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중일 시인, 다른 겹의 세계에서 만난 나
- 작성일 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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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겹의 세계에서 만난 나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선정작가 인터뷰- 김중일 시인(인터뷰어 : 최다영 평론가)
『가슴에서 사슴까지』(2018) 이후 우리에게 ‘애도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중일 시인은 2002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첫 시집인 『국경꽃집』(2007) 외 다수의 시집을 출간하고 여러 앤솔로지에 참여해왔다. 가장 최근에 발간한 시집은 여섯 번째 시집인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2022)으로, 이전 시집들에서처럼 영원회귀에 대한 사유와 생사의 너머를 직시하는 투명한 시선이 특징적이다. 2012년 신동엽문학상, 2013년 김구용시문학상, 2019년 지훈문학상, 2022년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했으며 2025년에는 지역 문화 강연에 참여하며 활발히 독자들을 만나왔다. 이번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에 선정된 것을 기념하여 시인 김중일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서 문예창작과 학생들과 시창작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수업 외 업무를 포함해서 꽉 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년 상반기 시집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3~4년간 모인 시들을 이제부터 취합하고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늘 부족하지만 최근에는 청탁받은 원고는 재차 퇴고가 필요치 않았으면 해서 부쩍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다음에 출간될 작품은 전작 시집(『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과 연작 형태로 처음부터 구상했습니다. 물론 독자들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전작에 이어 다음에 출간할 작품집의 주요 테마라면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작은 현실에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생면부지의 사람들(나와 너)이 ‘시’라는 가상 공간 속에서 ‘다시 살기’를 함께 하면서 회복해 가는 에피소드들이었습니다. 다음 시집은 그 후속편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전작과 연속적이고, 선명히 다른 점이라면 ‘어린이’들을 메타포로 한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 작가님께 이번 펠로우십이 가지는 개인적·창작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동행’한다는 느낌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입니다. 이번 인터뷰도 같은 층위로 볼 수 있고요. 단지 재정적 지원이 아닌 지속적으로 저의 작품 활동 및 성과에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점은, 저같이 활동 연차도 어느 정도 쌓인 게으른 창작자에게는 창작 과정에서의 긴장감을 주고 실제로 한 편의 작품이라도 더 쓸 수 있는 분명한 동인이 된다는 걸 느낍니다.
-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 세계에서 어린이들이 왜 자꾸 사라져 가는가. 제가 최근 천착하는 질문입니다. 현재 쓰고 있고 다음 시집에 수록될 다수 시편들이 이 질문에서 파생된 상상력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 질문은 사실 꽤 오래된 것입니다. 「마중 왔던 아이들」(『가슴에서 사슴까지』)을 쓰던 시절, 개인적으로는 첫째 아이가 출생했던 시절부터 가졌던 질문입니다. 펠로우십 지원 기간 동안도 국내외에서 어린이들이 희생되는 무수히 많은 사례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여전히 지속되는 이국의 전쟁에서도 가장 큰 희생자입니다. 국내에서도 지속적으로 갖은 형태의 아동 학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지향하던 언어로 그런 현안들을 시 속에 기록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의 언어나 시적 형식이 적절한 그릇이 될지 늘 고민합니다. 이런 일련의 시작 과정들을 올해 펠로우십 기간 동안, 다음 시집 출간을 앞두고 어느 해보다 밀도 높게 임했던 것 같습니다.
- 최근 몇 년간의 작품을 돌아볼 때, 작가님이 스스로 인식하는 창작의 변화 혹은 전환점은 무엇인가요?
