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불란서 특파단

  • 작성일 2024-09-04

불란서 특파단

기하라


파리


1900년


등장인물


민영찬

도편수

꼬막손

여주인

미브렐

죠 지

모리스


*미브렐과 모리스는 1인 2역이다.



  0. 미완
   
  무대. 신비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 중앙에 태양이 있고 수성, 금성, 지구, 달, 화성이 주변을 수놓고 있다. 각 행성은 한지로 마감되어 색이 칠해져 있다. 태양은 황금색, 수성은 파란색, 금성은 붉은색, 지구는 녹색, 달은 회색, 화성은 보라색이다. 특히 지구에는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어 근대적인 지구본을 연상시킨다. 사이. 젊은 시절의 도편수가 무대로 난입한다. 우주의 고요가 깨진다. 식은땀이 흥건한 그의 얼굴에 사느냐 죽느냐, 긴장감이 감돈다. 태양계를 노려보던 그가 이내 달려든다. 부수고, 바닥에 팽개치고, 잔해를 한데 모은다. 그리고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불을 붙인다. 솟아오르는 불길.
   
  무대 암전.
   
   
   
  1. 좆
   
  화륜선 선창. 공예품이 가득하다. 의복과 장롱, 문방사우와 청화백자, 족자와 거문고, 비단과 가마 등이다. 그 물건들 사이로 몸져누워 있는 도편수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지독한 멀미에 시달리고 있다. 옆에는 꼬막손이 오물통을 들고 시중을 들고 있다. 그들은 둘 다 한복 차림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도편수는 상투를 틀고 있는 반면,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꼬막손은 단발의 더벅머리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에서 민영찬 등장. 깔끔하게 정리된 콧수염에 단정한 포마드 머리, 양복 차림을 하고 있다.
   
민영찬 (관객을 바라보며)자네가 바로 사르탈레 통역관이군. 불란서인이라지? 용케 우리나라 말을 배웠구먼. 내 말을 잘 듣게. 나는 불란서 말도 하고 아메리카 합중국 말도 한다네. 하지만 저쪽에 있는 저 둘은 외국어를 전혀 하지 못해. 그러니 불란서에 도착하면 저 두 사람 곁에 바짝 붙어서 통역을 전담해 주게. 뒷간이든, 잠자리든 무조건 따라가서 그야말로 번갯불처럼 재빨리 통역을 해 달라 이 말일세. 그게 바로 자네의 역할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당부를 마친 민영찬이 무대 중앙으로 걸어간다. 도편수가 꼬막손의 부축을 받으며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킨다.
   
민영찬 몸은 좀 어떤가?
도편수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송구할 따름입니다.
민영찬 보름 안에는 도착한다고 하니 며칠만 더 참게.
   
  민영찬의 시선이 바짝 엎드린 꼬막손에게 향한다.
   
민영찬 스승을 극진히 보살펴야 할 것이야.
꼬막손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나리.
   
  꼬막손이 벌벌 떠는 사이 도편수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어 민영찬을 바라본다.
   
도편수 나으리. 소인이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민영찬 뭔가?
도편수 그······불란서란 곳이 대체 어떤 곳입니까?
민영찬 대국이네. 그렇게만 알면 되네.
도편수 그럼 만국박람회는 또 무엇입니까?
민영찬 자국의 문화를 자랑하는 천하제일대회 같은 것이네.
도편수 그 대국의 땅에 무엇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까?
민영찬 일종의 전시관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아네. 무엇을 짓든 자네하고 제자만으로는 무리겠지. 불란서에도 목수는 있을 것이니 그쪽과 협력하면 되지 않겠는가?
   
  짧은 사이. 도편수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뗀다.
   
도편수 기후가 다르니 땅이 다를 것이고, 땅이 다르니 목재의 성질도 다를 것입니다. 불란서에도 목수는 있을 것이나 어찌 그들이 조선의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것이 걱정입니다.
민영찬 어허! 황제 폐하의 명으로 국호가 바뀐 지 언제인데 여태 조선이란 이름을 쓰는가. 대한제국! 이 국호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도편수 (머리를 조아리며)소, 송구합니다. 저 같은 아랫것이 감히 무엇을 알겠습니까.
민영찬 아랫것이라니! 갑오개혁으로 엄연히 신분제가 철폐되었것만! 아직도 아랫것 운운하는가.
도편수 제, 제가 윗것은 아니지 않습니까요.
   
  짧은 사이. 민영찬이 도편수 쪽으로 머리를 기울인다.
   
민영찬 대.
   
  도편수와 민영찬의 눈이 마주친다.
   
민영찬 따라해 보게. 대.
도편수 대.
민영찬 한.
도편수 한.
민영찬 제국.
도편수 제국.
민영찬 알겠는가?
도편수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으리.
민영찬 내 자네의 염려를 모르는 바 아니나, 황제 폐하의 명이니 마땅히 해내야만 하네. 그럼 그렇게 알고, 도착할 때까지 몸이나 잘 추스르고 있게.
   
  뒷짐 진 민영찬이 오른쪽으로 퇴장한다. 짧은 사이. 힘껏 기지개를 켜는 꼬막손.
   
꼬막손 다리에 쥐나서 혼났네. 스승님. 멀미도 양반은 피해 가나 봅니다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으니 말입니다요.
도편수 그러게 말이다.
꼬막손 근데 스승님. 국호가 바뀌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요?
도편수 신분제 폐지니 단발령이니······ 우리 같은 아랫것들은 알 필요 없는 일들이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원하는 대로 말해 주면 될 일이야.
꼬막손 그러게 말입니다요.
도편수 저 양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을 섞어 주는 것만 해도 꽤 생각해서 해 주는 일이겠지. 생판 모르는 남의 나라에서 일할 사람이라고는 우리 둘밖에 없으니. 조선 땅에서처럼 함부로 하대할 수는 없을게다.
   
  도편수가 신음과 함께 길고 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오물통에 토악질을 한다.
   
꼬막손 (도편수의 등을 두드리며)스승님. 임무가 막중한데 어서 기운을 차리셔야 합니다요.
도편수 (신음과 한숨)아직도 모르겠느냐? 우리 처지 말이다.
꼬막손 처지······ 말입니까요?
도편수 퇴물이 된 이 몸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건 현역들이 모두 기피했다는 뜻이다. 그게 뭘 의미하겠느냐?
꼬막손 그만큼 스승님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요.
도편수 이 어리석은 녀석아······ 이런 걸 두고 좆 됐다고 하는 것이다.
   
  눈을 끔벅이는 꼬막손. 도편수의 한탄이 이어진다.
   
도편수 좆이로구나. 좆.
   
  무대 암전.
   
   
   
  2. 하숙집
   
  하숙집. 방과 거실이 하나로 합쳐진 구성. 왼쪽은 출입문, 오른쪽은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중앙에 야전 침대 세 개가 놓여 있고 책상, 의자, 축음기 등 생활용품이 보인다. 축음기에서는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왼쪽 출입문에서 여주인 등장. 앞치마 차림의 그녀가 샹송에 맞추어 가볍게 리듬을 탄다. 그리고 손짓한다.
   
여주인 이쪽이에요. 들어들 오세요. 어서요.
   
  쭈볏거리며 민영찬, 도편수, 꼬막손 등장. 민영찬은 현대식 가방을 들고 있고 나머지 둘은 봇짐을 지고 있다. 꼬막손이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음악이 멈춘다.
   
여주인 축음기는 이게 문제야. 항상 너무 짧다니까. 나는 아직 만족 못 했는데.
   
  원리를 이해하고 싶은 꼬막손이 축음기를 살펴본다. 민영찬이 헛기침을 한다.
   
민영찬 크고 깨끗하군. 마음에 듭니다. 다른 방은 어디에 있소?
여주인 네?
민영찬 다른 방 말이요. 보시다시피 우리는 세 명이오.
여주인 (침대를 가리키며)여기 있잖아요. 이 방이 3인용이에요.
민영찬 뭔가······ 착오가 있는 거 같군. 나는 대한제국 특파대사요. 대한제국은 당신에게 매월 은화를 주기로 약조하고 3층짜리 남향집을 빌렸소. 그런데 여기 2층에서 세 명이 같이 지내라고?
여주인 그쪽이야말로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군요. 여기가 바로 3층짜리 남향집 맞아요. 1층에 있는 식당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하고, 2층에서 잠을 자죠. 침대도 세 개 마련해 놓았어요. 무슨 문제 있어요?
민영찬 3층은?
여주인 3층은 내가 묵는 곳이에요. 혹시 3층을 원해요? 나한테 관심 있어요?
민영찬 관심이라니. 어찌 경망스럽게 그런 말을!
여주인 그럼 뭐죠?
   
  한숨을 쉰 민영찬이 여주인에게 다가가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민영찬 나는 한 나라의 특파대사요. 대한제국에서 그만한 집세를 냈는데 특파대사를 위한 방 한 칸이 따로 없단 말이오?
여주인 아하. 이제 알았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여주인이 도편수와 민영찬을 번갈아 쳐다본다.
   
여주인 (속삭인다)독방을 원하는 거군요?
민영찬 말하자면 그렇소.
여주인 특파대사라. 혹시 귀족이신가요?
민영찬 우리나라 말로는 양반이라고 하지.
여주인 그런데 어쩌지요? 이쪽은 혁명 때 왕족의 목을 쳐 버린 나라인데.
민영찬 목? 목을 쳐? 넥 슬라이스?
여주인 민중이 왕비의 목을 잘라 버렸죠. 단두대에서요.
   
  짧은 사이.
   
여주인 어때요? 귀족 대접 좀 해 드릴까요?
민영찬 대한제국엔 귀족이 없소. 정확히 일치하는 단어가 없어서 통역에 오해가 좀 있었던 모양이오. 불편함을 참는 것도 군자의 도리 중 하나지.
   
  민영찬이 도편수와 꼬막손을 돌아본다.
   
민영찬 다들 문제없는가?
꼬막손 이 정도면 궁궐입지요.
   
  도편수가 꼬막손의 입을 막는다. 민영찬이 여주인에게 억지웃음을 짓는다.
   
민영찬 다들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군. 이제 나가 보시오.
여주인 문제없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요.
   
  콧노래를 부르며 여주인 퇴장. 민영찬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쉰다.
   
도편수 (혼잣말)백 년 묵은 구미호가 여기 있었구먼.
   
  맨 왼쪽 침대에 가방을 올려놓고 짐을 푸는 민영찬.
   
민영찬 로마에 왔으니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
   
  꼬막손이 도편수에게 속삭인다.
   
꼬막손 스승님. 여기 불란서 아니었습니까요?
도편수 그러게 말이다.
민영찬 자, 도편수. 이리 오게.
   
  불안한 예감과 함께 민영찬에게 다가가는 도편수. 민영찬이 주머니칼을 내민다.
   
민영찬 자르게.
도편수 네?
민영찬 (상대방의 머리를 가리킨다)이거 말일세. 이거.
도편수 머리······ 머리 말씀입니까?
민영찬 상투 말일세, 상투.
도편수 머리카락을 자르란 말씀입니까?
민영찬 아무리 단발령을 내려도 촌부들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도망만 다니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이곳은 외국이고 지금 자네는 대한제국을 대표해서 여기 와 있지 않은가. 외국인의 눈에 그 상투가 어찌 비치겠는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미개한 국가라고 오해를 받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러니, 자르게.
도편수 그, 그 뭐시냐. 신체는······ 수지발모라 하여······
민영찬 설마 지금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그 얘기를 하는 건가? 아 글쎄, 그건 조선에서나 통했던 법도라니까. 지금은 대한제국일세. 한낱 개인은 시대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야.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을 어길 셈인가?
   
  마지못해 주머니칼을 받드는 도편수. 호흡이 가빠지고 손이 떨린다. 보다 못한 꼬막손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꼬막손 나리! 그냥 못 본 척해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요? 이 몸이야 천둥벌거숭이라 기꺼워하며 단발령을 따랐습니다만 스승님은 연세도 있으신데 어찌 머리를.
민영찬 어허! 자르래두!
   
  왼손으로 상투 끝을 잡은 도편수가 서서히 칼을 갖다 댄다. 그가 질끈 눈을 감는다.
   
  무대 암전.
   
   
   
  3. 바깥
   
  민영찬, 도편수, 꼬막손이 마차를 타고 있다. 활기찬 거리의 소음. 귀밑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가 된 도편수가 울먹이고 있다.
   
민영찬 거 그만 좀 하게. 나이도 벼슬 아닌가. 체통을 지키셔야지. 이발 좀 했다고 계속 울먹이면 쓰나. 코흘리개도 아니고. 자네 말이야, 이제야 새 시대에 맞는 새사람이 된 걸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도편수 (울음을 삼키며)소인은 그런 게 아니오라.
   
  꼬막손이 어린아이를 달래듯 도편수의 등을 두드려 준다.
   
민영찬 자, 이 거리를 좀 보게. 잘 정비된 도로와 활기찬 사람들. 철로 만든 탑과 돌로 만든 집들을 좀 보라고. 축제로군. 지금 파리는 온통 축제야.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서 자국의 문화를 뽐내기 위해 온갖 준비를 서두르고 있어. 놀랍지 않은가? (짧은 사이)스승 말고 제자가 한 번 말해 보게. 꼬막손이?
꼬막손 이, 이놈이 뭘 알겠습니까요.
민영찬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한 번 말해 보거라. 너도 사람인데 소감이란 게 있을 거 아니냐.
   
  스승과 민영찬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떼는 꼬막손.
   
