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작성일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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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1)
박상현
1. 사랑할 수밖에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너의 나쁜 무리」, p. 95-6)
그 순간 나는 여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너의 나쁜 무리」, p. 112)
“그런 세계”에 대한 이 고집스런 애착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에겐 ‘보통의 삶’에 대한 많은 서사적 자원이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반대편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험생활에 열중하다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고, 스펙 쌓기와 연애를 잘 병행하다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연상되는 보통의 삶에 한편,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작 자신이 왜 그토록 이런 삶에 집착하는지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염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아주 사소한 시절」, p. 71)던 이들에게 이 애착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 번쯤 보통의 삶이 주는 환희를 만끽해보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너의 나쁜 무리」, p. 94) 한다는 사실 뿐이다.
보통의 삶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정말이지 막연한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자신의 손녀(‘나’)에게 은밀하고 사소한 연애사들을 훌훌 털어놓고,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것 같다며 손녀에게 개평을 준 남자친구(‘현구 아저씨’)의 뺨을 때리는 ‘여사’는 누가 보아도 보통의 인간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차라리 아주 난잡하고 무람없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방식”(p. 110)이라고 정당화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좀처럼 보통의 삶에 대한 애착을 거두질 못한다. “나(=여사)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p. 99) 보통의 삶에 대한 ‘여사’의 오랜 염원을 함부로 상속받은 ‘나’는 별안간 억하심정을 느낀다. “그 삶을 물려주기 싫다면 그렇게 살아선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여사처럼 살 거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마음 주고 몸 주고 절절매며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평생을 살아갈테다.”(p. 102) 그러나 불만과 불안이 그다지 명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통의 삶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공부하는 모습이 대견하다는 듯 현구 아저씨는 매일 밤 ‘나’를 위해 값비싼 과일을 사오곤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정확히 현구 아저씨가 오기 전 두 시간 전부터 공부를 한다. ‘나’를 맞이하던 누군가의 애틋한 관심이 ‘나’를 앞지르는 순간 보통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겠다던 “최초의 결심”은 “영영 실패할 다짐”이 된다.
이 범박한 인물평은 오늘날 우리가 주체를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이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나 자유, 또는 행복의 추구와 결부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긴 소송의 시작이고 끝없는 자기변호의 시작, 문지기 뒤에 더 힘센 문지기, 그리고 그 뒤에 더더욱 힘센 문지기가 지키고 서 있는 겹겹의 문 앞에서,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맨 처음의 문지기에게 붙들려 끝없이 실랑이를 벌이면서 늙어가는 과정의 시작이다(이 말단 문지기는 ‘중요한 타자’라고 불리며, 자못 친근한 얼굴⎯대개는 가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사회의 명령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 자신도 다른 문지기들에게 들어서 짐작하는 것일 뿐, 사회의 실체를 자기 눈으로 보지 못했다).”2) 김현경이 잘 설명하듯, 예속 없이 주체를 말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비판을 압도한다. ‘자유’와 ‘행복’은 여전히 삶의 강력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며, 그것에 대한 아주 미약한 믿음만으로도 지금의 고통을 합리화하는데 충분하다.3) 적어도 내 탓이어야 내 몫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삶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내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몇몇 남자와 원나잇을 했고 늘 그랬듯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는데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제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또 다른 못 견딜 마음으로 돌려막고 있었다. 나는 살기 위해 내 삶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우리 철봉하자」, p. 25)
「우리 철봉하자」 속 늦깎이 의대생 남자친구의 뒷바라지를 하는 ‘맹지’와 데이팅 앱으로 원나잇을 일삼는 ‘석주’는 각자의 이유로 “남자 없이 못 사는”(p. 12) 존재이다. “일은 졸렬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좋아”하고 마는 석주는 “사랑에 있어서는 늘 나(=석주)를 함부로 대하고 선을 넘어”(p. 33)버린다. 마주하고 있는 얼굴 속에서 제 심연을 들여다본 걸까. 맹지는 그런 석주가, 석주는 그런 맹지가 화가 난다. 석주와의 실랑이 끝에 맹지는 우리에겐 “쓰레기를 만나거나 쓰레기가 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선택지가 없는 거”(p. 21)냐며 울분 섞인 자조를 토해낸다. 왜 이들은 자신을 ‘쓰레기’라고 비하하면서까지도 타자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가? 과연 이들이 타자로부터 벗어나는 건 가능한 일인가? 이들은 이 신산한 사랑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얻어야만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들은 도무지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뿐이다. 이들이 제일 견딜 수 없는 것은 보통의 삶에 대한 연약한 믿음도, 정상 규범으로부터 이탈한 불행한 미래도 아닌, “견딜 수 없는 마음” 그 자체이다. “또 다른 못 견딜 마음으로 돌려 막”지 않고서는 도무지 배길 수 없게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이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마음에 의해, 그 마음으로 종국에는 제 “삶을 궁지에 몰아 넣”고 만다.
