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작성일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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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식의, (정의를 가장한) 일련의 정치와도 또한 운동 방향을 달리한다.
가령 함윤이의 장편 『정전』에도 르네 바르자벨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풍경이 묘사된다. 그리고 공장의 정전 사태 이후로 두 차례 감전의 풍경이 등장하는 데 한번은 나무를 통해, 또 한번은 손끝에서 흐르는 정전기를 통해서다. 나무는 부도체에 가깝다. 조금은 전도체라는 뜻이다. 이는 자연 대부분이 보이는 보편적 양상이다. 눈앞에서 번개가 나무에 내리치는 걸 목격하거나, 원격(?)으로 전기를 제어할 수 있는 초능력자 은단의 증언을 통하지 않고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새삼 그 부도체에 전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진술함으로써 소설은 어떤 존재의 목소리를 복권하고자 한 것일까. 오늘의 문학(인)들은 나무에 대체 무얼 기대하는가. 김채원의 최근 단편 「별 세 개가 떨어지다」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몇몇 등장한다. 이처럼 스스로가 나무를 이해하는 것에, 그것과 대화하는 것에 부분적으로나마 성공했다고 호소함으로써 픽션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피력할 수 있게 되는가.
사실 문학이 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위해 사변speculation의 이름을 빌리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문학이 본디 태어나면서부터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아무도 본 적도, 가본 적도 없는 달 뒤편에서 지내는 이들의 이름을 상상하고, 그 이름을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서 불러 닿을 수 없는 타국의 그리운 이를 호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학 특유의 재능이자 대화 방식이다. 백지은은 최근 여러 편의 글을 통해 우리 문학에서의 ‘객체 지향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5)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저 첨단 이론에 우리 문학장을 붙여보기 위한 시도만은 아니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는 특정 방향으로 기우는 듯한 무게추를 돌려 보려는 ‘마음’의 일환에 가깝고, 여기에서 특정 방향이라고 함은 ‘자기-이론’이나 ‘오토-픽션’과 같은 단어들을 통해 가늠할 수 있는 영역이다.
실제로 몸은 작가에게 막강한 근거가 된다. 우리는 몸을 직접 스쳐 간 시간이라면 곧장 서사라 치환해서 불러도 무방한 시대를 지나고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잣대라곤 전부 무너진 시대에서, 몸은 개연성, 핍진성, 윤리성 그리고 반성… 모든 것의 그 ‘자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몸은 나와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렇게 지근거리에서 수집한 문장들을 반석 삼아 출발하는 글이 권력을 갖는 세계에서 거리(감)은 여차하면 낭만, 아니 기만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백지은의 글로 되돌아간다. 그의 시선에 따르면 마음은 아예 몸에서 외재하는 어떤 사물(事物)이다. 이는 어떤 종류의 원근감, 아니 어쩌면 전에 없던 어떤 공간감을 수복하는가, 저자(성)이라는 게 맞은 편 독자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매체’라는 사실을 환기함으로써 문학은 어떤 문장을 새롭게 맞을 준비를 하는가. 백지은의 표현에 따르면 “이 시대의 소설과 현실, 텍스트와 삶, 문학과 사회 등을 동시에 사유하는 데 기여”6)하며 김미정은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문학의 “포스트-비평”7)에 관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객체에 의탁하여 이야기를 읽어내는 과정은 후위(post)보다는 좋은 의미에선 회복, 다른 의미에선 회귀에 가까운 시도이다. 