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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y화하면서 분열

  • 작성일 2024-08-07

   x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y화하면서 분열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이미상 「티나지 않는 밤」을 중심으로

선우은실


   intro. 분열된 언어와 여성의 욕망

   여성은 어떻게 욕망하는가. 여성의 분절적 언어성이 곧 사회 안에서의 여성인 ‘나’를 인식하고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때, 이는 여성 젠더가 사회에서 어떤 식의 요구를 욕망으로 전유해야만 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분열이 발생하는지를 파악하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이에 여성이 욕망을 표출하는 것과 유비적 상관성을 지니는 듯 보이는 여성적 발화의 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아마도 이 산문집을 질투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에요. 얼마 전에 산문을 발표했는데 교정지에 편집자가 디자이너에게 보내는 메모가 함께 스캔되어 있었다. ‘글이 너무 파편적이라 문단을 나눠야 할 것 같아요.’ 확인사살 감사합니다. 파편이 내 삶의 숙명 같아요. 엄마로 시인으로 작가로 가사노동자로 선생으로 살면서 매일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게 숙명이라면 파편의 대마왕이 되고 말 거야.


   모두가 침묵할 때 함께 침묵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러면 내가 살 것 같아요.


   (···)


   뭔 소리 하는 거야? 하고 느끼셨다면 그 생각을 의도한 게 맞습니다만. 자세한 얘기는 하기 싫어서요. 공감받는 건 정말 별로니까.


   너도 사실은 네가 누군지 알기 싫잖아. 나도 내가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고 함부로 정의당하기도 싫어.1)


   백은선은 에세이에서 “파편적”이라 인식되곤 하는 자신의 글쓰기가 곧 자신의 정체성의 분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자필한 바 있다. 이는 기실 하나의 글에서조차도 다변하는 그녀의 쓰기의 ‘형식’에서 엿보이는 특징이거니와―어떤 문장의 톤이 거칠어지거나 격정적으로 치달았다가 금세 시무룩해지기도 하고, 다듬어진 것처럼 보였다가도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산문이었다가 시가 되었다가 사진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그녀의 시에서도 익히 잘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파편성’은 단순히 에세이와 시의 발화가 뒤섞여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여러 방식으로 분절되고 파편화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음에 대한 인지가 ‘분열적 언어’로 표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교컨대 이는 통일되고 일관된 ‘정제된 언어’로서 자기를 규정하는 일이 얼마간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환상성이 합리성을 자처하는 ‘남성적’ 언어가 (그 자신과 타인까지도) 지시하는 무결성의 환상에 기대어 있음을 보여 준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자기를 지시하는 언어가 파편적이고 분열적인 방식으로 직조되어 자신을 구성하고 있음을 인지함으로써 곧 ‘분열적 언어’ 그 자체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관점에 근거할 때, 최근 서사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이러한 언어 차원에서 다뤄 볼 수는 없을까? 여성이 파편화되고 분열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자각할 때 그러한 ‘자기 언어화’의 욕망은 외부적 억압과 그에 대한 내재적 재생산 및 저항의 모순을 둘러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가? 이때 욕망 또한 분열적 감각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여성들은 분열적 자기 정체화의 욕망을 어떤 식으로 경험하는가? 박서련, 이미상의 소설을 통해 ‘욕망-분열’의 처세의 양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1. 타인의 것을 적극적으로 자기화하면서 ‘분열’: 욕망이 거세된 자의 대리 욕망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이하 「게임」)은 독특한 형식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인물을 ‘당신’이라고 칭한다. 이때 ‘당신’은 누구인가? 아들의 사교 활동 및 사회생활을 위해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되게끔 만드는 것이 곧 자신의 욕망이라 믿고 자긍심을 가지는 듯 보이는 어머니인가? 분명 서사 속 (내포 작가라고도 할 수 없는) 서술자가 지시하는 “당신”은 어머니라는 인물 같아 보이지만, 제목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을 보면 이때 “당신”은 “아이”이거나 그에 준하는 독자로 읽히기도 한다.

