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 미래를 소설하는 두 가지 방식
- 작성일 2024-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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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 미래를 소설하는 두 가지 방식
박다솜
1. 막다른 골목에서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시대다. 만 19세에서 23세의 청년들 중 절반에 해당하는 50.4%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는 내용의 한 연구1)는 이 문장이 비유나 과장일 수 없음을 묵직하게 일깨운다. 물론 결혼제도와 출산 밖에서도 삶은 얼마든지 충만해질 수 있지만, 연애·결혼·출산·내집마련·취업창업 등 총 10가지의 항목에 따라 청년들을 ‘미래계획형’, ‘결혼출산포기형’, ‘N포형’으로 분류한 앞의 연구에서 우울·불안은 ‘N포형’이 가장 높고 행복감은 ‘미래계획형’, ‘결혼출산포기형’, ‘N포형’ 순으로 높다고 분석한 것을 보면, 결혼과 출산을 포함해 여러 항목에서 미래를 꿈꿀 수 없을수록 덜 행복하고 더 우울·불안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발맞춰 최근의 문학 작품들 역시 암울한 미래인식을 속속 보고하고 있다. 변혜지의 첫 시집 제목이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인 것이나, 특유의 유머로 저성장 시대의 우울을 부조해내는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 코로나와 생태 위기 같은 현재의 문제에서 시작해 미래를 가늠해보는 강혜빈의 『미래는 허밍을 한다』(문학과지성사, 2023) 등 최근의 시집들에서는 현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인식하고 꿈꿀 수 없는 미래를 애써 더듬어보려는 시도들이 거듭 발견된다. 비관적인 현재와 막막한 미래를 토로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는 물론 소설로도 형상화되고 있는데,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2)에 대한 세밀한 독서는 지금-여기의 우리가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밝혀줄 것만 같다.
2. 부패한 공동체와 ‘알잘딱깔센’의 폭력 –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가 불분명한 글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눈치가 빨라서 외항사 승무원들이 한국행 노선을 선호한다고 한다. 비행기 안에서 배식이 시작되면 일제히 테이블을 펴두고, 앞뒤로 들려오는 대화를 엿들어 내가 먹을 메뉴도 미리 정해두고, 저 앞쪽에서 승무원들이 식사를 치우기 시작하면 자신의 식사도 서둘러 마무리하고, 음료를 주문할 때도 승무원이 덜 귀찮도록 일행들과 함께 한 번에 요청한다는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우리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행동한다. 바쁜 식당에서는 메뉴를 통일하고 사람이 많은 점심시간에는 눈치껏 얼른 먹고 일어난다. 그게 서로서로 효율적이니까. 모든 일은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빨리빨리 착착 진행되어야 하니까.
한국인의 급한 성미를 드러내는 표현 ‘빨리빨리’는 최근 ‘알잘딱깔센’으로 변주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굴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은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의 도입부를 장악하고 있다. 우리는 취미로 수영을 배울 때도 잘하는 사람은 앞줄에 서고 못하는 사람은 뒷줄에 세운다. 그래야 수업이 순탄하게 진행되니까. 초보자는 스스로 주제를 ‘잘’ 파악해서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운동복을 입고 ‘알아서’ 뒷줄로 가야 한다. 화려한 운동복을 입고 맨 앞에 서서 수업에 방해가 되는 것은 ‘센스’ 없는,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행동이다.
자본주의적 효율성에 근거한 이 원칙에 의해 우리의 일상은 무탈히 굴러간다. 그런데 소설의 주인공들인 곽주호와 문희주는 삶의 어느 순간 원칙의 형체를 또렷이 인지하게 되고 더 이상 그것에 복속되길 거부하며 스스로의 일상을 멈춘다. 곽주호가 일하던 사업장에서는 플라스틱 사출 성형기에 끼임 방지 센서를 작동시키지 않고 일을 하다가 사람이 죽었다. 작업장 벽면에는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20)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지만, 포스터 밖의 현실에는 안전보다 중요한 것이 많다. 빨리 돈을 벌고 빨리 쉬고 빨리 화장실에 가고 빨리 집에 가기 위해서는 빨리 일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안전은 보장해주지만 시간을 지연시키는 끼임 방지 센서를 꺼야 한다. 사고 후에도 공장은 벌금을 냈을 뿐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가동된다. 주호는 몇 번이나 사출 성형기를 꺼 작업장 안에 소름 끼치는 침묵을 만들어내고, 처음에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던 직원들은 결국 “이건 아니지 않냐.” “네가 왜 난리냐” 질타한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행동하지 못하는 곽주호는 끝내 공장을 나온다.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문희주는 수능에서 아주 높은 성적을 받았다. 그녀는 수능이 끝난 다음 날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부고를 듣게 되는데, 칠판에 적힌 친구의 이름을 보고도 그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희주는 스스로를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후 ‘정상적’인 삶의 루트를 따르지 않게 된다. 엄마는 “희주의 성적으로 의대에 가지 않는 건 미친 짓”(31)이라고 말하지만, 희주는 의대에 가지 않는 “미친 짓”을 저지르고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1년 내내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던 사람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 동료의 죽음을 빨리 애도한 후 빨리 일상으로 돌아와 여전히 끼임 방지 센서가 꺼진 사출 성형기에 손이 끼지 않도록 재빨리 움직이는 것. 이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맞닥뜨린 우리 공동체의 운영 원리다.
