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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공화국

  • 작성일 2025-01-01

   눈사람 공화국


신미나


        눈이 오는 밤에 나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한 움큼의 눈으로 정부를 만들었어요 단 한 개의 초를 에워싼 빛

        딱 그만큼의 빛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어둠을 지우는 것은 빛이 아니었어요

   더 짙고 광막한 어둠이었어요 

      열이 백을 타고, 백이 천을 모으고, 천이 백만을 부르는 눈송이 

 

        그러니 이 나라에서는 그 누구라도 십자가를 홀로 지지 마세요  

   시대의 면류관을 씌워 한 명의 영웅을 만들지 마세요 

        광장에 선 소녀들의 뺨이 붉으니


        평범한 하늘, 평평한 땅, 동등한 어깨를 주세요  

   소와 족제비와 잉어와 곰이 뺨을 부비며 노는 나라 

   할머니와 장미와 월계수와 소년이 꼬리를 달고 덤불 속에 뒹구는 나라 


        백 년 전의 민요가 광장의 가요가 되어 울려 퍼집니다

   몸의 밑바닥을 울리는 북소리 둥둥 울려 퍼집니다 


        그때까지 우리 조용히 심지의 불을 키우기로 해요

   피가 비치는 하늘 아래 

        한 번의 숨, 딱 한 주먹의 혁명으로 이룩한 정부를 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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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

케이크 장현 식사 중에 아내에게 삶의 목적을 물어봤을 때 아내는 내 귀를 개처럼 쓰다듬으며 물을 챙기고 양말을 신고 산책을 나갔지 우리가 케이크에 어떤 것을 기대하는지보다 케이크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중요하다 홀로 산책을 즐기다가 하얀 눈 위에서 죽은 개를 벤치 근처에서 발견하면 아내는 내 엉덩이를 긁어주고 재산은 필요하지만 재산 축적 자체가 내 목을 조를 때 아내는 나를 개처럼 훈육했다 술잔을 씻어주고 안주를 채워줄 때 술잔이 낭자할 때 서로의 배를 베고 깔고 누워 해방된 개처럼 달콤한 꿈을 꿀 때 아내는 내 단벌을 지루해하지 않는다 술이 깨면 산책을 나가자고 한다 종종 내가 남긴 물건은 키우기 힘든 개처럼 아내 곁을 어슬렁거릴 것이다

  • 장현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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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

레시피 장현 이거 놓으세요 어차피 아무도 살아서 못 나가는 단테의 지옥에서 아내는 이미 먹고 있는데 어제까지 적은 레시피 깡통에 넣어 버리고 난 달콤한 것을 내려다보며 아직도 생각하는 사람 아내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달콤함을 누릴 자격 아내를 당당하게 만드는 것 아내가 피하지 않으면 좋겠다 삼키지 말고 초콜릿을 보는 순간 중심을 잃고 초콜릿에 파묻힐 것 같은데 초콜릿을 이미 먹었다고 다 먹어버렸다고 생각할 것 내가 내려다보며 심각해지면 아내가 밥알을 다 삼키며 놓으세요, 달콤한 걸 드세요, 그러면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레시피를 위한 심판을 연다 손을 묶고 입을 벌린다 입을 벌리세요 손이 묶인 내 앞에서 아내는 이미 먹고 있는데 아내를 명랑하게 만드는 것 난 아내의 손가락까지 먹으면 이 지옥에서 나갈 수 있을지 생각하는 사람 놓으세요 이거 놓으면 입이 벌어져요 아내가 웃는다

  • 장현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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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미미 우은주 너무 뜨거워서 일어났어. 벤치에 앉아 땀에 젖은 네 털을 빗긴다. 보드라운 털 사이로 전해지는 열기. 네가 좋아하는 계절을 사려고. 농장 게임을 시작했다. 다시 살아난 양의 고기를 얻고 달걀을 거두며 점수를 쌓는다. 가끔 벼와 콩을 수확하는 일이 휴대폰 너머에서 진짜처럼 느껴진다. 새끼를 낳지 않은 염소에게서 젖을 얻는 일이 이상하지만. 정교하고도 허술한 이 세계는 내 이해를 구하지 않고도 흘러간다. 구매한 부스터를 한꺼번에 열어놓는다. 경험치를 높여 다음 레벨까지 쉼 없이 달린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생각할 틈이 없다. 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를 잡고 돌아와 열매를 거둔다. 파이를 굽는 마음이 현실과 다르지 않다. 내 손끝이 뜨겁다. 고요한 세계. 아이템을 얻을 때까지 코인을 번다. 여름잠에서 깨어날 곰은 없어. 잠을 자기 위해 잠을 잘 수 없다. 너에게 ‘완벽한 계절’을 주려고. 오늘도 농장에 출근한다. 지금이 무사하길 기다린다.