   ‘당신’의 자리에 어머니-되기로의 욕망에 둘러싸인 여성 인물, 어머니-되기를 촉구하는 자녀 인물(및 남편 인물), 이를 관망하면서 어머니-당신에게 이입하거나 혹은 자녀-당신에 이입하는 독자라는 세 개의 층위가 세분화되어 있는 소설의 호명 방식은 이 사이에 가로놓인 있는 인물 및 인물과 멀지 않은 독자의 욕망을 헤아리는 데 긴요하게 작동하는 서사 전략이다. 특히 (아직은 불분명하게 느껴질) 어떤 ‘욕망’이 ‘어머니’ 표상을 중심으로 모아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에 서사 속에서 지칭하는 당신-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묘사하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 ‘당신’의 위치가 여러 레이어로 나눠져 읽히기는 하지만, 정작 서사의 전개 자체는 어머니 인물에 집중되어 있다. 이때 서술자의 위치가 자못 애매하다. 분명히 인물을 삼인칭으로 지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물에 대한 판단에서 완전히 물러서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술자의 묘한 위치 감각 때문에, 독자는 더더욱이 이 소설이 삼인칭으로 호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당신은~”) “당신”이라 불리는 인물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이렇듯 서술자의 판단 감각 위에 우리의 판정 기준을 슬쩍 올려 두며 인물을 평가한다. 이 소설이 “당신”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내보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소설 속 “당신”의 고백은 “당신” 자신이 해석한 자신의 내면에 해당할 텐데, “당신” 아이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이길 원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진다는 사실은 독자로 하여금 비판적 시선을 갖게 할지도 모른다. 가령 아이들 사이의 대화에서 엄마의 외모가 놀림의 원인이 된다는 걸 알고 난 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직후 “결혼했다고 긴장 푸는 여자들하고 달라서 당신이 좋”2)다는 남편의 말이 겹쳐지는 순간 그녀는 탈모 방지 샴푸를 구매하는 어머니-여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여성 인물이 욕망하는 것은, 자기비판 없이 그저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이미지화된 자녀와 남편에 대해 헌신적이고 영원히 늙지 않는 어머니인 것만 같다. 이러한 ‘어머니-되기’ 욕망을 인물이 자신의 내면 그 자체로 드러냈을 때, 우리는 그 욕망에 동조하는 입장이든 그것을 비판하는 쪽이든 불편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김미정에 따르면 “과장된 순응과 어리석음은 서술자와 독자는 알고 있지만 ‘당신’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 서술되듯 우리(독자)는 이 모습을 보고 모종의 불편감을 느낀다. 그 까닭은“‘당신’을 만들어낸 이 세계의 리얼리티가 곧 서술자-독자가 공유하는 그것이기 때문”3)이라고 김미정은 말한다.

   김미정의 이 해석을 떠올리며 소설의 내용을 되짚어 보자. 우선 “당신”은 자신의 모순을 정말로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당신”을 어머니 인물로 볼 때, 그녀는 자신이 자인하는 ‘좋은 엄마 되기’의 욕망이 그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을 충족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서술자에 의해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가끔 당신 아이가 되고 싶다”4)

며 슬쩍 흘러나오는 내면은 자신이 추구하는 ‘좋은 엄마 되기’의 욕망이 그 자신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향해 있지 않고 ‘자녀에게 바쳐지는 어머니상’에 있음을 드러낸다. 즉 그녀에 대한 발언을 자신이 원하는 것이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님을 균열적으로 인식한 결과로 볼 때, 인물의 자기 판단에 대한 이러한 진술은 분열적 해석의 지점을 지닌다. 