첫 시작부터 현재까지, 제가 가진 상상력의 작동이나 그것을 언어로 구현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런 점은 제가 태생적으로 가진 바뀌지 않은 성향같은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산소(O)에 어떤 물질이 덧붙느냐에 따라 이산화탄소(CO2)도 물(H2O)도 되듯이 당시 제가 천착하는 ‘질문’에 따라 조금은 다른 색깔로 작품들이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최근에는 ‘어린이’라는 존재 자체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어린이’는 단지 지구상에 몇 년 살지 않은 체구가 성숙하지 않고 작은 인간이 아닙니다. 어른과 다른 종이자, 인간 이전과 인간(어른) 사이의 경계인인 것 같습니다. 마치 태초의 그리고 미래의 전령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존재인 어린이가 이 현실 세계에서 무방비로 감내해야 하는 폭력, 고통과 희생은 안타깝게도 오래된 차가운 현안들입니다. 제게 있어 ‘창작의 변화 혹은 전환점’을 꼭 특정해야 한다면, 세월호 이후부터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세 번째 시집에 수록된 절반 분량 정도의 시를 쓸 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저 호기심 많은 방랑자 같았다고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세 번째 시집(『내가 살아갈 사람』)은 제게 과도기적 시집이자, 단독자이던 시적 주체인 ‘나’가 타자들을 본격적으로 감각하기 시작한 또다른 ‘나’와 만나는 순간의 기록입니다. 사실을 덧붙이자면, 두 번째 시집 이후 세 번째 시집의 수록작을 쓸 때 내심 저는 한 권의 연시집을 생각했습니다. 오래 사숙하던 시인 이성복의 세 번째 시집(『그 여름의 끝』)처럼 말입니다. 제 세 번째 시집의 1부에서 그런 경향의 시편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호가 침몰하는 일이 생기면서 저도차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제 시에 대한 그런 시적 전환은 제가 사전에 기획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 디지털 플랫폼 시대, 독서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오늘날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독자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독서 환경은 늘 변하고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점점 변화가 가속되는 경향은 선명합니다. 인터넷과 한글 프로세스가 나왔던 1990년대만 생각해도 격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이 처음 등장했고, 미니홈피, 네이버, 다음 등의 대형 포털의 카페, 블로그를 통해 시인들의 시편들이 읽혔습니다. 저작권의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지만 꼭 시집을 통해서 시가 읽힌 건 아닙니다. 최근에는 알다시피 AI가 빠르게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얼마간 시일이 흐른 후 독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분명히 알 수 있겠으나, 제 능력으로는 구체적으로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기술 발달 속도로 봤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앞서 언급한 테크놀로지의 점프업과 연계된 두 번의 전환기에 주목할 점은 오히려 창작가의 창작 환경이라고 생각됩니다. 시 창작의 경우에 비해 인터넷, 한글 프로세스가 특히 소설가의 작업이 미친 효율은 정말 컸다고 예상됩니다만 제가 첨예하게 진단할 부분은 아닌 듯 합니다. 다만 AI는 모든 글 쓰기에 공히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충분히 예상됩니다. AI 시인·소설가가 나오느냐의 문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 수렴되는 순수 문학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크게 주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가령 웹소설이나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콘텐츠 제작 등 상업 자본이 깊이 개입된 장르라면 좀 이야기가 다르겠지만요. 대신 AI는 인터넷과 한글 프로세스보다도 훨씬 더 시인, 작가들의 글 쓰기 효율을 엄청나게 높여줄 텐데, 그 정도가 인간의 창작 과정의 ‘소멸’로 수렴되지 않을지가 걱정이라면 걱정입니다. 한 편의 시의 초고, 소설의 ‘초고’가 탄생하기까지 고투의 과정이 사실상 창작 과정의 90%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편으로 그 과정을 만약에라도 AI로 손쉽게 대체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저 노멀이 된다면―마치 90년대를 경유하며 한글 프로세스조차 사용하지 않는(못하는) 당대 작가들이 고루하다고 여겨지듯―, 분명히 독자들이 인간 시인들, 인간 소설가들의 작품을 대하고 읽는 스탠스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저만해도 80년대까지의 소설들 특히 대하 장편 소설들을 보면 그 창작과정에서 예상되는 작가들의 고투가 경이로울 정도니까요. 그런 작품들에서 제가 가졌던 독자로서의 마음, 그에 상응하는 독자들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 ‘가치’를 향후에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보완될 수 있을지가 숙제입니다. 제가 답을 제시할 수 없지만, 창작자와 독자 사이에 AI라는 테크놀로지 프로세스가 개입될 수 있는 적정한 상호 공감대가 향후에는 어디쯤에서 형성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물론 독자가 AI가 전적으로 개입한 ‘시’보다는 시인 고유의 사유과 손길이 더 많이 묻은 시집을 선택할 거라는 희망을 전제로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그럴 거라고 믿는 편입니다.
