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 두 번째 폭력
- 작성일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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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두 번째 폭력
- 최은미의 「김춘영」과 현호정의 「달빛」
이미진
1. 오르페우스는 뱀에 물려 죽은 아내를 도로 데려오기 위해 타르타로스로 내려갔다. 그의 슬픈 음악을 들은 하데스는 잔인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데스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에우리디케가 햇빛에 안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리라 소리를 따라 캄캄한 통로를 올라갔고, 오르페우스는 자기가 햇빛에 안착한 그 순간 비로소 그녀가 아직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영원히 잃었다.1)
팔레스타인 문제를 꾸준히 다루어 온 일본의 비평가 오카 마리는 『기억/서사』에서 탈 자아타르 포위와 학살 사건을 다룬 리아나 바드르의 소설 『거울의 눈(1991)』이라는 작품을 소개한다. 베이루트 교외에 있는 탈 자아타르 난민 캠프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쫓겨온 사람들이 30년간 난민 생활을 하고 있던 곳으로, 1975년부터 1976년에 걸쳐 레바논의 기독교도 우파 민병대에 의해 몇 개월간 지속적으로 파괴되었다.
『거울의 눈』은 이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작가가 7년에 걸쳐 인터뷰한 증언들을 토대로 집필된 소설이다. 오카 마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소설 중반부 돌연 등장했다 사라지는 ‘나’라는 인물이다. 그가 캠프 밖에서 안으로 잠입했다는 설정은 그간 비인칭의 시점을 따라 캠프 안의 상황에 몰입했던 독자에게 갑작스러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 거리감은 캠프 안의 전사 중 한 사람인 하산이 캠프 밖의 전사들을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변된다. “뜨거운 물 속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은 찬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과 똑같이 느낄 수 없다.”2) 오카 마리는 하산의 말보다는 캠프 밖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안의 사람이기도 한 ‘나’라는 인물이 놓인 이중적인 위치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거울의 눈』의 작가가 왜 ‘나’라는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혼란을 초래하는지를 말이다.
『기억/서사』에는 또 다른 소설 발자크의 「아듀」도 등장한다. 이 소설은 귀부인이었으나 전쟁 중 처참한 일을 겪어 기억을 잃어버린 스테파니와 그녀를 사랑한 필립의 이야기다. 재회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스테파니를 보고 절망한 필립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그녀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주고자 한다. 하지만 힘겹게 기억을 되찾은 스테파니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3)
2. 나는 쫓겨날 것이다.4)
‘사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사건’을 온전히 말할 수 없으므로5)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끝에서 두 번째 세계』의 <현재적 관심>이라는 챕터에서 에우리디케를 잃어버린 오르페우스를 역사가로 호명함으로써, 그에게 ‘상실 이후’의 임무를 부여한다.
오르페우스와 마찬가지로 역사가는 죽은 존재들을 되살리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야 한다. 죽은 존재들은 역사가의 초혼가를 얼마나 멀리까지 따라올까? 현재의 햇빛에 안착한 역사가가 죽은 존재들을 잃어버릴세라 고개를 돌릴 때, 그들은 이미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다. 하지만 역사가가 죽은 존재들을 처음 소유하게 되는 때는 그들이 영원히 떠나는 그 순간, 그들이 역사가가 만든 역사에서 영영 사라지는 그 순간 아닐까?6)
역사가는 죽은 존재들을 영원히 떠나보냄으로써 그들의 찰나를 소유하게 된 자이다. 오르페우스가 역설적 시간 속 역사가가 되기 위해서는 에우리디케를 두 번 잃어야 한다. 에우리디케가 저승으로 떠났을 때 한 번, 그리고 그녀를 다시 살리려던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한 번. 하지만 에우리디케는 애초에 다시 살아난 적 없기에, 두 번 죽을 수 없다. 어쩌면 오르페우스는 망각 속에서만, 말하자면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를 지워버릴 만큼의 착각 혹은 그녀를 잠시나마 다시 살렸다는 희망 속에서만 에우리디케를 두 번 잃을 수 있을 것이다.
