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럴까
- 작성일 202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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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럴까
최원종
등장인물
현우 (남편, 38세)
수연 (아내, 39세)
장소
결혼식 피로연장
서울타워 전망대
에덴파크 모텔방
현우와 수연의 아파트
병원의 입원실
돌잔치 뷔페 홀
| *** | |
| 프롤로그 - 결혼식장 | |
| 정장 차림의 두 남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 |
| 자줏빛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등과 | |
| 짙은 감색 정장 슈트를 입은 남자의 등. | |
| 둘은 나란히 함께 서 있지만, 뒷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인다. | |
| 두 사람이 바라보는 저 앞쪽의 풍경은 | |
| 화려한 불빛들로 가득해 눈이 부시다. | |
| 그 불빛 속에서 사람들의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 |
| 잠시 후, 신랑 신부 행진곡이 울리며 | |
| 암전. | |
| 1장. 결혼식 피로연장 | |
| 홀로 테이블에 앉아 있는 현우. | |
| 그의 뷔페 접시에는 단출하게 초밥 몇 개가 올려져 있다. | |
| 현우는 피로연장 넓은 홀 중앙 벽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 |
|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결혼식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 |
| 스크린으로는 현우의 친구 형석과 혜은이의 결혼식이 생중계되고 있다. | |
| 현우는 속이 더부룩한지, 가방에서 까스활명수를 꺼내 따서 마신다. | |
| 한 병을 마시고, 다시 한 병을 더 따는 현우. | |
| 수연이 뷔페 접시에 음식을 잔뜩 담아 들고 테이블로 온다. | |
| 수연은 까스활명수를 마시고 있는 현우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는 | |
|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 |
| 까스활명수를 홀짝이는 현우. | |
| 현우 | 이렇게 밥 먹고 있어도 되나. |
| 수연 | ··· |
| 현우 |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야. |
| 수연 | 보고 싶으면 저걸로 봐. |
| 현우 | 그게, 직접 보면서 손뼉도 치고 그래야지, 이렇게 보는 거하곤 다르지. |
| 기념 촬영도 해야 하고. | |
| 수연 | 까스활명수가 와인이니? 홀짝홀짝 마시게. |
| 현우 | 새벽에 고추장에 밥 비벼 먹었더니. |
| 수연 | 호박죽이라도 갖다 먹어. |
| 현우 | 어. 근데 기념 촬영은 해야 하지 않을까. 평생 남는 게 사진인데. |
| 이왕 온 거 얼굴도장은 확실히 박아야지. | |
| 수연 | 혜은이 뒤에서 찍게? |
| 현우 | 나 형석이 친구거든. 당연히 형석이 뒤에서 찍어야지. |
| 수연 | 나 배고파. 사진 찍는 게 중요해, 나 배고픈 게 중요해? |
| 현우 | 너 배고픈 게 중요하지. |
| 수연 | 그럼 앉아 있어. |
| 현우 | 응. 아니. |
| 수연 | 그럼, 가. 네 마누라 놔두고 가. 네 마누라가 여기 이렇게 혼자 앉아서 밥 먹고 있으면 참 불쌍해 보여서 좋겠다. |
| 현우 | 불쌍하긴. 그냥 결혼식에 왔으니까 결혼식을 보자는 거지. |
| 수연 | 스크린으로 봐. 다 생중계해 주는데. |
| 현우 | 괜찮아. 다 끝나고 사진만 찍지 뭐. |
| 수연 | (쳐다보는) |
| 현우 | 알았어, 알았어. 사진 안 찍어. 깨끗이 포기할게. |
| 수연 | 누가 뭐래? |
| 현우 | 너 화나면 무섭잖아. |
| 수연 | 내가 뭘 화내? 내가 뭐가 무서워? |
| 현우 | 배고플 때만. 배고프면 너 신경 예민해지잖아. |
| 수연 | 나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어. |
| 현우 | 응. 먹자. 저걸로 보면 되지. 먹어. |
| 음식을 먹는 두 사람. | |
| 피로연장 스피커를 통해 결혼식 중계가 들려온다. | |
| 사회 목소리 | 다음은 두 사람의 결혼을 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하여 서로의 사랑을 맹세하는 혼인 서약이 있겠습니다. |
| 주례 목소리 | 신랑 허형석 군과 신부 정혜은 양의 혼인 서약을 하겠습니다. 먼저 질문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답변해 주기 바랍니다. 먼저 신랑에게 묻겠습니다. |
| 신랑 허형석 군은 신부 정혜은 양을 아내로 맞이하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권태로울 때나 한결같이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 |
| 현우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 |
| 주례 목소리 | 신랑이 씩씩하게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
| 다음 신부 정혜은 양에게 묻겠습니다. 신부 정혜은 양은 신랑 허형석 군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기쁘나 슬프나 괴로우나 권태로우나 변함없이 남편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 |
| 수연 | (사레 걸려) 캑캑캑. |
| 현우 | (수연을 바라보는) |
| 수연 | 캑캑! |
| 주례 목소리 | 신부 정혜은 양이 수줍게 예!라고 맹세하였습니다. |
| 아무 말 없이 접시에 코를 박고 묵묵히 음식을 먹는 두 사람. | |
| 주례 목소리 | 오늘 내빈 여러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랑 신부가 혼인을 서약했습니다. |
| 이에 주례는 두 사람의 성혼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합니다. | |
| 수연 | 너 나하고 잘 때 혜은이 생각한 적 있지. |
| 현우 | (멀뚱멀뚱 있다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
| 수연 | 생각했구나. (눈을 가늘게 뜨며 눈웃음치는) 눈이 젖어 있네. |
| 현우 | (눈가를 닦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 수연 | 난 너하고 잘 때 다른 남자 생각 많이 했어. |
| 너처럼 한 사람만 생각하진 않았어. | |
| 현우 | ··· |
| 수연 | 너 쟤랑 (혜은이랑) 잤지? |
| 현우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 수연 | 너 나랑 헤어져도 그 말투 고쳐. 넌 할 말 없으면 꼭 그러더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야말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솔직해져 봐 좀. |
| 현우 | 무슨 말이야. 나같이 솔직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리고 넌 툭하면 나하고 헤어진다고 하는데, 나하고 헤어져도 그 버릇 고쳐. |
| 수연 | 알았어. 어차피 헤어지고 나면 헤어진다는 말 안 할 텐데 뭐. |
| 현우 | 넌 진짜··· |
| 수연 | 너하고 자면서 다른 남자 생각하는 나 자신이 싫어서 그래. |
| 그래서 헤어지는 거니까 너도 솔직해져 봐. | |
| 현우 | ···나도, 그래··· 흥분이 안 되면··· 너하곤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면··· |
| 나도 딴 여자애들 생각해. | |
| 수연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현우의 뺨을 때린다. | |
|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현우는 뺨을 감싸 쥔 채 얼떨떨할 뿐이다. | |
| 수연 | 나쁜 새끼. |
| 수연은 현우를 짧고도 강렬하게 쳐다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
| 태연하게 계속 식사를 한다. | |
| 수연 | 밥. |
| 현우 | 어? |
| 수연 | 먹자. |
| 현우 | 응··· |
| 수연 | 밥 먹고 결혼식 다 끝나고 기념 촬영하고, 그러면 우리가 부부로서 |
| 어떤 모임이나 행사에 동반 참석하는 것도 마지막이야. | |
| 현우 | 미안해.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나도 홧김에··· 네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
| 하니까 그러지. | |
| 수연 | 알아. 내가 이상하다는 거. 밥 먹어. 우리가 함께 먹는 마지막 결혼식 |
| 뷔페일 테니까. | |
| 피로연장 내 스피커에서 | |
| 결혼을 축하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린다. | |