이 지긋하고 지극한 사랑 얘기를 읽다가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미워하는 만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왜 어떠한 사랑은 이토록 불가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타자에 대한 주체의 애착심이 얼마나 심원한지를 가늠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 구체적인 과정으로 “권력의 내부면”4)을 향해 숙고의 질문을 던지는 버틀러의 지적 작업을 따라가고자 한다.
2. 권력과 타자
사실 호명의 사건에는 수많은 불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우린 어째서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설령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게 경찰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소포를 전해주러 온 집배원인지는 모를 노릇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즉에 권력을 향해, 규범을 향해 어떻게서든 돌아서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미 고개를 돌린 우리를 향해 ‘이봐 거기!’라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경찰의 모습은 너무 “때늦은 장면”(『권력의 정신적 삶』, p. 165)인 것이다.5) 그렇다면 권력의 부름으로부터 저만치 달아나기는커녕 외려 자신의 내면에서 그 음성을 재생시키는 이 이상한 마음의 발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버틀러는 이 성급한 응답의 장면이야말로 “주체가 법에 대한 정념적인 기대 속에 살고 있음”(『권력의 정신적 삶』, p. 190)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이 고집스런 사랑의 원환⎯“정념적 애착(passionate attachments)”(『권력의 정신적 삶』, p. 20)⎯속에서 주체는 앞서 그 자신을 옭매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에 대한 주체의 이 이상한 애착은 호명의 ‘효과’가 아니라 호명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아닌가?6) 그러니까 버틀러는 지속해서 권력을 주체의 내면에 기입함으로써 권력이 “주체에 외재적인 동시에 바로 그 주체의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떤 주체도 권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동시에 “주체의 도래가 권력의 위장과 연루되었다”(『권력의 정신적 삶』, p. 33)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르 블랑은 버틀러가 “주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권력에 대해서도 이 주체와 권력의 관계 자체가 이 둘에게 구성적인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하며, “주체가 권력관계 내에서 유효화된(effectuée) 최종목표일 뿐만 아니라 권력관계 내에서 그리고 권력관계에 의해 스스로 유효화되기(s’effectue) 때문에 권력관계가 지니게 되는 그 생산적 특징의 복잡함”7)을 해명하는데 그 이론적 함의가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더 구체화되는 듯하다. 주체와 권력이 서로를 구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왜 주체는 “우선성의 외양”(『권력의 정신적 삶』, p. 30)을 온통 감당하게 된 걸까?
