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을 위한 유희
- 작성일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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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을 위한 유희
—황유원론1)
오경진
그는 불안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을 사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밤의 해변에서
저기, 꿈(夢·몽)과 환상(幻·환)을 물거품(泡·포)과 그림자(影·영)로 새겨넣으려는 시인이 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파도에 떠밀리듯 들려온다. 잠깐 여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죽어도 된다
우린 그날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에 앉아 있다가
안전요원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 밤바다로 뛰어들었지
…
잠들면 안 돼! 우린 여기서 밤새 놀다 가야 하니까
어차피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그 역(逆)이 아니라
…
내가 더 이상 해변에서 잠들지 않으므로
간혹 해변이 내 곁으로 와
쓰러져 잠드는 밤이 있고
그런 밤이면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어둔 밤의 해변을 홀로 거닐기도 했다
젖은 모래 위에 如, 夢, 幻, 泡, 影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써보며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다는 말
또 그림자 같다는 말을 문신처럼 새겨넣었다
우리 조금만 더 죽자
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
하고 기도하던 밤이 있었다
「여몽환포영」 부분,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신”(文身)처럼 새겨넣은 그것은 “어둔 밤의 해변”의 “젖은 모래 위” 하나의 형상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에는 지워지고 사라질 글쓰기. 꿈이 그렇듯, 허깨비가 그렇듯, 물거품이 그렇듯, 그림자가 그렇듯. 어른거리다가 없어지는 것. ‘있음’으로 피어올랐다가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것. 설령 그것이 진짜 문신이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몸은 어차피 스러지는 것, 몰락하는 것, 죽는 것. “진짜 죽음”이 오면 그것 역시 꿈처럼 허깨비처럼 물거품처럼 잊힐 것이다. 그러면 시 쓰기는 다 무엇일까. 저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조차도 결국 망각의 무로 돌아갈 것인데, 그 게송으로 시를 지어봤자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삶은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을 거니는 것과 같고, 시 쓰기는 어차피 파도가 들이쳐 지워 없어질 모래 위에 “여몽환포영” 하고 한 자씩 새겨 넣어보는 일이다. 세계의 무상(無常) 속에 스러질 것,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사는 절대적인 무(無) 앞에 선 인간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불안을 사랑하는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불안을 사랑한다. 불안의 포로인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시를 짓는다. 문학을 한다. “불안은 가능성에 앞선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현실성이다.”2) 무(無)에서 시작되어 무(無)로 흩어질 세계의 운명 속에서도 시인은 당당히 힘주어 시구를 아로새긴다. 어쩌면 그 빛나는 일필휘지가 무와 무 사이에서 유(有)를 샘솟게 하는 힘이다. 무에서 무로의 이행을 과감히 중단시키는, 강렬한 자유의 정념(情念). 황유원은 시 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를 쓸 때면, 쓰는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사라진다. 통편집된 것처럼. 황홀히 타오르는 백열(白熱)과 함께 잠시 사라지는 머리.”(「황유원의 편지」 부분, 『일요일의 예술가』)
“시짓기는 낱말에 의한 존재의 수립이다.”3) 하이데거는 ‘시짓기’의 본질을 직관하고 있다. 시짓기는 결국 낱말을 가지고 하는 ‘놀음’이다. 그 유희 중에 인간은 세계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는다. ‘없음’에서 ‘없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강력한 ‘있음’의 흔적. 무는 불안을 낳고 불안은 창조가 된다. 동물은 불안을 느끼지 못한다. 오직 인간만이 불안해한다. 백지(白紙) 앞에 선 인간의 불안. 시를 지으며 인간은 불안에서 벗어나 문명으로 향한다. 예술만이 오로지 인간적인 것이다.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아니다. 오로지 예술만이 ‘없음’ 가운데 불안을 느끼는 인간의 전유물이며 시짓기는 예술의 궁극에 있는 하나의 형태이다.