예컨대 오늘날의 우리는 능동과 수동이라는 (단지) 하나의 스타일로 잔뜩 닦달된, 소위 행동의 주동자나 상벌, 책임 소재 등을 따져 묻기 좋은 형식의 언어를 구사한다(즉, 어디 대기업 인사팀이 딱 좋아할 것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언어라는 게 태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중동태(Middle Voice)라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등에서 발견되는 형식, 혹은 데리다가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에 반하여 제안한 원시적 글쓰기(Arche-writing) 같은 단어 등을 통해, 우리는 지난 언어들의 흔적에 관해 논할 수 있다. 티모시 모턴은 최근 저작에서 데리다가 원시적 글쓰기에 대해 ‘언어를 괴롭히는 유령 같은 흔적’, ‘언어를 작동하게 하는 차이와 유보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유령의 놀이(spectral play)’의 특징을 말한 것에 주목한 바 있다.8) 그는 또한 유령이라는 단어가 종(species)과 같은 어원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모턴에게 있어 이 유령적(spectral)이란 표현은 “자연 인간의 / 이분법 아래에 있는 구분되지 않고 들쭉날쭉하며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존재자들의 공생적 얽힘(mesh)을 나타내는 말이자 그 얽힘이 가능한 공간”9)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얽힘이 가능한 공간(空間)의 가능성. 이는 사변적(Speculative) 문장이 육화되는 것, 그리고 해당 문장들이 그렇게 물질적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 따르는 효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송지현의 소설 「유령이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속 ‘나’-유령이라는 설정을 통해 백지은은 오늘날 우리 문학에서 객체의 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주인공이 유령인 덕분에 저자는 어떤 일인칭이 저 스스로는 단번도 발성할 수 없으면서도, 주변 삼인칭들의 기억은 결집하고 누적될 수 있는, 또 다른 문학적 공간의 탐색 가능성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 문단에 따르면 글 주변으로 유령이 배회하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어쩌면 글은 유령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기존 객관의 상징처럼 군림하던 삼인칭의 헤게모니가 현장에서 겨우 생존해내고 있는 일인칭 주체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말미암아 해체되고, 객체라는 게 앞선 해체와 함께 나타난 평평해진 땅을 딛고 도래한 무언가라면 그 새로운 무언가는 전에 없던 새로운 부류의 증언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혈안이 되도록 응시하는 정면의 뒤편에도 글자가 엄존한다는 사실에 대한 각성,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말이다. 차라리 그것의 가능성이라면 일인칭 주체의 음성을 분식함으로써 드러나는 탈중심성보다, 이 글은 어떤 구체적인 양상의 한 거리(감)에 관한 환기 속에서 그 가능성을 살피고자 한다.
2. 쿵…… 하고 떨어진 것을 표현하려면 정말 쿵……이 필요하겠지.
어려서부터 트럼프가 티브이에 나와 무어라(post-truth) 멈블거리는 걸 보며 자란 세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싫다. 놀이터에 나가봤더니 기대하던 색점토는 온데간데없고 온갖 색이 다 섞여 똥색이 된 거대한 덩어리만을 앞에 두고 다 큰 인간들이 싸우고 있다. 오직 그것의 용해 가능성에 대해서만 논하면서 말이다. 희미하게 끄트머리 겨우 남아있는 노랗고 빨갛고 파란 색점토의 흔적은, 되려 이제야 막 세계에 도착한 이들을 놀리려는 듯 남아있는 것만 같다. 심지어는 허리를 숙여 남아있는 미량의 색점토를 손가락으로 꼬집어 보려던 찰나, 저 멀리서 큰 소리로 부른다. 이리 오라고, 이 곤란한 덩어리 좀 같이 옮기게. 우린 세계를 망친 주범이 아니다. 우린 리좀 같은 단어를 요청한 적도 없고, 그런 건 단지 독재자의 호소에 지나치게 호응한 이전 세대들이 반성을 위해 발명하고 추켜세운 도구일 뿐이다. 문학이 시대에 대한 반성을 해야함은 자명하지만, 그렇다고 반성문이 문학 장르의 가장 모범은 아닌 것이다.
모든 게 이런 식이야, 하고 생각해버릴 수 없는 예외들이 있다고 말이다.
