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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메모리, 빚 없는 세대의 빛 : 박솔뫼, 최은영, 이미상의 소설을 중심으로

  • 작성일 2024-11-01

   포스트–메모리, 빚 없는 세대의 빛 : 박솔뫼, 최은영, 이미상의 소설을 중심으로


하혁진


   ‘포스트-메모리(post-memory)’와 트라우마라는 유산


   “내 부모님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다”(21쪽)라는 진솔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엘리자베스 로즈너의 논픽션 『생존자 카페 : 트라우마의 유산, 그리고 기억의 미로』(서정아 옮김, 글항아리, 2021)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2세’가 일생 동안 겪고 느끼게 되는 기억과 트라우마의 면면이 페이지마다 빼곡하고 핍진하게 적혀 있다. 로즈너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뒤죽박죽”이라고 말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부모님의 전쟁 경험담을 처음으로 들은 시점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부모님이 겪은 사건들이 “내가 태어난 순간, 아니 어쩌면 태어나기도 전부터 내 몸 구석구석 파편처럼 박혀 있는 기분”이라고 술회하는 로즈너의 고백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2세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전성 트라우마’라는 “유별한 정서”(22쪽)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볼 지점들을 남긴다. 그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평생 동안 슬픔, 불안, 분노를 비롯한 수많은 감정들을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 속한 듯 속하지 않은 경험의 망령들이 주위를 맴돌고”(23쪽) 있다고 느끼는 그들은, 경험하지 않은 일을 잊지 못하는 모순을 평생에 걸쳐 체험하게 된다.


   홀로코스트와 같이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세대의 트라우마가 다음 세대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승되는 현상은 다양한 국가, 집단, 사건에 걸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로즈너 역시 “베트남 난민의 자손들에게서, 캄보디아 킬링필드 생존자의 자녀에게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수용소에서 격리되었거나 원자폭탄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은 일본인의 자손들에게서”(23쪽) 그러한 교차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현실 속에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건의 전말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을 때, 후세대가 그 사건을 기억할 방법과 방식은 무엇이냐는 점이다. 요컨대 ‘포스트-메모리(Post-memory)’ 세대의 기억은 당사자 세대가 죽어가고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시간의 가장자리”(28쪽)에 놓여 있다. 그들은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나의 부모가 했거나 하지 않은 어떤 일”(42쪽)로 인해 기억의 의무를 지게 된다.


   ‘포스트-메모리(Post-memory)’는 미국의 비교문학자 마리안느 허쉬가 창시한 개념으로, 허쉬는 1990년대 초에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의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의 『쥐(The Complete Maus)』를 분석하며 처음으로 해당 용어를 사용했다. 허쉬는 이후 『포스트 메모리 세대 – 홀로코스트 이후의 문학과 시각 문화(The Generation of Post Memory : Writing and Visual Culture after the Holocaust』1)를 통해 해당 이론을 더욱 공고히 한다. 그는 트라우마를 초래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 세대가 남긴 구술, 자료, 행동, 이미지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해당 사건을 경험하는 후속 세대, 당사자 세대의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혹은 문화적인 트라우마를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는 후속 세대를 ‘포스트-메모리 세대(Post-memory generation)’라고 정의한다. 허쉬는 특히 홀로코스트의 사례에 주목하며, 폭력을 행사한 주체가 그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체계적인 방식으로 말살하거나 억압하는 경우, 기억의 제도화는 불가능하거나 왜곡된 방식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허쉬는 포스트 메모리 개념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포스트 메모리 세대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연루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는 그것이 트라우마의 전승인 한편 시공간을 초월한 연대의 가능성이기도 하다고 분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아우슈비츠는 증언의 시대를 지나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고 재판에 부치는 재-현(Re-presenting)의 세대로 넘어가고 있다.”2)는 지적은 중요해 보인다. “아우슈비츠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역사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사실들의 전쟁터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허구들의 전시장”3)이기 때문에, 당사자 세대와 후속 세대의 차이에 주목하고, 그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변형과 매개의 특성에 집중하는 포스트 메모리 세대의 기억과 표현 방식 역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허쉬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예술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는 역사학과 철학이 기억의 유산을 이어받고자 노력해 왔다면, 예술은 그것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예술은 역사적 사건을 해체하거나 생략하고, 증언을 수집하면서도 감정을 차단하고, 원형을 변용하거나 몽타주하는 등,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적 사건에 접근하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술을 통해 역사의 순수한 보전을 넘어선 지점, 시간적 단절이 초래한 역설적인 발견과 통찰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 메모리 세대의 기억과 정동은 사적인 기억을 공적인 기억으로 인도하고, 이를 문화적 기억으로 정착시키는 과정 중에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요컨대 후속 세대가 주목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선과 재현의 전략들, 그것이 제기하는 윤리적인 요청과 정치적인 의제들을 파악하고 응답하는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은 압축된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속성’으로 겪었는데, 그에 대한 진상 규명과 사회적 합의가 공고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갖는 기억의 중요성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의 역사적 사건 중에서도 5·18 광주 민주 항쟁과 ‘나’ 사이에 놓인 장막과 거리감을 다룬 박솔뫼의 「그럼 무얼 부르지」,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한국인 가정과 베트남인 가정의 갈등을 다룬 최은영의 「씬짜오, 씬짜오」, 한때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으나 이제는 속물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이들의 초상을 다룬 이미상의 「하긴」을 통해 후속 세대가 그리는 역사적 사건의 재현 양상과, 그 안에 담긴 정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박솔뫼, 「그럼 무얼 부르지」 : ‘장막’ 너머의 사건, 빚 없는 세대의 빛


