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성’에서 ‘아는 여성’으로 : 강화길론
- 작성일 202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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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성’에서 ‘아는 여성’으로 : 강화길론
하혁진
소설로 충분하다
2020년 여름, 강화길의 두 번째 소설집이 우리 곁에 도착했다. 화이트 호스(White Horse), 백마(白馬)를 타고.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설 속 그녀들은 더 이상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때마침 동명의 노래인 Taylor Swift의 <White Horse>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I`m not princess, this ain`t fairy tale. (···…) Now it`s too late for you and your white horse to come around.” 강화길은 표제작인 「화이트 호스」에서 스위프트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 이렇듯 변화를 경험한 그녀들은 왕자 대신 백마 위에 올라타 고삐를 쥐고 속도와 방향을 직접 ‘선택’한다. 요컨대 그녀들은 선택이라는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행위 주체라는 지위를 회복한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도, 무엇인가를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그녀들은 동화 바깥의 현실을 ‘살아간다’.
두 번째 소설집에서 수록된 소설만큼이나 눈여겨볼 만한 것은 작가의 말이다. 강화길은 마지막 두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다시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게는 소설로 충분하다.”(작가의 말 297쪽). 이 의미심장한 선언 뒤에 감춰진 진의는 무엇일까. 두 페이지 앞으로 가 보자. “당시 나는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것에, 그러니까 나를 향한 일부 비평에 대해 상당한 피로와 염증을 느꼈다. 신인 작가 입장에서 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글도 있었고, 그간 내가 여성으로서 받아 온 어떤 평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글도 있었다,”(작가의 말 293쪽). 이쯤 되면 ‘소설로 충분하다.’는 비장한 선언 뒤에는 모른 척 지나치기 어려운, 혹은 모른 채 지나쳐서는 안 되는, 숨겨진 내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어떤 평판들이 그녀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나’와 ‘여성’으로서의 ‘나’가 겹치는 경험을 하게 한 것일까. 다른 인터뷰도 함께 살펴보자.
실제로 이 소설을 쓸 때 이런저런 비평에 시달릴 때라서 여러 가지 감정이 혼재된 상태였어요. 평가를 받는 일에 계속 시달리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비평적 언어와 내가 가진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가 쓴 소설을 보호하고 싶기도 했고요. 개인적인 경험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이지만 쓰는 과정에 깨달은 건, 저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여성 작가들이 여성 문제를 다루면 유독 혹독한 비평에 시달려요. 결국 자기 검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요. 결국 글쓰기란 무엇인가? 계속 평가를 받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소설을 완성하고 나니, 이런 물음이 생겼어요. ‘비단 소설가뿐만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1)
짐작건대 작가의 말은 작품을 두고 제기됐던 비판에 대한 일종의 응답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비평’, ‘평가’, ‘자기 검열’, ‘글쓰기’, ‘화자와 작가의 동일화’ 등은 강화길의 두 번째 소설집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다. 이쯤에서 우리는 “근대 소설 자체가 여성에 대한 세간의 소문을 재현함으로써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기율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발언권을 확보했기에, 여성의 글쓰기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변호할 목적으로 시도될 수밖에 없었다.”2)는 심진경의 논의와, “그러나 이런 정황은 곧 ‘여성이 쓴 이야기는 여성 자신의 삶으로 갈음될 수 있다.’라는 재귀적 명제로 통용됐”3)었다는 장영은의 지적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의 차별성에 대해 고민했다는 강화길의 고백에는 세간의 평가와는 무관한, 다시 말해 작가 스스로 절감한 변화에의 필요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스스로 쓴 작품론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을 함께 살펴보자. 부제는 ‘나의 이력서’다.
