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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의 밤

  • 작성일 2024-09-04

롤러코스터의 밤

김성배


현대


강으로 남북이 나뉘어져 있는 어느 도시


등장인물

선기 29세, 취업 준비생

정기 29세, 선기의 형, 편의점 직원

데니스 30세, 한국계 입양아, 영어 강사

유자 29세, 정기의 고교 동창, 작가


무대

기본적으로는 빈 무대. 장면 전환에 따라 간단한 대소도구들이 그 장면의 특징을 드러내 줄 수 있으면 된다.



  1장
   
  조명이 들어오면 밤 열 시. 빌라 응접실. 유자와 정기,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유자 누가 온다고?
정기 동생.
유자 동생이 있었어?
정기 그런가 봐.
유자 뭔 말이 그래?
정기 내가 다섯 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거든. 나는 엄마가 키웠고 동생은 아버지가 키웠어. 근데 부모님 사이가 워낙 안 좋아서 한 번도 왕래가 없었어.
유자 단 한 번도?
정기 부모님이 약속을 했었대.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을 경계로 엄마는 나랑 남쪽에서, 아버진 동생이랑 북쪽에서 지내기로 하고 절대 강을 넘어가지 않기로. 그럼 우연히 마주칠 일도 없을 테니까.
유자 왜 그렇게까지 하셨지?
정기 마주치기가 죽기보다 싫었나 보지.
유자 그래도 살다 보면 강을 넘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안 그래?
정기 내가 아는 한 엄마는 절대 저쪽으로는 안 갔어. 그러는 걸 본 적이 없어. 이쪽도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유자 넌?
정기 내가 저쪽으로 넘어가는 거 본 적 있어?
유자 음··· 그러고 보니 없었던 것도 같고? 넌 왜 그러는 건데?
정기 몰라.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게 당연해진 건지. 학교도 이쪽에서 나왔고 워낙 이쪽에서만 뭘 했으니까 저쪽으로 넘어가는 게 안 내켰는지도 모르고. 근데 솔직히 말하면 어쩌다 한 번씩은 넘어갔거든. 근데 맘이 안 편해서 금세 돌아오곤 했지.
유자 어쨌든 다섯 살 때 이후로 동생을 이번에 처음 보는 거네?
정기 그렇지.
유자 어떻게 연락이 됐는데?
정기 메일이 왔어. 여기 와 보고 싶다고 해서 주소를 알려 줬어.
유자 반갑겠네.
정기 잘 모르겠어. 그냥 묘해. 아, 근데 우린 쌍둥이야.
유자 그래?
정기 응. 어렸을 땐 동생과 내가 서 있음 누가 누구인지 부모님도 몰라봤어.
유자 지금은?
정기 모르지. 자라면서 얼굴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데니스, 등장한다.
   
유자 왔어?
데니스 (소파에 주저앉으며) 완전 피곤해.
유자 술 마셨어?
데니스 조금.
유자 누구랑?
데니스 강의 마치고 친구 좀 만났어.
유자 어떤 친구?
데니스 집 있는 친구. 몇 달만 재워 줄 수 있냐고 물어봤거든.
유자 뭐래?
데니스 안 된대.
유자 왜?
데니스 큰 개를 두 마리 키우는데 그놈들이 예민해서 낯선 사람이 있으면 소화불량에 걸린대. 예전에도 사촌동생이 일주일 머물다 갔는데 두 마리 다 소화불량 때문에 병원 신세를 졌대.
정기 개 때문에 사람을 못 도와준다고?
데니스 개가 아니라 가족이래.
정기 재밌네.
데니스 너희들은 걱정도 안 돼? 일주일 안으로 전세 보증금 올려 주지 않으면 계약이 끝나는 거고 우린 여기서 나가야 해.
정기 고시원 알아보고 있어.
유자 난 일단 집에 가 있으려고.
데니스 네가 가장 낫네. 갈 집이 있으니.
유자 모르는 소리 마. 새엄마 눈칫밥 이틀만 먹으면 바로 소화불량 걸려. 너도 정 힘들면 미국 가면 되잖아.
데니스 알잖아. 그럴 수 없는 거.
유자 아, 내일 여기 손님 온대.
데니스 어떤 손님?
유자 정기 동생.
데니스 (정기에게) 동생이 있었어?
유자 그렇대.
데니스 왜 여태 말 안 했는데?
유자 쟤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는데 쟤는 엄마가 키웠고 동생은 아버지가 키웠대. 근데 부모님이 강을 경계로 위아래에 살면서 절대 강을 넘어가지 않기로 해서 내일 동생을 다섯 살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래.
데니스 (고개를 갸웃거리고) 분단국가 안의 분단가족이야 뭐야? (정기에게) 진짜 동생이 오는 거야?
정기 응.
데니스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해. 이렇게 여기서 쫓겨날 순 없어.
정기 어떻게 전세금을 오천만 원이나 올려 주냐?
유자 미쳤어.
데니스 그래도 방법을 찾아보자. 이렇게 흩어지긴 아쉽잖아.
유자 내 말이. 우리 셋이서 되게 잘 맞잖아.
데니스 맞아. 우린 흩어지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셋이서 함께 가야 해.
정기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겠지.
데니스 남 말 하듯 하네. 넌 참 속 편해서 좋겠다.
정기 안 편하니까 그렇게 말하진 마. 아, 내일 저녁에 고기라도 같이 구워 먹을까? 동생도 오니까 그러고 싶은데.
데니스 손님이 오는 건 좋은데 좀 애매할 때 오네.
유자 너무 그러지 마. 손님은 꼭 그럴 때 오는 거야. 중요한 건···.
데니스 뭔데?
유자 손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지.
데니스 뭔 소리야?
유자 그러게. 뭔 소릴까?
정기 고기 구워 먹는 건 괜찮은 거지?
유자 콜.
데니스 나도 콜.
정기 내일 봐. 오늘은 야간근무여서 나가 봐야 해.
유자 올 때 유통기간 지난 것 좀 가져와. 맛있는 걸로만. 그게 편의점 알바의 유일한 특권이잖아. 원고 마감해야 해서 밤샐 거야.
정기 콜.
   