우리 사회가 타인을 대하는 이와 같은 태도는 인류가 당면한 생태위기와도 ‘연결’된다. 주호는 꿀벌 실종에 관한 기사를 보고 꿀벌이 사라지면 모든 게 사라진다는, 사실은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18)는 점에 놀란다. “꿀벌 무리와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체인처럼 고리로 연결되어 있”(18)는 것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는 타인, 그리고 비인간들과 연결되어 있다. 소설이 문제 삼고 있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별수 없지 않느냐고 여겨지는 일상의 원칙들은 나의 생존을 위해 나 아닌 것들의 안위를 얼마간 무시한다. 서로를 돌보지 않는, 아니, 돌보지 말라고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공동체는 ‘서로’의 범위에 인간과 비인간을, 지구와 환경을 모두 욱여넣을 수 있다. 같은 반 친구를, 같은 작업장의 동료를 외면하며 ‘의대에 갈 수 있는 성적’과 ‘더 많은 일을 더 빨리하기’를 추구하는 것처럼, 꿀벌의 실종과 해수면의 상승을 도외시하며 더 많은 자본의 축적을 추구한다. 그래서 희주는 온갖 멸종한 것들과 멸종해가는 것들의 목록을 스크랩하며 세상의 멸망을 기다리고 바란다. 그게 옳은 일이니까. ‘이런 기준이 세워지고 또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망하는 게 맞아.’
인류세로 상징되는 생태 위기와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경제 저성장, 솟구치는 집값과 물가, 그에 따라 낮아지는 실질임금, 비트코인이나 부동산 투기 같은 리스크가 높은 영역에만 간신히 남아 있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곤경의 세목들이다. 나열된 모든 항목은 ‘우리는 왜 미래를 꿈꾸지 못하게 되었나?’라는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각 세목들을 대하는 우리 공동체의 신자유주의적 태도를, 불가능한 미래의 궁극적 원인으로 제시한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즉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원칙 속에서 행동하길 무언으로 강요하는 부패한 공동체야말로 미래 상실의 원인 아닐까? 우리는 취미로 배우는 수영 강습에서조차도 눈치껏 행동하길 강요받지만, 부족한 수영 실력은 조금도 수용되지 못한다.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교체된 강사와의 수업에서 희주와 주호는 수영장을 가로질러 나아가는데, 그들이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저 멀리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소리가 수영장에 울”(37)린다.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박수를 보내고 다음 수업을 이어갈 끈기와 인내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건 어쩐지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쉼 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와 같은 성장 강박은 사실 우리의 시간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 시간관은 ‘발전’이나 ‘성장’ 따위의 표현이 상징하는 점진적 증가를 바람직한 것으로 전제한다. 발전이 없는 상태, 더 많아지거나 강해지지 않는 상태는 퇴보하는 것으로 표상된다. 그러니 우리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지금의 시간관념을 재정립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완연한 저성장 경제에 접어든 지금, ‘발전이 없는 상태’를 ‘퇴보하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 과거-현재-미래의 단일한 흐름을 재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발표된 두 소설, 정영수의 「미래의 조각」과 최진영의 「홈 스위트 홈」은 각각의 방식으로 선형적 시간관과 작별하고 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성장하며 발전하는 주체·사회라는 오래된 시간관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두 작품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는 한 개인의 삶에 투사되어 나타나는데, 공동체가 마주한 현재적 난관은 각각 엄마의 자살 기도(「미래의 조각」)와 자꾸만 재발하는 암(「홈 스위트 홈」)으로 구현된다.