   한편 서사의 관건이라 할 수 있는, 좋은 엄마 욕망하기의 프로젝트의 대미는 아들을 ‘대리’할 ‘게임 하는 엄마’가 되는 장면에 있다. 게임 과외를 받는 그녀는 k대 남학생에게는 성추행을 당하는 한편 그 뒤에 새로 구한 s대 여학생으로부터는 그녀 자신의 가능성을 독려받는다. 그녀는 “당신의 몸이 아니라 당신이 실제로 해낸 일”에 대해 칭찬받는다. 그녀는 ‘엄마-되기’의 욕망에서 시작했으나 ‘여성-되기’로서의 경험이 중첩되어 가는 게임 과외를 지속하면서, 그녀가 게임 세계 안팎으로 사람들이 ‘여성’ 그 자체를 욕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게임을 못 하는 유저 일반을 여성화하는 사례로서 “혜지”에서 시작해 “김 여사”라는 멸칭을 청취하는 것을 거쳐, 마침내 그녀가 아이 대신 경헌이와의 게임을 대리해 주는 과정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욕으로 검열되는 것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소설의 초반에 그녀가 욕망했던 ‘어머니-여성 되기’가 실은 아이와 남편이 원하는 모습에 대한 대리 욕망이었음에 화자는 균열을 느낀다. 그녀는 게임을 통해 어머니-여성으로서 그 대리 욕망의 실천 속에 자기의 욕망을 발견해 나가다가, 결과적으로 게임에서 ‘엄마’라는 언어가 욕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목격하면서 급격하게 분열되는 형국을 맞는다. 이는 어쩌면 ‘어머니’와 ‘여성’ 사이에 하이픈이 주어져 있는 한 좌측 혹은 우측 가운데 어느 쪽의 욕망이 더 크게 작동하든지, 얼마간 그것이 ‘대리 욕망’의 자장 속에 있을 것임을 즉, ‘여성’은 과연 남성을 주축으로 삼는 대리 욕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당신’과 거리를 두어 그녀 자신의 욕망과 그녀가 대리 실천하는 욕망을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는 서술자와 독자로 인해, 그리고 서사 말미에 자신의 엇갈리는 대리/욕망의 종착점에 이르러, 우리는 ‘당신’이라는 명명 하에 분열하는 존재로 묶이고 만다. 소설 속 서술자가 온전히 객관적 서술자이거나 그녀를 옹호해 주는 서술자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니듯이, ‘당신’ 또한 ‘어머니’로서의 자신과 ‘여성’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항하는 욕망 속에서 위태롭게 자신을 다잡아  가고 있으며, 독자 또한 이러한 어긋나는 욕망의 확인과 실천의 서사 속에서 현실과 문학을 자주 교차하며 혼란을 느끼기 때문이다. 



   2. 자기의 욕망을 자기화하면서 분열: 여성이 ‘언어’를 얻을 때 일어나는 일

   - 이미상 「티나지 않는 밤」


   박서련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대리 욕망의 실천자’인 여성이 겪는 일종의 분열적 증상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면, 이미상의 소설은 그 분열의 ‘극복’이 아니라 이러한 분열 자체가 곧 여성의 욕망을 수행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독특한 사례다. 박서련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의 서술 방식 역시 특이점을 지닌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삼인칭을 유지하면서 ‘수진’의 시선과 내면을 따라간다는 점에서 박서련 소설의 삼인칭 시점과 비슷하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박서련 소설의 서술자는 소설 속 인물은 아니되 내포 작가라고 하기에는 보다 적극적인 가치 판단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의 이중 판단을 실천하는 내포 독자-서술자의 역할을 담지한다. 한편 이미상의 서술자는 기본적으로 삼인칭(서술자 A)으로 유지되고 있으나, 수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듣는다는 설정을 통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술자는 서술자 B이거나 미지의 캐릭터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 독특한 서술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소설에 개입한다. 