꼬막손 누, 눈이 돌아가기는 합니다요. 하지만 그게 과연 대단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요. 집이 웅장한 것은 땅이 넓어서 그런 것이고, 돌로 지은 것은 나무보다 돌이 흔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요? 때깔 번지르르한 석조전이야 조선, 아니 대한제국에도 지어지고 있지 않습니까요.
민영찬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다? 편리하군. 참 쉽고, 성의 없는 해석이야. 네 놈, 나와 말 섞기가 싫은 게로구나.
꼬막손 그, 그럴리가 있겠습니까요. 이, 이놈은 그저 무식할 뿐입니다요.
민영찬 자네 말대로 대한제국에도 석조전은 있네. 뿐인가. 전기, 전차, 전신 같은 신문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채워지고 있지. 하지만 그 모든 게 금광을 팔고 외국에서 사 온 것에 불과해. 자력 강국의 길은 멀기만 한데 과연 시대가 대한제국을 기다려 줄까? 나는 그것이 걱정이야.
꼬막손 서로 속도가 다르다면 우리는 우리대로 살고, 이들은 이들대로 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요?
   
  민영찬이 웃음을 터뜨린다.
   
민영찬 부럽군. 아무것도 모르는 자네가 부러워. (정색하며)눈앞에 토끼가 있으면 호랑이는 잡아먹을밖에. 호랑이를 탓하거나 자비를 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 지금 대한제국은······ 아니,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고국에서 멀어지면 그 땅의 규율에서도 멀어지기 마련. 나도 거기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군. 한낱 바치들에게 이런 얘기까지 하다니.
   
  도편수와 꼬막손이 불안한 눈빛으로 민영찬을 바라본다. 도편수에게 속삭이는 꼬막손.
   
꼬막손 스승님. 먹힌 쪽이 아니라 먹은 놈이 나쁜 놈 아닙니까요?
도편수 이놈아. 네 놈이 무엇을 안다고.
꼬막손 인간이 한낱 짐승은 아니지 않습니까요.
도편수 아, 글쎄. 짐승 이상인지, 이하인지. 우리 같은 것들이 뭘 안단 말이냐.
   
  도편수가 민영찬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한다. 침묵.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다. 주변이 조금 어두워진다. 인적이 드물고 후비진 곳이다. 사이. 마차가 멈춘다.
   
민영찬 도착한 모양이군. 다들 내리게.
   
  민영찬, 도편수, 꼬막손이 낯설고 텅 빈 공간에 내린다.
   
도편수 나으리. 여기가 어딘지요?
꼬막손 저쪽은 밝고 활기찬데 여기는 찬바람이 붑니다요.
민영찬 이곳이 바로 우리가 전시관을 지어야 하는 곳이네.
도편수 전시관? 이곳에 말입니까?
민영찬 그렇게 통보 받았네.
꼬막손 여기는 축제의 바깥이 아닙니까요.
민영찬 바깥은 아니네. 최북단이긴 하지만.
   
  터를 둘러보는 세 사람. 한기가 돌고 찬바람이 분다.
   
꼬막손 아무것도 없습니다요.
도편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민영찬 이제부터 설득해 봐야지.
도편수 누구를 말입니까?
민영찬 만국박람회 건축위원회 총무대원.
꼬막손 누구 말입니까요?
민영찬 미브렐 백작!
   
  민영찬이 서둘러 마차에 오른다. 도편수와 꼬막손이 멀뚱히 그를 바라본다.
   
민영찬 자! 어서들 타라고! 우리에겐 시간이 없네!
   
  도편수와 꼬막손, 여전히 멀뚱하다.
   
  무대 암전.
   
   
   
  4. 황제의 여름 궁전
   
  집무실. 미브렐이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전면 벽에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다. 노크 소리.
   
미브렐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들어오시오.
   
  다시 노크 소리. 미브렐이 얼굴을 들어 출입문을 본다. 문이 열리며 일렬로 민영찬 일행 등장. 집무실로 들어온 그들이 좌우로 정렬한다. 꼬막손의 손에 상자 하나가 들려 있다. 쇳대 자물쇠로 잠겨 있는 상자다. 그들을 본 미브렐이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사이. 민영찬이 도편수의 옆구리를 찌른다.
   
도편수 종2품 법부협판, 준비위원회 부총재대원, 대한제국 특파대사 민영찬 납시오!
   
  민영찬이 헛기침과 함께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민영찬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하사품입니다.
   
  품에서 열쇠를 꺼내서 꼬막손이 들고 있는 상자를 열려고 하는 민영찬. 그러나 자물쇠가 풀리지 않는다. 사이. 미브렐이 재차 시간을 확인한다. 민영찬의 얼굴이 붉어지고 식은땀이 난다.
   
민영찬 이, 이게······.
   
  애써 보지만 풀리지 않는 자물쇠.
   
민영찬 (혼잣말)열려라. 어서. 어서 열리지 못할까.
   
  달그락, 달그락 자물쇠 소리. 미브렐이 팔짱을 끼고 빤히 그들을 바라본다. 보다 못한 도편수가 민영찬에게 속삭인다.
   
도편수 소인이 해보겠습니다.
   
  열쇠를 건네받은 도편수가 상자를 열려고 시도한다. 곧바로 풀리는 자물쇠.
   
민영찬 (헛기침)홍삼입니다.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린.
   
  미브렐이 비로소 입을 연다. 그의 말투는 나른하고 무관심하다.
   
미브렐 귀한 선물 감사합니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오셨군요. 일단 앉으시지요. 선물은 나중에 확인하겠습니다.
   
  민영찬이 앞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책상 하나를 두고 마주 보는 두 사람. 그들이 거의 동시에 손을 내민다. 미브렐은 악수, 민영찬은 명함이다.
   
미브렐 아, 이거 실례.
   
  민영찬의 명함을 받은 미브렐이 뒤늦게 자신의 명함을 건넨다.
   
미브렐 (민영찬의 명함을 살펴보며)앞면엔 알파벳. 뒷면엔······ 이 복잡한 글자를 한자라고 부르지요? 본 적이 있습니다. 한자 옆에 있는 귀여운 글자는 뭡니까?
민영찬 한글이라고 합니다. 대한제국 고유의 글잡니다.
미브렐 한글이라······ 글자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흔치 않지요. 알파벳, 한자, 한글. 멋진 명함입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알고 계시지요? 작년 말에 전임자가 죽은 것.
민영찬 듣기로는 저녁 식사 중에 올리브 씨가 목에 걸렸다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진심으로 그레옹 남작의 명복을 빕니다.
미브렐 황당한 일이지요. 올리브 씨 하나가 역사를 바꾸다니. 후원자의 사망으로 대한제국의 만국박람회 참가는 무산될 뻔 했습니다. 거의 그랬지요.
민영찬 그게 바로 제가 급파된 이유입니다.
미브렐 불행인지 다행인지 총영사관님의 추천으로 제가 그레옹 남작의 뒤를 잇게 됐습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도 계획이 조금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돈과 시간이 문제이지요.
민영찬 이해합니다.
   
  미브렐이 책상에 가득한 서류를 뒤적인다.
   
미브렐 서류에 따르면 전임자인 그레옹 남작은······ (혼잣말)이걸 뭐라고 발음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저······잣거리? 저좟거리? 일종의 파사주를 재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시장 옆에 전시관도 짓고요. 하지만 지금은 원래 배정되어 있던 부지가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입니다. 때문에 파사주와 전시관,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민영찬 안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부지를 확인했습니다. 끄트머리를 배정 받은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지가 절반이나 줄어든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한제국은 정식으로 항의하는 바입니다. 도대체 어떤 나라가 대한제국의 부지를 대신 차지한 겁니까?
미브렐 나라가 아닙니다. (짧은 사이)비누 회삽니다.
민영찬 비누? 비누라고요?
미브렐 모르십니까? 위생을 위해 쓰는 물건 말입니다. 하얀 거품이 나는. 부지 절반은 비누 회사의 홍보관으로 이미 배정이 끝났습니다.
민영찬 우리도 비누가 무엇인지는 압니다! 비누라니······ 한 국가의 위상이 비누 회사보다 못하단 말씀입니까?
미브렐 진정하시지요. 그렇게 흥분하면 더 이상 대화가 어렵습니다. 만국박람회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겁니까?
민영찬 참여하고 싶습니다. 만국박람회에 참여해서 대한제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특파대사의 권한을 가지고 일꾼 두 명과 함께 여기까지 온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여기까지 표류하듯 떠밀려 왔습니다. 그레옹 남작이 있었다면 대한제국을 이렇게까지 홀대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미브렐 그레옹 남작이요?
민영찬 네, 그래요! 전임자 말입니다.
   
  짧은 사이. 미브렐이 깍지를 끼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미브렐 (깍지를 풀며)민영찬 특파대사님. 때론 진실이 참 뻔하고 실망스럽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게 바로 사람들이 진실을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어쩔 수 없이 지루한 얘기를 좀 해야겠군요. 내 원래 직업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민영찬 귀족이시니 나랏일을 하시겠지요.
미브렐 그러니까 그 나랏일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일 것 같습니까?
민영찬 질문의 의도를 말씀해 주시지요.
미브렐 아프리카에 콩고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식민지 사업을 합니다. 그게 내 원래 직업입니다.
   
  민영찬의 얼굴이 떨린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미브렐 고인에 대해 뒷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해가 있으신 것 같으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레옹 남작······ 그는 장사꾼입니다. 식민지 사업을 하는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장사꾼. 이집트도 그의 작품이지요. 그가 약소국의 박람회 참가에 그토록 열을 올렸던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그레옹 남작이 장차 어떤 식으로 돈을 뜯어 가려고 했던 것인지는······ 귀국의 국격을 생각해 차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레옹 남작의 죽음은 대한제국에 있어서는 오히려 행운입니다. 저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지요. 전임자와는 다르게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게 위원회에서 맡은 제 역할이니까요.
   
  사이. 민영찬이 무겁게 입을 뗀다.
   
민영찬 그러면······ 도대체 대한제국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미브렐 박람회를 완주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을 때, 솔직히 놀랐습니다. 후원자가 죽고 계약도 파기됐으니 당연히 중도 포기하리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웬걸? 당신들이 이 멀고 먼 외국에까지 와 버린 겁니다.
   
  진지하려고 애쓰던 미브렐이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미브렐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 이상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바다를 건너온 겁니까? 물론 그 간절한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고생에 비해 그만한 보상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그 열정에 감동받아 우리 위원회에서는 없는 자리라도 하나 내어 드리려고 합니다. 성대하게는 못해도 내실 있게 꾸밀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파사주와 전시관. 둘 중 하나는 포기하십시오. (혼잣말처럼)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짧은 사이.
   
민영찬 전시관을 선택하겠습니다. 대신 전시관 건립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전권을 주십시오. 그것만은 양보 못 합니다.
미브렐 그렇게 해 드리고 싶지만 전권이랄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그레옹 남작의 마지막 유산이랄까요? 이미 입면도를 다 그려 놓았더군요.
   
  미브렐이 벽면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는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서는 민영찬. 입면도(별첨1)가 모습을 드러낸다. 상단에 SECTION COREENNE라는 제목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전시관 정면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3층 탑에 중국풍의 지붕이 얹혀 있는 정체불명의 건축물이다. 멍하니 입면도를 바라보는 민영찬 일행.
   
미브렐 그레옹 남작은 이걸 황제의 여름 궁전이라 불렀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걸어 놓은 걸 보면 꽤나 자부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계획이 있습니까?
민영찬 이게······ 이게 대한제국의 궁이라고?
꼬막손 저런 기괴망측한 궁은 생전 처음 봅니다요.
   
  입면도를 쳐다보던 도편수가 민영찬을 지나 미브렐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도편수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모두의 시선이 도편수에게 쏠린다.
   
도편수 조선 건축의 정수는 근정전에 있습니다! 근정전을 지어 보이겠습니다!
미브렐 자네가 함께 입국했다는 기술자인가? 이제 곧 3월. 만국박람회는 4월 15일에 개최 되네. 다른 나라는 이미 전시관을 완성하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야. 이제 와서 설계를 바꾸겠다고?
도편수 소인의 보잘것없는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미브렐 목숨이라니······ 야만적이군.
   
  민영찬이 반사적으로 바닥에 엎드린다. 이를 본 꼬막손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몸을 낮춘다.
   
민영찬 부탁하오! 미브렐 백작!
   
  사이. 노크와 함께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 백작님. 이제 곧 만찬 시간입니다. 시간을 조금 미룰까요?
미브렐 정말 다들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군. (출입문을 향해)아니, 지금 바로 준비해 줘요!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최소한의 자재와 일꾼은 제공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십시오. 자, 그럼 다들 돌아가 주실까요? 만찬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사적인 시간이라. 우리나라는 사적인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엉거주춤 일어나는 민영찬 일행. 미브렐이 출입문을 가리킨다.
   
미브렐 제 업무는 끝났습니다. 하긴 전시관 생김새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참가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맘껏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후련한 마음이라도 생길 테니. 자, 나가는 문은 저쪽입니다.
민영찬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또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미브렐 규정 내에서라면 얼마든지.
민영찬 고맙소. 미브렐 백작.
   
  민영찬 퇴장. 도편수가 그 뒤를 따른다. 꼬막손은 쭈볏거리다가 책상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도망치듯 퇴장한다. 짧은 사이. 상자에서 비단 꾸러미를 꺼내는 미브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 본다.
   
  무대 암전.
   
