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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심금[心琴] - 한남희

  • 작성일 2024-10-30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심금[心琴]


한남희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으니, 학원에 보내달라는 내 말에 엄마는 수돗가의 물바가지를 들어 내 머리통을 내리쳤다. 날마다 허구한 날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사는 엄마였다. 눈두덩이에 시퍼런 멍이 가실 일은 없었다. 자식새끼들 때문에 못 죽고 산다는 말을 달고 사는 엄마였다. 너희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은 시의 댓구 마냥 세트로 붙어 다녔다. 하필 쌀 씻느라 수돗가에서 분주하던 엄마에게 말을 꺼낸 내 잘못이 컸겠지. 기껏 참고 또 참다 꺼낸 말 한마디로 죄 없는 플라스틱 물바가지만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주인집 할머니는 애들 머리 때리면 머리 나빠져서 공부 못한다고 말렸지만, 엄마는 가시나들이 공부 잘해서 뭐 하냐며 들은 체도 안 했다. 물바가지와 파리채 또는 연탄집게 등 손에 잡히는 걸로 엄마는 자식들을 때리고 겁주었다. 남편에게 받은 구박이 자식에게 전염되는 게 흔하던 시절이었다.

   살아남는 게 최우선인 정글 같은 집에서 자란 아이는 음악학원을 거절당한 후 모든 욕망이 거세된 채 그림자 인간으로 자랐다.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취직하였다. 공부 많이 해봐야 팔자만 세질 뿐이라는 강력한 신념을 가진 부모가 80년대에도 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는 사람도 많겠지만, 실제로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주 때리고 욕하고 나가 죽어라 악을 써대긴 했지만, 때때로 좋은 엄마이기도 했다.

   후에 검정고시를 봐서 고졸 학력을 취득했고, 엄마의 바람대로 스물세 살에 결혼했지만, 결혼을 위한 결혼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공장을 떠돌고 식당에서 일하며 바닥을 훑으며 살다가 병을 얻는, 구제가 어려운 삶을 살았다. 욕받이로 살던 아이는 제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고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다.


   일하지 못하고 생계가 어려워졌을 때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되었다. 부끄러웠지만 국가가 나를 돌봐준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몸을 추스르며 쉬고 있을 때 구청 소식지에서 문화원 문화학교 홍보를 발견했다. 첼로 수업이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 바이올린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가 두들겨 맞았던 날이 떠올랐다. 욕망이 거세된 줄 알았는데 첼로 수업이라는 문장에서 가슴이 뛰었다. 수급자는 50% 할인이라는 문구에 용기가 났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수업 날을 기다렸다. 개강일이 되었을 때 조금 떨렸고 가지 말까 하는 마음도 생겨났지만,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네 명의 수강생과 첼로를 옆에 세워둔 선생님을 만났다. 왜 첼로를 배우고 싶은지에 대해 선생님이 물었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비슷한 악기인 첼로 수업이 생겼기에 왔다고 했다. 속사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구질구질하지 않은 척하는 게 나름의 내 특기다. 


   첼로 선생님은 콘트라베이스 같은 느낌의 사람이었다. 묵직한 몸집과 저음의 목소리로 첼로라는 악기에 대해 알려주었고 다음 시간부터 악기 수업을 시작하려면 악기를 대여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첫 시간이니 선생님의 악기를 체험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고 했다.

   첼로라는 악기를 안은 그 순간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실제로 품어본 첼로는 생각보다 크고 묵직했다. 처음 갓난아기를 안아본 사람처럼 조심스럽고 어색하게 악기를 안았을 때의 첫인상은 무뚝뚝하지만 포근한 느낌이었달까. 선생님의 도움으로 왼손으로 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활을 문질러 간신히 소리를 만들어 냈다. 첼로는 한참을 침묵하다 비로소 입을 떼는 과묵한 신사처럼 묵직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서툰 몸짓의 나를 통해 한줄기 소리를 만들어 내주는 여유로움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생명력이 없는 악기가 현과 활을 통해 소리를 만들어 내는 그 순간, 속이 빈 제 몸통을 떨어 그 소리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첼로 몸통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 떨림은 내 몸과 마음과 영혼에 휘몰아쳐 왔다. 약한 전류가 흐르는 듯, 감전당한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타고 흐르는 소리의 울림에 나는 압도당했다. 

   짧은 체험이었으나 너무나 강렬했던 탓에 진이 빠진 채 집으로 돌아와 드러누웠었다.