참 좋다
주위를 둘러보면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 천지이지만
돌아갈 곳 아무 데도 없어도
집도 절도 없어도
돌아가고 나면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거
누구나 결국 돌아가고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거
어디로 돌아갔는진 모르겠지만
흔히들 하는 말처럼 그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
참 좋다
늦은 밤 장례식장 갔다 돌아와도 도무지
돌아온 것 같지 않은 기분인 그런 날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의 씨에서 싹이 돋아나
흙을 뚫고 청청하게 솟아오르는 상상에 젖다보면
어느새 세상모르고 다들
잠들어 있다는 거
「돌아가셨다는 말」 부분, 『하얀 사슴 연못』
“돌아가셨다”는 말. 그것은 우리가 ‘어딘가’에서 왔음을 상정한다. 그런데 그곳이 도대체 어디인가? 이 글이 거기에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뿐만 아니라 그 어떤 언어도 명쾌하고 시원하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황유원의 시는 다만, “참 좋다”고 한다. 살아서는 집도 절도 없는 이 역시 어딘가로 돌아간다. 터를 잃고 방황하는 이에게 머묾의 안식을 제공해 주는 것은 결국 말(言)이다.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의 씨”다. “오직 언어가 있는 곳에 세계가 존재한다”고 했던 하이데거는 언어가 오직 인간만의 “소유물”(Gut)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언어는 인간에게 “존재자의 열려있음(Offenheit) 한가운데에 설 가능성”을 승인해 준다.4) 언어가 있기에 인간은 자신의 잠재성을 현실화한다. 인간은 언어로써 ‘개방성’을 자신 안에 담는다. 이를 황유원의 시어에서 찾는다면 ‘씨’(種)다. ‘흙’에서 온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운명이다. 하지만 씨는 흙을 뚫고 올라와 “청청하게 솟아오른”다. ‘없음’과 ‘없음’ 사이의 세계에서 저의 존재를 주장한다. ‘없음’의 세계에서 언어는 ‘있었음’을 알리는 수단이다. 반복하지만, 이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거울과 변신
나는 오늘 세면대로 가서
승려가 세수하며 머리까지 씻듯
얼굴과 머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얼굴 밖을 씻은 김에
얼굴 안까지 씻어내는 기분으로
얼굴 전체를 씻어본다
물이 괸 양손을
얼굴에 좀 더 깊이 갖다 대며
차가운 물의 기운을
얼굴 저 깊은 안쪽까지
보내본다
…
다만 아침에 한차례 세수하러 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충분하다고
믿을 수 있다면
모든 게 충분해진 얼굴로
지금 문밖으로 걸어나가
거울 속 나를 보듯
너를 볼 수 있다면
「상선약수」 부분, 『하얀 사슴 연못』
“얼굴”과 “머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음’이다. 머리카락이 ‘없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얼굴과 머리 사이의 구분을 잊어버린다. “물”(水)의 속성도 그렇다. 물은 경계를 모른다. 인간이 애써 갈라놓은 것을 무너뜨린다. 문명이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인위적으로 물의 길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무한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물은 기어코 그 길을 무너뜨릴 것이다. 문명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질 것이지만, 그 위로 물은 도도하게 흐를 것이다. 황유원이 번역한 ‘물의 인류학’ 서문에서 앤 카슨은 이렇게 말한다. “물은 당신이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다.”5) 카슨이 쓴 이 글의 제목은 ‘잠수’다.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인 물에 우리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세수”는 그러한 물의 기운을 얼굴로 흠뻑 맞이하는 행위다. 찰나에서 무한을 느끼는 일이다. 하지만 이는 아직 시적 주체가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한차례 세수하러 가는 것만으로도/모든 게 충분하다고/믿을 수 있다면’에서 보듯 여전히 “믿어야” 하는 것이다. 물에 무한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여전히 그것을 붙잡을 순 없다. 여기서 시적 주체의 소망은 더욱 구체적으로 바뀐다. ‘모든 게 충분’해져서 “거울 속 나를 보듯” 너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거울”은 무엇인가. 