여기는 지정된 병원이잖아. 사고당한 여자들이 오는 곳이라고. 강간당하고 두들겨 맞은 여자들이 진단서를 받으러 오는 곳이라고. 그런 여자들만 가는 병실이 다락에 있는 거 몰라? 여자는 덧붙여 중얼거렸다. 병원은 그렇게 살아남았다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다른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납득할 수 없다는 말투였다. 거짓말,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러자 조금 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이어졌다. 네가 몰랐던 거겠지. 그 여자는 바로 그런 사람일 거야. 분명해. 남자가 쫓아와서 끝장을 낸 거라고.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남자 때문인 줄은 어떻게 알아?”4)
첫 번째 소설집 『괜찮은 사람』에는 확실히 “그런 여자”라고 부를 만한 여성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만약 우리가 강화길의 소설을 ‘여성 서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다락’에 갇혀 들리지 않던 ‘그런 여자’들의 울음, 비명, 신음 소리를 이야기로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 비평 중에는 이런 비판도 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여자들이 이 세상에 그렇게 많”냐는, “게다가 한 층 전체에 그런 여자들만 모여 있다는 건 비현실적이”지 않냐는 비판 말이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는 ‘재현’을 후자의 경우는 ‘작위’를 문제 삼는 것일 테다. 더욱이 대부분의 작품들이 ‘믿을 수 없는’ 일인칭 여성 화자에 의해 서술되고 있다는 정황까지 더해지면, 소설 속 그녀들이 겪고 있는 사건이 “남자 때문인 줄은 어떻게 알아?”5)라는 비판도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그런데 과연 이와 같은 비판들은 유효한가. 정확한 대답을 위해서는 소설들을 직접 읽어봐야 할 텐데, 우선 한 소설가의 유서를 경유해 보자.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
「라쇼몽」 등의 작품을 남긴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세 번의 시도 끝에 자살에(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성공했다. 자살에 사용했을 약물과 함께 발견된 유서에 따르면, 자살의 원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이었다. 요컨대 불안은 한 인간을 세 번이나 죽게 할 만큼(심리적으로는 세 번 자살한 것과 다르지 않다) 무시무시한 감정인 것이다. 특히 그것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라면 더욱 그렇다. ‘막연함’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뚜렷하지 못하고 어렴풋한 것’인데, 그 말 그대로 막연하다는 것은 ‘어렴풋하다’는 것이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불안에는 막연하게나마 이유가 ‘있다’.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불안의 본질이자 공포의 근원이다. 이를 가장 잘 활용하는 장르가 바로 스릴러(Thriller)다. 스릴러는 앎과 모름이라는 정보의 격차를 토대로 서스펜스를 형성하고 긴장감을 부여한다. 강화길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강화길의 소설이 스릴러 장르의 문법을 따른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평가가 아닌데, 특히 여성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그릴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강화길의 소설에서는 ‘안진’이라는 가상의 도시가 자주 배경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도시는 여성들에게 ‘안전(安)’한 ‘진지(陣)’가 되어 주지는 못한다. 「호수 – 다른 사람」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자인 ‘진영’은 친구인 ‘민영’이 당한 “끔찍한 일”을 추적하기 위해 민영의 애인인 ‘이한’과 함께 호수로 향한다. 늦은 저녁 인적도 없이 어두컴컴한 호수에서 진영은 이한으로부터 이유 모를 불편함을 느끼는데, 그 불편은 그가 얼마나 “평판이 좋은 사람”이고 “매력적인 남자”인지와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불과 얼마 전에도 범죄의 현장이었던 호수에서 그는 언제든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덩치 큰 남자”일 뿐이다. 문제는 진영이 느끼는 불편이 비합리적인 의심이냐는 것이다. 사실 진영은 이한에 대해 잘 모른다. 오히려 진영(그리고 독자)에게 주어진 정보에 따르면 좋은 인상을 가진 그는 그에 맞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이한은 호수를 걷는 동안 진영이 자신을 경계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자 스스로 뒤에서 걷겠다고 말한다. 이제 진영의 의심은 자기 자신을 향하기 시작한다. 더욱이 독자는 ‘믿을 수 없는 화자’인 진영을 통해서만 사건을 볼 수 있으므로 ‘비합리적인 의심’이라는 것에 대한 ‘의심’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가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니까 진영 씨. 부탁할게요. 생각나는 게 있으면 제발 말해 줘요, 민영이가 나를 무서워했나요?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나는 여전히 그를 믿을 수 없었지만, 동시에 나 역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여전히 들었다. (30쪽)