   화성 행궁에서 축제가 열린다는 기사를 발견했는데 오후엔 궁궐 마당에서 현악기 3중주 연주회도 있을 거란 소식에 나들이에 나섰다. 반지하의 집이 갑갑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행궁에 도착하고 보니 입구가 웅성웅성했다. 경기도의 어느 신문사가 주최하는 백일장이 열리고 있었다. 공연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중학교 2학년 때 꿈이 소설가였다. 사십 년을 잊고 지낸, 그냥 꿈이었다. 백일장이란 단어 앞에서 번쩍 각성이 되었나 보다. 얼결에 현장 접수하고 원고지를 받아들었다. 막막했다. 하필 시 백일장이었다. 글제가 발표되었다. -손-이었다. 감이 잡히질 않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지난 목요일 첼로를 배우던 순간이 떠올랐다. 떨리는 왼손으로 누른 현과 오른손에 들려 있던 활이 만나 소리를 만들어 내던 그 순간, 악기의 몸통을 통해 소리가 되어 공기 중에 퍼지던, 그 짜릿하던 순간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연습용 종이에 그때의 떨림과 설렘과 마음에 전해지던 울림을 생각나는 대로 산문으로 적었다. 일필휘지의 순간이었다. 워낙 강렬한 순간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몇 번을 읽고 다듬어가며 마감 시간에 임박하여 제출하였다. 항상 모든 일에 마무리가 약한 내가 시를 마무리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고 그날 백일장은 빠르게 기억에서 잊혀 갔다. 첼로 수업도 무산이 되었다. 수강생 네 명 중 두 명이 악기 대여에 난색을 보이며 수강을 포기했기에, 수강생 부족으로 수업이 폐강된 것이다. 아쉬웠다. 다시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수원에 다녀온 지 3주쯤 지났을 무렵의 어느 아침 031로 시작되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백일장을 주최한 신문사였다. 내가 낸 시가 백일장 장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믿기지 않았다. 낯선 나를 품어준 첼로의 따뜻했던 품이 만들어 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보잘것없는 삶에, 등불이 켜진 듯 환하게 밝혀준, 첼로가 내 품에 안겼던 그때를 잊지 못할 것이다. 한 편의 시가 되어 내 삶의 문학적 순간은 시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선명한 화질로 간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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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30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방문을 열면 계절이 - 방민의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방문을 열면 계절이 방민의 이번 여름은 억셌다. 외출하는 순간마다 오늘도 많이 더워서 쉽게 지쳐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면 사방에서 눅눅한 빛이 쏟아질 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마음이 쉽게 물러버렸다. 작년 여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나는 에어컨 바람을 맞다가 머리가 아파지면 방에서 나왔다. 아무도 없는 거실은 한여름이었다. 나는 집에서 창고로 쓰이는 작은 방에 들어갔다. 똑같이 더웠지만 햇빛이 들지 않아 바닥이 조금 서늘했다. 이곳엔 오랫동안 읽지 않은 책들이 높게 쌓여 있다. 그 책을 보면 십 년이 더 지났음에도 나는 금방 유년 때로 돌아갔다.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그때의 여름은 딱 이 정도였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들. 마른 햇빛과 이따금 불어오던 바람. 모래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축축하고 시원했다. 나는 노곤해졌다. 적어도 이곳에서 드는 잠은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있다. 여긴 그녀가 남긴 것들의 전부가 있으니까. 일곱 살 무렵에 나는 원래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돌연 논두렁과 매운탕 가게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새로 살게 된 집 바로 옆에는 미군 부대가 있었는데 부대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남자의 표정은 이 시골의 무료함만큼이나 느슨하고 우울했다. 아버지는 줄곧 그 군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갈수록 집에는 비상식량이 늘어났고 나는 그 텁텁하고 자극적인, 어설프게 가공되어 조미료 맛만 남아버린 미트볼이나 라면 밥으로 지루함을 달랬다.어떤 것도 내 호기심과 흥미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집과 부모의 일터에는 경계가 없었다. 정확히는 부모의 일터에 집이라는 공간이 끼어든 셈이었다.총 네 개의 컨테이너가 직사각형의 꼭짓점처럼 위치했고 이를 둘러싼 더 커다란 직사각형 전체가 고물상이었다. 가설 펜스가 고물상과 삭막한 논밭의 경계를 지켰다. 펜스 바깥으로는 ‘미래 비철’이라고 쓰인 파란색 간판이 붙어 있었고, 그건 아주 멀리서부터 생경하게 눈에 띄었다. 집이 왜 이 모양이지, 하다가도 높고 두꺼운 가벽을 보다 보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아버지가 작업하는 공간은 오빠와 내가 방으로 쓰는 컨테이너 옆이었다. 여름이면 그곳에서 습한 공기로 인해 철근의 부패한 냄새와 알루미늄 캔 속에 말라붙은 끈적한 설탕 냄새가 뒤섞여 났다. 아버지는 가만히 앉은 채 용접을 했다. 나는 보안면을 쓴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짓을 따라 했다. 용접이 끝난 뒤 아버지는 충혈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는 그때마다 쪼르르 달려가 이것저것 캐물었다. 알면서도 매번 물었다. 불꽃이 타닥거리며 날아오르는 움직임이나 바닥에서 가볍게 구르는 신비한 현상이, 이를테면 한낮의 불꽃놀이가 꽤 흥미로웠다. 나는 아버지의 설명을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떨어져 있던 걸 다시 이어 붙이는 게 어렵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조악하게 이어진 철근들은 아버지의 발밑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

  • 관리자
  • 202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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