   박솔뫼의 「그럼 무얼 부르지」를 ‘80년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부를 수 없다면 달리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설의 화자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임, “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한국어를 배우는 모임”(127쪽)에서 해나를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고향인 광주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자와 광주 사이의 거리가 일순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화자는 5·18 광주 민주 항쟁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30년 전에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라거나 칠레의 피노체트가 저지른 일”인 것처럼 거리감을 두고 생각한다. 마치 “영어가 사건에 객관을 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129쪽) 광주에 대한 화자의 주관적 감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화자와 광주 사이에는 공간적 거리감(샌프란시스코-광주), 시간적 거리감(80년 5월-30년 전), 언어적 거리감(한국어-영어)이 동시에 존재한다. 화자는 이러한 ‘장막’들을 통해 일정한 거리를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은지는 이러한 태도를 “탈역사의 운동”, “비의지에의 의지”라고 명명한다.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민주 항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화자는 “낯선 객관의 피사체”를 보듯 광주를 보는데, “체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규정은 낯선 것의 힘을 빌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4)는 것이다. 주지했듯 화자는 사건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남으로써 역사적 무게와 압력을 덜어 낸다.


   한편 양재훈은 박솔뫼의 소설을 읽는 일이 “괴로운 까닭은 거기에 내장되어 있는 도저한 절망과 무기력, 그리고 허무의 감각에 있다.”고 말하며, “그녀의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동의 시도를 멈춘 채 정신병적으로 수축된 (비)주체들”이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이러한 특징을 “청년 세대의 허무감각”5)과 연결해서 해석한다는 점이다. 또한 노태훈은 화자와 같은 “세대에게 1980년의 광주는 대학의 선배에게 전해 듣는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며, “1980년의 광주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외국인을 통해 ‘아 5·18이 May eighteenth구나.’ 하고 깨닫는 정도의 실감인 것”이라고 덧붙인다. 노태훈은 “이는 결코 비판의 지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왜냐하면 “세대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그 세대들이 아니라 그 세대를 둘러싼 세계이기 때문”6)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화자의 태도를 세대적 특성과 연결해서 이해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물론 박솔뫼의 소설에서 ‘세대감’을 읽어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비슷한 세대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 있음과 경험 없음을, 세대로 나누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김녕의 질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박솔뫼를 읽어 내기 위해 도입된 경험 유무의 세대론이라는 틀 자체가 오히려 박솔뫼의 소설에 의하여 부정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며, “그가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거기 있었다고, 보았다고, 안다고, 경험했다고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 의지”7)가 아니냐고 덧붙인다. 요컨대 사건에 대한 경험의 유무가 박솔뫼의 소설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는 아니다. 박솔뫼의 소설에 적용되어 왔던 세대론에는 분명한 맹점이 있다.


   예컨대 김홍중이 박솔뫼의 소설은 “‘0의 자리’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의 레짐’을 좀 더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말하며, “우리는 이 최후의 세대의 무기력증, 무기력을 본질로 하는, 무기력(포기, 좌절, 비관)에 대한 긍정으로 특정 지어지는 삶의 태도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고안해 낸 하나의 사상으로 간주해야 할 필요가 있다.”8)고 덧붙일 때, 청년 세대를 ‘최후의 세대’라고 규정하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 김홍중은 같은 글의 후반부에서 박솔뫼의 장편소설 『백 행을 쓰고 싶다』(문학과지성사, 2013)에 등장하는 아이가 죽는 장면에 대해 “우리는 이 장면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아프다는 말도 사치스럽다. 두렵다는 말도, 부끄럽다는 말도, 죄스럽다는 말도 사치스럽다.”고 말하며, “아이는 세계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처참함을 단호하게 거절함으로써, 이 세계에 태어나기를, 여기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함으로써, 여기에서 사는 우리 모두에게, ‘여기’를 만든 자들에게 가장 고통스런 진실을 드러낸다.”9) 덧붙인다. 그에 따르면 그가 말하는 ‘우리’는 ‘여기를 만든 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은 다소 과하게 느껴진다. 그가 말하는 ‘우리 세대’는 왜 ‘최후의 세대’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을까. 빌려준 사람은 없는데 빌린 사람은 있다는 식이다. 어쩌면 이 부채감이야말로 ‘우리 세대’가 가진 선민의식이자 특권의식일지 모른다. 따라서 세대론의 틀을 벗어나 박솔뫼의 소설을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소설에는 탈역사, 비의지, 무기력, 허무, 피로, 기만, 포기, 좌절, 비관 등을 넘어서는 빛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지했듯 「그럼 무얼 부르지」의 화자는 ‘장막’을 통해 일정한 거리감을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80년 5월의 광주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화자의 태도를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윤리적 장치로 해석할 수는 없을까. 요컨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역사로부터 인위적인 경험과 의미를 만들어 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 무얼 부르지」의 화자는 계속해서 거리를 두면서도 끝내 사건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고통을 앓고,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그는 윗세대가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죽음과 상실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맡는다. 소설로 돌아와 보자.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만난 화자와 해나는 항쟁으로부터 30년이 지난 해에 광주에서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은 “딱히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광주를, “특별히 소리 내어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은 없”는 광주를 걷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만 “손바닥을 위로 향해 허공에 내밀”고 “빗방울이 손바닥에 떨어”(137쪽)지는 것을 느끼며 걷는다. “구도청 구시청 구도심 보지 못한 과거의 거리를 긴 시간을 아는 사람처럼 부르”(138쪽)며 걷는다. 일견 무력해 보이는 그들은 광주에서 다시 만나 끊임없이 움직인다.


