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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당사자성’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

  • 작성일 2024-08-06

   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당사자성’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

선우은실


   intro. 시점(point of view)의 문제

   ‘내가 그렇게 말했다’와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어떻게 다른가.

   하나는 일인칭 서술, 하나는 삼인칭 서술이다. 두 문장이 하나의 상황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할 때, 이 두 문장이 지니는 차이는 단지 그뿐일까? 전하려는 상황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 주어가 달라졌을 뿐일까? 나는 이 글에서 두 문장에 의해 이야기된 것이 ‘다른 것’임을 주장하려고 한다. 두 문장에서 갈음된 것은 ‘주어’에 불과해 보이지만 이는 단순히 ‘누구’가 아니라 ‘시점(point of view)‘의 차이에 따른 태도의 변화를 내포한다. 해당 발언을 하는 발화자의 관점에 의해 사건이 판단되고 해석되어 전달된다는 사실은 인물의 교체가 아니라, ‘시점’의 측면에서 볼 때 인물 간 가치관의 차이 이상을 함의한다. 특정 문제의식을 어떠한 캐릭터의 해석을 경유해 말할 것인가(‘나는~’) 혹은 보다 객관적 진술이 가능한 서술자를 설정하여 어떤 전망 내지는 태도를 강조할 것인가(‘그는~’)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물과 서술자의 말과 태도가 곧 작가의 그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말하게끔 하는 서술자를 통해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는가 하는 점은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현실을 되비췄을 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때 ‘필요한 것’이란 ‘결핍된 것’과 교집합을 이룬다. 이때 ‘(결핍된) 필요한 것’이란 그저 비어 있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어 있으나 다른 마땅한 것으로 채워져야 할 비어 있음이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거나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채워질(해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식의 개선이나 해결이 필요하기는 하며, 그렇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 있다는 데 방점이 찍힌다. 즉 현실의 결핍은 완전하게 해소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결핍된 것을 이러한 식으로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시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만약 현실에서 처리될 수 없는 어떤 공백이 서사의 ‘시점’을 통해 제안될 수 있다면, 서사가 지닌 현실에 대한 허구성 내지는 환상성은 바로 이 공백에 대한 하나의 안(案)을 제안하고 보여 주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최근 서사에 대한 여러 비평적 제안들, 가령 페미니즘 서사나 퀴어 서사에 대한 독해 또는 돌봄의 정치, 포스트 휴머니즘적 접근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문학의 허구적 자율성’ 내지는 ‘허구적 장치로서의 문학’의 문제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서사적 요소의 설정을 통해 드러나는 태도로부터 우리가 어떠한 현실을 요청하느냐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大)서사 시대’의 삼인칭 말하기와 당사자성의 확장

    피터 브룩스는 최근 저서1)에서 서사가 남용되고 때론 오용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서사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방법과 관점임을 강조한 바 있다. 오늘날 서사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서사는 전 과정에 ‘어떻게’라는 방식으로 서사가 개입함에 따라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편향된 논리를 구축할 수도 있는 인지의 도구로 이해된다. 때문에 우리는 서사의 활용과 이해를 더욱 면밀한 차원에서 살펴 나가야 한다. 나는 피터 브룩스의 이러한 주장을, 서사가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자신을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과정에, 또 사회를 사회라고 인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미묘한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쓰인 것이 중요한 만큼 읽는 것이 중요하고, 읽은 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느냐 또한 중요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허구적 장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곧 서사가 현실과 교차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를 승인하는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즉 서사라는 ‘재현된 현실’은 그것이 현실에 토대를 두되 ‘서사’라는 규칙 위에서 다시 구성된바 ‘형상화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실재 현실에 기반한 관념적 현실, 달리 말하면 허구적 세계다. 그것은 곧 현실이 아니지만, 감춰진 현실의 일면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서사는 현실이 아니며 현실이다. 