  • 우은주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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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전의 일들

사랑 전의 일들 우은주 개를 쓰다듬고 나면 잊은 것이 생각난다. 웅크리고 앉아 사랑을 기다려본 일. 털의 감촉을 기억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쳐다본 정원에서. 목련의 봉오리를 발견한다. 아직 겨울인데. 이제 산책은 그만하자. 말랑한 연어 스틱의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면. 주머니 속에서는 미지근하고 물컹한 것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과거에서 찾아온 것을 늘어놓으며. 없던 것이 신발장 위에 모인다. 햇살 한 움큼 마룻바닥을 굴러다니는 사이. 덜덜거리며 작동하는 세탁기 안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연어 떼가 돌아다니고. 나는 소파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듣는다. 흘러가는 동안 여러 모양의 순간이 부서진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일. 아무런 의심 없이 쳐다보며 웃던 일이 기억나서 윤기 나는 등을 만져본다. 그만 가볼게. 의젓한 것을 앞에 두고. 기억의 보푸라기를 떼고 또 떼며. 안간힘을 밀어 올린다. 울고 싶으면 울어. 잠깐 슬퍼하는 의식을 치르자. 집에는 너무 많은 영혼이 살지만. 그 사실을 잊고. 개를 쓰다듬은 손으로 손잡이를 돌린다. 저기서 무엇이 오고 있는지 모른 채. 그것은 언제나 문밖의 일이라고 믿는다.

  • 우은주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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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 겨울의 뭐랄까 봄의 그런 거 있잖아

진부, 겨울의 뭐랄까 봄의 그런 거 있잖아 박정대 말하지 않은 모든 것은 어디로 가나? 우선 담배 연기처럼 혹은 그대 한숨처럼 허공을 떠돌다 새벽녘 검은 유리창에 당도하기도 하고 떨어지는 빗방울에 젖어 풀잎의 귀에 당도할 수도 있겠지 침묵이 말없음과 손잡고 걸어가는 진부 진부라는 밤의 초원에서 너는 무슨 말을 타고 그리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는가? 외로움이 고독과 어깨동무하고 찾아들던 밥집 우리가 삼키던 밥알과 국물들 한 잔의 술이 피워 올리던 수많은 불꽃들은 또 어느 허공으로 공허로 사라져 버렸는가? 진부라는 곳에 가면 아니 진부라는 곳에 오면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만 내리는 함박눈 을 지나, 눈 그친 진부 거리를 거닐며 오고 가는 까마귀에게 너의 안부를 묻는다, 묻지 않는다