  별첨1
 
   
   
   
  5. 불란서 가정식
   
  주방. 왼쪽은 출입문. 오른쪽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중앙에 가로로 기다란 식탁이 놓여 있고 주변에 조리 도구가 그득하다. 식탁에는 촛불과 함께 식기들이 차려져 있다. 아늑하고 따듯한 분위기. 여주인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 중이다. 출입문 열리며 민영찬 일행 등장. 모두 지쳐 보인다.
   
여주인 어머. 마침 제시간에 왔네.
   
  민영찬, 도편수, 꼬막손이 차례대로 식탁에 앉는다.
   
꼬막손 스승님. 제자는 감동했습니다요. 목숨까지 거시다니요.
도편수 목숨을 걸기는······ 누가 목숨을 걸어. 그냥 해본 소리다. 고국에서 싣고 온 보물들을 그런 해괴망측한 전시관에 방치할 수는 없지 않느냐.
꼬막손 그러다 기한을 못 지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요. 이제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요.
도편수 우리야 일개 바치에 불과한데 설마 책임을 묻기야 하겠느냐. (민영찬을 살피며) 여기······ 이곳 책임자 되시는 특파대사 민영찬 나으리가 있지 않느냐.
   
  민영찬은 도편수의 시선을 모른 척하다가 헛기침을 흘린다.
   
민영찬 어허. 이 사람들아. 이곳이 대한제국인가? 여기는 불란서 아닌가. 이곳에서는······ (망설이며)함께, 함께하는 걸세. 알겠나? 함께 일하고 책임도 함께 지는 것이야. (짧은 사이)꼬막손아. 어서 저녁이나 시켜라. 일단 배부터 채우자꾸나.
꼬막손 예예, 알겠습니다요. (여주인을 돌아보며)주모. 거 국밥 세 개만 넉넉하게 말아 주시요.
여주인 주모? 국밥?
꼬막손 주모는 딱 아주머니 같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고, 국밥은 백성들이 먹는 음식이요.
도편수 이놈아. 고국에서 만리 떨어진 이곳에 무슨 국밥이 있겠느냐.
민영찬 몹시 고단하니 아무거나 주시오. 배만 채우고 올라가리다.
여주인 그런 섭섭한 말이 어딨어요. 배만 채우고 올라가다니. 이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기본이 네 시간인데.
민영찬 네 시간? 네 시간 동안 뭘 한단 말이오?
여주인 뭘 하긴 뭘 하겠어요. 삶을 즐기는 거지. 인생에 거창한 건 필요 없어요. 먹고, 마시고, 수다 떠는 게 전부라고요.
도편수 주모. 아니 세상에 네 시간이나 먹고 마시는 밥상이 있단 말이요?
여주인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만찬을 열면 그리 되지요. 우리 집에 묵는 사람들은 저한테는 모두 귀한 손님들이에요. 게다가 오늘이 첫 저녁이잖아요. 뭐든 첫 경험은 특별한 법이죠. 우리끼리 만찬을 즐겨 보자고요.
민영찬 (혼잣말)만찬이라······ 위원회에서 못 받은 대접을 여기서 받는군.
   
  여주인이 분주하면서도 우아하게 돌아다니며 민영찬 일행에게 요리를 나누어 준다.
   
여주인 시작은 앙트레와 화이트 와인이에요! 살이 오른 도톰한 생선에 홈 메이드 마요네즈를 뿌린 음식이죠.
   
  작은 포크와 생선용 나이프를 드는 민영찬. 그러나 도편수와 꼬막손은 다섯 개나 되는 식탁 용구 중에서 무엇을 사용해야 할지 모른다.
   
여주인 우리 대사님은 드실 줄 아시네. (도편수와 꼬막손에게)바깥에서 안쪽으로. 순서대로 사용하면 돼요. 모르면 그냥 아무거나 사용하시고. 여기가 뭐 귀족의 식탁은 아니니까. 내 식탁에서 지켜야 하는 규율은 딱 하나예요. 즐길 것!
   
  조심스레 와인을 맛보는 도편수. 꼬막손은 생선을 맛본다.
   
도편수 달군. 달짝지근한 술이야.
꼬막손 이 마요네즈란 것도 끈덕끈덕한 것이 고소하면서도 달달합니다요.
   
  앙트레를 모두 나누어 준 여주인이 이번에는 기다란 빵 칼로 서걱서걱 바게트빵을 썬다.
   
여주인 빵의 흰 속살에 생선과 마요네즈를 올리고 먹어 보세요.
도편수 딱딱하군.
꼬막손 부드러운 댑쇼?
도편수 질기다고 생각했는데 혀끝에서 사르르 녹는구나. 보드라운 빵의 속살과 탄탄한 생선 살을 마요네즈가 감싸주면서 또 다른 맛을 내고 있어. 비단 같은 술이 파도처럼 입안을 간지럽히는 게 아주 그만이야.
꼬막손 달콤한 향이 코끝을 살살 긁습니다요!
   
  도편수와 꼬막손이 호들갑을 떤다. 그 와중에도 민영찬은 묵묵히 식사를 계속한다.
   
여주인 아직 감탄하기는 일러요. 베샤멜 소스를 뿌린 치킨 파르스와 레드와인. 생넥테르, 로블르숑 치즈 플레이트와 과일 샐러드. 갓 구운 비스킷과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화려한 꺌리티 스트힛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알아요? 크리스마스요. (와인 잔을 올리며)만찬은 이제 시작이랍니다!
   
  도편수와 꼬막손이 같이 와인 잔을 올리며 맞장구친다.
   
도편수 지화자!
꼬막손 좋다!
민영찬 (탁! 포크를 내려놓으며)잘 먹었소.
   
  일동 침묵.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영찬. 2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주인 스탑!
   
  민영찬이 돌아본다.
   
여주인 지금······ 뭐하는 거예요?
민영찬 밥을 먹었으니 잠자리에 들 생각이오. 내일도 분명 숨 가쁜 하루가 될 테니까.
여주인 여기 당신 혼자 있어요? 어쩜 이리 이기적일까. 동료들 생각은 안 해요?
민영찬 저들은 내 동료가 아니요.
여주인 그럼 뭐죠?
민영찬 저들, 저들은···.
여주인 같이 시작했으면 같이 끝을 내야죠. 이 음식은 다 어쩌란 거예요? 내가 이 만찬을 준비하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요?
민영찬 대한제국은 당신에게 이미 은화를 지불했소. 청소, 밥, 빨래. 그게 당신 직업 아니오?
여주인 돈을 받았으니 일이나 해라? 나는 여기 집주인이고, 당신들은 하숙인이에요. 좀 더 내 눈치를 보는 게 지내기 편할걸요?
민영찬 눈치? 감히! 대한제국 특파대사에게 눈치를 보라고?
여주인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당신, 이름이 없어요? 무슨 말만 하면 대한제국, 대한제국. 국가가 곧 당신은 아니잖아요.
   
  짧은 사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간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진다. 여주인의 키가 민영찬을 웃돈다.
   
민영찬 겉모습이 다르면 생각도 다르기 마련이지. (사이)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졌군. 녹색 보석 같아. 내 처지가 우습구나. 운 좋게 강대국의 백성으로 태어난 일개 부녀자와 무엇을 논한단 말인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법.
여주인 뭐래, 병신이. 일개 부녀자? 야! 나 마드무아젤이야!
   
  등을 돌리는 민영찬. 여주인을 무시하고 2층으로 올라간다. 내내 눈치를 보던 도편수와 꼬막손이 슬그머니 와인 잔을 내려놓는다.
   
도편수 우, 우리도 올라가 봐야지. 아랫것들과 겸상하려니 저 양반도 머리가 복잡하겠지.
꼬막손 아니, 조금 전에는 함께라느니 어쩌니 하더니만. 뭔 놈의 변덕이.
도편수 어허!
   
  도편수가 꼬막손을 입단속 시킨다.
   
도편수 어서 따라오너라.
꼬막손 여, 여기 정리만 도와주고 금방 올라가겠습니다요.
   
  2층으로 올라가는 도편수. 스승이 올라간 걸 확인한 꼬막손이 입안에 허겁지겁 빵을 쑤셔 넣기 시작한다. 숨이 막힌다.
   
여주인 어머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천천히 먹어요, 천천히.
   
  여주인이 꼬막손의 등을 두드린다.
   
  무대 암전.
   
   
   
  6. 꿈
   
  하숙집 2층. 어스름하다. 민영찬, 도편수, 꼬막손이 차례대로 야전 침대에 누워 있다. 꼬막손이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인다. 암전. 사이. 어디선가 도끼질 소리가 들린다. 조금 밝아지는 무대. 민영찬이 밑동만 남은 나무에 도끼질을 하고 있다. 도편수와 꼬막손 등장. 꼬막손은 잔뜩 겁에 질리고 도편수는 무표정하다. 나무 밑동을 부둥켜안는 꼬막손. 민영찬이 도끼를 들어 올린다. 힘찬 도끼질. 암전. 사이.
   
꼬막손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스승님!
   
  날이 밝는다. 분주하게 보따리를 동여매던 도편수가 꼬막손을 쳐다본다.
   
도편수 왜 불러?
꼬막손 (두리번거리며)네?
도편수 아침부터 바쁜 거 안 보이냐? 연장 챙기고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오늘 같은 날 늦잠을 자면 쓰겠느냐.
꼬막손 그게······ 그게 아니라. 제자가······ 꿈을 꾸었나 봅니다요.
도편수 꿈?
꼬막손 (왼손으로 목젖을 감싸며)개꿈. 개꿈을 꾸었습니다요.
   
  짧은 사이.
   
도편수 어서 연장이나 챙겨라. 주모한테 부탁했더니 마차를 불러 준다지 뭐냐. 현장으로 가야지.
꼬막손 예예. 알겠습니다요.
   
  서둘러 일어나는 꼬막손. 봇짐에 연장을 챙기다가 민영찬의 침대가 비어 있는 것에 시선이 미친다.
   
꼬막손 나리는 어디 가셨습니까요?
도편수 그 양반이라면 이른 새벽에 벌써 문밖을 나섰다. 이름 있고, 힘깨나 있는 이들을 만나 기둥 하나라도 더 얻어 올 모양이다.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할밖에.
   
  도편수가 꼬막손의 등에 커다란 짐을 올린다. 여주인 등장. 손에 도시락을 들고 있다.
   
여주인 아직 멀었어요?
도편수 다 됐소.
꼬막손 갑니다요. 가요.
여주인 자, 이거. 사과랑 샌드위치예요.
꼬막손 샌드위치?
여주인 (객석에 귀를 기울이며)새참? 불란서 새참 같은 거예요. 그러고 보니 저 통역관. 참 고생이 많네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어요.
꼬막손 홍길동이요, 홍길동.
여주인 홍길동?
도편수 자자, 그만, 그만. 이러다 끝이 없겠다. 고맙소, 주모.
여주인 잠깐만요.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간 여주인이 서랍을 연다. 달그락거리며 중간에 걸리는 서랍.
   
여주인 얼마 전부터 이게 잘 열리지 않아서요. 혹시 한번 봐 줄 수 있어요? 바쁘면 어쩔 수 없고요.
도편수 그건 대목이 아니라 소목의 일이오. 꼬막손아.
꼬막손 네 스승님.
도편수 나는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네가 한번 봐 주거라. 서둘러.
꼬막손 예, 알겠습니다요.
   
  먼저 퇴장하는 도편수. 짐을 내려놓은 꼬막손이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서랍을 살핀다.
   
여주인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괜한 부탁을 한 거 아닌지 모르겠네.
꼬막손 주모가 새참까지 싸 줬는데 이 정도가 뭐 별건가요.
여주인 뭐가 좀 보여요?
꼬막손 보이지요. 형태는 달라도 원리는 같으니.
   
  짧은 사이.
   
여주인 근데 꼬막손이 무슨 뜻이에요?
꼬막손 그건 왜요?
여주인 진짜 이름이 따로 있을 거 같은데 다들 꼬막손이라 불러서.
꼬막손 내가 손끝이 야물지가 못해요. 아이들처럼 실수가 잦다고 다들 꼬막손이라 부르지요.
여주인 겸손하네. 그래도 국제 행사에 선발이 돼서 이렇게 올 정도면 실력을 인정받은 거 아니겠어요?
   
  꼬막손이 수줍게 웃는다. 소년티가 난다.
   
꼬막손 선발이 아니라 영문도 모른 채 끌려 온 거지요. 나는 중짜예요.
여주인 중짜?
꼬막손 도편수는 정승.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하늘이 내린다는 거예요. 나는 중짜. 재능이 어중간해서 명장이 되기는 글렀어요.
여주인 재능이야 갈고닦으면 되는걸.
꼬막손 하긴 갈고닦은 중짜가 무딘 중짜보다는 낫겠지요?
여주인 내 말은··· 아니다. 아니에요. 남의 일이라고 내가 너무 순진한 말을 했어.
   
  그때 아래층에서 도편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편수 꼬막손아! 아직 멀었느냐?
꼬막손 예 스승님! 갑니다요!
   
  꼬막손이 서랍을 닫으며 일어선다.
   
꼬막손 보니까 느슨해진 부품을 조이고 기름칠만 해주 면 될 거 같은데. 지금 도구들이 다 짐 속에 있어서. 다음에 고쳐 놓을게요.
여주인 다음에? 다음에 언제요? 해 주려면 지금 해 주어야지.
꼬막손 (짐들을 챙기며)다음에, 다음에요. 정말.
   
  여주인이 웃으며 꼬막손을 배웅한다.
   