(김채원, 「별 세 개가 떨어지다」, 『소설 보다: 봄』, 2026, 32쪽)
앞서 짤막이 언급한 김채원의 단편 「별 세 개가 떨어지다」에 나오는 한 문장으로부터 앞선 이들의 관성에서 벗어난, 그렇게 작지만 단단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공교롭게 이 소설에서 역시 유령이 등장한다.10) 그러나 이 소설은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식물에 관한 이야기도, 유령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유령은 소설 속 두 인물이 우연히 보게 된 티브이 드라마 제목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유령에게는 좋은 틈이 있어. (32쪽)
틈은 앞서 언급한 거리의 향어(鄕語) 같은 것이다. “모든 게 이런 식이야, 하고 생각해버릴 수 없는 예외들이 있다고 말이다.”라는 문장 역시 위 드라마에 대한 사촌 ‘혜임’의 어떤 견해(모든 이야기가 처음부터 보지 않아도 보다 보면 알게 된다는 그런)에 ‘나’가 답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이외에도 소설은 갖은 종류의 거리를 구사한다. 예컨대 그늘과 햇볕이라는, 비교적 일상적인 거리에서부터 죽음과 “죽어도 너무 죽었다”는 식의 사변적 거리감까지, 그것은 다양한 크기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사진의 형태로 등장하는 어떤 텍스트,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간격이다. 문학이 도끼가 되어야 하듯, 때때로 어떤 문장은 충격이 되어야 하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가장 좋은 방법은 충격의 경과를 묘사하기보다, 충격 덩어리 그 자체를 행간에 직접 삽입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은 자료가 아닌 주변 문장들과 동등한 지위의 글자, 그 자체로서 제시된다.
“어느 나무면 어때, 어차피 떨어진 거야. 너 귀 빨개졌다.” (「별 세 개가 떨어지다」, 12쪽)
혜임은 휴대폰 플래시를 터뜨려 떨어진 모과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자기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노랗게 잘 익은 열매의 식이 선명했다. 나는 휴대폰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혜임의 행동에 내 행동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일이 종종 자연스럽고 안심이 되는 일처럼 여겨지곤 했다. (「별 세 개가 떨어지다」, 12쪽)
쿵…… 중요한 것은 ‘쿵’이지 그 모과가 어떤 나무에서 떨어진 것인지, 어떤 경위로 떨어진 것인지 등에 관한 탐문이 아니다. ‘나’는 혜임의 행동에 내 행동을 맞춤으로써 그것을 서사로 만든다. 오늘날의 이야기는 시간적 혹은 공간적 차원의 정합성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옆 사람의 행동에 내 행동을 맞출 내가 있고, 모과는 이에 맞춰(앞서) 떨어지는 것이다. 소급(遡及)인 것이다. 마치 먼저 도착한 모파상의 글이 후위로 도착한 프루스트의 그것을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가만 보니 불현듯 ‘쿵’하고 떨어지는 게 모과만이 아니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 역시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경우 없이 툭 떨어진 그런 것이다. 모과도… 나도… 문장과 호환 가능한, 이야기다. 쿵…이 곧장 간격 그 자체가 되듯 말이다.
소설은 널브러진 것을, 혹은 널브러짐, 그 자체를 전시하는 장르는 아니다. 동시에 무언가에 빈틈없이 몰입하는 장르 역시 아니다. 예컨대 소설은 여하간에 첫 문장을 시작하여, 또한 마지막 문장으로 끝난다. 설령 그것의 종지가 도입부를 완전히 베낀다고 해서 줄글의 연속이 결코 원(circle)이 되진 않는다는 뜻이다. 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열역학 제2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하나의 작품을 가정해본다. 엔딩에 이르러 최소한의 문장 부호나 자모음 표기 마저 유실된, 잔뜩 무너진 생김새의 어떤 소설을. 그것이 하나의 양식이 될 수는 있겠으나, 이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문학의 전형으로 여길 순 없는 것이다. 그것은 외려 어떤 예시로서 충분하다. 너덜거리는 생김새가 정밀하게 엔딩에 도착할 정도로, 건설적인 체계와 짜임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의 예시로서 말이다. 문학은 그런 것이고, 인공물이 아닐 재간이 없는 어떤 것이다.
