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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 담론과 여성 가장의 이중 책무

  • 작성일 2024-07-30

   ‘다정함’ 담론과 여성 가장의 이중 책무

박다솜


   1. please, be kind.


   다니엘 콴·다니엘 쉐이너트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는 미국에 정착한 중국인 이민자 가정의 애환을 다룬다. 주인공 에블린은 운영하는 세탁소의 세무 조사를 준비하면서 아버지의 식사를 챙기고, 신년 파티를 준비하는 동시에 딸 조이의 동성 연인을 (손녀의 동성애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분명한) 아버지에게 소개하며, 42번 세탁물을 찾아다 주고, 남편 웨이먼드가 천장에 칠한 페인트 색을 확인하면서, 세탁소 손님의 성희롱도 감당해낸다. 다중우주를 소재로 하는 이 영화가 오색찬란한 평행 우주들을 누비며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 만큼이나 영화 초반부에서 에블린이 수행하는 다중-미션들 역시 우리를 정신없게 한다. 말하자면 에블린은 국세청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른 우주의 웨이먼드를 만나 다중 우주여행으로 인도되기 전부터 이미 충분히 다중적인 삶의 책무들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웨이먼드가 자신의 착함이나 다정함은 바보 같은 것이 아니라 세상과 싸우는 방식, 즉 생존 전략이라고 말하며 에블린에게 ‘다정하게 대해줘’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얼마간 폭력적이다. 웨이먼드가 그 자신의 말대로 다정함을 생존 전략 삼아 삶을 분투하는 동안 웨이먼드의 생존 방식이 미처 해결하지 못한/않은 것들-세탁물 찾아다 주기, 쿠키로 세무관의 일시적 환심을 사는 것 말고 실제로 세무 문제를 해결하기, 완고한 아버지에게 딸의 동성 연인을 소개하기 등-을 직면하고 해결해 나가는 것은 에블린이기 때문이다. 웨이먼드의 ‘다정함’ 이론은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디플롯, 2022)와 직접적으로 공명하는데, 책은 친화력이나 타인에 대한 감수성, 협력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종족 유지에 얼마나 유리하고 유용한 것이었는지 분석하며 ‘다정함의 힘’을 거듭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우리 인간들의 친화력에 존재하는 어두운 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우리는 위협적인 상황에 놓이면 외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1)이라는 전언은 웨이먼드의 관용이 에블린의 무자비함으로 구축한 보호막 속에서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에블린에게 부족한 것은 다정함 자체가 아니라 다정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아닐까? 웨이먼드가 세무관에게 줄 쿠키를 굽는 대신 세법을 공부해서 세무 문제를 해결했다면, 에블린은 딸의 동성 연인을 아버지에게 소개할 적절한 말을 조금 더 고심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혹은 웨이먼드가 세탁물에 장난스런 눈을 붙여두는 대신 세탁소의 일을 전담하고 세탁물을 직접 찾아다가 고객에게 전해주었다면, 에블린은 가족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고 세무 문제를 처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사태의 핵심은 에블린이 다정하지 않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역할 분담이 불균형하다는 데 있다. 가족에게 발생하는 모든 문제 상황(세탁소 일, 세무 조사, 아버지 돌보기, 딸과의 소통)의 책임자는 에블린이며 웨이먼드는 조수의 역할에 그친다. 그래서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하는 말 “please, be kind.”는 그저 부당한 미션의 부과처럼 들린다. ‘늘 그래왔듯 그 모든 일들을 당신이 주가 되어서 하되 앞으로는 웃으면서 다정하게 해줘.’ 사소한 부탁의 형태를 한 “please, be kind.”는 에블린이 다정하기 힘든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 채 그녀의 성품을 문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요청은 한국의 일하는 여성들에게도 어김없이 당도한다.