| 사회 목소리 | 주례 선생님의 주옥같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은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가가 있겠습니다. |
| 축가가 흘러나온다. | |
| 밥을 먹는 두 사람. | |
| 현우 | 우리 결혼식 땐 축가도 없었는데. 축가가 참 좋은 거구나. |
| 수연 | 야외 촬영도 안 해서 사진도 없어, 우린 |
| 현우 | 그건 네가 돈 아끼자고, 필요 없다고 해서. |
| 수연 | ··· |
| 현우 | 네가 옵션에서 비눗방울이며 포그며 폭죽도 뺐잖아. |
| 수연 | 그만해. |
| 현우 | 내가 안개는 꼭 깔자고 했잖아, 포그. |
| 비눗방울은 빼도 안개는 있어야 한다고, 환상적인 결혼식을 위해서는. | |
| 수연 | 10년이 지나도 넌 어째 변하질 않냐. 까스활명수. |
| 현우 | 어? (가방 뒤지며) 10년 아니고 8년이거든. (까스활명수를 건네며) 여기. |
| 수연 | 몇 개나 갖고 다니는 거냐. 이런 거 좀 갖고 다니지 마. |
| 무슨 동네 약국이야. (따서 마시는) | |
| 현우 | 넌 벌써 세 접시야. |
| 피로연장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 | |
| 사회 목소리 | 그럼 신랑과 신부의 새 출발을 알리는 행진에 앞서, 신랑이 신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랑은 신부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해!라고 힘차게 세 번 외쳐 주세요. |
| 신랑 목소리 | 혜은아, 사랑해~ 혜은아, 사랑해~ 혜은아, 사랑해~ |
| 사회 목소리 | 신랑이 목이 아직 안 풀린 모양이네요. 목소리는 사랑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럼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신랑의 힘찬 고백을 들어 보겠습니다. 신랑~ |
| 신랑 목소리 | 혜~은~아~ 나 너 무지 사랑한다~ |
|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들. | |
| 사회 목소리 | 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신랑, 신부를 번쩍 들어 올리며 방금 전과 |
|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외쳐 주세요. ‘오늘 밤을~’ 그러면 신부는 | |
| 큰 소리로 ‘기대할게~’, 하고 외치는 겁니다. 세 번 해 보겠습니다. | |
| 신랑 목소리 | 오늘 밤을~ |
| 신부 목소리 | 기대할게~ |
| 신랑 목소리 | 오늘 밤을~ |
| 신부 목소리 | 기대할게~ |
| 신랑 목소리 | 오늘~ 밤을~ |
| 신부 목소리 | 기대~ 할게~ |
| 우레 같은 박수 소리와 폭죽 소리, 웃음소리 들. | |
| 수연 | (팔짱 끼고 시니컬하게) 저런 거 딱 싫어. |
| 현우 | 재밌잖아 (따라 하며) 오늘 밤을, 기대할게. |
| 수연 | (갑자기) 너 나 사랑하지 않지? |
| 현우 | 응? 아, 사랑하지. |
| 수연 | 아, 사랑하지? |
| 현우 | 왜 또. |
| 수연 | 왜, 사랑해,가 아니라 아, 사랑하지야. |
| 현우 | ···사랑하니까··· |
| 수연 | 왜, 사랑해,가 아니라 사랑하니까야? |
| 현우 | 그래, 사랑해. |
| 수연 | 왜, 사랑해가 아니라, 그래, 사랑해야? |
| 현우 | 알았어. 사랑해. 사랑해. 이젠 됐냐? |
| 수연 | 왜. 왜. 왜. 사랑해,가 아니라 알았어, 사랑해, 사랑해, 이젠 됐냐고냐고. |
| 현우 | 그만해. |
| 수연 | 사랑한다고 말해 봐. |
| 현우 | 지금까지 했잖아. 뭘 더 하라는 거야? |
| 수연 | 사랑한다고 말해 줘. |
| 현우 | (하려다) 지금은 안 나와. 집에 가서 해 줄게. |
| 수연 | ··· (우걱우걱 먹는) |
| 현우 | 그만 먹어. |
| 수연 | 너도 먹어. 배고파. 어제저녁도 굶고, 아침도 굶었어. 여기서 배 터지게 먹어야지. 축의금도 30만 원이나 했는데, 30만 원어치는 먹어야지. 먹어. |
| 현우 | 너 축의금 때문에 그래? |
| 수연 | 많이 먹어 주는 것도 축하야. |
| 현우 | 너 축의금 뽑으려고 그러는 거야? |
| 수연 | 응. |
| 현우 | 너 그렇게 돈이 좋아? |
| 수연 | 응. 나 돈이 좋아. |
| 현우 | 남편인 나보다 돈이 더 좋아? |
| 수연 | 응. 너보다 돈이 더 좋아. 네가 돈 많이 벌어 오면 네가 나을 수도 있지. |
| 현우 | 그럼, 돈하고 결혼하지 그랬냐? |
| 수연 | 글쎄 말이야. 돈하고 결혼할 걸, 바보처럼. |
| 현우 | ··· |
| 수연 | 뭐 해. 먹어. |
| 현우 | 싫어. |
| 수연 | 좀 조용히 말해. |
| 현우 | 큰 소리로 먼저 떠든 게 누군데. 지금 누구보고 조용하라는 거야? |
| 너나 입 좀 다물어. | |
| 수연 | 알았어. 입 다물 테니까 내 소원 하나만 들어줘. |
| 현우 | 소원? 내가 왜. |
| 수연 | 헤어지는 아내한테 그깟 소원 하나 못 들어줘, 남편이? |
| 그게 8년 동안 같이 산 남편이 취할 태도야? | |
| 현우 | 싫어. |
| 수연 | 아파트 너 가져. 너 줄게. |
| 현우 | 아파트 우리 부모님이 사 준 거잖아. |
| 수연 | 나한테도 조금은 권리가 있어. |
| 현우 | 그건 내 거거든. |
| 수연 | 냉장고도 줄게. 컴퓨터도 너 가져. 책도, 텔레비전도 줄게. |
| 현우 | 그거 다 내가 산 거라고. |
| 수연 | 8년 동안 직장 다닌 건 나야. 내 월급은 우리 생활비로 다 썼어. |
| 내 월급이 네 똥으로 다 나갔잖아. | |
| 현우 | 뭐, 똥? |
| 수연 | 그래 똥. 네 똥. |
| 현우 | 네 똥으로도 나갔거든. |
| 수연 | 그래, 네 똥 내 똥. |
| 현우 | 그래, 네 똥 내 똥. (어이없는) 많이 먹어라. |
| 수연 | 먹을 거야. (입에 한가득 넣고) 먹어. 돈 아깝잖아. 30만 원. |
| 현우 | 그만 좀 처먹어. |
| 수연 | 쟤들 우리 결혼할 때 얼마 냈는지 알아? |
| 현우 | ··· |
| 수연 | 3만 원. 둘이 와서는 3만 원 냈어. 그것도 너한테만. |
| 현우 | ··· |
| 수연 | 먹어. |
| 현우 | 그래. 먹자. 먹고 까스활명수 먹든가 토하든가. |
| 수연 | 너 결혼식장 화장실에서 토해 본 적 있어? |
| 현우 | 없어. |
| 수연 | 나도 없어. 오늘 토할 거야. |
| 현우 | 그래, 알았다. 많이 먹어라. |
| 수연이 고기를 먹으면서 운다. | |
| 현우 | 맛있냐? |
| 수연 | 맛있어. 고기 맛있어. 나 고기 좋아해. 많이 먹을 거야. 고기 다 내 거야. |
| 사람들의 박수 소리들. 결혼행진곡. | |
| 현우 | 또 왜 그래. |
| 수연 | 우는 거 아냐. 눈물이 그냥 나는 거지. |
| 현우 | ···울지 마, 뚝! |
| 수연 | 소원 들어줄 거야? |
| 현우 | 위자료 달라고? |
| 수연 | 나쁜 새끼! 이제껏 내가 너 먹여 살렸는데 너한테 위자료 달라고 할까. |
| 현우 | 알았어. 말해 봐. 무슨 소원인데. |
| 수연 | 죽어 줄래? |
| 현우 | ···?? |
| 수연 | 나하고 헤어지면. |
| 현우 | 내가··· 죽어야 해? |
| 수연 | 그래서 소원이라고 했잖아. |
| 현우 | 어떻게? |
| 수연 | 수면제 100알. 나하고 헤어져서 실연의 아픔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
| 그래서··· 수면제 100알을 먹고. | |
| 현우 | 안 돼. 못해. |
| 수연 | 왜? |
| 현우 | 수면제 100알을 어떻게 먹냐. 배 터지겠다. |
| 수연 | 너 혜은이한테 차인 다음에 수면제 100알 먹고 자살 시도했었잖아, |
| 대학교 2학년 때. | |
| 현우 | ··· |
| 수연 | 형석이가 너 여관방에서 잠든 거 들쳐업고 응급실로 달렸다고 했어. |
| 현우 | ··· |
| 수연 | 네가 쓴 유서도 보여 줬어, 혜은이한테 쓴 유서. |
| 현우 | 형석이 저 개새끼! |
| 수연 | 그날 응급실에서 혜은이 오면 보여 주려고 갖고 있었대. |
| 현우 | 정말 보여 줬어? |
| 수연 | (끄덕끄덕) |
| 현우 | 기억이 잘 안 나. |
| 수연 | 기억나게 말해 줄까. |
| 현우 | 아니. 기억나. 기억났어. 나 100알 먹은 거 아냐. 사실은 20알 정도··· |
| 수연 | 내 이름도 그렇게 간절히 불러 본 적 있어? 유서 가득 혜은이 이름 부르면서 사랑의 맹세했던 것처럼, 내 이름도 불러 본 적 있어? |
| 현우 | ···너 진짜 왜 그래. |
| 수연 | 당연히 없겠지. |
| 현우 | 진짜 없었다고 생각해? |
| 사회 목소리 | 신랑 신부 친구분들 사진 촬영이 있겠습니다. 친구분들 단체 사진 찍겠습니다. 신랑 신부가 있는 곳으로 얼른 올라와 주세요. |
| 현우 | 나가자. 사진 찍어야지. |
| 수연 | 싫어. 너나 찍어. |
| 현우 | 그럼 나도 안 찍어. |
| 수연 | 왜 혜은이 옆에서 찍어야지. |
| 현우 | 나 혜은이하고 안 친해. 난 형석이 친구야. |
| 수연 | 나가. |
| 현우 | 싫어. |
| 수연 | 나가. |
| 현우 | 소리 좀 지르지 마. 나갈게. |
| 수연 | 웃어 봐. |
| 현우 | 왜? |
| 수연 | 웃어 봐, 나 보면서 치즈~ |
| 어색하게 치즈 하며 웃는 현우. | |
| 수연 | 꼭 혜은이 바라보면서 웃는 네 얼굴 같다. |
| 2. 서울타워 전망대 철제 보호망 근처 | |
| 서울타워 철제 보호망 앞. | |
| 철제 보호망에는 그곳에 오른 수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며 | |
| 채워 놓은 색색의 자물쇠들이 걸려 있다. | |