최은미의 「김춘영」은 어쩌면 이 기묘한 운명의 역사가에 관한 소설이다. 「김춘영」은 ‘화운령 사건’을 겪은 김춘영과 구술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그를 면담하는 ‘나’(박정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두 사람을 대립시키는 구도로부터 출발하지만 결국 그 대립의 불안정성을 서사화하는 것에 골몰한다. 박정윤이 탁월한 역사 연구자라는 설정은 매끄럽게 이루어지는 면담, 균형적으로 유지되는 관계성에 알리바이를 부여한다. 하지만 견고해 보이는 형식적 관계는 갑작스러운 개입과 어긋나는 관점들, 상투적 편견이나 쉽게 일어나는 오해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박정윤은 김춘영이 자신을 “방문객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내가 어떻게 방문객일 수만 있나”하는 생각을 한다. 면담자와 피면담자라는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박정윤에게 김춘영은 하나의 목적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목적성은 모호하고 다층적이다. 학자로서 자신의 성취를 위해 김춘영 고유의 개인이 사건과 일치되는 지점을 알고 싶은 것인지, 자신의 윤리적 소명 의식에 따라 김춘영과 사건의 관계성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것인지조차 박정윤은 명확히 판단하지 못한다.
김춘영의 자원을 내가 알아보았다는 걸 김춘영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면담 중간중간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연구자인 나를 만족시키고 있는지 반응을 살피곤 했는데, 그것은 어떤 수위로 어떤 이야기를 더 내보일지 타진하는 것처럼도 여겨졌다. 타진의 기미가 느껴지면 나 또한 내가 가진 자원이 당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어필했다. 시골 노인이라도 이름을 알 수 있는 대학의 박사학위, 사명감 있는 연구 기관에서 착실하게 쌓아온 경력, 구술자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지는 이른바 ‘배운 여자’라는 자원이었다.7)
박정윤은 자신의 상대적인 이점을 통해 피면담자로서의 김춘영을 설득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주어진 이 관계는 명확하고 선명해 보이는 만큼이나 유약하다. 그래서인지 일인칭 화자로서 박정윤의 심리는 미묘하게 불안정하다. 그건 아마 김춘영이라는 존재가 주는 상대적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김춘영은 박정윤과 무관하게 거기에 있다. 어쩌면 독자와 마찬가지로, 박정윤 또한 그 실재적 무게감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박정윤은 김춘영과 여러 차례 형식적인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채워지지 않는 뭔가”를 느낀다. 어렴풋하게 그는 그것이 김춘영이라는 인물에 가닿는 일의 본질적 곤궁임을 깨닫는다. 당연하게도 김춘영의 생애는 구술을 통해 재조립된 “김춘영생애사1.hwp” 따위로는 환원될 수 없다. 하지만 면담자와 내담자라는 관계성은 그 당연한 사실을 지워낸 채로만 온전히 성립할 수 있다. 때문에 ‘진짜’ 김춘영을 알고 싶다고 할 때, 그것은 성공적인 면담자의 역할을 배반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어쩌면 박정윤은 이 배반을 꿈꾼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인터뷰 날, 폭설로 인해 하룻밤을 김춘영의 집에 묵게 된 박정윤은 “가슴이 내려앉”을 만큼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이부자리를 펴주는 김춘영. 장롱 안에 있는 오래된 물건을 꺼내 보여주는 김춘영. 녹음기를 사이에 둔 상태에선 나올 수 없던 얘기를 사소한 계기로 풀어놓게 되는 김춘영”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부터 온 것이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김춘영에 대한 박정윤의 ‘과잉’된 열망은, 면담의 목적을 초과한다.
