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2
- 작성일 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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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2
김유림
김숨 「막차」
1. 거친 일상으로 질주
현대는 고-모빌리티1) 시대로 접어들었다. 전 지구를 하나의 네트워크 체계에 편입한 이동 매체와 지리적 활동 범위를 넓힌 교통수단의 역할로 인해 ‘이동’은 단순한 움직임을 넘어 현대인의 사회적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인식 틀로 자리 잡게 되었다.2) 김숨 작가는 70여 편의 작품을 통해 서민들의 곤궁한 삶을 재현해 왔다. 특히 이동 공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흔들리는 약자들의 실존 삶을 기계적 상상력으로 재현하고 있어 흥미롭다. 교통수단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인간과 기계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인간과 사물의 동일체 의식은 예술적 감응을 넘어 AI와 공존 시대, 새로운 사유 확장의 논거가 될 것이다.
「막차」3)는 가족의 일상사를 모티브로 모빌리티 수행 과정을 재현한 작품이다. 소설은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과 죽음을 모티브로 천변만화 같지만, 알고 보면 제자리를 돌고 도는 인생 여정을 다룬다. 서사는 부부가 고속버스에 탑승하면서 시작된다. 소설 장르는 사회 계층의 구체적 현실로 부각 되는 인간관계의 불합리한 조건과 그 이면에 내재한 문제들을 형상화하는 장르다.4) 「막차」는 개인 가족사를 다루고 있으나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화자 순옥 부부는 아들로부터 며느리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순옥은 기우뚱 가라앉는 배에서 뛰어내리듯 외출을 서둘렀고 남편은 경황없는 와중에도 바지를 다림질하고 손수건까지 다려 외투 주머니에 챙겨 넣고서 집을 나선다. 순옥은 남편의 행위가 눈에 거슬렸으나 굳이 탓하지는 않는다.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결혼까지 했을 정도의 시간을 함께 사는 동안 익숙하게 겪어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코드는 뺏대요? 코드를 빼두는 거랑 꽂아두는 거랑 전기세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밥솥 코드는 뺐던가. 하루 이틀 비울 것도 아니고, 집을 나서기 전에 두루 둘러보지 않은 게 그녀는 뒤늦게 후회되었다. (13쪽)
“어제오늘 손님이 달랑 한 명뿐이었다고요. 그것도 파마 손님이 아니라 염색 손님요. 그깟 염색을 해주고 얼마나 받는다고. 자반 한 손 사고, 달래 한 묶음 사니까 그 돈이 다 날아갑디다.” (「막차」 본문, 이하 쪽수만 표기, 19쪽)
순옥 가족이 처한 현실은 전기 요금이라도 아껴야 할 만큼 곤궁하다. 남편은 자신의 입성만 챙기는 무능한 캐릭터로 아내 순옥에게 생계를 의지하여 삶을 지탱해 왔다. 그동안 남성은 합리적이고 강인하며 가족을 보호하고 가족이 처해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주체로 여겨져 왔다. 반면 여성은 감정적이고 연약하며 보호가 필요한 순종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5) 「막차」의 화자 순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며 남편은 무위도식한다. 이러한 구조는 전통적인 성 역할이 전도되는 양상을 보여주며 가부장제의 변화를 아우른다.
순옥은 아들을 낳고 일 년쯤 지나 익힌 미용 기술로 동네 미용실을 차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왔다. 미용실 수입은 가족의 생계유지 정도는 되었으나 예측불허의 위험, 즉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출은 감당하기에 어려웠다. 가난은 일평생 순옥 가족을 따라다녔고 그 흔한 자가용 한 대 없어 부부는 며느리 임종 소식을 듣고 고속버스를 이용하게 된다.
“내일 미선 엄마가 머리 좀 해달라고 했는데···”, “못 받아도 이만 오천 원은 받을 텐데.” (10쪽) 당장 가족의 생활비와 며느리의 병원비까지 책임져야 하는 현실이 순옥이 짊어진 짐이며 풀어야 할 과제다. 죽음 앞에서 삶은 한층 진지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며느리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고 순옥은 놓친 손님을 아쉬워한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 삶에 근거한 것으로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그녀를 모질고 야박한 인물로 몰아간다.
“그애까지 낳았으면 정말 어쩔 뻔했어요.”
그녀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토한 말이었다.