  암전.
   
   
   
2장
   
  다음 날. 저녁 일곱 시 무렵. 빌라 응접실 소파에 선기가 홀로 앉아 있다. 거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기 (목소리로) 무슨 맥주 마실래?
선기 아무 거나 줘.
정기 (목소리로) 안주는?
선기 필요 없어.
정기 (목소리로) 만두라도 구워 줄까?
선기 이따 고기 먹자며.
   
  정기, 캔맥주 두 개를 들고 등장한다.
   
정기 (캔맥주를 하나 내밀고) 필스너야.
선기 땡큐. (받아 들고 주위를 둘러보며) 집이 좋네.
정기 곧 이사 가야 해.
선기 왜?
정기 사정이 좀 있어.
   
  두 사람, 캔맥주를 부딪치고 한 모금씩 마신다.
   
선기 근데 별로 안 어색하네.
정기 그러게. 핏줄이라 그런가?
선기 내가 왜 갑자기 연락했는지 안 궁금해?
정기 궁금해.
선기 근데 왜 안 물어봐?
정기 때 되면 말하겠지 싶어서.
선기 나랑 성격이 다르네
정기 그래?
선기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거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정기 ···언제?
선기 한 달 전에.
정기 ···그걸 왜 이제 말해?
선기 너도 엄마 돌아가셨을 때 안 알렸잖아.
정기 그거야···.
선기 아버지가 너한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어. 엄마도 나한테 알리지 말라고 했던 거잖아. 안 그래?
정기 그래도 알리고 싶었는데 네 연락처가 없었어.
선기 의지가 있었음 찾을 수도 있었겠지. 근데 나도 너도 안 그랬던 거고.
정기 내 메일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선기 구글링해서.
정기 그렇군. 근데 아버진 어떻게 돌아가셨어?
선기 뻔한 스토리야. 우연히 병을 발견했는데 처음에는 안 믿고 화만 내며 치료를 거부하다가 통증이 점점 심해지자 치료를 받아들이고 체념했다가, 다시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약에 찌들어서 가셨지 뭐. 그 과정이 꽤나 길었어.
정기 옆에서 고생했겠네.
선기 간병인이 고생했지. (짧은 사이) 엄마는 어땠어?
정기 교통사고라 한순간에 가셨어.
선기 그렇군. 우리 사이에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남겨 놓고 가셨군. 너는 여기, 나는 저쪽에서 살게 해 놓고 말야. 솔직히 말하면 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끔 궁금했어. 넌 안 그랬어?
정기 사실 나도 그랬어.
선기 네가 이메일 답장을 반갑게 해 줘서 용기를 내서 올 수 있었어. (짧은 사이) 넌, 무슨 일 해?
정기 편의점.
선기 점주?
정기 알바.
선기 그렇군.
정기 한심하지?
선기 아니. 난 요새 아무 일도 안 해.
정기 예전엔 뭐 했는데?
선기 아버지 일 도왔어.
정기 아버진 무슨 일 했는데?
   
  유자, 등장한다.
   
유자 (선기를 발견하고) 어? (정기에게) 동생분?
정기 응.
유자 (선기에게 악수를 청하며) 안녕하세요, 여기 살고 있는 송유자예요.
선기 (악수하며) 장선기라고 합니다.
유자 두 분이 다르게 생겼네. 쌍둥이 맞아요?
선기 네. 많이 달라지긴 했는데 쌍둥이 맞아요.
유자 (정기에게) 배고파 죽겠어. 고기 구워 먹는다며?
정기 한 명 더 와야지.
유자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곧 오겠네. (짧은 사이) 두 분은 만나 보니까 어떤 거 같아요?
   
  사이.
   