   다시 말해 화자는 광주 민주 항쟁을 직접 겪은 사람도 아니고(“거기 서 있는 사람은 아니고”),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사람도 아니고(“거기 서 있는 건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심지어 사건으로부터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사람이지만(“손가락으로 광주가 어디 있는지 짚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 광주 사람이지.”(146쪽)라는 말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화자는 광주 사람이냐는 말을 두 번 듣는다. 첫 번째로 들었을 때 화자는 “내 옆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린다. 화자는 자신이 광주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다고 말하지만, 그 말에는 화자가 광주 사람이 맞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들었을 때 화자는 “할 이야기는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80년에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고 “순간적으로 아득함을 느”(150쪽)낀다. 요컨대 화자에게는 ‘광주’라는 단어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가는 측면과 억지로라도 귀를 막는 측면이 공존한다. 그러한 이중성 사이에서 화자는 “내 앞으로 몇 개의 장막이 쳐져 있고 나는 그 앞으로 직선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역시나 내가 모르는 시간으로 내가 더하거나 내게 겹쳐지지 않는 시간들이었다.”(152쪽)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했듯 이러한 거리 두기는 사건 자체로부터의 거리 두기가 아니라 인위적인 경험과 의미를 만들어 내지 않기 위해 거리 두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 내가 모르는 것, 내가 더하거나 겹쳐지지 않은 것을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을 퇴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무엇보다 화자와 해나는 ‘함께’ 움직인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김정환의 「오월곡」을 읽는 장면을 보자. 두 사람은 김정환의 시를 “검지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데, 이때 “나의 검지 옆에 해나의 검지가” 나란히 움직인다. “나의 검지는 해나의 검지를 밀 듯이” 움직이고, “해나의 검지는 나의 검지에 붙어 있는 듯한 모양으로” 움직인다. 두 사람의 검지는 시의 결구인 “은밀한 죄악의 밤조차 진저리 쳤던 대낮이었습니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종이를 두드리는 것과는 다른 실감으로 ”서로의 손가락“(144쪽)을 두드린다. 이 장면이 전달하는 감각은 무력감이나 허무감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분명한 연대감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감은 특정 세대가 전유하는 감각이 아니다. 80년 5월의 광주 이후 ”그럼 무얼 듣지? 무얼 불러야 하지?“(141쪽)라고 질문하는 사람이라면 세대를 불문하고 공유할 수 있는 연대감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떡과 죽과 국수의 이야기“(149쪽)만 반복할지언정 이야기가 끊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연대감이다. 바로 이 감각이야말로 빚 없는 세대가 만들어 낸 빛,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137쪽)인 것이다.


   최은영, 「씬짜오, 씬짜오」 :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사과하기, 그리고 용서하기


   최은영의 「씬짜오, 씬짜오」는 화자인 ‘나’가 독일의 플라우엔 지역에서 보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회상의 중심에는 ‘우리 가족’과 ‘투이네 가족’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호 아저씨’와 ‘아빠’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였으며, ‘투이’와 ‘나’는 같은 학교 같은 반인 친구인데, 두 가족, 그러니까 한국인 가족과 베트남인 가족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시종 따뜻한 관계를 유지한다. 먼저 독일에 정착한 베트남인 가족, 그중에서도 ‘응웬 아줌마’는 화자의 가족을 초대해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는 등, “어떤 조건도 없”(69쪽)는 무조건적인 환대로 ‘나’와 ‘엄마’를 대한다. 두 가족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같이 저녁을 먹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친척처럼 가깝게 지낸다. 화자는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투이네 가족도, 우리 가족도 서로 말고는 그렇게 가까운 이들이 없었던 셈”(70쪽)이라고 회상한다. 이러한 우정의 기반에는 두 가족이 공통으로 느끼는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는데, 그들은 낯선 타국에서 살아가는 외로움과 고단함을 공유하며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69쪽) 모르겠다고 말할 만큼의 끈끈한 관계를 형성한다.


   따뜻함과 평온함으로 가득하던 소설은 화자와 투이가 학교에서 2차 세계 대전에 대해 배우는 장면에 이르러 처음으로 파열한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다행히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이처럼 대규모의 살상이 일어난 전쟁은 없었단다.”라고 가르치는데, 투이는 손을 들어 선생님의 말에 반박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 베트남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것이다. 투이는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이모, 삼촌 모두 다 죽었대요. 군인들이 와서 그냥 죽였대요. 아이들도 다 죽였다고, 마을이 없어졌다고 했어요. 저희 엄마가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라고 말한다. 선생님은 투이에게 알고 있는 것을 더 이야기 해 보라고 말하지만, 투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힌다. 그리고 화자는 그러한 상황을 지켜보며 “그 모든 상황이 부당하”다고 느끼는데, 그사이 다른 친구가 나서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발표하고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다. 화자는 친구의 얼굴에 떠오른 “자랑스러운 미소”가 아닌 “빨갛게 달아오는 투이의 작은 귀”를 바라보며, “투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으리라고, 그 애를 앞에 두고 그런 식의 설명을 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을 열”(77쪽)지 못한다.


   이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로 이루어진 역사 교육이, 트라우마를 직접 겪은 당사자를 통해 ‘기록되지 않은 기억’을 전승받은 후속 세대로 하여금 인식의 불화를 경험하게 한다는 점이다. 역사를 서술할 권력을 가진 집단에 의해 선별되고, 그마저도 최소한의 객관적인 정보로만 구성되는 공식적인 역사 교육은, ‘침대 위의 이야기(Bed time story)’와 같이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전해지는 기억들을 쉽게 무화한다. 이렇듯 개인적으로 체험한 사건과 공식적으로 기록된 역사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한다. 어떤 친구에게는 뽐낼 수 있는 ‘지식’이었던 것이, 투이에게는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였던 것처럼 말이다. 주지했듯 화자는 투이에게 공감하며 그 상황이 부당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날 저녁 화자 역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다. 여느 때와 같이 투이네 집에 모여 저녁을 먹던 두 가족의 화두는 갑자기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한국의 역사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던 화자는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78쪽)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기대했던 칭찬은커녕 화자의 말을 못 들은 척 외면하고, 이에 서운함을 느낀 화자는 한 번 더 “정말이에요. 우린 정말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요.”(79쪽)라고 덧붙인다.