   이러한 문학적 재현의 성질에 착안하여 작품이 ‘보여 주는 현실’이 얼마나 잘 재현되었는가를 비평의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아 왔다면, 이제는 그것이 ‘서사’라는 점을 좀 더 분명하게 인지하여 약간 다른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재현의 양태 그리고 장면과 사건 자체에 대한 재현의 범주를, 서술의 측면으로 넓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문학에서 시점이란 해당 사건을 보여 주는 문학의 메타적 태도를 보여 주는 장치일 수 있다. 이에, 서술자의 설정 문제를 중심으로 작품을 읽는다면 어떤 이야기가 가능한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서술자는 현실을 해석하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벤야민식의) ‘이야기꾼’의 역할을 담지한다. 이를 설명하고자 함에 서사화와 자아의 구성에 대한 피터 브룩스의 논의를 조금 더 참조해 보자. 피터 브룩스는 서사화하는 것이 곧 자아를 만든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2) 그러한 입장에 따르면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자아를 구성하고 세계를 체험한다. 자아는 주체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로 존재하며 그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어화할 때 비로소 주체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이야기’함으로써, 즉 언어화된 형태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언어화하느냐에 따라, 즉 어떤 서사로 펼쳐 놓느냐에 따라 현재 자신의 자아 및 그것을 구성하는 외적 요소(세계, 타인)와의 관계 설정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새로 쓸 수도 있다. 이는 종내 스스로가 써 내려가는 현실 인식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서사이고 이 과정에 개입되어 있는 외적 요소를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다뤄 나가는지를 보여 주는 포괄적 형태의 ‘서사’인 바, 곧 자아의 확장적 메타 인지의 결과다.

   이렇듯 자아가 서사에 따라 구성되고 발견되고 돌출되는 것이라면, ‘서술자’ 또한 그러한 자아-서사의 일부일 수 있지 않을까? 자아로서 서술자를 이해하고자 할 때, 이는 작가나 인물이 아닌 ‘전달자’, 일면 이야기꾼의 자아를 지닌 서사적 장치이며, 인물이 아닌 ‘이야기’를 중개하며 상정된 발화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자아’를 확장하는 서사적 장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물이나 사건 자체를 통해 서사의 ‘재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서술자’에 의해 이것이 중개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즉 우리가 문학이라는 ‘상정된 현실’ 및 ‘상정된 자아’를 통해 현실을 다시금 통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서술자에 의해 재현되는 세계에 대한 이해 속에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작품이 곧장 세계인 것은 아니나 우리는 그것을 중개하는 서술자적 자아를 ‘통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내러티브화한다. 그러한 영향 속에서 우리는 서사를 통한 전망 따위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삼인칭 서술자의 약진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최근 서사에서 이야기 전달자로서 삼인칭 서술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정주아의 논의에서 충분히 이야기된 것처럼, 비교적 근래의 문학에서 두드러지는 형태는 삼인칭이 아니라 일인칭이었다. ‘~해도 괜찮아’류의 에세이가 부쩍 쏟아져 나왔던 2010~2020년대의 현상에서 두드러지는 일인칭 시점의 약진을 정주아는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해석되고 제한되는 특징을 삶의 태도로 기꺼이 수용하려는 추세”3)로 본다. 정주아의 이러한 논의를 참고하면 일인칭의 약진은 총체적인 차원에서 문학이 진리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믿음이 더는 불가능해진 시대상을 징후적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소설적 ‘나’를 에둘러 보다 큰 차원의 공동체적 믿음을 갈구하고 실현하고 그 실천의 가능성을 갈구해 내는 것이 더는 불가능하다면, 저마다의 ‘나’의 “시계(視界)”4)를 통해 역사를 재조립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활용한 일인칭 시점의 소설은 그러한 시대 상황에 대한 정당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작가의 구속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서 정주아는 재현의 장르로서 소설의 성격을 되짚는다. 즉 ‘괜찮지 않은 현실’과 ‘괜찮다’고 말하는 소설적 ‘나’의 대립이 곧 소설이라는 양식과 작가 의지가 대립하는 것이라 볼 때, 이때의 ‘나’(작가의 의지와 소설적 양식의 의무가 결합된 존재인)를 통해 그 재현의 윤리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5)