유자 뭐야, 물어본 사람 무안하게 왜 대답이 없어.
선기 좋은 것 같아요.
유자 뭐가요?
선기 사실은 제가 강 저쪽에서만 거의 지냈거든요. 이쪽에 전혀 안 온 건 아니지만 어렸을 적부터 이쪽에 오면 안 된다는 아버지 말에 세뇌당했는지 영 맘이 안 편해서요. 그래서 이쪽엔 아는 사람이 없는데 정기가 있으니까 좋죠.
정기 형이라고 불러야지.
선기 왜?
정기 형 맞잖아.
선기 뭐래. 조금 전까진 아무 말도 없다가. 이분 앞에선 그렇게 불리고 싶어?
정기 응.
선기 미안하지만 곤란할 거 같아. 겨우 2초 먼저 태어났다고 형일 순 없어.
정기 뭐, 그러든지.
선기 포기가 빠르네.
정기 난 항상 그게 문제야.
유자 그래,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그게 문제야. 두 달 뒤에 올라갈 공연 때문에 오늘 내가 쓴 희곡을 처음 리딩했거든. 근데 왕창 깨졌어. 연출도 배우들도 맘에 안 들어서 비난하더라고. 내가 진짜 한바탕 싸우고 싶었지만 한 발 물러서서 고쳐 쓰겠다고 말해 놓고 집에 온 거잖아.
선기 어떤 내용인데요?
유자 음, 배경은 미래인데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안 하는 시대가 된 거예요. 모든 걸 AI가 알아서 해 주니까요. 그러다 사람들이 말하는 법을 잊어버려서 국가가 나서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대화를 하게 하는 거예요. 거기서 말하는 능력을 되찾지 못하는 사람은 돌로 바뀌는 형벌을 내려요.
선기 돌요?
유자 제목이 ‘위대했던 돌’이거든요. 인간은 한때 위대했으나 현재는 소통의 빈곤을 겪고 있음을 말하는 내용이라 보심 돼요. 근데 다시 써야 해요. 방금 말한 내용을 고쳐야 할지 아예 다른 내용으로 새로 써야 할지 모르겠네요.
정기 새로 써.
유자 왜?
정기 그냥 느낌이 그래.
유자 소재 좀 주고 그런 소릴 하든지. 근데 지금 우리가 연극 이야길 할 땐 진짜 아니다. 대책을 세워야 해. 여기서 쫓겨날 판이잖아.
선기 쫓겨나요?
정기 (한숨을 내쉬고) 넌 신경 쓸 거 없어.
   
  데니스, 등장한다.
   