여주인 농담이에요. 신경 안 써도 돼요. 생각난 김에 별 뜻 없이 봐 달라고 한 거니까. 어서 가요. 마차 놓치면 혼날라.
   
  꾸벅, 여주인에게 인사하는 꼬막손. 급히 퇴장한다. 여주인이 출입문을 향해 손을 흔든다.
   
여주인 힘내요! 안 되는 건 너무 애쓰지 말고!
   
  무대 암전.
   
   
   
  7. 용과 개와 돼지
   
  건축 현장. 꼬막손이 무대 중앙에 짐을 푼다. 도편수는 이곳저곳 둘러보며 생각에 잠긴다.
   
도편수 얘. 꼬막손아. 나 좀 보아라.
꼬막손 예, 스승님. 보고 있습니다요.
도편수 여기. 중앙에 근정전을 짓기 위해서는 말이다. 왼쪽에 나무, 돌 같은 자재들을 쌓아두고. 오른편에는 불가마를 하나 만들어야 쓰겠다.
꼬막손 불가마요?
도편수 기와를 구워야지, 기와. 청기와까지는 무리더라도 번듯한 기와지붕은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
꼬막손 맞습니다요. 하지만 갑자기 또 흙은 어디서 구해야 할지.
도편수 아, 바로 옆에 꽃밭이 있지 않느냐. 이곳 사람들은 저런 곳을 공원이라고 부르더구나. 흙이야 저기서 퍼 오면 되지.
   
  왼편에서 죠지 등장. 멜빵바지에 두툼한 작업용 가죽장갑을 끼고 있다. 허리띠에 망치, 니퍼, 줄자 등 도구들이 가득하다. 항상 껌을 씹고 있다.
   
죠 지 헤이. 꼬레안?
   
  빤히 죠지를 쳐다보는 도편수와 꼬막손.
   
도편수 이 서양 오랑캐가 뭐라는 게냐?
죠 지 당신들, 대한제국 사람들?
꼬막손 그렇소만. 댁은 누구요?
죠 지 콜 미, 죠지. 위원회에서 오더 때려서 도와주러 왔다.
꼬막손 뭐? 뭔 지?
죠 지 죠. 죠지.
도편수 어째······ 통역관 선생의 통역이 조금 어색한 것 같구먼.
꼬막손 불란서 말고 다른 나라 말인가 봅니다요.
   
  죠지가 허리춤에서 망치를 꺼내 든다.
   
죠 지 토크 그만. 우리 시간 없다. 원 먼스밖에 안 남았어. 허리 업! 오케이?
도편수 우리도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 근데 다른 일꾼들은? 달랑 자네 혼자 온 게야?
죠 지 다른 일꾼? 여기 있잖아. (주변을 가리키며)이 아이들이 다 일꾼이야.
   
  주변을 바라보던 꼬막손이 손사래를 친다.
   
꼬막손 안 돼. 이런 코흘리개들이 무슨 일을 한다고. (죠지에게)어이, 내 말 알아들어? 어른이 필요하다고. 다 큰 어른.
죠 지 일꾼, 어릴수록 좋다. 말 잘 듣고 돈 적게 줘도 되니까.
도편수 이곳 사람들은 평민부터 귀족까지 온통 돈 얘기뿐이로구먼.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어린아이들한테까지 일을 시키다니. 하긴······ 우리도 기저귀 떼면서부터 집안일을 돕긴 한다만은.
꼬막손 아무리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최하 열여섯은 되어야 역을 지지 않습니까요.
도편수 그러게 말이다. 어쩌면 이 나라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훌륭한 나라는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아무튼 이 어린애들은 모두 돌려보내라. 정신없고 방해만 돼.
죠 지 훌륭한 나라? 그런 거 필요 없어. 나라가 아니라 돈이 우릴 지켜 준다.
도편수 돈? 돈이 어찌 우릴 지켜주나? 돈이 있어 봤자 국밥밖에 더 사 먹어? 우릴 지켜 주는 건 나랏님이지.
죠 지 뭔 개소리야. 나랏님? 대통령 말하는 거야? 혹시 대통령 얼굴 본 적 있어? 얼굴도 모르는 놈이 날 지켜 준다고? 내가 먹고 살 수 있는 건 다 돈이 있기 때문이야. 돈은 믿어도, 인간은 믿으면 안 된다고. 돈이 최고야. 아이 니드 머니! 일하러 왔으니까 어서 일 줘. 여기서 일해야 위원회에서 나한테 돈 줘.
도편수 거참. 성격도 급하네. 하긴, 굼벵이보다는 급한 놈이 낫지.
죠 지 왓 츄어 네임?
도편수 이름? 내 이름?
   
  꼬막손이 도편수와 죠지 사이에 끼어든다.
   
꼬막손 어딜 감히.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조선 제일의 도편수이시자 그 옛날 근정전 중건에 참여하신 전설적인 분이시다.
죠 지 보스?
꼬막손 그렇지, 그렇지. 보스라고 부르라고.
도편수 어허, 이놈아. 서양 오랑캐 앞에서 도편수니 전설이니 그런 얘기가 무슨 소용이 있어. 앞으로 우리가 지을 궁. 근정전에 대한 얘기를 해 줘야지. 자, 근정전이 무엇이냐? 설명해 보거라.
꼬막손 제, 제자가 말입니까요?
도편수 너도 이제 밥값은 해야 할 것 아니냐.
   
  짧은 사이. 꼬막손이 쭈뼛쭈뼛 앞으로 나선다.
   
꼬막손 에······ 그럼 일단······ 궁궐. 궁궐이 무엇이냐. 궁은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고, 궐은 높다란 망루를 뜻하는데······ 그중 근정전은···팔작지붕을 가지고 있는 2층 전각이올시다. 전면 다섯 칸, 측면 다섯 칸 규모로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다포 양식이요.
도편수 어허, 그렇게 줄줄 외워 봤자 이해를 못 한다니까. 어이, 죠지. 자네 눈앞에 있는 저 공터를 좀 보라고. 저기에 근정전이란 궁이 올라갈 건데 말이야. 뭐가 좀 보이나?
   
  죠지가 팔짱을 낀다.
   
죠 지 노. 아무것도 안 보여.
도편수 거 봐라.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하지 않느냐. 우선 상상을 해야지. 모든 바람은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공자 왈, 맹자 왈 줄줄 외기만 하지 말고 눈앞에 근정전이 그려지도록 상상력을 자극해 보란 말이다.
꼬막손 그, 그럼 제자가 이야기라도 하나 지어 보일깝쇼?
도편수 이야기?
꼬막손 이 이야기는 말입니다요. 어느 날인가 낮잠을 자다가 한 번 상상해 본, 그런 이야기입니다요. 제목은 이렇습니다요. 왜 근정전에는 용과 개와 돼지가 없는가?
   
  목을 가다듬은 꼬막손. 주변이 어두워지고 중앙에 밝은 빛이 떨어진다. 그가 빛으로 들어선다.
   
꼬막손 옛날 옛적 바다 건너 아주 먼 나라에 한 왕이 있지 않았겠소. 왕에게는 궁이 하나 필요했다오.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 나라를 부강케 하리라. 왕과 신하의 지혜를 모아 뜻을 이룰 수 있는 그런 궁. 대목장은 왕과 백성을 생각하며 온갖 정성으로 그 궁을 지었다오. 하늘 님이여 우리를 보우하사 푸르른 청기와를 올리고. 먼 곳까지 살피사 바닥에 돌을 쌓고. 작은 목소리도 들으사 천장을 높였지. 그리고 열두 마리의 동물을 조각해 수호신으로 삼았다오.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도편수가 십이지신을 빠르게 호명하면 꼬막손이 동물 흉내를 낸다. 연습에 의한 능숙함보다는 즉흥적인 느낌이 중요하다.
   
꼬막손 신하가 왕에게 이름 지어 올리니 근정전이라. 왕이 부지런할수록 백성은 평안하리란 뜻이었소. 그 크고 바른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가. 근정전이란 이름 아래 십이지신이 눈을 떴다오. 순간, 깨어난 용이 그대로 구름 속에 숨었소. 어좌에 이미 다른 용이 앉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오. 뿐인가, 개도 감히 짖을 곳이 아님을 알고 땅으로 숨었소. 왜냐하면 왕과 신하가 백성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했기 때문이오. 가장 늦게 눈을 뜬 돼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소. 게으른 나는 감히 이 궁을 지킬 자격이 없구나. 소원하나니 내 살과 피를 먹어 혹시 모를 나태함을 경계해 주시오. 남은 지신들이 기꺼이 돼지의 살과 피를 취했소. 그렇게 구 지신들은 자신들의 소임을 다하게 되었고, 지금도 용과 개와 돼지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그런 이야기올시다.
   
  사이.
   
죠 지 카니발적인 이야기군. 끔직해.
도편수 그렇다면 제자야. 근정전은 왕을 위한 궁이 아니구로나. 누구냐? 근정전은 누구를 위한 궁이냐?
꼬막손 백성. 백성을 위한 궁입니다요.
   
  주변이 다시 밝아진다. 무대 배경에 궁(별첨2)의 모습이 떠오른다.
   
도편수 제자야. 내 눈에는 보이는구나. 높게 휘날리는 어연(魚鳶)과 한복 입은 서양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만국박람회, 그날의 근정전이 이제야 보이는구나.
꼬막손 보입니다요. 분명 제자도 보입니다요.
도편수 어이. 죠지. 보이나? 자네도 보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죠지. 그가 고개를 젓는다.
   
죠 지 네거티브.
   
  도편수와 꼬막손이 죠지를 쳐다본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 소리 내어 껌을 씹는다.
   
  무대 암전.
   
  별첨2
 
   
   
   
  8. 꼰대
   
  하숙집 1층. 어둡다. 누군가 식탁에 앉아 레드 와인을 병째 들이켜고 있다. 왼쪽 출입문에서 여주인 등장. 손에 피켓을 들고 있다. 피켓을 내려놓고 성냥을 긁는 여주인. 주변이 밝아지며 민영찬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미 상당히 마신 모습이다. 깜짝 놀란 여주인이 뒤늦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식탁 위 촛불을 켠다. 그리고 민영찬 옆에 앉는다.
   
여주인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불도 안 켜고 무슨 술을 그렇게.
민영찬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것이오?
여주인 다른 사람들은요?
민영찬 다른 사람들?
여주인 노인과 소년이요. 벌서 며칠째 얼굴을 보지 못했어요.
민영찬 철야 중이지. 아마 오늘도 들어오지 못할 거요.
여주인 밤샘도 하루 이틀이지. 어떻게 매일······.
민영찬 시간이 없단 말이오. 시간이.
여주인 당신은요?
민영찬 나?
여주인 다른 사람들은 계속 철야 중인데 당신은 여기서······.
민영찬 뭐하고 있냐 이 말이오? 왜 술만 푸고 있느냐고? (콧방귀)가소롭군. 당신, 당신 같은 사람을 대한제국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시오? 오지랖! 오지랖이 넓다고 하오. 우리 주모는 참 오지랖이 넓다 이 말이오.
여주인 아, 그래요? 우리나라에서는 당신 같은 사람을 꽁뜨(comte)라고 해요. 오만한 백작이라는 뜻이죠. 꽁데썽덩뜨(condescendante)! 당신은 오만해요.
민영찬 축하하오! 아주 제대로 봤어. 난 양반이오. 그러니 오만할밖에. 꽁뜨? 내 귀엔 꼰대라고 들리는군. 꼰대······ 꼰대라······ 앞으로 꽉 막힌 사람을 꼰대라 부르게 될지도 모르겠군.
   
  짧은 사이. 민영찬의 시선이 피켓에 닿는다. 어쩐지 그는 여주인과 대화하는 것이 싫지 않은 눈치다.
   
민영찬 저 나무 판때기는 무엇이요?
여주인 저거요? 저거야 말로 내 걸작이에요. 오늘도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온 참이죠.
   
  여주인이 피켓을 들어서 민영찬에게 보여준다. 피켓에는 Permettre aux femmes des droits politiques! 라고 적혀 있다.
   
민영찬 (고개를 저으며)듣고 말하기는 어느 정도 하지만 읽고 쓰는 건 많이 부족하오.
여주인 (고개를 저으며)당신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어요.
   
  짧은 사이. 민영찬이 떠듬떠듬 글자를 읽기 시작한다.
   
민영찬 여성. 여성······에게······ 참정권을···허하라?
여주인 내가 직접 만들었어요. 어때요?
민영찬 참정권이라니······ 여왕이라도 되겠단 말이오?
   
  짧은 사이. 여주인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여주인 당신은 매사에 너무 진지해요. 알아요? 그게 정말 웃기다는 거. 말했잖아요. 우리나라는 여왕의 목을 벤 나라라고. 나는 한 여성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민영찬 황당한 이야기군.
여주인 왜요? 불가능할 거 같아요?
민영찬 내가 다녀 본 나라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오? 그건 바로 남성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오. 인간이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양보 할 것 같소?
여주인 지금 당장은 무리겠죠.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큰 전쟁이 나서 남자들이 많이 죽으면 그때는 싫어도 권리를 나누어야겠죠.
민영찬 끔찍한 얘기를 잘도 하는군.
   
  레드 와인을 들이켜는 민영찬.
   
여주인 전쟁이 끔찍하다는 거예요? 아니면 권리를 나누는 게 끔찍하다는 거예요?
   
  여주인이 민영찬의 손에서 술병을 뺏어서 이번엔 자신이 들이켠다.
   
