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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 작성일 2026-06-01

  ‘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 이유리론의 방향을 모색하다


최선재


  1. 두 개의 기이함

  처음 이유리 작가의 소설을 읽은 건 등단작인 「빨간 열매」(『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가 대학 전공 수업에서 발췌되었던 때다. 아버지의 화장한 뼛가루를 화분의 흙과 섞자 아버지가 나무의 몸으로 부활하고, 이웃 남자의 어머니-나무와 아버지가 결합하여 “빨갛고 작은 열매”(29쪽)를 낳는 이야기는 당시엔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정말 당황스럽고 기이하게 여겼던 것은, 나무가 된 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물.”이라고 아버지가 말을 걸자 ‘나’는 “깜짝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뭐야 이러면 살아 있을 때랑 똑같잖아, 하고 투덜거리”(15쪽)기만 할 뿐이니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듯한 천연덕스러움은 이유리 소설을 다른 작가의 소설과 구분 짓는 특징이다.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의 해설에서 소유정 평론가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유리의 소설에서 환상은 현실에 아주 밀착되어 있다”1)고 설명한다. 이것은 이유리 소설의 독특한 리얼리즘이기도 하며, 현실과 매우 흡사한 세계에 환상이 삽입되어 독자를 낯선 감각에 빠뜨린다. 나는 이러한 특징을 ‘환상’과 ‘기이함’ 중 어느 것으로 부를지 고민했다.2) 비현실적 사건과 대상에 집중한다면 환상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나는 환상을 현실적 사고방식으로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까지 아울러 기이함이라 부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내가 「빨간 열매」를 읽고 당황했던 것은 잠깐 놀라고 마는 ‘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려는 기이함은 앞서 말한 기이함과 다시 구분 지어야 한다. 이유리 소설의 기이함은 독자에게 불편하고 해소될 수 없는 문제로 남지 않는다. 기이함은 인물들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이유리의 소설이 따뜻함과 발랄함을 전하는 주된 이유이며, 독자 역시 기쁨과 편안함, 소설적 상상력이 빚어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작품은 독자가 명료하고 만족스러운 감상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잘 유지되고 발전하는 줄 알았던 인물 관계가 갑작스레 재검토되고 파멸의 예감까지 남길 때, 독자는 이유리 소설에서 예상하지 못한 불편한 기이함을 느낀다. 전자가 소설 구조로서의 기이함이라면 후자는 독자의 감상으로서의 기이함이다. 그리고 두 기이함은 작품에서 반비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이유리 소설의 균열이자 징후라 할 수 있다.


  2. ‘나’와 ‘너’를 바라보는 따뜻한 기이함

  사실 이유리 소설을 아우를 수 있는 특징은 또 있으니, 거의 모든 작품이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나’와 ‘너’는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인격체로서 동등한 비중을 갖는다. 자기중심적인 ‘나’가 주변의 ‘나’를 밀어내고 단정하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유리 소설의 ‘나’와 ‘너’는 서로를 이해하고 혹시 모를 상처와 불만을 보듬어줘야 할 서사적 의무를 갖는다. 대부분 작품이 연인들의 이야기인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환상은 ‘나’와 ‘너’가 서로를 들여다볼 기회와 의욕을 제공해 준다. 그렇기에 환상이 현실적 무대에 불쑥 나타나지만 인물들은 태연하게 반응하는 구도가 소설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환상이 공포나 혐오를 일으킨다면 ‘나’와 ‘너’의 관계는 진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첫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브로콜리 펀치」에서 ‘나’는 남자친구인 원준의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했음을 알게 된다. 복싱 선수인 원준은 “우편배달부나 중화요리사가 어울릴 것 같은 인상”(82쪽)을 가졌지만, 링 위에서만큼은 “표독스러운 눈빛이며 주먹에 실은 살기”(82쪽)를 보이며 경기에 임한다. 이 모습을 직접 본 ‘나’는 며칠 동안 원준의 전화도 받지 않을 만큼 그를 무서워했고 또한 낯설어했다. 원준 역시 할 얘기가 없다는 이유로 복싱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 그들에게 복싱은 오랫동안 대화의 제재(題材)가 되지 못했다.