기본적으로 글쓰기는 질서를 관장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반대급부로서 혼돈과 무질서를 향한 강한 동경이 그것에게 있지만, 태어나기를 글에 기반한 예술은 정합성을 갖기 마련이다. 더는 벌어질 것 같지 않은 행간을 기어코 비집고 들어선 단어나 불현듯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문장 역시 결국 작가의 의중에 기반한 사건이다. 녹음기를 켜고 가장 깊은 숲속을 거닐다 저 멀리 선거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유세 소리가 예상치 못하게 녹음기에 취입되는, 문학에서 그런 사운드-스케이프적인 우연은, 문학에선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래사장 위에 나뭇가지를 휘갈겨 쓰더라도 소설은 인공물이다. 그것이 어디 입각하여 서 있는지, 현실 속의 어떤 흙과 자연의 이름들을 그러모아 정초한 것인지를 잊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실제의 모든 게 무너지고 있을 때, 그 운동을 가장 먼저 흡수하여 줄글로 뱉어내는 데 문학의 사명이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우주를 구성하는 그 많은 우연 가운데 단 하나도 담아낼 수 없는 장르에게, 애초에 자연이 그런 걸 기대할 리도 만무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론적 사유물의 갑주를 성급히 두를 일 또한 아닌 것이다. 예컨대 거울 하나를 가정해본다. 어찌나 정밀하게 세공된 것인지, 거울이 그 자기 자신을 비출 정도다. 와중에 이 ‘거울의 초상’은 저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변의 그 누구도 자기 얼굴을 거울 안으로 들이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바깥에서 그것과 교호함으로써 거울의 이름이, 그것의 초상이 세계에 엄연히 실재하고 있음을 증언할 뿐이다. 읽기(Readings)라는, 독자로부터 불어오는 사건을 통해 하나의 소설이 완성됨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독자가 그거 완성하려고 책을 읽는 것 아니듯, 작가 역시 바깥으로부터 불어온 존재론의 도움을 통해서야 자신이 조탁한 세계 속 사물들이 온전히 이해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차라리 문학은 내부의 글자와 글자 사이, 혹은 그것의 떨림을 통해서 완성된다. 무엇보다 문학에게는 아래와 같은 말을 할 줄 아는 재능이 있다.
“어느 나무면 어때, 어차피 떨어진 거야. 너 귀 빨개졌다.” (「별 세 개가 떨어지다」, 12쪽)
3. 가만, 어쩐지 동숲 주민들의 대사가 어디서 다 읽어본 것 같더라니?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을 자주 뇐다.11) 세계를 해석하는 일이 결코 수동적이거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의 위급함 속 평론으로서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우리는 이언 보고스트가 단위 조작(Unit Operation)이라는 화학 공학 용어를 경유하여 세계에 제안하는 몇몇 실천으로부터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누군가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게임, 테트리스를 두고 다음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
“〈테트리스〉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1990년대 미국인들의 삶, 주의를 요하는 업무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그것을 어떻게든 빽빽한 일정에 맞추어야 하며, 다음 공세를 받아 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책상을 비워야 하는 삶을 완벽하게 행화한 게임이다.”12)
이런 식의 해석은 꽤 적절할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다. 이언 보고스트는 오리지널 테트리스에 탑재되어 있던 기능, ‘보스 키 (boss key)’같은 설정이 머리의 해석에 대한 뒷받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보스 키를 누르면 게임이 일시정지되면서 비상호작용형 스프레드시트(오늘날의 엑셀 화면 캡처 이미지)가 화면에 뜬다. 이러한 기능은 당시에 분명 효과적이었을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에겐 낯선 게 사실이다. 차라리 NPC 같은 단어라면 모를까.