   “한국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우린 아무에게도 잘못한 게 없다고. 우린 당하기만 했다고.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는데.”라고 말하는 화자의 호소는, “한국 군인들이 죽였다고 했어.”(79쪽)라는 투이의 한마디에 의해 전적으로 부정된다.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해 배운 적이 없는 화자는 “그들이 엄마 가족 모두를 다 죽였다.”고, “엄마 고향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있다.”고 말하는 투이의 힐난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한국의 역사 교육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배운 화자와, 한국군에 의한 학살을 직접 겪은 부모로부터 기억을 전승받은 투이는, 같은 후속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대한 전혀 다른 기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는 가해와 피해의 프레임뿐만 아니라, 국가, 교육, 기억의 제도화 과정 등 다양한 문제들이 결부되어 있다. 요컨대 화자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 자신이, 혹은 자신의 국가가 ‘주체’였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화자는 공식적인 교육을 통해 습득한 지식 이외에는 어떠한 ‘대항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컨대 “투이네 집에서 유일하게 접근이 어려웠던 곳은 서재”라고 회상하는 화자는 어느 날 그곳에서 “작은 제단”을 발견한다. “액자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흑백 사진이 들어 있”는 재단 앞에서 화자는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까닭으로 투이네 집 제단에 안치돼 있는지 알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연함 두려움 때문에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못”(76쪽)했던 화자는, 감춰진 내막에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음을 아예 추측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95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베트남 전쟁 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관한 진상 규명 운동을 시작하고,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의혹이 <한겨레21>을 통해 최초로 보도된 것이 1999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화자의 무지는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응웬 아줌마 역시 “넌 신경 쓸 것 없어.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야.”(79쪽)라며 도리어 화자를 위로한다. 그러나 화자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라며 자신을 위로하는 응웬 아줌마를 보며 “응웬 아줌마의 상처에 대한 가책”을 느낀다. 엄마 역시 “저는 정말 몰랐”다며, “응웬 씨가 겪었던 일, 저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며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응웬 아줌마와 호 아저씨도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80쪽)라며 엄마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빠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인다. “저희 형도 그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형 나이 스물이었죠. 용병일 뿐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아빠의 고백은 결국 두 가정을 헤어 나올 수 없는 갈등 속에 빠지게 만든다. “구역질나는 학살”로 가족을 잃은 응웬 아줌마의 기억과, “전쟁”으로 형을 잃은 아빠의 기억이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가족과 베트남인 가족이 만난 장소가 독일이라는 점은 중요해 보인다. 두 가족 모두에게 외국인 독일에서 그들은 ‘이방인’으로의 정체성을 공유하며 친해진다. 그런데 초반부의 서사에서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통분모로 작용하지만, 중후반부의 사건에서는 오히려 소통이 불가능함을 강조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요컨대 “뜻도 알아듣지 못할 노래의 후렴구를 어설프게 따라”(70쪽)부르며 서로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던 두 가족은, 한쪽에게는 ‘학살’로 기억되고 다른 한쪽에게는 ‘전쟁’으로 기억되는 사건과 맞닥뜨리며 언어로 대표되는 근본적인 균열과 차이를 마주한다. 결국 한국어와 베트남어와 독일어가 뒤섞인 그날 밤 식탁에서, 그들은 “어차피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82면)라는 절대적인 한계, 환대의 불가능성을 마주한다. 그리고 화자는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선택한 어른들의 결정을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서로로 인해 더는 다치고 싶지도 않은 어른들의 평범한 선택이었다.”고 회상한다. 물론 이후에도 화자의 엄마는 응웬 아줌마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임에도 사과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엄마의 부정확한 독일어는 자주 부서”(82쪽)지고, 두 가족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로 헤어지게 된다.


   한편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책임’의 문제가 어떻게 다음 세대로 이행하냐는 점이다. 이 소설에는 총 두 번의 화해 장면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화해는 화자와 투이의 화해다. 화자의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만난 두 사람은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언어인 독일어로 서로에게 사과한다. 투이는 “그날 너에게 나쁘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널 공격하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화자는 그런 투이에게 “미안해.”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로 인해 발생한 갈등을 두고 화자와 투이는 사과하고 용서한다.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86쪽)라며 자신의 무지에 대해 반성하는 화자의 태도는 후속 세대가 어떻게 사건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해 화자는 역사적 사건의 주체가 아니라 사건 이후 기억의 주체로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자는 시간이 흘러 세상을 떠난 엄마를 대신해 응웬 아줌마를 다시 만난다는 점에서 두 세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엄마에게 사랑이 많다고 말해 주었던 사람, 유일하게 엄마를 이해해 주었던 사람, 그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사과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화자는 자신에게도 아픈 기억으로 남은 독일로 향한다. 그곳에서 화자는 엄마가 응웬 아줌마에게 건네고 싶었던 그 말을, 독일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씬짜오.”라는 짧은 베트남어를 건넨다.