민영찬 둘 다.
여주인 왜요? 이 달콤한 걸 혼자만 독차지하려고요?
민영찬 인간 사회에 평등은 불가능하오. 왜? 본성이 그러하니까. 인간도 국가도 결국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도망칠 수 없다 이 말이오. 백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평등한 나라가 있다? 속지 마시오. 그건 교묘하게 치장한 껍데기일 뿐. 그 껍데기 안에 신분제와 차별은 항상 존재할 것이오. 언제까지고.
   
  여주인의 손에서 술병을 뺏어서 다시 들이켜는 민영찬.
   
민영찬 오늘 말이오. 각국 공사를 찾아다니다가 일본 대사들과 마주쳤소. 그들이 나에게 묻더군. 어찌하여 장복을 입고 예를 갖추지 않느냐고. 나는 대답했소. 개혁을 통해 양복이 예복이 되었으니 이 또한 예를 갖춘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여러 차례 나를 붙잡고 늘어졌소. 장복이 없으면 협수라도 착용하고 공경의 예를 갖추라고 하더군. 다분히 의도적이고 노골적인 괴롭힘이었소. 마치 힘 센 아이가 자신보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꼴이었지. 나는 결국 원치 않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소. 대등하게 손을 잡는 게 아니라······ 고개를 숙이는 방식으로. 어쩌면 그들에게 항의 할 수도 있었을 것이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왜일까······ 왜 나는 그들에게 덤비지 못했을까?
   
  짧은 사이. 민영찬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여주인에게 건넨다.
   
민영찬 내 명함이오. 이 명함을 누가 만들어 주었는지 아시오? 바로 내 형님이오. 형님은 나 같이 줏대 없는 놈하고는 다르오. 얼마나 기품이 넘치시고 대쪽 같으신지. 그야말로 군자의 표본 같은 분이오. 치욕을 당하느니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하실 분이지.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일. 나는 죽음이 두렵소. 나는······ 자결이 아니라 굴종하며 사는 쪽을 택할 게 분명하오. 같은 씨에서 나왔건만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아마 나는 어머니 배 속에 용기를 두고 나왔나 보오. 나는 오만한 사람이 못 되오. 나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오.
   
  자리에서 일어서는 민영찬. 그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는다.
   
민영찬 내가 취했군. 취한 게 분명해.
여주인 당신 말이에요. 혹시······ 조국을 미워하는 거 아니에요?
   
  민영찬과 여주인의 시선이 얽힌다.
   
민영찬 뭐라?
여주인 그렇잖아요. 특파대사로 왔다면서 계속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꼭 누가 시켜서 억지로 떠밀린 사람 같아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당신의 말 속엔 조금도 나라 걱정이 없어요. 오직 자기연민만 가득하다고요. 아닌가요?
민영찬 내가······ 여기까지······ 억지로 왔다고?
여주인 나도 당신과 비슷해요. 나를 위해서라면 싸울 수 있지만 나라를 위해서라면······ 글쎄요. 뭐 놀랄 일도 아니죠. 사랑의 모습은 아주 다양하니까. 어쩌면 미움도 사랑의 감정 중 하나일 수 있어요. 아주 넓게 보면 말이죠. 자,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일단 앉아요.
   
  여주인이 민영찬을 다시 의자에 앉힌다. 그리고 두르고 있던 숄을 머리에 쓴다. 집시 같다.
   
여주인 답답하지요? 내 마음인데도 내가 나를 모르겠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 그럴 때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풀어 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품에서 타로 뭉치를 꺼내는 여주인. 민영찬이 혀를 찬다.
   
민영찬 카드? 노름이나 하자는 거요? 현실의 고뇌를 노름으로 잠시 잊자? 손잡고 현실도피라도 하자 이거요? 실망이군.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오? 정말 실망이야.
여주인 손을 잡긴 누가 손을 잡는다고 그래요. 가만히 보면 엉큼하다니까. 이건 트럼프가 아니라 타로라는 거예요. 마음을 점치고, 미래를 점치는 물건이죠.
   
  여주인이 능숙하게 타로를 섞기 시작한다.
   
민영찬 그건 미신 아니오. 당신네 나라는 과학을 숭상하는 거 아니었소?
여주인 (코웃음)난 과학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있어서 생활이 좀 편리해 지긴 했죠. 밤거리에 빛이 생겼고, 먼 거리를 빠르게 가게 됐으니까요. 또 사람을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죽이게 됐지요. 만국박람회? 그건 그냥 쇼예요. 장기 자랑 비슷한 거라고요. 그런 게 있기 전에도 사람들은 잘만 살아왔어요. (타로를 일렬로 펼치며)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아요?
민영찬 음양과 오행?
여주인 우연! 세상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태어난 것도 우연, 만남도 우연, 죽음도 우연. 이 세상은 온갖 우연으로 가득하죠. 사람들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운명이나 사랑조차도 실은 우연에 휘둘리는 가련한 요소들일 뿐이죠. 그래서 인간에게는 아주 옛날부터 어떤 무기가 필요했어요. 우연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무기.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선조들은 마침내 깨달았죠. 우연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연을 활용하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걸. 과학이 아니라 우연. 아시겠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연에는 우연. 이제 당신의 고민에 대해 말해 볼까요? 내가 과연 조국을 사랑하는가, 자신과 대한제국의 운명. 뭐 그런 거였죠? 자, 카드를 골라 봐요.
민영찬 미치겠군.
   
  다시 와인을 병째 들이켜는 민영찬. 목이 타는 듯 수시로 술을 마신다.
   
여주인 총 세 장의 카드를 골라서 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엿볼 거예요.
민영찬 여기까지 와서 점을 본다고? 이 시국에?
   
  그가 카드를 한 장 고른다. 여주인이 카드를 뒤집어서 그림을 확인한다.
   
여주인 컵 식스. 한 소년이 꽃이든 화병을 소녀에게 건네주고 있어요. 소년은 국가, 소녀는 당신을 뜻해요. 당신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군요. 조국의 요람에서 참 많은 걸 받으면서 성장했어요.
민영찬 나는 지배받는 쪽이 아니라 지배하는 쪽에서 태어났소. 그 이유 하나로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며 성장했지. 평생 노동 한번 해 본 적 없으니까. 땀 흘리며 고생하는 것은 다른 계층의 몫이었소. 나에게 조선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옳은 세계였지.
여주인 그런데 그 세계가 급변했군요. 완벽하다고 믿었던 유리그릇이 깨져 버린 거예요.
민영찬 어제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들이 오늘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게 되었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지. 이전 것을 통째로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세계를 배워야 했소. 지금도··· 배우는 중이고.
여주인 그랬군요. 신기하지 않아요? 카드 한 장 골랐을 뿐인데 당신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게. 자, 그럼 현재를 볼까요?
   
  점점 진지해지는 분위기. 민영찬이 다음 카드를 고른다.
   
여주인 더 문. 색이 다른 개 두 마리가 달을 보며 짖고 있어요. 달은 현실을, 개 두 마리는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요. 당신, 두 개의 선택지 앞에서 고민하고 있군요. 당신의 현실이 당신에게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어요. 당신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해요.
민영찬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만국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것이오. 그것 외에 달리 무슨 고민이 있겠소.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성공하는 쪽을 택하고 싶소.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겠소?
여주인 나는 만국박람회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달 혹은 태양. 당신은 좀 더 근원적이고 좀 더 거대한 선택을 해야만 해요.
민영찬 근원적이고 거대한 것?
여주인 하늘에 달과 태양이 동시에 떠오를 수는 없으니까요.
민영찬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달이나 태양. 두 개의 하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오?
여주인 자, 이제 마지막 카드가 남았어요. 신중하게 고르도록 해요.
   
  마지막 카드를 고르는 민영찬. 그러나 확신하지 못한다. 여주인이 카드를 확인하려는 순간, 민영찬이 먼저 카드를 낚아챈다. 눈이 마주치는 그와 그녀. 그가 금방이라도 카드를 구겨 버릴 것 같다.
   
여주인 참고로, 이 타로는 할머니 유품이에요.
민영찬 돌려 드리리다. 단, 그림은 확인하지 않겠소.
   
  마치 무기를 내려놓듯 천천히 카드를 내려놓는 민영찬. 여주인이 한숨을 내쉰다.
   
여주인 미래가 궁금하지 않아요?
민영찬 특파대사 민영찬의 미래는 카드 하나에 좌우되지 않소. 나는 그저 재미로 당신의 여흥에 응해 준 것뿐이오. 하지만 덕분에 하나 깨달은 게 있소. 선택! 내가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 나는 그동안 망설이고 있었소. 체면이라는 것에 발목을 잡히고 있었던 것이지. 하지만 이제 확실히 마음을 정했소. (짧은 사이)노동을 하겠소!
여주인 갑자기요? 평생 노동 한번 해 본 적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민영찬이 몇 번의 헛구역질을 참는다.
   
민영찬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현장으로 가겠소. 가서 도편수, 꼬막손과 함께 근정전을 지을 것이오. 나무를 자르라면 자르고, 바위를 깨라면 깨겠소. 나라를 위해 못 할 일이 무엇인가. 천지신명께 대한제국을 향한 나의 충정을 증명해 보이겠소!
   
  건배라도 하려는 듯 술병을 잡으려던 그가 병을 놓친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양동이에 머리를 박고 토악질을 시작한다. 짧은 사이. 여주인이 몰래 카드를 뒤집었다가 다시 덮는다. 그림을 확인한 그녀가 말없이 민영찬을 바라본다.
   
  무대 암전.
   
   
   
  9. 이음과 맞춤
   
  현장. 무대에 목재, 돌 등의 자재가 쌓여 있다. 오른편에 벽돌로 만든 불가마가 보인다. 맨발의 꼬막손이 불가마 옆에서 찰흙 더미를 밟고 있다. 꾸벅꾸벅 졸다 깨기를 반복한다. 매우 초췌해 보인다. 기단 근처에서 도편수와 죠지가 대화 중이다. 도편수가 자재 위에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토막 두 개를 올려놓는다.
   
도편수 이렇게 좌우로 나란히 놓는 걸 이음.
   
  이번에는 나무토막 위에 다른 나무토막을 올려놓는다.
   
도편수 위아래로 놓는 걸 맞춤이라고 한다. 건축은 이 이음과 맞춤의 집합인 게야.
죠 지 블록 쌓기네. 나도 어렸을 때 이런 놀이 많이 했어. 블록으로 탑 쌓는 놀이. 프라블럼은 이걸 어떻게 고정할 건데? 이거 바람만 불어도 쓰러져.
도편수 결구 방법이야 무궁무진하지.
   
  끌과 망치를 손에 쥔 도편수가 나무토막 두 개를 추려서 각각 끄트머리를 깎는다.
   
도편수 반턱, 주먹장, 나비장, 맞장부, 메뚜기장, 상투걸이, 지옥장부, 제비초리.
   
  하나는 요(凹) 다른 하나는 철(凸) 모양이다.
   
도편수 이음과 맞춤을 위해서는 암놈과 수놈이 필요하지. 움푹 들어간 암놈을 장부구멍. 툭 튀어나온 수놈을 장부라고 한다.
   
  요와 철을 맞추는 도편수. 요철이 합쳐져 두 개의 목재가 하나가 된다.
   
죠 지 이거······ 섹스네.
도편수 섹스?
죠 지 블록끼리 섹스를 시켰어. 결구 방법이 많다고? 그거 섹스 포지션이야. 체위가 다양한 것처럼 블록끼리 결합시키는 방법도 다양한 거지. 내 말이 틀려?
도편수 이 서양 오랑캐 놈이 무슨 말을 하는 게야?
죠 지 그런데 보스. 한 가지 문제가 있어. 이음과 맞춤? 이거······ 그냥 토이 같은 거야. 오케이? 우리도 가구나 소품을 만들 때 이런 식으로 하기도 해. 퍼즐 같아서 재밌지. 하지만 너무 비효율적이야. 봐봐.
   
  죠지가 허리춤에서 망치와 못을 챙겨 든다.
   
죠 지 (나무토막 위에 나무토막을 올린다)원, (못을 갖다댄다)투, (망치로 못을 박는다)쓰리. 오케이? 못을 쓰면 쓰리 세컨드 피니쉬야. 이걸 일일이 구멍을 파고 모양을 맞춰? 공사 기간이 세 배는 더 늘어날걸?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는 도편수.
   
도편수 죠지······ 이 어리석은 서양 오랑캐야. 만물은 숨을 쉰다. 너와 나는 물론이고, 이 나무하고 쇠도 숨을 쉰다고. 그런데 나무하고 쇠는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의 양이 다르다 이 말씀이야. 겨울에 줄어들고, 여름에 늘어나는 정도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난다고.
   
  도편수가 못질한 나무토막을 들어 올린다.
   
도편수 이 못이 얼마나 버티겠느냐 이 말이다. 십 년? 백 년? 나무와 나무의 결합은 천년을 버틴다.
   
  머리를 젓는 죠지. 껌 씹는 소리가 요란하다.
   
죠 지 보스. 이 신비로운 동양의 목수야. 방금 당신이 말한 그걸 전문용어로 팽창 계수라고 하는 거야. 나무와 쇠는 당연히 팽창 계수가 다르지. 우리라고 그걸 모를 것 같아? 하지만 노 프라블럼이야. 와이? 보수하면 되니까. 천년? 그렇게 따지면 석조 건물은 만년은 버티겠다. 오 마이 갓! 보스! 우리는 지금 1년이면 철거할 전시관을 짓는 거야. 원이어 디스트로이! 오케이? 천년이나 버틸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고.
도편수 필요 없는 것과 하지 못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야. 이 사람아, 왜 그걸 몰라.
   
