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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너에게

  • 작성일 2026-05-01

  거짓을, 너에게

  - 당신이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며 궁금증을 느꼈겠지만 

    차마 <에반게리온>에서 답을 찾지는 못했던 문제들에 대하여


전철희


1. 환상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김애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는 2005년에 출간됐다. 이 책을 처음 볼 당시 나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하 <에반게리온>으로 약칭)이 떠올랐다. 그때의 문단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과 “미래파”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문학인들이 고담준론을 나누는데 초신성의 소설에서 애니메이션을 연상한 내가 부끄러웠다. 

  이제 20년이 지났고 김애란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동안 나는 등단을 했고 평론가의 책무가 비약과 과장이라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연식을 쌓았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20년 전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김애란의 작품들을 복기해 보려 한다.

  거두절미하자면 『달려라, 아비』의 주제는 하얀 거짓말(white lie)이다. 이 책의 표제작 「달려라, 아비」는 편모가정에서 자란 딸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래전 가출했다.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1)이었던 아버지는 가족부양의 책무를 벗어던지겠다는 무책임성 내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려는 욕망 때문에 집을 나간 것으로 보인다. 딸은 그런 정황을 알면서도 아버지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전 세계를 누비면서 달리기를 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소설의 뒷부분에서 아버지의 허접했던 인생이 폭로되지만 그럼에도 딸은 자신의 상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맹목적 ‘믿음’은 자기방어 기제의 산물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무능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패배자의 피가 흐름을 긍정한다는 뜻이고, 아버지가 금의환향해서 명예나 재산을 상속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가 이기적인 무뢰한이었다면 버려진 가족들로서는 그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불신과 미움은 본인을 병들게 하는 감정이다. 아버지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거짓된 믿음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라이너스의 담요로 유용하다.

  당시 주목받은 작품 중 하나였던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는 소녀와 아버지의 대화 장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소녀는 아버지에게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라고 묻는다. 농담에 가까운 거짓말로 일관하던 아버지가 진실을 말하려던 찰나 소녀는 잠이 들고 자신의 탄생에 대한 상상을 시작한다.

  소녀가 아버지의 답을 회피한 이유는 쉽게 짐작 가능하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답은 밋밋하고 초라하다. 남녀가 성관계를 할 때 정자가 난자에 착상과 수정을 해서 아기가 생겼다는 생물학적인 설명은 낭만적이지 않다. “부모님이 사랑해서 자식이 태어났단다”라는 말은 손발이 오글거리고 “너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났단다” 같은 이야기는 촌스럽다. 하물며 작품 속 소녀는 어머니가 없는 듯한데, 자신의 출생에 관한 서사는 과거에 죽거나 가족을 버렸을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포함할 것이다. 재미없고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근사한 허구로 도피하는 편이 낫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이것이 『달려라, 아비』의 수록작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책에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의 제목을 빌리자면,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들은 객관적 현실을 외면하면서 자신의 ‘뇌피셜’만 늘어놓는 “영원한 화자”로 보였다.


2. “웃으면 좋다고 생각해”


  『달려라, 아비』는 독보적인 책이다. 한국문학사에 기록된 작가 중 이처럼 집요하게 “거짓말과 자기기만을 통해 정신 승리하는 사람”의 모습만을, 그것도 긍정적으로 모사한 소설을 써낸 사례는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문학인들은 허구(fiction)를 창조하지만 ‘진실’을 지향한다. 그들로서는 가벼운 거짓말로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인물을 대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본래 소설은 자기기만을 일삼는 정신승리자들을 비판하기 위한 무기였다. 초기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신앙의 세계에 갇혀있던 중세 유럽인을 풍자하고 ‘현생(現生)’으로 복귀하라는 교훈의 소설 『낙관주의자 캉디드』를 썼다. 중국과 한국에서 소설 장르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루쉰과 이광수는, 동양의 구습이 거짓된 것임을 논파하고 현실을 적확하게 볼 것을 제안했다. 20세기 한국의 주요한 평론가들 또한 ‘진실’한 문학에 대한 지향을 공유했다.2)