   일인칭의 약진 현상과 그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작가/인물 간 일치에의 요구 및 그에 따른 재현의 정치성과 속박에 대한 이러한 정주아의 논의를 되짚을 때, 최근의 소설들은 시점의 전환을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강구하고 있는 듯하다. 앞서 나는 최근 소설에서 삼인칭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삼인칭 자체가 새로운 서사적 시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노동, 환경, 젠더 이슈와 같이 현실의 주요 사안들을 다룸에 있어서 삼인칭 서술자의 ‘발화 방식’ 자체는 특이점을 지닌다. 이에 최근 소설을 중심으로 삼인칭 발화의 형식 전환의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노동소설 삼인칭의 서술자적 자아-박지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최근 박지영 소설의 일련의 행보는 이른바 ‘노동소설’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민음사, 2023)에 수록된 여러 편의 소설이 그렇거니와 『테레사의 오리무중』(자음과모음, 2024)에 묶인 세 편의 작품 역시 ‘노동’이라는 주제 의식을 전면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노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소설에서 삼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 삼인칭이 인물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느낀 감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까지를 해설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올드 레이디 버드」의 진술 형태를 들 수 있다. 이 소설은 박물관에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영우’가 학예사인 ‘정’과 친해지고자 하나 이른바 ‘정규직의 세계’에 그가 발들일 수 없는 절대적 기준이 있음을 경험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며 후반부에서는 다소 다른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특히 전반부에서 두드러지는 삼인칭 진술이다. 전반부에서 영우의 ‘비정규직으로서의 나’에 대한 진술은 다음과 같이 언어화된다.


   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을 죽은 고양이는 영우에게 일깨워주었다. 자신은 불행하게 로드킬 당한 죽은 고양이 앞에서 죽은 새의 이야기를 하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떤 모함의 의지를 담아. 그러니 영우는 애초에 공평하지 못한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공평한 고양이가 있는 세계에 자유로운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공평한 일이었다. 공평한 세계는 그런 식으로 유지될 것이다. 영우 같은 사람을 출입 금지시키는 것으로. 그것이 영우가 느끼는 공평함의 정당성이었다. [강조-인용자]6)



   ⅱ

   작별 인사가 여러 번 필요할 만큼 끝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서 영우는 더 완벽한 시그널을 기다렸지만 그런 완벽한 시그널이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도 아니었다. 제대로 시작한 적 없어서 끝낼 수도 없는 것,영우의 진짜 삶은 늘 그 사이에 존재했다. [강조-인용자]7)



   ⅲ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핵심은 그것이었다. 아주 작은 차이가 만드는 고양이가 있는 세계의 안과 밖에 대해서, 애초에 확연히 다른 사람에게는 느끼지 못할 어떤 패배감과 의혹이 영우에게 주경을 선택하게 했다. [강조-인용자]8)



   소설의 1부에 해당하는 박물관 에피소드에서, 영우는 학예사 정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자신 역시 고양이를 좋아하는 ‘척’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이 우연히 박물관 정원의 길고양이를 차로 치는 모습을 목격한 영우는 그 현장의 목격자가 됨으로써 정과 사이가 틀어진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영우는 ⅰ, ⅱ와 같이 상황을 판단한다. 물론 영우의 캐릭터가 자기 객관화에 능하며 신속하고 정확하게 결론을 내리는 성격을 지녔을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일까? 영우의 상황과 내면을 표방하는 듯한 두 진술은, 영우의 내면 자체를 이야기한다기보다는 영우에 대한 태도를 내보이는 것 같다. 가령 ⅰ에서 영우가 느끼는 ‘공정함’이 계급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선에서 작동하는 기준이라는 점은, 영우에게 불편함이나 난처함으로 ‘느껴졌을’지는 몰라도 영우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즉각적으로 얻는 통찰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마찬가지로, 계약이 연장되지 않아 일을 그만두게 된 영우가 정과의 화해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좌절된 상황에 대해 ⅱ와 같이 진술하는 것은 어떠한가. “제대로 시작한 적이 없어서 끝낸 적도 없다”는 것은 영우의 성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 진술이 곧 인물의 성격인 것은 아니며, 인물이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미묘한 화자의 차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그 뒤에 이어지는, 그녀의 삶이 “그 사이에 존재했다”는 말로 하여금 시작과 끝에 대한 구절은 보다 서술자가 진술해 주는 객관적 판단처럼 읽힌다.