“며느리가 왜··· 셋째를 가졌었잖아요.”(27쪽)
상훈이만 죽어나는 거지. 혹이 셋이나 딸린 홀아비한테 누가 시집을 온다 하겠어요. 버젓하고 안정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29쪽)
순옥은 셋째 손주 태몽을 꾸었고 아들 손주라는 확신이 있었던 터였다. 당시 상의 없이 낙태한 며느리가 야속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아들 상훈은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영업직으로 전전하며 순옥에게 도움을 받아 겨우 생계를 꾸려간다. 두 딸 양육도 버거운 현실에서 셋째 출산은 무리였을 것이다. 순옥이 며느리의 맞벌이를 원한 것도 아들 혼자 버는 돈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아들과 직장 동료였던 며느리는 결혼 후 집안일과 아이들 양육에 전념했다. 생계 전반을 아들 상훈이 도맡게 되자 며느리에 불만이 쌓인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진다. “내가 제집에 일하러 온 파출부도 아니고, 빌라 계단을 다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현관문을 야멸치게 닫아버리지 뭐예요.”(30쪽), “아까운 차비 들여 올라가서는 그런 대접이나 받다니, 고작 그런 대접이나요··· (31쪽) 큰 손녀가 태어나고 우울증을 앓는 며느리를 보살피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순옥은 집안일을 살뜰히 보살펴주지만, 며느리에게 푸대접받는다. 셋째 아이를 낙태한 상훈 부부, 며느리의 낙태에 공감하는 순옥, 이들 가족의 생명 경시 태도나 고부 갈등도 결국은 경제적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순옥이 혼자 남겨질 아들 걱정을 한다고 해서 며느리에게 연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까지 봐서 뭐하겠어요.”
“굳이 그것까지···”
지켜본들 서로 간에 뭐 할 말이 있을까. 명절에나 겨우 얼굴 보던 사이가 뭔 정이 그렇게나 들었다고. 나도 그렇지만 며느리도 성격이 보통 쌀쌀한가. 남다른 정이 들었다 한들 새파란 며느리가 병에 찌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세상천지 어느 시어머니가 보고 싶겠는가. (33쪽)
며느리가 위급하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정작 서두른 건 순옥이였다. 남편이 들고 있는 다리미를 빼앗고 막차를 타기 위해 도로로 뛰어 내려가 택시를 잡아타고 터미널로 간 것이다. 그녀는 차라리 날이 밝은 다음에 첫차를 타는 게 나을 뻔했다고 자책한다. 첫차에 집착하는 심리는 며느리의 생명을 살리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로다. 하루의 시작을 상징하는 첫차가 생의 출발점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 “뭘 그렇게나···”(34쪽) 그녀는 막차를 타고 올라가 병원에 도착해도 며느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데 절망한다. 죽음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몸속에 뼈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무력감을 느낀다.
2. 잔혹한 이동 경관
1960년대 전후는 인문 계열보다 상고가 인기가 좋았다. 상고를 졸업한 남편은 마음만 먹으면 취업이 가능한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담을 치고 아내에게 생계를 떠맡긴 채 살아왔다. 순옥에게 기댄 삶은 아들 상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훈은 성인이 된 후에도 대학 등록금은 물론 졸업 후 외지로 나가 생활하는 제반 비용을 어머니 순옥에게 의지한다. 결혼 비용과 신혼집 전세금, 빌라 매입, 아내의 병원비도 어머니의 도움을 받는다. 남편과 아들은 순옥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가족 간의 착취 구조는 아무런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행된다. 심지어 남편은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빚 받는 일마저도 순옥에게 떠넘긴다. 순옥은 남편 친구가 죽자, 그의 아내가 일하는 식당으로 찾아가 기어이 돈을 받아낸다. 남편은 그런 순옥에게 벌을 받을 것이라고 악담까지 퍼붓는다. 오직 가족을 위해 억척같은 삶을 살아왔으나 순옥은 남편이나 아들, 며느리에게까지 속물 취급을 받는다.
순옥 가족의 관계 균열은 필요한 만큼 충족될 수 없는 물질적 욕망에 있다. 이들 가족의 물질적 욕망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가족의 입성을 해결하고 집 한 채 품고 사는 삶, 몸이 아플 때 필요한 최소한의 치료비가 전부다. 순옥 가족의 욕망은 소박하다 못해 처절한 욕망이다. 순옥 부부는 지방에서 미용실에 달린 살림집에서 기거하는 형편이고 아들 상훈은 재개발을 꿈꾸며 서울 변두리에 15평 빌라를 매수해 거주해 왔다. 순옥 가족은 그때가 호시절이었다. 며느리의 암 진단으로 가족의 소박한 유토피아는 단숨에 허물어진다.
