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녀와 윤심덕과 그리고 나
- 작성일 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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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녀와 윤심덕과 그리고 나
신은수
등장인물
김우진.
이영녀.
오일삼.
윤심덕.
1925년, 늦은 저녁. | |
상성합명회사의 작은 사무실 안. | |
한쪽 벽면엔 업무 서류들이 쌓인 책장. | |
전화기가 놓인 책상에는 쓰고 있던 원고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 |
사무실 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다. | |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김우진. | |
옆에 놓인 물컵과 약봉지. | |
김우진 | 하루하루 정말 미칠 지경이야··· 돈과 직위?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가꿔 이룬 것들이라면 애착이라도 있겠지만, 모두가 아버지 것들인데··· 난 그저 장남으로 태어난 책임으로 꼭두각시처럼 있는 거라고. 아무리 좋은 먹이를 매일 갖다 줘도··· 새장 속의 새가 행복하겠나. 지금 내 신세가 꼭 그래, 누구보다 자유로워야 할 예술가가 말이야. 이러다간 날개가 퇴화돼··· 어느 때부턴 나는 법조차 잃어버릴까 두렵다고. |
약봉지를 힘겹게 뜯으며. | |
김우진 | 그래서 오늘도 쓰고 있다네. 이런 밤늦은 시간에 부친께서 앉힌 사장 역할이 끝나면, 나는 법을 잊지 않으려 말일세. 지금 쓰고 있는 것 말인가? 조선판 입센의 인형의 집, 노라인데··· 잘 풀리지가 않아. 막바지 3막으로 가고 있지만, 과연 지금의 조선 현실서 착취 속에 사는 궁핍한 여성이 자아를 찾아간단 것이 가능한 얘기인지··· 써 본들 사람들이 보고도 공감 못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뭐라 했나, 윤심덕? |
당황해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 |
김우진 | 이보게,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다고. 안 만날 걸세, 지금 윤심덕이가 어디 살고 있던 내 알 필요 없잖은가?! 그래, 그 추잡한 소문들을 여기서도 전부 다 듣고 있다고! |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 | |
밖을 향해서. | |
김우진 | 밖에 누군가. (수화기에) 잠시만··· |
급하게 원고들을 구석에 숨겨 놓으면, | |
조심스레 문을 열고 오는 오일삼. | |
오일삼 | 접니다, 사장님. |
김우진, 안도하는 표정. | |
오일삼 | 아! 전화 중이신데··· 불쑥, 실례했습니다. |
김우진 | (수화기에) 회사 직원이야, 신경 안 써도 돼. 나도 잘 모르겠네··· 언제 완성될지는. 얘기했잖은가, 마지막 부분에 글이 막혔다고. 다 쓰면 우선은 자네가 있는 토월회 쪽으로 보낼 테니, 한번 읽어 보라고. |
오일삼 | 하하하. 편하게 계속하십시오. |
김우진 | 이영녀일세. 주인공 이름 그대로가 작품의 제목이야. 목포 유달산 판자촌에 사는 가여운 여인네지··· 그래, 그럼 다음에 또 하세. |
수화기를 내려놓고선, | |
구석의 원고들을 다시 꺼내며. | |
김우진 | 부친께서 감시하라 보냈나 보군. |
오일삼 |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
김우진 | 이런 늦은 시간에, 불쑥 무슨 일 때문인가. |
갖고 온 꾸러미를 건네는 오일삼, | |
김우진은 표정이 환해진다. | |
김우진 | 아! 벌써 도착했구먼, 몇 달 더 걸릴 줄 알았는데. |
오일삼 | 와 있어서 바로 갖다드리러 왔죠, 이 밤에요. |
김우진 | 괜한 말을 해··· 미안하네. |
오일삼 | 요즘 왕 사장님께서 많이 칭찬하시던데요, 뭘. |
김우진 | 아들인 내가 착실히 사업에 전념한다 말인가. 무대 안에서고 밖에서고··· 내 삶은 어이서든 연극이로구먼. |
오일삼 | 무슨 말씀입니까, 동경에 유학까지 다녀오신 분께서. |