  원준에겐 복싱 선수로 활동하는 것에 고충이 있었다. 눈앞의 상대를 쓰러트려야 하는 상황에서 원준은 상대를 향한 미움을 억지로 만들어냈고, 그 미움은 링에서 내려오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연인인 ‘나’에게조차 이야기하지 않고 “너무 많은 괴로움을 자꾸만 억지로 삼키다 보니”(101쪽) 브로콜리가 생겨난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복싱 선수의 손이 부드럽고 복슬복슬한 브로콜리로 변한 건 전복적인 상상이다. 그 손으로 어떻게 일격을 날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원준의 손이 어떻게 묘사되는지다.


  팔뚝 가운데쯤부터 점점 푸르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해서 가장자리가 깔쭉깔쭉한 잎사귀들로 감싸이고, 손가락은 연둣빛 줄기가 되어 끝으로 모여서는 아프로 펀치파마같이 뽀글뽀글 큼직한 푸른 송이를 이룬 그러니까 완벽한 브로콜리, 빼도 박도 못 하도록 브로콜리였다. 게다가 거참 실하기도 하지, 슈퍼에서 마주쳤다면 무심코 덥석 집어 들었겠다 싶을 만큼 신선하고 굵직해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매만질 수밖에 없었다. (『브로콜리 펀치』, 80쪽)


  손에 자란 브로콜리는 아주 싱싱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깜짝 놀라거나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고, 원준 역시 “멋지지.”(80쪽) 하며 흐흐 웃는다. 손이 채소로 변한다는 상상은 제법 그로테스크하게 읽히지만, 작중 브로콜리의 묘사는 상황의 심각성을 덜어내면서 인물과 독자 모두 원준을 궁금해하게 만든다. 반대로 원준의 손이 가시나무의 가지, 또는 벽돌로 변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나’에겐 공포와 혐오를 일으켰을 것이다. 링 위에서 무섭게 싸우던 원준의 모습이 떠오르며 말이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나’가 만나는 노인들,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원준의 손에 감탄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작중에서 손이 브로콜리가 되는 건 아토피처럼 한 번씩은 겪는 일로 여겨진다. 「빨간 열매」에서 느꼈던 천연덕스러움과 같은 맥락이다. 핵심은 신체의 비현실적인 변화가 사람들의 호기심과 호의를 불러들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브로콜리가 생명력으로 충만한 모습이기 때문이며, 원준이 직업적 고충뿐 아니라 브로콜리가 된 손에 수치심까지 느끼는 이중고를 겪지 않도록 해준다.

  「브로콜리 펀치」의 브로콜리화(化)는 환상적이지만 기이한 것은 아니다. 진정 기이한 것은 환상이 사람들에게 낯설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오히려 타인을 돕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환상성의 구조는 단순한 유머 요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외면되던 문제로 초점을 집중시키고 독자들의 상처를 환기시키는 강력한 기폭제로 작용한다.”3) 따라서 기이함은 초반에만 뚜렷하고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솜사탕이 물에 녹듯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편견 없이 ‘너’에게 다가갔던 ‘나’의 따스한 마음과 그로 인한 내면의 치유다. 이유리 소설의 본령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현실에서 재건하고 이어가려는 노력에 있으며, 처음에 느꼈던 기이함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지 못한 우리 삶을 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누군가의 손이 싱싱한 브로콜리로 변했을 때 우린 멋지다는 말을 쉽게 뱉을 수 있을까.


  3. 환상 너머의 싸늘하고 외로운 현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기이함은 ‘나’와 ‘너’의 관계 발전을 위해 기능했던 소설 구조로서의 기이함이 아니다. 이유리 작가의 몇몇 작품은 환상이 붕괴되고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결말을 보인다. 관계가 위태로워지며 세계와 인간이 낯선 것으로 변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작중의 ‘나’와 ‘너’가 놓인 곳은 환상이 소거된 현실이다. 해소되지 않는 불편을 남기는 작품들은 이유리 소설의 큰 흐름을 거스르는 듯이 보인다.