순옥이 한 달에 오만 원씩 부어오던 이 년짜리 정기적금도 며느리의 병원비로 들어간다. 순옥에게는 미래 희망이었던 적금을 내주었지만, 며느리는 고맙다는 전화 한 통 없고 아들 상훈은 서운한 내색을 감추지 않는다. 미용실이라도 팔아서 병원비를 대달라는 상훈의 요구를 순옥이 거절하면서 모자 관계는 틀어진다. “세탁기 안에서 악다구니 쓰듯 뒤엉킨 채 큼큼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갈”(22쪽) 수건이 순옥 가족 관계의 현재다. 가족에 속물 취급을 받는 순옥, 속물 취급을 하면서도 돈을 요구하는 가족, 이는 물질이 가진 불편부당한 양면성이다. 순옥은 가망 없는 며느리를 위해 가족의 생계 수단인 미용실을 팔아 병원비를 대주지 못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우리는 그저 죄인처럼 죽은 듯이 있다가 내려오자구요.”, “죽은 듯이요. (24쪽), “피 한 방울 안 섞였다지만 그애가 그렇게 된 게 내 탓인지도 모르지요. 내 탓인지도요···”(39쪽) 순옥은 가족에게 봉사하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위치에 선다. 그녀는 며느리의 질병마저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아내에게 생계 전반을 떠맡기고 살아온 남편은 오히려 태연한 듯이 보인다.
순옥에게 무능하고 무심한 남편이 달가운 존재일 리 없다. 순옥 부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있으나 남남과 같다. 부부의 소통 부재는 이동 여정에서도 드러난다. 남편은 고속버스에 올라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눈을 질끈 감았고 순옥이 무슨 말을 해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멀어도 어지간히 멀어야지요. 어지간히···”(9쪽) 이러한 진술은 순옥 부부의 거주지에서 아들이 거주하는 서울까지의 거리를 뜻하지만, 심층적으로는 부부 관계의 거리를 뜻한다. 순옥과 나란히 앉은 남편은 고속버스가 두 시간여를 달리는 사이 눈 한번 뜨지 않았다.
“갈 때가 되면 그렇게 급하게 가더라고요. 하기는 반년을 더 산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아니겠어요?” (12-13쪽)
“백만원을 해다준 게 언제였어요?” (···)
“우리가 백 만원을 해다준 게요.”(15쪽)
“설사 미장원을 내놓아 살려놓는다 쳐요. 지들이 우리를 죽을 때까지 먹여 살리기나 할 거래요?” (18쪽)
“벌써 대전은 지났을 테지요?” (37쪽)
부부의 대화는 단절되었고 순옥은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독백하듯 저 혼자 중얼거리는 모양새다. 자식을 낳아 기르고 같은 방향으로 내달리며 살아왔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냉담하다. 그녀는 신문이나 방송에도 귀를 닫고 사는 남편을 ‘흑싸리 깝데기’같은 인간으로 인식하고 살아왔다. 남편 또한 그녀를 무시하긴 마찬가지다. 버스가 두 시간을 달리 내내 단절된 대화는 그들이 살아온 삶 전반을 반추한다.
남편은 순옥뿐 아니라 세상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한 번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 사회의 부적응자, 은둔형 외톨이로 산 그는 사회적으로 매장된 존재다. 산 사람이 아닌 인물로 각색된 남편은 완고한 부동성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반면 서사의 대부분이 순옥의 독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순옥은 움직이는 캐릭터, 즉 유동적 주체가 된다. 부동성과 이동성은 상충하는 개념이다. 포괄적으로 「막차」의 부동성은 가족 간의 소통 부재, 개인과 사회의 불통, 죽음(생명 상실)으로 요약된다. 순옥과 남편은 삶과 죽음이라는 상대성의 개념을 갖는다.