  • 박정대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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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박정대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자꾸만 목포를 향해 나아갔다 새들이 날아가 죽는 곳 새들도 세상을 뜨는 곳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등불처럼 타오르는 말을 타고 밤을 건너 자꾸만 사랑과 혁명의 시 쪽으로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겨울의 뭐랄까, 봄의 그런 거 있잖아(1)를 보았다 (1) 어떤 드라마의 제목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2)를 보았다 (2) 역시 어떤 드라마의 제목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내가 싸우듯이(3), 모든 것은 영원했다(4)를 읽었다 (3), (4) 정지돈의 소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영원 같은 건 관뒀다 영원은 단지 영원이라는 말 속에서만 영원할 뿐이어서 영원을 유랑하는 말 속에서 끝내 너를 찾아 헤맬 뿐 우리는 싸우지 않으므로 모든 것과 싸우고 영원하지 않으므로 영원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여전히 시를 쓰리라는 걸 안다 그러니 우리가 찾는 건 겨울의 뭐랄까, 첫눈의 그런 거 있잖아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유랑하는 말처럼 당도한 겨울을 보았다 포크레인이 우리의 달걀을 먹어 치우고 상한 구름들은 비행접시처럼 허공에 얼룩으로 남아 있었다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어항 앞에 앉아 하루 종일 낚시질을 했다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깨부수고 오롯이 침묵을 향해 질주할 것 옛 애인 같은 건 옛날에 남겨둘 것 다락방은 창백하고 푸른 먼지로 가득할지니 여전히 먼지를 헤치며 먼 지방으로 산골로 바닷가로 나아가는 생은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가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상습적 고독의 만찬 기후우울증 그러니 담배 한 대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회신 지연(5), 회신 불가 (5) 나하늘의 시 그러니 담배 두 대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어떡할래, 이에야스(6)를 보았다 (6) 역시 어떤 드라마의 제목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그런데 에도 막부 무사들아 머리 모양이 그게 뭐니? 그래갖고 무사할 수 있겠니? 웃으며 물어봤을 뿐 우리는 단지 심장의 파편 같은 이 세상을 애도하느니 우리가 끝내 찾아 헤맨 것은 세상의 모든 드라마로도 꿈꿀 수 없는 겨울의 뭐랄까, 첫눈의 감정의 무한 같은 거 추울수록 찬란해지는 고독 같은 거 고독이 피워 올리는 불꽃 같은 거 어쩌면 사랑과 혁명의 시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7)를 읽었다 (7) 황지우 시인의 시집, 목포에서 인문학 토크를 하는 그를 보았다 더 이상 시를 안 쓰시는가? 저렇게 안색이 좋아지다니! 생각하면서 리스본, 파리,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기침도 그만하고 세상에 침도 뱉지 말자

  • 박정대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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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미자

중성미자* 김지숙 버스가 정류소에 정차한다. 몇몇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고 또 내린다. 차창 밖으로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사내 얼굴에는 호수 아래 검은 돌멩이 하나가 표정처럼 얹혀 있다. 구겨진 셔츠 사이로 언뜻 보이는 오른쪽 팔뚝에는 김미자라는 이름이 붉은 장미와 함께 새겨져 있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일까, 아무것도 지닐 수 없는 죄수가 눈으로 마음으로 사방 벽에 새긴 이름처럼 저 사내는 저 이름의 주인과 영원을 꿈꾸었을까, 김미자는 아직 살아 있고 사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김미자를 향한 것일까, 혹여 영영 헤어져 다시는 볼 수 없대도 생의 마지막 석 달만은 함께 보내자 약속했을까, 흔적 없이 몸과 시간을 통과하는 영혼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허적허적 걸어 다니는 우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하고, 오래된 기억의 벽도, 죽음의 벽도, 사랑이 세운 벽도 통과하는 것일까, 김미자라는 이름도 그렇게 한 사람의 몸을 떠나 저 사내의 몸과 마음을 오가고 있을까. 어떤 사내는 먼 이국의 사원 담벼락 돌 틈, 물결마저 숨죽인 초록 호수 아래 이름 하나를 묻었다.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잠시 환한 얼굴로 서성이고 내린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간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듯한 사람들의 뒷모습은 투명하다. 버스가 사내를 통과하는 동안 사내는 다음 버스가 오는 쪽만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멋진 삶의 풍경마다 드리워진 모든 지나간 것들의 파수꾼처럼, 어떤 버스는 영영 도착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것처럼, * 전하를 띠지 않고 물질과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는 입자. 태양에서 날아온 수많은 중성미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몸과 지구를 흔적 없이 통과하고 있다.