과거의 (소설가를 포함한) 픽션 전문가들이 위 같은 특수한 설정에 관심을 두었다면, 실제로 오늘의 소설들은 NPC에 더 집중하는 듯하다. 게임 속 NPC들은 이상하다. 어차피 모두가(심지어 스스로조차) 사람이 아닌 걸(Non-Player) 아는데, 어째서 그들은 구태여 말을 하는가. 아니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말은 그저 언어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언어란 게 인간보다 세계에 먼저 도착해 있던 것이니까.
“둘 다야. 나는 오래전에 죽었고, 혼자 재미있는 걸 하고 있어.” (「별 세 개가 떨어지다」, 16쪽)
“그러니까 겨우 일부분만 알 수 있는, 줄거리와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계속 나였기 때문에, 비록 줄거리뿐인 이야기라고 해도, 자기 인생을 버린 사람과 버리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었다.” (「별 세 개가 떨어지다」, 17쪽)
가만 보면 우리에게 인상적인 대사로 기억에 남는 NPC들은 모두 중동태를 구사해 왔다. 게임 내에서 그들의 지위는, 타격을 할 수도 당할 수도 없으며, 이에 따라 죽지도 않고 어떤 책임을 따져 물을 수도 없는 곳에 있다. 그러니 이들의 대사엔 어떤 위계를 전복하거나, 정치적 저의가 담긴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지위를 인간, 혹은 소설가의 문장, 행간과 같은 독립된 하나의 객체로서 ‘존립’하기 위해 높이 들어 올리는 피켓 속 문구는 아니라는 뜻이다.
“여름은 어떤 느낌이어라? 소문을 듣자 허니 눈이 하나도 없고 겁나게 더운 계절이라 그러던디.”13)
“War. War never changes. But men do. Through the roads they walk.”14)
4. 진정 모든 문학의 고향, 틈.
예컨대 지난 겨울 발표된 현호정의 소설 「달빛」은 글 전체가 이러한 중간적 태도를 향하고 있다. 작품 속 모든 글과 말은 달에서 온 것이며, 달로 다시 가는 중이다. 이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꼭 그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빛 속에서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와그르르 웃음소리가 지나갔다.”
“우리는 여전히 씁쓸해질 수 있었고 입안이 떫어질 수도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속상할 수 있었다.”
(「달빛」 중에서)
우리는 현호정의 소설에서 충분한 수준의 언어적 시도를 보고, 말과 글에 대한 지극한 마음을 보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한때 미국에서 유행했던 신 비평(New Criticism)적 태도를 겹쳐보진 않는다. 이는 비단 그의 소설이 중간중간에 팔레스타인 시인들의 시구를 엮어 구성한 글이기 때문만은 아닐 테다. 예컨대 그의 소설 속 ‘나’, ‘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더 피동 되게 말함으로써 바깥에서 밀려오는 사역 동사의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낸다.
“내가 내가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나는 눈도 없고 나도 없는데.
내가 내가 그리워지면 어떡하지. 나는 눈도 없고 나도 없는데.”
“난 당신보다도 당신과 가깝고 이것이, 내 대적가 벗이여, 거리의 의미랍니다.” (「달빛」 중에서)
곳에 따라 존재보다 가까운 곳까지 글자가 들어설 수 있다. 모든 글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글자의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퍽 희망적으로 들리는데 존재가 닿을 수 없는, 달의 뒤편 같은 응달에도 어떤 글자만큼은 흘러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게 ‘달을 볼 수 없는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의 감옥’15)일지라도 말이다. 명명될 수 없는 것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폭력 되어 세계 아름다운 것들을 차례로 부숴 나가는 걸 목전에서 경험했다. 우리는 더 이상 그 방식으로 우리가 구사하는 자모음의 효용을 파악하지 않는다. 차라리 효용이라면 글자라는 게 그렇게 제한적이라는 것을 온전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글자만의 재능이라는 데에, 어떤 공산이 있을 것이다.