그런데 만약 이런 정보가 더해진다면. 진영은 전 애인에게 목을 졸린 적이 있다. 집 앞까지 쫓아온 의문의 남자에게 위협을 느낀 적도 있다. 민영 역시 온몸에 멍 자국을 달고 살았고 사고 전날에도 “요즘 뭔가 무서워.”라는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호수에 나와 빨래를 하던 ‘미자네’도 동네 아이들에게 모욕을 당했다. 그러니까 진영도 민영도 미자네도 모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와 폭력의 대상이 됐다. 생각해 보면 진영에게 “민영이가 정말로 나 무섭다고 했어요?”라고 반복해서 묻는 이한의 언행 역시 수상하다. 아무도 그를 용의자라고 지목하지 않았는데 마치 제 발 저리듯 무죄를 입증하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는 민영이 끔찍한 일을 겪은 당시의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다. 과연 감춰진 진실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작가는 사건의 범인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이한이 범인인지 알 수 없다.’는 명제가 ‘그는 범인이 아니다.’라는 명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의 끝에 남는 것은 ‘O’도 ‘X’도 아닌 ‘?’인데, 일인칭 화자인 진영과 그녀를 통해 서사를 따라가는 독자는 바로 이 물음표에 의해 훨씬 더 깊은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그런 점에서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놓치고 있다는 직감, 불안은 그로부터 시작된다.”(해설 264쪽)는 황현경의 해석은 적절해 보인다. 「호수 – 다른 사람」을 포함해 『괜찮은 사람』에 수록된 많은 소설에서 ‘믿을 수 없는 화자’가 가지고 있는 부족한 정보에 의해 “해소되지 못한 불안”은 “차곡차곡 쌓이다 넘”친다. 따라서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장치가 아니라 결론이다.”(해설 268쪽)라는 해석에도 동의할 수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일인칭 화자와 사건에 대한 정보의 공백은 과장된 재현을 위해 작위적으로 설정한 장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여성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의 본질이자, 지금 여기에 명백하게 존재하는 현실이다. 작가의 선택이 당연하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의 여성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의 본질이 ‘모른다’에 있기 때문이다. 반복건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하는지,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소설의 끝에서 진영의 손에 쥐어진 딱딱하고 차가운 촉감의 물건이 무엇인지, “내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해요?”라고 묻는 이한의 질문에 대답 대신 행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 역시 우리는 모른다.
여성 스릴러 vs 여성 서사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길의 첫 번째 소설집 『괜찮은 사람』과 두 번째 소설집 『화이트 호스』 사이에는 ‘각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변화’가 감지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각성과 변화는 앞서 살펴봤던 비판, 그러니까 강화길의 소설은 현실을 과장해 재현하고, 인물과 구성은 작위적이며, 심지어 남성 일반을 악으로 묘사한다는 비판과는 무관한 지점에서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차라리 여성 스릴러와 여성 서사는 양립 가능한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된 변화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예컨대 오혜진의 논의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오혜진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스릴러 서사가 이채로운 미학과 쾌감”을 선보이며 “페미니즘 서사 기획으로 여성 스릴러 양식이 지닌 정치적 가능성”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 스릴러 양식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교란과 전복을 