나아가 “거울 속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거울은 어떤 현상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한 분장 도구가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냥 말하기 속에서 이미 말해진 것을 무한하게 만들고 소유할 수 없게 만들며 또한 텅 비게 만들기 위한 도구들이다.”6) 베르너 하마허의 말처럼 거울은 반복의 계기다. 거울을 보는 ‘나’는 거울 안에서 반복된다. 거울을 보는 이는 거울에서 무한을 본다. 거울의 표면은 무한으로 나아가는 경계(境界)다. 자신의 무한을 인식한 화자는 타자에게서도 그것을 보고 싶어 한다. 황유원의 시는 ‘나’에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이 다른 존재에게로 나아가고자 한다. ‘나’와 다른 존재 사이에 쳐진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꿈에 변신하는 자라를 보았다
육안으로 볼 때마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근처 사물들 중 하나로 변해
나는 그것이 자라인지 뻔한 사물들 중 하나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인해
그것이 본래 자라이며
어려서부터 완벽하게 익힌 은폐 엄폐술을 통해
끝없이 사물로 변해 가는 중이며
어딘가로 끝없이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변신한다는 건
본모습을 가린다는 것
…
자라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
넘어서지 못한 채
벽 앞에 선 채
사물처럼 굳어 가고 있다는 거
그런다고 감추고 싶은 과거가 숨겨질 줄 아는가
모든 착각이 일시적이길 바라며
영원한 이합집산에 그치고 마는가
내가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 자라는 계속 사물로 남을 것이다
그 상태를 죽을 때까지 유지할 것이다
「변신 자라」 부분, 『세상의 모든 최대화』
변신(變身)은 몸을 바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몸에 갇혀 하나의 생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존재가 되기를 욕망한다. 변신이 문학의 유구한 주제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꿈. 시적 주체는 여기서 ‘은폐’(隱蔽)의 욕구를 읽어낸다. 왜 다른 존재가 되려는가? “나”의 “본모습”을 가리기 위해서. “감추고 싶은 과거”를 숨기기 위해서다. “넘어서지 못”하고 “사물처럼” 굳어 가고 있는 “자라”에게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자라”와 세계 사이에 “사물”이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자라”는 자신을 넘어 세계의 무언가가 되고자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사물처럼” 굳어 가고 있다.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자라”는 절대로 무언가가 되지 못하고 사물로 남는다. “물속에서 나오려던 자라는 순간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느끼고는/낡은 질그릇 비슷한 무언가로 변해 다시 물속에 가라앉았고/내가 그걸 꺼내려고 손으로 집자/몇 조각 진흙으로 허물어지고 말았다”(「변신 자라」)
고정된 무언가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변신을 추구하는 것. 그러다가 “몇 조각 진흙”으로 허물어질지라도. 황유원의 시는 어느 하나의 상(相)에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되기’를 추구한다. “진흙”으로 허물어진 “자라”는 언젠가 “질그릇”이 되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또다시 무한히 근처의 사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로 돌아올 것이다. 넘어가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것. 그래서 변신은 영원한 꿈으로 남는다. 다와다 요코는 변신을 ‘공간’으로 사유했다. “시적인 변신은 죽음의 위험이 뒤따르는 동물로의 변신에 대한 동경과 인간으로의 변신에 대한 경악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입니다.”7) “동경”과 “경악” 사이에서 움직이는 변신의 꿈은 어느 하나에 멈추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갔다가 또다시 돌아오고, 다시 나아갈 채비를 한다.
유일한 통제자인 모든 존재 안의 아(我)는
한 가지 모습을 여러 가지로 만드는 것,
자신에 머무는 그것을 바라보는 현인들,
그들의 행복은 영원하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은 그렇지 않도다.