  이들이 문학의 허구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식의 영역을 벗어난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 진실한 문학의 이념은 근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이다. 지금도 나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은, 가령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한강의 『소년이 온다』 같은 문학작품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실’을 담아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문학의 영향력이 감퇴했다지만, 어쨌거나 문학이 여타의 매체보다 진지하게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고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완전히 사멸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문학은 ‘진실’의 담지자를 자처하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믿고 따르는 ‘진실’이 존재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교리가 ‘진실’로 받아들여졌고, 조선 시대의 사람들에게 유교적 사회질서는 자명한 섭리였다. 당시에는 삶의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교회의 안내를 따르고, 조선 사람은 신분(양반이나 노비 등)에 순종하면 그만이었다. 한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때는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였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없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어떤 정당을 지지하고 기분이 우울할 때에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렇게 무질서한 시대가 되자 문학이 인간과 사회에 관한 진실을 담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퍼지게 됐다. 불안한 세상을 사는 사람은 확실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오늘날에도 자본주의는 건재하다. 허나 문학의 위상은 꽤 많이 떨어졌다. 이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문학책이 아닌 자기계발 서적을 뒤적거리거나 유튜브를 검색한다. 김애란의 첫 소설집이 출간될 때에도 문학의 영향력 감소에 대한 진단은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를 두고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 표현했다.3) 그의 논지인즉 문학만이 진실한 매체로 받아들여지던 ‘근대문학’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이에 한국의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반박했다. 그들은 한국의 근대문학이 아직 진실성을 가지고 있음을 변호하려 했다.

  별로 생산적이지는 않았던 논쟁이 불타오르던 때 신인 작가 김애란은 무덤덤하게 『달려라, 아비』를 출간했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죄책감과 부채 의식을 갖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허구(fiction)를 창조한다. 그 허구가 거짓으로 판명돼도 이야기의 자가증식은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의 소녀들은 진실과 거리가 먼 존재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진실을 추구하기 어려운 세상이라면, 혹은 진실이 상처만 남길 것이라면, 거짓말을 피할 이유가 있는가? 허구라도 삶에 도움이 된다면 충분히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김애란의 소설은 이런 질문들은 던졌다. 문학의 진실성에 관한 논의가 벌어지던 시절 ‘진실’보다 허구가 유용하다는 논지의 소설이 발표됐다는 사실은 흥미롭고 의미심장했다.

  나는 『달려라, 아비』를 처음 볼 때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미안,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던 여성 캐릭터에게, 남성 주인공은 감정이 소거된 거짓된 웃음이라도 지으라는 듯 이렇게 답한다.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이 대사는 정확히 『달려라, 아비』의 주제와 일치한다. 네 삶이 고달프고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었대도 괜찮아, 거짓된 상상으로 도피하면 웃을 수 있잖아, 이 세상에는 별로 희망이 없지만 어쨌거나 웃으면 좋다고 생각해…… 물론 김애란의 소설과 <에반게리온>의 상동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3. 우주세기에서 신세기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특성을 정리한 연구서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출간한 해는 1980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일본근대문학이 종언을 실감하면서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고진이 종언을 생각하게 된 핵심적 계기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로 등단하고 이듬해 『1973년의 핀볼』을 상재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하루키의 초기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런저런 망상을 늘어놓지만 실상 골방에 틀어박혀 여인과의 섹스에만 골몰하는 히키코모리들이다(그래서 여인과의 관계조차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 망상에 불과한지가 헷갈릴 정도이다). 하루키는 인간과 세상을 핍진하게 모사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4) 차라리 그는 정체된 사회에서 ‘진실’을 추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퇴행하는 일본인들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쪽에 가까운 작가였다. 고진은 그의 성공이 근대문학의 위기를 방증한다고 봤다.

  아쉬운 것은 고진이 자국의 하위문화(sub-culture)가 문학의 역할을 대체할 가능성을 고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근대문학의 퇴조를 방증하던 무렵,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인간과 사회를 진지하게 성찰하려던 작가들이 다수 등장했다. 여기서는 비교적 지명도가 높은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1980)을 대표 사례로 살펴보겠다.

