의 모양새도 모두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 |
| 사이 | |
| 시안 | 전 여전히 브람스를 좋아하고, |
| 맥시밀리언도 언제까지나 브람스를 좋아할 테고, | |
| 친애하는 나의 마에스트로 또한 그럴 테죠. | |
| 마에스트로 | (시안에게) 브람스는 어디에 있지? |
| 시안 | (마에스트로에게) 하늘과 땅 사이. |
| 맥시밀리언 | (손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여기, 여기 어딘가. |
| 마에스트로 | 그렇지. 거기. |
| 시안 | 땅 위에는 없는 음악. |
| 맥시밀리언 | 그렇다고 하늘에 떠 있지도 않은 음악. |
| 시안 | 인간은 아니지만, |
| 맥시밀리언 | 신도 아니고, |
| 시안 | 그렇다고 천사도 아닌데, |
| 마에스트로 | 브람스지. 브람스는 그냥 브람스야. 브람스 그 자체야. |
| 시안 | 두 개의 이야기가 흘러가다 하나가 돼요. |
| 하나가 되었다 다시 흩어지고 다시 만났다 | |
| 서로를 껴안았다 사랑했다 헤어졌다 신에 의해 다시 결합하고 | |
| 눈물 나게 아름답다는 말은 오직 브람스에서만 쓸 수 있어요. | |
| 맥시밀리언 | 〈브람스 1번〉이요. 〈베토벤 10번〉이라고 하잖아요. |
| 전 그 말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어요. | |
| 브람스는 브람스일 뿐인데! 이걸 베토벤이라고 말한다고? | |
| 베토벤이 위대한 걸 알지만 난 브람스를 더 사랑해. | |
| 마에스트로 |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시안은 오페라를 사랑하고 |
| 말로부터 도망치는 맥시밀리언은 교향악을 사랑하고 | |
| 그렇게 땅 위에 두 발 붙이지 못하는 둘은 브람스를 사랑하네 |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는요? 그럼 마에스트로는 어째서 브람스를 사랑하세요? |
| 마에스트로 | 나?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어렸을 땐 너희들처럼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해서. |
| 저기 먼 어딘가로 자꾸 발을 내디뎌서. | |
| 그 먼 어딘가가 현실에서는 절벽이었거든. | |
| 근데 현실에 살지를 못하니까 자꾸 절벽에 발을 내딛는 거야. | |
| 거기를 걸어가려고 하는 거야. | |
| 시안 | 그래서요? |
| 마에스트로 | 하나만 있으면 돼. 두 개도, 세 개도 필요 없어. 딱 하나만 있으면 돼. |
| 그 절벽에서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게 해줄 딱 하나만 있으면 돼. | |
| 맥시밀리언 | 그게 바로, |
| 마에스트로 | 음악이고, 브람스. |
| (웃으며) 자기는 허공에 있으면서 나한테는 ‘떨어져, 물러서!’ 소리쳐. | |
| (맥시밀리언에게) 네가 그랬지? 브람스가 너를 대신해서 울어줬다고. | |
| 맥시밀리언 | 네. |
| 마에스트로 |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
| 장담하건대 브람스가 그대를 위해 단 한 번이라도 울지 않을 이가 없으리. | |
| 시안 | 슬픔을 아는 자만이 슬퍼하는 자를 위로해 주리. |
| 맥시밀리언 | 슬픔을 아는 자가 슬퍼하는 이를 위로해 주리.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위로하는 거, 위선적이에요. |
| 마에스트로 | (웃으며) 위선적? |
| 맥시밀리언 | 질투도 나고요. |
| 마에스트로 | 질투? |
| 맥시밀리언 | 전 마냥 행복한 사람들 보면 질투 나고 화나요. |
| 저만 불행하고 우울한 것 같아서요. | |
| 저만 고통 속에서 매일 버티는 것 같아서요. | |
| 근데 저렇게 행복하신 양반들이 날 위로해 준다? 사양할래요. | |
| 마에스트로 | (맥시밀리언의 어깨에 손을 갖다대며) 사양해. |
| 맥시밀리언 | 네? |
| 사이 | |
| 맥시밀리언 | (예상 밖이라는 듯) 진짜 사양해요? |
| 마에스트로 | 응, 사양해. (짧은 사이) 대신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
| 시안 | 이건 예상 밖인데요? |
| 마에스트로 | 왜? ‘받아줘! 호의를 받아줘야지, 아가야.’ 할 줄 알았어? |
| 시안 | 네. |
| 마에스트로 | 나 참. |
| 맥시밀리언 | 정말 거절할게요? |