   

   2. 맞벌이 아내의 다정함 외주주기

   

   김유담의 「돌보는 마음」은 아이가 있는 맞벌이 가정의 아내가 수행하는 다중-미션을 서사화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미연은 대학병원의 고객 서비스 만족부 팀장으로 남편 기훈과 함께 딸 지우를 키우고 있다. 미연은 딸 지우의 베이비시터를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고용한 시터가 지우를 잘 돌보고 있는지 회사에서도 수시로 집 cctv를 확인하면서, 팀원 승주 씨와 악성 민원인인 노인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일 바구니를 사들고 노인의 집에 찾아가 끼니도 거른 채 일장연설을 들으며 사과하고, 그러고도 승주 씨로부터 “팀장님은 누구 편이세요?”2)라는 질문을 받는다. 미연은 <에에올>의 에블린 못지않은 다중-미션을 이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미연 역시 불균등한 가정 내 역할 분담에 시달린다. 미연과 기훈은 부부 사이이고, 딸 지우를 함께 낳았으며, 맞벌이라는 형태로 가정 경제를 함께 책임지고 있지만, 지우를 돌볼 베이비시터를 구하고 관리하는 일은 전적으로 미연의 책임인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시터였던 정순이 집안의 생필품을 훔쳐가는 것을 알게 된 후 미연이 시터 교체를 결정하자 기훈은 얼마간 “투덜대면서도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다. “미연의 판단에 찬성했다기보다는 그 판단에 대한 책임이 미연에게 있다”(170)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훈의 태도는 “맞벌이 여부에 상관없이 영아 자녀 돌봄은 주로 아동의 어머니가 하고 있어, 성 불평등한 돌봄 분담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3)는 최근의 연구 결과를 예증한다. 경제적 분담과 무관하게 아직도 육아는 궁극적으로 엄마의 책임인 것이다. 

   기훈은 육아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 만큼이나 미연의 커리어에도 무책임하게 군다. 그는 실상 자신은 육아휴직을 할 생각도 없으면서, 복직을 서두르는 미연에게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려 한다며 타박해 분란을 일으킨다. 노동 가치의 하락으로 맞벌이가 필수인 시대, 출산 이후의 여성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제법 궁색하다. 미연 주변의 선배 워킹맘들(친구 혜정과 전산팀의 황희수 선배)이 월급의 대부분을 돌봄 비용으로 소진하면서도 커리어를 놓지 않고 버티는 것은,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어 원래 하던 일은 할 수 없게 되었으나 남편의 벌이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버거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게 되는 또 다른 선택지를 고르지 않기 위한 사투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미연은 자신에게 할당되어 있(다고 믿)는 ‘다정함’, 즉 육아의 영역을 시터에게 외주 주게 된다. 

   앞서 언급한 연구 결과를 생각해 보면, 평생 자기 계발의 주체로서 ‘능력’을 증명하길 요구받았던 신자유주의의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 이후 ‘마음’이나 ‘진심’같은 감정을 증명하길 요구받는다4)는 지적에는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 이후 능력에 더해 감정‘도’ 증명하길 요구받는다. 나직한 당부처럼 보였던 “please, be kind.”는 여기서 ‘육아’라는 구체적 형태로 육박해 온다. 가부장의 외벌이로 온 가족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시절의 여성들이 육아와 가정 내 돌봄 노동을 전담하며 다정함의 화신으로 거듭나길 강요받았다면, 오늘날 맞벌이 가정의 여성들은 과거 가부장들의 경제적 짐을 나눠 들면서도 가정 내 돌봄 노동은 그대로 강요받는 형국이다.