감행하려는 정치적 의지는 ‘스릴러’라는 양식의 장르적 쾌감을 달성하기 위한 법칙들과 자주 충돌하거나 경합”한다고 지적한다. “소설에서 자행되는 살인 자체가 폭력적인 지배 질서에 대한 반란의 행위로서 기획되지 않고 그저 반전과 서스펜스라는 장르적 쾌감에 복무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서사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정당성과 무관하게, 그 살인을 즐기고 있는 것”6)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혜진은 “‘괴담’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괴담’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괴담’은 그 이야기를 괴기스러운 것으로, 즉 듣는 이 자신의 안위와 직결된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 ‘취약한’ 청취자에게만 ‘괴담’이다.”라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주로 여성이 피해자로 상정되는 스릴러 장르의 문법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내포하는 취약성을 재확인함으로써 불안과 공포의 정동을 자극한다. 실제로 강화길의 소설 역시 ‘여성 독자가 느끼는 정동’은 주요한 해석 대상이자 분석 층위로서 호출된다. ‘여성 스릴러의 딜레마’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스릴러 장르는 기본적으로 “폭력에 대한 과잉 묘사와 함께 남성적 시선에 의한 여성의 타자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여성 독자가 느끼는 감상에는 ‘타자화 당함’이라는 정동이 포함될 여지가 다분하다. 그에 따르면 “젠더화된 공포와 고통을 장르적으로 자원화하는 스펙터클 전략을 택하는 지점에서 스릴러 장르는 여성, 특히 피해자 - 여성들의 비가시화와 타자화를 재현하며 애도의 배제라는 민감한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7)한다는 지적은 「호수 – 다른 사람」에도 유효하게 적용된다. 진영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라는 스릴러적 요소, 그리고 그에 따른 성취와는 무관하게, 민영의 죽음은 소설 내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여성 스릴러는 여성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지금 여기에 명백하게 존재하는 현실의 폭력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로서의 가능성을 갖지만, 피해자 여성을 스릴러 장르의 서스펜스를 창출하는 요소로, 장르적 도상성을 획득하는 도구로 타자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딜레마에 빠진다. 따라서 “스릴러의 관람 체험은 남성(적 정체성의) 관객이 여성 피해자를 구원하는 남성 주인공과 강력한 동일시를 경험하는 동안 여성(적 및 피해자적 정체성의) 관객을 고통과의 직접적 동일시에서 오는 치명적 고통에 노출시킨다.”8)는 지적은 앞서 살펴본 비판과는 다르게 훨씬 더 본질적인 비판이다(이에 대해서는 “살인을 ‘보고 즐기는’ 대상으로 만드는 대중문화 텍스트가 생산하는 젠더화된 불안과 공포는 피해자 - 여성이 스스로의 주체성을 복원 재구축하고 활력의 삶을 영위하는 행위성을 봉쇄한다.”9)고 지적한 배은경의 연구와 “스릴러의 관람 체험은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피해자의 정신 상태를 학습시킴으로써 여성을 남성보다 성적으로 열등하고 취약한 존재로 사회화하는 피해적 사회화의 과정으로 작용하게 된다.”10)고 지적한 박연미의 연구 역시 참고할 만하다).
그렇다면 강화길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우리는 두 번째 소설집 『화이트 호스』를 통해 작가가 ‘앎’과 ‘모름’의 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해답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릴러 장르가 정보의 격차를 통해 서스펜스를 형성하고 긴장감을 부여한다면, 모름의 지위에 있던 여자들을 앎의 지위에 있는 여자들로 전환함으로써 반전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모르는 여자들’은 ‘아는 여자들’이 되어 기존의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 사회의 이면을 속속들이 파헤칠 것이다. 이에 대해 강지희는 여성 스릴러 서사에 대한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에는 “여성의 강한 권력(Power)과 행위성(Agency)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깔려 있다.”고 말하며, 최근 여성 스릴러의 흐름이 “가부장제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내파하는 방식을 개시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요컨대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가학성을 발휘해서라도 가부장제를 부수어 버리는 여성을 보고 싶다는 바람이 다른 장르에 앞서 여성 스릴러를 추동시켰다.”11)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첨단에 강화길의 소설이 놓여 있다.