| 마에스트로 | 그럼, 네가 제일 소중한걸.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넌 지휘자야. 예술가라고. 맘에 들지 않는 걸 거절할 줄도 알아야지. |
| 네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가 나올 땐 정확히 말하잖아. | |
|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렇게 고쳐요.’ | |
| 맥시밀리언 | 정말 그래도 되죠? |
| 마에스트로 | 시안. |
| 시안 | 네,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알겠지? |
| 시안 | (웃으며) 아뇨. |
| 마에스트로 | 거절해야 해. 싫다고 해야 해. 좋기만 할 수는 없어. 너를 지켜야만 해. |
| 시안 | 그게 어려워요. |
| 마에스트로 | 왜, 무엇이 어려워? |
| 시안 | 싫다고 하는 게요. |
| 마에스트로 | 왜? |
| 시안 | 아무래도 전 동양인이기도 하고, |
| 마에스트로 | 너 아주 비겁하구나. 네가 동양인이라서 그렇다고? |
| 시안 | (짧은 사이) 아니죠. |
| 마에스트로 | 싫다고, 아니라고 하는 게 왜 어렵지? |
| 시안 | ··· 글쎄요. |
| 마에스트로 | 넌 그거에 대해 생각해 보기는 했어? |
| 시안 | ··· 네. 하지만 답을 내리지는 못했어요. |
| 마에스트로 | 네 생각은 뭐야? |
| 시안 | 전 싸우는 게 싫어요. |
| 마에스트로 | 지금 이렇게? |
| 시안 | 네. |
| 마에스트로 | 이건 싸우는 게 아니야.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거지. |
| 시안 |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아요. |
| 사이 | |
| 시안 | 그리고 저는 서른 살이 넘었어요, 마에스트로. |
| 더는 어린 시절의 일이나 자라온 환경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되었다, | |
| 라고 말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어요. | |
| 마에스트로 | 나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말하는데! |
| 시안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저를 지키는 방법이었어요,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네가 싫다고 말해도 아무도 널 죽이지 않아. |
| 맥시밀리언, 웃음이 터진다. | |
| 맥시밀리언 | (웃음을 참으며) 죄송해요. |
| 시안 | (웃으며) 아무도 절 죽이진 않죠. |
| 마에스트로 | 그래! 아무도 죽이지 않아. |
| 시안 | 대신에 절 미워하겠죠. |
| 사이 | |
| 시안 |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어요. |
| 내게 싫다, 아니다, 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 |
| 마에스트로 | 무자격자들이 판치는 세상이야! |
| 시안 | 사실 그 사람이 저를 미워해도 뭐 어때요! |
| 저는 이미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데요. | |
| 맞아요, 그런데도 저는 그게 두려워요. | |
| 마에스트로 | 이 아가씨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
| 맥시밀리언 | 아무래도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보내야겠어요. |
| 시안 | 뭐라구? |
| 맥시밀리언 | 거기에서 크고 작은 고통을 겪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
| 시안 | 아직 청소년인 주제에. |
| 맥시밀리언 | 용서해 주세요, 부인. |
| 마에스트로 | 시안. |
| 시안 | 네,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어쩌면 넌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도 없을지 모르겠구나. |
| 누구에게 기대본 적도 없겠지. |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사랑은 함께 하는 거거든. 진실로. |