권력은 주체에 작용(act)을 가할 뿐만 아니라 타동적인 의미에서 주체를 존재로 실연한다(enact). 권력은 주체 존재의 조건으로 주체에 선행한다. 그러나 권력이 주체에 의해 행사될 때, 권력은 [자신이 지녔던] 우선성의 외양을 상실한다. 즉 권력이 주체의 효과이자 주체가 행하는 것이 권력이라는 역전된 관점을 발생시키는 상황이 나타난다. 어떤 조건이든 현재화되지 않고서는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하거나 제정할 수 없다. 권력은 주체에 앞서 손상되지 않은 채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권력의 우선성이라는 외양은 권력이 주체에 작용을 가하기 시작할 때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권력의 지평 위, 시간의 역전 속에서 주체는 시작된다(파생된다). 주체의 행위성으로서 권력은 주체의 [과거나 미래의 차원이 아닌] 현재적 차원을 취한다. (『권력의 정신적 삶』, p. 30)
권력은 “주체를 존재로 실연한다.” 다시 말해, 권력은 우리에게 사회적 인식값을 부여해준다. 2024년 12월 3일 한밤중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수많은 시민이 낯익은 공포라는 그 불쾌하고도 분통한 감정을 안고 또다시 광장으로 향했다. 사태의 장본인이었던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발의되었고 정말이지 지난한 과정 끝에 파면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격동은 가까스로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소요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음모론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경험적 몸짓을 키우고, 혼란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해 줄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며 더 공고한 경제적 주체가 되고자 모두가 열을 낸다. 우리는 여전히 내란의 여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때의 우리는 매우 비참했다. 당시에 우리에게는 사상 초유의 혼란을 얼마간에 수습하기 위한 법적 언어도 절차도 있었지만 비참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비참함은 어떠한 부재에서 기인했다기보다 내가 믿어온 사회가 여태껏 ‘그런 식으로’ 존재했다는 데에서 온 배신감 같은 게 아니었을까. ‘자유’, ‘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가 이다지도 쉽게 전유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 인식의 궁극적인 준거로 작용하던 헌법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허구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실제 한국 사회를 조직 및 지탱하고 있던 게 헌법이라는 법・제도적 총체가 아니라, 미시적 수준에서 거시적 수준에 이르는 권력 관계의 총체⎯물질적 헌정(material constitution)⎯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권력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존재할 수 있냐고 미심쩍은 눈길을 보낸다면, 그것이야말로 권력이 우리를 ‘아주 은밀히’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는 증거일 테다. 우리는 왜 권력의 외양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싱거운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권력이 이른바 권력의 모습으로 체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권력은 “타동적인 의미(transitive sense)에서” 상연된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타동사로서 권력은 반드시 그 구체적인 대상(주체)을 경유해야만 수사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최원이 적절히 기술했듯 “주체를 예속시키면서도, 동시에 모종의 역량을 그 주체에게 항상 이전하는 방식으로만”8) 작동하는 권력의 근본적인 성질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그 의도를 늘 어설프게 전승하는 타자가 정말이지 주체스럽지만 바로 그 ‘위태로운 타자’를 거치지 않고서는 스스로 재생산할 수 없는 권력의 존재론적 한계가 있다. 그리고 버틀러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주체의 예속과 사랑을 대응시킨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에 빠진다’ 또는 ‘우리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실은 사랑하고 있던 것이었다’와 같은 유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권력의 정신적 삶』, p. 189)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제기하는 것도 듣는 것도 석연찮은 일이다. 누군가는 인간사에 온존해 있는 수많은 갈등과 다툼을 해결하는 데 사랑하는 거 말고 무슨 뾰족한 대안이 있겠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믿음이 무색하게도 끝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최소한의 합의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왜?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랑이 너무나 많은 것들의 이름을 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만 사랑하기에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궤변을 무람없이 쏟아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보편을 구도하기 위한 자리가 실은 그 균열을 관측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가 된다는 것, 너무나 많은 것들의 이름을 대리하다 못해 그 자신을 위협할 만한 이름도 대리하고 만다는 사실에서 사랑은 내재적인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주체의 예속이 이토록 불안하고 불완전한 사랑의 양태를 취한다고 할 때, 권력은 결코 덜어낼 수 없는 존재론적인 부담을 떠안게 된다.