   한편, 퇴사한 영우가 임시 보호하던 고양이 테루를 주경에게 입양 보내고는 그녀의 돌봄에 끊임없이 관심(의심)을 표명하는 서사의 후반부 내용을 고려하여 ⅲ의 인용에서 영우가 테루의 입양자로 주경을 선택한 까닭을 밝혀 주는 구절을 보라. 이는 영우가 종종 사람들로부터 패배감을 느꼈다는 ‘사실’ 이상의 해석이 가미된 진술이다. 실은 테루를 보고 싶어 해서 자신에게 그렇게 연락해 온 게 아니냐는 주경의 말에 뒤늦게 자신이 갈구하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듯한 소설의 뒷이야기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영우가 스스로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한 채 주경에게 특정한 행동을 요구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므로, 시간적으로 그보다 앞에 해당하는 위의 인용에서 영우 행동의 이유를 아는 자는 서술자적 자아뿐이다.

   그런데 이렇듯 인물의 내면 이상의, 해석적 태도를 보여 주는 삼인칭 진술은 왜 쓰였는가? 이러한 진술의 형태가 서사적 규칙(서술자와 시점 문제)에 부합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넘어서 이러한 서술자적 개입이 필요한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인칭 진술이 ‘나’의 관점에서 세계를 재구성하고,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진술을 보편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정치성을 획득한다면, 삼인칭 진술은 그에 역전된다. 삼인칭 시점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표방함으로써 보편적 ‘나’의 개념으로 ‘인물의 개인성’을 확장한다. 그런데 위에서 예로 들었던 박지영 소설의 구절을 보면, 삼인칭 서술자는 어떤 면에서는 그 객관적 지위에서 스스로를 다소 내려놓는 듯 보인다. 명확하게 어떤 인물(또는 작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포 독자와 내포 작가를 포괄한 서사의 참여자 가운데 누군가의 관점을 통해 ‘인물’을 재해석하고 그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드러내는 것 같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이는 삼인칭 서술자가 인물에 대한 일련의 태도를 내비침으로써 인물과 흡사한 자아를 드러낸 셈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왜 그렇게 될 필요가 있었는가? 앞선 인용에서 서술자가 영우의 삶의 일부를 해설해 주는 구절의 내용을 다시금 상기해 보자. 서술자의 태도는 영우가 홀로 처해 있는 곤란한 상황이 그녀 자신에 의해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기울어진 공정에 근거하고 있다는 보다 높은 차원의 진실을 드러낸다. 영우가 주경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모습이 “패배감과 의혹”의 동질감에 의한 것이란 점도 그렇다.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영우의 행위에 서술자의 간접적 주석이 달림으로써 영우의 입장은 조금 더 양해된다.

   이는 일인칭을 통해 개인적 정치성의 보편적 확장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달리 말해 보편의 정의로운 전망 혹은 진리가 추구되기 어려운 현실의 상황 속 과감한 ‘객관적 진술’에의 시도다. 이때 ‘어려운 현실의 상황’이란 궁극적으로는 인물을 통해 혹은 인물을 진술함으로써 획득되는 ‘상정된 자아’에 개별적 자아를 의탁함으로써 공통의 ‘나’를 형성하고 그로써 총체적 전망을 획득하는 것이 어려워진 상황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발화로서 ‘자아’의 다발성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치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이 시점에 보편적 자아로서 삼인칭을 시도하는 것은, 삼인칭을 통해 ‘태도’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그 규칙을 다소 위반하는 것일지라도 오늘날 객관적 전망을 타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돌봄 소설 삼인칭의 거리 두기-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를 중심으로