  죠지가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한걸음 물러선다.
   
죠 지 오케이, 오케이. 나 무기 없어. 보스와 싸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궁금한 거 하나 있어. 어제 설명해 준 거 있잖아. 지붕에 올리는 토템. 원숭이였나?
도편수 잡상 말이냐?
죠 지 그래, 잡상. 그걸 왜 80개나 만들어서 올려야 하냐고. 거기서 시간 엄청 로스트 될 거야. 그거, 기능적으로 아무 역할도 없잖아. 잡상만 생략해도 시간 엄청 절약 될 거라고.
도편수 열 개씩 총 여덟 군데에 올려야 하니까 80개지.
죠 지 아니, 방법을 모르겠다는 게 아니야. 왜냐고 묻는 거야. 있으나 마나 한 장식을 왜 80개나 올려야 하냐고. 왜?
도편수 왜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쭉 그렇게 해 왔으니까 그런 게지.
죠 지 그러니까 왜 옛날부터 쭉 그렇게 해 왔냐고.
도편수 그야······ 옛날부터······ 옛날부터······쭉······.
   
  도편수가 생각에 잠긴다. 짧은 사이. 왼쪽에서 민영찬 등장. 도편수에게 다가간다.
   
민영찬 (헛기침)고생이 많네. 별일 없는가?
   
  민영찬을 발견한 도편수가 허리를 숙인다. 멀뚱히 민영찬을 바라보는 죠지. 도편수가 억지로 죠지의 머리를 숙인다. 꼬막손은 조느라 민영찬의 등장을 알지 못한다.
   
도편수 나으리. 오셨습니까?
민영찬 이 서양인은 누군가?
도편수 위원회에서 붙여 준 일꾼입니다. 꽤 솜씨가 있습니다.
   
  죠지가 도편수에게 손을 내민다.
   
죠 지 하우 아 유?
도편수 (악수하며)아임 파인. 땡큐. 앤 유?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도편수가 죠지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통성명을 마친 민영찬이 도편수를 돌아본다. 입술이 달싹거리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민영찬.
   
도편수 여기까지 어인 행차십니까? 나으리.
민영찬 어인 행차라니. 그 말은 좀 섭섭하구먼. 내가 못 올 곳에 왔는가? 여기 짓고 있는 전시관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냐는 말일세.
도편수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오라.
민영찬 됐네, 이 사람아. 농을 던진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말게. 내 그간 각국의 여러 대사들을 만나며 대한제국을 알리는 데 힘을 쏟지 않았겠는가.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지 이제 만날 사람이 없지 뭔가. 할 일이 없다는 뜻이야. 그렇다고 명색에 특파대사인 내가 멍하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오늘부터 나도 공사에 참여하기로 했네.
도편수 공사에 참여하시겠다는 게 어떤······ 뜻이신지.
민영찬 말 그대로일세. 노동을 하겠다는 뜻이야.
도편수 노동? 일꾼이 되겠다는 말씀이옵니까?
   
  의욕에 찬 민영찬이 팔을 흔들며 사방을 둘러본다.
   
민영찬 자, 무슨 일부터 할까?
   
  민영찬의 시선이 구석에 있는 꼬막손에게 닿는다.
   
민영찬 저런 저. 얼마나 피곤하면 서서 잠을 잔단 말인가. 내가 나서야겠구먼.
   
  꼬막손에게 다가가는 민영찬. 도편수와 죠지가 뒤따른다. 꼬막손은 반쯤 잠든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찰흙만 밟는다.
   
민영찬 (꼬막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꼬막손아!
   
  화들짝 놀란 꼬막손이 그대로 주저앉는다.
   
꼬막손 나, 나리. 오셨습니까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다 다시 엎드리는 꼬막손.
   
꼬막손 이놈이 그만 깜박 정신이 나갔던 모양입니다요.
민영찬 얼마나 피곤하면 서서 잠을 다 자느냐. 잠시 숨 좀 돌리거라.
꼬막손 아, 아닙니다요.
민영찬 어허. 이리 나오래도.
   
  꼬막손을 끌어내는 민영찬. 꼬막손이 못 이기는 척 찰흙 더미에서 내려온다.
   
민영찬 잠깐 이것 좀 맡아 두고 있거라.
   
  민영찬이 양복저고리와 양말을 벗어서 꼬막손에게 건네준다.
   
꼬막손 무, 무엇을 하시려고······.
   
  눈을 끔벅이던 꼬막손이 도편수 옆에 붙어서 속삭인다.
   
꼬막손 스승님. 도대체 이게 무슨 변고입니까요?
도편수 낸들 알겠느냐. 뭘 잘못 먹은 게지.
   
  바짓단을 접고 찰흙을 밟기 시작하는 민영찬. 도편수와 꼬막손이 기겁한다.
   
도편수 나으리!
꼬막손 오매! 오매! 아, 아니됩니다요! 나리! 이놈이 하겠습니다요!
민영찬 옛날 조선에서는 왕께서 직접 농사도 지으셨다. 겨우 종2품인 내가 찰흙 좀 밟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이리 호들갑이냐.
도편수 그래도 어찌 이 천한 일을······.
민영찬 노동이 천하다고 누가 그러더냐? 우리는 조선인이 아니다. 우리는 대한제국인이야. 자, 한 번 외쳐 보거라. 나는 대한제국인이다!
꼬막손 나, 나는 대한제국인이다!
도편수 나는 대한제국인이다!
민영찬 대한제국! 만세!
꼬막손 (동시에)대한제국! 만세!
도편수 (동시에)대한제국! 만세!
   
  적막. 허망하고 어색하다. 죠지가 한 걸음 떨어져서 세 사람을 바라본다.
   
  무대 암전.
   
   
   
  10. 우주
   
  어둑한 가운데 모닥불을 피운 중앙만이 아늑하다. 왼편에서 죠지가 잠을 자고 있다. 코를 골다 몸을 뒤척인다. 오른편에선 민영찬이 비몽사몽이며 찰흙을 밟고 있다. 언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도편수와 꼬막손은 모닥불 곁에서 기와를 만들고 있다. 양동이에 찰흙을 붙이고 굴려서 모양을 잡는 작업이다. 장작 타는 소리.
   
꼬막손 스승님. 눈 좀 붙이시지 말입니다요.
도편수 갈 길이 아직 멀구나.
꼬막손 이러다 몸이라도 상하시면.
도편수 세상만사 겪을 만큼 겪은 몸뚱이다. 이제 와서 아까울 게 무엇이 있겠느냐.
   
  말없이 손이 바쁜 두 사람. 꼬막손이 밤하늘을 바라본다.
   
꼬막손 어째 이 나라는 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요.
도편수 별?
꼬막손 예. 조선 땅은 하늘 가득 별이 빛나지 않습니까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습지요. 여기는 흐릿한 게 뭔가 안개가 낀 거 같습니다요. 코가 따갑고 숨도 갑갑하지 뭡니까요. 하늘은 다 같은 하늘일 텐데. 소인의 기분 탓이겠지요?
도편수 그야 모르는 게다. 땅이 다르면 하늘도 다를지 어찌 알겠느냐.
   
  꼬막손을 따라 도편수도 밤하늘을 바라본다.
   
도편수 별이라···.
   
  잠시 생각에 잠긴 도편수가 이윽고 입을 연다.
   
도편수 꼬막손아.
꼬막손 예, 스승님.
도편수 아주 예전에 말이다. 나에게 제자 아닌 제자가 한 명 있었다.
   
  장작 타는 소리.
   
도편수 그때 나는 솜씨 있는 목수로 작게나마 이름을 알리고 있었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만, 아마 근정전 중건을 앞두고 있었던 즈음일 게다. 한 양반집 도령이 날 찾아왔더랬지. 본인이 선교사한테 서학을 배웠는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나? 태양, 달, 지구······ 저 하늘의 별들이 서로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모두 우주의 일부라고 하지 무어냐. 그렇게 이상한 얘기를 잔뜩 늘어놓더니 대뜸 자기가 배운 걸 그대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더구나. 후학을 위해 교구로 쓰겠다고 하면서.
   
  무대 배경에 수많은 별이 떠오른다.
   
꼬막손 우주······ 말입니까요?
도편수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말이다. 아니 될 말이었지. 붓을 잡던 손으로 끌과 망치를 들겠다니. 나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그 부탁을 거절했다. 그런데 그 도령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오는 게 아니겠느냐.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내가 뭐라고 이 양반집 자제가 여기까지 찾아올까. 이토록 간절한데 그깟 기술 가르쳐 주자. 그날부터 그 도령에게 목공을 가르쳐 주었지. 그 도령이 말이다. 글쎄 재주가 있지 무어냐. 손이 빠르고 마음이 침착해서 나무를 깎고 다루는 법을 금세 익혔지. 나중에는 지구본이란 걸 만들어서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에게 가르쳐주기까지 했단다. 나는 말이다. 기뻤다. 참 신이 났어.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양반과 함께 뭔가 해냈으니까. 그들도 사람이구나 싶었지.
   
  꼬막손이 조심스레 묻는다.
   
꼬막손 그 도련님은 어찌 되었습니까요? 우주를 완성했습니까요?
도편수 죽었다. 절두산이란 곳에서 머리가 잘려 죽었어. 서양 미신에 빠져 미풍양속을 혼탁케 했다는 것이 이유였지. 그날, 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누군가 묻더구나. 저 도령과 알고 지내지 않았느냐고.
   
  짧은 사이.
   
도편수 모르오! 정말 모르오! 죽어도 모르오!
   
  장작 타는 소리.
   
도편수 태워 버렸다. 그 아이와 만들었던 모든 걸 태워 버렸어. 그때 다짐했다. 개가 되겠다고. 바짝 엎드려 순응하며 살겠다고. 그런데 말이다. 끝내 완성하지 못했던 그 우주가 내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요즘 들어 자꾸 의구심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때 그 다짐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이제 와서는 상관없는 일이지. 무언가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아직 젊다. 꼬막손아, 너는 이 스승처럼 살지 말거라.
꼬막손 스승님, 어찌 그런.
도편수 이곳에 와서 내가 느낀 건, 어쨌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처럼 방관자로 살지 말거라. 무엇인 부끄러운 것인지 모르게 되니까. 나처럼 엎드려 살지 말거라. 무엇이 비굴한 것인지 모르게 되니까.
꼬막손 부끄럽지 않게, 비굴하지 않게 살면 되는 것입니까요?
도편수 그래, 그러면 된다. 바뀐 세상에서 너는 그렇게 살아라.
   
  그때 민영찬의 몸이 휘청거린다. 쓰러지듯 찰흙 더미에서 잠이 드는 민영찬.
   
민영찬 (잠꼬대)대한제국······ 만세······.
   
  도편수와 꼬막손이 서로 눈을 마주친다. 그들의 시선이 민영찬에게 향한다.
   
꼬막손 참 끔찍이도 나라를 사랑하는 분입니다요. 그것만큼은 인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요.
도편수 크게 떠들며 강조할수록 속마음은 그와 반대인 경우가 많은 법이다. 나는 저 양반을 볼 때마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구나.
   
  짧은 사이.
   
도편수 허참. 그새 정이 들었는지 내가 양반 걱정을 다하고 앉아 있네.
꼬막손 우리 코가 석 자 아니겠습니까요.
도편수 맞다. 우리 코가 석 자야.
   
  다시 양동이를 들고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두 사람. 밤이 깊어 간다.
   
  무대 암전.
   
   
   
  11. 밤의 카페테라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연상되는 무대. 밤의 카페테라스에서 민영찬과 미브렐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말끔한 미브렐과 달리 민영찬은 노숙의 흔적이 역력하다.
   
미브렐 대한제국에도 커피가 있습니까?
민영찬 양탕국이라고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애음하시지요.
   
  한 모금 맛을 보는 민영찬. 그러나 곧바로 잔을 내려놓는다.
   
미브렐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민영찬 입에는 맞습니다. 깊은 쓴맛이라고 할까요. 열매를 태워서 그 즙을 마신다는 발상도 흥미롭습니다. 다만 제 몸에는 맞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늘 화장실을 찾게 되더군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커피란 것에 창자를 자극하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브렐 커피에는 각성 효과가 있습니다.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해 주지요. 어쩌면 그 성분이 괄약근을 자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러고 보니 제 주변에도 커피만 마시면 화장실을 찾는 분이 계십니다.
민영찬 그걸 동양에서는 체질이라고 합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체질이 다 달라서 누군가에겐 약이 누군가에겐 독이 되기도 하지요.
미브렐 그렇군요. 흥미롭습니다.
   
  미브렐이 커피를 마신다.
   
미브렐 저는 낮보다 밤이 좋습니다. 밤의 불란서는 낮의 불란서보다 낭만적이지요. 센 강변을 중심으로 카페들이 불을 밝히고, 노란 불빛 아래에서 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즐깁니다.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오고 반쯤 취한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며 거리를 걷지요. 이 모든 게 자유롭고 아름다워요. 여러 나라를 가 보았지만 우리나라만큼 낭만적인 나라는 없었습니다.
민영찬 대한제국에도 한강이란 강이 있습니다. 센보다 훨씬 커다란 강이지요. 음주가무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대한제국 사람들입니다. 개혁을 통해 신분제를 철폐했으니 자유롭다면 자유로운 나라이지요. 길가의 초목도 아주 자유롭게 자랍니다. 제가 처음 불란서에 왔을 때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나무였습니다. 공원의 나무들이 모두 직사각형 모양이더군요. 도대체 어떤 품종이기에 저리 인위적인 모습으로 자라날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가지치기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불란서는 일견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고도로 획일화된 국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지 뭡니까.
   