3. 서로 다른 무늬의 데칼코마니, 과거와 미래의 만남 - 정영수, 「미래의 조각」
「미래의 조각」은 어머니의 자살 시도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둘째 아들인 ‘나’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관찰자 시점을 취하는데, ‘특공대’라는 이름의 농약을 먹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머니는 사실 15년 전에도 비슷한 시도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는 모아둔 신경안정제를 몰래 먹었고 이를 뒤늦게 발견한 가족들이 데려다가 토하게 한 후에 앞으로는 어머니에게 좀 더 신경 쓸 것을 다짐하며 사태가 마무리된 바 있다.
어머니가 거듭 자살 시도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두 번째 시도와 함께 남긴 유서가 잘 말해준다. “나는 나의 지난 삶에 죄를 지었다.”3) 단 한 줄의 유서는 중학교 졸업과 상경, 아버지와의 만남과 강압적 성관계, 원치 않았던 임신, 탈출 실패와 재임신으로 이어지는 어머니의 지난 삶의 연쇄를 작죄의 과정으로 요약한다. 그녀에게 자신의 과거란 더럽혀진 것이자 회복 불가능한 것이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어머니가 단 한 모금의 음용만으로도 신체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히는 농약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큰 충격에 휩싸이지만, 사실 그녀에게는 삶 전체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것으로 현현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말한다. “죽는 건 나쁜 게 아냐. 고마운 거야.”(339)
농약 복용으로 성대가 상하긴 했지만 어머니는 죽지 않고 몸을 회복해 ‘나’의 돌봄 하에서 지내게 된다. 간단한 수신호와 필담으로 소통하던 그녀는 어느 날 큰 아들이 사다준 노트에 뭔가를 적기 시작한다. 며칠에 걸친 글쓰기가 끝나고 어머니가 잠든 사이 ‘나’는 글을 확인하는데 거기에는 예상과 달리 회고록이 아니라 어머니의 ‘가능했던 미래’가 적혀 있다. 어머니가 쓴 글에서 그녀는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하지만 아버지를 만나지 않고 대학에 가 무역 회사에 들어가거나 또는 생물학자가 되거나 한다. 글 속에서 어머니가 결혼하는 남자는 현실의 아버지와 달리 다정하고 가정적이다. 가능했던 미래의 시간 속에서 어머니는 두 아들이 아니라 두 딸을 낳으며 두 딸들은 무역 회사에 다니거나 생물학자가 되기도 하고‧‧‧ 이야기는 끝없이 변주된다.
어머니의 글쓰기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그대로’ 적지 않고 ‘다시’ 쓺으로써 지난 삶을 정죄하는 행위이다. 그녀의 글 속에서 고된 삶이라는 과거의 텍스트는 가능했던 미래로 변주되고 또 변주된다. 과거의 미래를 다시 쓰는 속죄의 글쓰기를 통해 어머니의 과거와 미래는 직접 만난다. 과거와 미래는 양쪽을 오가며 부지런히 읽히고 새로 쓰이는 것이다. 마치 접었던 종이를 떼어내면 양쪽이 서로 다른 그림이 되는 신기한 데칼코마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그녀의 과거-현재-미래가 한 장의 종이이고, 글쓰기를 통해 과거와 미래가 데칼코마니를 만들 듯 만났다면, 현재는 두 시간의 사이, 종이의 접힌 면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에 어머니의 글쓰기가 갖는 한계가 있다. 종이의 접힌 면-현재-은 과거와 미래의 데칼코마니가 형성한 다채로운 아름다움에 밀려 미처 인지되지 못한다. 어머니가 쓴 책에서 ‘현재’는 언제나 접힌 면으로, 책등에 해당하는 부분에 끼어 망각된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누구도 왼쪽 면과 오른쪽 면 사이 가운데에 끼인 부분을 펼쳐 그곳에 글씨가 있나 확인하려 들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의 과거와 미래가 교호하는 동안 현재는 조용히 소거된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는 비경험적 믿음(우리는 한 번도 그곳을 확인해 본 적 없으면서 거기엔 아무 글씨도 없으리라고 굳게 믿는다.)은 우리가 무사히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영영 잊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현재를 마주하게 하는 일은 삶이라는 책을 뜯어 해체하는 일과 같다. 환하게 드러나 버린 현재의 시간성 앞에서 한때 책이었던 것은 낱낱의 종이가 되고 모든 시간은 무의미하게 뒤엉켜 버린다. 그럼 소설은 아마도 다시 처음의 에피소드-엄마의 자살 시도-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치기어린 열정으로 밤을 새운 사람이 마주하게 되는 새벽빛의 부끄러움을 엄마는 ‘현실’의 시간성을 직시하는 순간 감각할 것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현재의 좋은 것을 손에 잡기보다 미래에 도래할 좋은 것을 기다리는 일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가는 대신,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유럽에 가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339)