   이는 타인의 돌봄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아무리 사랑이 많은 시터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아이가 아니기에 자신의 아이처럼 돌볼 수는 없다는 점)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미연이 무리하게 ‘진심’을 갈망하며 ‘완벽한’ 시터를 찾아 헤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회사 일에는 영혼 없는 사과를 잘만 하면서도 육아에는 올바른 영혼이 가득 담긴 사랑과 애정이 투여되어야 한다고 믿는 태도에는 가부장제 사회의 신비화된 모성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다. 그녀는 애정과 헌신으로 아이를 돌볼 ‘완벽한’ 모성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떠맡은 것을 대리해 줄 ‘완벽한’ 모성의 시터를 찾는다. (기훈은 이런 모성의 역할을 떠맡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시터에 대해 우리도 회사 물품을 슬쩍할 때가 있지 않느냐며 관대할 수 있다.) 요컨대 미연은 자신이 들어온 “please, be kind.”를 실행해 줄 타인을 찾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02동 할머니 남희가 처한 상황과 그것을 바라보는 미연의 태도는 문제적이다. 남희는 가정 내에서 경제적 책무를 나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치가 떨릴 지경”(173)인 시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돌보는 마음」을 다루는 기존의 비평들은 지우를 아낌없이 예뻐하는 동시에 시모를 학대하는 남희의 이중적 면모에 뜨악하면서도5) 그녀가 자신을 괴롭혔던 가해자를 억지로 돌보고 있다는 사실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며느리에게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가정 내 폭력 행위들이 그간 주목되지 않았던 만큼 남희가 강요받은 돌봄 노동의 부당함에 대해서도 우리는 더디게 인지한다. 남희 이야기를 전해들은 친구 혜정이 “그 아줌마 입장도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라면서도 “나라면, 내 아이를 처음부터 그런 집에 보내지 않지.”(182)라고 깔끔하게 단언해버리는 것 역시 돌봄 주체를 흠결 없는 다정함 그 자체로 상정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미 자신도 다정함을 강요받고 그것을 타인에게 외주주려 애쓰고 있으면서도 남희가 강제 받은 다정함에 대해서는 얼마든 냉정해질 때, 모성의 신화화는 돌봄 주체에 대한 신화화로 슬쩍 옮겨가는 것 같다. 


   

   3. 무정한 남편과 유물론적 존중

   

   그러나 사실 우리는 돌봄이란 “차라리 자신과 타인의 미성숙을 교집함 삼아 서로 폐를 끼치고 받는 위험한 관계”6)라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런 형태의 돌봄에 충분히 감사할 줄도 안다. 돌봄 관계 안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커다란 사랑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뜻밖의 냉담함에 상처받는 순간들도 있다. 그리고 역시 중요한 것은 인식론이다. 그에게서 무심함을 포착해 서운해할 것인가, 아니면 과묵하지만 진중한 사랑을 발견하고 감사할 것인가. 가령 <에에올>의 에블린은 다정하지 못한 사람인가, 가정의 생계를 오롯이 책임지는 훌륭한 가장인가. 황정은의 「하고 싶은 말」은 “의식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은 채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7)으로 평가된 어떤 무정한 남편이 받는 유물론적 존중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내 한영진에 대한 남편 김원상의 기본적 태도는 ‘무시’인 듯하다. 그는 꽤 적극적으로 한영진을 무시한다. 지하철에서 만난 외국인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은 한영진이 김원상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그는 대뜸 “ㅋㅋㅋㅋㅋ” 웃으며 “Where is the toilet? / 이 말을 니가 잘못 들은 거 아니고?”(53)라고 답한다. “네가 그 정도로 매력 있을 리가 없잖아.”(53)가 김원상의 생각인 것이다. 그의 멸시는 비단 아내의 성적 매력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어서, 동생 한세진에게 내 밑에 들어와서 일을 하면 월급을 이백오십까지 맞춰주겠다는 한영진의 말에 김원상은 “웃기시네” “그 돈을 니가 무슨 수로 주냐, 니가 무슨 권한으로.”(65)라며 함부로 끼어든다. 김원상의 이런 태도는 심지어 한영진의 가족들에게도 적용된다. 최근에 그는 처가 식구들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않는 지경이다. 영진의 동생 세진이 집에 와도 “거실에 놓인 소파에 깊숙이 앉은 채 눈만 움직이며 어,라고 하거나 잔다는 핑계를 대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60-61)는다. 그는 한영진의 모친이 옥상에 올려둔 화분들이 너무 많다며 투덜거리고, 한영진의 부친이 차고에 쌓아두는 고물에 얼굴을 찡그린다. 한세진의 연극에서 재현된 것처럼 김원상은 화장실에 가는 길에 “엉덩이를 내밀어 한영진의 등을 깔고 앉”(66)는 사람, 연극을 보던 관객이 정확하게 중얼거렸듯 “씨팔 새끼”(66)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영진은 모친의 화분과 부친의 고물은 누구라도 싫어할만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김원상에 대해 “그 사람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68)라고 판단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영진-김원상 부부는 시가의 재산인 빌라의 5층에 살며 같은 건물의 4층에 한영진의 부모를 모시고 사는데, 부모를 이 집으로 모셔올 때 원래 살던 세입자를 내보내며 돌려줘야 했던 보증금 8천만 원의 절반 이상을 김원상이 묵묵히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도 그 돈에 대해 그저 함구하고 있다. 또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 무릎이 안 좋은 이순일을 김원상이 직접 등에 업고 오름을 오르기도 했다. 정정하건대 김원상은 단순한 “씨팔 새끼”는 아닌 것이다. 