- 지금의 젊은 작가 세대―후배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출생 연도에 따른 ‘젊음’은 무색할 때가 많습니다. 문예창작과 학생들과 함께 최근 작품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저는 2010~2020년대 등단한 제2의 백석, 윤동주, 이성복, 기형도, 허수경, 최승자 등을 발견합니다. 시적 정서에서 강한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요. 한 시인으로 내면을 형성해 온, 결코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시대적 배경을 달리해도 말입니다. 즉 결국 세상에 탄생한 한 시인은 발달하는 테크놀로지는 물론이고 시간마저 초월해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쓰게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심지어 AI가 향후 어떤 식으로 창작에 깊이 개입할지 와도 무관합니다. 지금 왕성하게, 여전히 쓰고 있다면 ‘젊은 작가’라는 점은 우리 시인, 소설가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저도 제가 쓸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무엇보다 꾸준히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배 후배 구분 없이 다 같이 노력하면 좋지 않을까요.
- 독자들이 앞으로 만나게 될 작가님의 작품에서 특히 주목해 주었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약자가 희생되어 온 유구한 인간의 역사는 아마도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쩌면 상식적인 인식은 순전한 페시미즘이라기보다는 제 시적 상상력의 원점입니다. 여기서 시작된 질문입니다.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회복하려는 대신 어떻게 모두와 유의미하게 나누고 섞을 수 있는가. 그것이 혹시 ‘시’라는 시공간에서나마 충분히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저의 이전 시집들도, 이번 펠로우십을 통해 다음에 출간될 시집도 한 편 한 편이 그런 나름의 시도들이라고 인식하고 읽어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 1980년대 구로공단을 “내면이 형성된 시공간”이라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첫 시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면들이기도 할 것입니다. “개나리빛깔” 유년 속 지금 가장 떠오르는 기억은 무엇인가요?
제가 유년을 보냈던 그 시절 공장지대는 마치 봄날처럼 따뜻했습니다. 가난한 골목에 늘 따뜻한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했습니다. 노동자들이던 그들의 현실적인 고통은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제가 성년이 되어 여러 자료를 통해 소급해서 인지한 것입니다. 저는 그 시절을 마치 ‘개나리빛깔’을 조명으로 하는 동극의 한 장면으로 기억합니다. 다만 모든 꽃은 환하게 피었다가 핏빛으로 떨어집니다. 여태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라면 친구 아버지가 공장에서 한쪽 손목이 절단된 일입니다. 그는 유쾌한 분이셨고, 두 손으로 하는 그림자 놀이로 저를 비롯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신 분이었습니다. 백열전구 아래서 평상에 앉아 두 손으로 늑대, 꽃게, 토끼, 새 등을 척척 만들어내었습니다. 아이들의 반응에 신이나 새로운 그림자 동물을 개발하는 것도 열심이셨습니다. 그런 그가 한쪽 손을 잃었습니다. 아울러 그가 만든 늑대, 꽃게, 토끼, 새 등도 잃었습니다. 저는 그의 손이 새가 되어 새의 나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손을 잃고 직장을 잃고 웃음을 읽고 결국 가정이라는 둥지 밖으로 뛰어내린 것을 돌이킬 수 없지만, 다음의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고작 ‘시’였고, 물론 제 ‘시’는 유년의 친구와 친구의 아버지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첫 시집 『국경꽃집』(2007)의 서시는 「공룡」입니다. 이 시가 시인님께 각별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시에서 시간을 불안으로 환치시키는 과정의 핵심 메타포로서 ‘공룡’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공룡’을 물리적 형상으로 선명히 인식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때와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상 ‘공룡’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다분히 관념적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시 저는 그 두 가지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는 메타포로서 ‘공룡’을 통해, ‘일몰’로 분절되는 ‘하루’를 알레고리 방식으로 가능하면 길지 않고 짧고 강하게 형상화해 보고 싶었습니다. 