| 현우가 자물쇠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뭔가를 찾고 있다. | |
| 현우 | 이 근처 같은데. |
| 수연 | 여기 맞아? |
| 현우 | 여기 맞아. 이 근처. |
| 수연 | 빨리 찾아. |
| 현우 | ···여깄다. 겨우 하나 찾았네. |
| 수연 | 다른 것도 빨리 찾아. |
| 현우 | 언제 다 찾아? 이렇게 많은데. |
| 수연 | 찾아. 찾아서 다 따와. |
| 현우 |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아. |
| 현우와 수연이 어둠 속에서 자물쇠를 찾고 있다. | |
| 3. 에덴파크 모텔방 | |
| 이곳은 결혼 전부터 두 사람이 드나들었던 여관이다. | |
| 동아리 모임이 길어져 막차를 놓쳤을 때도,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 |
| 싶을 때도, 두 사람이 헤어지기 싫어 함께 있을 곳을 찾아 헤맬 때도, | |
| 둘은 언제나 이곳을 찾았었다. | |
| 모텔방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현우가 벗어 놓은 팬티 고무줄을 | |
| 늘렸다, 줄였다 하며 생각에 빠져 있는 수연. | |
| 현우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 | |
| 현우 | 수연아, 아까 백화점에서 산 팬티, 너무 꽉 끼어. 꽉 끼면 건강에도 |
| 안 좋은데. | |
| 수연 | ··· |
| 현우 | 수연아. |
| 수연 | 응? |
| 현우 | ···이 T팬티는 나한테 안 맞는 거 같애. 그냥 입던 걸로 입으면 안 될까. |
| 수연 | (뜬금없이) 나 어제 악몽 꿨다. |
| 현우 | 팬티부터 주고 얘기하면 안 돼? |
| 수연 | (들고 있던 팬티를 욕실 문 안쪽으로 들이밀어 준다) 내가 토끼를 여섯 마리나 낳았어. 그러니까 기억에는 없는데, 토끼들이 내 애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키우고 있었거든. 그런데 이 여섯 마리 토끼들이 밥 달라고 얼마나 울어대는지, 그것도 닭 소릴 내면서 우는 거야. 꼬꼬꼬꼬 그러면서. 엄마 밥 줘 꼬꼬꼬꼬. 엄마 찌찌 꼬꼬꼬꼬. |
| 수연은 일어나 여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 |
| 그러고는 가방에서 자물쇠를 꺼내 창밖으로 하나둘 던진다. | |
| 현우가 T팬티를 들고 욕실에서 나온다. | |
| 현우 | 뭐 해? |
| 수연 | (던진다) |
| 현우 | 버리지 마. |
| 수연 | (던진다) |
| 현우 | 이리 줘. |
| 수연이 손에 쥐고 있던 자물쇠를 현우 얼굴에 들이민다. | |
| 현우가 의심스러운 듯 자물쇠를 받아들려고 하자, | |
| 현우에게 던지는 포즈. | |
| 그러다 뒤돌아서 창밖으로 던진다. | |
| 자물쇠가 날아간 창밖을 멍하니 보는 수연. | |
| 현우 | 아이 진짜. 그걸 왜 던져. 찾아 갖고 올게. |
| 수연 | (T팬티를 뺏어 들고) 이거 얼마나 비싼 건지 알아? (창밖으로 던져 버린다) |
| 현우 | 야! 나도 취향이란 게 있어. 마누라도 알 수 없는 신체 구조상의 비밀도 있고. 엉덩이에 끈 끼는 느낌이 얼마나 싫은지 알아? |
| 수연 | (창밖 먼 곳을 가리키며) 이 나이 되면 누구나 저런 호텔에 가는 줄 알았는데. |
| 현우 | 네가 여기로 오자며. |
| 수연 | 그랬나? |
| 현우 | 그래. |
| 수연 | 주인아주머니가 너 못 알아봐? |
| 현우 | 날 왜? |
| 수연 | 너 여기서 죽으려고 했었잖아. |
| 현우 | ···샤워해. 네가 던진 것들 찾아 갖고 올게. |
| 수연 | T팬티? |
| 현우 | 자물쇠! |
| 수연 | 너 나가면, 나 문 잠글 거야. |
| 현우 | 설마···, 안 잠글 거지? |
| 수연 | ··· |
| 그냥 나가려던 현우가 화장대 위에서 열쇠를 챙겨서 나간다. | |
| 현우가 나가자 수연은 문을 똑딱 잠그고 | |
|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 |
|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불 속으로 숨는 수연. | |
| 수연이 숫자를 센다. | |
| 수연 |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 아홉 살, 열 살, 열한 살, 열두 살, 열세 살, 열네 살, 열다섯 살, 열여섯 살, 열일곱 살, 열여덟 살, 열아홉 살,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 (계속 센다) 서른네 살, 서른다섯 살, 서른여섯 살, 서른일곱 살, 서른여덟 살, 서른아홉 살. |
| 현우가 문을 따고 들어온다. | |
| 현우 | 진짜 잠그냐. |
| 밖에서 찾아온 자물쇠를 가방에 넣는 현우. | |
| 현우, 추운지 몸을 떨며 이불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간다. | |
| 수연 | 저리 가. |
| 현우 | 왜. |
| 수연 | 차가워. |
| 현우 | 너 때문에 나갔다 온 거잖아. |
| 수연 | ··· |
| 현우 | 이제 내 발까지 싫냐? |
| 수연 | 차가워서 그래. |
| 현우 | 알았어. 이제 네 몸에 안 닿도록 노력할게. 발로 네 몸 문지르지도 않고. |
| (이불 속에서 발로 문지르며) 자자. 이제 마지막으로 문지르는 거다. | |
| 이제 너도 나 건들지 마. | |
| 수연 | 나 춥다고. 추워서 그래. |
| 현우 | 내 발이 그렇게 추워? |
| 수연 | ···그만하자. |
| 현우 | 그래. 그만해··· 자자. |
| 수연 | 잠 안 와. |
| 현우 | 양 세. 토끼를 세든가. |
| 수연 | 아까 내 나이 세 봤어. |
| 현우 | 그런 걸 왜 세고 그러냐. |
| 수연 | 내가 몇 살인지 자주 확인해 줘야지. |
| 현우 | ··· |
| 수연 | 근데 좀 놀랐어. |
| 현우 | 왜. |
| 수연 | 생각보다 길어서. 되게 오래 걸리더라고. |
| 현우 | 응··· 난 너보다 한 살 어리니까 1초쯤 덜 걸리려나? |
| 수연 | 좋겠다. |
| 현우 |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헤어지지 않고 그냥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치. |
| (사이) | |
| 수연 | 앗! 왜 이래? |
| 현우 | 뱃살 잡히네. 아줌마 다 됐어, 한수연. |
| 수연 | (이불 속에서 손을 탁 치며) 놔. 이 얼간이. |
| 현우 | ···충격이다. 얼간이. 평생 첨 들어 보는 욕이야. |
| 수연 | 나도 하고 나니까, 첨 해 본다. |
| 두 사람, 어이없이 웃는다. | |
| 현우 | 나도 어제 꿈꿨는데 얘기해 줄까? |
| 수연 | 어. |
| 현우 | 시험이 내일인데 밤에 너무 졸린 거야. 그래서 잠 깨려고 졸릴 때마다 눈꺼풀이 감길 때마다 냉장고 안에 있는 고추장 통 꺼내서 한 숟가락씩 퍼먹고 있는 거야 내가, 꿈속에서. 아침에 꿈 깨고 일어났는데 속이 너무 쓰린 거 있지. |
| 수연 | ··· |
| 현우 | 연극을 보러 갔는데. |
| 수연 | 연극? |
| 현우 | 꿈에. 너랑 같이 갔는데, 네가 피곤한지 자꾸 조는 거야, 코를 심하게 골면서. 남자 배우는 자꾸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근데 어쩌겠어, |
| 피곤해서 그런걸. 그 남자 배우, 최대한 코 고는 소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더라고. 그런데 여자 배우가 울기 시작했어. 그 여자 배우, 불치병에 걸려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었거든. 외롭고 고독해져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바로 그 장면에서 갑자기 꾸벅꾸벅 졸고 있던 네가 확 짜증 나는 목소리로 소리치지 뭐야, “누가 자꾸 울고 지랄이야~” | |
| 울고 있던 여배우며 관객들이 우리 둘을 보는데, 그 여배우, 울음을 뚝 그치곤, 너를 보면서 한마디 하더라고 이렇게. “내가 운다, 왜!” | |
| 웃는 수연. | |
| 현우 | 우리 할까? |
| 수연 | (끄덕끄덕) 응. |
| 이불 속에서 현우가 수연의 옷을 벗겨 이불 밖으로 던진다. | |
| 수연 | 처음 너하고 할 때처럼. |
| 현우 | 처음처럼? 내가 어떻게 했는데? |
| 수연 | 떨리는 입술. |
| 현우 | 떨리는 입술 |
| 수연 | 어쩔 줄 몰라 하는 손가락. |
| 현우 | 어쩔 줄 몰라 하는 손가락. |
| 수연 | 쿵쿵, 말발굽 소리를 내며 뛰는 심장. |
| 현우 | ···쿵쿵, 쿵쿵 |
| 수연 | 석유난로 같은 뜨거운 몸. |
| 현우 | 석유난로 같은··· |
| 수연 | 나에게 빠진, 날 너무나 좋아하는 눈빛. |
| 현우 | ···어··· 어렵다··· |
| 수연 | 어려워? 내가 앞에 있는데? |
| 현우 | 그게 아니라. |
| 수연 | 왜 어려워? |
| 현우 | 우린 처음 하는 게 아니니까. |
| 수연 | ···그럼 날 다른 여자라고 생각해. |
| 현우 | 넌 수연이지 다른 여자가 될 수는 없지. |
| 수연 | 왜 될 수가 없어? |
| 현우 | 없어, 아무튼. |
| 수연 | 왜 될 수 없는데? |
| 현우 | 그건 그냥 될 수 없는 거잖아. 아무리 노력해도. 될 수 없는 거야, 다른 사람이. |
| 수연 | ···나 샤워할게. |
| 이불 속에서 속옷 차림으로 나와, 화장대 근처에 모아져 있던 | |
|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샤워실로 걸어가는 수연. | |