뜻밖에도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권력에 근본적인 한계를 부여하고 그것의 재생산 과정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그 타자가 너무나도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멋모르는 우리에게 그럼직한 사회적 자리를 배치해주고, 그 자리를 이탈하려고 하면 부드러운 손길을 내밀거나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타자가 실은 권력의 아주 감각화된 측면이라고, 그래서 주변에 익숙한 얼굴에 무턱대고 속지 말아야 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9) 이처럼 권력이 지닌 “우선성의 외양”이 타자의 수준에서 “손상”될 때, 타자는 권력의 가장 근본적인 취약점이자 동시에 그 정당성을 지속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타자의 극치가 ‘가족’이라는 점은 구태여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타자라는 곤경’에 휘말린 주체는 실컷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한 채 한참을 머뭇거리고 만다.
3. 가족이라는 곤경
나는 인생이 적당한 시점에 최악의 결말로 끝나버릴 거라는 염세적인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최악의 결말은 존재하지 않고, 늘 최악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건대, 그 감각은 세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가해한 상황으로 구성되고, 나는 속절없이 휘말릴 뿐이라는 것을 그 시절에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걸레가 되고 그 짓거리 하는 년이 되고 씨발년이 된다. 그건 내 의도도 누구의 의도도 아니다. 세계가 그렇게 나를 그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계절마다」, p. 86)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함부로 거역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순간 말이다.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이런 순간을 자주 마주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들이 깨닫는 것이라곤 자신이 “불가해한 상황”에 놓여 있고 이내 “속절없이 휘말릴”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내 삶을 단 한 번이라도 손에 쥔 적이 있던가. 삶은 언제나 나를 쥐고 흔들 뿐이었다.”, 「그 개와 혁명」, p. 230). 이처럼 예소연의 소설에선 ‘의지’와 ‘의도’는 별다른 효용이 없다. 대신 그는 우리가 그토록 자부하던 주체성의 토대를 번번이 무력하게 만드는 지점에 대해 천착한다. 「그 개와 혁명」 속 ‘태수 씨(형주)’에 대한 ‘나(수민)’의 관심이 그런 것이다. 태수 씨는 자칭(?) 민주85의 멤버로서 “자본의 배를 불리는 식으로는 사회가 올바르게 굴러가지 않는다”(p. 222)며 투쟁이라든지 평등이라든지 그런 ‘지고한’ 가치들을 들먹인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너무도 멋있어 보였고, 언젠가 태수 씨가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 그게 무엇이든 기필코 지지해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알다시피 막연함은 위태로운 것이다. 해가 거듭할수록 태수씨와 ‘나’는 “지독하게 사랑해서 서로를 끔찍하게 미워하기 시작했다”(p. 226). ‘결혼 비용은 무릇 남자가 독박 써야지…’ 어느 날 태수 씨는 메갈과 한국 여자들에 대해 다룬 유튜브 쇼츠를 보며 ‘나’에게 아닌 게 아니라 여자들이 그러한 의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자꾸 요즘 여자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태수 씨는 가까이에 있는 나를 두고도 저 멀리 있는 요즘 여자들을 보는 식이었다. 그래서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사회는 조리 있게 굴러가야 하지만, 가족이라는 제도 안의 조리는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 그래도 나는 태수 씨를 사랑했다. 인셀은 사랑하지 못했고 그런 태수 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개와 혁명」, p. 226-7, 강조는 인용자)
나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과거에 천착하며 살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머니가 죽어서도 할머니의 삶이 끝나지 않았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할머니의 삶은 내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된 채로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p. 139)