아는 여자, 모르는 남자
『화이트 호스에』에 수록된 작품들은 수록된 순서가 아니라 쓰인 순서대로 읽는 것이 더 유효할 수 있다.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돌보기 위해 시골 마을로 이사한 ‘나’가 마을을 둘러싼 섬뜩한 미신과 미스테리한 사건으로부터 딸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손」, 택시와 연관된 연쇄 실종 사건이 벌어지는 도시에서 여성 운전사가 운전하는 택시에 탄 ‘나’의 의심과 혼란을 그린 「서우」,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보다 먼저 흡혈귀를 등장시킨 셰리든 르 파누의 여성 스릴러 소설 『카밀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카밀라」는 일인칭 여성 화자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라는 점에서 첫 번째 소설집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화길의 소설은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다룬다는 점에서 ‘메타 픽션’이라고 부를 수 있을 「오물자의 출현」과 「화이트 호스」를 거쳐 확실한 변곡점을 맞이한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이전까지의 소설에서 일인칭 여성 화자가 ‘모르는 인물’이었다면 이후의 소설에서 일인칭 여성 화자는 ‘아는 인물’이다. 지금까지 여성에게 가해지는 소문과 폭력의 파문을 예민하게 포착해 왔던 작가는, 「음복」과 「가원」에 이르러서는 그 진원지의 이면을 파헤치는 작업으로 한 발 더 나아간다. 소설 속 그녀들은 은폐되고 왜곡됐던 구조적 억압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알아본다.
「오물자의 출현」에서 ‘오물자’는 전라도 방언으로 ‘인형’을 의미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물자를 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을 뜻하는 ‘오물(汚物)’에 ‘사람(者)’을 합친 합성어로 이해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오해한 채 소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괴리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인데, 이는 소설의 주요 인물인 ‘김미진’이 ‘여성 연예인’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미디어 저편에서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따라 이야기를 만들고 바꾸어 송출하는 ‘그들’에 의해, 절상되고 복원되고 칭송되고 긍정되는 한편 절하되고 훼손되고 오염되고 부정되기를 반복했다.”(해설 271쪽)는 신샛별의 해석처럼, 미디어에 등장하는 여성 연예인은 대중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임과 동시에, 절하되고 훼손되고 오염되고 부정되는 ‘오물자’인 것이다. 김미진 역시 24살에 가상 연예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해 17명의 남자와 스캔들이 있었고, 그중 한 남자와 결혼하면서 온갖 루머와 구설수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소설은 그런 김미진의 인생사를 겹겹의 액자 구조 안에 끼워 넣음으로써, 너무 많은 이야기에 휩싸여 살았지만 정작 그녀의 “진짜 모습”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묘파한다.
먼저 첫 번째 액자에는 ‘이마리’가 쓴 김미진의 전기가 있다. 다음 두 번째 액자에는 이마리의 전기가 잘못됐다며 ‘김지우’가 쓴 박사 논문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액자에는 서술자가 김미진이 스스로 쓴 유작 소설이라고 밝히는 「천국」의 본문이 그대로 실려 있다. 물론 각각의 액자 안에 들어 있는 이야기를 살펴보며 김미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 어떻게 뒤섞이고 충돌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독법일 것이다. 특히 이 과정을 통해 ‘피해자의 진술’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시선들을 성찰해 보는 것은 유의미한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조금 더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겹겹의 액자 구조 그 자체이다. 요컨대 여성은 왜 이야기, 평가, 소문, 구설수, 루머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까. 그녀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감옥의 철창과 다르지 않고, 그녀들의 ‘진짜 진실’은 그 안에 갇힌 채 파편적이고 피상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앞서 살펴본 「손」의 미신, 「서우」의 괴담 그리고 「호수 – 다른 사람」의 소문만 살펴봐도 그러하다. 여성 인물들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하는 의심을 더욱 강화하는 것은 너무 많은 이야기, 너무 많은 말들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마지막 액자에 끼워진 이야기, 김미진이 스스로 쓴 유작 소설인 「천국」 또한 결국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 모든 액자를 껴안고 있는 강화길의 소설인 「오물자의 출현」 역시 결국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야기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야기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이, 이야기 바깥의 진실된 주체로서 존재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가십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가십에 불과한 법”인 걸까. 진실이란 “알면 됐고, 모르면 또 됐고, 뭐 그런 거”에 불과한 걸까.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2020년 여름, 강화길의 두 번째 소설집이 우리 곁에 도착했다. 화이트 호스(White Horse), 백마(白馬)를 타고.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설 속 그녀들은 더 이상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변화를 경험한 그녀들은 왕자 대신 백마 위에 올라타 고삐를 쥐고 속도와 방향을 직접 ‘선택’한다. 요컨대 그녀들은 선택이라는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행위 주체라는 지위를 회복한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도, 무엇인가를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그녀들은 동화 바깥의 현실을 ‘살아간다’. 방점을 찍었듯이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선택이다. 결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조라면 그것에 순응하든 극복하든 무언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수행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수행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여성의 욕망이 드러나며 구조에 균열을 만든다.