유자 왔어?
데니스 응. (선기를 발견하고) 아, 이분이 그분이군? (악수를 청하며) 안녕하세요, 여기 살고 있는 데니스 강입니다.
선기 (악수하며) 장선기라고 합니다. (짧은 사이) 외국에서 오셨어요?
데니스 한국에서 태어나서 갓난아기 때 입양을 갔어요.
선기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데니스 입양 가서 살던 동네에 한국 교포가 여럿 있었거든요. 그분들한테 배웠어요.
정기 자, 배고픈데 슬슬 고기나 구워 볼까?
데니스 난 완전 입맛 달아났어.
정기 왜?
데니스 아까 점심에 은행에 들렀거든. 융자를 받으려고 했는데 은행원이 나한테 외국인이고 비정규직이라 안 된대. 내가 그래도 우방국에서 온 사람이잖아. 우방이 뭐냐, 힘들 때 도와주는 게 우방 아냐? 근데 융자가 하나도 안 된다니까 너무 화가 나더라고.
유자 그럴 필요 없어. 넌 그래도 미국에서는 융자가 나올 거 아냐. 난 여기 사람인데도 하나도 안 나와.
정기 우리, 오늘은 그런 이야기 하지 말자.
데니스 왜?
유자 동생이 왔잖아. 우울해진다 이거지.
정기 (선기를 슬쩍 보고) 내가 사는 게 거의 이런 꼴이라서 미안.
선기 괜찮아.
데니스 근데 어쩐 일로 여기 오신 건가요?
선기 그냥 좀 이쪽에서 지내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서요.
데니스 아, 그렇군요. 근데 생각해 보면 참 비극이네요. 같은 핏줄인데 누구는 저쪽에서 누구는 이쪽에서 지내며 만나지도 못했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모님이 너무하셨어요.
선기 그런가요?
데니스 완전요.
정기 뭐, 그렇긴 한데 사정이 있긴 했어. 어렸을 때라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데 부모님이 미치도록 자주 싸웠거든. 선기하고 난 한쪽 구석에 웅크린 채 그걸 보고 있었어. 그럴 때면 선기는 오돌오돌 떨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지. 부모님도 우리가 그러는 걸 보고 이럴 바엔 갈라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거야.
선기 난 운 적 없는데?
정기 기억 못 하는 거야.
선기 네가 운 거겠지.
정기 너야.
선기 아니라니깐.
유자 어쨌든 가슴 아픈 일이야. 한 핏줄인데 이쪽과 저쪽으로 나뉜다는 건, 상상이 안 돼. (선기에게) 어떻게 견뎌 왔어요?
선기 뭐, 그렇게도 살아지더라고요.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었잖아요.
유자 그건 그렇죠. 근데 무슨 일 하세요?
선기 그게 중요한가요?
유자 그렇다기보다는 정기랑 뭔가 다르신가 해서요. 정기는 대학을 나온 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하겠다고 선언한 뒤로 아직까지 그 일이 뭔지 못 찾고 있거든요.
데니스 내가 충고했잖아. 뭐든 하라! 그 안에서 중요한 건 찾아진다!
유자 시끄럽고!
선기 저는 아버지 일 돕다가 지금은 다른 일 해 보려고 생각 중이에요.
데니스 뭐야. 그럼 취업 준비생이라는 거잖아. 정기하고 상황이 같네.
유자 부친께서는 무슨 일 하셨는데요?
선기 회사를 운영하셨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어요.
유자 어떤 회사였는데요?
정기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 적당히 넘어가.
유자 내가 실례했나?
정기 실례했지. 다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음 너에 대해 먼저 밝혀야지.
유자 아, 그건 그렇지. 아까 잠깐 들으셨겠지만 저는 연극을 하고 있어요.
선기 어떤 연극을 하는데요?
유자 음, 몇 작품 무대에 올리긴 했는데 아직은 어떤 연극을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만큼은 아니긴 해요. (혼잣말처럼) 그러고 보니 내가 정체성이 없네.
정기 자기 비하는 하지 말고.
데니스 그건 정기 말이 맞아. 자기 비하는 우리한테 안 좋아. 가뜩이나 이래저래 안 좋은데 더 안 좋아지면 버티기가 힘들지.
유자 음, 그럼 정체성 없다는 말 취소.
데니스 저를 소개하자면 영어 강사로 일하면서 친엄마를 찾고 있어요. 양부모님이 되게 좋은 분들인데 친엄마를 만나야 제가 누군지 알 것 같아서요.
선기 의미 있는 일이겠군요.
데니스 완전 그렇죠.
선기 다들 고민하는 지점이 확실하시네요.
유자 그렇게 보여요?
선기 완전요. 근데 전 그런 게 없어요.
유자 왜요?
선기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 목적이 없는 사람 같아졌어요.
정기 사실 나도 그래. 내가 편의점에서 일하는데 편의점에서 일하는 게 목적은 아니거든. 근데 다른 목적도 없으니 참 하루하루가 한심해.
유자 자기 비하하지 말자며.
정기 그런 거 아냐.
유자 아님 뭔데?
정기 자기 성찰.
유자 뭐래.
선기 진짜 목적 없이 사는 거 같아?
정기 그런 것 같아. 너도 그래?
선기 음,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데 하고 싶은 건 있어.
정기 뭐?
선기 말하면 웃을 것 같아서 말 못 하겠어.
정기 안 웃을게.
선기 안 믿어.
데니스 뭔데 그래요?
선기 말하면 비웃을걸요?
데니스 절대 안 그래요.
선기 장담 마세요.
유자 혹시··· 정기하고 관련 있어요?
선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전혀 아니진 않네요.
정기 나랑 뭐?
선기 ···롤러코스터.
정기 뭐?
선기 다섯 살 때였던 거 같은데 우리가 함께 롤러코스터를 탄 적이 있었어.
정기 근데?
선기 그걸 다시 한 번 타 보고 싶어.
정기 롤러코스터를 타려고 여기 온 거라고?
선기 그런 셈이야.
   
  정기, 웃음을 터뜨린다. 유자와 데니스도 웃는다. 선기가 인상을 쓰자 모두들 웃는 걸 멈춘다
   
정기 아, 미안.
선기 입에서 나온 말을 잘 안 지키는 스타일인가 봐.
정기 그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빵 터졌어.
유자 저도요.
데니스 비웃은 건 아니에요.
유자 자, 대화 나눌 시간은 많으니 이쯤에서 고기 먼저 굽자. 배고파.
데니스 나도 거의 쓰러질 지경이야.
정기 그럼 부엌으로 가자. (선기에게) 오겹살 괜찮지?
선기 없어서 못 먹지.
   
  암전.
   
   
   
3장
   
  다음 날. 강 근처의 야영장. 텐트가 쳐져 있고 그 앞에서 정기와 선기, 캠핑 의자에 앉아 있다.
   
정기 캠핑 좋아해?
선기 아니. 넌?
정기 안 좋아해.
선기 그렇군.
   
  사이.
   
정기 아버지하곤 어땠어?
선기 뭐가?
정기 사이.
선기 별로였어.
정기 왜?
선기 되게 통제적이었달까. 말로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 어쩐다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자기 맘대로였어. 독재 그 자체였지. 아주 숨 막힐 정도였어.
정기 말은 잘 들었어?
선기 겉으로만.
정기 그래도 착한 아들이었나 보네.
선기 겉으로만. 돌아가셨을 때, 슬프기보다는 홀가분했어.
정기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보통 그렇지 뭐.
선기 넌 엄마하고 어땠는데?
정기 별로였어.
선기 왜?
정기 엄마가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는데 속은 되게 셌던 사람이야. 친구들이 나한테 니네 엄마는 니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거 같다고들 했는데 모르는 소리였지. 왜 웃으면서 사람 갈구는 거 있잖아. 엄마가 그랬어. 되게 방목형인 거 같은데 알고 보면 굉장히 통제적이었어.
선기 아버지랑 비슷하네.
정기 부부는 닮는다니까.
선기 엄마 돌아가셨을 땐 어땠는데?
정기 슬펐지. 근데 솔직히 나도 홀가분했어.
선기 그렇군.
   