  <기동전사 건담>은 우주도시 지온과 지구연방정부의 전쟁을 소재로 삼는다. 작중 전쟁의 향방을 주도하는 인물은 파일럿 아무로 레이와 군인 샤아 아즈나블이다. 이들은 제대로 된 가정환경에서 자라지 못해서인지 정신적으로 미숙하다. 전자는 제멋대로인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후자는 건실한 사회인 행세를 하지만 젊은 여자에게서 어머니의 대체물을 찾으려는 변태 로리콘이다.5) 이렇게 정신 나간 인물들을 무대 위로 올림으로써 <기동전사 건담>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대체로 미친놈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부각했다. 전쟁의 주역이 대체로 미친놈들이라는 설정은 미국, 이란, 이스라엘의 갈등이 한창인 2026년의 상황에서도 되새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조셉 콘래드, 커트 보니것, 조지프 헬러 등등의 반전(anti-war)문학이 가졌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기동전사 건담>이 하루키의 소설보다 ‘근대문학’의 본도를 계승한다고 감히 주장한다.6) 만약 고진이 이 작품을 알았더라면 문학의 역할을 애니메이션 같은 대안 매체가 수행하게 되었다는 진단을 덧붙였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은 전쟁의 원죄로 군대를 갖지 못하는 국가이다. <기동전사 건담>의 감독 토미노 요시유키는 아늑하게 경제 호황을 누리던 사람들이 넘쳐나던 나라에서 전쟁을 논의하고 비판하기 위해 “우주세기”라는 가상역사를 창조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고무된 감독은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스테이지로 나아간다.”7) 하지만 안타깝게도 묵직하게 인간과 사회를 성찰한 애니메이션의 계보는 단명했다. 1980년대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시이 마모루 같은 작가들이 나름의 활약을 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류는 양산형 소년만화와 야릇한 러브코미디로 채워졌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고 1994년이 되자 <에반게리온>이 방영됐다. 이 작품 속 인류는 ‘사도’라는 정체불명의 적에게 침략을 받았다. 사도에게 대항하는 병기 에바는 선별 받은 아이들(children)만이 조정할 수 있다. <에반게리온>의 중심인물은 3명의 칠드런(이카리 신지, 아야나미 레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이다. 이들의 마음도 그다지 건강한 상태는 아니다. 신지는 권위적인 편부 가정에서 자란 탓에 아버지의 인정만 갈구하는 외톨이이고, 레이는 감정이 결여된 꼭두각시 로봇처럼 보이며, 번듯하고 자신감 넘치는 소녀를 연기하는 아스카 또한 불우한 가정사를 경험한 탓에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인정 내지는 사랑을 찾고 있다. 이런 아이들(children)에게 지구의 운명이 맡겨졌다니, 그야말로 세상에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인류의 명운이 걸린 건곤일척의 싸움에 내던져진 인간들이 전부 제정신이 아니라는 설정은 <UFO로봇 그랜다이저>와 <겟타로보>에서부터 <성전사 단바인>부터 <장갑기병 보톰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반복되던 것이고,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기동전사 건담>의 핵심 주제이기도 했다. 앞의 문장에서 언급한 모든 작품은 인간의 광기가 불러올 파국을 경계한다. 반면 <에반게리온>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인물들의 복마전을 보여주다가 전혀 다른 결말로 나아간다.

  이 작품의 후반부는 난해하기로 유명해서 요약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범박하게 설명한다면, 거의 모든 인류가 전멸한 후 생존자 중 한 명인 신지는 불현듯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그 순간 수많은 타인들이 나타나서 그를 둘러싸고 박수를 치며 이렇게 말한다. “축하해(おめでとう)” 내면의 골방에 처박혀 있던 인물이 세상과 소통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기특하게 여기며 칭찬하는 훈훈한 상황으로 보이지만, 이미 그 타인들이 대부분 절멸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장면은 신지의 개인적 상상에 불과할 것이다.8)