「공룡」이 특별히 각별하기보다는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편들에 나타난 상상력의 기조를 집약적으로 담고 있다는 정도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국경꽃집』에서는 감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로 눈앞의 세계가 재구성되곤 합니다. 가령 「창문 한 접시가 놓인 식탁」의 경우 석양이 지는 창밖 풍경과 유리창에 비친 식사하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화자가 먹는 것은 “한 접시의 창문 가득 노랗게 햇볕을 뒤집어쓰고 튀겨진 한강 한 덩이”. “구름셔벗” 등이 됩니다. 「15층의 Y」에서는 한밤중 내리는 장대비가 “밤의 가발”에 비유되어 빗줄기 한 가닥 한 가닥은 검고 지저분한 머리카락처럼 묘사됩니다. 이처럼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들을 보고 있자면 김중일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당시 청년 김중일에게 세계는 어떻게 감각되는 것이었나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제가 거창한 문학관이나 철학적 사유를 기반해서 창작하는 능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등단을 했으나 제게 ‘시’는 경제 활동도 아니었고, 명예를 좇는 일도 아니었으며, 내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의 존재도 감히 바랄 수 없었던 심지어 아버지는 반대하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 학부 전공을 살려 친구들처럼 곧 졸업하면 제약회사에 취직하라고 조언하시면서 시 쓰기는 그냥 취미로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그런 조언을 이해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 시절 제게 ‘시’는 순전히 유희적 놀이였습니다. ‘시’라는 놀이터 안의 저는 당시 확고한 유희적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인식하는 ‘세계’와 잘해야 한 뼘 정도, 거의 붙어서 동행하는 ‘다른 겹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요. 그것은 마치 외계인의 시공간을 믿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저도 지구 밖 누군가에게, 어쩌면 개나 고양이, 새나 곤충들에게는 외계인으로 인식되지 않을까 믿는 입장에서, 제 인식에서 외계인의 존재는 당연합니다. ‘지구’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시간의 겹만 달리하면 여러 존재가 공히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창작방법론적으로 제가 현실에서 물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와 ‘창문’ 한 장을 두고 붙어 있는 또 다른 가상 세계 사이의 길항은, 그 자체로 서로의 반영으로 무수한 시적 ‘비유’의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질문에서의 시편들과 앞서도 언급하신 「공룡」도 그런 상상을 수집한 내용들 그리고 표현들입니다. 농담을 곁들여 정리하자면 저는 그 시절의 제 시편들을 즐거운 뜬구름 잡기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현재 시에 담으려는 내용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것들이니까요.
- ‘불편’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동료들과 함께 시를 읽고 쓰는 일은 어떤 기쁨을 경험하게 하나요?
당시 시동인의 구성원 중에는 미래파의 대표 주자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울러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성향을 달리하는 시인들의 우연한 집합이라는 점은 상당한 시너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미래파가 주목받기 전까지 3~4년간은 사숙하던 선배 시인들의 시집들이 출간된 소위 메이저 시인선에 투고했다가 반려된 경험들, ‘이번 계절 청탁 없음’ 등의 경험을 통해 과연 우리도 첫 시집을 낼 수 있을까 걱정하던 젊은 시인들이란 점에서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이 위로였고 관심사였고, 문학적 자극이었고, 더 잘 써보고 싶다는 동인을 주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수록 지면이 없어도 격주로 한 편씩 신작시를 가져와 마치 학부 습작 시절 빈 강의실에 그랬던 것처럼 ‘진지하게’ 품평회를 진행했던 기억들은 지금도 저를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한 살이라도 막내였던 제가 모임의 ‘총무’ 역할을 줄곧 맡아와서인지 기억이 더 선명합니다.