왜 그렇게까지 되었어야 했을까라는 물음은 애초에 사건 앞에 무의미하다. 박정윤은 설명 불가능한 계기로 사건 안의 김춘영을 목격하게 된다. 박정윤을 김춘영의 트라우마 앞으로 추동한 것은 아마도 그의 ‘과잉’일 테지만, 그 과정은 또한 우연 혹은 어떤 계시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다 세어버릴 것처럼 눈앞에서 김춘영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물들어갔다. 머리카락이 세어가는 그 속도로 김춘영한테서 소변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긴 시간처럼도 느껴졌고 일순간처럼도 느껴졌다. 소변이 흘러오는 동안 나는 어둑한 방안에서 김춘영과 비스듬히 마주 앉아 있었다. 괜찮으시냐고 묻지 않았다. 그가 생의 어느 지점에 있는 기억의 습격을 받았는지 되짚지 않았다. 김춘영한테서 흘러나온 소변이 김춘영의 무릎을 지나 내 무릎에 와서 고일 때까지, 나는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8)
박정윤은 “괜찮으시냐고 묻”는 대신, 소변이 무릎에 와서 고일 때까지, “그냥 그대로 앉아” 있는다. 면담자로서 보인 그간의 욕심이 무색할 만큼, 그 밤 박정윤은 그저 김춘영 앞에 비스듬히 마주 앉아, 김춘영과 마찬가지로 취약해진다. 거기엔 어떤 의지도 목적도 없다. 그렇게 박정윤은 김춘영과 상처의 온도를 나누어 갖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 속에서, 강함과 약함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러한 박정윤의 행위는 ‘반응’이 아닌 ‘응답’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고유성으로 타인의 고유한 상처에 답한다.9) 박정윤은 아마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의 잔인함은 최은미 소설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지만, 「김춘영」은 그 징그러운 용기가 어떻게 ‘책임’으로까지 연결되는지를 묻는다. 냉소하거나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남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까. 설사 불가능하다고 해도, 인간에게는 ‘책임’이 남는다. ‘도덕’이나 ‘의지’보다는 정동에 가까운 이 ‘책임’은 주체를 초과한다.
도롱이 연못 터를 지나다 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눈이 그친 연못은 말할 수 없이 고요하고 평평했다. 하얗게 펼쳐진 풍경 끝에서 쨍한 주황색 점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갱도에서 올려보낸 뾰루지처럼 작게 솟아 있었다. 다가가면서 보니 봉분 같았다. 웅크리고 있는 짐승의 등 같기도 했다. 하지만 더 가까이 걸어가자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작은 백패킹용 텐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 등을 켜놓고 있었다.10)
다음 날 새벽, 박정윤은 김춘영에게 작별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서둘러 김춘영의 집을 나선다. “봉분” 혹은 “웅크리고 있는 짐승의 등” 같은 일인용 텐트 앞에서, 박정윤은 “김춘영의 생애”를 전하는 상상을 한다. 새벽은 어딘가 으스스하고, 박정윤은 알 수 없는 희열 속에 있다. 「김춘영」의 마지막 장면은 그 수행의 과정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며, 차라리 위험하고 예측 불가할 것임을 암시한다. 박정윤은 아마도 김춘영조차 모르는 트라우마를 전하게 될 지 모른다. 그것은 김춘영 스스로 사건을 영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할 것이며, 결국에는 박정윤 자신을 상처입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의 또 다른 응답을 기대하는 이 장면 속 박정윤의 모습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다.
3. 내가 죽어야 한다면
너는 살아서
내 이야기를 전해11)
2025년 8월 한국의 ‘접촉면’이라는 작은 출판사에서는 『팔레스타인 시 전집』이 출간되었다.12) 이 책은 저자 대부분이 팔레스타인계이거나 팔레스타인인과 인연이 있는 외국인,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인인 『팔레스타인의 시, 팔레스타인을 위한 시(Poems from and for Palestine)』를 저본으로 한다. 얇고 가벼운 이 시집은 한국에서의 출간과 유통을 거치며 더 많은 사람들과 ‘물질적’으로 연결되었다. 그건 고통에 대한 문화적 재번역의 과정이었다.
2025년 12월 발표된 현호정의 「달빛」은 『팔레스타인 시 전집』의 고통에 공명하며, 먼 곳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영혼들에 길을 비춰주고자 한다. 「달빛」이 이를 행하는 방식은 특히 그 비-형식의 측면에서 고유하다. 현호정은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에서도 이름 없는 유령들을 재현하기 위해 비형식의 형식을 고안하고자 하였다. 「달빛」에서 그 자유로움은 팔레스타인 시인들의 의지를 통해 단단히 뿌리내린다.
이 소설은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이 하늘로 떠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끌벅적한 축제를 연상시키는 이동의 과정, 일상적이면서도 밝은 대화들 속에는 지상에서의 잔인한 죽음의 흔적들이 묻어난다.