  「하트 세이버」(『하트 세이버』, 북다)에는 운명의 상대를 찾아주는 ‘하트 세이버’라는 연애 주선 업체가 등장한다. 사람의 피 한 방울의 정보만으로 자신과 꼭 맞는 상대를 연결해 준다는 것이 업체의 주장이다. 남자친구 민재와 헤어진 ‘나’는 하트 세이버를 통해 상대를 찾기로 한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도록 누군가 속 시원히 정해준다면 어떨까”(『하트 세이버』 23쪽) 하는 마음에서다. 시간이 지나 하트 세이버에서 매칭해 준 재민은 ‘나’와 무척 닮은 사람이다. 두 사람은 취미와 생활 방식 전반이 일치한다는 사실에 놀라며 빠르게 가까워진다.

1년 뒤 그들은 하트 세이버의 실체를 알게 된다. 업체의 주장은 거짓이었고, 업체 직원들이 신청자들의 사적 정보를 수집해 최대한 비슷한 사람을 매칭해 주던 것이었다. 재민은 “진짜든 아니든 뭐 어때, 우리만 잘 지내면 됐지.”(52쪽)라고 말하고 ‘나’도 거기에 수긍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떠올린다. 운명적 사랑이라는 이유로 ‘나’와 재민은 서로 맞춰주기만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원래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재민을 만나면서 야구를 좋아하게 됐고, 자연스레 ‘나’는 원래부터 야구를 좋아한다고 믿어 온 것이다.

  운명적 사랑이라는 환상은 두 사람을 손쉽게 맺어주었고, 이해의 과정은 생략되었다. ‘나’도 재민도 상대방을 알아 가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트 세이버의 실체는 두 사람의 사랑이 거짓이었음을 뜻하진 않는다. 관계를 지탱하는 근거가 사라진 채, 앞으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많은 시간과 마음을 낭비”(43쪽)해야 함을 뜻한다. 「하트 세이버」의 기이함은 운명적 사랑을 기업이 실현하고 있으며 이를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는다는 설정에 있다. 결말에서 기이함은 관계를 매개하는 힘을 잃고, 그 자리에 분리된 ‘나’와 ‘너’만을 남긴다. 두 사람이 놓인 곳은 환상이 소거된 현실, 싸늘하고 외로운 현실이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북스)4)의 ‘나’는 이별의 슬픔을 잊기 위해 감정전이센터에 사랑을 팔기로 한다. 사랑을 사는 사람은 ‘나’의 친구인 영인이다. 그녀의 남편이 조건 만남을 한 것이 들켜 부부 관계가 악화되었고, 영인은 남편에 대한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나’의 사랑을 사게 된다. 감정전이가 끝난 ‘나’는 사랑이 있었던 자리가 텅 빈 까닭에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는 ‘감정전이 부작용’을 겪는다. 영인은 나름의 해결책으로 동료 변호사인 영욱을 소개하는데, 사랑의 빈자리는 다른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는 논리에서다. 처음에 황당해했던 ‘나’는 영욱이 자신과 취미, 식성 등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바다로 드라이브를 떠난 두 사람은 잠시 휴게소에 멈췄고, 영욱이 화장실에 가는 동안 ‘나’는 영욱의 지갑을 받아 커피를 사려고 한다. 그때 ‘나’는 지갑 속에서 영욱과 어떤 여자가 찍힌 사진을 발견한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영욱은 사진을 무심하게 버리며, 작년에 만난 사람이지만 감정전이를 한 덕분에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욱은 지금까지 네 번의 감정전이를 했다.