| 이불 속에 혼자 남겨진 현우. | |
| 웅크리고 있다가 이불에서 머리를 내민다. | |
| 그리고 가방 속 자물쇠들을 꺼내 보는 현우. | |
| 자물쇠에 적힌 글귀를 읽어 본다. | |
| 현우 | 건강하게 군대 생활 잘해. 1997년. 12월 12일. |
| (다른 자물쇠) 사랑하는 현우의 취직을 축하하며. 2003년 3월 2일 | |
| 내일 결혼이다. 우리 사랑 영원히. 2006년 5월 14일 | |
| 그러다 현우는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 |
| 현우 |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
|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다섯, ··· 서른둘, 서른셋, 서른넷, 서른다섯, | |
| 서른여섯, 서른일곱, 서른여덟. ··· 생각보다 기네. | |
| 수연이 욕실에서 나온다. | |
| 스위트룸에 불려 온 콜걸처럼 옷차림과 화장을 한 수연. | |
| 담배를 피워 문다. | |
| 현우 | 담배 끊었잖아. 다시 피려고? |
| 수연 | 글쎄. |
| 현우 | 힘들게 끊었는데 좀 참지. |
| 수연 | 나 어때? 할 말 없어? |
| 현우 | 뭐가. |
| 수연 | 내 모습. 내 옷차림. |
| 현우 | 놀랬지. |
| 수연 | 그리고? |
| 현우 | 그게 뭐야. 벗어. |
| 수연 | 왜? |
| 현우 | 딴사람 같아. 안 어울려. |
| 수연 | 봐 봐. 난 딴사람이 될 수 있어. |
| 현우 | 그 얘기가 아니잖아. |
| 수연 | 나 매춘부 같아? |
| 현우 | 뭐? |
| 수연 | 나 콜걸 같아? |
| 현우 | 뭔 소리야. |
| 수연 | 이곳은 힐튼 호텔이야. 넌 룸서비스를 받고 있어. 스위트룸에 있는 거야. |
| 하룻밤에 550만 원 하는 스위트룸. 나는 콜걸. 네가 전화로 불렀어. | |
| 오늘만큼은 날 마음대로 해도 좋아. 마음대로 갖고 놀아. | |
| 오늘은 마지막 날이고 오늘밖에 기회가 없으니까. 오늘이 지나면 | |
| 우린 영영 남남이고 모르는 사이가 되고, 난 두 번 다시 너하고 섹스는 | |
|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오늘은 할 수 있어. 모든 것을 | |
| 다 해 줄 수 있어. | |
| 현우 | 구두 좀 벗어. 하루 종일 걸어 다녔잖아. 다리 안 아파? |
| 수연 | 내 엉덩이를 봐. 날 벽에 세워 두고 때려도 좋아. 날 묶어서 매달아도 |
| 좋아. 고객이 원하는 건 뭐든지 준비해 갖고 다니는 콜걸이니까. | |
| 스타킹 신은 발가락으로 해 줄까. 가슴으로 해 줄까. 아, 가슴으로는 | |
| 무리네. 내 가슴은 작지··· 네가 보는 앞에서 오줌을 눌 수도 있어. | |
| 오늘은 너한테 날 파는 거야. 나는 여기 없고 나는 내가 아니야. | |
| 그냥 장난감. 네 마음대로 갖고 놀아도 돼. 우린 결혼했지만 우린 | |
| 서로가 서로의 것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더 어려워했잖아, 눈치만 보고. 서로가 화났나, | |
| 화 안 났나, 그걸 좋아하나, 좋아하지 않나 살피기만 하고. | |
| 날 아프게 해 줘. 아파서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라고 소리치게 해 줘. | |
| 하지만 단 한 가지만 해 줘. 단 한 가지만 해 줘. 단 한 가지만 내 말대로 | |
| 해 줘. | |
| 현우 | 뭔데? 그 한 가지가? |
| 수연 | 날 딴사람 이름으로 불러 줘. |
| 현우 | ···너 무섭게 왜 이래? |
| 수연 | 어떤 이름이 좋을까? |
| 현우 | ··· |
| 수연 | 그래. 유리? 효리? 희진? 어떤 이름이면 네가 날 처음처럼 대해 줄 수 있을까. |
| 현우 | ··· |
| 수연 | 태희? 예진이? 윤진? |
| 현우 | 수연아. |
| 수연 | 아. 그래··· 혜은. 날 혜은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 줘. 사랑스럽게. |
| 현우 | 그만해. |
| 수연 | 떨리는 입술. 어쩔 줄 몰라 하는 손가락, 쿵쿵 북처럼 울리는 심장, |
| 모닥불처럼 열기로 가득한 입김, 날 너무나 좋아해서 별처럼 빛나는 눈빛. | |
| 현우 | 미안해. 잘못했어. 우리 호텔 갈까, 지금. |
| 수연이 가발을 벗어 현우에게 집어 던진다. | |
| 수연 | 얼간이. 왜 항상 그 자리야? 왜 항상 거기서 서 있어? 왜 항상 멈춰 |
| 있어? 나까지 나아갈 수 없잖아. 나까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잖아. | |
| 현우 | 수연아, 옆방에 다 들리겠어. 조용히. |
| 수연 | 쓰레기야, 쓰레기. ···내가 회사에서 번역하는 것들은 죄다 쓰레기야. 재능도 없고, 실력도 안 되고, 돈도 못 벌고, 돈이 없으니까, 점점 더 돈 벌기도 힘들고, 아무것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가 없어. 사랑만 잡고 있는데, 그런 내가 너무 초라해. |
| 수연이 지갑에서 약통 하나를 꺼낸다. | |
| 약통에 있은 약들을 한 움큼 꺼내 입에 넣고 물로 삼키는 수연. | |
| 현우 | 너 뭐 먹는 거야? |
| 수연 | 수면제. |
| 현우 | 너 왜 이래? |
| 수연 | 먹어도 안 죽어. 걱정 마. 네가 먹어 줄 것도 아니잖아. |
| 수연이 현우에게 약통을 내민다. | |
| 수연 | 네가 먹어 줄 수 있어? |
| 수연이 내민 약통을 받지 않는 현우. | |
| 수연 | 봐, 넌 못 먹잖아. 혜은이한테 차였을 때는 죽겠다고 약까지 먹은 네가 |
| 날 위해서는 겁나서 못 먹잖아. | |
| 현우 | 그때는 젊었을 때고··· 뭘 모를 때고··· |
| 수연 | 뭘 몰랐는데? |
| 현우 | ···너 왜 이래? |
| 수연 | 그 말투, 지겨워. (약을 먹는) 나 깨우지 마. |
| 이불 위에 눕는··· 그러다 먹던 수면제 통을 현우에게 던진다. | |
| 수연 | 나하고 자고 싶으면 그거 먹고 옆에 누워. |
| 현우는 그저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다. | |
| 4. 현우와 수연의 아파트 | |
| 빗소리. | |
|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낭만적인 천둥소리. | |
| 어둠 속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 |
| 이내 전화는 끊어지고··· 다시 울리는 전화벨. | |
| 초인종이 울린다. | |
| 점점 초인종 소리가 격하게. | |
| 현우와 수연의 집이 밝아진다. | |
| 텅 빈 거실이 보이고. | |
| 문밖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현우가 보인다. | |
| 저녁 무렵. | |
| 현우가 핸드폰을 끊으면 | |
| 집 거실의 전화벨 소리도 멎는다. | |
| 문밖에서 소리치는 현우. | |
| 현우 | 문 열어. 수연아. 수연아, 자니? 너 자는 거야? |
| 문을 두들기는 현우. | |
| 현우 | 일어나 봐. 수연아, 너 좋아하는 한우 등심 스테이크 사 왔어. |
| 너 또 수면제 먹은 거야? 수연아, 일어나 봐. 문 열어. | |
| 너 정말 이럴 거야? 나 화낸다. 너 잘 거면 문이라도 열고 자. | |
| 한숨을 쉬는 현우. | |
| 다시 문을 두들기는 현우. | |
| 점점 그 두드림이 거세진다. | |
| 현우 | 야, 한수연, 너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
| 빗소리. | |
| 현관문에 기대어 주저앉는 현우. | |
| 비가 내리는 저녁 하늘을 바라본다. | |
| 현우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 |
| 현우 | 어. 야. 허형석. 너 이 나쁜 새끼. 너 나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행복하냐. |
| 깨가 쏟아지냐. 너 그 유서 왜 남들 보여 주고 다니는데. 나쁜 새끼. | |
| 끊어 새꺄. 그래, 전화 안 해. 다시는 너 안 봐. 끊어 새꺄. | |
| 핸드폰 폴더를 탁, 닫아 버리는 현우. | |
| 빗소리. 밤새 퍼부을 것 같은 천둥소리. | |
| 그러다, | |
| 다시 어딘가로 핸드폰 버튼을 누르는 현우. | |
| 현우 | 어. 허형석? 끊어 새꺄. 전화 왜 받어, 새꺄. 끊어. |
| 확 폴더를 닫는 현우. | |
| 수연이 방에서 나온다. | |
| 거실을 지나 현관문 앞으로 온다. | |
| 수연은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있다. | |
| 머리도 몇 주 안 감은 듯한 모습. | |
| 번역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 |
| 한쪽 손에 두꺼운 하드커버의 책이 들려 있다. | |
| 잠금장치를 돌려 문을 따는 수연. | |
| 현우가 벌떡 일어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 |
| 탈칵, 안전장치가 걸리며 문이 조금만 열린다. | |
| 그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인사한다. | |
| 현우 | 안녕. 회사 다녀왔어. 밖에 비 온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어? |
| 밖에 비 와. 비 같이 볼래? | |
| 수연은 그런 현우를 그저 멀뚱히 쳐다본다. | |
| 현우 | (봉지를 들어 보이며) 한우 등심 스테이크 사 왔어. 두꺼운 고기. |