막연한 믿음에 기대어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인 어머니는 결국 미래의 가능성에 의탁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살아내는 사람이다. 이는 사실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방식인데, 힘든 수험생 시절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던 어른들의 말, ‘대학가면 예뻐지고 애인 생겨’ 역시 도래하지 않은 시간의 희망을 당겨 와 현재의 고통을 지워내는 기술이었다. 소설은 그 마지막에 이르러 이와 같은 미래관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기에 이른다. 화자는 “어머니가 그리는 괜찮은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며 “미래는 언제까지고 미래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349)에 미래 시제의 말을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미래에 대한 믿음 너머의 은폐된 절망을 상기시키는 것은 어째서일까?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채로 멀리 있다.”(349)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희망보다 섬뜩함이 더 짙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어머니의 삶 때문이다. 그녀의 삶에서 현재가 철저히 소거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가 끝내 관찰자로 남는다는 점과 맞물려 문제적이다. 자신의 현실을 바꿀 엄두조차 내지 못하며,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자살만을 생각할 수 있는 어머니의 생애를 시종 타인의 것으로 관찰하는 화자의 냉정한 시선은 이미 그 자신에 의해서도 감지되고 있다. 자율 주행이 보편화되고 통일이 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차를 타고 유럽에 가겠다는 어머니에게 ‘나’는 “엄마, 유럽은 그냥 비행기 타고 가.”(338)라고 말한 적 있는데,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그리고 나는 내가 ‘가자’라고 하지 않고 ‘가’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린다.”(338)라고 솔직하게 쓴다. 유럽에 ‘가자’고 말하지 않는 사람, ‘운전 배우고 싶어?’라고 묻지 않는 사람. 어머니의 삶을 오롯이 어머니의 삶으로만 남겨두는 둘째 아들 ‘나’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건강한 어머니가 포함된 미래의 어느 순간을 ‘구성’하지만, 그 장면 역시 ‘어머니가 보았으면 좋겠다고 내가 생각한’ 장면이라는 점에서 어머니를 또 한 번 소외시킨다. 어머니가 보고 싶은 장면은 뭘까? 화자가 그것에 관심 갖지 않기 때문에 독자도 어머니의 욕망을 무시한 채 소설을 읽게 된다.
‘가능했던 미래’라는 형식으로 과거와 미래를 직접 맞대어 두는 「미래의 조각」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직선의 시간을 반으로 접는 신선한 시간 개념을 보여준다. ‘과거의 미래’를 다시 쓰는 어머니의 글쓰기는,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우리에게 미래를 구상하는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에 천착하는 것으로 미래를 다시 꿈꿀 수 있으리라는 소설의 제안은 그러나 어머니의 현재를 조망하는 시선에 의해 기각되는 것 같다. 더불어 이런 식의 미래관이 어머니의 삶을 매개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게 된다. 상이한 무늬를 만들어내는 신기한 데칼코마니(과거-미래)와 접혀 잊힌 부분으로서의 현재라는 구도는, 미래를 상상하는 새로운 방식과 그를 위한 도구로써의 어머니의 삶이라는 소설의 구조와 상응한다. 책을 해체하고 접힌 종이를 다시 펴 잊힌 현재를 복구하는 것, 최진영의 「홈 스위트 홈」이 그 일을 한다.