  “전 헤어지면 무조건 감정전이를 해요. 얼마나 좋아요?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고, 저에게는 더이상 이 사랑이 필요가 없고. 서로 윈윈이잖아요.”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56쪽)


  영욱은 사랑을 현재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나’와 헤어지면 영욱은 다섯 번째로 감정전이를 할 것이다. 하지만 ‘나’가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나’ 역시 사랑을 팔았기에 영욱이라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바다, 그래 바다를 생각하자”(57쪽)라며 자신을 추스르는 것으로 보인다. 결말에서 바다는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더없이 좋은 그런 풍경, 그곳에 있는 모두는 행복”(57쪽)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감정전이가 가능한 세상에서 사랑은 설레는 시작만 남게 된다. 고통스러운 끝과 그 이후의 시간은 아무도 감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인 영인은 어떻게 됐을까. 감정전이를 받은 영인은 남편을 기꺼이 용서하며 신혼 때처럼 애정을 쏟게 된다. 하지만 타인의 사랑을 이식한 탓에 영인의 행동과 생각은 남편이 보기에도 영인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때가 있으며, 영인도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영인이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다면 이는 감정전이가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남편에게 입은 상처 역시 회복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사랑이 가져온 아픔을 감당할 수 없어 감정전이를 한 영인이 이제 와 인정할 수 있을까?


  「하트 세이버」와 「내게 남은」의 인물들이 원한 사랑은 모두 낭만적 사랑이다. 현실 논리에서 벗어나 감각과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이상적 상태를 낭만이라 부른다면, 두 작품의 낭만적 사랑은 모든 유형의 고통이 제거된, 행복하기만 한 사랑에 가까워 보인다. 하트 세이버와 감정전이센터라는 환상적 설정은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제거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두 작품은 이유리 소설의 기이함의 문법을 결말에서 부정한다. ‘나’와 ‘너’는 서로 이해할 방법도 필요도 없는 완전한 타인이 되었고, 이상하게도 그들이 놓인 결말은 우리의 현실 세계와 많이 닮았다. 현실에는 호의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브로콜리도, 운명이 점지해 준 낭만적 사랑도 없기 때문이다.

  현실이 ‘나’와 ‘너’의 관계 지속이 어려운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은 그간의 이유리 소설에 관한 논의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이유리 소설이 희망적인 어조였던 것만은 아니다. 소유정 평론가가 “환상의 맛을 한 꺼풀 벗겨낸 후에야 나타나는 찐득하고 쩍쩍 달라붙는 맛을 가진 소설 속 인물들은 어딘가 조금 슬프고 처량한 구석이 있다.”5)라고 말한 것처럼, 발랄한 소설적 상상 너머에 현실의 아픔과 슬픔이 비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희망은 남아 있었다. 연작소설 『좋은 곳에서 만나요』(안온북스)에 등장하는 유령 인물들이 현실과 접촉할 수 없음에도, 보고 싶었던 타인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시간 끝에 평온한 마음으로 소멸하는 흐름은 분명 독자에게 인간에 대한 희망을 던지고 있다. 또는 「평평한 세계」(『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처럼 서로를 미워하던 ‘나’와 새엄마가 유령이 된 후에야 처음 정서적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그래서 이유리 소설의 온도는 따뜻함으로 귀결된다. 「하트 세이버」와 「내게 남은」처럼 차가운 현실을 비추며 끝나는 작품은 분명 예외적이다.

  어떻게 보면 이유리 소설의 환상은 낭만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낭만성은 버거운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현실과 이상을 잇는 다리가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후자의 역할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왜 이유리 소설에서는 환상이 힘을 잃자마자 부정한 공간으로서의 현실이 전면화되는가? 여기에는 환상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이해와 공감, 사랑이 실천되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이 담겨 있는 걸까? 이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작품을 살펴야 한다.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자 올해 2월에 발간된 『구름 사람들』(문학동네) 말이다.