「음복」의 화자인 ‘세나’는 남편인 ‘정우’와 함께 시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시댁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목의 ‘복(福)’과는 거리가 먼 갈등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와중에도 정우는 “헐렁하고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속 편해 보”이는 태도로 일관한다. 후궁들의 암투를 그리는 드라마를 즐겨 보는 정우는 정작 제삿날 자신의 집안에서 펼쳐지는 현실의 내막은 전혀 알지 못한다. 정우는 할머니가 숟가락을 던지는 이유가 자신에게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겹쳐 봤기 때문이라는 것도 모르고,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이유가 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시며 제사를 챙기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모른다. 심지어 고모가 자신을 미워해 마음속에 “날카로운 심지를 품고” 있다는, 아주 오래된 사실조차 전혀 알지 못한다. 한편 고모의 존재는 조금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정우는 세나에게 고모를 “진중하고 속이 깊으”신 분이라고 소개하는데, 설명과 다르게 세나가 느끼는 고모는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싫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나는 이내 고모가 “집안마다 한 명씩 있는 그런 사람”, 즉 어쩔 수 없이 “악역”을 자처하고 있는 그런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동시에 세나는 “여전히” 모든 사실을 모르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고모가 “앞으로도” 그를 싫어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바깥’ 사람인 세나가 고작 하루 만에 알아차린 혹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던 가족사, 그러니까 삼대에 걸친 비밀과 진실을 ‘안’ 사람인 정우는 왜 “영원한 미스터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걸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을 ‘성별은 피보다 진하다.’는 명제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모가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몰라도 되는 정우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세나가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세나 역시 가족제도 안에서 여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녀 계획을 물어보는 고모의 잔소리를 시어머니가 막아 주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성의 입장에 서 있는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곤란함을 눈치채고 그녀의 편을 들며 보호하지만, 정작 남편은 아내의 당혹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그렇다면 고모는 왜 여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혹스러운 질문을 하느냐는 의문 역시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던 고모의 역할, 그러니까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악역을 자처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음을 떠올려 보자. 대한민국의 가부장제는 ‘짜증 나는 시댁 식구’를 디폴트 값으로 요구한다). 우리는 이를 특정 성별이 권력이 되는 구조하에서 특권을 누리는 남성의 ‘눈치’가, 즉 공감과 이해의 능력이 퇴화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여성주의자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고 정의하며, “페미니스트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12)고 주장한다. 당연하게도 여성주의적 감각과 사고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책의 해제를 쓴 여성 학자 권김현영 역시 “주어진 질서의 오류와 모순을 눈치”채는 능력으로서 “예민함”13)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요컨대 세나(가부장제하에서 여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와 정우(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의 차이는 성차별주의에 기반한 고정된 성역할로 인해 발생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하에서 가장의 위치가 보장해 주는 확고한 정체성”을 체화한 정우는 주변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거나 덜한 반면, “성차별주의 때문에 발생하는 더 많은 혜택”과 “가부장제로 인한 특권”을 누려 본 경험이 없거나 덜한 세나는 기민하게 집안의 분위기를 살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우의 가족사임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알고 정우는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정우와 세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가부장제하에서 불평등한 성 역할은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구조 안에 있는 모두가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면 정우가 가진 특권, ‘무지할 수 있는/무지해도 되는 권력’을 ‘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벨 훅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넓은 의미로서의 가정폭력,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적 사고, 남성중심주의와 이어져” 있는 “가부장제 폭력”14)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까.