| ···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조차 나누는 거거든. 진실로. | |
| 둘이 하는 게 사랑이야. 둘이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게 사랑이야. | |
| 싫다고 말을 해야 싫다는 의미를 갖게 되는 거야. | |
| 혼자 미워하는 건 증오에 가깝지. | |
| 시안 | (옅게 웃으며) 없어요.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그래, 서른은 아직 너무 어려! |
| 사랑도 해야 되고, 싫다는 말도 배워야 하고, | |
| 맥시밀리언 | 청소년 오케스트라도 지휘해야 하고, |
| 마에스트로 | 좋은 지휘자가 되려면 싫다고 말하는 법부터 연습해. |
| 안 그럼 넌 빵점 지휘자야. | |
| 싫어요, 소리가 싫어요, 활 쓰는 게 싫어요, 더 짧게, 싫어요! | |
|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안 돼요! 그렇게 말고요! 알겠어요? | |
| 시안 | (웃으며) 네. |
| 맥시밀리언 | (웃으며) 싫다고 해야지! |
| 시안 | (웃으며) 싫어, 좋다고 할 거야. |
| 사이 | |
| 마에스트로와 맥시밀리언, 시안을 바라본다. | |
| 시안 | (관객에게) 브람스는 어디를 향해 갔던 걸까요? |
| 거긴 도대체 어디고 무엇이 있던 걸까요? 아니, 그가 알긴 했을까요? | |
| ··· 솜사탕이요. 솜사탕 같은 걸 잡으려 했던 건 아닐까요? | |
| 어쩌면 잡으려 했던 것도 아니고, | |
| 그냥, 손을 폈다가 혼자 접어버린 거 아닐까요? | |
| 그건 잡아버리면 녹아버릴 거라서요. | |
| 사이 | |
| 시안 | 음악은요, 그런 걸까요? |
| 사이 | |
| 시안 | 제가 틀렸네요. 음악은 잡히지 않네요. |
| 음악은 잡히지조차 않네요. 제가 틀렸어요. | |
| 자! 우리는 잡히지조차 않는 걸 쫓아가네요. | |
| ··· 그런데 꼭 잡아야 하나요? | |
| 잡아서 소유하고 부수고 깨뜨려야만 하나요? | |
| 잡는다는 건 아무리 좋아진다 해도 결국은 부수게 되니까요. | |
| 그것만이 인간의 길인가요? | |
| ··· 그러니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 |
| 잡히지 않는 걸 쫓는 이 순간들이. | |
| 9장 | |
| 마에스트로 | 이제 슬슬 헤어질 시간이 되어가는구나. |
| 맥시밀리언, 머뭇거린다. | |
| 마에스트로 | 뭐가 불편하지, 맥시밀리언? |
| 맥시밀리언 | 저희 중에 부지휘자를 정하셨나요? |
| 마에스트로 | 그럼.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오늘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리고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의 마음은 대개 변하지 않죠. |
| 마에스트로 | 응, 난 대부분 처음의 것을 고집하지. |
| 시안 | 그럼 저희가 이 자리에 온 건 무슨 의미를 갖는 건가요?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무슨 의미를 갖느냐···.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의 말씀대로 이미 부지휘자가 정해져 있었던 거라면 |
| 우리가 지금까지 나눈 논쟁과 이야기들이 무슨 의미를 갖는 건가요? | |
| 마에스트로 | 너희들이 원할 만한 답. 첫 번째 답이 되겠군. |
| 그럼에도 난 이 시간을 통해 부지휘자를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 |
| 시안 | 그렇다면 이해가 돼요. |
| 마에스트로 |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 |
| 맥시밀리언 | 더 중요한 이유는요? |
| 마에스트로 | 없어.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없다구. |
| 시안 |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없어. 뭔가 거대한 이유가 있길 바랐어? |
| 맥시밀리언 | ··· 없을 수도 있죠. 저희와 이야기 나누길 바라셨을 수도 있죠. |
| 마에스트로 | 이유가 없다는 게 이유야. |
| 시안 | 그냥 저희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단 거죠? |