카타 우파니샤드
죽음, 황홀한 유한
사자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더 이상 포효가 없게 된다
죽은 사자 두개골로 물을 퍼마시면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갈증이 싹 가시겠지
다 쓰고 내던져진 사자 두개골은 햇빛 속에서 환히 빛나고
빗속에서도 환히 빛난다
사자 두개골로 물 마신 자는 이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고
그 발걸음에서는 사자 굴로 걸어들어가는 자의 결기가 느껴진다
바람에 휘날리는 그의 갈기는 쓸쓸하고
집에는 이제 그 말고는 아무도 없고
…
또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난 사자 굴에는
사자 꿈 대신
사자 한 마리 대신
사자 두개골만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된다
사자 두개골에 어둠이 한 바가지 고여
누구나 지나가다 들고 마실 수 있게 된다
「사자 두개골—HIC SVNT LEONES」 전문, 『초자연적 3D 프린팅』
백수(百獸)의 왕도 죽음 앞에서는 별수 없다. 늙음과 시간의 운명을 맞아들여야 한다. 생전 강렬하게 외쳤던 포효도 무로 흩어진다. “사자”의 “두개골”은 “물”과 “어둠”만이 깃드는 “바가지”가 된다. 한때 쟁쟁하던 “결기”도, “사자”의 얼굴 주위에서 그의 위엄을 높여주던 “갈기”도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꼭 살아서 위풍당당해야만 하는가. “두개골”로 남아 뭇 나그네의 “갈증”을 싹 가시게 해주는 물바가지가 되는 것 또한 좋지 아니한가. 살아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자기”를 비워낸 뒤 그 안에 “어둠”을 가득 품어내는 것. 이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무한을 꿈꿨던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죽음으로 스러진다. 영원을 사유할 수 있는 존재가 유한한 운명을 지녔다는 것은 몹시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초연할 수 있다. 어차피 사라져 없어질 것이니까. 한 사람이 태어나 시인으로 자라나서 시를 쓰고 시집을 출판한다는 것은 모두 우연의 소관이다. 대단히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더 가벼워져도 좋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 생을 자율적-원칙적으로 절대화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온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는 절대적 원칙에 비춰 보면 항상 과도하게 우연적이다.”8) 오도 마르크바르트의 말은 퍽 잔인하지만, 왜인지 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미 죽어서 백골이 된 “사자”의 ‘두개골’로 물을 마신다고 해서 ‘사자의 기운’ 같은 게 솟아나길 기대하는 건 어리석다. 그저 “갈증이 싹 가시”는 것, 그뿐이다. 삶은 우연한 일의 연속이고 죽음 역시 그중 하나다.
“사실에 있어, 아직 ‘최후의 심판’을 받지 못해 관곽 속에 누워 있는 ‘어떤’ 해골들은, 장차 ‘천사’들이 불어 제치는 나팔 소리에 잠을 깨일, 잠든 질료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들은 무(無) 속에, 죽음 속에 무상 속에, 침몰해버린 소멸이 아니고, 부활에의 희원으로 기다리고 누워 있는 암컷들임에 분명하다.” 죽음을 치열하게 사유했던 작가 박상륭은 여기에 이런 문장을 덧붙인다. “그러나 다시 살(肉)은 입지 마라, 그것은 고통인데, 살기뿐만이 아니라 죽기도 그렇다. 하지만 사번이로다.”9) 죽음은 해석에 따라서는 존재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오히려 ‘살’을 벗고 영원의 왕국으로,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일이 될 수 있다. 저 “사자 두개골”은 무엇인가. 그것 역시 종말의 천사를 기다리는 존재인가. 사번(事煩)한 육신을 마침내 벗고 천년왕국으로 들어 올려지길 학수고대하는, 여전히 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중생인가. 황유원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 다음 시를 보면, 시인은 유한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오히려 우리가 무한을 붙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쯧쯧쯧, 한심한 자여—
죽은 후의 일은 궁리치 말고
태어나기 전에 그대가 어디 있었는지나 궁리해 보거라
하고 피타고라스가 말했다
…
사는 일이 앞뒤가 막막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네 생은 앞뒤가 모두 뚫려 있구나
온몸에 힘을 주면 환생이고
온몸에 힘을 빼면 해탈이라는 생각에
잠시 힘을 빼고 한가로이 구름 위에 누워 있었는데
바야흐로 머릿속에 무한이 해방되었는데
깨고 나니 꿈이었고
어느새 다시 꿈속이었다
나는 끝없이 펼쳐진 긴 회랑을 끝도 없이 걷고 있었다
「무한대의 밤」 부분, 『초자연적 3D 프린팅』
음의 무한대에서
나는 마이너스의 음악 속에서
제로를 넘어 소멸을 넘어
마이너스 무한대로 쫄아드네
무한대로 낮은 곳까지 스며들어
질병처럼
고독사처럼
…
박쥐 똥 냄새로 뒤덮인 어두운 지하 동굴 아래로 추락하네
초고층 빌딩의 초고속 엘리베이터처럼!