꾸러미를 푸는 김우진, | |
영문 원서를 꺼내 넘겨 보며. | |
김우진 | 요즘에 손님들 반응은 좀 어떤가. |
오일삼 | 뭐, 가끔 물건에 불만 있다 찾아오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김우진 | 무조건 친절히 응하게. 일본 종합상사도 많은 상황에, 우리 물건을 사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니. 다른 점원들한테도 그리 전하고. |
오일삼 | 조선 사람이 일본 놈들 가게로 가겠습니까. |
김우진 | 대량으로 들여와서 싸게 팔면 우리 쪽도 점점 버틸 수가 없어질 걸세. 민족 민족 외치는 구태적 사고로는 앞으론 살아남기가 힘들지. |
오일삼 | 예, 예! 뭐든 사장님만 믿고 잘 따릅죠. |
피하듯 영문 원서를 하나 집어 펼쳐 보며. | |
오일삼 | 오! 전부 이걸···! 읽으신단 거군요. |
김우진 | 뭐, 대충만 아는 정도지. 이러면 일본을 안 통해도 서구 문학을 바로 접할 수 있으니··· 답답함을 벗고 잠시라도 하늘을 나는 기분이랄까. |
오일삼, 놓인 원고를 조심스레 살펴본다. | |
오일삼 | 써서 어디로다 보내신단 게··· 이겁니까. |
김우진 | 희곡이란 건데, 연극은 본 적 있는가. |
오일삼 | 변사가 하는 활동 필름은 좀 봤습니다, 애들이랑 마누라 때문에. |
김우진 | 일삼이 자넨 가족이 어떻게 됐지? |
오일삼 | 마누라랑 남매 꼬맹이 둘하고, 그렇습니다. |
김우진 | 응, 네 식구로구먼···. |
책상 서랍을 열고 표 다발을 꺼내, | |
네 장을 세어 건네준다. | |
김우진 | 활동 필름만큼 즐거워들 할 테니, 가서 좋은 시간 보내라고. |
오일삼 | 아니, 이거 곡마단 공연 아닙니까. |
김우진 | 서양에선 서커스라 부른다네. 이번에 본격적으로 들여와 한다니, 아이들이 코끼리 같은 걸 실제 보면 많이 좋아하지 않겠나. |
오일삼 | 어쩌다 표를 그리 많이 사셨습니까. |
김우진 | 낮에 흥행업자를 만났는데, 그때 받은 거야. 홍보 좀 해 달란 뜻에서겠지. 낯선 지역까지 와서 첫 흥행인데, 걱정이 많을 수밖에··· 내 그 마음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
오일삼 | 인제 여기 곡마단도 들어오면··· 사장님 하시려는 연극 흥행엔, 어쨌거나 경쟁자라 안 좋은 일인데 뭘 도와주려 하십니까. |
김우진 | 이 사람아, 어디 연극이 흥행을 위한 오락인가, 사람들 계몽하는 문화 운동이지. |
오일삼 | 아, 일단은 남들이 와서 봐야 계몽이든 뭐든 되죠. |
김우진, 원서들을 책상에 쌓아 놓으며. | |
김우진 | 맞네··· 일리 있는 말이네. |
오일삼 | 그럼 가 보겠습니다. 문화 운동하시는 데 방해 말아야죠. |
김우진 | 혹시라도··· 부친한텐, 이 원고 얘기 같은 건 하지도 말고. |
오일삼 | 저는 못 봤습니다. 하하하. |
오일삼이 가려고 돌아서면, | |
약봉지를 입으로 가져가는 김우진. | |
오일삼 | 참, 아까 하신 말씀 중에··· |
김우진 | (손을 멈추고) 무슨, 문제라도 있나. |
오일삼 | 아니, 웬 약을···!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
김우진 | 흔한 수면제야, 수면제라고. |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다. | |
김우진 | 쓰다 내용이 막힐 땐, 정신이 좀 몽롱해지면 등장인물들이 나타나 말을 하기도 하고··· 그럼 나도 거기에 말을 걸기도 하면서 그렇게 서로들의 대화를 듣다가 보면, 방향도 내용도 선명해져 다시 쓸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 |
오일삼 | 고참···! 문화 운동하기 어렵네요, 정말. |
김우진 | 이러다 자연스레 잠들 테니 걱정 말라고. |
오일삼 | 밖의 괘종시계가 말썽이라 방해되시겠군요. |
김우진 |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가, 한참 집중해 있다 보니··· |
오일삼 | 제대로 시간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시간마다 항상 똑같이, 두 번을 땡땡하고 치니, 참···! |
김우진 | 내일 고치면 될 테고, 그런데 하려던 말은? |