   노동이라는 테마가 돌봄이라는 주제로 확장되고 있으며, 삼인칭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박지영의 소설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장례세일」 등에서 또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 소설들에서도 얼핏 서술자적 자아가 엿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노환 및 죽음을 상품화하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 교집합을 지니고 있는 두 소설에서 아들 인물은 표면적으로 자신이 아버지를 ‘팔아서’ 소소한 밑천을 마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서술자적 자아는 그들이 자식으로서 부친을 부양하는 과정에서 노동으로서 소모되는 인간성에 대한 힌트를 부분적으로 부여한다. 가령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에서 아들 강선동은 형제들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돌봄노동을 떠맡은 것에 대해 “자신과 남을 돌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착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착함은 양보가 아니었다. 희생이 아니었다. 투쟁하고 악착같이 싸우고 탐욕스레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9)는 성찰이 뒤따른다. 이는 강선동의 생각이나 내면에 대한 노출처럼 보이지만, 그에 앞서 ‘착함’에 대한 가치 판단이자, ‘강선동의 착함’이 얼마간 그의 생존전략임을 이해하게끔 하도록 이끄는 가치 판단에 가깝다. 이러한 돌봄–노동소설에 대한 삼인칭 진술은 ‘세일즈하는 돌봄노동’이라는 결과가 돌봄 수행자에게 어떤 미덕의 정당성을 요구하느냐는 질문 및 그에 대한 태도를 내재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노동’이라는 현안이 인물의 ‘돌봄’이라는 행위를 통해 재현됨으로써 서사에서 노동/돌봄 등과 같은 범주가 확장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삼인칭 서술자적 자아를 통해 현시점에 결핍되어 있는 ‘총체적 진리와 대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이 과감한 시도가 돌봄/노동이라는 결합된 주제를 재현하는 데 차용되고 있다면, 이는 실재하는 현실에서 돌봄과 노동 문제가 더는 분리가 불가능한 사안이며 그러한 사안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재현의 주제 및 재현의 서술 형태를 고려할 때, 노동/돌봄의 문제는 또 다른 전 지구적인 문제에 대한 주제로 확장될 수 있고 이때 사용되는 삼인칭의 또 다른 진술의 효과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소설에는 함께 수영을 배우는 희주, 주호라는 두 청년 인물이 등장해 기후 위기 시대에 각각 자신에게 ‘생존’ 내지는 ‘화를 낼 만큼 중요한 것’의 의미를 살핀다. 이때 기후 위기라는 전방위적 위기의 감각은 노동 현실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대에 자신과 타인을 헤아린다는 의미의 확장된 차원의 ‘돌봄’을 호출한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속에 직결되는 모두의 문제’라는, 기후 위기라는 현안에서 소급되는 ‘개별 인간의 존속 행위’다. 희주가 생존 문제를 직면하면서 떠올리는 것은 성과주의와 인간 소외에 대한 경험이다. 학창 시절 공부에만 매진했던 그녀는 수능이 끝난 직후 자살한 친구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이제는 친구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두 죽을 수도 있는 시점에, 그녀가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애정 어린 말은 이런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잘하면 30년 뒤에.”10)


   한편 주호가 기후 위기를 통해 떠올리는 문제는 노동과 관련한 것이다. 유능한 직원이었던 주호는 작업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 ‘카샤’를 떠올린다. “안전을 지키면 그만큼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11)기 때문에 공장의 관계자들은 안전수칙과 관련한 것들을 묵인했다. 카샤가 죽은 뒤에도 멈추지 않는 공장에 주호는 “이건 아니죠.”12) 한 마디를 던짐과 동시에 권고사직에 가까운 처분을 받는다.

   이러한 두 사람의 사례는 노동, 성과주의, 인간 소외와 같은 문제가 더는 분리된 차원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지점에서 한데 엮여 있음을 드러낸다. 각기 다른 계급, 자본, 젠더를 지닌 이들이 저마다 개별적으로 겪어 나가는 위기를 공통적으로 상정된 문제인 ‘기후 위기와 생존’ 문제에 투영해 볼 수 있게 된 현실이 돌출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사람이 수영 강습생으로 만나 서로 마지막 순번을 도맡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타인의 분노를 통해 모종의 연대라는 해결책 또한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영 강사는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 두 사람, 특히 눈치가 없는 주호에게 분노를 쏟아 내기에 이른다. 배움이 늦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주호는 그에게 다가가 “선생님, 괜찮으세요?”13) 하고 묻는다.