  유자, 식수가 든 플라스틱 통을 들고 등장한다.
   
유자 아유 무거워.
정기 내가 간다니까.
유자 아냐. 캠핑 오자고 한 건 나니까 내가 궂은일 다 할 거야.
정기 뭐, 그러든지.
유자 (손목시계를 보고) 네 시네. 우리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정기 좋지.
   
  유자, 버너에 불을 붙이고 냄비에 물을 부어 버너 위에 올린다.
   
정기 데니스는?
유자 이따 올 거야.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 되게 좋지 않아?
정기 뭐, 나쁘진 않네.
유자 평일인데도 캠핑 온 사람들이 되게 많아. 선기 너도 좋지?
선기 응.
정기 두 사람, 언제부터 말 놨지?
유자 어제 술 마시다 놨잖아. 기억 안 나? 어차피 동갑이니 친구 먹는 거지 뭐.
정기 빠르네. 근데 캠핑은 왜 오자고 한 건데?
유자 그냥. 저기 흐르는 강 보면서 바람도 쐬고 술도 마시면 좋잖아. 마침 날씨도 아주 근사하고.
정기 다른 목적 있는 건 아니지?
유자 목적?
정기 아님 말고.
유자 뭔 소리야?
정기 너 꼭 그러잖아. 누군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과 관련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거. 근데 이번엔 좀 참아 주라. 우린 네 희곡에 등장하고 싶지 않아.
유자 누가 뭐래. 그냥 선기하고 네가 오랜만에 만났다니까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사람 진심을 곡해하는 거면 되게 서운한데?
선기 말실수했네.
정기 그런가? 서운했다면 미안.
유자 사과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아, 물 끓는다. (라면 포장을 벗겨 내며) 수프 먼저 넣고 면을 넣고. 파는 이따 넣는 게 좋겠고.
   
  사이.
   
유자 어디선가 들었는데 어떤 관계가 반으로 갈리는 건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이 있대. 쉽게 말해 그 관계의 당사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갈린 건지, 당사자들 외의 주변 상황으로 인해 갈린 건지 분석이 필요하다는 거지.
정기 뭔 말이 하고 싶은데?
유자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거야.
정기 글쎄.
선기 둘 다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유자 그런 두리뭉실한 대답 말고 근거가 있어야지. 니들 일이잖아.
정기 부모님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사실인데 양가 어른 사이가 더 안 좋긴 했대. 엄마한테 들은 바로는 아버지 집안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엄마를 되게 안 좋게 말했대.
선기 아버지 말도 비슷했어. 엄마 집안이나 친구들이 아버지를 아주 싫어했대.
유자 그럼 갈라진 게 외적 요인이 더 컸다는 거네?
정기 근데 가장 큰 문제는 당사자들 사이가 나빴다는 거겠지.
유자 그래서 결론이 뭔데?
선기 내가 그랬잖아. 섞여 있는 거라고.
유자 (한숨을 내쉬고) 어쨌든 어렵게 만났는데 형제끼리 잘 지내봐야 하는 거 아냐?
정기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
유자 친구로서 안타까워서 그래.
정기 거기까지만 해.
유자 내가 제안 하나 할까?
선기 뭐?
유자 같이 살아 보면 어떨까?
선기 같이?
정기 우리가?
유자 응.
정기 왜?
유자 여태까지 떨어져 있었으니까.
선기 꼭 같이 살아 봐야 하나? 여태까지 따로 살았는데.
유자 내 말은 단둘이 살라는 게 아니라 우리랑 같이 살자는 거야. 옷방으로 쓰는 방이 있거든. 거길 비우고 네가 보증금을 보태며 들어오면 우린 이사 안 가도 돼. 어때? 좋은 아이디어 같지 않아?
선기 잘 모르겠는데.
유자 아직 시간 있으니까 며칠 생각해 보라는 거야.
선기 그래, 생각은 해 볼게.
유자 자, 어느 정도 끓었으니 파를 넣고··· 라면 다 됐다. 한번 먹어 볼까. (냄비를 들다가 놓치고) 아이고!
   
  냄비가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유자 내 라면!
정기 괜찮아? 안 데었어?
유자 난 괜찮은데 라면이 몽땅 쏟아졌어.
선기 괜찮아. 사람이 안 다쳤음 됐지.
유자 으 아까워. 라면도 딱 네 개밖에 안 가져왔는데. 편의점에라도 다녀올까?
정기 됐어. 이따 치킨 먹겠다며. 그거에 맥주나 마시자.
유자 그럴까?
선기 응, 그러자.
유자 이런 착한 형제를 봤나. 보통 먹을 걸 엎으면 불같이 화내는 게 정상인데. 근데 이게 무슨 복선은 아니겠지?
정기 복선이라니?
유자 라면이 엎어지니까 불길하잖아.
정기 애매한 데다 작가 기질 발휘하지 마. 라면은 라면일 뿐!
   
  데니스, 등장한다.
   