  객관적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내면적 환상으로 도피하면 된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마음가짐을 바꾸라. 이것은 불교, 쇼펜하우어, 행복 등등을 키워드로 삼은 거의 모든 책들이 공유하는 식상한 교훈이다. 그래서 한 평자는 <에반게리온>의 후반부가 “자기계발 세미나”9)처럼 보인다고 비아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계보 속에서 그런 식상한 주제는 새롭고 도발적인 것이었다. <기동전사 건담>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애니메이션은 우주세기로 명명된 가상의 연대기를 만들었고, 그 가상세계의 복마전을 묘사함으로써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했다. 반면 <에반게리온>은 인간과 사회의 문제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설정에 따르면 세상은 이미 망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해도 이딴 세상에서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외부와 단절되어 골방에 틀어박히는 쪽을 택했다. <에반게리온>은 그들의 선택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어쨌거나 타자와의 만남을 회피해선 안 된다는 당위론을 제시한 후, 세상과의 소통이 무리라고 느껴진다면 신지처럼 망상의 힘을 빌려서라도 시도해보라고 조언했다. 이것은 우주세기라는 가상의 연대기를 창조해서 인간과 사회를 성찰했던 <기동전사 건담>과 전혀 다른 전개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앞 단어는 “우주세기”의 문제의식이 종언을 고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내가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읽으면서 저 애니메이션을 떠올린 이유이다. 1970년대 무렵까지 한국의 주요한 문학인들은 흡사 1980년대 일본의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그랬듯 인간과 사회의 삶을 진실한 논조로 성찰했다. 최인훈, 황석영, 신경림, 김승옥, 이청준, 박완서 등등의 ‘순수문학적’인 작가들은 물론이고 박영한, 김성종 같은 비교적 ‘대중적’인 작가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1990년 무렵부터 핍진성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젊은 작가들(가령 장정일, 김영하, 배수아, 백민석 등)이 등장했지만, 어쨌든 평단은 이들의 작품도 모종의 진정성을 갖는다고 방어했다. 2000년대에 홀연히 등장한 김애란은 마침내 그런 문학사적 전통에서 단절하여 진실을 포기하고 허구로 도피하는 인물들을 그렸다. IMF 이후 망해가는 것으로 보이던 대한민국에서 희망을 포기해야만 했던 세대의 독자들은, 망상이나 허구의 힘을 빌려서라도 착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김애란의 소설에서 위로를 얻었다. 많은 평론가가 김애란의 첫 소설집에 나타난 명랑함을 상찬했지만, 그 미덕이 ‘거짓’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세대의 슬픈 자화상임을 덧붙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4. 순간, 마음은 하나 되어


  어쨌든 그리하여 나는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과 김애란의 첫 소설집에 흥미를 느꼈다. 허나 내 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4년 이후 일본에서는 수많은 애니메이션이 나왔고 그중에는 <에반게리온>보다 뛰어난 것도 많았다(애당초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만큼 진지하게 새로운 문제의식을 표방하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이후 몇 개의 실사영화,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는데 흥행하거나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도 있었지만 대부분 실망스러웠다.10)

  김애란의 경우는 달랐다. 앞서 언급했듯 『달려라, 아비』의 핵심적 특징은 거짓된 환상에 기댄 사람들의 모습을 부감함으로써 허구에 대한 시대적·메타적 고찰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김애란의 이후 작품들에서 그 문제의식은 단절된 것으로 보였다. 가령 그녀의 두 번째 단편집 『침이 고인다』는 힘겨운 상황을 직면한 인물들이 (가령 질끈질끈 껌을 씹으면서 고이는 침을 통감하면서도) 건실하고 선량하게 살아가려는 모습을 핍진하게 그려냈다. 이는 쿨하게 허구로 도피했던 『달려라, 아비』의 등장인물들과 전혀 다른 태도이다. 