   만약 이 장면으로 하여금 이 소설이 ‘공통의 의제’ 아래 개인적 문제를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하고 나아가 그들이 저마다 다르게 이해하는 개별적 공통의 의제를 공동의 협력으로 보듬어 나갈 수 있음을 지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이러한 ‘장면’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삼인칭 서술자는 수영 강사의 태도에 대해 변명의 여지를 줄 수도, 그의 내면을 보여 줄 ‘지위’를 가지고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수영 강사가 나름대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과정에서 주호에게 화를 냈으며 계약직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 전달됨으로써 그에게도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단서를 남기는 데 그친다. 요점은, 이 소설의 경우 삼인칭 서술자의 자아가 박지영 소설에 비하면 완전히 뒤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사가 말하지 않은 것 또는 돌출하지 않은 자아라는 요소는, 그것이 ‘물러나 있음’에 주목할 때 역으로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자아’로 재독될 수도 있다. 즉 삼인칭 서술자의 태도 측면에서 접근할 때, 우리는 서사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을 읽어 낼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객관성을 띠고 인물 및 세계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내릴 수도 있는 삼인칭 서술자가 삼인칭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소설의 삼인칭 서술은 철저히 인물을 중개하는 객관적 시선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물을 ‘통해’ 서술자의 태도를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서술자는 인물의 내면과 생각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전말을 진술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서술자가 제시하는 정보에 독자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이입할 때 그 추적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입’이라는 장치를 고려한다면 이 소설의 서술자가 인물을 ‘통해’ 어떠한 사실들을 전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물들이 다른 인물 또는 어떠한 장면을 통해 자신들의 경험을 이입하고 고백하고 재구성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ⅰ

   주호도 꿀벌 실종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 꿀벌 무리와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체인처럼 고리로 연결되어 있고, 그 고리 끝에 자신이 매달려 있다. 나는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 주호는 무슨 일이든 거기에 자신이 얼마나 엮여 있을지 생각해보게 됐다. 어느새 습관이 됐는데 자기가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죄책감을 느끼기 위함인지 죄책감을 덜기 위함인지 헷갈렸다. 한편으론 그 헷갈림 속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14)



   ⅱ

   희주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환경 문제에 집착하게 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처음 시작이 어떻든, 또 현재의 강박이 어떻든 환경에 관심을 갖는 일은 희주가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줬다. (···) 희주는 화내야 하는 일과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을 정했다. 고래와 펭귄이 죽고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지구가 죽어가는 일에 화를 내자. 어차피 인간은 죽는 건데. 다 같이. 희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15)



   인물들은 기후 위기와 관련한 기사 또는 다큐멘터리를 본다. 가령 꿀벌이 실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해수면이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도가 그렇다. ‘그것을 보았다’라는 사실에 대한 진술은 객관적이다. 서술자는 그것을 보는 인물에 대해 추가적인 정보를 주지는 않는다. 이를 보여 주듯 위의 두 진술에서 주호와 희주는 각각 자기가 어떤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되 그 의미를 알지 못 한다(“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환경 문제에 집착하게 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러한 ‘모름’의 상태는 서술자가 인물의 앎과 깨달음에 대해 서술자적 자아를 통해 적극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발 물러서서 살펴보면 서술자가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가치를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서술자는 인물이 벌, 고래 등을 봄으로써 어떤 상태에 대한 자각을 촉구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어떤 대상물을 대하는 인물의 모습이 서술자에 의해 중개됨에 따라 그것을 그들이 어떻게 다뤄 나가고 있는지에 대한 특정 관점의 의도가 드러난다. 이를 이해한다면, 생존을 위해 수영을 배운 두 사람이 수영을 통해 모두의 죽음과 자신의 생존 앞에서의 연대 가능성을 넌지시 성찰하는 행위가 바로 이러한 삼인칭 서술자가 부여하는 객관적 거리감과, 그것을 채우는 인물의 개별적 관점에 의해 가능해짐을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업무 실적에 대한 압박에 의해 그랬을지도 ‘모를’ 수영 강사에게 화내는 대신 ‘괜찮냐’고 물음으로써 ‘모르는 채’ 자기 경험을 개입시켜 그를 위로하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outro. 삼인칭의 엄정함과 일인칭의 삼인칭화: 최은영과 문진영을 되살피며