「골 때리는 아름다움—문제의 핵심」 부분, 『나는 이 왕관이 마음에 드네』
이제, 사라질 시간이다. 한바탕 즐거운 유희도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처음에 아무것도 없었듯이 이제 ‘없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시인은 어깃장을 놓는다. “제로”, 영(零)을 넘어 그 밑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마이너스 무한대”로 나아간다. “마이너스 무한대”로 나아간 시는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까. 일상의 언어로 이것을 붙잡기는 참으로 난망하다. 끝없는 무한대를 향한 사유를 벼렸던 시인은 단 몇 문장으로 정반대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이를 통해 시인은 ‘추락’을 다시 무한한 ‘상승’의 이미지로 변주한다. “박쥐 똥 냄새로 뒤덮인 어두운 지하 동굴 아래”에는 다시 “초고층 빌딩”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없음’의 이면으로 영원히 가라앉다가 보면 무한대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들은 무한을 향한 문학의 욕망을 직시한 바 있다. “참된 뮤즈의 환락을 아는 자는 이 도정에서 결코 극점까지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혹은 거기에 도달했다고 착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흘러넘치는 만족감 자체에서 끝없이 새롭게 생겨나는 동경을 결코 잠재울 수 없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이 말은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존재로서 시인의 운명을 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불행한가? 이 무위(無爲)한 글쓰기를 통해 “시간의 사라짐”을 경험한 시인의 말을 상기해 보라. 슐레겔은 이런 말을 덧붙인다. “시문학의 세계는 … 생동하는 자연의 풍성함과 마찬가지로 헤아릴 수 없으며 무궁무진하다. … 우리 인간 모두에게 영원히 언제까지나 모든 활동과 모든 기쁨의 대상과 소재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단 하나의 신성함의 시, 즉 대지이며 우리 또한 그것의 일부이자 결실이다.”10)
‘자연’이나 ‘대지’ 같은 거창한 단어로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방 안에서 “대왕가오리” 한 마리 무심히 관찰하는 것. 그것이 황유원의 태도와 가깝다. “침실이 전부인 방/나는 가만히 앉아 네가 한 마리 대왕가오리로 변하는/모습을 본다/이윽고 넌 방 안을 우아하게 헤엄쳐 다니며 여기저기/자유로이 배설하고/벌거벗은 채 쓰러진 너의 모습은 마치 포획된 한 마리/대왕가오리”(「대왕가오리의 고독」 부분,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방”이라는 유한한 공간에 갇혔지만, 그곳에서도 “우아하게” 헤엄치는 “대왕가오리”는 곧 시인이다. 그는 “자유롭게 배설”하듯 시를 쓰고 “벌거벗은 채 쓰러진”다. 하지만 그거면 된 것이다. 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침실이 전부인 방/앞으로 두 번 다신 없을/너와/나만의/완벽한 밤바다”
1) 이 글은 황유원의 시를 비평한다. 황유원의 시집 다섯 권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현대문학), 『초자연적 3D 프린팅』(문학동네), 『하얀 사슴 연못』(창비)에 『일요일의 예술가』(난다)에 실린 모든 시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시를 인용할 땐 작품명과 작품이 수록된 시집만 병기하고 쪽수는 적지 않는다.
2) 쇠렌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임춘갑 역, 다산글방, 2007.
3) Heidegger, Martin: 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Verlag Vittorio Klostermann, 1971. 번역은 『횔덜린 시의 해명』(신상희 역, 아카넷)을 참고했으나 원문과 대조하여 문맥에 맞춰 수정했다.
4) Heidegger, 앞의 책.
5) 앤 카슨, 「물의 인류학」, 『플레인 워터』, 황유원 옮김, 난다, 2025.
6) 베르너 하마허, 『문헌학, 극소』, 조효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7) 다와다 요코, 『변신』, 정항균 역, 세창출판사, 2025.
8) 오도 마르크바르트, 『늙어감에 대하여』, 조창오 옮김, 그린비, 2018.
9)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문학과지성사, 1986.