   “빨간 털모자를 쓴 작은 여자가 현관에서 나와 길 건너편에 섰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길가로 걸어갔다. 우리는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내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나는 길을 건넜다. 나는 아줌마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충격을 봤다. 서른셋의 나는 그때의 엄마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엄마를 빼닮아 있었으니까. 아줌마의 눈에서 나는 나와 함께 여기에 서 있는 엄마를 본다. 응웬 씨, 반갑게 이름 부르며 저쪽 길로 건너가는 엄마의 모습을. 씬짜오, 씬짜오. 우리는 몇 번이나 그 말을 반복한다. 다른 말을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93쪽)


   이미상, 「하긴」 : 속물이 된 ‘그 세대’와 후일담을 초과하는 ‘임테기 천사’


   이미상의 「하긴」은 앞서 소개한 두 편의 소설과 비교했을 때, 형식적인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럼 무얼 부르지」와 「씬짜오, 씬짜오」의 화자가 후속 세대의 인물이었다면, 「하긴」의 화자는 당사자 세대, 즉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이른바 ‘86세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인 ‘김’은 자신의 딸인 ‘보미나래’가 친구들의 자녀들에 비해 지적인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9쪽)은, “ADHD의 가능성”을 진단하기 위해 방문한 아동발달센터에서 들은 “지능 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쪽)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소설은 그런 와중에도 딸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애쓰는 김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진짜로 진단되어야 하는 것은 김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속물근성과 엘리트주의다. “한마디로 머리가 나쁜 종자들”이 있다고, “우리는 그런 종자가 아니”(11쪽)라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던 김은 딸의 지능 검사 결과를 보고 나서 아내를 의심한다. “아내와 나는 같은 대학원을 나왔다. 그러나 대학은 달랐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다.”(12쪽)와 같은 고백에서 풍기는 지독한 학벌주의의 악취를 김은 숨기지 못한다. 소영현의 지적처럼 대의와 정의를 부르짖던 86세대로 대표되는 엘리트 운동권의 위선과 이중성”은 “입시 제도의 민낯을 통해 거침없이 폭로”10)된다.


   결국 김은 입시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 ‘문’을 찾아가 상담을 받는다. “나래는 명분 쪽으로 가야겠네.”(13쪽)라며,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쪽) 운운하던 문은 은근슬쩍 자신의 딸인 ‘초롱’을 치켜세우고, 김은 그런 문을 보며 부러움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런데 아내의 안부를 묻던 둘의 대화는 또 한 번 엘리트 운동권 세대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특히 진보적 남성성 뒤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여성 혐오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흐른다. 술기운이 오른 문은 아내에 대해 “지들이 언제부터 정신을 외주 줬다고··· 지들이··· 언제부터··· 날 뭐로 보고. 개 같은 년들.”이라고 말하며, “딸! 딸들이 우리의 희망이다!”(17쪽)라고 덧붙인다. 요컨대 민주화를 주도했던 운동권 세대의 남성들은,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아내를 통해 확인한다. 그리고 그들은 시대에 뒤처진 자신의 의식을 탓하는 대신 비난의 화살을 아내에게 돌린다. 그들은 소리 소문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는 것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데, 따라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 세대’의 남성들이 딸의 교육과 입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 역시 “세계의 주인공이자 역사 발전의 영웅이라는 운동권 출신 엘리트의 자기애적 중심성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견고하다는 사실”11)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김은 “중학교를 자퇴하고 삭발하고 사르트르 따위를 읽다가 최연소로 등단해 검정고시를 거쳐 국공립 예술대학에 들어갔다.”(14쪽)는 초롱을, 명백한 “자기 언어”(20쪽) - 소설에서 초롱의 ‘자기 언어’는 “이름 튀어 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라는 SNS 게시글로 등장한다 – 를 가진 초롱을 자신의 이상이라고 말하며, “멋지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가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가하는 새끼를 길러 낸다는 것이.”(21쪽)라고 덧붙인다. 요컨대 김은 자신의 딸이 본인을 포함한 자신의 세대를 ‘쌩까 주는’ 후속 세대이기를 바란다. 딸이라는 반(反)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정(正)의 자리에 두고 싶어 하는 김의 욕망은 “처절하게 부정되고 가열하게 척결되고 싶다.”(20쪽)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박다솜은 이러한 “뒤틀린 욕망”을 “결국 딸에게서 자신의 재현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현재의 내가 부정당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나를 추인하는”, “기만적 자기 인정의 구조”12)라고 진단한다. 그것이 아내든 딸이든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쪽) 존재할 수 있는 ‘그 세대’ 남성의 특권적 자의식은, 더 이상 과거의 영광에 머무를 수 없다면 후속 세대에 의해서 부정되고 척결되는 방식으로라도 자신들의 역사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투신했던 ‘그 세대’가 괴물에 가까운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가는 사이 “대의명분”은 “대입 명분”(28쪽)에 수렴되어 버린다. 예컨대 문의 이력이 그렇다. 사교육 시장에서 문은 “‘티처 빨간 줄’”로 통하는데, 그것은 문이 밑줄 그어준 문제가 수능에 빈번하게 출제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문의 이력에 빨간 줄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문은 그 전과 때문에 “입사 길이 막혀 사교육 시장에 유폐되었다는” “자조 섞인 농담”(15쪽)을 던지곤 하는데, 물론 이때의 빨간 줄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면서 생긴 전과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문이 그 당시 자신을 구속하고 고문했던 세력과 대입이라는 명분 아래 화해한다는 점이다. 문은 김에게 “입시 성공 수기집”(26쪽)을 보여 주며 하나의 일화를 들려준다. 어느 날 문은 상담을 받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경찰을 보고 단번에 누구인지 알아봤다고 말하는데, 그는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27쪽)에서 자신을 고문했던 군부 세력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안보라는 국가 명분의 희생자”였던 문은 “내신 5등급을 서울 소재 대학에 보내 억을”(27쪽) 버는, 대학 입시라는 명분을 통해 부활한다. 여전히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나선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13) 문이 “‘억대 연봉’ 할 때 상상하는 액수가 니들 위치고 니들 수준이야.”(27쪽)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한국 근현대사가 낳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긴」은 속물이 된 ‘그 세대’를 고발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딸인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 보미나래(후속 세대)는 소설 내내 부모(당사자 세대)의 그늘에 가려진 존재로 그려진다. “1988년 자주민보 대신 ‘한겨레신문’이라는 제호를 지지했던 것처럼” 첫딸의 이름도 순우리말을 고집한 부모 탓에 보미나래는 태어날 때부터 “웬만한 인생 살아서는 이름값 하기 힘든 이름”(9쪽)을 가지고 살아간다. 애초에 그녀의 삶은 부모 세대가 겪은 경험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과 문은 아내가 임신했을 때 “백민투, 조민중, 이애국 같은 이름은 짓지 말자고”, “최악도 감당하는 아비가 되자고”, “자식이 보수 우익의 젊은 기수가 되건 서울역에서 기타 치며 포교 활동을 하는 종교인이 되건 내 구미에 맞게 조련해 키우지”는 말자고, “급진적인 양육관”(14쪽)을 다짐하지만 그 다짐은 지켜지지 않는다. 김이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쪽)이라고 말할 때, 문이 “암만해도” “난 그건 못 해.”라고, “자식새끼 멍청한 거, 그건 못 해.” “우리 자식이잖아.”(18쪽)라고 말할 때, 방점은 ‘딸’과 ‘자식’이 아니라 ‘나’와 ‘우리’에 찍힌다. 요컨대 ‘그 세대’에게 자식 세대, 후속 세대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서만 인식될 뿐이다.