  4. 비정한 현실에서의 인간 해체 서사

  『구름 사람들』은 이유리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이질적이다. 분홍색 구름 위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산다는 동화적 설정은 여태까지의 환상적이고 발랄한 상상력과 연관 있어 보인다. 그렇지 않다. 작중 구름은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이다. ‘나’를 포함한 30여 가구가 살아가는 구름은 대기 중 유독 물질이 단단하게 모여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물도 없고 전기도 없으므로 구름 위 사람들은 열악한 생활을 이어간다. 지상에서는 일조권을 침해하고 땅값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인공 강우제를 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 내용들은 소설을 두세 쪽 넘기면 확인할 수 있다. 『구름 사람들』은 분홍색 구름이라는 무대의 환상성을 시작부터 제거한다. 구름은 비루한 가난의 풍경과 현실의 비정한 논리만이 보이는 공간이며, “구름 위에선 모든 것이 남의 일 같다. 때로는 내 일조차도.”(15쪽)라는 ‘나’의 서술은 앞으로의 전개를 지나치게 잘 요약하고 있다.

  줄거리는 ‘나’가 가족들을 하나씩 잃는 과정과 맞물린다. 원래 ‘나’의 가족은 엄마, 아빠, 할아버지, 남동생을 포함해 다섯이었다. 처음에는 지상에서 상주 가정부로 일하게 된 엄마가 연락을 끊고 사라지더니, 곧이어 할아버지가 오랜 투병 끝에 죽는다. 아빠는 엄마가 도망간 일, 구름 위 사람들을 내몰려는 지상에 대한 분노가 합쳐져 시청에 불을 지르려다 붙잡힌다. 마지막 남은 가족인 동생은 인터넷 방송을 하겠다면서 구름을 먹는 영상을 찍었고, 유독 물질이 몸에 쌓여 죽고 만다. 막힘없이 진행되는 가족 해체 서사는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이며,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원인은 가난이다. 가난은 ‘나’와 ‘너’의 영역을 벗어난 문제다.6)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너’는 필요가 없어지며, 반대로 가난을 타개하지 못하는 ‘나’ 역시 쉽게 자조에 빠진다. 

  『구름 사람들』이 무너뜨리는 환상은 구름만이 아니다. ‘나’에게는 같은 구름에 사는 남자친구인 원이 있다.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 맞고 있던 ‘나’를 어느 날 원이 구해주는 장면이 있다. 다시는 때리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소리치는 원을 보며 ‘나’는 그와 함께 도망치는 모습을 상상한다.


  누군가 내 편을 들어준 건, 내가 맞고 있을 때 내 앞에 서준 건 처음이다. 그 처음이 원이라는 사실이 기쁘다. (중략)

  지금까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평생 찾아 헤매던 해답이 갑자기 눈앞에 환한 빛을 발하며 놓여 있는 것 같다. 원과 함께 도망치는 것. 내 손을 잡아끄는 원을 못 이기는 척 따라가며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멀리 떠나는 거다. 두려움도 죄책감도 모두 나를 꼬여낸 원에게 지워버리면 된다. (『구름 사람들』, 136-137쪽)


  ‘나’가 상상한 사랑의 도피는 낭만적이다. 동시에 자신의 편을 들어준 사람이 원이 처음이라는 사실은, 그동안 ‘나’가 타인으로부터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이 없었음을 밝힌다. 가족들은 돈을 버느라 바빠서 서로 이야기할 시간이 적은데다, 극복할 수 없는 가난과 지상에서의 차별 때문에 구름 위 사람들의 심성은 이타적인 것이 되기 어렵다. ‘나’에게는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너’가 있다는 것조차 환상적인 사건이 된다.

  하지만 원은 ‘나’의 구원자가 되지 못한다. 구름 사람들의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한 시청 앞 데모를 준비하던 중, 아버지는 ‘나’에게 원을 포함한 젊은 남자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데모에 기대하는 바가 없던 원은 돌연 ‘나’에게 섹스를 요구한다. 데모에 참여하겠다면서 ‘나’의 몸에 손을 대는 원은, 그 대가로 ‘나’의 몸을 받으려는 셈이었던 것이다. 결국 ‘나’와 원은 구름 위 쓰레기장에서 섹스를 하지만 그것은 당장의 애욕을 해소하는 일에 불과하다. ‘나’가 원과 함께 도망치는 상상을 하지 않는 것도 이때부터다.