4. 발산하는 시간, 모든 현재들 - 최진영, 「홈 스위트 홈」
「홈 스위트 홈」은 암을 선고받은 40대의 일러스트레이터 ‘나’를 화자로 삼아 우리 사회의 건강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매커니즘을 폭로하는 작품이다.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폭동’이라는 말이 알려주는바, 현실의 논리는 강자에 의해 구축된다. 어떤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르게 될지, 폭동이라고 부르게 될지는 성공 여부에 따라 소급적으로 정해진다. 성공하여 강자의 위치에 올라선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숭고한 혁명으로 명명할 것이고, 실패한 사람은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할 테니 그의 행위는 폭동이 될 것이다. 혁명과 폭동의 구분은 ‘정치적 투쟁’이라는 범주 안에서 강자와 약자의 의미 쟁탈전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건강이라는 범주에서는 누가 강자일까? 물론 건강한 사람이 강자일 것이다. 아픈 사람, 허약한 사람은 말 그대로 약자다.4) 건강 이데올로기는 뚱뚱하거나 마른 사람을 ‘건강’이라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배제한 후에 그들에게 살을 빼거나 찌워야 한다고 끝없이 조언한다. 마찬가지로 병든 사람을 대할 때에도 건강 이데올로기의 충고는 분명하다. “병원 침대에서 죽고 싶지 않”5)다고 이야기하며 시골의 폐가를 고쳐서 그곳에서 지내겠다는 화자의 계획을 들은 엄마는 말한다. “네가 할 일은 건강을 되찾는 거야.”, “아픈 사람이 어떻게든 나을 생각을 해야지.”(34) 건강 밖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며 교정되어야 한다는 이런 생각은 손쉽게 다음과 같은 논리로 변모한다. 병원 로비에서 음료를 마시던 일군의 중년 남녀는 아픈 사람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아직 젊은 사람이 대체 어떻게 살았으면 그런 병에 걸리냐.” “요즘처럼 좋은 세상에 자기 관리만 제대로 했어도 그 지경까지 안 갔을 텐데.”(25-6)라고 말한다. ‘자기 관리’라는 편리한 단어로 “아픈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곳은 화자가 느꼈듯 “인간들의 지옥”(26)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건강 범주에서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에 비해 강자인 것은 시간과의 연관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범주에서는 현재보다 미래 쪽이 강자다. 지젝은 ‘소급적 인과성’ 개념에 기대어 “트라우마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6)다고 주장한다. 트라우마적 사건은 처음부터 트라우마로서 현상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사건을 트라우마로 지정하는 훗날의 행위가 있어야만 비로소 트라우마가 된다는 의미에서다. 따라서 앞으로 도래할 어떤 시간을 지속적으로 점유할 사람, 그리하여 현재의 의미를 제 나름의 논리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입장에서)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이 시간의 범주에서 강자인 것이며, 살아남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건강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강자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픈 사람의 죽음 이후, 여전히 살아 있는 건강한 사람이 죽은 자의 삶을 정리하고 정의할 것이니 말이다. 그의 인생이 혁명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폭동과도 같은 막무가내의 것이었는지.
그러니 암이 “3차 재발한다면 화학적 치료는 하지 않겠다”(27)며 “나는 나을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더 행복해질 수는 있어.”(34)라고 말하는 「홈 스위트 홈」은 강자와 약자의 위치를 전복하고 약자가 스스로의 약함을 긍정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현실의 논리 속에서 ‘행복’은 응당 강자의 것이다. 일반적으로 폭동군의 우두머리보다는 혁명군의 수장이, 과하게 뚱뚱하거나 비쩍 마른 사람보다는 정상 체중인 사람이, 병약한 사람보다는 건강한 사람이 ‘행복’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는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간주되거나.7) 하지만 말기 암 진단을 받은 ‘나’가 “내성 생기면 다른 약 쓰면 되니까” (건강해지길) “포기하지 말자.”라는 연인 어진의 말에 “물론이야, 나는” (행복해지길) “포기하지 않아.”(27)라고 답할 때 우리는 문득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직업적·경제적 성공, 정상 체중, 건강 같은 것들을 거치지 않고도 우리는 곧장 행복으로 갈 수 있었다. 사실 “건강과 죽음은 큰 연관이 없”(24)는 것처럼 어쩌면 그런 것들과 행복은 큰 연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폭동군의 우두머리가 스스로 야기한 소요 속에서 희열을 맛볼 수 있는 것처럼, 과체중이나 저체중 또는 암환자도 건강 이데올로기 밖에서 행복을 향해 곧바로 질러 갈 수 있다.