- 두 번째 시집이자 제30회 신동엽문학상을 받은 『아무튼 씨 미안해요』(2012) 이후 김중일 시의 주체는 ‘불면’하는 존재로 언급되곤 했습니다. 그 당시 김중일 시인에게 ‘불면’이 중요하게 다뤄져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불면’은 다른 겹의 시공으로 드나드는 관문입니다. 앞서 11번 질문에서 언급한 시적 상상력이 작동되기 위한 하나의 주요한 기제라고 해도 좋습니다. 잠든 시간 속의 나와 ‘불면’하는 나는 한 겹쯤 분리된 다른 존재입니다. 후자의 경우 중력의 자장 속에서 잠든 나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몸과 의식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시 속에서만큼은 행동 반경이 무한대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씨’의 공간을 비롯해 어디든 의식이 닿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불면’에 그럴듯한 의미 부여도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창작방법론적인 소소한 전략의 층위로 읽어주시면 적당할 듯 합니다.
- 나주혁신도시에 대해 쓰신 에세이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나주혁신도시로 옮긴 후 글을 쓰는 방식에 환경의 변화가 끼친 영향이 있을까요?
일상 공간의 이동보다는, 현재 어린 아이들과 동행하고 있는 사실이 제 창작 환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칩니다. 최근 제가 ‘어린이’라는 메타포에 천착하고 있는 분명한 동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국내외 어린이 사상 소식을 눈동자에 핏줄이 설 때까지 재차 읽게 됩니다. 그런 변화가 제 시에 반영이 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 시 세계가 온전히 저의 선택을 통해서만 구성되고 컨트롤되지 않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느낌입니다. 이제 저와 제 시는 세계 속 누군가와 동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언급해주신 「내가 쓴 시는 누가 쓴 시일까」라는 에세이에서 이미 이야기했듯, 이제는 제 시가 그 ‘누군가’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 2022년에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이때 신철규 시인과 나눈 대담에서 취미로 드라마를 즐겨 보며 “시를 쓰게 되는 촉발점은 ‘원고 마감일’”이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즘도 드라마를 즐겨 보시는지, 마감일에 가까워지면 “발산하듯 집중을 하”는 편이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시쓰기 자체를 어떤 예술적 층위로 올려놓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한때나마 아버지의 조언대로 실제로 유희적 취미 정도로만 생각하기도 했으니까요. 솔직히 시집을 읽는 것만큼 잘 만들어진 드라마를 보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금 미화하자면 저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제 시에 서사성이 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학부 시절 시와 함께 단편 소설 습작도 했었고요. 저는 학부 시절 등단한 후 졸업까지 1년간을 제외하곤 줄곧 직장인으로 살았습니다. 책 한 줄 읽을 수 없는 육체적인 방전 상태를 드라마 속 이야기로 충전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직장인들은 공감할 것입니다. 현재는 아이들과의 시간이 우선이므로 드라마 대신 ‘헬로 카봇’, ‘에그 박사’, ‘호기심 딱지’ 등을 평소에 더 많이 보는 편이지만, 꼭 보고 싶은 드라마 콘텐츠는 종영 후 하루 이틀에 몰아서 보는 편입니다. 다소 부끄럽지만 여전히 시 창작은 마감일에 맞춰 특정 날짜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 시인으로서 단 하나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돌이켜보면 저는 많은 보통의 독자들이 호응하기에는 다소 복잡하고 장황해 보일 수도 있는 시 세계를 구축해 왔을 수도 있습니다. 대신 제 시를 깊이 호응해 주는 극소수의 독자들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몇몇 분들을 우연히 실제로 만나 뵙기도 했고요. 세간의 눈에 잘 띄지 않더라도 저만의 첨예함으로 제가 쓸 수 있는 것들을 제가 쓰고 싶은 언어로 지금까지처럼 쓸 것입니다. 또한 저는, 인터뷰의 초반에 AI 등도 잠시 언급했듯 앞으로 창작 환경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상상 이상의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가령 AI가 저 자신을 비롯한 시인들의 시 쓰기 과정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지 모릅니다. 거의 확실한 건 개입하게 될 것이란 점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세간의 평균 허용치를 추종하기보다는 저는 저만의 적정선을 찾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상대적인 생산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면 과감히 은퇴해도 좋겠지요. 시 쓰기에 굳이 은퇴라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지만요. 조사 하나나 구두점 하나에도 인간 정서가 반영되는 것이 ‘시’라는 점에서 테크놀로지가 굳이 ‘시’에서 현재의 편의적 수준 이상으로는 개입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다소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다만 소설 장르에서는 아마도 그 효율성과 편의성을 떨쳐내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걱정 반 호기심 반입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시’만은 온전히 제 힘으로만 창작하고 싶습니다. 