   소설이 방향을 트는 것은 보미나래의 임신과 출산 이후다. 김은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보미나래를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에코 공동체에 보낸다. 그러나 돌아온 보미나래는 “공동체에서 가져온 낡고 펑퍼짐한 히피풍 원피스를 입고 새벽까지 밖을 쏘다”(30쪽)닐 뿐이다. 그리고 이내 보미나래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김과 아내는 보미나래의 출산 이후 상담 센터를 전전한다. 보미나래의 임신이 성폭력에 의한 원치 않는 임신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담을 거듭할수록 확실해지는 것은 보미나래의 무의식에 박혀 있는 “심리적 외상 경험의 징후”가 아니라 부모 세대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인종차별”(36쪽)이다. 그들은 자신의 딸이 흑인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딸이 공동체에서의 생활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내가 품고 내가 키운 애야. 내가 걔를 몰라?”라며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쪽)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 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 세대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은 보미나래가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확신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한강, 화장실, 혼자, 둘이, 추웠던, 휘파람.


   한 여자애가 보낸 독자 편지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

   곁에 옅게, 있어 주어 고맙습니다.

   편지는 담담하게 끝났다. (41쪽)


   인용한 장면은 결말부에 등장한다. 부모가 딸의 트라우마를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사이, 보미나래 본인은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불어 주는, ‘임테기 천사’가 되어 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곁에 옅게” 있어 주는 보미나래의 행위를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 간의 연대로, 예컨대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 주는 여성들의 연대”14)로 곧장 의미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해는 조연정이 언급하고 있듯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를 관념화시키는 것으로 비약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말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보미나래의 행위가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그 세대’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초과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주지했듯 소설 내내 부모의 그늘 아래 존재했던 보미나래는 결말에 이르러 그들의 이해를 완전히 벗어나 버린다. 이를 통해 소설은 당사자 세대의 실패와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 후속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을 드러내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결론 : 포스트 메모리를 넘어 ‘커넥티브 메모리(connective memory)’로