| 피 철철 나는. 문 좀 열어 봐. | |
| 문을 닫으려는 수연. | |
| 현우 | 안젤리카! 안젤리카! |
| 안전장치를 풀고 거실 테이블로 가서 책을 읽는 수연. | |
| 현우가 거실로 들어온다. | |
| 현우 | 회사 사람들이 너 많이 걱정해. 벌써 한 달이 다 돼 가니까. 너한테 무슨 |
|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너 임신한 거 아니냐고, 막 떠들어. 큭큭. | |
| 안젤리카, 오늘 밤은 고기 파티하자. | |
| (수연이 읽는 책을 힐끔 훔쳐보며) 너 번역 다시 시작한 거야? | |
| 사장님이 번역일은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나오기 힘들면 | |
| 집에서 해도 된다고 그러셨어. | |
| 수연이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 | |
| 수연 | (독일어)··· 폴 폰 프로인덴 바 미어 디 벨트 (Voll von Freunden war |
| mir die Welt) | |
| 현우 | 고기 굽자. 안젤리카, 고기 굽자. 맛있는 등심 스테이크, 굽자. |
| 수연 | (독일어) ··· (밑줄도 긋는, 또한 뭔가를 쓰는) 알스 노흐 마인 레벤 리히트봐, (Als noch mein Leben licht war) |
| 한숨 쉬는 현우. | |
| 가스레인지 오븐에 한우 고기를 한 점 두 점 넣는 현우. | |
| 현우 | 아까, 형석이한테서 전화 왔는데··· 집에 와서 사과하고 싶다고, 너한테. |
| 꼭 사과하고 싶다네. | |
| 수연 | (벌떡 일어나 방으로··· 잠시 후 사전을 들고나온다. 단어를 찾는) |
| 현우 | 오늘 회사로 장모님 오셨어. |
| 수연 | ··· |
| 현우 | 돈 주셨어, 550만 원.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너하고. |
| 수연 | (다시 사전을 찾는, 하지만 찾아지지 않는) |
| 현우 | 나하고 말 안 하는 건 괜찮지만, 어머님하고는··· 걱정하시잖아. |
| 수연 | (독일어) 눈, 다 데어 네벨 휄트 / 이스트 카이너 메어 지히트바. (Nun, |
| da der Nebel fällt, / Ist keiner mehr sichtbar.) | |
| 현우 | 응? |
| 수연 | (독일어, 어떤 단어) 바-리히 (Wahrlich-실로, 정말로의 뜻) |
| 현우 | ··· |
| 수연 | 독일에 갈 거야, 나. |
| 현우 | 독일? ···유학? |
| 수연 | 응. |
| 현우 | 언제 갈까, 우리? |
| 수연 | 지금 당장. |
| 현우 | 당장? |
| 수연이 책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 |
| 곧이어 슈트케이스를 끌고 방에서 나온다. | |
| 현우 | 지금 유학을 어떻게 가? |
| 수연 | 놔. |
| 현우 | 갈 거면 내일 가. 아침에. 내가 데려다줄게. |
| 슈트케이스를 끌고 수연이 현관문으로 다가가자 | |
| 현우가 슈트케이스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 |
| 힘겨루기. | |
| 현우 | 내일 가. |
| 수연 | (쳐다보는, 비웃는) |
| 현우 | 지금은 못 가. |
| 수연 | (비웃는) |
| 현우 | 비웃지 마. |
| 수연 | (비웃는) |
| 현우 | 내가 그렇게 웃겨? |
| 수연 | 응. |
| 현우 | 못 가. |
| 수연 | 왜? |
| 현우 | ···고기 먹고 가. |
| 두 사람의 힘겨루기. | |
| 수연이 현우의 힘에 끌려 식탁에 앉는다. | |
| 현우가 잽싸게 슈트케이스를 방 안에 던져 놓는다. | |
| 세탁기가 놓여 있는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여는 수연. | |
| 비가 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 |
| 빗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 |
| 현우 |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오늘 나 회사에서 잘렸다. 너도 잘렸어. |
| 수연 | ··· |
| 현우 | 잘 됐지? |
| 수연 | ··· |
| 현우 | 이제 그런 하찮은 일, 하지 않아도 돼. 하찮은 일 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하찮은 일만 하다가 우리 젊음을 다 보낼 수도 없잖아··· |
| 새로 직장 알아보려고. | |
| 수연 | (세탁기 뚜껑을 열어 보는, 세탁 버튼을 누르는) |
| 현우 | 어? 세탁기 돌리게? 근데 빨래가 마르려나, 비 오는데. |
| 수연이 세탁기 안에 자신이 번역하고 있던 자료들을 집어넣는다. | |
| 그러곤 세제를 넣는다. | |
| 현우 | 어. 어. 너 뭐 하는 거야. |
| 세탁기 안에서 번역 종이들을 건져내는 현우. | |
| 잉크가 번져 있는 종이들. | |
| 수연 | 하찮아. 하찮아. |
| 수연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 |
| 현우는 번역 종이들을 건져내 거실 바닥에 종이들을 한 장씩 한 장씩 | |
| 깔아 놓고 있다. | |
| 수연의 방으로 가서 노크하는 현우. | |
| 현우 | 수연아··· 문 열어··· 수연아. 수연아. |
| 수연 목소리 | 내 이름은 안젤리카야. 안젤리카라고 했잖아. 독일에 갈 거야. 독일에 가서 안젤리카로 살 거야. |
| 현우 | 알았어. 안젤리카. 안젤리카, 문 좀 열어 봐. 드라이어만 가져갈게. |
| 문 열어. 자꾸 문 잠그지 마··· 벌써 한 달이다. 나도 힘들어. | |
| 드라이어만 가져갈게. 그거만 가져갈게. 문 좀 열어. 너 문 안 열면··· 열쇠로 연다. 싱크대 서랍에 열쇠 있는 거 알지? 빨리 문 열어. | |
|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문 열어. | |
| 차츰 현우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간다. | |
| 현우 | 문 열란 말이야. 문 열어. 문 열어. 힘들다고 했잖아. 나도 힘들어. |
| 그만 좀 하란 말이야. | |
| 현우의 주먹이 문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 |
| 현우 | 난 지금 장난 아냐. 지금 나 진돗개 하나 발령이야. 군대에서 진돗개 하나 |
| 발령이면 훈련이 아냐. 실전이거든. 강원도에서 무장 간첩 넘어왔을 때 | |
| 그때 발령된 게 진돗개 하나거든. 나 그것 때문에 정기 휴가도 못 나오고 | |
| 강원도 산속 헤매고 다녔거든. 난 장난하는 거 아냐. 실전이거든. | |
| 빨리 문 열어. 문 부수기 전에 문 열어. ··· 너 자꾸 이러면 나 소리 | |
| 지른다. ··· 으아아아아. 문 열어. 으아아아아아. 문 열어. | |
| 현우가 베란다로 뛰어가 창밖으로 소리를 지른다. | |
| 현우 |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
| 으아아아아. 동네 사람들! 다 부숴 버릴 거야! 다 죽여 버릴 거야! | |
| 다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으아아아아. 다 부숴 버릴 거야. | |
| (뒤돌아서 문 쪽을 향해) 야, 한수연. 뭐, 안젤리카, 안젤리나 졸리가 | |
| 웃겠다. 너 안 나오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너 죽고 나 죽이는 거야. | |
| 우리 같이 죽자. 우리 같이 죽어 버리자. | |
| 수연이 방문을 따고 나온다. | |
| 싱크대로 가는 수연. | |
| 서랍에서 식칼을 꺼내 든다. | |
| 칼을 들고 현우에게 다가가는 수연. | |
| 수연 | 내가 먼저 찌를까, 아니면 네가 먼저 찌를래? |
| 현우 | ··· |
| 수연 | 네가 먼저 선택해. |
| 현우 | 칼 이리 내. 위험해. |
| 수연 | 아무래도 내가 먼저 찌르는 게 낫겠지. |
| 순간 겁을 집어먹는 현우. | |
| 현우 | ···잠깐, 잠깐. 칼 이리 줘··· 이러다 다쳐. |
| 수연 | 결정해. |
| 현우 | 내가 먼저 찌를게. 내가 먼저. 칼 이리 내. |
| 수연이 칼을 건넨다. | |
| 칼을 잠시 손에 쥐고 멍하니 수연을 바라보는 현우. | |
| 수연 | 넌 이렇게 권태롭게 인생을 살아가도 괜찮은 거니? |
| 넌 이렇게 권태롭게 사랑을 해도 괜찮은 거야? | |
| 현우는 칼을 창밖으로 집어 던지고, 창문을 닫고 잠금장치도 채운다. | |
| 현우에게 달려드는 수연. | |
| 힘겨루기. | |
| 현우의 왼쪽 팔을 입으로 와앙~ 문다. | |
| 현우 | 아아아아. |
| 현우가 수연을 강하게 벽 쪽으로 밀어 버린다. | |
| 밀려난 수연이 벽에 부딪혀 주저앉는다. | |
| 현우 | 너, 너, 너 나 왜 물어? 네가 날 어떻게 물 수가 있어? 네가 동물이야, |
| 네가 짐승이야? ···네가··· 네가 어떻게 날 물 수가 있어? | |
| 수연이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 |
| 옷소매를 걷어 물린 자국을 확인하는 현우. | |
| 피가 나고 있다. | |
| 현우 | 피 난다. 피 난다··· 알았어. 내가 다 잘못했어. 수면제 100알 먹으면 되지? |
| 그럼 됐지? 그럼 예전처럼 다 되돌아갈 수 있는 거지? 먹을게. 수면제 100알, 먹을게. | |
| 싱크대 서랍에서 약통을 꺼낸다. | |
| 냉장고에서 1.5리터 물통을 꺼내는 현우. | |
| 식탁에 앉아 테이블 지면 위에 수면제를 쏟는다. | |