대신 AI가 재밌게만 만들어준다면 드라마는 지금까지처럼 열심히 즐길 의사는 충분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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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콤마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인터뷰] 강영숙 소설가, 나약한 한 명의 인물을 떠올리며나약한 한 명의 인물을 떠올리며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선정 작가 인터뷰 – 강영숙 소설가(인터뷰어 : 안세진 평론가) 강영숙은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장편소설 『리나』(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문학동네, 2011), 『라이팅 클럽』(자음과모음, 2010/민음사, 2020), 『슬프고 유쾌한 텔레토비 소녀』(문학과지성사, 2013), 『부림지구 벙커X』(창비, 2020), 『분지의 두 여자』(은행나무, 2023), 소설집 『흔들리다』(문학동네, 2002), 『날마다 축제』(창비, 2004),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문학동네, 2009), 『아령 하는 밤』(창비, 2011), 『회색문헌』(문학과지성사, 2016), 『두고 온 것』(문학동네, 2021)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장르와 문체를 자유자재로 바꾸어가며 매 소설 변모해온 강영숙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재난’ 그리고 ‘여성’이라는 두 가지 단어일지도 모른다. 지진으로 파괴된 가상의 공간 ‘부림지구’에 남아있는 생존자들의 모습을 그려낸 『부림지구 벙커X』로 2022년 가톨릭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이외에도 한국일보문학상, 백신애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새로운 장편소설의 출간을 앞두고 있는 그와 서면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상반기에는 계간지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단편소설 「중회」를 발표했습니다. 한동안 단편소설 청탁이 없어서 감각을 잃었던 것 같기도 해요. 마음만큼 표현이 잘되지 않아 어렵게 썼던 것 같습니다. 더운 여름에 몇 주간 집중해서 장편소설 초고를 쓰고 나서 조금 쉬었고요. 9월부터 다시 소설을 수정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15만 자 정도를 썼는데 10월 말까지 끝내려던 저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매일 조금씩 써나가고 있습니다. 작가님께 이번 펠로우십이 가지는 개인적·창작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누구나 그렇지만 소설을 쓸 때는 대부분 혼자 쓰고 혼자 읽고 더러는 혼잣말도 하면서, 온전히 혼자서 작업합니다. 제가 소설을 쓰는지 아무도 모르고요. 그래서 쉽게 게을러질 때가 있는데 그래도 펠로우십에 선정되었기 때문에 게을러질 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또 창작의 측면에서는 그동안 써보고 싶다고 상상만 했던 작품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라서 그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써봤기 때문에 작품이 실패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서 지구 평균 기온의 상승을 산업화 이전(1850년~1900년) 대비 1.5˚C로 제한하자고 했었지만, 2024년 평균기온 상승폭은 1.55˚C로 그 저지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지구가 펄펄 끓게 된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고 앞으로 일어날 변화도 두렵지만,
- 202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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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성해나 소설가, 무해한 아픔과 평평한 왜곡을 넘어, 한 사람의 우주로무해한 아픔과 평평한 왜곡을 넘어, 한 사람의 우주로 아르코 문학 작가 펠로우십 선정 작가 인터뷰 -성해나 소설가(인터뷰어 : 성현아 평론가) 소설가 성해나는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즈」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오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다루는 소설이지만, 더 정확히는 나이도 상처의 모양도 다른 두 여성 ‘오즈’와 ‘하라’가 서로를 보듬어 안는 이야기이다. 2022년에 첫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을 펴냈고, 2023년에는 첫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을 출간하였다. 2025년에 발간한 작품집 『혼모노』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24·2025 젊은작가상, 2024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 2025 신동엽 문학상 등을 연이어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고, 예스24 ‘2024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온라인 투표에서 1위에 오르는 등 대중의 사랑과 지지도 함께 얻었다. 