  둘 사이에 어색한 웃음이 흐른다. 빤히 서로를 쳐다보는 두 사람.
   
미브렐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저는 그저 불란서의 야경에 대해 말한 것뿐입니다. 다른 의도는 없어요.
민영찬 피차일반입니다.
   
  짧은 사이.
   
미브렐 전시관은 어떻습니까? 기한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민영찬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지요.
미브렐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직접 발로 뛰고 계시다고요?
민영찬 발로······ 발로 뛰고 있는 건 맞습니다.
미브렐 모두 애국을 입에 올리지만 행동하는 자들은 많지 않지요. 대사님 같은 분들을 애국자라고 하지요?
   
  민영찬,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다시금 커피를 마시는 미브렐.
   
미브렐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은 메달을 배정하기 위해섭니다.
민영찬 메달을 배정한다고요?
미브렐 그 왜 있지 않습니까.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민영찬 메달은 배정하는 것이 아니라 따내는 것 아닙니까?
미브렐 스포츠에서는 그렇지요. 박람회는 스포츠가 아니지 않습니까. 경쟁이 아니라 화합의 장이지요. 대상은 금메달, 은상은 은메달, 장려상은 동메달을 드립니다.
민영찬 상을 나눈다는 말입니까?
미브렐 서로 사이좋게, 형편에 맞게 분배하는 것이지요. 대한제국도 어렵게 만국박람회에 참여했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상도 받고, 메달도 타야지요. 그래야 대사님 체면도 설 것 아닙니까.
   
  짧은 사이.
   
민영찬 적어도 대한제국의 전시품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결정하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상을 준다는 데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받겠습니다. 받아야지요. 하지만 우리는 구걸하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공정한 평가를 원합니다. 시대는 강철을 숭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쌓아 올린 문화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은 겁니다.
미브렐 곧 알 수 있을 겁니다. 세계 각국의 관람객들이 대한제국 전시관을 방문할 테니. 바로 거기서 확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마침 대상이 하나 남은 게 있습니다. 농산물 가공식품 분야입니다.
   
  침묵. 웃고 떠드는 카페테라스의 소음이 이어진다.
   
민영찬 농산물 가공식품이라니······ 멀고 먼 바다를 건너왔는데 농산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있다 해도 다 썩었지요. 있지도 않은 품목으로 무슨 상을 탄다는 말입니까?
미브렐 왜 없습니까? 나한테 선물로 준 가공식품이 있지 않습니까.
민영찬 홍삼······ 홍삼 말입니까?
미브렐 그걸 먹은 날은 평소보다 활력이 넘치더군요. 정말 놀라운 농산물 가공식품입니다. 충분히 대상을 받을 만합니다.
민영찬 하지만 그건 전시품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하사품입니다.
미브렐 차이가 있습니까?
   
  사이. 경적 소리와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민영찬이 단숨에 커피를 들이켠다.
   
  무대 암전.
   
   
   
  12. 대한제국관
   
  현장. 말끔히 정리되어 있다. 커다란 하얀색 천이 무대 배경을 가리고 있다. 도편수 일행이 무대 오른편에 서 있다. 도편수와 꼬막손은 양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은 자세다. 죠지는 팔짱을 끼고 껌을 씹고 있다. 왼편에서 민영찬 등장. 목욕재계를 마친 모습이다. 도편수와 꼬막손이 동시에 허리를 숙인다. 죠지는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한다.
   
도편수 오셨습니까. 나으리.
꼬막손 오셨습니까요. 나리.
죠 지 하이.
   
  민영찬이 벅찬 얼굴로 하얀색 천을 바라본다.
   
민영찬 드디어 오늘이군. 이 흰색 가림막은 무엇인가?
도편수 며칠 전부터 옆 부지에 있는 비누 회사에서 항의가 들어와서 말입니다.
꼬막손 비누를 건조시키는 데 우리 쪽에서 먼지가 날아와 다 망쳤다고 하지 뭡니까요. 이놈이 보란 듯이 천으로 감싸 버리니 그쪽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됐습니다요.
민영찬 내가 없는 사이에 그런 변이 있었군. 고생했네. 작업은 모두 마무리되었는가?
도편수 전시관은 그제 마무리됐고, 전시품도 모두 옮겨 두었습니다.
민영찬 수고했네. 정말 수고했어. 모두 완성되었다니 이제 천을 걷어 보세.
꼬막손 예. 알겠습니다요.
   
  가림막 옆으로 잽싸게 다가간 꼬막손이 줄을 잡아당긴다. 하얀색 천이 떨어지고 대한제국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배경을 가득 채우는 흑백사진(별첨3). 죠지가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친다.
   
죠 지 브라보!
   
  한동안 계속되는 박수. 민영찬이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다가가 대한제국관을 바라본다.
   
민영찬 이것이 우리가 불란서에 세운 근정전이군.
   
  도편수가 민영찬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도편수 송구할 뿐입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나으리를 속이겠습니까. 어계와 답도, 사신상과 구 지신상, 잡상이 생략되었고, 기단은 1단으로 줄었으며 칸과 높이도 절반에 불과합니다. 근정전을 짓고자 하였으나 근정전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다만 대한제국의 전시관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민영찬이 무릎을 굽혀 도편수를 일으켜 세운다.
   
민영찬 자네가 전력을 다한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우리가 아네. 어디가 송구하단 말인가. 내 진심으로 탄복했네. 그 옛날, 도편수는 정5품의 관직이었네. 대목장이라 높여 불렸지. 그러다 유를 숭상하며 기술을 천시하게 되었네. 어쩌면 대목장을 도편수라 폄하한 바로 그 순간이 조선이 길고 긴 잠에 빠진 순간인지도 모르겠네. 언젠가 도편수가 다시 대목장이라 불리는 그런 세상이 오면 그때는 대한제국도 필경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오늘만큼은 자네가 대목장이네. 알겠는가?
   
  민영찬과 도편수가 진심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이 순간만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평등하다. 짧은 사이. 한껏 멋을 부린 여주인이 등장한다. 양손에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있다.
   
여주인 어머? 정말이네? 정말 다 지었어.
민영찬 주모? 주모가 여긴 웬일이오?
여주인 웬일은 무슨 웬일이에요. 내일부터 만국박람회가 시작되잖아요. 파리가 온통 축제예요, 축제.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무대 중앙에 돗자리를 펼치는 여주인. 차례대로 사람들을 끌어다 앉힌다.
   
여주인 자, 우리 특파대사님은 중앙에 앉으시고, 도편수는 왼쪽, 꼬막손은 오른쪽, 일꾼 아저씨는 왼쪽, 나는 오른쪽.
   
  자리를 정한 여주인이 이번에는 바구니에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꺼낸다. 꼬막손과 죠지도 눈치껏 여주인을 돕는다. 돗자리가 금방 음식으로 가득 찬다. 마지막으로 레드 와인을 꺼내서 모두에게 한잔씩 돌리는 여주인.
   
여주인 자자, 대한제국과 만국박람회를 위해서 건배하자고요. 이럴 때 대한제국에서는 뭐라고 축하하죠?
   
  모두의 시선이 민영찬에게 쏠린다. 그가 헛기침과 함께 어색하게 잔을 든다.
   
민영찬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지화자 하면 모두 좋다 하는 거요.
   
  모두 잔을 높이 올린다.
   
민영찬 지화자!
  모 두 좋다!
   
  무대 암전.
   
  별첨3
 
   
   
   
  13. 만국박람회
   
  무대 배경에 흑백 영상이 재생된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영상이다. 당시의 실제 영상은 1900 Paris Exposition 키워드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놀라울 정도로 사람이 많고 활기찬 영상이 계속된다. 왼편 끝에서 민영찬, 도편수, 꼬막손 등장. 당당하려고 애쓰지만 위축된 기색을 감출 수 없다. 두리번거리며 영상을 가로질렀다가 무대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상이 꺼진다. 사이. 대한제국관 배경이 떠오른다. 한적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앞서 영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민영찬 일행이 객석을 바라본다.
   
민영찬 잠시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저 전시관에 가보셨는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만국박람회의 중심은 에펠탑이지요. 하지만 저 건물도 엄연히 전시관입니다.
도편수 대한제국이라는 나라에서 지은 건물입니다. 대한제국관이라고 하지요.
민영찬 아, 들어가 보셨군요. 그렇다면 감상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떠했는지요? 눈이 가는 전시품이 있으셨습니까? 기억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까?
꼬막손 철로 만든 용도 있고요. 갑옷, 의복, 가마, 그림, 도자기, 거문고. 무엇이든 좋습니다요. 모두 고급품이고 손으로 직접 만든 것들입니다요.
   
  사이.
   
민영찬 모자? 모자요? 모자···말입니까?
도편수 하지만 그건···그저 모자입니다.
꼬막손 저곳엔 그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대단한 것들이 많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요.
   
  짧은 사이.
   
도편수 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꼬막손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요.
   
  마네킹처럼 어색해 보이는 세 사람. 서서히 해가 진다. 붉게 노을 지는 무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적막하다.
   
도편수 나으리. 어두워지기 전에 전시관 문을 닫아야 할 듯합니다. 소인들이 정리할 터이니 먼저 가셔서 진지라도 잡수고 계시지요.
민영찬 여기까지군.
   
  그가 객석을 등지고 대한제국관을 바라본다.
   
민영찬 (허망하게 웃으며)꿈을 꾸었구나. 그럴듯한 꿈을 꾸었어. 이제야 눈을 떴다. 이제야 눈이 뜨였어.
도편수 나으리.
꼬막손 첫술에 배부를 수야 있겠습니까요. 언젠가 온 나라가 대한제국의 이름을 알게 되는 그런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요.
   
  꼬막손이 민영찬에게 한걸음 다가간다.
   
꼬막손 나리.
   
  다시 객석으로 몸을 돌리는 민영찬. 그가 꼬막손의 멱살을 잡는다.
   
민영찬 진실을 말해주랴?
   
  민영찬의 자포자기에 자조가 섞인다.
   
민영찬 하긴. 우리가 보통 사이는 아니지. 천리만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의기투합한 사이 아니더냐. 그러니 내 진실을 말해주마. 네 놈이 말한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암 그렇고말고. 광무 백년이 되어도 어림없지. 우리는 땅에 못 박혀 사는데 이들은 하늘을 날지 않더냐. 만국박람회? 여긴 전쟁터다. 대한제국은 원치도 않는 선전포고를 받고 예까지 휩쓸려 왔다. 그리고 온갖 수모 끝에 외면당했어. 우리는 졌다! 패배한 나라의 백성이 어찌 되는지 아느냐? 응? 우리 모두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선택을 해야만 한다고. 이 천한 놈! 너는 어느 쪽이냐?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너는 어느 쪽이야?
꼬막손 (목이 졸려 가쁜 목소리로)소인이 얼마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요. 꿈에 다 썩어가는 나무 밑동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요. 누구는 그 밑동마저 자르려 하고, 누구는 그저 방관하고, 누구는 그 밑동을 부둥켜안는 그런 꿈이었습니다요. 세 번째 사람이 왜 그 밑동을 부둥켜안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요. 그 사람은 필경 그 안에서 새로운 싹을 본 것입니다요. 소인은...소인은...
   
  짧은 사이. 도편수가 그들 사이에서 민영찬의 손목을 잡는다.
   
도편수 나으리. 해가 지고 있습니다.
   
  순순히 멱살을 놓은 민영찬. 몹시 지쳐 보인다.
   
  무대암전.
   
   
   
  14. 마지막은 샹송과 함께
   
  하숙집 2층. 여주인이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청소 중이다. 아래층에서 노크 소리.
   
여주인 열려 있으니 들어오세요! 저는 2층에 있답니다!
   
  사이. 계단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모리스 등장. 양복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다. 그가 중절모를 벗고 여주인에게 인사한다.
   
여주인 방을 얻으러 오셨나요?
모리스 아닙니다. 누굴 좀 만나러 왔습니다.
여주인 누구요? 여긴 이제 아무도 없어요.
모리스 주소는 분명 여기가 맞는데 이상하군요.
   
  모리스가 방을 둘러본다.
   
모리스 여기 혹시 대한제국에서 온 사람들이 묵지 않았습니까?
여주인 아, 그들. 그들 말이군요. 그들이라면 떠났어요.
모리스 떠났다고요?
여주인 떠났어요. 보시다시피 그들이 묵었던 방을 청소 중이랍니다.
모리스 떠났다니···제가 너무 늦게 왔군요. 이렇게 일찍 가리라고는 예상 못했습니다.
여주인 타국에 오래 머무를 돈이 없는 거 같았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모리스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아쉽게 됐네요. 알겠습니다. 친절한 응대 감사합니다. 그럼.
   
  그가 다시 중절모를 쓴다. 뒤돌아 출입구로 향하는 모리스.
   
여주인 잠시만요.
   
  모리스가 몸을 돌린다. 마주보는 두 사람.
   