위 질문에 대해 짧은 글 안에서 명확하게 답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더군다나 가해자/피해자, 선/악의 이분법적 접근에는 분명한 오류와 한계가 있다. 다만 살펴봐야 할 것은 정우를 비롯한 남성들의 무지가 ‘선택된 무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구조적 특권을 누리는 남성이라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갖게 되는 권력을 인지하고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하며 공부하지는 못했을지언정,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고 말하며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권력에 안주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실제로 젠더 불평등 문제에 있어서 남녀 간에 가장 큰 차이는 “여성보다 남성이 성차별주의 때문에 더 많은 혜택을 보고 그렇기에 가부장제로 인한 특권을 쉽사리 포기하려 들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차이다. 물론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 남성중심주의가 진짜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별 남성들이 가부장제가 부여하는 특권을 내려놓는다 해도” 여전히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 남성중심주의를 토대로 한 체제”는 굳건히 유지될 것이며 “여성들은 계속 착취당하고 억압당할 것”15)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자신이 누리는 특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로 인한 심리적 의존을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한 작업이다.
선택하는 여자들, 그녀들의 이후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떤 문제를 명료하게 인식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어떤 확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소설을 쓰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설 쓰는 것이 사는 것보다 쉽기 때문입니다. 세나도 사는 게 힘들겠죠. 다만 저는 세나가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고모와 할머니에게서 뭔가를 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우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세나에게는 보이는 거죠. (···) 사실 세나의 엄마도 딸에게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하지만 잘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겠죠. 할머니도 고모에게 최선을 다했겠지만, 끝내 뭔가를 넘어서지는 못했을 것이고, 세나도 딸에게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나 삶이 마음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때, 힘들겠죠, 화가 나고 불면증에도 시달리고 폭식도 하겠죠. 그래도 딸의 삶이 나보다 나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버리지는 못할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변화일까요, 아니면 변화 이후일까요.16)
‘여전히 모르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제는 아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음복」에서 진실을 알아차린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세나는 가족 내에 자리 잡은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남성중심주의를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우의 무지를 폭로하거나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다. 다만 독자는 “하지만 나는 늘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부디 너를 위해 이것만큼은 내가 진짜로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래. 그래서 나는 그날 대답했던 거야. 이것이 너의 드라마. 복(福)이 되길 바라며.”라는 세나의 독백을 통해 그녀가 딸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결말에 대해 소설 속 문장을 빌려 의문을 제기하자면 “과연 그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세나는 비밀을 알고서도 함구함으로써 고모의 연기와 시어머니의 계약을 반복하고, 정우가 여전히 왕자일 수 있도록 기존의 질서에 동조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세나의 선택은 “뭔가를 모르는 너.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도 없고, 미움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으로서의 정우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선택을 “여태껏 실험된 적 없는 다른 체제, 즉 ‘다음 민주주의’를 설계하는 원리로서의 페미니즘”과 연결 지어 설명하는 신샛별의 논의는 참고할 만하다. 신샛별은 “가부장제의 젠더 불평등 권력 구조를 남성의 무지와 여성의 앎의 위계에 유비해 보여 ”주는 「음복」의 주요한 성취는 “시모와 시고모과 제사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의 제약과 ‘협상하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소원을 성취해 왔는지를 세나가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따라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신을 구속하는 힘을 실감하면서 그 힘의 방향을 굴절시키고 강도를 조율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종내에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짜고 실천하는 ‘선택’의 당사자들, 즉 행위자(Agent)로서의 여성들”17)이라고 덧붙인다. 요컨대 시모와 시고모, 그리고 세나의 엄마와 세나까지, 일견 가부장제의 ‘피해자’ 혹은 ‘공모자’처럼 보이는 그녀들은 사실은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설계하고 선택하는 ‘행위자’라는 것이다.