| 마에스트로 | 아니? 그냥 너희와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아니! |
| 시안 | 그럼요? |
| 마에스트로 | 예술은 그래!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지휘가 얼마나 의미 없어! |
| 지휘자 없이 오케스트라끼리 연주하는 거 들어봤겠지? | |
| 잘해. 잘들 한다고! 가끔은 놀란다니까. | |
| 어느 지휘자의 연주보다 훨씬 좋아서 나도 깜짝깜짝 놀라. | |
| 슬프지만 지휘는 의미가 없는 일이야. |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지휘가 뭐겠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냥 손짓이야. |
| 발광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야. | |
| ‘뭐야, 저 사람 왜 춤을 추고 있어? 혼자 쇼하고 있네!’ | |
| 이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는 지휘야. | |
| ‘지휘자가 왜 필요해? 그냥 멋으로 있는 거 아냐?’ | |
| 그것도 맞는 말이지! 예술은 무용해. 예술은 무용하다고. | |
| 지휘만 그런 게 아니야. | |
| 예술 밖 진짜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 |
| 모든 예술은 전부 놀음이야. 사기고! |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우리는 무용한 지휘에 대해 긴 시간 동안 치고박고 싸우고 울고 웃었어. |
| 사람들이 보기에 어떻겠니. 참으로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구나! | |
| 난 너희들에게 예술이 얼마나 무용한지 보여주고 싶었어. | |
| 그리고 또 보여주고 싶었단다. 그 무용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 |
| 무용하여 예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 |
| 그리하여 그 무용함이 절벽으로 내몰려 있는 인생들을 | |
| 결국에는 살아남게 한다는 걸. | |
|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 나눈 이 시간이 평생 우리를 살아남게 한다는 걸. | |
| 사이 | |
| 시안 | 제가 지휘하는 일도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겠죠? |
| 누구를 살리는 정도가 되지 않아도, | |
| 마에스트로 | 최소한 너를 살릴 수는 있잖니. |
| 시안 | 그렇네요. |
| 마에스트로 | 맥시밀리언. |
| 맥시밀리언 | 네,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계속해. 계속 지휘하라고. |
| 맥시밀리언 | 제 언어는 음악이니까요. |
| 마에스트로 | 그럼. 너처럼 사유할 수 있는 애들은 많지 않아. |
| 듣기 싫은 얘기겠지만, 넌 슬픔이 뭔지 아는 아이란다. | |
| 그게 네가 살기 위해 음악을 해야만 하는 이유야. | |
| 너의 슬픔이 음악이 되어 너를 위로하고, | |
| 또 다른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는 거,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니? | |
| 맥시밀리언 | 감사합니다.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부지휘자는 맥시밀리언이야. |
| 긴 사이 | |
| 맥시밀리언 | 정말··· 인가요,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그래. |
| 시안 | 축하해, 맥시밀리언.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기뻐할 줄 알았는데. |
| 맥시밀리언 | 너무 기뻐요, 다만···. |
| 마에스트로 | 시안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
| 긴 사이 | |
| 마에스트로 | 시안, 넌 빈으로 갈 거야. |
| 시안 | 빈이요? |
| 마에스트로 | 빈에 네 자리를 마련해 뒀어. |
| 시안, 울음이 터진다. | |