| 한 알씩 먹기 시작하는 현우. 한 알 먹고, 물 한 모금 마시고. | |
| 현우 | 두 알··· 세 알··· 네 알··· 다섯··· 여섯··· 열 알··· 스무 알··· |
| 나 정말로 죽는다. 스물셋··· 스물아홉··· 사랑해. 사랑해, 수연아. 서른··· | |
| 테이블 위로 푹 엎어지는 현우. | |
| 현우 등 뒤로 스테이크가 타는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 |
| 5. 개인 병원 입원실. | |
|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현우. | |
| 수액을 맞고 있다. | |
| 그 옆에 앉아 있는 수연. | |
| 잠에서 깨는 현우. | |
| 현우 | ···어··· |
| 수연 | 깼어? |
| 현우 | ···어··· 여기··· |
| 수연 | 병원. |
| 현우 | 병원? ··· 얼마나 잔 거야, 나? |
| 수연 | 일주일 동안··· 너 잠만 잤어. |
| 현우 | ··· (얼굴을 찡그리며) |
| 수연 | 속이 안 좋아? |
| 현우 | 아파, 허리가··· |
| 수연 | 마사지해 줄까. |
| 현우 | ···아니. |
| 수연 | 화장실 안 가고 싶어? |
| 현우 | 음··· 모르겠어. |
| 수연 | 너 일주일 동안 화장실 한 번도 안 갔어. |
| 현우 | 음··· 그랬구나. |
| 멀뚱멀뚱 병실 천장을 바라보는 현우. | |
| 상념에 젖은··· | |
| 수연 | 무슨 생각해? |
| 현우 | 어? 아무것도··· 꿈을 꿨어. |
| 수연 | 무슨 꿈? |
| 현우 | 그게··· 조금··· 당혹스러운 꿈. |
| 수연 | 얘기하고 싶어? |
| 현우 | 아니. |
| 수연 | 응. |
| 현우 | ···말해 줄까? |
| 수연 | (끄덕끄덕) |
| 현우 | 여러 가지 꿈을 많이 꿨는데··· 기억나는 건··· 두 가지. |
| 꿈에 네가 나한테 지우개를 주더라고. 하얀 지우개. 제도용 지우개 말이야. | |
| 내가, ‘이게 뭐야?’ 그랬더니 | |
| 네가 그러는 거야. ‘먹는 거야. 먹어 봐’ 그러더라고. | |
| 그래서 입안에 넣고 꼭꼭 씹었어. | |
| 씹다가 보니까, 눈물이 나더라고··· | |
| 수연 | ··· |
| 현우 | 또 기억나는 거 한 가지는··· |
| 집에 모아 둔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 동전 있잖아. | |
| 그것들 다 모아서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서 은행에 가져가는데··· | |
| 도로 길 한복판에서 봉지 밑이 터졌어. 너무나 당혹스러웠어. | |
| 이걸 다 언제 줍지?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 |
| 이게 주워도 주워도 끝이 없는 거야. 동전 줍다 꿈 깼어. | |
| 수연 | ··· |
| 현우 | 수연아. |
| 수연 | 응? |
| 현우 | 우리··· |
| 수연 | ··· |
| 현우 | 우리··· 이혼하자. |
| 수연 | ···그래··· 좀 더 빨리 네가 결정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
| 현우 | 아니. 빨리 결정했어도 여기까지 왔을 거야. |
| 수연 | (끄덕끄덕) |
| 현우 | 널 뭐라고 불러야 해, 이제? |
| 수연 | 뭐라고 부르고 싶은데? |
| 현우 | ···글쎄··· 뭐라고 불러야 하지? |
| 수연 |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
| 현우 | ···선배라고 부를까. 처음 동아리방에서 만났을 때처럼. |
| 수연 | ··· |
| 현우 | 선배라고 부를게. |
| 수연 | 그래. 그렇게 불러, 선배. |
| 현우 | 우리 싸우지 말자, 선배. |
| 수연 | 응. 그래. |
| 현우 | 우리 수면제도 먹지 말자, 선배. |
| 수연 | 응. 그래. 귀여운 후배야. |
| 현우 | 선배? |
| 수연 | 귀염둥이 후배. |
| 현우 | 선배라고 부르니까, 꼭 여기가 동아리방 같네. |
| 수연 | 그러네. 휑한 게. |
| 현우 | 어떻게 그렇게 추운 동아리방에서 매일 밤 기다렸을까. |
| 수연 | 그땐 어리고, 젊었으니까. |
| 현우 | 지금은 안 젊어? |
| 수연 | 그때보다는. |
| 현우 | 우리 늙은 거야? |
| 수연 | 늙은 건가? |
| 현우 | 나 거기에 흰 털 났다. |
| 수연 | 어? |
| 현우 | 거기에, 세 개나. |
| 수연 | 하나였는데, 저번엔. |
| 현우 | 근데, 금세 세 개나 더 자랐어. |
| 수연 | ···뽑아 줄까. |
| 현우 | 아니. 또 날 텐데 뭐··· 정말 우리 늙은 건가? |
| 수연 | ···마음이··· 마음이 늙은 거야. |
| 현우 | 마음이··· 아··· 그렇구나··· 마음이··· 동아리방에서 선배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
| 선배가 뭐랬는 줄 알아? | |
| 수연 | 뭐라 그랬는데? |
| 현우 | 너, 이거 장난이지? |
| 수연 | (웃는다) |
| 현우 | 그래서 키스까지 했잖아. 그런데 선배가 화를 내면서 뭐랬는 줄 알아? |
| 수연 | (웃는다) |
| 현우, 수연 | 너 이것도 장난이지? |
| 수연 | 꼬신 거야, 내가 널. 순진해 보여서. |
| 현우 | 선배 옷을 벗기는데 얼마나 떨리던지. 설마 옷까지 벗겼는데, |
| ‘이것도 너 장난이지?’ 그럴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 |
| 수연 | 떨리는 입술. |
| 현우 | 응. 떨리는 입술. |
| 수연 | 예측할 수 없는 서투른 손가락. |
| 현우 | (자신의 손을 보는) 그랬구나. |
| 수연 | 북처럼 울리는 네 심장. |
| 현우 | (자신의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대 보는) 그랬구나. |
| 수연 | 난로 같은 뜨거운 몸. |
| 현우 | (몸을 만지는) 그랬구나. |
| 수연 | 홍수처럼 흘러넘칠 것 같은 너의 검은 눈빛. |
| 현우 | (수연의 눈을 뚫어질 듯 바라본다) |
| 두 사람은 잠시 상념··· | |
| 현우 | 아, 기억났다··· 선배하고 동아리방에서 여섯 번이나 섹스했던 날, |
| 캠퍼스를 혼자서 걸어가는데 다리가 휘청거리더라고. | |
| 그렇게 많은 섹스를 하고 나서, | |
|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걸으니까,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 | |
| 인생에서 그렇게 자신감이 느껴지던 날은 처음이었어. | |
| 수연 | 수업 들을 때, 식당에서 밥 먹을 때, 도서관에서 독일어 공부할 때 |
| 하루 종일 네 게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어. | |
| 현우 | 선배? |
| 수연 | 응? |
| 현우 | ···이렇게 계속해서 권태롭게 인생을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
| 수연 | ··· |
| 현우 | 선배. 내가 싫을 때가 언제였어? 내가 어느 때 싫었어? |
| 수연 | ···슈퍼에서 물건 넣을 때 손가락에 침 뱉어 봉투 열 때. |
| 현우 | 아, 그랬구나. |
| 수연 | 너 내가 어느 때 싫었어? |
| 현우 | ···음··· 슈퍼에서 유통기한 조금 더 많이 남은 걸 고르려고 우유를 |
| 안쪽에서 꺼낼 때. 레스토랑 갔는데 할인 카드 안 갖고 왔다고 막 화낼 때. | |
| 수연 | 잠을 자고 있는데, 네 방귀 소리에 놀라서 잠 깰 때. |
| 현우 | (웃는) 내가 한 방귀 하지. |
| 수연 | 넌 내가 언제 싫어졌어? |
| 현우 | ···우리 같이 살고 나서··· 어느 날 선배가 목욕을 하고 욕조의 물을 |
| 빼지 않았었는데··· 다음 날 욕실에 들어가니까, 어젯밤, 목욕하고 남은 물이 | |
| 차갑게 식어 있었어. 욕조에 선배 머리카락이랑 몸에서 나온 때가 둥둥 | |
| 떠 있고. 지저분한 물과 그 물에 떠 있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보고 | |
| 있자니 갑자기 속이 메슥거려졌어. 그 순간 나 자신이 너무나 싫어져서 | |
| 견딜 수 없이 화가 나서··· 나 자신이 너무나 싫어져서··· 항상 누나가 목욕한 | |
| 물에 내가 들어가곤 했는데··· 정말 달콤한 욕조의 물이라고 생각했는데. | |
| 그 물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는데. 선배의 긴 머리카락이 둥둥 떠 있고, | |
| 선배의 몸에서 나온 때가 물 위에 꽃잎처럼 떠 있고··· 선배의 체온이 | |
| 느껴지던 그 물. 옷을 벗고 들어가면 그만 흥분해 버려서··· 내 작은 새가 | |
| 활짝 날개를 펴던 그 물. ···그때 내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알았어. | |
| 수연 | ··· |
| 현우 | 선배? |
| 수연 | 응? |
| 현우 | 나한테, 좋아해,라고 열 번만 말해 봐. |
| 수연 | 듣고 싶어? |
| 현우 | 응. 나한테 처음으로, 좋아해,라고 말했을 때처럼. 동아리방에서. |
| 할 수 있어? | |
| 수연 | 음. 할 수 있어, 처음처럼. |
| 현우 | 응. 처음처럼. 처음 그때의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 |
| 수연 |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
| 현우 | 어! |
| 수연 | 왜? |
| 현우 | 신호 왔다. |