오일삼 | 으음! 거기··· 말입니다. |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 |
오일삼 | 유달산 판자촌엔··· 뭔 일로다가··· |
김우진 | 쓰던 작품의 배경이라 취재차 가 봤네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 |
오일삼 | 자, 작품이요?! 문화운동? |
과장되게 손뼉을 치며 웃는다. | |
오일삼 | 난, 또···! 괜히 걱정했네. 요즘 그쪽··· 소문이 안 좋아서요. 남정네들 유혹해 돈 뜯으려는 여인네들이 득실하다던데요. |
김우진 | 그런 일 없었으니, 괜한 오해 말게나. |
오일삼 | 다 신세 망치는 짓이죠. |
김우진 | 날 미행했나 보구먼··· 아버지가 시켰겠지만. |
오일삼 | 예?! 제가요? 무슨 말씀입니까. |
김우진 | 괜찮아. 자네를 나무라진 않을 테니깐. |
오일삼 | 그런 일 없습니다. 에이, 말도 안 되죠. |
김우진 | 그럼 유달산 판자촌에 갔던 걸 어찌 알았나?! |
오일삼 | 방금 전 전화로다, 얘기하시던데··· |
정신이 몽롱해진 김우진, | |
연신 눈을 깜박인다. | |
김우진 | 아···! 그랬지, 참. |
오일삼 | 진짜로··· 괜찮으신 겁니까. |
김우진 | 아버지에 대한 피해 의식 탓이니까··· 신경 쓸 것 없어. |
오일삼 |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쉬엄쉬엄하십시오. |
김우진 | 가져다줘서 고맙네. |
오일삼 | 가 보겠습니다. |
꾸벅 인사하고 나가는 오일삼, | |
김우진은 책상에 앉아 원고를 쓰려 한다. | |
김우진 | 유달산 밑의 판자촌··· (넘겨보며) 빈곤한 이 여성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작품은 사회극이 되어야 해. 처참한 빈곤 탓에 몸을 파는 한 여자의 눈물 쏟는 신파가 돼선 안 돼. 낡은 관습에 찌든 사람들의, 그들 마음속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줄 작은 돌멩이가 될 연극··· 1막은 1924년 여름밤··· 2막은 한 해가 지난 여름날··· 이제부턴 마지막이 될 3막을 써야 하는데··· 가을이 좋을까. (원고에 적으며) 가을··· 차가운 눈이 쌓이는 겨울을 맞이하기 전, 이때에 이영녀는··· 죽음을 맞는다··· |
신경질적으로 썼던 원고를 그으며. | |
김우진 | 아니, 아니지. 이래서는 안 돼···! |
괘종시계가 한 번 땡 울리면, | |
순간 놀라 펜을 멈춘다. | |
사이. | |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 |
김우진 | 일삼이 자넨가. 밤이 늦었는데··· 그만 돌아가게. |
아무 말 없이 다시 문을 두드리면, | |
김우진은 일어나 조심스레 다가가 문을 연다. | |
김우진 | ··· |
30세 전후 검은 모시치마 차림의 여윈 여성, | |
김우진에게 고개를 숙인다. | |
김우진 | 아, 무슨 일··· 때문이십니까. |
이영녀 | 꼭 선생님한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왔어요. |
김우진 | 저한테 말인가요? |
이영녀 | 부디···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
김우진 | 일단은 들어오십시오. |
이영녀를 소파로 안내하고선, | |
새 컵에 물을 따르며. | |
김우진 | 대접할 게 지금은 물 한 잔뿐인데, 괜찮겠습니까. |
이영녀 | 역시나 친절한 분이시네요. |
김우진 | (앞에 놓아 주고) 으레 손님한텐 당연한 건데요. |
이영녀 | 이런 친절을··· 사내한테선 받아 본 기억이 없어서요. |
김우진 | 그저 물 한 잔 따라 준 것뿐입니다. |
이영녀 | 사내가 여인한테 말이죠. |
김우진 |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관습의 틀에 갇혀 남성한테 순종만 하며 사는 게 여성 삶의 전부가 돼선 안 될 일이죠. 이 땅에도 점점 의식이 바뀐 신여성들이 늘어날 겁니다. 저희 회사에서 중계한 집에, 무슨 문제라도···? |
이영녀 | 그런 일 때문이 아니에요, 선생님. |
김우진 | 그럼 판매 중인 물건 때문에 오셨겠군요. 지금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해 당장 해결해 드릴 순 없습니다만. 허수아비지만 어쨌거나 사장이니 하자에 관해선 책임지고 보상해 드려야죠. |