3. 사이 공간에 움직이는 죽음의 벡터들
고속버스는 ‘사이 공간이다.’ 사이 공간은 억압과 단절, 통제 등의 부동성을 갖는다.6) 부동성은 움직임이 멈춘 상태, 육체적 죽음을 아우른다. 「막차」는 이동 여정에 다수의 죽음을 배치하고 있다. 첫째, 며느리는 임종 상태로 살아날 가망이 없다. 둘째,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한 채 낙태 당한 손주다. 셋째, 남편 친구의 죽음이다. 그는 여러 차례 사업에 실패하고 순옥에게 돈까지 빌려 재기를 꿈꾸었으나 거듭되는 실패로 술을 마시고 도로에 누워있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넷째, 순옥의 꿈에 나타난 친정어머니와 당숙모도 망자다.
이들의 죽음 이면에는 가난이라는 그늘이 있다. 셋째를 키울 능력이 없는 아들 부부는 서둘러 아이를 낙태시킨다. 남편 친구 또한 경제적 어려움이 죽음의 빌미가 되었다. 암에 걸린 며느리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병세가 급격히 악화한다. 이러한 사례는 다수의 서민이 직면한 현실로 물질이 사람의 생사에도 관여하는 정황이다. 따라서 소설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경제적 약자의 고통스러운 삶이 촉발한 죽음의 문제를 부각하고 있다.
소설의 표제인 막차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뜻한다. 노년기에 접어든 순옥 부부는 막차에 올라 삶의 종착지를 향해 내달리는 중이다. 소설에서 고속버스는 순옥 부부와 함께 이동의 주체가 되어 움직인다. 인간과 기계의 혼종적 아상블라주는 새로운 이동 경관을 창출한다.7) 순옥은 “콜타르를 바른 듯 검게 번들거리는 차창에서 남편의 얼굴을 찾았다.”, “남편의 옆얼굴은 물속에 묵직이 가라앉은 돌덩이처럼 붓고 일그러져 보였다. 뭉텅한 턱 밑으로 손을 들이밀고 들추면 이끼 뭉치 같은 다슬기가 두엇 달라붙어 있을 것 같았다.” (10쪽) 콜타르, 돌덩이, 다슬기는 죽음과 동일체다. “남편의 두 눈은 그러나 시침질을 해놓은 듯 고집스럽게 감겨 있었다.”(20쪽) “남편의 두 눈과 입은 이미 고집스럽게 다물려있었다.” (35쪽) 순옥은 알루미늄포일을 구기는 소리에 뒤를 본다. “빈 의자들 너머 배죽이 튀어나온 검은 머리”(10쪽)를 본다. 의자들에 가려 얼굴과 몸이 전혀 보이지 않아 가발을 걸쳐 놓은 듯하다. 이는 죽은 자를 연상케 한다. 순옥의 눈에 비친 남편의 모습은 산 자의 형상이 아니다. 사이 공간에 함몰된 그녀의 의식에는 죽음의 벡터들이 움직인다. 이제 고속버스는 기계의 물리적 속성을 넘어 죽음의 메신저가 된다.
흔들리는 차창에 떠올라 희미해졌다 또렷해졌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남편의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에서, 그녀는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37쪽)
공간은 행위자의 체험과 자아 전체를 지배하는 특정 견해와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8) 순옥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눈을 감고 있는 남편의 얼굴에서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다. 자신과 나란히 앉아 있으나 남편은 부재중인 사람이나 다름없다. 순옥이 묻는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남편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동 공간에 내재한 기계 본성은 인간의 불안한 내면 심리를 추동하고 이질적인 세계를 재현한다.9) 부부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면서 각자 다른 세계에서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 순옥의 의식적 기제를 통해 고속버스는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간단없이 허물어버린다.
히터를 한껏 틀어 고속버스 안 공기는 덥고 건조했다. 아직 2월 중순이라 히터를 끄면 손발이 금세 시려올 것이었다. 눅눅한 걸레 냄새와 쉬어터진 김밥 냄새, 지려진 어묵 국물 냄새가 뒤섞여 떠돌아 그녀는 벌써부터 멀미가 났다. (···)
그녀는 의자 등받이가 박제 거북의 등딱지처럼 딱딱해 영 불편했다. 어딘가 어긋난 관철처럼 헐거워졌는지 의자는 그녀가 뒤척거릴 때마다 끼익,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다고 촐싹 다른 의자로 바꾸어 앉아야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녀 앞뒤로 빈 의자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별반 나을 것 같지 않았다. 일반인 데다 오래된 고속버스였다. 그렇지 않아도 고속버스는 탈수 중인 세탁기처럼 흔들림이 심했다. (9-10)
고속버스의 환경 묘사는 순옥의 불편한 심리와 맞물린다. 건조한 공기와 시린 발, 불쾌한 냄새가 뒤섞여 그녀는 멀미가 난다. 멀미는 버스에 오르면서부터 육체적 고통이 시작되리라는 암시다. 버스의 이동성은 삶의 흐름이다. 멀미는 존재자가 대면하는 현실적 난제다. 관절처럼 헐거워진 의자, 그녀가 뒤척일 때 비명을 내지르는 의자는 순옥의 몸으로 치환된다. 오래된 고속버스는 노년기에 접어든 순옥 부부의 육체를 연상케 한다. 탈수 중인 세탁기처럼 흔들리는 버스는 임종이 임박한 며느리의 목숨을 움켜쥔 듯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고속버스는 가족의 요동치는 일상을 비춘다.