  또 하나는 동생의 장례를 치른 ‘나’에게 김노을이 나타났을 때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김노을은 ‘나’를 다큐멘터리에 출연시키기 위해 접근했다. 김노을은 ‘나’를 위로하고자, 자신의 엄마가 죽었을 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늘어놓는다. 그러자 ‘나’는 원에 이어 두 번째로 누군가 자신을 이해한다고 느낀다.


  “안락. 그래, 안락하다는 느낌에 가까운 것 같다. 안락하다니, 지금 이 상황이 어째서 안락해. 하지만 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누군가가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있어서다. 나를 이해하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중략) 누가 나를 알아주고 위해주는 것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구나. 그리고 이 치명적인 약점을 이제야 깨달은 건······내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많지 않아서구나.” (『구름 사람들』, 274쪽)


  김노을의 위로는 ‘나’가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중요한 계기다.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334쪽) 에필로그에서 반전이 드러난다. 김노을의 엄마가 죽었다는 문자가 장례식장 주소와 함께 ‘나’에게 전송된 것이다. 즉 김노을은 ‘나’를 출연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냈으며, 시간이 지나 자기가 한 말을 잊고 ‘나’에게까지 전체 문자를 돌렸다. 사실 김노을이 했던 말은 환상에 속하지 않는다. 가족의 죽음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 경험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다. 김노을의 거짓말은 『구름 사람들』의 세계에선 환상은커녕 현실적인 공감과 이해조차 온전하지 못하다는 진실을 내포한다. 당황스러운 환상과 천연덕스러운 인물들의 결합이 보여준 유쾌한 기이함은, 이제 잔혹한 현실과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인물들의 간극에 의한 불편한 기이함으로 변해 있다.


  딱 하나, 인물들을 구원하는 것이 있다. 돈이다. 상주 가정부로 일하던 엄마는 지상의 풍족한 생활에 익숙해져 구름 위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인터넷 방송으로 큰돈을 벌겠다던 동생은 유독 물질이 많은 구름을 먹다가 죽었다. 그리고 ‘나’는 김노을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약 2억 7천만 원의 후원금을 받아 구름에서 내려온다. 2억으로 혼자 살 집을 구한 ‘나’는 남은 돈으로 가구와 살림살이를 장만한다. 돈을 물 쓰듯 하는 감각이 빠르게 ‘나’를 집어삼키고 “계급적 감정이라는 자신의 거주지에서 추방당하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7) ‘구름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은 어찌 됐든 ‘나’의 일부였고 같은 구름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미약한 연결고리로나마 작용했다. 무력한 와중에도 끝까지 가난과 가족 문제를 이겨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나’는 벼락처럼 떨어진 거금에 의해 순식간에 ‘땅 사람’으로 변한다. ‘나’의 “불행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 모든 과정이 끝나버렸다는 사실 자체”8)에 있다. 돈은 ‘나’의 생활을 구원했지만 ‘나’의 존재를 소거해 버렸다.


  5. 마치며

  나는 웬만해선 작가의 말을 읽지 않는다. 작가란 자기 글로 말하는 사람이지, 자기 글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사람은 아니라는 조금 오래된 생각 때문이다.9) 『구름 사람들』의 작가의 말은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쓰게 됐는지, 의도한 결과였는지 아닌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구름 사람들』은 내가 지금까지 쓴 소설 중 가장 길고 슬프고 무거운 이야기다. 내가 오하늘을 이렇게 만들어 내놓는 바람에 이 우주 어딘가에 한 사람어치의 새로운 불행이 존재하게 됐다. (중략)