실제의 조짐이든 이론적 열망이든 ‘정상 가족’이라는 견고한 환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시도가 문학장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가족 해방/폐지’, ‘퀴어 가족’으로 표방되는 일련의 작업들은 그동안 정상 가족이 얼마나 인식론적, 제도적 자원을 독점해왔는지를 비판하며 다양한 가족의 외연을 상상한다. 다만, 그 일련의 시도가 기존에 정상 가족과 얼마간의 ‘단절’을 전제한다고 할 때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10) 우리가 단절해야 할 것은 혼인과 혈연을 중심으로 한 법・제도인가 혹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식탁에 단란히 둘러앉아 끼니를 같이하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이 친밀한 타자들인가. 내 절박한 저항들을 단숨에 무용하게 만드는 이들은 결코 법・제도적 결속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오늘날 가족만큼이나 에토스적(관습-윤리적) 지지를 흠뻑 받고 있는 친밀성의 양식이 또 있을까. 이 친밀성의 양식은 정말이지 특별하다. 가령, 누구보다도 ‘사회’에 대해 진보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에 대해선 가차 없이 예외를 두는 태수 씨에게 있어 가족이란 무엇일까. 인셀은 사랑할 수 없지만 아무렇지 않게 인셀스러운 발언을 내뱉는 “태수 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나’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나’는 화가 불쑥 치민대도 그런 태수 씨를 사랑한다, 차마 미워할 수 없다. 예속은 예속이고 태수 씨는 태수 씨다. 도대체 왜?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식구(食口)’니까. 무릇 식구라면 그런 거라고. 나는 오직 나일 뿐이라는, 그 과도한 자기 동일성의 믿음에 대한 타성적 부담(inertia mass)을 주체에게 이양하는 것이야말로 이 지극한 친밀성의 양식이 잘하는 일이다. 가족을 마주하고 있는 내 자신은 기껏해야 나쁜 아들이자 딸일 뿐 권력에 예속된 주체가 아니다. 불합리한 사회 현실은, 권력과 규범은 범박하게 적대시되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타자라는 곤경이다. 끝내 누군가는 이 현실에 남아 환상을 파괴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할 때 그 비용은 과연 누가 부담할 것인가.
「사랑과 결함」 속 ‘순정(고모)’은 ‘나(희조)’에게 사랑을 듬뿍 안겨주는 둘도 없는 존재다. 정말이지 그러한 존재는 둘도 없을 것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동생(‘아버지’)을 위해 부모가 된 사람, 부모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렇게 ‘순정’의 젊은 날은 아버지가 무럭무럭 자라는 데 고스란히 바쳐졌다. 제 나이 마흔에 이르기까지 순정과 아버지는 서로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아버지가 새살림을 차리기로 하고, 결혼할 때 몸만 오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은 ‘엄마(민애)’가 정말로 빈손으로 집에 왔을 때, 순정은 폭음을 했다. 거나하게 취한 순정은 도대체 어느 새댁이 밥솥도 없이 살림을 차리냐며 엄마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그때의 앙금이 얼마나 컸었는진 헤아릴 수 없지만, 좌우지간에 순정은 엄마를 오랫동안 끔찍이도 미워했다. ‘나’는 엄마를 바라보던 순정의 소름 끼치는 시선을, 그 독기어린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순정이 소박을 맞고 돌아왔을 때 응당 [엄마에게 못되게 굴은] 업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나는 나에게 사랑을 흠뻑 주는 고모(‘순정’)를 흠뻑 사랑했다는 것이다.”(p. 163)
내가 아는 것은 고모나 엄마가 그저 나에게 끔찍한 사랑을 흠뻑 물려주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결함이 나를 어떻게 구성했는지도. 나는 실제로 고등학교 때 정신병이 유전되었을까 봐 몹시 두려워했으며 내가 이상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친구들의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다. (「사랑과 결함」, p. 183)
사랑이 제 삶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대는 동안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믿음직한 단서도 찾지 못한다. 혹자는 어떠한 믿음은 앎을 유보한다고 무지함이야말로 절대적 믿음의 징표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족을 향한 사랑이란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사랑은 너무도 무지막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지게 한다. 그래서일까.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무엇이 여전히 비어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대도 “몇 번이고 다시 서로에게 사랑을 다짐”하고 만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 그것이 종국에는 사랑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처럼”(「아주 사소한 시절」, p. 72) 말이다.