정기 왔어?
데니스 어. 원장이 이야기 좀 하자는 걸 핑계 대고 간신히 빠져나왔어.
유자 무슨 이야길 하재?
데니스 뻔하지 뭐. 회사 경영이 어려워서 강의료를 동결하겠다는 거야.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어떻게 그런 소릴 쉽게 할 수가 있지?
정기 그게 전 세계 고용주의 전략이자 전술이지.
데니스 근데 왜 라면을 엎어 놨어? 싸웠냐?
유자 아니. 실수로 그랬어.
데니스 싸웠구만 뭘. 내가 어제 술 마시면서 그랬잖아. 갈라서서 오래 지낸 사람들끼리 다시 잘 지내는 건 어렵다고.
유자 뭔 소리야?
데니스 네가 뭘 의도하는지는 알겠어. 윗 세대 때문에 갈라진 핏줄을 다시 이어 주고 싶다는 거잖아. 근데 그거 지나친 이상론이야.
유자 어째서?
데니스 현재 상태가 나으니까.
유자 남 이야기라고 쉽게 하네.
데니스 네 이야기도 아니잖아.
유자 정기랑 나랑 고등학교 때 만나 여태까지 친구야. 물론 너도 우리의 친구지만 정기와 난 그 이상이야.
데니스 그 이상이든 이하든 네가 열 낼 일은 아냐.
유자 선기 쟤, 우리 집으로 들어올지도 몰라.
데니스 뭔 소리야? 방이 없는데.
유자 옷방 비우고 쟤가 그 방 쓰면? 쟤가 보증금 보태면 이사 안 가도 돼.
데니스 다 같이 살자고?
유자 좋잖아. 그게 바로 공생이지.
데니스 (정기에게) 넌 그걸 원해?
정기 뭐··· 안 될 이유는 없는 것도 같고.
데니스 (선기에게) 넌 어떤데?
선기 아직 잘 모르겠어.
데니스 아서라. 그냥 거리 두고 살던 대로 사는 게 낫지. 괜히 애매하게 합쳤다가 안 맞아서 싸우기라도 하면 다 피곤해지는 거야.
유자 넌 왜 이렇게 부정적인데? 그게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도 돼?
데니스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거야.
유자 너무 냉정한 거 같은데.
데니스 로스쿨을 나와 로펌에서 일했었어. 법을 다루는 일이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게 뭔가 명확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법이 쓰이는 게 아니라 돈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는 쪽으로 법이 작용하더라고. 어이없지? 근데 그게 이 세상의 상식이야. 우리의 현재는 이상적인 게 아닌 그런 상식으로 채워져 있어.
유자 너나 많이 상식적으로 살아.
데니스 비꼬지 말고.
정기 그 이야긴 처음 듣는 건데, 로펌이면 대우도 좋았을 텐데 왜 그만뒀어?
데니스 다들 말렸는데 난 거기서 그렇게 살긴 싫었어. 내가 나 자신을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친엄마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건 그때였어.
선기 엄마를 찾으면 뭐가 달라질 거 같아?
데니스 아직은 잘 모르겠어.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유자 근데 치킨은? 네가 배달시키기로 했잖아.
데니스 아! (휴대폰을 터치해서 확인하고) 음, 아직 조리 중이래.
   
  사이. 네 사람 캠핑 의자에 앉아 강을 바라본다.
   