   ⅰ

   우듬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새 말을 기입하는 건 새 세계를 들여오는 일 엉뚱한 문장이 수진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누가 말을 걸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5)



   ⅱ

   모르는 단어가 점점 줄고 있었다. 수진의 어휘력이 향상돼서이기도 했지만 생활 반경이 협소한 게 더 컸다. 매일 가는 곳, 매일 보는 얼굴, 매일 듣는 소리. 서사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누구 죽이지 말고 되도 않는 반전 꾸미지 말고 움직이고 또 움직일 것! 핫팩이 식었다. (···) ‘획기적인 이동!’ 수진은 혼자 큭하고 웃었다. 만약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수진은 스스로 물었다. ‘어디로 갈까?’ 답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수진은 밤의 베란다가 미치게 좋았다. 일 밤 누려도 좋았다.6)



   위의 인용에서 기울임체로 드러난 구절이 미지의 인물/서술자 B의 존재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러한 불특정한 존재의 개입은 수진의 의식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문장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불쑥 끼어들 뿐만 아니라(ⅰ), 마치 ‘작가로 여겨지는 존재’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소설 세계에 진입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ⅱ). 정체가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인물로 생각하면 그만일 것 같은 이러한 발화에 구태여 서술자 B의 레이어를 덧대어 보려는 것은, 여성의 분열적 언어화와 관련해 박서련의 화자가 독자를 순식간에 인물로 끌어당겨 일치감과 이질감을 경험하게 했듯, 이미상의 소설 또한 그 낯설고 불편한 불일치의 감각을 현시하려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형식적 실험에 그치지 않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수진’이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자기 언어화하는 과정에 파편적으로 개입되는 서술자 B의 발화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로 하여금 마침내 ‘자기 언어’를 획득해 나간다는 이 소설의 내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소설은 사회적 약자로서 모멸적 경험을 겪는 수진이 (문자 그대로) ‘언어’를 획득하면서 자기의 언어-세계를 구축/획득해 나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서사 줄기가 가로놓여 있다. 하나는 수진은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의 원장으로부터 이른바 ‘부리기 좋은 사회적 약자’로 취급된 바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수진은 직장에서 자신을 “초대졸”이라 소개할 줄 아는 ‘수미’와 비교되며 임금으로 차별받는데, 훗날 수진은 수미로부터 초대졸의 뜻을 대충이나마 듣게 되면서 ‘동대학’이 “동국대 동이 아니라 같을 동이란다. 너도 어디 가서 기 안 죽으려면 알아”7)두라는 이야기까지 건네 듣는다. 이후 수진은 자신이 새롭게 알게 된 단어를 노트에 적어 나가기 시작하고, 그 시점에 위의 ⅰ의 인용에 해당한 서술자 B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서사 줄기는 그녀의 좁디좁은 원룸에 얹혀사는, 예술가라고 자신을 소개했으나 알고 보니 불법촬영범죄 전력이 있는 남자친구와 관련돼 있다. 점차로 언어를 획득해 나가는 수진이 “밤의 베란다”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을 눈치챈 남자는 ‘글 쓰는 그녀’를 모멸한다.(““우리 수진이, 집필 중이야?”/남자가 킥킥 웃었다.”8) 이 장면에 이르러 첫 번째 서사 줄기와 두 번째 서사 줄기가 마주친다. 곧이어 회식 자리에서 수진이 소설을 쓴다는 걸 알게 된 원장은 그녀에게 “취해 살지 말라”며 그녀의 위치를 거듭 확인시키며 그녀를 멸시한다.

   이제 수진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녀는 자신의 세계에서 이러한 억압자의 언어를 행사하는 이들을 몰아낸다. 조금 더 유비적으로 말하자면 억압자의 ‘언어’(질서, 구조)를 몰아낸다. 그러나 그 영향을 받음으로써 그렇다. 이 과정이 불현듯 수행되고 있었음은 그녀가 병원을 관두고 남자친구를 쫓아내는 장면에 ‘이르러서’가 아니다. 서술자 B가 그녀의 이야기에 메타적 관점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진행되었음을, 독자는 서사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야 알게 된 것뿐이다. 게다가 “로맨스에 의지하기보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한 방법이자, 미지의 여성과 동맹을 맺는 선택과 판단의 창구”9)로 선택되었다고 해석된 바 있는 수진의 소설 쓰기는, 그러므로 한 여성이 외부의 언어를 자기의 그것으로 환유하여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 그 자체이자 결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 소설 쓰기는 소설 속 캐릭터 수진의 행위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미 이 소설 자체로 제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언어가 확장되는 것의 메타적인 의미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이 글이 마치 수진이 쓰는 소설과 다름없음을 여러 겹으로 보여 주는 서술자 B의 개입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 역시 바로 이 때문이다. 타인의 언어에 지배되었던 수진이 점차로 자기의 언어를 자체적으로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그녀의 세계는 온전히 그녀의 언어로 구성될 가능성을 지닌다. 