또한 신샛별은 “행위자 –여성으로의 성장의 문턱에 ‘출산과 양육’이라는 사건을 배치하면서, 강화길의 소설은 행위자– 여성이 획득하고자 하는 ‘모성적 권력’의 가치를 사유할 준비를 마친다.”는 점에 주목한다. “가부장의 외피를 쓰는 듯이 보이기도 하는 ‘모성적 권력’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바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돌봄의 수행’이라는 점을 시사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강화길의 인터뷰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끝내 뭔가를 넘어서는 데 실패한 소설 속 그녀들은 그래도 딸의 삶이 나보다 나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또 다른 선택들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이는 “‘~보다 우위에 있는 힘’(Power over)이 아니라 ‘~를 하는 힘’(Power to)으로서의 권력 개념”18), 즉 모성적 권력과 돌봄의 수행 권력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사유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가부장제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소거하며, 선택지 자체를 여성들이 재구성하고 재창출해야 한다는 급진적 사유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나 역시 그것이 세나의 ‘최선’의 선택인지, 이제는 진실을 알게 된 여성의 ‘변화’ 혹은 ‘변화 이후’의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강화길의 첫 번째 소설집 『괜찮은 사람』에서 독자들이 느끼는 정동의 핵심이 불안과 공포였다면, 두 번째 소설집 『화이트 호스』에서 독자들이 느끼는 정동의 핵심은 선택과 변화에 대한 가능성과 염원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강화길 표 여성 스릴러는 여성 서사에 대한 비판, 여성 스릴러에 대한 비판 모두를 넘어서며 한 차원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야.
과연 그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계속 그날을 떠올린다. 이 이야기를 계속 중얼거린다. 너. 너와 나로 인한 너. 무심코 생각하면 나를 닮은 모습으로 불쑥 떠오르는 너. 그래서 나를 겁나게 했던 너. 어떤 계획도 세우고 싶지 않게 만들었던 너. 하지만 나는 늘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부디 너를 위해 이것만큼은 내가 진짜로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래. 그래서 나는 그날 대답했던 거야. 이것이 너의 드라마, 복(福)이 되길 바라며.
어둠 속에서 나는 대답했다.
“걔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참··· 시시하지?(42쪽)
그리고 그것은 결코 시시하지 않다.
1) 강화길, “[월간 채널예스] ‘커버 스토리 – 강화길, 소설로 발언하는 사람’”, 채널예스, 2020.06.01.
2) 심진경, 「여성 문학의 탄생, 그 원초적 장면 : 여성 스캔들 소설의 삼각관계」,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음사, 2018.
3) 장영은, 「'배운 여자'의 탄생과 존재 증명의 글쓰기 :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 서사와 그 정치적 가능성」, 같은 책.
4) 강화길, 「다락」, 계간 『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
5) 강화길, 같은 글.
6) 오혜진, 「‘즐거운 살인’과 여성 스릴러의 정치적 가능성」,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오월의봄, 2019.
7) 박인영(Park In Yeong). "스릴러 장르의 피해자-여성 표상." 영화연구 0.67 (2016): 59-95.
8) 박인영, 같은 글.
9) 배은경, Eun-Kyung. (2010). 연쇄살인사건과 영화: 여성의 불안을 즐기는 사회. 사회와역사, (88), 115-148.
10) 박연미. (2006). 청소년기의 "개념화"와 청소년의 성. 청소년문화포럼, 13(), 1-33.
11) 강지희. 2020, 「[특집] 투명한 밤과 미친 여자들의 그림자」, 『문학동네』, 27(1), 1-28.
12)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경아 옮김, 문학동네, 2017,
13) 권김현영, 「해제 –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다’」, 같은 책.
14) 벨 훅스, 같은 책.
15) 벨 훅스, 같은 책.
16) 강화길 - 강동호 인터뷰, 『소설 보다 2019 가을』, 문학과지성사, 2019.
17) 신샛별. (2020). 불평등 서사의 정치적 효능감, 그리고 ‘돌봄 민주주의’를 향하여 : 김유담, 강화길, 장류진 소설에 주목하여. 창작과비평, 48(2), 34-54.
18) 신샛별,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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