| 마에스트로 | (시안의 어깨를 잡으며) 그곳에 네 부지휘자 자리가 마련되어 있단다. |
| 시안 | 감사합니다, 마에스트로. |
| 마에스트로 | 여기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연주를 하게 될 거야. |
| 내 제자가 상임지휘자로 있는데, 그 애는 다른 악단으로 곧 떠날 거거든. | |
| 넌 많은 콘서트를 소화해야만 할 거야. | |
| 시안 | 감사합니다. |
| 마에스트로 | 너는 나를 떠나고, 여기를 떠나 모든 걸 잊고, 음악을 즐기면서 살아. |
| 알았지? | |
| 맥시밀리언 | 축하해, 시안. |
| 시안 | 고마워, 맥시밀리언. |
| 맥시밀리언 | (마에스트로에게) 제가 빈으로 가면 안 돼요? |
| 마에스트로 | 넌 여기에서 나랑 평생 있자, 꼬마야. |
| 맥시밀리언 | 으, 엄마에 이어 마에스트로라니···. |
| 마에스트로 | 그리고 내가 말해뒀단다. 너의 데뷔는 〈브람스 교향곡 1번〉으로 하라고. |
| 시안 | 〈브람스 교향곡 1번〉이요? |
| 마에스트로 | 왜, 두렵니? |
| 시안 | 2번이나 4번은 제가 좋아하기도 하고, 해본 적도 있고, |
| 3번만 되어도 괜찮고요. | |
| 1번은··· 요즘 시대에 이런 말은 별로지만 지나치게 남성적이에요. | |
| 마에스트로 | 그래. 아무도 보여주지 못한 걸 보여줘. 너에겐 그럴 에너지가 있어. |
| 남성적이라는 말 대신 지배적이라고 말해보자. | |
| 넌 음악의 중력을 지배할 줄 알아. 그러니 네가 한 번 보여줘 봐. | |
| 신에게 맞서는 거대한 인간으로서의 운명과 용기를 보여줘. 지지 말고. | |
| 네가 그렇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동양 여성 지휘자로서, 보여줘 봐! | |
| 시안 | 네, 해볼게요. |
| 맥시밀리언 | 완전히 부럽네. |
| 시안 | 십 년은 기다려라, 꼬마야. |
| 맥시밀리언 | 음악에 꼬마란 없어. |
| 사이 | |
| 마에스트로 | 하지만··· 시간은 쉬이 이길 수 없단다. |
| 모두 옅게 웃는다. | |
| 맥시밀리언과 시안, 밝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 |
| 점점 어두워지는 조명, | |
| 오직 마에스트로에게만 옅게 남는다. | |
| 마에스트로, 아주 따뜻하고, 또 따뜻하게 말한다. | |
| 마에스트로 |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 아주 많이. |
| 왜냐면 그들은 또 아주 많이 떠나갈 거거든. | |
| 아주 많이 만들어도 아주 많이 떠나가니까 결국 남는 건 얼마 안 되지. | |
| 그러니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해. | |
| 그래야 떠나고 남은 얼마 안 되는 사랑이 우리를 지탱해 주지 않겠어? | |
| 나는 너희를 사랑한단다. | |
| 얼마 못 가 나는 너희들에게 박제된 어느 찢겨진 달력으로 남겨지겠지만, | |
| 그럼에도 너희들을 아주 많이 사랑한단다. | |
| 너희는 나를 잊어야 한다. | |
| 살아있는 것은 죽은 것을 잊어야 해. 냉혹해 보여도 그래야만 해. | |
| 살아있는 것은 죽은 것을 놔줘야 해. 그것이 삶이야. | |
| 살아있는 것은 지속되어야지 정체되어서는 안 돼. | |
| 죽은 것을 위해 살지 마. | |
| 음악이 순환이라고 얘기했지? 인생도 순환이야. | |
| 죽음 뒤에 삶이, 삶 뒤에 죽음이. | |
| 그러니 하나가 끝나면 하나를 놔줘야 다른 하나가 또 시작되는 거야. | |
| 너희들은 계속 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돼. | |
| 나를 부디 잊어다오. 아주 가끔 내 음악을 떠올려 줘. | |
| 그거면 됐어. | |
| 부디 산 것을 위해 살아줘. | |
| 살아있는 너희 자신을 위해 살아줘. | |
| 치열하게. 사랑스럽게. 음악처럼! | |
| 어느새 자리에 앉아있는 맥시밀리언과 시안. | |
| 두 사람을 바라보는 마에스트로. | |
| 천천히 퇴장하는 맥시밀리언과 시안, | |
| 홀로 무대에 남은 마에스트로. | |
| 마에스트로, 천천히 LP판을 올린다. | |
| 〈브람스 교향곡 4번〉 4악장 흘러나온다. | |
| 거대하고 낡은 의자에 앉는 마에스트로. | |
| 점점 어두워지는 조명, | |
| 남아 흐르는 음악. | |
| - 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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