   앞서 살펴봤듯 ‘포스트-메모리(Post-memory)’는 사건을 직접 겪지 않은 후속 세대의 기억으로, 체험하지 않은 역사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거대한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 세대가 전승하는 개인적, 집단적, 문화적 트라우마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 후속 세대가 형성하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포함되어 있다. 포스트 메모리 세대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역사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사건에 대한 연루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마리안느 허쉬는 그것이 트라우마의 전승인 한편 시공간을 초월한 연대의 가능성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 당사자 세대와 후속 세대의 차이에 주목하고, 그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변형과 매개의 특성에 집중하는, 포스트 메모리 세대의 기억과 표현 방식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허쉬는 그를 통해 역사의 순수한 보전을 넘어선 지점, 단절이 초래한 역설적인 발견과 통찰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 따라 본고는 한국의 역사적 사건 중에서도 5·18 광주 민주 항쟁과 ‘나’ 사이에 놓인 거리감을 다룬 박솔뫼의 「그럼 무얼 부르지」,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한국인 가정과 베트남인 가정의 갈등을 다룬 최은영의 「씬짜오, 씬짜오」, 한때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으나 이제는 속물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이들의 초상을 다룬 이미상의 「하긴」을 통해 후속 세대가 그리는 역사적 사건의 재현 양상과, 그 안에 담긴 정동에 대해 살펴봤다. 먼저 「그럼 무얼 부르지」에서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건으로부터 인위적인 경험과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장막’을 설치하면서도, 끝내 사건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붙들리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빚 없는 세대의 빛’을 포착하고자 했다. 다음 「씬짜오, 씬짜오」에서는 자신들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하는 ‘나’와 ‘투이’의 화해를 통해, 사건의 주체가 아닌 기억의 주체로서 자신의 역사적 책임을 다하는 후속 세대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하긴」에서는 속물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당사자 세대의 초상을 통해, 운동권 세대가 가지고 있는 특권적 자의식의 한계를 살펴보고, 그들의 후일담을 초과하는 후속 세대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주체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각기 다른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세 편의 소설을 분석하며 도출한 공통적 결론은 포스트 메모리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하는 공통 감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후속 세대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연루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이 역사의 주체라는 인식,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그러한 연결의 감각이 정치 사회적으로 파괴되어 있다. 세대와 세대 사이의 단절뿐만 아니라, 지역·계급·젠더 등의 다양한 구별이 그러한 연결의 감각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 메모리는 ‘커넥티브 메모리(Connective memory)’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기억이 이미 종결된 역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를 잇고 현재와 미래를 잇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질문으로 바꾸어 내고 현재의 질문을 미래의 과제로 이어 나가는 연결된 기억의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 Marianne Hirsch, 『The Generation of Post Memory : Writing and Visual Culture after the Holocaust』,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2) 이은정. (2022). 포스트 메모리 세대의 아우슈비츠 이미지 – 영화 <사울의 아들>과 재현 논쟁 -. 인문학연구, 61(1), 217-251.
3) 이은정. (2022). 포스트 메모리 세대의 아우슈비츠 서사와 윤리 – 영화 <사울의 아들>과 윤리적 초과 -.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41(4), 131-164.
4) 이은지, 「광주, 광주들」, 『실천문학』 2018년 봄호.
5) 양재훈, 「인식의 밤에 깨어난 괴물」, 『자음과모음』 2014년 여름호.
6) 노태훈, 「이걸 무어라 부르지」, 『실천문학』 2014년 여름호.
7) 김녕, 「산책하는 공동」, 『오늘의 문예비평』 2018년 봄호.
8) 김홍중, 「탈존주의의 극장」, 『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
9) 김홍중, 같은 글.
10) 소영현, 「‘하는’ 여자들 – 이미상론」, 『문학과사회』 2022년 봄호.
11) 소영현, 같은 글.
12) 박다솜, 「연대가 분열할 때」, 『오늘의문예비평』 2023년 봄호.
13) “김수근 개새끼 때문에 친구 놈 결혼식도 못 가네. 그것들이요, 뭐 하나는 꼭 영구적으로 남겨 놓는다니까.”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김치열이 발주하고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대공분실에 끌려간 사람들은 눈에 안대를 쓰고 오 층 조사실까지 좁은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훗날 그들은 조사실의 층수를 다 다르게 증언했다. 일부러 계단참을 없앤 그 계단은 올라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했고 아주 오랫동안 끝없이 굽이치는 계단을 오르는 악몽을 꾸게 했다. (27쪽)
14)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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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성’에서 ‘아는 여성’으로 : 강화길론 하혁진 소설로 충분하다 2020년 여름, 강화길의 두 번째 소설집이 우리 곁에 도착했다. 화이트 호스(White Horse), 백마(白馬)를 타고.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설 속 그녀들은 더 이상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때마침 동명의 노래인 Taylor Swift의 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I`m not princess, this ain`t fairy tale. (···…) Now it`s too late for you and your white horse to come around.” 강화길은 표제작인 「화이트 호스」에서 스위프트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 이렇듯 변화를 경험한 그녀들은 왕자 대신 백마 위에 올라타 고삐를 쥐고 속도와 방향을 직접 ‘선택’한다. 요컨대 그녀들은 선택이라는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행위 주체라는 지위를 회복한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도, 무엇인가를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그녀들은 동화 바깥의 현실을 ‘살아간다’. 두 번째 소설집에서 수록된 소설만큼이나 눈여겨볼 만한 것은 작가의 말이다. 강화길은 마지막 두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다시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게는 소설로 충분하다.”(작가의 말 297쪽). 이 의미심장한 선언 뒤에 감춰진 진의는 무엇일까. 두 페이지 앞으로 가 보자. “당시 나는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것에, 그러니까 나를 향한 일부 비평에 대해 상당한 피로와 염증을 느꼈다. 신인 작가 입장에서 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글도 있었고, 그간 내가 여성으로서 받아 온 어떤 평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글도 있었다,”(작가의 말 293쪽). 이쯤 되면 ‘소설로 충분하다.’는 비장한 선언 뒤에는 모른 척 지나치기 어려운, 혹은 모른 채 지나쳐서는 안 되는, 숨겨진 내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어떤 평판들이 그녀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나’와 ‘여성’으로서의 ‘나’가 겹치는 경험을 하게 한 것일까. 다른 인터뷰도 함께 살펴보자. 실제로 이 소설을 쓸 때 이런저런 비평에 시달릴 때라서 여러 가지 감정이 혼재된 상태였어요. 평가를 받는 일에 계속 시달리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비평적 언어와 내가 가진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가 쓴 소설을 보호하고 싶기도 했고요. 개인적인 경험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이지만 쓰는 과정에 깨달은 건, 저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여성 작가들이 여성 문제를