이언 보고스트는 책에서 시뮬레이션의 새로운 정의를 적어두고 있다.
“시뮬레이션이란, 소스 체계에 대한 사용자의 이해를 주관적인 방식으로 알려주는(inform) 덜 복잡한 체계를 통해 소스 체계를 표상한 것이다.”16)
이러한 시선을 처음으로 제안한 것은 게임 디자이너 곤살로 프라스카로, 실제 그를 통해 처음 제안된 이러한 관점의 시뮬레이션은 물질 세계를 정확히 모델링하려는 컴퓨터 시뮬레이션과는 구분된다. 그것은 실제 체계에 관한 관찰자의 의견이나 지식을 알려주는 걸 유일의 목적으로 삼는다. 여기서 ‘관찰자’를 소설의 화자, 또는 소설가 그 자체로 적용할 경우 시뮬레이션에 관한 해당 정의는 게임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문학과의 호환 가능성, 그 이상의 범용성을 갖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지금-여기에서 당장 갖다 ‘쓰기’ 좋다. 그는 같은 책에서 바디우를 인용한다. 이러한 상황의 재구조화를 바디우는 ‘사건’이라 부르며 이때 사건은 일상적인 발생이 아닌, 현재 상황의 전례 없는 급진적 변화라는 것이다. 그는 피터 홀워드의 비유를 예시로 빌린다.
“예를 들어 반유대주의로 구조 지어진 상황의 구성원들은 유대인 ‘개개인’을 유의미하게 볼 수 없고, 정상적인 사회 구조 속 불분명한 간극, 모든 실증적(positive) (아리아인) 특징의 생생한 결여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는 동성애 혐오가 지배적인 상황의 한 요소임이 분명하지만, 개별적 관계를 맺는 개별적 남성과 여성으로서는 (어떤 실질적인 의미에선) 아니다.”17)
위 인용은 급진적 변화에 관한 참고, 그리고 동시에 단위 조작에 관한 참고가 된다. 우리는 이산적이라는 특징에 대해 조금은 파편화된 것, 진득하게 연결되지 못하는 것, 유기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여기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산성(discrete) 특유의 미학은 ‘것’과 ‘것’ 사이의 틈, 즉 간격에 있다. 그리고 그 틈이 팔을 휘저을 수 있을 정도로 확보되었다면, 우리는 반드시 후려갈길 수 있어야 한다. 정확히는 그러기 위해(행동하기 위해) 틈을 만드는 것이다. 이산성으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간격의 미학은 일본의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 같은 걸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랑시에르의 지난 비유 가운데 훨씬 근사한 것이 있다. 그는 세계의 시인들이 감각 체제의 연접conjunction과 두 감각 체제 간의 이접disjunction을 무대화해야 한다고18), 그렇게 말했다.