   김원상에 대한 한영진의 평가 기준은 유물론적이다. 그녀는 경제적(집)이고 물리적(오름 오르기)인 것들을 묵묵히 감당해내는 김원상에게 모종의 감사를 느낀다. “김원상은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 “의식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은 채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70)이라는 한영진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바, 이순일을 업고 걷는 일도 김원상에게는 다정함의 발현이기보다 그저 문제의 해결 쪽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김원상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실제로 충분히 감사한 일 아닌가? 한영진의 부모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큰돈을 아무 생색 없이 구해오고, 이순일을 업고 올라가 억새 숲을 보여주는 일. 그의 행동들은 추앙 받아 마땅한 것들이다. 김원상에 대한 한영진의 유물론적 존중은 타당하다.

   반면 한영진이 자신의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감당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평가절하가 이뤄진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그녀의 경제적 노동과 가족 부양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81)라는 말 속에서, 다만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한 일’ 정도로만 의미화 되는 것 같다. 무심해서 때로는 “씨팔 새끼”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김원상을 한영진이 궁극적으로 유물론적 존중의 대상으로 삼는 반면, ‘큰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오래된 여성 혐오적 표현을 착실히 살아낸 한영진에 대해서 가족들은 ‘감사함’보다는 ‘미안함’을 느낀다. 미안함의 감정은 한영진의 경제력에 기대어 온 가족이 생계를 꾸려나갔으며 한영진은 그런 삶을 원한 적 없었다는 점과도 연관되지만, 그런 장녀의 삶을 긍정적으로 의미화 할 언어의 부재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하다. 한영진이 지금껏 한 일들은 안타깝고 미안한 것일 뿐, 숭고한 노동이거나 아름다운 것일 수는 없다. 이를테면 아무도 우러르지 않는 희생인 것이다. 건설적 의미의 장에는 한영진의 삶을 위한 자리가 없다. 

   


   4. 여성 가장의 이중 책무

   

   우리는 가정 내 돌봄 노동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당연히 여성의 일로 치부되면서 여성들이 제공한 돌봄 노동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엄마의 밥상이 가진 초월적인 힘이나 할머니의 무조건적 사랑, 엄마를 생각하며 눈물짓는 성인 남성들의 흔한 이미지는 모성의 가정 내 돌봄 노동이 신화화되는 방식으로라도 얼마간 기려져 왔다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8) 이는 회사에서 모욕을 당하면서도 가족 앞에서는 씩씩하기 위해 애쓰는 상투적인 아버지 이미지가 주는 감동과도 유관하다. 반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여성 가장들의 노력은 전혀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사랑으로 가정을 돌보는 가정주부로서의 아버지에 관해 우리가 어떠한 보편적인 상(像)도 갖고 있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서수의 가족소설에서, 젊은 여성 주인공들은 가족 안에서 유일하게 현실성과 책임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홀로 고통 받는 경우가 많다. 「미조의 시대」의 ‘나’는 중증 우울증을 앓는 엄마를 돌보면서 오천만원으로 서울에 전셋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인데, <생생정보>에 나온 전국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사는 오빠 충조는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장편 『헬프 미 시스터』(은행나무, 2022)의 수경은 애초에 여성 가장이었는데 어떤 사건 이후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스스로 여전히 사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이제는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가족들을 북돋우는 것도 역시 수경이다. 「젊은 근희의 행진」의 문희 역시 뮌하우젠증후군에 걸린 엄마와 유튜버가 되겠다는 동생 근희에겐 부족한 경제적 현실 감각을 가지고 가족을 유지할 책임을 다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젊은 근희의 행진」은 이런 특질의 선택적 보유가 우연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소설에는 이서수의 여성 가장들이 여성 가장이 될 수밖에 없는 맥락이 직접 등장해 흥미롭다.