물론 이들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 사랑에 공모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은 믿는 게 아니”(「사랑과 결함」, p. 174)라며 굳이 ‘내’ 전 애인이었던 ‘수’와 함께 제 보험 만기금을 수령하러 가던 ‘순정’처럼, “혹시 내가 삶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하는 일들이, 사실은 정말 내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게 아닐까”(「도블」, p. 302-3) 하고 생각하던 ‘나’처럼, “나의 방식대로 나를 물림할 것”이라던 ‘뚜비’처럼(「뜰의 미래」, p. 274), “엄마의 조금 부른 배를 보며 이번만큼은 이들이 절대로 내 삶의 결정권자가 되지 않도록 다짐”(「우리는 계절마다」, p. 110)하고, 생전에 무망한 게 제일로 무서운 것이라던 할머니의 귀에 대고 “존나 못 사는 방식으로 잘 살 거”(「그 얼굴을 마주하고」, p. 145)라고 귀엣말로 속삭이던 ‘희조’처럼,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족의 바깥을 상상한다. 그렇게 이들은 사랑의 역사를 상속받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 지리멸렬한 상속 투쟁은 우리에게 처분 불가능한 유류분을 남긴다. 언제 받은 줄도 모르지만 어느새 내면 깊숙이 각인되어버린 몸의 기억들 말이다. 예소연은 이렇게 질문한다. “빤히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척하는 것. 서로가 떠안은 일들에 지쳐 상대의 상처에는 그저 눈을 감아버리는 태도. 우리가 그런데도 서로를 친밀한 사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인가?”(p. 125) 서글프게도, 그러하다. 죽기 직전 ‘순정’은 ‘민애’에게 외마디 말을 남긴다. “그런 다음 눈을 감았다. 우리 중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순간 우리 가족이 가진 축축하고 퀴퀴한 기억들이 전부 엉켜버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도요.”(「사랑과 결함」, p. 188) ‘순정’은 마지막으로 ‘민애’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까. ‘사랑한다,’ ‘사랑했다.’ 이상하게도 그런 말들이 떠오른다. 아마도 ‘나’는 원망과 반목에도 불구하고 “이 어처구니없는 세계에서 도망”(「그 얼굴을 마주하고」, p. 144)치지 못할 것이다. 고단한 시간을 거쳐 터득한 것이라고는 사랑의 외연을 넓히는 법이지, 사랑을 해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역사는 곧 존재의 역사이다. 우리 존재가 단지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테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죽음 역시 생체 신호의 중단으로 환원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랑의 역사로부터의 이탈을 감행하는 것은 생물학적 차원으로 환원할 수 없는 “죽음보다 더한(worse) 것”11)일지도 모른다. 이토록 절박하고도 불가피한 사랑의 실질 속에서 사랑은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12)
이따금 희망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땐 차라리 작지만 아주 분명한 행동이 도움이 된다. 집 앞 거리를 숨가쁘게 달린다거나, 샤워 부스 안에서 뜨거운 물을 맞는다거나, 외투를 걸치지 않은 채 서늘한 밤공기를 느낀다거나. 이 소설에는 막연한 희망 대신 그러한 움직임들이 많다. 세계와 불화할지언정 함부로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 이의 모습일 테다. 소설 속 한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사실 내가 안락한 곳에 있는 동시에 안락하지 않은 곳에 당도하길 바란다고 고백할 것이다.”(「통신광장」, p. 243) 이 겸허한 고백을 한동안 끌어안고 있을 것 같다.
1) 이 글은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문학동네, 2024), 『너의 나쁜 무리』(한겨레출판, 2026)과 주디스 버틀러의 『권력의 정신적 삶』(강경덕・김세서리아 옮김, 그린비, 2019)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본문에서 인용 시 각각의 제목과 도서 내 쪽수만 밝힌다.
2) 김현경, 「재생산의 문제 설정」, 『문학과사회』 2016년 겨울호, p. 223.
3) 참조할 만한 글로는 Sara Ahmed,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2nd ed),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4; Willful Subjects, Duke University Press, 2014가 있다.
