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027
- 작성일 2025-02-01
- 댓글수 1
E-1027*
김서치
바깥에 부슬비가 내린다 이곳은 미술관이고 당신과 나는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다
수백 점의 그림과 사진이 걸린 회랑을 걸어온 끝에
우리는 같은 시점 앞이다
완벽히 자유로운 구조의 파사드는
비밀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힘을 품고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에메랄드빛이 넘실대는 지중해의 절벽
연인과 함께 지낼 하얀 별장은
사랑의 끝과 동시에 완성되었고
건축가는 연인에게
너를 위해 지었으니 네가 가져가라고 한다
요즘 우리는 주소를 지우는 일에 익숙하다
자주 다니던 레스토랑이
하나둘씩 문을 닫아서
남은 건 음식과 커틀러리의 어렴풋한 질감과 디테일
그리고 조명에 의한 왜곡된 색감
너는 밤 10시쯤 마시는 커피가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네가 가진 대부분의 문제가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걸
알고 있다고
요즘도 기타를 치냐는 말에 아니 요즘은 안 친다고
낭만은 비싸고 잠은 부족해서
잘 안 되고 있다고
죽어 버린 시절을 향한
애도를 보내고 싶다
그때 갑자기
어깨에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곧 전시관 안으로
폭풍우가 들이쳤다
쏟아지는 재앙에
머리카락이
블라우스가
흥건히
번갯불 속으로 젖어 들고
네가 뭐라 말하는데
인상을 써 봐도 그게 잘 들리지는 않고
뭐라고? 뭐라고? 소리쳐도 너는 너의 말만 하고
순식간에 물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깜빡이는 샹들리에 아래로 나와 당신과
액자들이 휩쓸렸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흠뻑 젖어 얼굴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순간에 나는
헤어질 때 우리가 함께 쓰고 온 우산은
누가 가져가야 할지 생각했다
* 에일린 그레이가 그의 연인 장 바도비치와 보낼 달콤한 휴가를 꿈꾸며 남프랑스에 지은 은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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