책상으로 가서 펜을 들고. | |
김우진 | 성함과 사시는 곳을 알려 주시면, 적어 뒀다 내일 직원한테 전달하겠습니다. |
이영녀 | 진정, 절 모르시겠어요? |
몽롱해진 김우진, | |
연신 눈을 깜빡이고. | |
김우진 | 언제 서로가··· 만났던 적이 있던가요. |
이영녀 | 전 유달산 빈민의 삶을 살고 있지만··· |
김우진 | 그··· 유달산 밑의 판자촌 말이군요. |
이영녀 | 몇 번이고, 선생님께선 거길 찾아가셨죠. |
김우진 | (떨려 오는 손) 성함을 말씀하십시오. |
이영녀 | 이영녀예요. |
놀란 김우진은 펜을 놓치고, | |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 |
김우진 | 흔한 이름은 아니라서··· 기억하기가 쉽겠군요. |
이영녀 | 선생님께서 직접 지으셨잖아요, 길 영(永)자에 계집 녀(女)로다··· |
김우진 | 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겁니까?! |
이영녀 |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
김우진 | 적어 뒀으니, 낮에 다시 찾아오면 직원이 해결해 줄 겁니다. 어떻게 돌아갈 생각으로 이런 한밤중에 여기까지 여자 혼자··· 인근에 누군가가 삽니까, 하룻밤 신세 질 형제 친척이라던가. |
이영녀 | (고개를 가로젓는다) ··· |
김우진 | 근방 어디, 적당한 여관이라도 찾아 들어가야겠군요. |
이영녀 | 선생님께서 정해 주지 않으셨잖아요. 이영녀한텐, 이 근방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
김우진 | 그런 이상한 말 좀 제발 그만하십시오! 세상은 여성한텐 더 잔인하고 악랄하단 말입니다. 근대적이지 못한 이 망할 세상의 가장 약자는 여성이란 말입니다! 여관비를 드릴 테니··· 이 근방 어딘가에서 묵으십시오. 아마도, 아이들도 있으시겠죠? |
이영녀 | 예··· 넷이나 낳았지만요··· |
책상 서랍을 열고 표 다발을 꺼낸 김우진, | |
네 장을 세어서 건네준다. | |
김우진 | 이 밤에 그래도 헛걸음이 돼선 안 되니, 곡마단 구경이라면 아이들이 무척이나 좋아할 겁니다. 아, 참··· (한 장을 더 건네고) 이렇게 본인 것까지··· 다섯 사람이서 즐겁게 구경 다녀오십시오. |
이영녀 | 하지만··· 두 아이는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 버렸는걸요··· |
김우진 | ··· |
사이. | |
김우진 |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좋게 쓰시려 일찍 데려간 걸로 생각하십시오. |
이영녀 | (표 한 장을 책상에 놓으며) 한 아이는 칠팔 년 전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다시 한 장을 내놓는다) 숙희라는 아이는 저번 겨울··· 병이 들어 죽고 말았어요. 모든 게 가난 때문이에요. 돈이 없으니 병원에도 갈 수가 없었고··· 굶주림에 몸은 점점 더 약해져만 갔으니까요. 남은 두 아이는 무슨 수를 쓰든 지켜야 하는데, 가난은···! 삯바느질 수입만으론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으니··· 아이들만 지킬 수만 있다면 남들의 손가락질 같은 건 하나도 두렵지가 않아요···! 몸을 파는 일조차도요. |
사이. | |
김우진 |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
이영녀 | 선생님, 제가 바로··· 이영녀예요. |
김우진 | 혹시 날 잡아가려는 악마인 거요?! 거짓말! 분명히 아버지가 날 연극에서 영영 떼어 놓으려 짠 계획일 거야. 그런 연기에 속을 줄 아나. 이러고 나면 놀라 오줌이라도 지리며, 딴생각 안 하고 이깟 사장 자리에 충실할 줄 아나 본데! 아버지한테 전하시오, 난 언제고 떠나, 평생 글 쓰고 연극 하며 살 거라 말이오! |
이영녀 | 선생님··· |
슬픈 표정의 이영녀. | |
김우진은 정신없이 원고를 살핀다. | |
김우진: 언제 와서 이것들을 몰래 봤소? 당신은 배우요? 아직은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않은 이 작품을··· 이런 망할! | |