  물론 김애란의 소설은 줄곧 뛰어났다. 나 또한 그녀의 작품은 발표되는 족족 따라 읽었고 실망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를 진실하게 모사하고 “현생에 충실해라”라는 주제로 귀결하는 소설은 김애란 이전에도 많았다. 그녀가 한국문학을 대표할 만한 작가 중 한 명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달려라, 아비』의 독특한 문제의식이 휘발된 것은 아쉬웠다. 다소 SF적인 설정의 단편 「물속 골리앗」이라든가 「침묵의 미래」 같은 작품은 김애란이 여전히 허구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모르겠다는 기대를 품게 했지만 데뷔작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이런 취향의 독자로서는 김애란이 두 번째 장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출간할 때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달려라, 아비』를 통해 “거짓말로 자신을 속여도 괜찮아”라고 해줬던 작가가 20년 만에 다시 “거짓말”을 다루다니! 읽고 나서의 감상은 복잡했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불우한 중학생들이 소통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들의 관계는 하나의 거짓말과 네 개의 진실을 섞어서 자기소개를 하는 ‘게임’에 비유된다. 이 비유는 인간관계에 ‘거짓말’이 섞일 수밖에 없다는 통찰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결말은, 작중인물들이 거짓말을 경유하여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진실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할 때 오롯이 우정을 나누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되리라는, 말하자면 마이크 리의 1996년 영화 <비밀과 거짓말> 같은 하버마스적 비전을 재천명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관계에는 얼마간의 ‘비밀’과 ‘거짓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깨달음을 구현한 것인가? 나는 어떤 독법이 맞는 것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이 감상은 작품의 한계라기보다는 내 논리의 단순함으로부터 비롯됐을 수 있다. 인간관계에 얼마간의 ‘거짓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현상 분석은 타인과 소통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명제와 모순되지 않는다.

  김애란이 최근 출간한 단편집 『안녕이라 그랬어』(문학동네, 2025)는 이 문제를 더욱 정밀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첫 작품 「홈 파티」는 제목 그대로 홈 파티를 배경으로 삼는다. 홈 파티는 집들이와 다르다. 미국 영화를 보면 정원에서 바비큐를 굽고 와인을 마시는 파티 장면이 자주 나오지만, 중산층들조차 닭장 같은 아파트에 모여 사는 한국에서는 그런 문화가 일상적일 수 없다. 홈 파티의 주최자는 영화 <기생충>의 부자 가족처럼 정원 딸린 집을 소유해야 한다. 그들에게 간택될 만한 흥미 요소를 가진 사람들만이 파티에 초대될 자격을 얻는다. 작중 홈 파티의 주최자와 참가자들은 전부 자본주의 질서에서 성공했다. 딱 한 명, 가난한 생계형 배우인 이연만 제외하면 말이다. 

  이연을 제외한 사람들은 고상한 취향을 뽐내다가 세상사에 대한 수다를 떨기에 이른다. 고아원의 퇴소자들이 자립지원금 500만 원을 받으면 명품 가방 하나를 산다는 뉴스가 나오자 그중 한 명은 아이들에게 “금융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논평했다. 이연은 반문한다. “(명품백이 그들의 가난을) 제일 잘 감출 수 있는 거라 그런 거 아닐까요?”(39면) 갑자기 분위기는 어색해지고 이연은 황급히 자리를 뜬다. 왜 이 말이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려 한다는 이연의 통찰은, 진심을 숨기고 거짓된 대화를 이어가는 파티의 참여자들에게 찝찝함을 안길만한 것이었다. 애당초 이 파티는 진심을 허용한 공간이 아니다. 상기했듯 파티의 주최자와 참석자들은 승리자들이다. 이 체제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폐쇄적인 카르텔을 만들고 고급스러운 식사 따위를 만끽하며 투자에 대한 정보라든가 세상에 대한 격조 높은 대화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연은 남들보다 예술에 대한 지식이 높겠지만 당장 다음 계절의 끼니를 걱정하는 프레카리아트이다. 그가 파티에 참석한 이유부터가 경제적인 원조를 준 지인의 부탁에 보답하기 위함이었다. 이들 사이에 무슨 대화를 나누겠는가? 이질적인 타인에게 진심을 내뱉으면 파국이 온다. 파티 참석자들이 이연에게, 당신은 왜 돈도 안 되는 배우가 되었으며 “금융 감수성”도 없이 한심하게 사느냐고 따진다고 상상해 보라. 혹은 이연이 다른 이들에게 정색하고, 소포클레스와 브레히트도 헷갈릴 만큼 일천한 지식을 가진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예술과 사회를 논평하느냐고 묻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다행히 양쪽 모두 그런 말을 참아낼 정도의 예의와 눈치는 있었다. 이렇게 가식으로 충만한 자리에서 모든 사람이 거짓을 연기하고 있다는 진실이 발설되면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홈 파티」의 인물들은 성숙하다. 젊은이들은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고 마음을 나눌 타인을 갈구한다. 허나 ‘성숙’한 사람들은 웬만해선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게 진심을 전해봐야 분란만 생길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성인들은 대부분 진심을 숨긴 채 자리에 맞는 역할(persona)을 연기하는 일에 익숙하다. 모두가 거짓으로 일관하는 세상이지만 놀랍게도 진실이 생겨나는 순간이 있다. 진실은 누군가가 통찰과 용기를 가지고 내뱉은 말이 아니라 우발적인 상황에서 내뱉어진 언사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홈 파티」는 서로의 진심을 숨기는 성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들 사이에서 종종 진실이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허구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우연한 계기로 ‘진실’이 발견된다. 불륜과 이별의 “연기”를 하던 인물들이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올라서 “진실”을 마주한다는 내용의 영화 <화양연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안녕이라 그랬어』의 표제작 또한 거기에 버금가는 울림이 있다. 이 책은 진실을 촉구하지 않는다. 반대로 김애란은 우리의 삶이 거짓으로 충만함을 고발한다. “나”와 당신이 거짓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서글프지만, 언제나 진실은 사실 너머에 존재하는 법이다. 모든 문학이 그렇듯 김애란의 소설 또한 허구(fiction)인데 그 속에서 우리는 종종 진실을 마주한다. 첫 소설집에서 환상을 통해 거짓된 자아를 구성하던 작가는 이제 거짓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1) 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2면.