   문희는 연인 강하와 홍대 근처에서 15평짜리 빌라를 매수해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러브 하우스에 갑작스럽게 엄마가 침입한다. 문희의 엄마는 생애 첫 집으로 연남동의 반지하를 별 망설임도 없이 구매했는데, 계약기간을 맞추지 않아 1년 뒤에나 그 집에 입주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역시 별 망설임도 없이 문희와 강하의 공간으로 들어온다. 혼자 사는 근희가 아니라 연인과 함께 살고 있는 문희를 구태여 선택한 것은 엄마가 “큰딸과 가까운 곳에 사는 게 자신의 유일한 목표”9)라는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희는 그런 엄마가 무섭다고 생각하지만 별 수 없이 엄마와 함께 살게 되는 K-장녀이다. 한편 동생 근희는 현재 북튜버로, 방화동 투룸짜리 빌라에서 문희가 빌려준 보증금 천만원으로 살고 있다. 소설은 근희가 인스타 사기를 당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고조되었다가 엄마와 오근희가 쓴 두 통의 편지로 갈등이 해소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둘 중 먼저 등장하는 엄마의 편지는 가정 공동체 안에서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어떻게 자극되는지를 상연하고 있어 인상 깊다. 

   사기를 당하고 잠적한 근희에게 엄마가 편지를 쓰기 시작하자, 문희는 엄마의 편지를 대놓고 들여다본다. 엄마 역시 문희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꿋꿋이 편지를 쓰기 때문에, 소설에서 엄마의 편지는 근희에게 보낼 엄마의 활자들과 그것을 읽는 문희의 반응이 괄호 안에 담긴 채로 함께 나열된다. 이런 식이다. 

   

   근희야, 엄마는 너무 속상해. 돈은 아무것도 아니야. 벌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게 돈이야. 그렇지만 가족 간의 신뢰는 달라. 신뢰는 얻기 힘들지만, 잃는 건 너무 쉬워. 지금 너는 문희한테 신뢰를 잃었어. 절대로 용서해주지 않을 기세야. 하지만 근희야, 너도 알겠지만 문희는 우리 중 가장 착하잖아. (“엄마, 나 안 착해.”) 다행이지 않니? 문희가 착한 게. 착하지 않았으면 너랑 나는 어떻게 됐겠니. 개차반이 되지 않았겠니? 아주 똥같이 살지 않았겠니? 그러니까 근희야, 언니한테 연락해. 연락해서 용서를 빌어. 문희가 좋은 점이 뒤끝이 없다는 거잖아. 문희한테 용서를 빌면 문희가 다 해결해줄 거야.(“엄마, 이 문장 지워.”) (151-152. 밑줄은 인용자)

   

   문희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알기에 엄마는 근희에게 보낼 편지에 문희가 우리 중 제일 착하다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쓴다. 또 “문희한테 용서를 빌면 문희가 다 해결해 줄 거”라고도 쓴다. “엄마, 나 안 착해.”, “엄마, 이 문장 지워.” 같은 문희의 반응을 의연히 무시하며 써 내려가는 이 편지는 기실 근희가 아니라 문희를 향해 있다. 근희가 용서를 빌면 착한 네가 용서해 주고 다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너는 우리 중 가장 착한 아이니까 분명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을 편지를 경유해서 할 뿐이다. 편지를 다 쓴 엄마가 근희에게 편지를 보낼 방법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펜을 내려놓고 편지지를 두 번 접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방으로 들어”(153)가는 이유는 자명하다. 편지는 이미 목적지(문희)에 도착한 것이다. 이서수의 젊은 여성 주인공들은 이렇게 책임감을 갖춘 여성 가장이 되어간다.10)