  이대로 소설을 끝내버리는 게, 오하늘이 사는 세상을 이 모습으로 완결 지어 영영 닫아버리는 게 미안하고 두려웠다. 그래서 에필로그를 썼는데 그 안에서조차 하늘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가 행복해지길 원하는지조차 나는 알 수가 없다. (『구름 사람들』, 349-350쪽)


  오하늘은 ‘나’의 이름이다. “평생 구름에 살 팔자인 이름”(283쪽)을 가진 ‘나’는 역설적으로 구름에서 내려옴으로써 더 이상 오하늘이 아니게 됐다. 에필로그에서 그녀는 동네에 백반집을 운영하는, ‘나’와 무관한 사람으로밖에 안 보인다. 한편으로 나는 이유리 작가의 윤리의식에 감동했다. 소설 속 인물에게 큰 책임감을 느끼며, 오하늘의 불행이 우주 어딘가에 남게 된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나 역시 조심스러운 태도로 작품을 검토하며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질문해야 할 것은, 어째서 『구름 사람들』이 이유리 작가에게서 나올 수 있었냐는 것이다. 또한 「하트 세이버」, 「내게 남은」 등의 단편처럼 환상과 현실의 밀착이라는 기이하면서도 정다운 분위기를 어째서 스스로 무너뜨렸냐는 것이다. 독자가 해당 작품들에서 느낀 불편을 해소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불편이 우리 현실과 밀착해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일에 피로를 느낀다. 소홀해지거나 끊어낸 관계가 적지 않다.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사랑을 느껴보려는 소망은 부풀어 오르지만, 낭만이 없는 건조한 현실에선 소망을 충족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모두 구름 사람들인지 모른다. 붕 뜬 생활 공간의 색이 분홍색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즐겁게 상상을 갖고 놀 수 없는 사람들.

  이 글은 이유리론이 아니다. 이유리론의 방향을 모색해 보는 글이다. 내가 집중적으로 분석한 작품들은 작가의 전체 소설 중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며, 최근작인 『구름 사람들』이 없었다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논의였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소설가가 다양한 스타일의 글을 시도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고. 또 누군가는 해당 작품들이 일종의 돌연변이이며, 거시적인 이유리론에서 배제하더라도 큰 지장이 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 명의 독자로서 느꼈던 불편함과 불안함의 감각을 믿고 있다. 또 이러한 감각을 일으킨 작품들이 독자로서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도 사실이다. 이유리 소설에서 ‘나’와 ‘너’는 어떤 조건에서 서로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조건이란 환상과 현실을 어떻게 매개하고 또 밀어내는가.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이 나와야 구체화되겠지만, 나는 이 질문이 이유리론을 더 넓은 영역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는다.



1) 소유정, 「슈거 하이Sugar High」, 『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 2021년, 277쪽.

2) ‘환상’과 ‘기이함’은 앞서 말한 소유정 평론가의 해설(276-277쪽)에 등장하는 표현을 빌린 것이다.

3) 한승빈, 〈삶과 회복의 이야기 - 브로콜리 펀치〉, 아트인사이트, 2021년 7월 10일(2026년 4월 29일 조회).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4844)

4) 이하 「내게 남은」.

5) 소유정, 앞의 글, 290쪽.

6) “이전까지 썼던 소설 속 인물들은 여러 헤어짐을 겪지만 경쾌한 발상의 전환으로 극복하려고 해요. 그런데 이 소설을 쓰면서 이별이나 죽음은 개인사에 가깝지만 가난은 사회적인 문제라 사람이 혼자 극복하긴 어렵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어요. 너무 감상적이지도 과장되지도 않게 인물의 삶을 따라가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박의령, 〈[인터뷰] 이유리, 기상천외한 가난 이야기〉, 채널예스, 2026년 3월 24일(2026년 5월 1일 조회). (https://ch.yes24.com/article/details/82031))

7) 강보원, 「말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주어진 삶」, 『구름 사람들』, 문학동네, 2026년, 344쪽.

8) 앞의 글, 345쪽.

9)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4권』, 황금가지, 2003년, 414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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