10) 프리드리히 슐레겔, 『시문학에 관한 대화』, 이영기 옮김,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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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비평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최선교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최선교 김혜순은 2002년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을 시작으로, 2017년 『여성, 시하다』를 거쳐 2019년 『여자짐승아시아하기』, 2026년 『공중의 복화술 : 문학은 어디서 시작할까?』에 이르기까지 여성과 여성시를 대상으로 한 시론을 세워왔다. 명백히 여성과 여성시를 위한 시론이다. 그녀는 여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녀는 여성시에 대해서 말한다. 이 진술에 대해 해명하거나 덧붙이고 싶은 말은 없다. 그녀의 시론은 기존의 ‘여성적 글쓰기’ 범주에 속하면서 ‘들림’이나 ‘바리데기’ 등의 동양 무속적 상상력을 통해 개성을 확보한다. 한국에는 ‘여류시’라는 말이 있(었)다. 김혜순은 생물학적 성차 개념에 기반을 둔 ‘여류시’라는 일종의 멸칭으로부터 ‘여성시’의 범주를 구분하려고 했다. 시론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 생물학적 정체성이 아님을, 공중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지만 어떤 순간에는 생생하게 발악하기도 하는 구성적 개념임을 설명하고자 했다. 김혜순의 시는 종종 난해하다거나 초현실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 본인은 그러한 평가가 ‘현실’이나 ‘환상’의 개념을 남성적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현실이 무엇이고, 환상이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나의 시를 초현실이라고 부르는가. 그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여성이 현실이라면?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이 쓴 시, 여성시를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발성기관, 새로운 발성법에 대한 해독이 필요”1)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구체적인 시 형식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2022년 11월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의 개정판을 펴내며 김혜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무엇보다도 여성시는 여성의 형식을 발명한다. 면면히 내려오는 말하기 방법 말고 다른 말하기 방식 말이다.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는가가 여성주의적 발성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다.”2) 이는 김혜순이 여성 시론을 적어나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말하기 방식을 통해 ‘여성시’의 범주를 설계하고자 함을 암시한다. 단지 생물학적 여성에 의한 시가 ‘여성시’가 아니다. 여성이 말하는 시가 바로 ‘여성시’인 것이다. 시 형식에 대한 김혜순의 관심은 1990년대 한국의 ‘여성문학’ 담론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로부터 시작한다. 1990년대 한국 문학장에서 ‘여성문학’을 둘러싼 담론들은 그 당시의─대부분 남성이었던─비평가들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일 경우에만 미학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김혜순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 시론을 만들
- 최선교
- 2026-09-01
문장웹진 비평
분노의 하나비(花火)분노의 하나비(花火) ─ 구소현론1) 하혁진 썩은 과일에 사랑을 담아 건네면 신선해진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다시 살아난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 「요술 궁전」 중에서 * 오랜만이다. 이런 소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한동안 뜸했던 것은 사실이어서, 구소현의 소설을 읽는 내내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잔뜩 화가 난 소설이라니. 이렇게까지 눈치 안 보고 나쁜 소설이라니. 분노의 감정이 차갑게 벼려진 폭력적인 장면들이 설령 보기 좋은 (혹은 보고 싶은) 장면들이 아니더라도 어쩌겠는가. 뒤표지의 표현처럼 그 마음 역시 인간이 가진 ‘진짜’ 마음인 것을. 고백건대 분노가 가득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것이 불순한 마음임을 알면서도 적지 않은 해방감을 느꼈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우리 소설이 그 화를 지나치게 참고 있다고, 너무 오래 참아 왔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튼 구소현의 소설에는 곪을 대로 곪은 마음의 종기를 터뜨리는 것 같은 장면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면. 은호는 피곤한 날에 꼭 꿈을 꿨다. 그녀는 꿈에서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죽였다. 평생 꾼 꿈 중에서 최고로 기분 좋은 꿈이었다. 흉기로 목과 가슴과 배를 수차례 찔렀다. 기어가는 도중에도 계속 뒤쫓아가 마구잡이로 난도질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안면을 가혹할 정도로 가격했다. 