   두 번째 편지는 근희가 문희에게 보내온 것으로 근희는 지금 낙산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즐기고 있다. 편지에서 근희는 자신이 사기를 당한 이유가 북튜버를 하면서 똑똑해져서 그런 것 같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옛날 같았으면 사기꾼이 설명하는 수익 구조를 아예 이해하려 들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진지하게 수익을 따져보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의심에는 품이 든다.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얼마나 쉽고 또 선한 태도인가. 모든 인간의 선의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들의 말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주체의 세상은 간명하면서도 선함이 넘치는 유토피아적인 공간이다. 반대로 타인의 말을 의심하며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일은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수고를 필요로 한다. ‘저 사람이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하고 의문을 갖는 일은 인간을 불신하는 일이면서,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나 자신의 모습까지도 감당하는 일이다.

   근희는 그저 이런 식의 의심을 문희보다 덜 해도 되는 사람인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근희의 부족분은 문희가 채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근희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영악하게도 문희의 동성애가 가족들에게 수용되는 것은 가족들이 문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니가 결혼해서 우리 곁을 떠나는 일이 없을 거라는 게 좋은 것뿐이야.”(160) 요컨대 엄마와 근희는 문희를 착취하며 삶을 영위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젊은 근희의 행진’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애석하게 읽힌다. 문희는? 문희의 행진은? 근희가 행진하는 동안 문희도 함께 행진할 수 있을까? 근희가 걸어갈 길에 돌을 골라내고, 신나게 가다가 넘어진 근희를 일으켜 세우고 깨진 무릎에 약을 발라주는 일을 문희가 하게 되지는 않을까? 게다가 이제는 근희의 행진을 응원하는 임무까지 지게 된 것 같다.

   근희가 문희에게 “언니, 관종이 되려면 관종으로 불리는 걸 참고 견뎌야 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언니는 모르지?”(158)라고 말하며 관종의 힘듦까지 이해하길 촉구할 때,11) <에에올>의 “please, be kind.”는 다시금 들려온다. 동생에게 전세금을 천만 원이나 빌려주고, 집 계약을 꼼꼼히 하지 못해 붕 떠버린 엄마에게 주거지를 제공하면서도, 근희의 관종적 힘듦을 살뜰히 이해하는 것까지 요구받는 문희의 처지는 <에에올>의 에블린과 꼭 닮아 있다. 문희가 가족에게 제공하는 물리적이고 경제적인 안락함은 그저 문희의 착함으로 규정될 뿐이며, 이제는 넓은 이해심까지도 요청받는 지경인 것이다. 이는 황정은의 「하고 싶은 말」에서 처가 식구에 대해 보이는 김원상의 적대적 행동이 경제적 가치로 양해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에블린이 그랬던 것처럼 문희에게는 제대로 된 존중도 감사도 부재한다. 여성 가장들에게는 그저 “please, be kind.”라는 충고가 또 한 번 주어질 따름이다. 문제의 두 번째 책무로서. 

   


   5. 다정함의 가정-정치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감정이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살핀다. 아메드는 지뢰 피해자들을 위한 정기 후원을 장려하는 한 소식지가, 피해자의 고통과 슬픔에 천착하는 과정을 거쳐 종국에는 ‘지뢰’를 후원자들의 효능감을 확인하는 기호로 바꿔내는 매커니즘을 분석해낸다. 그는 고통의 과잉 재현이 “타자를 고통을 ‘지닌’ 존재로서, 서구의 주체가 후원을 결심할 만큼 마음이 움직였을 때 비로소 고통을 극복할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로 고정시킨다.”12)고 말한다. 고통과 괴로움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지뢰 피해자들은 고통에 속박된 수동적 주체로 의미화된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고통이라는 감정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여성 가장 서사들에서 포착되는 ‘다정함에의 요구’ 역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정치적이다. 여성 가장들에게 보다 다정하게 행동할 것만을 주문하는 태도는, 사실은 얼마든지 친절할 수 있는데도 자의에 의해 단순히 그러지 않길 선택하는 사람으로 그녀를 규정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일상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여성 가장들은 그들이 가족을 위해 수행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존중도 없이 그저 더 다정하기를, 더 넓은 이해심을 보이기를 요구받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여성 가장의 신체는 ‘완벽한 돌봄 수행자인 여성’에 대한 과거의 환상과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인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장소다.