  • 김지숙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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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빛

공원의 빛 김지숙 두 사람이 공원의 밤을 걷고 있네 부드러운 발걸음과 달리 성난 영혼은 일찌감치 사냥개들의 양식이 되었네 푸른 밤공기 속에서 사냥개들은 천천히 식사를 시작하고 주변으로 검은 뼈들이 쌓이는 걸 두 사람은 묵묵히 지켜보네 우리는 우리 안에 너무 많은 사람을 데리고 살고 있구나 사냥꾼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든 총을 겨눌 그에게 가져본 적 없는 부모나 형제의 친근함을 느끼기도 하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걷네 약하고 덧없는 것들이 부서지는 풍경 속에서도 어린 풀잎처럼 영원을 만져 볼 수 있기를 내가 너의 흔적이고 네가 나의 미래이기를 뜨거운 반역의 계절 한가운데서 그늘도 초록이었을 두 사람이 밤의 공원을 걷고 있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묘지를 돌보는 사람들처럼 잔풀이 머금은 물기에 발목을 적시며 그 집 앞에는 두 그루의 아름다운 나무가 있었지 나무는 싱그러운 잎을 가지고 있고 꽃은 향기로웠지 손에 닿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빛처럼 스며들고 달빛에 그을린 풀잎들이 끝없이 흔들리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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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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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한 감정

발굴한 감정 김이듬 계속 출토되는 유물 때문에 나의 무덤이 열려 있다 누가 파헤친 건 아니다 오늘 나온 건 깨지지 않은 청동거울 나는 평생 셀 수 없이 거울을 보았지만 죽는 날까지 거울의 재질과 크기는커녕 거울 뒷면에 용과 소나무 전각무늬가 새겨진 줄 몰랐다 이보다 놀라운 건 영면에 든 지 사백 년 넘은 화가의 진경산수가 발견되었다는 것 집 뒷마당 정리하다가 천 년 전 보물을 찾은 것만큼 너의 무덤에서 백자 달항아리가 발굴된 것만큼 믿기지 않는 일 미심쩍어 버지니아 울프의 경우 이미 샅샅이 긁어모아 발간한 거 아니었나 그녀가 120년 전에 썼다는 미공개 소설이 올해 또 나왔다 나머지 암갈색 토기 조각을 찾지 못해서 바닥 부근 깨진 채로 수장고에 전시된 곧은 입 작은 단지 세상에나 난 직언한 적 없어요 후회할 일이 많아서 제대로 살다 죽은 것 같을 때 새날이 밝지 않은 적 없다 나는 약간의 지겨움을 느끼며 새로이 태어난다 그렇다고 새것처럼 되돌리지 않는다 나는 나의 표면을 세척하며 약간의 얼룩과 오물을 남긴다 입지름 2.3 센티미터 전체 높이 170.5 센티미터 가역성 기억 접착제는 나의 복원에 도움이 된다

  • 김이듬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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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굴성 문장 김이듬 벽에 푸른 문자가 어른거린다 손가락으로 담쟁이덩굴을 걷어본다 어디서 본 구절이 적혀 있다 누군가 연미산고개길 낮은 한옥 담벼락에 흰 페인트를 칠하고 그 위에 파란색으로 널리 알려진 시 한 편을 옮겨적어 놓았다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지 저 아래 빵 가게 외벽 전체가 화사한 꽃과 새 그림으로 꾸며져 있다 나는 몇 발짝 물러나 늦여름의 벽을 쳐다본다 벽에 달라붙어 자라는 담쟁이는 시가 좋아서 초록색 하트를 촘촘히 붙여놓은 것도 아니고 시가 부끄러워서 덩굴손 뻗어 문장을 가린 것도 아니겠지만 머잖아 담쟁이의 생명력이 벽을 점령할 것이다 시가 적힌 담벼락을 뒤덮을 것이다 한없이 사랑으로 번져 갔던가 내가 심은 담쟁이는 쩍쩍 흡반으로 울타리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뿌리만큼 암흑에 살았으므로 정말 내 몸이 어둡기만 했나 반음지였다는 게 시를 향해 손을 뻗는 솔직한 잎새 나의 담쟁이가 내 육체라는 구조물의 구멍과 아치형 창문을 덮고 처마를 뒤덮었을 때 나는 환희했다 벽은 소멸하는 문장을 사랑하여 담쟁이가 자신을 삼키기를 기다렸다 아아 푹썩 주저앉으리 내 문장의 잎새는 벽에 틈새를 만들고 줄기는 배관에 균열을 내어 터뜨렸으며 구조물을 부식시켰다 사랑이여 입에 담지 못할 뿌리여 네가 나를 이겨라 너는 반양지에서 나를 차지하고 빠르고 날카롭게 번진다

  • 김이듬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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