이영녀 | 선생님께선 조선판 인형의 집이 될 거라 동료한텐 말했지만, 실제론 버나드 쇼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본인도 그런 작품을 써 보겠단 갈망으로 시작한 것이잖아요? |
김우진 | ··· |
사이. | |
아련하게 윤심덕의 노랫소리가, | |
허밍으로 들려온다. | |
김우진 | 맞아··· 그의 작품 「위렌 부인의 직업」 같은 걸··· 나도 쓸 수만 있다면··· 그런 걸 남길 수만 있다면··· |
이영녀 | 너무 좋아해 번역까지 해 보셨을 정도로요. |
김우진 |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혼자만의··· 내 마음속의 것들을,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오··· |
이영녀 | 지금 제가··· 그 속에 있으니까요. |
김우진 | 그대는 분명··· 내 작품 속 이영녀로군··· |
고개를 끄덕이는 이영녀, | |
김우진은 다시 책상에 앉는다. | |
김우진 | 분명··· 이 약기운이 만든 망상일 테지만 말이야··· |
이영녀 | 전 선생님 속에서 자라난 인물이에요. |
김우진 |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
이영녀 | 이제부터 마지막 부분을 쓰려 하시죠? |
김우진 | 생각들이 많아··· 좀체, 더는 써 나가기가 어려워. |
이영녀 | 낙엽 진 가을을 배경으로 말이에요. |
김우진 | 그래··· 1925년의 가을··· 지금 이때지. |
이영녀 | 저를 마지막엔 죽여 주세요. |
김우진 | 그럴 순 없어···! 그건 내 의도하고 다른 결말이야. |
이영녀 | 이 고민 때문에 써지지 않는 거잖아요. |
김우진 | 이영녀가 왜 죽어야 하는데?! |
이영녀 | 그런 여성을 세상이 허락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
김우진 | 내가 추구하는 건 세상에 대한 굴복이 아니야. 봐라, 저런 가난 탓에 몸을 팔던 밑바닥 여성도 세상과 싸워 가며 자기 의지로 살아가려 하지 않냐. 무대 위 이영녀를 보며 사람들은 새로운 생각들을 하게 될 거야. 앞으로 그렇게, 조선 땅에도 남성의 그늘을 벗어난 신여성들이 점점 늘어날 테고··· |
이영녀 | 버림받으셨잖아요. |
김우진 | 누가··· 나··· 김우진이가? |
이영녀 | 바로 그 신여성한테 말이에요. |
사무실 밖의 다른 공간. | |
벤치에 앉은 윤심덕은 김우진을 바라보고. | |
김우진 |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어. |
노래하는 윤심덕. | |
광막한 광야에/달리는 인생아. | |
너의 가는 곳/그 어데냐. | |
쓸쓸한 세상/험악한 고해에. | |
너의 무엇을/찾으려 가느냐. 윤심덕 작사, 〈사의 찬미〉 중. | |
김우진 | 서로의 처지 때문이었다고··· 처자식까지 둔 나와 떼어 놓으려는, 부모 압박에 못 이겼을 윤심덕을··· 내가 어떻게 원망하겠어. 모든 게 내 욕심이었던 건데··· |
이영녀 | 돈 욕심에 후원자를 구해, 애첩 짓을 하고 있다는 추문은요? |
김우진 | 그만해! |
귀를 막으면, | |
윤심덕은 노래를 멈춘다. | |
김우진 |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깐, 믿을 수가 없어. |
이영녀 | 이미 소문은 세상에 널리 퍼져 버렸는걸요. |
김우진 | 이 작품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야. |
이영녀 | 진정··· 아무 원망도 미움도 없으신 건가요? |
김우진 | 돈에 몸이나 팔고 첩이나 될 만큼 윤심덕은 더럽지 않아, 윤심덕은 자존심이 강한 신여성이야. |
이영녀 | 그럼 이영녀는, 어떻죠? |
윤심덕은 벤치에서 담배를 꺼내, | |
피우기 시작한다. | |
이영녀 | 원하는 걸 얻어다 주는 돈 앞에선··· 모든 것이 쉽게 무너지죠. |
김우진 | 그녀를 마녀 취급하던 세상이 만든 모함일 테지. |
이영녀 | 그렇다면 왜 윤심덕을 피하고 계세요? |
김우진 | 일부러 그러지 않았어, 다 이 망할 회사 일 때문에···! |
이영녀 | 거짓을 말해 봤자 허망한 메아리일 뿐··· 전 선생님 마음의 한 자락인데, 자신을 속일 수야 없겠죠. 죽여 달란 제 부탁의 실체는··· 그녀를 향한 선생님의 증오심이잖아요. |