   최근 삼인칭 소설은 우리 시대의 현안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서술자적 자아를 전면화함으로써 총체적 전언을 시도하며, 또는 적극적으로 물러남으로써 그 숨긴 태도를 읽도록 요청한다. 이처럼 그 삼인칭 서술자의 활용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전지적’으로 상정된 서술자의 시점과 발화 및 그 존재를 빌려 지금 우리에게 엄정하게 다뤄져야 할 결핍의 지점들에 적극적인 대안을 만들어 내고 또 그러한 개별적-보편적 자아를 의탁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거듭 보내고 있다는 점을 읽어 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여성 서사에서의 삼인칭 및 일인칭의 삼인칭화에 대한 양상이다. 후속 작업에서 섬세하게 다룰 것을 기약하며 최은영과 문진영의 단편 소설과 삼인칭/일인칭의 작동 방식에 대해 짧게나마 언급해 두고자 한다.

   앞서 공현진의 소설이 일종의 연대 가능성을 통해 지구적 차원의 돌봄을 서사의 폭넓은 주제 범위에서 다루는 것처럼, 최은영의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문학동네, 2023)은 여성의 허스토리(herstory)로서 여성 관점의 역사화의 작업에서 돌봄이라는 의제가 포괄적으로 사유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사위 제임스가 출장을 간 사이 작은딸 우경을 보러 홍콩에 간 기남은, 손자 마이클과 그 집의 헬퍼 제인과 인사를 나눈다. 기남이 딸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기남이 소환하는 자신의 여러 정체성이다. 기남은 자녀와의 만남을 통해 어머니로서의 자신을 성찰하는 동시에 자신을 버렸던 부모에 대한 기억을 중첩시키면서 여성 자녀로서 자기 삶을 회고한다. 한편 제인을 통해서는 아홉 살 때부터 식모살이를 했던 자신의 과거를 다시 떠올린다. 기남의 이러한 회고를 능숙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시점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삼인칭 서술자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소설에서 삼인칭 서술자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기남이 현재 자신과 관계 맺는 이들을 통해 자신의 역사를 회고함으로써 그것을 다시 쓰기 시작할 때, 그 모든 과거가 부끄러웠다는 그녀의 고백16)은 마이클의 ‘부끄러워도 된다’는 말에 의해 용서받는 듯하다(“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17)). 이때의 삼인칭 서술자는 이 장면을 다만 보여 주고 있을 따름이지만, 바로 그 관점이 가진 객관적 지위를 고려해야만 한다. 우리는 기남의 자기 역사에 대한 재조명과 그로부터 찾아드는 부끄러운 감정이 더는 그녀만의 짐으로 남아선 안 되며 그것을 더욱 다정하게 보듬어야 한다는 엄정한 삼인칭 진술의 태도를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더는 ‘개인적 관점’의 주관성에 대한 정치적 비평이 아닌, 삼인칭에 의한 공정한 시선 속에서 허스토리에 대해 객관성을 부여하고 있는 진술과 비교할 때, 문진영의 「내 할머니의 모든 것」(『최소한의 최선』, 문학동네, 2023)은 그 비슷한 태도에 대한 다른 작법적 형식을 보여 준다. 이 소설은 손녀인 ‘나’의 일인칭으로 전개된다. 소설은 미혼인 삼촌의 죽음으로 인해 오래전 이혼 후 집을 떠난 삼촌과 엄마의 엄마, 즉 외할머니와 재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녀가 없는 삼촌이 사망하게 되어 그의 재산 상속의 1순위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녀와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접선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문제는 소설의 주요 사건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외할머니의 삶이며, 이것이 엄마가 아닌 ‘나’의 발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데 있다. 이 소설이 ‘나’에 의해 할머니의 삶이 어떠했다고 진술되는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 미루어 볼 때, ‘나’는 엄마에게 전해 들은 (혹은 할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넌지시 짐작되는) 이야기들을 자기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말하는(telling) 형식을 취한다. 할머니와의 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 줄(showing) 수도 있으나 일인칭 화자가 다른 인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로 또 다른 인물의 삶을 성찰하는 형식은 지극히 그 진술의 주관성에 대한 해석을 요한다.