4) 기욤 르 블랑, 「예속된다는 것/예속된 존재」, 배세진 옮김, 『문화과학』, 96, 2018.
5) 이에 진태원은 주체로 거듭난다는 것이 “호명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이 호명행위를 기회로 해서 다시 한번 되풀이된 의식적 재-인지, 자기 자신이 주체-임을 다시-긍정하는 것일 뿐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재-인지가 필연적이라는 점을 가리키고 있을 뿐”(p. 391)이라고 말한다. -진태원, 「라깡과 알뛰세르: ‘또는’ 알뛰세르의 유령들 Ⅰ」,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22.
6) 이러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앞서 우리가 ‘보통의 삶’을 최소한으로나마 경험하지 않았다면, 과연 ‘양심’이나 ‘죄책감’이 작용할 수 있을까? 즉, 자기 자신을 질책하게 하는 최소한의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최원은 버틀러가 “단지 호명 이전의 ‘주체’의 실존만을 그렇게 ‘도착할 주체’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여전히 문제를 발생론적인 목적론(그리고 심리학)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다는 혐의”(p. 264)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버틀러가 말하는 양심의 형성이라는 것도 호명의 사전 조건이 아니라 (회고적 구성을 통해 도착하는) 호명의 지연 효과 또는 사후 효과일 뿐”(p. 265)이라고 덧붙인다. 더 자세한 설명으로는 최원, 『라캉 또는 알튀세르』, 난장, 2016, p. 258-76을 참조.
7) 기욤 르 블랑, 같은 글, p. 314, 321.
8) 최원, 같은 책, p. 269.
9) 나는 앞서 ‘(감각화된) 타자라는 곤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특히 권력이 자신의 외양을 친밀한 얼굴에게 위임하는 한 주체의 자기 발명은 지속적으로 유보된다. 친밀한 '얼굴'과의 관계 안에서 권력과 저항에 대한 주체의 상상은 사랑과 배반의 문제로 전유된다. 권력에 대한 예속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그것이 자신과 가장 친밀한 이들과 쌓아온/쌓아낼 관계로 나타날 때, 주체는 더욱이 '좋은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좋은 삶'의 균열을 봉합할 수 있는, 친밀한 이들의 생의 열망을 보존할 수 있는 존재로서 '좋은 삶'에 대한 환상을 깨트린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좋은 삶'에 대한 의심과 거부감은 친밀한 이들과의 정동적 사슬 속에서 자기 책망으로 변모하게 된다.” - 박상현, 「주디스 버틀러의 권력론에서 정동적 가능성 혹은 한계」, 『비교문화연구』 76권, 2025, p. 71.
10) 이를테면, 안세진은 오늘날 “한국에서 전통적 가족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이전처럼 기능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바야흐로 전통적 가족 모델에 대한 수선 내지 개선보다는 그에 대한 과감한 단절이 하나의 ‘합리적인’ 대안으로 요구되는 결정적 시점”이라고 전망했다. -안세진, ⌜신新 가족 로망스-2020년대 한국 소설의 이모, 고모, 그리고 삼촌⌟, 『자음과모음』 2025년 겨울호.
11) 주디스 버틀러・프레데리크 보름스,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4, p. 39.
12) 오히려 우리는 적극적으로 사랑하기를 강요받는다. 이 세계에서 감히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말은 호기롭다 못해 정말이지 불가능한 문구 같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랑의 양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떠한 사랑은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미래를 위한 긴요한 조건으로 여겨지는 반면, 또 다른 사랑은 세계의 종말을 재촉하는 불온한 무언가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불가피한 사랑의 양식이 주체를 얼마나 이중적으로 구속하고 있는지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다만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래’와 ‘재생산’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 질서가 특정한 양태의 사랑만을 승인하고 다른 사랑을 배제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리 에델만의 No Future(Duke Univ Press, 2005)는 이를 논의하기 위한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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