빛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구름 속에서 들었다. 우리는 그리고 냄새였는데 푸른 우유의 냄새 같았다. 푸른 우유가 있다면, (여기) 푸른 염소가 있어 푸른 새끼를 낳는다면, 아니 (여기서는) 염소가 아니라 양이라도 상관없었다. 카라칼이나 바위너구리, 알을 낳는 새들까지 푸른 빛을 가정할 수 있었고 새끼에게 원하는 걸 먹일 수 있었다. 새뽀얀 물.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필요했던 것. 향료가 되는 풀들처럼 자연의 법칙을 배반하면서, 그것은 마지막까지 싱싱하고 그 후에 더 생생하고, 푸르고 계속 풍부할 거고, 우리는 계속 올라가면서 하늘을 떠다니는 이 냄새였고 그게 아니라면 이 냄새와 함께 떠다니는 하늘이 바로 우리였다. 이제는 그런 게 우리였다. 이제는 그렇게 우리인 거였다.
(중략)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는 아주 많아.”
누군가 말했고 그는 어른이었다. 나는 어른이 아니어서 알 수 있었다.
“아저씨, 제 발을 밟으셨어요.”
또 어른이 아닌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발이 없는데….”
“전 있어요! 전 살아 있을 때 발이 없었거든요. 그러니 지금은 있어야지요.”13)
이 소설의 문자들 위에는 천진한 슬픔의 정서가 떠돌고, 그건 명확히 팔레스타인의 것이다. 한국어로 팔레스타인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 바깥이 필요하다. 「달빛」은 이국적 단어들을 동화적으로 재조합하여 그 바깥을 구축한다. 카라칼, 바위너구리, 향료와 같은 단어들을 이국적이라기보다는 동화(童話)적이다. 이들을 잃어버린 동화적 파편으로 만드는 것은 익숙한 심상(心象)들이다. 푸른 염소와 새뽀얀 물, 하늘을 떠다니는 냄새 그리고 달빛과 같이 낯설지만 어딘가에 편재하는 것들.
단어들을 원초적 모티프로 만드는 것은 죽은 자들의 세계이다. 동화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들의 세계에는 국경이 없다. 낯선 단어들은 잃어버린 동화적 파편, 디아스포라적 잔여가 되어 ‘한국어’라는 형상 위를 맴돈다. ‘배회’하는 「달빛」의 단어들은 먼 곳의 이름 없는 죽음들을 불러내는 초혼가가 된다.
그레이스 M. 조는 『유령 연구』에서 70년대 한국에서 양공주라 불렸던 이들의 삭제된 트라우마를 유령으로 호명하며, 이 유령들의 배회가 새로운 종류의 가시성을 생성한다고 본다. ‘유령’이 “트라우마의 주체도 지각하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어떻게 보고 들을 것인가”14)를 체현하는 존재라면, ‘배회’는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과 아주 거리가 먼 형태로 물질화된, 제자리를 벗어난 트라우마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역설”과 만나는 행위이다. 배회를 통해 이 “정동은 트라우마를 입은 주체 안에 가만히 자리를 잡기보다는 몸들을 관통하며 흘러”15) 다닌다. 배회는 삭제되고 잊힌 트라우마를, 디아스포라의 비전을 통해 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생전에 자신이 잃었던 것을 자꾸 만들어 붙이는 일은 확실히 유행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더 잊어버렸다. 우리가 잃은 것을 잊었고, 우리가 만든 것을 잊었고, 우리가 얼마나 더 만들기를 원하는지도 잊었다. 108개의 다리를 치마처럼 두른 소녀는 이것들이 다리임을 잊었다. 하여 거추장스러운 장식들을 하나씩 흩어 버리던 중, 그렇게 하고 있음을 잊었다. 거추장스러움을 잊었고, 장식을 잊었고, 아저씨를 찾으러 갔다. 어쨌든 이 아저씨만은 잊지 않은 거였다. 108개의 머리통 하나하나에 박수를 쳐 흩어 버리던 아저씨도 이 소녀를 잊지 않았다. 그는 소녀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 이상 어디에도 바깥은 없어.16) 확실히,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해야 했죠.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버지 몸에서 막 벗어난 희고 순결한 입자들처럼 자유롭거든요. 달을 향해 꼬물꼬물 기어가도 좋다는 뜻이에요.”