김우진 | 작품 속 이영녀에··· 윤심덕이 투영됐단 건가··· |
윤심덕 | 그것이 작가란 사람들이에요. 써가는 동안 작품엔 자신의 삶도 자연스레 스미는 것이니까요. |
김우진 | 난 그저, 버나드 쇼 작품 같은 걸 쓰고 싶었을 뿐이야. |
담배를 끄는 윤심덕. | |
윤심덕 | 자아를 찾아가는 이영녀를 써가며, 윤심덕을 떠올리진 않았나요? 관습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이 자기 삶을 사는 신여성··· 이영녀의 정점엔 윤심덕이 있지 않았냐고요. |
김우진 | 너무나도 쓰는 것이 즐거웠어, 흥이 날 정도로··· |
윤심덕 | 그러다 추문을 듣고 나서부턴, 더 이상 잘 써지지가 않았겠군요. 하늘을 날다 일순간 추락한 기분처럼? |
김우진 | 그래··· 분노가 일었어, 배신이었으니깐! |
피시식 웃는 윤심덕, | |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던 이영녀. | |
이영녀 | 자식 교육을 위해 몸을 판 이영녀··· 동생 유학비용 마련을 위해 후원자를 찾다, 추문이 퍼진 윤심덕··· 써 나가기가 무척이나 괴로우셨겠군요. |
김우진 | 마지막 부분에 이르고 보니, 어느새 이 머리와 가슴 속에 처음 계획하고 다른 것들이 자라나 있었다고! |
이영녀 | 이영녀를 죽이자는 결말로 말이죠. |
신경질적으로 원고를 넘겨 보다, | |
밀쳐 내 버리는 김우진. | |
김우진 | ··· |
사이. | |
남은 약봉지를 움켜쥐면, | |
이영녀가 그 손을 잡아 막는다. | |
김우진 | 잠들고 나면··· 뭔가 방법이 떠오를 거야. |
이영녀 | 솟아났던 감정을 애써 피하지 말고··· 이영녀를 죽이세요. |
김우진 | 난··· 그럴 수가 없어··· |
이영녀 | 그럼 이영녀는 계속해서 선생님을 괴롭힐 거예요. |
김우진 | 그건, 당초에 내가 원했던 작품이 아니야. |
이영녀 | 선생님! |
김우진 | 부모 잘 만난 덕에 유학까지 갔다 와선, 허울 좋은 사장 자리까지 차지해 앉은 주제에··· 예술이니 계몽이니 복에 겨운 투정이라 비웃고들 할 테지만, 예술로서 계몽해 변화시키는 걸 사명이라 여겼고 내 자부심이었건만··· 여자 문제 하나로 무너지는 꼴이 정말로 한심해! 예술? 예술가?! 나 같은 건 실격이야. |
이영녀 | 그렇지 않아요. |
김우진 | 이젠 그만··· 나한테서 사라져 줘. |
어느 먼 곳을 바라보며, | |
홀로 노래를 부르는 윤심덕. | |
김우진 | ··· |
광막한 광야에/달리는 인생아. | |
너의 가는 곳/그 어데냐. | |
쓸쓸한 세상/험악한 고해에. | |
너의 무엇을/찾으려 가느냐. | |
이영녀 | 왜 자꾸만 선생님 귓가에 들려올까요. 여기 담긴 예전의 어떤 기억이··· 지금의 선생님에게 자꾸만 노크하고 있는 걸까요. |
벤치에서 일어난 윤심덕, | |
김우진을 향해 다정히 손짓한다. | |
윤심덕 | 얼른 이쪽으로 와 보세요. |
김우진 | ··· |
사이. | |
윤심덕 | 뭘 그렇게 멍하니 서 계세요? |
김우진 | 당신의 노래는··· 언제나 심금을 울리오. |
윤심덕 | 이 노래, 일본 가서 레코드 취입할 때 넣을 생각이에요. 어때요? 우리말로 제가 가사를 붙여 봤는데, 작가님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
김우진 | 멜로디와 너무나도 잘 어울려. |
윤심덕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김우진 | 당신은··· 정말로 대단한 여성이오. |
사무실 공간을 벗어나서, | |
감격한 표정으로 다가가는 김우진. | |
김우진 | 제목은 정했소? |
윤심덕 | 사(死)의 찬미(讚美)예요. |
김우진 | 죽음을 찬양한단 거요? |
윤심덕 | 맞아요. 죽고 싶을 만큼 삶에 지쳐 있는 사람들이, 듣고선 눈물을 흘려 준다면··· 가수로선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요. |
김우진 | 죽음을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군. |
윤심덕 | 자연의 이치 아닌가요. |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손을 내밀고, | |
손바닥에 떨어지는 눈송이. | |