‘나’의 이러한 ‘질러가기’는 시간의 영역에도 적용된다. 과거-현재-미래의 선형적 흐름을 벗어나서 ‘나’는 시간들을 함부로 점유한다. 화자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미래의 집을 기억하고 노트에 그 집의 평면도를 그린다. 비 오는 미래의 어느 여름날 그 집 툇마루에 앉아 부추전을 만들어 먹었던 것을 기억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 집을 찾아내 기억 속 평면도처럼 꾸민다. 화자의 ‘기억된 미래’는 이렇게 현실이 된다. 과거 또한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내가 그것을 기억하는 순간 과거는 지금-여기에 현재로서 존재한다. 기억된 미래의 집에 남아 있는 누군가 살았던 흔적, 즉 “키 재기 흔적이 남아 있는 문틀과 야광별 스티커가 붙어 있는 유리창”(35), “플라스틱 헤어핀, 문구사 앞 뽑기 기계에서 뽑았을 듯한 통통 튀는 고무공, 닳은 지우개, 몽당연필, 발목에 앵두 자수가 있는 양말 한 짝, 노란 슬리퍼 한 짝, 스누피가 그려진 볼펜 (‧‧‧)”(36)을 고이 간직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가 그것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과거는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의 화자에게 “시간은 발산”(15)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15)
「홈 스위트 홈」의 ‘나’는 「미래의 조각」의 어머니가 쓴 책을 해체해 가운데 끼어버린 현재를 꺼내 다시 시간을 평평하게 만들고 이내 그것을 폭발시켜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 나가”(15)게 만든다. 그런 뒤에 낱낱의 종이들 사이를 유영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마음껏 취한다. 그는 미래의 건강한 순간을 위해 현재를 접어두길 결단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의 조각」의 어머니가 상상하는 미래는 결코 도래하지 않거나, 비틀린 형태로만 들이닥치지만 「홈 스위트 홈」의 ‘나’가 기억하는 미래는 소설에서 보듯 어김없이 도래한다. 요컨대 「미래의 조각」의 어머니가 ‘과거의 미래’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소거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홈 스위트 홈」의 ‘나’는 현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과거와 미래를 마구 차지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를 지금 기억하는 방식으로 점유할 수도 있고, 모든 인간들의 목적지인 사랑과 천국을 이곳에 두고 자유롭게 떠날 수도 있다. 시간은 발산하고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이런 방식으로 그의 미래 또한 영락없이 행복할 것이다.
5. 다시 막다른 골목에서
정용준의 「바다를 보는 법」은 「홈 스위트 홈」과 비슷하게 개인의 질병 문제에 빗대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진단해보는 작품이다. 소설에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 동안 작은 극단을 꾸려 연극을 올린다. 5개월 후 다시 찾은 병원에서 그는 의사로부터 종양이 전혀 자라지 않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더 나빠졌다거나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는 의사에게 주인공은 묻는다. “그럼 얼마나 남은 것 같나요?” 의사는 스스로도 어이없어 하며 답한다. “6개월?”
「바다를 보는 법」은 6개월짜리 시한부로서 영속되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 하는 셈이다. 소설은 우리의 미래가 망한 채로 지속될 거라고, 더 커지지도 줄지도 않는 종양이 달린 채로 계속될 거라고 말한다. 이는 미래가 내내 암울할 것이라는 선언이기도 하고,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권유이기도 하다. 지금의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내내 암울해할까? 새로운 연극을 준비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내가 기억하는 미래는 이렇다. 어떤 미래에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의 문희주는 아직도 물에 못 뜨지만 형광색 화려한 수영복을 입고 맨 앞줄에 설 것이다. 강사의 말에 씩씩하게 대답하고 가장 먼저 출발해 가장 늦게 도착한다. 사람들은 희주가 도착하길 기다렸다가 박수를 친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뭔가를 손해 봤다거나 대단한 것을 인내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그런 것은 더없이 당연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곽주호는 끼임 방지 센서가 꺼진 적 없는 사업장에서 일한다. 거기서 사람들은 정말로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히 그랬었다.
1)이승진 외 5명, 「청년들은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N포세대 유형과 우울·불안 및 행복감 간의 관계-」, 『한국사회복지학』, 한국사회복지학회, 2024. 해당 논문은 월드비전에서 주관한 『2022년 한국 미래세대 꿈 실태조사』를 활용한 연구다.
2)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소설 보다: 여름 2023』, 문학과지성사, 2023. 이후 2장에서 이 작품을 인용할 때에는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3) 정영수, 「미래의 조각」, 『문학동네』, 2023 가을호, 335쪽. 이후 3장에서 이 작품을 인용할 때에는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4) 서사의 범주에서는 누가 강자일까? 아마도 말하는 사람, 즉 화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정영수의 「미래의 조각」에서 어머니가 목소리를 잃는다는 설정은 꽤나 증상적이다.
5) 최진영, 「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23, 33쪽. 이후 4장에서 이 작품을 인용할 때에는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6) 슬라보예 지젝, 『라캉 카페』, 조형준 역, 새물결, 2013, 1005쪽.
7) 사라 아메드는 그의 저서 『행복의 약속』(후마니타스, 2021)에서 행복이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방식을 세심히 탐구한 바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행복 이데올로기가 퀴어 주체나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 등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하는데, 이 글에서 다루는 건강 이데올로기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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