버스 실내가 정전인가 싶게 침침해지더니 환하게 켜져 있던 조명들이 일제히 점멸한다. 고대, 중세,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담론을 지배해 온 빛은 어둠과 대극점에서 맞물린다.10) 빛은 생명을 어둠은 죽음의 상징성을 갖는다. 빛이 사라진 버스 실내는 혼돈 상태다. 흡사 죽음을 암시하듯 어둠에 묻힌 버스의 실내 환경은 음산하다. “며칠 전에 통화할 때만 해도 반년은 더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반년은요.”(11쪽) 순옥은 며느리의 임종을 지금 여기의 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버스 내부의 어둠을 밀어내려는 듯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아들의 전화가 걸려 온 시간을 유추하며 혹여 그사이 불길한 소식이라도 당도했는지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며느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시점을 떠올리다 반년 더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회의감에 빠진다. 며느리의 삶은 살아있어도 고통의 연장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며느리를 지키고 싶은 의지를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안방에 불을 켜둔다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
그녀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다. 고속버스 안 공기가 더워서인지 아까부터 스카프가 목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13쪽)
순옥은 전등을 켜두지 않고 집을 나온 자신을 질책한다. 그녀는 전등을 켜는 행위를 통해 가족에게 다가오는 위험에 대응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짓뭉개듯이 현실은 목을 죄어온다. 목에 두른 스카프를 푸는 순옥의 행위가 삶의 긍정형이라면 고속버스 실내의 열악한 환경은 그녀의 목을 조여오는 실체로 대두된다. 젊은 며느리의 죽음이라는 부당한 환경 세계에서 가족을 지켜내려는 순옥의 의지와 무관하게 버스(현실 세계)는 거침없이 어둠 속을 질주한다. 목을 조여오는 스카프를 푸는 그녀, 삶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긍정적 태도가 가족을 지키며 살아온 단 하나의 힘이었지만, 죽음만큼의 넘어설 수 없는 영역이다.
4. 지독한 삶의 환유
자정이 다가오는 시간 순옥은 차창 밖으로 또 한 대의 고속버스를 보게 된다.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달리는 고속버스는 한 사람의 승객도 보이지 않았다. “저 고속버스에는 사람이 한명도 없네요.”, “한 사람도요.”(20쪽) 순옥은 독백하듯이 중얼거린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남편이 뜻밖에 말을 섞는다. 틀림없이 사람이 탔을 것이라며 우기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눈을 뜨지 않았다. “속을 긁어낸 멍게 껍질처럼 텅 빈 고속버스는 그들이 탄 버스를 추월하더니 조금씩 멀어져 한점 빛으로 반짝거리다가 어둠으로 사라졌다.” (21쪽) 속을 긁어낸 멍게로 표상되는 고속버스는 생명의 층위를 곧바로 무너뜨린다. 실체가 모호한 고속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녀 앞에 실체를 드러낸다. 순옥은 “운전기사도 없이 저 홀로 철필대 속 같은 고속도로를 유령처럼 내달리는 고속버스”(24쪽)에 자신과 남편 단둘이 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저 봐, 누군가는 타고 있잖아.”(34쪽) 순옥의 가물거리는 의식을 일깨우듯이 남편의 항의 섞인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온다. 겨우 눈을 뜬 순옥은 차창에 비친 남편의 얼굴을 보고 소름이 돋는다.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는 눈과 입, 순옥은 차창에 비친 남편을 보았으나 남편은 유령처럼 질주하는 버스에 탑승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한 공간에서 각자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부부, 순옥은 남편과 각자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잠시 쉬고 싶었으나 옥산휴게소를 지나친 버스는 천안 휴게소도 그대로 지나간다. 버스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비명을 내지른다. 옆자리에 타고 있던 남편이 증발한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속버스는 휴게소에서 시동을 끈 채 멈춰있었다. 버스가 출발하려고 하자 순옥은 다급하게 소리친다. “사람이 덜 탔다니까요.”, “아주머니 혼자 아니었어요?”(43쪽) 기사는 남편이 버스에 탑승한 적이 없다는 듯이 순옥에게 되묻는다. 순옥은 평소 남편이라는 손님을 멀리멀리 내쫓고 싶어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하지만 무심코 내뱉은 소리가 진심은 아니었을 터이다. 운전기사에게 남편의 부재를 강하게 부인한 순옥은 버스에서 내린다. 그녀는 휴게소에 내린 후 남편의 부존재를 재확인한다. 남편은 애초에 순옥과 동행한 적이 없다는 듯이 자취를 감춘다.