윤심덕 | 겨울이란 소멸을 맞아야만 봄이 열리는 것이니까요. |
김우진 | (함께 손을 내밀어) 그리 생각해 보니 차갑게만 느껴지던 눈도··· 따스할 수가 있는 것이겠구먼. |
윤심덕 | 다르게 보고 느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인 거잖아요. |
김우진 | 참으로 근사한 감각이오··· 사의 찬미라··· |
윤심덕 | 당신이 제게 해 줬던 말 때문이에요. 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가며··· 그렇게 삶을 견디며 살아간다 하셨잖아요. 그 말에서 생각해 낸 가사라고요. |
김우진 | 심덕의 죽고 싶을 만큼의 상처는 과연 뭐지? |
미소 짓는 윤심덕. | |
윤심덕 | 고향으로 가신 후에도··· 언제나 절 생각해 주실 건가요? |
김우진 | 물론이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당신인데. |
윤심덕 | 제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말이죠? |
김우진 | 죽기 살기로 써서, 반드시 내 작품으로 세상을 바꾸고 이름을 떨칠 테니! 두고 보시오. |
윤심덕 | 계몽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좀 내려놓으세요. 사람들은 오히려, 말하셨던 것처럼 작품에 스민 작가의 상처에 더 공감하게 되는 것이니깐··· 평소 좋아하셨던 입센이나 버나드 쇼의 작품들도, 그 첫출발은 모두··· 자기 자신이지 않았을까요. |
김우진 | ··· |
사이. | |
윤심덕 | 우린 이만, 여기서 헤어져요. |
김우진 | 당신과 떨어져 있어야 한단 것이··· 내겐 너무나도 큰 슬픔이오. |
윤심덕 | 서로가 그 겨울 동안, 다가올 봄을 기대하며 기다려요. 그럼 겨울도 따스하게 견뎌 낼 수 있지 않겠어요? 자요. |
김우진을 향해 손을 내밀고, | |
두 사람은 악수를 한다. | |
윤심덕 | 몸 조심히 가세요. |
손을 놓고는 돌아서서, | |
가 버리는 윤심덕. | |
김우진 | ··· |
홀로 눈을 맞으며 바라보는 김우진, | |
점점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 |
이영녀 | 선생님··· |
김우진 | 잠시 잊고 있었어··· |
다시 들려오는 윤심덕의 노랫소리. | |
광막한 광야에/달리는 인생아. | |
너의 가는 곳/그 어데냐. | |
김우진 | 가을보다는··· 마지막 3막은 눈이 포근히 내리는 겨울이 좋겠어··· 하얀 눈은 다가올 새 시작을 축복하는 선물이라며 좋아하던, 윤심덕의 환한 얼굴이 떠올라··· |
쓸쓸한 세상/험악한 고해에. | |
너의 무엇을/찾으려 가느냐. | |
김우진은 의욕이 넘친 표정으로, | |
사무실 공간으로 걸어간다. | |
김우진 | 이영녀는 비록 소멸하지만··· 그녀의 남아 있는 딸 명순은 멋진 신여성으로서,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야. |
이영녀 | 이영녀는 비록 죽어 소멸하지만, 그 꿈은 새롭게 이어져 가고··· 원망의 윤심덕을 죽임으로써 현실에서의 윤심덕을 용서할 수 있게 되어··· 선생님은 그렇게,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되는 것이에요. |
원고를 책상에 정리해 놓아 주면, | |
김우진은 다시 앉는다. | |
김우진 | 남들한테도··· 이 이야기가 와닿을까. |
이영녀 | 믿으세요, 자신을 말이에요. |
김우진, 펜을 들고 원고를 다시 써 간다. | |
환하게 미소 짓고 이영녀, | |
조심스럽게 뒤돌아 나가고. | |
가 버린 줄도 모른 채 써 가던 중. | |
괘종시계가 땡! 한 번 울리면. | |
김우진 | ! |
순간 놀라 펜을 멈추고, | |
주위를 둘러본다. | |
김우진 | 사라졌어··· 어디로 가 버린 거지? |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 |
황급히 가서 문을 연다. | |
오일삼 | 저라고요, 놀라지 마세요. |
김우진 | 자넨 그동안 어디 가 있다 왔나. |
오일삼 | 예? 몇 계단 내려가다··· 다시 올라왔는데요? |
김우진 | ··· |
사이. | |
오일삼 | 잠깐 사이, 뭔 일 있었습니까. |
김우진 | 아무것도 아닐세··· 갑자기 무슨 일인가. |