   이처럼 가정의 ‘다정함’ 정치는 여성 주체들을 이중 책무로 내몬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근대 초기에 여성의 가정 내 돌봄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 가능했다고 주장13)하는데, 오늘의 가정 정치는 여성의 경제적 노동과 가정 내 돌봄 노동을 ‘모두’ 착취하며 유지된다. 가정 안에서 여성의 경제 활동은 언제나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것으로 명명되며, 육아를 전담하고 이해심을 발휘해 가족 구성원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일은 그저 ‘다정함의 발현’으로 당연한 것처럼 요구되는 실정이다. 사라 아메드는 2014년에 『감정의 문화정치』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꽤 긴 후기를 덧붙여두었는데, 책의 의의를 밝히는 이 글은 이렇게 끝난다. “이른바 올바른 감정에는 옳지 않은 것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한다.”14) 본고에서 살펴본 여성 가장 서사들은 ‘무해·다정·안온’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다정’이 가정 안에서 요청될 때, 거기에 깃들어 있는 모종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른바 다정함에는 다정하지 않은 마음이 담겨 있다.’ 



1)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민아 역, 디플롯, 2022, 32쪽.
2) 김유담, 「돌보는 마음」, 『돌보는 마음』, 민음사, 2022, 187쪽. 이후 2장에서 해당 작품의 내용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3) 김영란 외 5명, 「젠더 관점의 사회적 돌봄 재편방안 연구(Ⅱ): 아동 돌봄 질 제고 전략 모색」,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보고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3, 93쪽.
4) 민선혜, 「돌봄의 낭만화를 벗어던지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3 봄호, 522쪽.
5) 김미정은 남희의 이야기를 암시하며 “‘돌보는 마음’은 애정과 학대를 오가는 그로테스크한 마음에 다름 아니”(김미정, 「여성 서사의 자긍심」, 『문학과사회』 2022 여름호, 282쪽.)라고 말한다. 한편 김주원은 남희가 시모에게 당하고 산 세월을 “복수하듯 되갚아주고 있었던 것”(김주원, 「여성의 돌봄에서 공동체의 돌봄으로」,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333쪽.)이라고 표현하는데, 정작 작품 안에서 남희는 “나야말로 저 노인네 이 집에 데리고 오는 거 죽기보다 싫었”(180)다고 말한다.
6) 전청림, 「돌봄의 극사적 에로스」, 웹진 비유, 2022년 12월호.
7) 황정은, 「하고 싶은 말」, 『연년세세』, 창비, 2020, 70쪽. 이후로 3장에서 이 작품을 인용할 때에는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하기로 한다.
8) 앞서 살펴본 「하고 싶은 말」에서 이순일은 한만수의 뉴질랜드 친구로부터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하고 싶은 말」, 34)라고 적힌 카드를 받는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의 변주인 이 메시지 역시 돌봄 노동의 주체인 어머니가 가정 안에서 숭배되어 온 방식을 잘 보여준다.
9) 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128쪽. 이후로 4장에서 이 작품을 인용할 때에는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하기로 한다.
10) 그리고 종국에는 이 책임감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위하는 주체가 된다. 문희는 종적을 숨긴 오근희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언제쯤 돌아오려나. 언제쯤 이 사건을 수습해달라고 연락하려나‧‧‧.”(154)
11) 그간 「젊은 근희의 행진」은 관종인 동생을 이해하려는(이해해야 하는) 언니에 관한 서사로 읽혀왔다. 관련하여 김보경 해설, 「관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공동의 행진」,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2)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역, 오월의봄, 2023, 61쪽.
13)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성원·김민철 역, 갈무리, 2011 참고.
14) 사라 아메드, 같은 책, 4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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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다솜
  • 2024-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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