남편이 돌아왔을까 싶어 고속버스 쪽으로 걸음을 내딛던 그녀는, 얼어붙듯 멈추어 섰다. 꽃상여처럼 환한 고속버스가 그녀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고속도로를 유령처럼 내달리던 그 고속버스인 듯싶었다. 승객을 한 명도 태우지 않고. (44쪽)
순옥은 휴게소 주차장에 죽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고속버스와 대면한다. 꽃상여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버스는 삶의 끝자락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며느리, 칠순을 목전에 둔 남편, 또는 순옥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순옥이 타고 온 버스는 꽃상여 같은 버스의 그림자에 가린 채 뒤쪽에 웅크리고 서 있다. 순옥은 자신이 타고 온 버스가 아니라 꽃상여 같은 버스에 오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도착지가 어디든 가는 곳까지 무작정 타고 갔으면 했다.”(44쪽) 그녀는 현실에 지쳐있다. 새파란 며느리의 암 진단과 임박한 죽음, 아들 혼자 헤쳐가야 할 미래, 어린 손녀들의 불투명한 내일, 그녀 주변은 온통 혼돈 상태다. 그녀를 둘러싼 암울한 현실은 생을 포기하라고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죽음은 인간의 선택이 아닌 순리에 맡겨야 할 것이다. 문이 닫히고 고속버스가 천천히 움직인다. 그녀는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면서 우두망찰 서있을 뿐이다. 버스는 그녀를 치받을 듯 스친다. 죽음의 여정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 고속버스는 아슬아슬하게 그녀 앞을 지나친다. 마치 머지않아 순옥도 그 버스에 올라야 한다는 듯이.
그녀는 누군가 타고 있다는 남편의 말이 불현듯 떠올라, 버스 안을 살피는 그녀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남편의 말대로 누군가 버스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버스가 유유히 휴게소를 빠져나가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것을 그녀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버스에 타고 있는 누군가가, 유령인가 싶게 홀연히 타고 있는 누군가가 하필이면 남편과 닮아서였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그녀 옆자리에도, 휴게소 어디에도 없던 남편과 몹시나. (45쪽)
버스에 타고 있는 누군가는 남편일 가능성이 크다. 부부로 만나 함께 살아왔으나 죽음이라는 갈림길에 접어들면 각자의 길로 가야 한다. ‘속을 긁어낸 멍게 껍질 같은 고속버스’, ‘철필대 같은 고속도로를 유령처럼 질주하는 버스’, ‘꽃상여 같은 버스’, 남편은 저승행 버스에 탑승한 것일까. 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난다. 감각적인 것의 분배, 관념과 사건으로서의 문학은 이동하는 형식을 중요시한다. 미학적 상태란 미결정의 순수한 단계이며 형식이 독자적으로 경험되는 순간이다.11) 결말은 독자의 몫으로 남았다.
김숨 작가는 한자리에서 뿌리내려야 할 나무에 이식만큼 모진 시련은 없다고 했다.12) 작가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바로 뿌리뽑힌 나무다. 나무는 약자들을 비유한다. 교통 모빌리티의 이동성은 사회 취약계층의 불안정한 삶의 메타포다. 「막차」의 고속버스는 약자들의 실존적 삶을 형상화하는 동시에 죽음으로의 여정을 재현하였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마냥 그렇게 흔들리면서 정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듯 실려가는 것만 같은··· 빈 의자들과 함께.”(24쪽) 순옥 부부가 살아온 인생길은 요동치는 버스 차체만큼이나 흔들렸다.