  • 최고관리자
  • 2024-11-05
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1

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1 김유림 김숨 「룸미러」 1. 길 위에 표류하는 인간 모빌리티는 시대를 읽는 키워드가 되었으나 문학과 연결고리는 느슨하다. 국내외적으로 『서유견문』, 『열하일기』 , 『오디세이아』, 『리어왕』, 『돈키호테』등 이동을 모티브로 천착한 세기의 걸작들은 넘쳐난다. 반면 모빌리티 인식을 기반으로 문학 작품을 사유한 사례는 미미한 편이다. 현대는 이동성이 범람하는 사회다. 다양한 이동 매체와 첨단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를 제외한 인간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시대의 거울인 문학 분야에서도 이동 매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모빌리티 수행 과정에 천착한 문학 작품 해석은 시대의 재해석이며 사회를 관통하는 인식의 재발견이 될 것이다. 더하여 문학과 다소 거리감이 있는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가치 추구는 문학 분야를 넘어 예술계 전반에 시너지 효과를 추동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김숨 소설 「룸미러」1)는 ‘길 위의 장르’2)로 교통 시스템이 사건의 주요 무대다. 도로에 범람하는 교통수단은 사회의 얼굴이다. 수백만 원 단위부터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자가용, 생계 수단인 물류 수송용 트럭, 관광버스, 배달 오토바이 등은 물신주의, 사회 계급을 표상하는 하나의 기호다. 소설은 집을 떠나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 중에 서사가 전개되어 이동 중에 결말에 이른다. 이때 이동 수단은 가족이 임시 체류하는 거소가 된다. 즉 집이 정주에 근거한 안정된 공간이라면 교통수단은 집을 떠나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잠시 머무는 장소로 불안정한 공간이라 하겠다. 이동 중에 체류지는 사이 공간3)이다 사이 공간의 불안정성은 경제적 약자의 현실 삶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생계 위기로 대별 된다. 「룸미러」의 사건은 어린 사내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화자는 아내다. 소설의 배경 공간은 자가용으로 가족의 이동을 모티브로 한다. 가족은 남편의 이모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다. 외자식인 남편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어릴 적부터 가장 역할을 해왔고 친척 대소사까지 빠짐없이 챙긴다. 아내가 전업주부이기 때문에 가족의 생계는 오롯이 남편이 책임지고 있다. 남편은 두 달 전에 직장을 옮겼다. 가장의 잦은 이직은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원인이다. 고용 불안은 가장의 심리 불안으로 이어진다. 남편의 불안 심리는 아이들이 잠들었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야근 중에도 집에 수시로 전화하여 아이들이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잠들지 않았다고 말하면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퇴근해 오면 잠든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티브이 볼륨조차도 낮춘다. 가장의 강박 행위는 가족이 차를 타고 이동 중에도 계속된다. 남편은 차선을 바꾸면서도 룸미러로 뒷좌석의 아이들을 흘끔 살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깨어나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의 두 눈동자가 흘끔 룸미러를

  • 최고관리자
  • 2024-09-05
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2

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2 김유림 김숨 「막차」 1. 거친 일상으로 질주 현대는 고-모빌리티1) 시대로 접어들었다. 전 지구를 하나의 네트워크 체계에 편입한 이동 매체와 지리적 활동 범위를 넓힌 교통수단의 역할로 인해 ‘이동’은 단순한 움직임을 넘어 현대인의 사회적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인식 틀로 자리 잡게 되었다.2) 김숨 작가는 70여 편의 작품을 통해 서민들의 곤궁한 삶을 재현해 왔다. 특히 이동 공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흔들리는 약자들의 실존 삶을 기계적 상상력으로 재현하고 있어 흥미롭다. 교통수단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인간과 기계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인간과 사물의 동일체 의식은 예술적 감응을 넘어 AI와 공존 시대, 새로운 사유 확장의 논거가 될 것이다. 「막차」3)는 가족의 일상사를 모티브로 모빌리티 수행 과정을 재현한 작품이다. 소설은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과 죽음을 모티브로 천변만화 같지만, 알고 보면 제자리를 돌고 도는 인생 여정을 다룬다. 서사는 부부가 고속버스에 탑승하면서 시작된다. 소설 장르는 사회 계층의 구체적 현실로 부각 되는 인간관계의 불합리한 조건과 그 이면에 내재한 문제들을 형상화하는 장르다.4) 「막차」는 개인 가족사를 다루고 있으나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화자 순옥 부부는 아들로부터 며느리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순옥은 기우뚱 가라앉는 배에서 뛰어내리듯 외출을 서둘렀고 남편은 경황없는 와중에도 바지를 다림질하고 손수건까지 다려 외투 주머니에 챙겨 넣고서 집을 나선다. 순옥은 남편의 행위가 눈에 거슬렸으나 굳이 탓하지는 않는다.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결혼까지 했을 정도의 시간을 함께 사는 동안 익숙하게 겪어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코드는 뺏대요? 코드를 빼두는 거랑 꽂아두는 거랑 전기세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밥솥 코드는 뺐던가. 하루 이틀 비울 것도 아니고, 집을 나서기 전에 두루 둘러보지 않은 게 그녀는 뒤늦게 후회되었다. (13쪽) “어제오늘 손님이 달랑 한 명뿐이었다고요. 그것도 파마 손님이 아니라 염색 손님요. 그깟 염색을 해주고 얼마나 받는다고. 자반 한 손 사고, 달래 한 묶음 사니까 그 돈이 다 날아갑디다.” (「막차」 본문, 이하 쪽수만 표기, 19쪽) 순옥 가족이 처한 현실은 전기 요금이라도 아껴야 할 만큼 곤궁하다. 남편은 자신의 입성만 챙기는 무능한 캐릭터로 아내 순옥에게 생계를 의지하여 삶을 지탱해 왔다. 그동안 남성은 합리적이고 강인하며 가족을 보호하고 가족이 처해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주체로 여겨져 왔다. 반면 여성은 감정적이고 연약하며 보호가 필요한 순종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5) 「막차」의 화자 순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며 남편은 무위도식한다. 이러한 구조는 전통적인 성 역할이 전도되는 양상을 보여주며 가부장제의 변화를 아

  • 최고관리자
  • 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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