| 수연 | 어? 무슨 신호? |
| 현우 | 화장실. |
| 현우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수연이 거들어 준다. | |
| 두 사람은 함께 화장실로 걸어간다. | |
| 6. 현우와 수연의 아파트 | |
| 빗소리. | |
| 거실 냉장고를 정리하고 있는 수연. | |
| 식탁 위에는 잡동사니 음식 재료들이 놓여 있다. | |
| 전자레인지 위에선 냄비 안의 카레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 |
| 냉장고에서 반찬통이며 물통, 채소들을 꺼내고 | |
| 냉장고 안을 비우고 있는 수연. | |
|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깨물어 먹는 수연. | |
| 비에 축축이 젖은 현우가 현관문을 노크한다. | |
| 수연 | (입속의 얼음) 그노야? |
| 현우 | 어. 나야. |
| 수연이 현관문을 딴다. | |
| 수연 | 비 마잤어? |
| 현우 | 어. 갑자기 비가 와서. 일기예보에는 비 온다는 얘기 없었는데. |
| ···뭐 먹어? | |
| 수연 | 얼음. |
| 현우 | 냉장고에 있는? |
| 수연 | 응. 아, 시려. (입속의 얼음) 어서 드러와. |
| 현우 | 어. |
| 테이블 의자에 걸려 있던 타월을 현우에게 건네주는 수연. | |
| 현우 | (머리를 닦으며) 좀 늦었지? |
| 수연 | 아니. 딱 좋을 때 왔어. 냉동실 좀 청소해 줘. |
| 현우 | 응. 그래. 옷 벗고 도와줄게. |
| 식탁 위 음식들을 살펴보는 현우. | |
| 현우 | 뭐가 이렇게 많아? |
| 수연 | 냉장고에 있던 거 다 꺼내서 카레 만들어. |
| 현우 | 너무 오래된 거 아냐? |
| 수연 | 3년 지난 것도 먹을 수 있대, 냉동실에 보관하면. |
| 현우 |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누가 해? |
| 수연 | 네이버. |
| 현우 | 아. 네이버. |
| 수연 | 이 얼음도 작년 여름에 얼려 놓은 건데. |
| 식탁 위에 있던 육포를 집어 뜯어먹는 현우. | |
| 현우 | 육포 샀어? |
| 수연 | 아니. 냉동실에 있던 거. |
| 현우 | 이런 게 다 있었어? |
| 수연 | 우리 폐백할 때, 너 육포 좋아한다고 왕창 가져왔었잖아. |
| 현우 | 이게 그 육포야? |
| 수연 | 응. |
| 현우 | (씹으며) 상한 거 아닌가. 맛이 영··· |
| 수연 | 괜찮대. |
| 현우 | 누가? 네이버가? |
| 수연 | 아니. 어머니가. |
| 현우 | 어. (커피 봉지를 집어 들며) 이 커핀? (유한기한을 확인하곤) 이건 5년도 더 지났는데. |
| 수연 | 브라질에서 산 거. |
| 현우 | 그러네, 브라질에서 산 거··· 신혼여행 때 친구들 준다고 잔뜩 사 갖고 |
| 왔던 거, 맞지? 이것도 먹을 수 있대? | |
| 수연 | 그건 버리래. |
| 현우 | 엄마가? |
| 수연 | 아니. 네이버가. |
| 현우 | 아, 네이버가. ···전화 통화했어? |
| 수연 | 응? |
| 현우 | 엄마하고. |
| 수연 | 응. |
| 현우 | 뭐래? |
| 수연 | 이혼해도 한번 며느리는 영원한 며느리래. |
| 현우 | 참, 엄만 부담되게. |
| 수연 | 뭐가? |
| 현우 | 영원한 며느리. |
| 수연 | ···모르겠어. |
| 현우 | 네이버에 물어볼까. 한번 며느리는 영원한 며느리인가? |
| 말없이 냉장고 안을 청소하는 두 사람. | |
| 현우 | 좋아? |
| 수연 | 어? |
| 현우 | (열심히 걸레질하다가, 문득) 좋아? |
| 수연 | 뭐가? |
| 현우 | 그냥 다. |
| 수연 | 좋아. |
| 현우 | 우릴 위해서 청소하는 것도 좋아? |
| 수연 | 응. |
| 현우 | 우릴 위해서 빨래하는 건? |
| 수연 | 좋아. |
| 현우 | 우릴 위해서 요리하는 것도 좋아? |
| 수연 | 응. |
| 현우 | 날 위해서··· 날 위해서··· |
| 수연 | ··· |
| 현우 | 나만을 위해서 네 인생을 나한테 바친 시간들··· 좋았어? |
| 수연 | ··· (끄덕이는) |
| 다시 말없이 냉장고 청소에 열중하는. | |
| 현우 | 아까 법원에 들렀는데··· 서류 볼래? |
| 수연 | 청소 끝나고··· 밥 먹고. |
| 현우 | 그래. 밥 먹고. |
| ···지하철에서 잠깐 봤는데, 서류 작성하는 게 어렵더라고. | |
| 수연 | 그랬어? |
| 현우 | 응. 그래서 너하고 상의하면서 써 보려고. |
| 수연 | 그래. 상의하면서 같이 써. |
| 현우 | 둘 다 모르는 게 생기면 어떡하지? |
| 수연 | ···네이버에 물어보지 뭐. |
| 현우 | 아, 네이버가 있었지. |
| 다시 말없이 냉장고를 청소하는. | |
| 현우 | 어디서 살 거야? |
| 수연 | 당분간은 엄마 집에서. |
| 현우 | 아, 장모님 댁. ···장모님 화 많이 났지? |
| 수연 | 어. |
| 현우 | 뭐라셔? |
| 수연 | 이제부턴 날 딸로 취급도 안 하겠대. |
| 현우 | 그렇게 됐구나. |
| 수연 | 뭐가, 그렇게 됐구나야. |
| 현우 | 내 말투 왜 고쳐지지가 않는 걸까? 너한테 맨날 혼나는데. |
| 수연 | ···귀여워. 답답하기도 했지만. |
| 현우 | 다행이네. |
| 수연 | 아. 다 끝났다. |
| 현우 | 여기도 끝. |
| 냉장고 청소를 끝낸 두 사람. | |
|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해 본다. | |
| 텅 빈 투명한 하얀 냉장고 안. | |
| 냉장고 문을 닫았다, 활짝 열어 보는 두 사람. | |
| 냉장고 불빛이 그 두 사람을 감싼다. | |
| 현우 | 훤하다. |
| 수연 | 훤하네. |
| 현우 | 이혼하면, 인생이 열릴까, 훤하게? |
| 수연 | ··· (고개를 젓는) |
| 현우 | 그렇겠지? |
| 수연 | (고개를 끄덕이는) |
| 현우 | 그래도 우린 헤어져야겠지? |
| 수연 | (끄덕이는) |
| 수연이 냉장고 불빛 속에서 현우의 입술에 키스한다. | |
| 현우 | 아 참, 선물 사 왔어. |
| 수연 | 선물? |
| 현우가 양복주머니에서 조그맣게 포장된 고급스러운 상자를 꺼낸다. | |
| 현우 | 이혼선물. ···너, 생일선물. 6개월 후에 생일이잖아. |
| 수연 | 고마워. |
| 현우 | 그 안에 보증서도 있어. |
| 상자의 포장을 뜯고 열어 보는 수연. | |
| 현우 | 금이야. |
| 수연 | 뭐야, 이게? |
| 현우 | 손톱깎이. |
| 수연 | 금으로 만들었어? |
| 현우 | 응. 특수 제작. |
| 수연 | 비싸겠다. |
| 현우 | 너 금 좋아하잖아. |
| 수연 | 응. 좋아해. ···난 선물 준비 못 했는데. |
| 현우 | 괜찮아. 난 생일도 지났는데 뭐. |
| 수연 | 손톱 깎아 줄까? |
| 현우 | 지금? |
| 수연 | 응. 지금. |
| 현우 | 손톱 안 길었는데. |
| 수연 | 봐 봐. |
| 손을 보여 주는. | |
| 수연 | 깎을 때 됐네, 뭐. |
| 현우 | 손톱 짧으면 캔 맥주 딸 때 잘 못 따는데. |
| 식탁 의자에 나란히 앉아 | |
| 금으로 된 손톱깎이로, 수연이 현우의 손톱을 깎아 준다. | |
| 두 사람의 뒷모습이, | |
| 오래전 사랑에 부풀어 있던 연인처럼 다정해 보인다. | |
| 손톱이 공중으로 튀는 소리. | |
| 탁~ 탁~ 탁~ 탁~ 탁~ 탁~ | |
| 수연 |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엄지손톱은 전쟁의 신, 아레스를 상징한대. |
| 현우 | 응, 그렇구나. |
| 수연 | 검지손톱은 꿈의 신, 모르페우스. |
| 가운데 손톱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 | |
| 약지손톱은 결혼의 신, 히메나이오스. | |
| 새끼손톱은 청춘의 신, 헤베. | |
| 탁~ 탁~ 탁~ | |
| 수연 | 신들이 죽어 가. |
| 현우 | ··· |
| 수연 | 신들이 떠나가고 있어. 죽어 가고 있어. |
| 현우 | 걱정 마. 다시 태어날 거야. |
| 신들 말이야, 다시··· 태어날 거야, 자랄 거야. | |
| 죽은 건 반드시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어. | |
| 수연 | 그래. 다시 태어나, 죽는 건 모두. |
| 현우 | 내 손톱, 다시 자랄 거야. 발톱도 씩씩하게 자라고. |
| 수연 | 응. 씩씩하게. 손톱도··· 발톱도··· |
| 현우 | 손톱 얘기, 그거 선배가 지어낸 거지, 방금? |
| 수연 | ···응. |
| 수연이 눈물을 참고 있다. | |
| 현우 | 아, 카레 냄새 좋다~ |
| 창밖으로 빗소리가 새어 들어온다. | |
| 7. 형석과 혜은의 아들 돌잔치 | |
| 1년 6개월 후··· | |
| 허형석과 정혜은의 아들, 허영웅의 돌잔치. | |
| 사회 목소리 | 바쁘신 와중에도 영웅이의 첫돌을 축하하러 참석해 주셔서 |
| 아빠, 엄마를 대신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
| 박수 소리들··· | |
| 사회 목소리 | 그럼 지금부터 영웅이가 커서 무엇이 될지를 점쳐 보는 돌잡이 |
| 이벤트가 시작되겠습니다. 아까 넣어 주신 이벤트 번호표를 뽑아 | |
| 영웅이가 뭘 잡을지 맞히신 세 분에게 작은 선물을 준비했고요, | |
| 맞히지 못하신 두 분께도 아차상의 기회를 드릴 테니 기대해 주세요. | |
| 그리고 아직까지 응모하지 못하신 분들은 지금 빨리 번호표를 함에 | |
|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 |
| 현우 목소리 | 마우스. |
| 수연 목소리 | 돈. |
| 현우 목소리 | 마우스. |
| 수연 목소리 | 돈. |
| 무대가 밝아 온다. | |
| 정장 차림의 현우와 수연이 | |