가정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가족 집단의 혼란은 전 사회의 혼란이나 다름없다.13) 순옥 가족의 대립, 소통의 부재는 저항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이 작용한 결과다. 이 외부적인 힘은 궁극적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힘이다.14) 세상과 결탁하지 못한 남편은 일평생 사회의 변두리에 방치되어 왔다. 아들 상훈은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전국을 떠돌지만, 안정된 생활, 안정된 직장은 요원하다.
불공정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는 한 능력주의 사회는 결코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지 못한다.15) 낙하산 인사, 주가조작, 학벌 위조, 세금 포탈, 뇌물 수수 등의 부조리는 사회의 근간을 훼손하는 행위다. 사회 주권 권력은 불법을 자행하고 범죄를 은폐하거나 법망을 피해 처벌을 면한다. 순옥 가족과 같은 상대적 약자는 그만큼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사회는 처벌받지 않는 대상자로 인해 좌절과 분노로 흔들린다. 일정한 시간에 맞춰 승객을 태우고 목적지까지 안내하는 대중교통처럼 성실하게 살아온 순옥 가족의 삶은 휴게소에 멈췄다. 소설에서 휴게소는 환승구간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움직이는 공간이다. 따라서 「막차」에 배치된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다.
순옥은 갈대 줄기처럼 흔들리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인물이다. 그녀는 아들과 손녀딸들의 미래를 짊어진 채 척박한 인생 행로를 내달려야 할 책임이 있다. 환승구간에서 멈춘 그녀는 삶의 길목으로 이동할 터이다. 태동기부터 문학은 약자의 삶을 싣고 달려왔다. 문학의 렌즈에 담긴 이동 경관은 남루하고 헐벗고 때로는 비루한 풍경을 반추한다. 희망은 헐벗은 이동 경관에서 움튼다. 거친 삶으로의 질주, 그 중심에 다수의 순옥이 있고 김숨 작가가 있다.
1) ‘모빌리티’는 영국의 사회학자 존 어리가 정립한 개념어다. 그는 현대사회의 특성을 ‘모빌리티’로 규정하고 이동에 따른 다층적인 현안을 미래지향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기존의 공간 관점이 아닌 이동 공간을 통해 사회 차별과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인간뿐 아니라 사물(기계)과, 자연의 공존 모색을 기치로 내걸었다. ‘모빌리티 전환적 사고’는 AI 시대에 특히 요구되는 패러다임이다. 인문학은 존 어리의 이론을 바탕으로 고 모빌리티 시대에 예술이 지향해야 할 가치 재고에 역점을 맞추고 있다. 본 비평은 문학 작품 재해석에 이동 매체를 비롯한 이동 시스템 관점을 수용하였다. 이는 시대적 요구이며 새로운 텍스트 해석의 방편으로 예술을 포함한 문학이 지향하는 창조적 사유임을 밝힌다.
2) 존 어리, 『모빌리티』, 앨피, 2022, 17-23쪽.
3) 김숨, 「막차」, 『국수』, 창비, 2020, 9-45쪽.
4)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민음사, 2017, 266쪽.
5) 로저 타이슨, 윤동구 역, 『비평이론의 모든 것』, 앨피, 2019, 197쪽.
6) 존 어리, 앞의 책, 37쪽.
7) 위의 책, 94쪽.
8)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 이기숙 역, 『인간과 공간』, 에코리브르, 2011, 20쪽.
9) 린 피어스, 「사건으로서의 운전」, 피터 메리만 외 9인, 김태희 외 3인 역, 『모빌리티와 인문학』, 앨피, 2019, 272-275쪽.
10) 한병철, 김태환 역, 『투명사회』, 문학과 지성사, 2015, 82쪽.
11) 이안 데이비슨, 김태희 외 3인 역, 「형식의 모빌리티」, 『모빌리티와 인문학』, 앞의 책, 159-161쪽. (쟈크 랑시에르(2004, 2011, 2014), 알랭바우디(2005) 재인용)
12) 강동호, 「죽음보다 낯선」, 김숨 『노란개를 버리러』, 문학동네, 2011, 393쪽.
13) 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2017, 48쪽.
14) 이병창, 「뿌리뽑힌 자들의 비명」, 김숨 『국수』, 창비, 2014, 354쪽.
15) 마이클 샌델, 함규진 역, 『공정하다는 착각』, 미래엔, 2021, 105-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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