배제되고 소외되는 인물들에 오래 품을 내어주는 성해나 작가는 현재 자신의 모교인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며 다음 세대 문학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드리운 그림자를 집요하게 탐사하는 일을 놓치지 않는, 성실하게 세심하고 치열하게 다정한 성해나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 -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펠로우십에 선정된 이후 『혼모노』라는 작품집을 발간했습니다. 작품집이 발간된 후 부쩍 바빠진 것 같지만, 집필은 부지런히 하려 합니다. 근래에는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이라는 단편을 썼어요. 의존에 관한 가족 서사입니다. - 성해나 작가님께 이번 펠로우십이 가지는 개인적·창작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다음 행보에 관한 고민이 컸던 시기에 펠로우십에 선정되었어요. 어찌 보면 예술가에게 지원사업이란 마찰을 덜어 생계와 창작 사이의 톱니를 더 부드럽게 맞물리게 하는 윤활제가 아닐까 합니다. 이번 사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음 작품을 써나갈 토대를 만들어주었죠. -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시각장애인을 위한 듣는 소설집과 친일 문제, 청년 소외, AI사회의 노동 등을 한데 엮은 기담집을 발간할 예정입니다. 기담집의 경우는 ‘어제-오늘-내일’이라는 테마로 엮을 생각이고요. 내년 발간을 목표로 둔 터라 두 작품 모두 충실히 써나가고 있습니다. - 작품 「인비인人非人」에서는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는 고문에 활용된 건축물 남영동 대공분실을, 등단작 「오즈」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셨습니다. 피해자가 실존하는 역사적 비극을 작품 속에 담아내는 일은 독자 입장에서는 매우 귀한 작업이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자료를 연구하고 따로 공부해야 할 뿐 아니라 재현의 윤리까지
- 2025-12-19
문장, 콤마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인터뷰] 선우은실 평론가, 더 자유로운 비평을 향해더 자유로운 비평을 향해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선정 작가 인터뷰 - 선우은실 평론가(인터뷰어 : 안세진 평론가) 선우은실은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페미니즘, 문학장(場)/문학제도, 저자성/독자성과 같은 동시대의 담론적 섹터를 종횡무진 가로질러온 그의 작업은 그야말로 ‘자립할 수 있는 비평’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 실천에 다름 아니었다. ‘보이는 비평’ 내지는 ‘대화 가능한 비평’이라는 화두로부터 비롯된 최근의 작업에서 선우은실은 ‘비평’이라는 텍스트가 생산되고 소비되어온 관습적 사이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그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와 서면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문학 평론을 쓰는 선우은실입니다. 비평집 『시대의 마음』(문학동네, 2023)과 생활비평산문집 『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음』(읻다, 2024)을 썼습니다. 여성, 청년, 제도, 문학의 구조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두어왔습니다. 비평집과 산문집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를 비평의 언어로, 또 생활 비평의 감각으로 다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 작가님께 이번 펠로우십이 가지는 개인적·창작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이번 펠로우십에서는 제도 안에서 생산되는 비평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제가 지금껏 체험해온 비평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의미를 생산하는 비평, 작품과 유기적 관계를 맺는 비평, 그리고 이 모든 게 혼자의 작업이 아닌 타인과 공유되는 경험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비평이란 작업은 해석을 통해 대화적이거나 구성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또 창작의 과정에서 또한 이미 비평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되, 그걸 ‘비평문’과는 조금 다른 문법으로 풀어나가고 싶었습니다. 비평의 독자를 직접 확인하고 ‘다른 문법’으로 풀어나간다는 점이 최근의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인데요. 비평을 어떻게 ‘행위’로 소환할 수 있을지, 그것을 어떻게 타인과 교류하는 형식으로 제안하고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지가 늘 고민이었기 때문에요. -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라는 제목의 비평 전시 프로젝트를 구상했습니다. ‘텍스트는 어떻게 전시되는가? 우리는 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을 읽는가?’라는 부제를 달아서요. 단적으로 말해서 저는 이 전시의 주인공을 ‘비평’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비평이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창작자를 포함한) 모든 참여자가 비평 행위를 인지할 수 있을까? 비인지적일지라도 일련의 비평 행위를 따라가면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에 대해 대화할 수 있을까? 그런 점들을 내
- 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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