오일삼 | 저, 그게··· 말입니다. |
조심스레 받았던 표를 다시 건넨다. | |
오일삼 | 뭐가 이상한 게··· 요 뒷면에 잔뜩 쓰여 있어서··· |
김우진 | (표 뒷면을 본다) ··· |
오일삼 | 이게, 사장님 글씨인가, 딴 사람이 써 놓은 건가··· (눈치를 살피고) |
김우진 | ‘두 가지의 결말이 머릿속에서 싸운다··· 이영녀를 과연 죽여야 하는 것인가···’ 내가 쓴 건데 이게 어쨌단 건가. |
오일삼 | 누굴···! 진짜로, 죽이시려고요?! 참으십시오, 안 됩니다. |
김우진 | 쓰고 있던 작품 얘긴데 웬 호들갑이야. |
오일삼 | 자, 작품? 상대 이름까지 써 놓으신 건··· 뭔가요. |
김우진 | 아까 말했잖은가. 주인공이 이영녀라고, 그 유달산의 판자촌. 글이 안 풀려 고민하다··· 나도 모르게 여기다 끼적인 모양이야. |
다시 건네주면, | |
오일삼은 큰 소리로 웃는다. | |
오일삼 | 아이, 참. 놀랬잖습니까. |
김우진 | 사람 죽일 만큼 간이 크진 않으니 안심하게나. |
오일삼 | 당연히 우리 사장님께서 그럴 리야 없죠. |
김우진 | 내가 잡혀가면, 자넨 졸지에 실업자가 되는 건가. |
오일삼 | 그럼 얼른, 다른 회사를 알아봐야죠. |
김우진 | 사람이 어째 그리 의리가 없나. |
오일삼 | 어쩌겠습니까, 당장 처자식이 굶게 생겼는데요. |
김우진 | 옳은 말이네. 마땅히 그래야지. |
오일삼 | 사는 낙이야 자식 커 가는 거 보는 재미죠. |
김우진 | 아이들은 분명··· 지금보단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되겠지. 나라의 독립도 볼 것이고, 분명 더 윤택한 삶을 살 거야. |
오일삼 | 인젠 안심하고 갑니다만··· (약봉지를 보고) 적당히 조절하십시오. 그렇게 자주 드시다 영영 못 깨어나면 어쩌시려고요. |
김우진 | 이 수면제는··· |
전부 구겨 휴지통에 버린다. | |
김우진 | 막혔던 작품이 풀려 더는 필요가 없어. |
오일삼 | 잘 됐군요. 진짜 잘 생각하셨습니다. |
김우진 | 이제 그만 들어가 보게. |
오일삼 | 올겨울 난방은 미리 대비해 놔야지··· 작년엔 추위 때문에 엄청 고생했잖습니까. 눈도 얼마나 또 쌓일지··· 어휴, 벌써부터 걱정이네. |
김우진 | 썰매 타는 거 좋아하나, 나랑 같이 타 볼 텐가. |
오일삼 | 하하하. 다 큰 어른이 웬 썰매는··· 문화 활동, 열심히 하십시오. |
김우진 | 조심히 들어가게. |
오일삼, 인사를 하고 문을 열고 나간다. | |
김우진 | 올겨울 자주 눈이 내려 준다면, 많은 위로가 되겠는데··· |
사이. | |
심호흡을 하고는, | |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건다. | |
김우진 | 나··· 김우진일세. 아까 윤심덕이 살고 있다는데 말이야. 어딘지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응, 마음이 바뀌었어. 더는 피하지 않고 만나 볼 생각이야. 이보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나한테는 얼마든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게 있으니 말이야. |
아련하게 윤심덕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 |
-막- |
참고 문헌: 『김우진 전집 1』(서연호 홍창수 저, 연극과 인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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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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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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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02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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