여주인 대한제국 사람들은 왜 찾는 거죠? 아니 뭐, 저야 아무 상관없지만. 일단 제 집에서 하숙을 했던 사람들이니까요. 이유가 궁금해서요.
모리스 아,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실례를.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모리스 쿠랑입니다. 만국박람회 공사관원으로 건축물 기록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학자이지요.
여주인 건축물 기록이요?
모리스 박람회에 참여한 국가들의 전시관을 보고 기록하는 일이지요. 그중에서도 저는 대한제국관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서 그 건물을 지은 사람들을 만나서 직접 제 소감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여주인 저런···한발 늦으셨어요. 안타깝네요.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떠나는 날까지도 상심해 있었어요. 다른 나라의 전시품에 기가 죽었다고 할까요? 하늘을 나는 기구와 거대한 강철 기계들을 보면서 복잡한 표정을 짓더군요. 생각이 많으면서도···그걸 표현하는 게 참 서투른 사람들이었어요.
모리스 말씀을 들으니 더욱 아쉽군요.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여주인 그 소감. 저한테 들려주지 않으시겠어요?
모리스 마담에게요?
여주인 전 그들과 함께 생활했어요. 이곳에 아직도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지요. 저라도 그 소감을 듣고 싶어요. 그들 대신이요. 자, 부끄러워하지 마시고요. 참, 그리고 저는 마담이 아니라 마드무아젤이랍니다.
모리스 이런. 또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군요. 정말 듣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사과하는 의미에서라도 제 소감을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들어주십시오.
   
  여주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는 모리스. 그가 객석을 보며 중앙으로 나선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모리스에게 조명이 비친다.
   
모리스 여기 회색 기와를 올린 지붕이 있다. 그 지붕은 빗물의 흐름을 인도하며 햇살아래에서 아름답게 빛난다. 처마는 우아한 곡선을 이루고, 네 곳의 모서리에는 구운흙으로 만든 환상적인 용머리가 세워져 있다. 약간 무거워 보이는 이 지붕을 단단히 떠받치고 있는 것은 생동감 넘치는 붉은색 원기둥이다. 기둥과 기둥을 가로지르는 수평부재에는 하얀색, 검은색, 청색, 녹색 등 다양하고 화려한 색이 칠해져 있다. 놀라울 정도로 경쾌함을 부여하는 이 화려한 색을 어떻게 만든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 화려함은 장엄한 햇빛 아래에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룬다. 비록 중국과 일본, 두 제국이 훨씬 더 크고 화려한 전시관을 지었지만 대한제국은 우아함과 훌륭한 심미안으로 그들만의 전시관을 완성하였다. 역사적으로 대한제국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 나라의 국민은 여전히 건재하다. 근년에 유럽은 대한제국의 문명을 경시하였으며, 습관적인 자부심에 취해 그것을 야만적인 것으로 취급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한제국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복합적이고 세련된 문명의 기념물로 보인다. 대한제국 정부는 우리의 오만함에 겸손이라는 값진 교훈을 선물로 주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이. 무대가 다시 밝아진다. 모리스가 감상문을 여주인에게 건넨다.
   
모리스 괜찮으시다면 이 감상문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언젠가 그들에게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감상문을 받는 여주인.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여주인 아니요. 아마 그들과 다시 만나는 일은 불가능 할 거예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드네요. 이 감상문을 전해주면 정말 좋아할 거예요. 물론 맘껏 웃지는 않겠죠. 그런 사람들이니까. 아마 아주 엷은 미소를 보이며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일 거예요. 그리고 속으로 좋아하겠죠. 이 감상문은 제가 소중히 보관하겠습니다.
모리스 알겠습니다. 이렇게라도 뜻을 전하니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조금은 달래지내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여주인과 모리스가 인사를 나눈다. 모리스 퇴장. 홀로 남은 여주인이 아무도 없는 방을 둘러보다가 책상 서랍을 연다. 부드럽게 열리는 서랍.
   
여주인 어머, 정말 고쳐주고 갔네?
   
  짧은 사이. 감상문을 서랍에 보관한 그녀가 축음기를 튼다. 이베트 길베르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샹송 리듬을 탄 그녀의 빗자루질이 시작된다.
   
  무대암전.
   
  끝.


추천 콘텐츠

문장, 콤마 희곡

이영녀와 윤심덕과 그리고 나

이영녀와 윤심덕과 그리고 나 신은수 등장인물 김우진. 이영녀. 오일삼. 윤심덕. 1925년, 늦은 저녁. 상성합명회사의 작은 사무실 안. 한쪽 벽면엔 업무 서류들이 쌓인 책장. 전화기가 놓인 책상에는 쓰고 있던 원고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사무실 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다.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김우진. 옆에 놓인 물컵과 약봉지. 김우진 하루하루 정말 미칠 지경이야··· 돈과 직위?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가꿔 이룬 것들이라면 애착이라도 있겠지만, 모두가 아버지 것들인데··· 난 그저 장남으로 태어난 책임으로 꼭두각시처럼 있는 거라고. 아무리 좋은 먹이를 매일 갖다 줘도··· 새장 속의 새가 행복하겠나. 지금 내 신세가 꼭 그래, 누구보다 자유로워야 할 예술가가 말이야. 이러다간 날개가 퇴화돼··· 어느 때부턴 나는 법조차 잃어버릴까 두렵다고. 약봉지를 힘겹게 뜯으며. 김우진 그래서 오늘도 쓰고 있다네. 이런 밤늦은 시간에 부친께서 앉힌 사장 역할이 끝나면, 나는 법을 잊지 않으려 말일세. 지금 쓰고 있는 것 말인가? 조선판 입센의 인형의 집, 노라인데··· 잘 풀리지가 않아. 막바지 3막으로 가고 있지만, 과연 지금의 조선 현실서 착취 속에 사는 궁핍한 여성이 자아를 찾아간단 것이 가능한 얘기인지··· 써 본들 사람들이 보고도 공감 못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뭐라 했나, 윤심덕? 당황해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김우진 이보게,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다고. 안 만날 걸세, 지금 윤심덕이가 어디 살고 있던 내 알 필요 없잖은가?! 그래, 그 추잡한 소문들을 여기서도 전부 다 듣고 있다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 밖을 향해서. 김우진 밖에 누군가. (수화기에) 잠시만··· 급하게 원고들을 구석에 숨겨 놓으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오는 오일삼. 오일삼 접니다, 사장님. 김우진, 안도하는 표정. 오일삼 아! 전화 중이신데··· 불쑥, 실례했습니다. 김우진 (수화기에) 회사 직원이야, 신경 안 써도 돼. 나도 잘 모르겠네··· 언제 완성될지는. 얘기했잖은가, 마지막 부분에 글이 막혔다고. 다 쓰면 우선은 자네가 있는 토월회 쪽으로 보낼 테니, 한번 읽어 보라고. 오일삼 하하하. 편하게 계속하십시오. 김우진 이영녀일세. 주인공 이름 그대로가

  • 신은수
  • 2024-11-21

문장, 콤마 희곡

떡갈나무

떡갈나무 하성민 장소 지방 도시 노인복지관 그리고 독거노인들의 집 배경 12월 중순. 추운 날씨다. 관내 노인복지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직원 민영과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조사원 준성, 도시에서 귀촌한 준성은 복지 대상자인 노인들을 한 명씩 만난다. 인물 박수환, 남자, 80대, 독거노인. 최장수, 남자, 70대, 독거노인. 김양희, 여자, 70대, 독거노인. 김준성, 남자, 32세, 독거노인 현황 조사원. 전민영, 여자, 52세, 노인복지관 직원. 무대 무대는 삼분할된다. 왼편은 민영의 사무실, 중앙은 준성이 다니는 길, 오른편은 노인들의 집 마당이다. 하수(무대 왼쪽), 사무실 출입구 상수(무대 오른쪽), 노인들의 집 [전막] 자연은 과연 아름다운가. 말없이 무심함을 내뿜는 자연을 우리는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나. 시골은 사람 없는 자연이다. 지금 여기 겨울을 지나는 시골은 그 어느 때보다 깊게 고요하고 서늘하다. 가랑잎나무가 조용히 흔들린다. 지난 시절 푸릇하던 잎 하나가 어느새 기력을 다하고 지면으로 툭 내려앉는다. 추위에 내려앉은 잎의 맥처럼 마을에 듬성듬성 자리를 지키는 노인들의 주름살도 그 결이 또렷하다. 마을을 지나는 구불한 길은 적막을 걸치고서 노인들을 생의 끝자락으로 안내하고 있다. 이곳은 그렇게 기운을 잃었다. 무겁게 발을 내디디며 쉭쉭 빠지는 노인들의 날숨은 시간이 지나며 더욱 짙어질 뿐이다. 준성, 무대 중앙에 있다.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빼고를 반복한다. 다른 손에는 서류뭉치가 들려 있다. 천천히 무대 좌우로 왔다 갔다 걷는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무대 중앙에 멈춰 선다. 3초 후 민영, 하수에서 등장. 손에는 종이컵이 들려 있다. 자리에 앉고 차를 마시며 모니터를 바라본다. 종이컵을 내려놓고 키보드를 두들긴다. 기지개를 켰다가 다시 차를 마시며 모니터를 바라본다. 준성, 민영 쪽으로 느리고 천천히 다가간다. 중간중간 숨을 고르기도 한다. 옷매무새를 다듬고서 민영 앞에 멈춘다. 준성 (서류 뭉치를 건네며) 여기요. 민영 (슬쩍 준성을 보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며) 네, 고생하셨어요. 거 두고 가시면 됩니다. 준성 ···뭐 다른 건 없나요? 민영 (모니터만 바라보며) 다음 주에 조사원들 다 같이 모이는 거 아시죠? 시간 정해서 연락드릴게요. 준성 네. (돌아가려 몸을 돌린다) 민영 몇 분 정도 남았죠? 준성 (다시 몸을 돌린다) 아, 다섯 명 정도? 민영 다섯 명, 그거 마치면 저번에 얘기 드린 기초조사에서 사백 명 분량이 필요하니까 부지런히 다니셔야겠어요. 준성 몇 명이요? 민영 사백 명 준성 사백 명이요? 민영 예예. 저번에 얘기 드렸잖아요. 추가 명단 있다고. 준성 아. 민영 어쨌거나 시간 없으니 얼른 돌아다니셔야겠어요. 언제 다 할라고. 준성 ·&midd

  • 하성민
  • 2024-10-22

문장, 콤마 희곡

여전히 진행 중, 우리는

여전히 진행 중, 우리는 최해인 현실 김기훈 – 소설 속 다른 인물을 대역한다 소설 김기훈 교수 현실 김기훈의 지도교수 연구실 및 소설 속의 여러 공간 현재 1장. 무대 중앙을 기준으로 끝에서 끝까지 세로로 긴 책상 두 개가 있다. 책상 사이로 한 사람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책상 위에는 연극 포스터가 깔려 있고, 그것을 긴 유리가 덮고 있다. 마치 박물관 같다. 긴 책상을 기준으로 하수는 지도교수의 공간, 상수는 소설 속의 공간이다. 하수 아래에는 지도교수 책상이 있고, 지도교수는 객석을 향해 앉아 있다. 하수 위에는 책장이 있고, 안에는 각종 책이 가득 꽂혀 있다. 상수에도 의자가 있다. 노크 소리가 들린다. 교수 들어오세요. 현실 기훈이 등장한다. 교수는 기훈을 쳐다보지 않는다. 교수 거기 앉아 있어. 현실 기훈, 의자에 앉는다. 교수 포스터 나왔어? 현실기훈 아직이요. 교수 거기 자리 있으면 하나 넣어놔. (사이) 근데 지난 학기 힘들었어? 갑자기 제주도 다녀오고. 기훈아 이 바닥은 박사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선물은 안 사 왔지? 받고 싶어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세상에는 비밀이 없어요. 현실기훈 교수님, 제가 보내드린 거 읽어 보셨어요? 교수 뭐? 현실기훈 금수일보에서 당선된 소설이요. 메일로 보내드렸는데요. 교수 아 뭐 하나 왔던데 소설이었어? 그런 걸 읽을 시간이 어딨니. 현실기훈 그렇군요. 사실 그거 때문에 온 거예요. 교수 할 말이 있다는 게? 현실기훈 교수님께 답을 듣고 싶어서요. 교수 뭔데 그래? 현실기훈 (가방에서 인쇄한 소설을 꺼내며) 소설 읽어 보실래요? 교수 시간 없다니까. 빨리 말해. 현실기훈 누가 제 얘기를 썼습니다. 교수 무슨 소리야? 현실기훈 (소설을 들며) 이거 제 얘기입니다. 교수 (그제야 기훈을 쳐다보며) 자세히 얘기해봐. 현실기훈 소설 주인공 이름이 김기훈입니다. 소설의 김기훈도 대학원을 다닙니다. 그리고 소설의 김기훈은 일광시에서 주관하는 희곡상을 받았고요. 교수 잠시만, 너잖아. 현실기훈 말씀드렸잖아요. 교수 누가 썼어? 당선작가 이름이 뭐야? 현실기훈 가까이에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교수 우리 가까워, 다 들리니까 거기서 얘기해. 현실기훈 그쪽으로 갈게요. 현실 기훈, 교수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교수 여기는 못 들어온다고 했지? 어디 건방지게, 당장 안 나가! 현실기훈 제발 제대로 좀 들어보세요. 교수, 현실 기훈의 큰소리에 당황한다. 무대 상수에 소설의 기훈이 등장한다. 소설 기훈은 통화를 하고 있다. 현실 기훈은 교수에게 소설을 읽어준다. 현실기훈 주민등록증과 통장 사본을 보내 달라는 전화였다. 시상식 날짜는 추후 공지하겠다 하고는 잠깐의 정적이

  • 최해인
  • 2024-10-1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