“그러다 또 태어나게 되면 어떻게 하고?”
“다시 죽거나, 저녁 파티를 망치겠지.”17)
“파티 자리에서 그들의 목을 때리고 각 손가락을 때려 줄거야.”18)
“손가락을 하나씩 때려주려면 총 몇 번을 때려야 해요?”19)
* 굵은 글씨 표시는 인용의 과정 중 추가.
사건 안에 사는 사람은 사건을 영위할 수 없다. 하지만 요르단 태생의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시인의 “더 이상 어디에도 바깥은 없어”라는 절망적 외침이 “확실히,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해야 했죠.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버지 몸에서 막 벗어난 희고 순결한 입자들처럼 자유롭거든요.”라는 죽은 소녀의 천진한 목소리로 되풀이될 때, 어디까지가 사건의 안이며 어디서부터가 그 밖이라 할 수 있을지를 말하기는 어려워진다.
언어가 갖는 근원적인 폭력성은, 명명을 통해 형상화됨으로써 다른 것을 배제하는 과정에 이미 내재 되어 있다. 어떤 죽음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 불가능하다. 그런 죽음은 명시되지 못한 채 “공적 담론을 진전시키는 생략부호(ellipses)”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20) 이름 없는 죽음들에 대한 문학적 애도는 그래서 고통의 현재화인 결정화(crystalization)를 필요로 한다. 흐르는 시간에 대한 프리모 레비의 대응이기도 했던 결정화는21) 인간의 기억이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시간과 함께 사건 속 이름들이, 어쩌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기록은 반복되며, 더욱 절실하게 반복된다.
달빛이 밝지 않으니 아직은 밤도 아니었다.
해가 지고 있었지만 하늘은 아량을 베풀어 푸른 빛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친구의 눈동자였다. 그 애가 죽었을 때 그의 푸른 눈동자는 검게 변해 있었다.
“미사일은 너의 눈 속으로 검은 잉크를 쏴서 뿌렸니?”22)
나는 평범하게 죽은 사람의 눈동자도 색이 변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짐승들이 내 몸을 먹는 것을 원치 않아. 나는 개의 먹이가 되고 싶지 않아. 차라리 땅으로 융해되어 사라지고 싶어. 그러나 비료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기도 하네.”23)
* 굵은 글씨 표시는 인용의 과정 중 추가.
결정화는 「달빛」의 두 번째 초혼의 방식이다. 삭제된 존재들을 체현하는 과정은 결코 안정적일 수 없다. 이 자유로운 소설이 파편화되어 흩어져 버리지 않도록 붙드는 것은 결국 팔레스타인 시인들의 구절들이다. 애도는 인용 그 자체보다는 그 인용구를 겹겹이 감싸고 있는 다른 문장들과의 연루를 통해 실체화된다. 그렇게 문장들은 상처를 감싼 붕대와 같이 치유와 위로를 위한 방어막이 되고, 하나의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팔레스타인에서 온 시구절들은, 이야기의 모든 문장이 스러지더라도 제거될 수 없는 상처가 존재한다는 듯이, 「달빛」의 또 다른 문장들 사이에 박혀 반짝인다. 물론 이 반짝임은 얼마간 폭력적이다. 푸른 눈동자가 검은 눈동자로 변한 것을 보고 “평범하게 죽은 사람의 눈동자도 색이 변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반짝임은 그것을 둘러싼 어둠을 알게 한다.
어떤 슬픔은 기억이 붕괴한 자리, 움푹 파인 터에 숨어 살아남는다. 잔해 속에 오래도록 웅크린 채로. 그렇게 살아남는 것들은 강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약하기 때문에 죽는 건 아니었다.24)
모든 슬픔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어떤 애도도 그러할 것이다. 가자를 목격한 사람이 아니어도, 팔레스타인과 직간접적으로 얽혀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그 죽음들을 애도할 수 있다. 「달빛」은 타인의 고통을 언어화한다는 불가능한 과제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그 서사적 책임을 수행해 나간다. 그것을 끝에서 두 번째 폭력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 무구한 ‘용기’가 얼마간 무모하더라도. 「달빛」은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디딤돌 삼아 그렇게 불가능한 강을 건넌다.