유자 강은 참 끝도 없이 흘러가네.
데니스 강이니까.
정기 우리 형제처럼 강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어져 사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유자 있을 거야.
정기 그럴까?
유자 의외로 많을 수도 있어.
선기 사춘기 때 그런 생각을 했었어.
유자 무슨 생각?
선기 부모님 사이가 안 좋다고 해서 정기랑 나까지 남처럼 살아야 한다는 건 부조리하다는 생각.
유자 그래서?
선기 나름 반항을 하긴 했었거든. 근데 뭐 힘이 있어야 그런 반항도 먹히는 거지.
유자 집을 나와서 이쪽으로 올 수도 있었잖아.
선기 용기도 없었고 이쪽으로 오는 게 좋은 판단이란 확신도 없었어. 어렸을 때부터 저쪽에서 살았으니까.
유자 그건 그렇겠네.
선기 아버지한테 내내 들어왔던 말도 대단한 걸림돌이었지. 아버진 엄마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남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끝도 없이 말했거든. 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나쁠 수 있을까, 저 말은 사실이 아닐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렇게 믿게 됐어.
정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선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해.
정기 하긴 뭐, 나도 엄마한테 그런 말들을 들었으니까.
선기 어떤 말?
정기 아버지가 얼마나 구제불능이고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없는지에 대한 말.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어.
선기 그 말을 믿었어?
정기 반만. 전혀 안 믿을 순 없었지. 어쨌든 내 곁엔 엄마뿐이었으니까. 나와 엄마 주변에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충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어. 우리 편임을 강조하며 아버지를 험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개인적으로 아버지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았어. 아버지를 나쁜 사람이라며 욕했지만 사실은 우릴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를 욕하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며 화를 푸는 것처럼 느껴졌어. 반대로 아버지와 지금이라도 잘해 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사람들의 입장은 사실 되게 애매했어.
데니스 어떤 점이?
정기 엄마하고 아버지가 다시 합쳤을 때 발생할 여러 문제들은 모르는 척하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이었거든.
유자 그래도 후자가 낫지 않나?
정기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유자 (선기에게) 넌? 너랑 아버지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어?
선기 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엄마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만 있었어.
유자 어떻게 나쁘게 말했는데.
선기 엄마가 안 좋은 물이 들어서 아버지와 날 배신했다고 했어.
유자 그 말을 믿었고?
선기 계속 듣다 보니 그렇게 됐지 뭐. 근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나쁜 마법에서라도 풀려난 듯 그런 생각이 없어졌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지.
데니스 내가 충고 하나 할까?
선기 나한테?
데니스 너희 형제한테.
정기 해 봐.
데니스 두 사람은 절대 한 공간에서 살면 안 돼. 재미로라도 그랬다가는 크게 싸우게 될 거야. 지금까지 그랬듯 거리를 두고 살아. 그래야 최소한의 평화가 유지되는 거야.
유자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데니스 넌 희곡을 쓴다는 사람이 당대성은 염두에 두지 않는 거냐?
유자 무슨 당대성?
데니스 분열은 어떤 방법을 써도 분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세계사를 보면 알 수 있잖아. 사람도 국가도 마찬가지지. 쉬운 예를 들어 볼까? 반으로 갈라진 유리컵을 붙인들 그게 온전하겠어? 잘못 쓰다가 유리 파편을 삼키게 될 뿐이지. 갈라진 건 다시 붙일 수 없어. 떨어진 채로 존재하거나 폐기되어야 하는 거라고.
유자 도와주지 않을 거면 그냥 가만히 있어.
데니스 옳은 말을 해도 저런다니까.
유자 뭐가 옳은데?
선기 둘 다 그만해.
정기 맞아. 왜 너희들이 난리야? 우린 가만히 있는데.
유자 음, 미안. 목소리가 컸네.
데니스 나도 미안.
유자 (데니스에게) 치킨은 어떻게 됐어?
데니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배달 중이래. 곧 오겠지.
정기 맥주는?
유자 저기 아이스박스에 잔뜩 있어. 오늘 취할 때까지 마시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거야.
정기 그거 녹취해서 희곡으로 쓰려고?
유자 아니라니까.
데니스 난 저 말 못 믿어. 저번에는 내 이야길 썼잖아. 이름을 로버트로 바꾸면 뭐 해. 내용은 나에 대한 이야긴데. 친엄마를 찾아 이 도시에 온 입양아 로버트가 이 사회에서 소외되다가 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는 내용이잖아. 로버트는 강으로 뛰어내리는데 죽진 않고 구조되지. 내가 그거 보면서 진짜 충격이 컸어. 그 뒤로 저 강을 잇는 다리만 봐도 몸이 떨린다고. 내가 너, 고소하려다가 참았다 진짜.
유자 말했잖아. 한국계 입양아들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싶었다고. 그걸로 경계에 선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고.
데니스 방법이 잘못됐어.
유자 그렇게 싫었어?
데니스 싫다기보단 부끄러웠던 것 같아.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긴 줄 모른다고 해도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어.
유자 (정기에게) 너도 그럴 거 같아?
정기 이제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야.
유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기 그렇잖아. 해결되지 않아서 분명 할 이야기가 있긴 한데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가 돼버렸어.
유자 그러니까 계속 이야기해야지. 저 아이스박스에 있는 맥주를 몽땅 다 마시고 할 이야기 다 해 보자고. 속에 있는 이야길 다 한 다음에 나는 그걸 정리하는 거지. 한 번만 도와주라. 너희 형제 이야기에 좀 꽂힌 거 같아.
정기 됐다니까.
유자 (선기에게) 너도 싫어? 내 이야기가 되는 게?
선기 난 나쁘지 않은데.
유자 진짜?
선기 치킨 오면 맥주 한 캔씩만 마시고 가자.
유자 어디로?
선기 롤러코스터.
정기 뭔 소리야?
선기 타러 가자고.
정기 나랑?
선기 응.
데니스 우린?
선기 그건 너희들 선택.
유자 왜 자꾸 롤러코스터 이야길 하는 건데? 이유가 뭔데?
선기 타면 이야기해 줄게.
   
  데니스의 휴대폰에서 띵동, 소리가 난다.
   
데니스 어? 왔나 보다. (한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여기요! 치킨!
   
  암전.
   
   
   
4장
   
  그날 밤. 롤러코스터 구조물 근처의 벤치에서 네 사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롤러코스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정기 진짜 탈 거야?
선기 응.
정기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데.
데니스 그러게. 현기증 나.
유자 직접 보니 재밌을 거 같기도 해.
데니스 퍽이나 재미있겠다.
선기 표 끊어야지.
정기 아직 아이스크림 다 못 먹었어.
선기 빨리 먹어.
정기 보채지 좀 마.
   
  사이.
   