눈알을 터뜨리고 광대뼈와 턱뼈를 으스러뜨렸다. 그 뒤 꿈에서 깨기 이전까지는 사람인지 연체동물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하게 시체를 훼손했다. 누군가 ‘꿈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묻는다면 은호는 어떠한 비난도 감수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324쪽)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곤란하다. 조시 코언은 “우리는 분노하면 종종 공격을 연상하며, 심지어 둘을 혼동하기도 한다”라고 지적하며, “하지만 공격은 분노와 달리 행동의 범주에 속한다”2)라고 짚어낸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구소현의 인물들은 느끼고, 행한다. 인용한 장면에서 은호는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극악무도하게’ 그리고 ‘기분 좋게’ 죽인다. 꿈이니까 괜찮다고? 그렇다면 소설은 현실인가 꿈인가. 은호가 말하는 ‘꿈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독자들은 꿈속에 있는가 현실 속에 있는가. 일단은 이렇게 대답해 두자. 끝없는 분노를 생산하고 심지어 부추기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출할 출구는 마땅치 않은 상황, 즉 “분노와 공격의 병목 현상”3)으로부터 이 소설들이 나왔다. 감정은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
- 하혁진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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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 황석현 회색빛 갯벌, 우연히 스며든 사랑 박상영의 소설 세계 「대도시의 사랑법」 도입부에는 연인 규호와 연애를 시작한 지 200일이 지난 시점에서 규호가 홀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고영의 실수로 규호 홀로 떠나게 된 여행에서 고영은 공항철도 창밖을 바라보다, 감정의 리듬과 직면한다. “나 홀로 공항철도를 탔다. 창밖으로 회색빛 갯벌이 계속 이어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대도시의 사랑법」, 184-185면) 이 짧은 문장은 연인 규호와의 단절 이후의 감정을 '슬픔'이나 '외로움'으로 바로 치환하는 것이 아닌, 반복되는 비어 있음, 스스로를 검열하는 감정적 카메라, 종종 회색빛으로 필름이 씌워진 삶의 프레임으로 보여준다. 고영은 ‘갯벌’ 속에 발이 빠지듯 감정적 침몰을 겪으면서도 공허에 침전되지 않으며 곧이어 감정적 전환을 시도한다. 섹시한 팝가수 카일리 미그노 앨범과 립밤. 즉각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립밤을 찾는 행동은 감정을 파국으로 밀어 넣지 않기 위한 자기 정동의 능동적 복구 행위이다. 촉촉한 립밤을 바르며 감정의 표면을 다듬는 조심스러운 생존술로 읽을 수 있다. 입술은 말을 시작하는 신체 기관인 동시에 키스·식사·호흡 등 생존과 욕망의 경계 지점이다. 이는 사랑이 머뭇거리는 자리에서 지금 여기 다시 관계의 준비를 하는 미세한 제스처이다. 이는 관계를 살아낸 몸이 감정을 지속하려는 퀴어한 생존술이자 정동적 자기 조율 방식이다. 연인 규호와의 감정적 관계는 기계적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모르게 끝나가 보이지만, 여전히 감정은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은 도래하지 않을 듯도 보인다. 이 글은 그러한 지속 불가능한 단일한 감정의 리듬, 끊어졌으나 끝나지 않은 애착, 그리고 삶을 살아내기 위한 감정적 생존술을 퀴어 정동1)의 관점에서 따라가 보고자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가 보여주는 감정의 구조, 감각과 기억의 귀환, 기쁨의 부재가 어떻게 문학적 윤리로 전환되는지를 추적해본다. 로런 벌랜트는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에서, 우리가 삶을 지속하게 해주는 어떤 대상이나 관계가 오히려 그 삶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적 조건으로 변할 때의 정동 상태를 ‘잔인한 낙관’이라고 설명한다(윤조원·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24). 현대의 주체는 여전히 ‘좋은 삶(good life)’의 약속을 좇지만, 그 약속 자체가 자기착취적 생존을 강화하거나 정서적 고통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기도 한다. 박상영 소설 속 고영과 규호의 관계 역시 이러한 양가적 구조 안에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착을 통해 버티고 살아가지만, 그 관계는 사회적 제도와 생물학적 조건 속에서 점차 유지되기 어려운 형태로 변하며, 그럼에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내부에 잔존한다. 바로
- 황석현
- 2026-09-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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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유한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오히려 우리가 무한을 붙잡을 수 있다' 평소 유한성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왔지만, 왜인지 이유를 쉬이 말할 수 없었는데 이 글을 통해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정리된 기분이 듭니다. 시를 읽고 쓰는 재미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