1)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 번째 세계』, 문학동네, 김정아 옮김, 2012, p. 95.
2) 오카 마리, 『기억/서사』, 고유서가, 김병구 옮김, 2024, p. 18.
3) 오카 마리, 같은 책, p. 42.
4) 나즈완 다르위시, 「공포증」 중에서, 문호영 옮김. (『팔레스타인 시전집』, 리파르 알아리르 외 지음, 김한나 외 옮김, 접촉면, 2025, p. 17.)
5) 오카 마리, 같은 책, p. 114.
6)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 같은 책, p. 95.
7) 최은미, 같은 책, 『김춘영』 중에서.
8) 최은미, 『김춘영』 중에서.
9) “응답에 있어서 중요한 건, 자신이 마주한 사건에 대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응하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방식인 점이 중요하며, 판에 박힌 자동적인 대답밖에 하지 못한다면 그 대답은 응답이 아니라 반응이 되어버린다.” 『책임의 생성』, 고쿠분 고이치로, 구마가야 신이치로 지음, 메디토리얼, 2025, 박영대 옮김, p. 12.
10) 최은미, 『김춘영』 중에서.
11) 리파트 알아리르, 「내가 죽어야 한다면」 중에서. 류송 옮김. (『팔레스타인 시전집』, 리파르 알아리르 외 지음, 김한나 외 옮김, 접촉면, 2025, p. 7.)
12) 영어권 독립 출판인들을 중심으로 2023년 10월과 11월에 판매가 아닌 집단 학살을 멈추는 행동 촉구를 목적으로 마련된 소책자 『팔레스타인의 시, 팔레스타인을 위한 시(Poems from and for Palestine)』를 저본으로 하는 이 시선집은, “저‧역자 34인이 아랍어, 프랑스어, 영어로 쓰고 아랍어와 프랑스에서 영어로 옮긴 시를 한국어 번역 워크숍에 참여한 여덟 명의 번역가가 영어에서 한국어로, 드물게 아랍어 시를 참고해 번역하거나 중역해 엮은” 책으로 소개된다.
13) 현호정, 「달빛」 중에서.
14) 그레이스 M. 조, 『유령 연구』, 성원 옮김, 동녘, 2025, p. 56.
15) 그레이스 M. 조, 같은 책, p. 85.
16) 수헤이르 함마드, 문호영 옮김, 「무제」, 『팔레스타인시선집』, 2025.
17) 할라 알얀, 최리외 옮김, 「귀화되다」, 『팔레스타인시선집』, 2025.
18) 꾸란 8장, 12절.
19) 현호정, 「달빛」 중에서.
20)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p. 67.
21) 마리암 모하메드 알 카티브, 골목길 옮김, <호화로운 죽음>, 팔레스타인평화연대, 2024. 07. 19.
22) 마리암 모하메드 알 카티브, 위의 글.
23) 현호정, 「달빛」 중에서.
24) 현호정, 「달빛」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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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 오웅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1) 박상현 1. 사랑할 수밖에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너의 나쁜 무리」, p. 95-6) 그 순간 나는 여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너의 나쁜 무리」, p. 112) “그런 세계”에 대한 이 고집스런 애착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에겐 ‘보통의 삶’에 대한 많은 서사적 자원이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반대편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험생활에 열중하다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고, 스펙 쌓기와 연애를 잘 병행하다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연상되는 보통의 삶에 한편,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작 자신이 왜 그토록 이런 삶에 집착하는지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염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아주 사소한 시절」, p. 71)던 이들에게 이 애착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 번쯤 보통의 삶이 주는 환희를 만끽해보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너의 나쁜 무리」, p. 94) 한다는 사실 뿐이다. 보통의 삶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정말이지 막연한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자신의 손녀(‘나’)에게 은밀하고 사소한 연애사들을 훌훌 털어놓고,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것 같다며 손녀에게 개평을 준 남자친구(‘현구 아저씨’)의 뺨을 때리는 ‘여사’는 누가 보아도 보통의 인간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차라리 아주 난잡하고 무람없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방식”(p. 110)이라고 정당화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좀처럼 보통의 삶에 대한 애착을 거두질 못한다. “나(=여사)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 박상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
- 이은지
- 2026-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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