2) 백낙청, 김우창, 김현의 1970년대 비평이 특히 그런 경향이 심하고 ‘진정성’을 강조했던 1990년대 평론가들 역시 진실한 문학에 대한 염원을 자주 표현했다.

3)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본문에서 상술한 내용은 필자가 이해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종언론의 요약이다. 이렇게 소심한 단서를 붙이는 까닭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종언론을 다룬 평문이 논리적 엄결성을 담지한 논설문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사유의 계기가 될 만한 에세이에 가깝고, 따라서 다른 해석도 가능할 여지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4) 물론 하루키의 소설이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하루키의 소설은 경제 호황의 버블이 끝나가던 시절 향락만을 즐기면서도 무의식적 불안을 느꼈던 일본인들의 퇴행적 심리를 ‘사실적’으로 반영한다.

5) 로리콘(로리타 콤플렉스)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에게 모성애를 기대하는 남성은 사회 통념상 로리콘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6) 이 문장은 개별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담고 있지 않다. 필자 개인의 취향을 굳이 밝혀두자면, 커트 보니것과 조지프 헬러의 소설은 웬만한 대중문학보다도 재미있고, 하루키의 초기작은 그럭저럭 잘 읽힌다. 반면 <기동전사 건담>은 지루하고 쓸데없는 부분도 많다. 재미를 지상 가치로 삼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기동전사 건담>을 가장 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실하게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려 했는지의 문제를 판가름한다면, 이 작품은 동세대 어느 일본 문학작품들보다도 우위에 놓일 만하다. 사실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재미없어진 까닭은 너무 진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하는 편이다.

7) 우노 츠네히로, 주재명·김현아 역,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워크라이프, 2018, 156면.

8) 혹자는 <에반게리온>이 “오타쿠들이여, 골방을 벗어나 타인을 만나라!”라고 설교하는 작품이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감독 안노 히데아키 자신도 얼마간 그런 의도로 창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에서 타인과의 온전한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신지가 정말 타인과 세상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타인과 접촉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타인들에게 박수와 축하를 받는 순간, 오히려 더 자폐적 내면으로 침윤해 들어간 것이지 않은가?

9) 우노 츠네히로, 위의 책, 181면.

10) <에반게리온>을 리부트한 4부작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은 “현생을 살아라”라는 고전적 메시지를 너무 단순화하여 보여줬고, <신고지라>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나는 이 평가 자체가 일본영화의 전반적인 작품성 저하를 방증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최근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는 예외적 감동을 선사했지만 <에반게리온>의 설정(특히 아야나미 레이와 관련된 설정)을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반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감동적인 결말이 인상 깊은 작품이라서 이 평문을 통해 <기동전사 건담>과 <에반게리온>을 알게 된 모든 독자들이 보시길 권하고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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