|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내기를 하고 있다. | |
| 현우 | 난 마우스. |
| 수연 | 저렇게 얼굴이 순진해 보여도 돈 집는 데니까. |
| 현우 |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지. 마우스. |
| 수연 | 돈. |
| 현우 | 마우스. |
| 수연 | (잠시 생각) 실. 실로 해야겠다. |
| 현우 | 실? 왜? |
| 수연 | 오래오래 살라고. |
| 현우 | 너무 잔인한 거 아냐, 이 험한 세상에. |
| 수연 | 그런가. 그럼, 돈. |
| 두 사람은 이벤트 번호표를 본다. | |
| 현우 | 몇 번이야? |
| 수연 | 35번. 넌? |
| 현우 | 6번. |
| 수연 | 6번? 너, 솔직히 말해 봐. 여기 일찍 온 거 다른 속셈 있지? |
| 현우 | 아냐. 내가 제일 친한 친구잖아. 일찍 와야지. |
| 수연 | ···영웅이, 참 못생겼다. |
| 현우 | 응. 그러네. 정면에서 보니까 더 하네. |
| 수연 | 못생겨도 예쁘다. |
| 현우 | 응, 그러네. 못생겨도 예쁘네. |
| 와인을 마시는 두 사람. | |
| 수연 | (아이 얼굴 감상) 참, 못생겼다. 눈도 작고. |
| 현우 | 참, 못생겼어. 코도 납작하고. |
| 사회 목소리 | 다음은 케이크 커팅과 영웅이의 건강과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건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잔을 채우고 높이 들어 주세요. |
| 영웅이 아버님과 어머님은 힘차게 건배,라고 외쳐 주세요. | |
| 잔을 높이 드는 두 사람. | |
| 왠지 쓸쓸한. | |
| 형석·혜은 목소리 | 건배~ |
| 현우와 수연은 잔에 든 술을 원샷하고, 손뼉을 친다. | |
| 현우 | (손뼉을 치며) 너 변했어. |
| 수연 | (손뼉을 치며) 내가? 어디가? |
| 현우 | (손뼉을 치며) 하긴. 1년 6개월 만이니까. |
| 수연 | (손뼉을 치며) 어디가 변했는데? |
| 현우 | (손뼉을 치며) 더 예뻐졌어. ···남자친구 있어? |
| 수연 | (박수) ···넌? |
| 현우 | (박수)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
| 수연 | (박수) 모르겠어. |
| 현우 | (박수) 그런 대답이 어딨냐? |
| 수연 | (박수) 알고 싶어? |
| 현우 | (손을 내리며) 아니. |
| 수연 | (손을 내리며) 나도 아니. |
| 현우 | 어?! 신호 왔나 보다. |
| 수연 | 신호? |
| 현우 | 저 애, 오줌 마려운 몸짓인데. 네가 가 봐. |
| 수연 | 내가 왜? 저 애 엄마도 아닌데. |
| 현우 | 여기다 오줌 싸게 둘 순 없잖아. |
| 수연 | 아이, 귀찮게. |
| 현우 | 싼다. |
| 수연 | 어디? |
| 현우 | 싼다. 내가 다섯까지 세면 싼다. 싼다. 하나··· 둘··· 셋··· |
|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연. 아이가 있는 쪽으로 나간다. | |
| 다시 돌아오는. | |
| 수연 | 몇까지 셌어? |
| 현우 | 셋. |
| 수연이 테이블에서 자신의 이벤트 번호표를 집는다. | |
| 수연 | 실이 낫겠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라고. |
| 현우, 수연에게 자신의 이벤트 번호표를 건네준다. | |
| 현우 | 통에 같이 넣고 와. |
| 번호표를 들고 나가는 수연. | |
| 사회 목소리 | 이제, 돌잡이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자··· 영웅이가 과연 무엇을 |
| 잡을까요? 돈이냐, 실이냐, 마우스냐, 마이크냐, 연필이냐, 책이냐, | |
| 공이냐, 영웅이가 무엇을 잡을까요? | |
| 아이가 무언가를 집으려고 손을 뻗을 때마다 사람들의 감칠맛 나는 | |
| 탄성들··· 어어어어. 어어어어. 어어어어. 어어어어. | |
| 박수 소리들. | |
| 사회 목소리 | 아아. 우리 영웅이가 돈을 집었네요. 그것도 3만 원을 집었습니다. |
| 우리 영웅이 부~자 되겠네요. | |
| 현우 | 녀석 벌써부터 밝히긴. |
| 사회 목소리 | 그럼 맞히신 분들 중 세 분께 추첨 통해 선물을 증정하겠습니다. |
| 영웅이 어머님, 3장 뽑아 주세요. | |
| 네. 21번 당첨. 33번 당첨. 5번 당첨. | |
| 네, 21번, 33번, 5번 어딨습니까? 번호표 확인해 주세요. | |
| 수연이 들어와 테이블 의자에 앉는다. | |
| 현우 | 애는? |
| 수연 | 화장실에 갔더니 엄마가 쫓아왔더라고. 내가 애를 어디로 데려가는 줄 |
| 알았나 봐. | |
| 현우 | 너 갑자기 얼굴 밝아 보인다. |
| 수연 | ···그래? |
| 현우 | 어. |
| 수연 | 너도. |
| 현우 | 안젤리카는? |
| 수연 | 응? |
| 현우 | 안젤리카는 어떻게 지내? |
| 수연 | 안젤리카는··· 잘 있어. (가슴을 툭툭 치며) 여기에. |
| ···근데 영웅이 뭐 집었어? | |
| 현우 | 돈. |
| 수연 | 아, 아깝다. 역시. ···뭐였지, 상품이? |
| 현우 | 하트 모양의 분홍색 베개. 받았으면 기분 좋았을 텐데. |
| 사회 목소리 | 아차상 두 분 뽑겠습니다. 영웅이 아버님, 뽑아 주세요. |
| 네! 6번. 네, 또 하나의 번호는, 35번. | |
| 현우 | 우리다! 우리다! 여기, 여기요! |
| 뛰어나가는 현우. | |
| 와인을 마시는 수연. | |
| 테이블로 돌아오는 현우의 머리 위로, | |
| 커다란 장미 한 송이가 그려진 아이보리색 양산. | |
| 현우 | 이거 쓰고 전망대 안 갈래? |
| 수연 ··· | |
| 현우 | 네가 여관방에서 버린 자물쇠 기억나? |
| 수연 | (끄덕이는) |
| 현우 | 그거 원래 있던 자리에 채워 놓고 오자. |
| 양복주머니에서 자물쇠들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 현우. | |
| 수연이 자물쇠에 적힌 글을 본다. | |
| 수연 | 2003년 7월 15일 결혼. 처음으로 세상을 전부 다 얻은 것 같다. |
| 사랑한다, 수연아. | |
| 현우 | 취직한 거 축하해. 대박 나길. 네가 하고 싶은 일, 언제까지나 했으면 |
| 좋겠어. 우리 사랑 영원히. 2004년. 1월 1일. | |
| 자물쇠를 보는 두 사람. | |
| 에필로그- 서울타워 전망대, 밤 | |
| 서울타워 전망대에 서 있는 두 사람. 수연과 현우. | |
| 그들 앞에는, 그곳에 올라온 수많은 연인들이 사랑의 맹세를 하며 | |
| 채워 놓은 자물쇠들로 가득하다. | |
| 현우가 전망대 망원경에 동전을 넣고, 서울 시내 야경을 바라본다. | |
| 현우 | 와. 진짜 잘 보이네. 저기 두타 보인다. 밀레오레도 보이고. 동대문시장. |
| 택시도 보이고, 사람 지나가는 것도 보이네. | |
| 어, 우리가 다니던 학교다··· | |
| 망원경에서 눈을 떼며 | |
| 현우 | 볼래? |
| 수연이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 댄다. | |
| 한참을 들여다보던 수연. | |
| 수연 | 저기, 우리가 살았던 집이다. 봐 봐. |
| 현우 | 여기서 그게 보여? |
| 수연 | 응. 저쪽. 저기 큰 건물 왼쪽에 간판 큰 거 보이잖아. 그 아래쪽으로 |
| 쭉 내려가서 건물 세 번째 다음 우측 건물 옆에. | |
| 현우가 수연의 설명의 듣고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 |
| 수연 | 찾았어? |
| 현우 | ···아직. |
| 사이 | |
| 수연 | 찾았어? |
| 현우 | ···아니··· 잠깐만··· |
| 사이 | |
| 수연 | 찾았어? 저기 안 보여? |
| 현우 | ···찾았다. |
| 수연 | 찾았어? |
| 현우 | 응. 찾았어. 저기 보이네. |
| 수연 | 정말 찾았어? |
| 현우 | 아니. 어디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 |
| 수연 | 저쪽, 저쪽 길 아래. |
| 현우 | 어··· 어느 쪽 길? |
| 수연 | 저기. 저기. 저기. 간판 아래. 간판 아래에서 세 번째 건물 끼고 우측에 보면 작은 건물 하나 있잖아. 그 옆이잖아. |
| 현우 다시 망원경을 보는. | |
| 현우 | 찾았다. 아, 저기, 저기구나. |
| 수연 | 보여? |
| 현우 | 응. 잘 보여. |
| 수연 | 저 위쪽 노란색 지붕 보여? |
| 현우 | 잠깐만. 응. 그래. 노란색 지붕 보인다. |
| 수연 | 무슨 노란색 지붕. 너 아직 못 찾았지? |
| 망원경에서 눈을 떼는. | |
| 현우 | ···못 찾겠어. |
| 수연 | 저기. 저기. 저기. 저기가 왜 안 보여? |
| 현우 | 그만 좀 해. 내가 안 찾고 싶어서 안 찾냐? |
| 수연 | 가. 내려가. 왜 올라왔니. 가. 빨리 내려가. 그것도 하나 못 찾니, |
| 우리가 살았던 집인데. 너하고 이혼하길 정말 잘했지. | |
| 현우 | 내려가더라도 이건 마저 제 위치에 채우고 가야지. |
| 현우가 자물쇠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철조망 사이에 채워 잠근다. | |
| 그 둘은 서로 씩씩거리며 전망대에서 걸어 내려간다. | |
| 그들이 내려간 서울의 야경 위로 | |
| 전망대 철제 보호망에 채워진 수많은 사랑의 자물쇠들이 | |
| 밤하늘의 별처럼 환하게 빛난다. | |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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