   앞서 최은영의 소설에서 ‘여성 젠더의 역사’에 대한 ‘개인적 견해’로서의 주관적 진단이 아닌, 보다 완고한 이해를 도모하는 객관적 태도로서 삼인칭이 작동하고 있음을 짚었다. 그러한 엄정한 시각의 정치성을 이해할 때, 문진영의 소설에서는 어째서 손녀의 일인칭 시점을 통해 조모의 서사가 재기술되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 소설에서의 일인칭은 사실상 모녀, 조모 손녀의 관계를 모두 포괄하는 재진술의 형태를 띠며, 전달자 인물이 곧 삼인칭 서술자적인 방식의 거리를 확보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이때 일인칭 서술자가 손녀라는 점 즉 모계 혈통의 인물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모계 서사에서 세대 차이가 나는 각 여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과 직접적인 관계성을 가진 인물을 통해 그러나 그들 사이의 공백을 통해 관찰자적인 방식의 접근이 가능하며 또 필요함을 보여 준다. 이로써 모계 여성에 의한 여성 역사의 서술에서 한 세대를 건넌 관계 양태는 직계에 비해 객관적 관점을 획득할 수 있고, 또 그러한 거리감으로부터 ‘여성’이라는 동질성을 강조하는 대신, 다른 여성의 삶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한다.


*


   이렇듯 최근 서사는 현실의 독자가 개별적인 자기 삶을 허구적 인물의 이야기에 투영함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문제로 확장시킬 수 있게끔 시도하고 있다. 이것이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해 왔던 ‘서술자’의 문제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우리는 일련의 문학이라는 허구적으로 상정된 세계를 통한 ‘당사자 되기’의 시도가 꼭 당사자 자신 내지는 일인칭이 아닌 형태로도 시도될 수 있음을 논의해야 할 것 같다. 당사자에서 멀어지는 서술의 방식, 즉 삼인칭을 통한 서술자가 자아를 드러내는 형식으로 그 보편성과 일종의 ‘진리’에 해당하는 공통의 답을 제안하려고 하는 과감한 시도를 놓쳐서도 안 될 것이며, 삼인칭 서술자의 객관성과 그 진술의 단호함과 엄정한 관점을 강조하는 것 또한 함께 살펴야 한다. 나아가 여성 서사의 서술자의 개입 양상에 대한 사례를 상기할 때, 일인칭을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방식의 진술을 하도록 만들 것이냐에 따라 관찰자적인 태도에서 여성 젠더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시도를 읽어 볼 수도 있다. 문학이 구현하는 당사자성의 범주는 ‘서술자’의 태도를 읽어 내는 것으로서 이렇게 확장될 수 있으며, 그 정치성 또한 다르게 의미화되어야 할 때다. 


1) 피터 브룩스, 『스토리의 유혹』, 백준걸 옮김, 앨피, 2023.
2) 피터 브룩스, 위의 책의 1장 「이야기가 넘치다: 서사에 매혹된 세계」를 참조.
3) 정주아,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56쪽.
4) 정주아, 위의 글, 60쪽.
5) “글과 작가의 동일시 현상이란 어찌 보면 소설 본래의 허구적 성격과 멀어지는 대신에 생겨나는 일인칭 글쓰기 특유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힘이 수많은 ‘나’들을 정치적 주체로서 발언하게 만들고, 오늘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연대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보다 좀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변화는 따로 있는 듯하다. 바로 소설의 창작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대상의 재현과 상대화 단계에 대한 반성이다.”(정주아, 위의 글, 67쪽)
6) 박지영, 「올드 레이디 버드」, 『테레사의 오리무중』, 자음과모음, 2024, 101쪽.
7) 박지영, 위의 글, 111쪽.
8) 박지영, 위의 글, 115쪽.
9) 박지영,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이달의 이웃비』, 민음사, 2023, 59쪽.
10)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소설보다 여름』, 문학과지성사, 2023, 33쪽.
11) 공현진, 위의 글, 20쪽.
12) 공현진, 위의 글, 21쪽.
13) 공현진, 위의 글, 36쪽.
14) 공현진, 위의 글, 18~19쪽.
15) 공현진, 위의 글, 32~33쪽.
16)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그 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 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최은영,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문학동네, 2023, 318쪽)
17) 최은영, 위의 글,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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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우은실
  • 2024-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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