   또한 이는 수진이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주체적 언어화와 무관하지 않은데, 이때 ‘소설의 서술자 B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다시금 가져와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서술자 B는 마치 미지의 인물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만약 이 소설이 수진이 ‘수진’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메타적으로 재구성한, 온전히 그녀 자신이 획득한 언어의 규칙으로 우뚝 세운 세계라고 한다면, 이 서술자 B는 이 소설을 쓰고 있는 ‘수진’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수진의 소설 쓰기의 형식이, ‘외부의 수진’(언어화 이후의 수진)과 ‘캐릭터 수진’(언어화의 과정을 거치는 수진)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둘은 완전히 분리할 수 없으나 완전히 일치시킬 수도 없는 불편한 일체감 혹은 결합된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열된 언어’ 그 자체로 제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서술자 B의 정체다.



   outro. 자기 언어화에 대한 욕망이 도달하는 곳, 분열

   ‘분열’은 여성이 자기를 구성하는 젠더 정치 및 그로부터의 저항하기 위한 일련의 실천들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구성하는 원리이거나 여성 그 자체일 수 있다. 여성이 남성 중심적으로 언어화되고 구조화되어 있는 ‘여성’을 대리 욕망하는 자장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며 우리는 때로 절망한다. 그러나 박서련의 소설이 보여 주듯 ‘대리 욕망’을 전면화하고 그녀의 삶을 독자의 시선에서 내레이션하는 서술자를 통해 우리는 이미 감각적으로 여성의 분열적 욕망 형태를 감지한다. 이로써 합일되고 일체된 형태의 ‘분열 없는 완전함’이 어떤 종류의 허구일 수밖에 없음을 어렴풋이 감각하고 있는 분열된 정체성의 존재들은, 자신을 규정하는 외부의 언어가 지닌 억압적 형식이 자신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알고’, 자기의 언어를 ‘만들어 나가고’, 그 언어로 세계를 ‘다시 쓸’ 수 있다. 이미상의 ‘수진’, 그리고 수진의 소설 쓰기로서 「티나는 밤」이 이것을 보여 준다. 이로써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어떤 깨달음의 지점에는, 언어는 나를 규정하는 외부의 구조-언어와 완전무결하게 떨어져 있을 수 없고, 그에 저항하며 도달하는 ‘자기 구축적 언어’의 세계 또한 완전무결한 형태로 구성될 수 없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여성의 자기 언어화를 향한 욕망이 분열적인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어떤 종류의 언어화가 ‘여성적 분열’과 같은 원리로서 구축된다는 이해로 나아갈 수 있음에, 언어가 지닌 분열적 성격을 토대로 ‘여성-당사자성’의 확장을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백은선, 「시와 산문 사이를 우왕좌왕하며」,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문학동네, 2021, 14~15쪽.
2)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16쪽.
3) 김미정,〈「여성 서사의 자긍심 :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민음사, 2022)/김유담, 『돌보는 마음』(민음사, 2022)〉,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285쪽.
4) 박서련, 앞의 글, 같은 쪽.
5) 이미상, 「티 나지 않는 밤」,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 157쪽.
6) 이미상, 위의 글, 166쪽.
7) 이미상, 위의 글, 156쪽.
8) 이미상, 위의 글, 166~167쪽.
9)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이미상의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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