데니스 내가 입양을 갔을 때 말야. 되게 어렸거든. 조금 커서야 내가 같은 반 아이들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걸 알았어. 그들이 날 놀려서 울며 집에 돌아온 날이 있었거든. 양부모가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고 화장실 거울 안에 있는 날 물끄러미 쳐다봤었어. 아, 다르구나. 난 다른 아이들과 다르구나. 그걸 인정한 뒤로는 누가 놀려도 반응하지 않았지. 속으로는 감정이 롤러코스터처럼 위아래로 출렁였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어.
유자 힘들었겠네.
데니스 그래서 난 변수를 좋아하지 않아. 예측 가능한 걸 좋아해.
선기 뭔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데니스 롤러코스터, 타고 싶지 않다고.
선기 진심이야?
데니스 응.
정기 근데 넌 친엄마를 찾으러 이 먼 곳까지 왔잖아. 그거야말로 변수가 많은 선택이지 않냐?
데니스 할 말 없네.
유자 찾을 순 있을 거 같아?
데니스 언젠가는. (한숨을 내쉬고) 난 갈게.
유자 지금?
데니스 응.
유자 좀 더 있다 가.
데니스 내가 할 말은 다 한 거 같아.
선기 진짜 저거 안 탈 거야? 같이 타면 좋잖아.
데니스 사양할게. 너에겐 저걸 타려고 하는 이유가 있겠지. 근데 나는 저걸 꼭 타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 갈게.
   
  데니스, 퇴장한다.
   
유자 뭐야. 진짜 가버렸네.
선기 (유자에게) 넌 어쩔 거야?
유자 음, 저거 몇 분이나 타게 될까?
정기 아마 이삼 분 정도?
유자 짧네.
정기 저런 거 안 타 봤어?
유자 응.
정기 타면 알게 될 거야.
유자 뭘?
정기 결코 짧지 않다는 거.
유자 그래?
정기 응. 순간이 영원 같을 거야.
유자 그거 내 모토야.
정기 모토?
유자 내가 쓰는 희곡 말야. 순간이 영원 같은 내용이길 바란다고. 근데 쓰면 쓸수록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쓰는 것도 그렇긴 한데 요즘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는 게 더 큰 문제긴 해.
선기 그래서 타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유자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선기 뭔데?
유자 데니스가 그랬잖아. 너한텐 저 롤러코스터를 타려고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럼 나는 어떨까? 있을까? (짧은 사이) 없을까?
선기 그건 네가 판단해야지.
유자 음··· 어렵네. 일단 화장실 좀 다녀올게.
   
  유자, 퇴장한다. 긴 사이.
   
선기 몇 분이나 지났지?
정기 (손목시계를 바라보고) 이십 분.
선기 왜 안 오지?
정기 변비인가?
선기 간 거 같아.
정기 어딜?
선기 어디로든. 저걸 탈 이유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지.
정기 그렇군. 이제 어떡하지?
선기 타야지.
정기 롤러코스터?
선기 응.
정기 네가?
선기 우리가.
정기 나도?
선기 응, 너도.
정기 나까지 그럴 필요 있나?
선기 있어.
   
  사이.
   
선기 가자.
정기 ···그래.
   
  암전.
   
   
   
5장
   
  그날 밤.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정기와 선기. 둘 다 긴장한 표정이다.
   
정기 이제 말해 봐.
선기 뭘?
정기 이걸 왜 타자고 했는지.
선기 어? 움직인다.
정기 어서 말해 보라니까.
선기 으 달린다!
정기 말해 보라니까.
   
  롤러코스터에 속력이 붙으면 두 사람 얼굴을 찡그린다.
   
선기 기억나? 어렸을 때 너랑 나랑 부모님이랑 함께 이걸 탔었어. 아마 부모님이 피터지게 싸우던 시절이었겠지. 어쩌면 갈라서기 직전이었을지도 몰라. 그때 난 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 현재도 아니고 과거도 아닌 멋진 미래로 열차가 우릴 데려다줄 거라고 믿었던 것 같아.
정기 뭐라고? 안 들려!
선기 근데 롤러코스터가 정신없이 달려서 도착한 곳은 출발점이었지. 그걸 깨닫자마자 울고 말았어. 부모님이 날 달래 주셨지. 아마 내가 무서워서 운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실망해서 울었어. 기대했던 모험의 끝이 겨우 출발점이라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어.
정기 크게 좀 말해! 아, 정신없다 진짜!
선기 근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래. 열차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곳이 출발점이라고 해도 안 떠난 것보단 나은 거라고. 적어도 열차가 달리는 동안은 어디론가 가고 있던 순간이니까 그게 더 낫다고.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면 그냥 영원히 그 상태니까.
정기 아, 죽을 것 같아! 이거 언제 끝나냐?
선기 그러니까 아무런 성과가 없더라도,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올지라도, 우린 출발할 준비를 해야 하고 언제든 떠나야 해. 이 롤러코스터처럼!
정기 야!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긴 사이. 롤러코스터가 멈춰 선다. 두 사람,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정기 와, 이거 진짜 장난 아니네. 원래 이런 거였냐?
선기 그런가 봐.
정기 근데 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거야? 하나도 못 들었어.
선기 저기, 우리 이거 한 번만 더 탈까?
정기 뭐라고?
선기 한 번만 더 타자. 응?
   
  암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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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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