현호정의 소설은 한 클래식 음악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에서 들려오는 단어를 ‘음차’한 것이다. 실제로 이 음악엔 가사가 없어, 음차라는 표현이 어색할 수 있다는 걸 작가도 알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랬다고 말한다. 어떤 소설이 이렇게 시작하면 크게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우선 빌려온 언어로부터 출발한 만큼, 소설가는 첫 문장에 관한 부담을 덜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소설의 시작점 자체가 흐릿해진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진정 언제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드뷔시의 음악 첫 프레이즈와 함께 소설의 첫 구절(phrase)은 시작하는가, 혹은 음악이 끝나고 그것의 종지를 글의 첫 단어가 이어받는 식으로 픽션은 문을 여는가. 정답은 없다. 그렇게 틈이 발생한다. 앞서 언급한 김채원의 작품에선 바닥에 떨어진 사과가 등장하는 사진(의 모습을 한 글자)이 등장한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사진기와 작가가 함께 쓴 문장이다. 더 나아가서는 출력되는 종이의 속성에 따라 다른 종류의 흑백(어쩌면 컬러)이 나타날 테고, 그렇다면 문장은 또한 프린터와도 같이 쓴 프레이즈가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학 현장을 목격하면서 이러한 사진기나 프린터, 혹은 음악의 첫 프레이즈 또는 그것을 추동하는 소설(가)의 마수 있다. 이 창작자들은 외려 인회(湮晦)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행위의 능동과 수동을 가르기 위해 서두르지도 않고 첫 문장의 키를 꼭 쥐려는 마음도 없으며, 필요하다면 자신의 글은 다른 시인의 시구와 시구 사이 매질의 형태로 존립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현호정의 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팔레스타인 시인들의 시구 몇몇을 엮는다. 즉 이 소설의 본문은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면서 동시에 이러한 문장들을 잇는 매질로서, 연접과 이접을 실천한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이건 평론이 해야 할 일이다. 여러 작품 사이를 오가며 인용하고 필요하다면 서로 간 접붙이기를 시도함으로써 의미를 증폭하거나 새로운 그것을 발견하는 행위 말이다. 소설 「달빛」 속 인물들은 하나의 ‘나’를 여럿이 공유한다. 이러한 양상은 해당 주어뿐만 아니라 춤추고, 망각하고, 경험하고, 죽는… 많은 동사들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나 어떤 단어도 정원 초과의 느낌을 주진 않는데, 그 까닭은 작가의 글에서 상술한 태도가 능히 묻어나기 데 있을 것이다. 그런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여러 작품을 하나의 글에 담아내야 하는 평론가로서, 특히 부러운 ‘조작’ 능력이다. ‘필자’를 ‘나’로 바꾸어 부르는 일보다, 그런 걸 살피는 작업보다 오늘의 평론가가 진정으로 해야 할 급한 숙제가 있을 것이다.
나가며. 조작하는 평론을 향하여
이 글은 그것의 일례로 보고스트가 제안한 ‘조작’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몇 가지 제반 작업들을 함께 언급했다. 번역가 안호성은 『단위조작』 서론에서 ‘Operation’을 ‘조작’으로 번역한 경위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것은 얼마든지 ‘작동’이나 ‘운영’, ‘연산’과 같이 중립적이거나 안전한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자가 기존에 화학 공학 용어에서 빌린 개념 ‘Unit Operation’ 자체의 뉘앙스 탓도 있었으나, 그는 우리말로 새로운 포털을 여는 과정에서 ‘오퍼레이션’에게 좀 더 강한 근력의 팔다리를 붙여주고자 했다.
사물이 자기 일을 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화학 공정에서처럼 사물들 간 상호작용이 다른 사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도 함축하므로 ‘조작’으로 번역했다.19)
해당 실천은 그 자체로서 단위조작의 한 예시가 되며, 동시에 그럼으로써 발칙한 재귀가 된다. 평론가는 접합을 시도해야 한다. 그것은 때론 랑시에르가 이야기한 연접이나 이접처럼 충분한 맥락을 바탕으로 하는, 그런 근사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조작은 미끄러질 수도 있다. 시대와 제대로 호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뭐야,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와 같은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서 들을 순 없다.
평론은 그것 특유의 소급적 속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진정 지구상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문장으로만 이뤄진 섬을 처음 디뎌보는, 그런 형태의 미래를 평생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누군가로부터는 영원히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할 부류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말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차라리 어떤 미래나 혜안을 기존 평론가들의 글이나 비평 이론에서 찾는 것이 아닌, 미래를 화학 공학 용어, 혹은 아예 새로운 생김새의 다른 텍스트에서 찾는 시도 말이다. 그리하여 나도 해본 것이다. 급기야 평론의 모범으로서 어떤 소설을 제시하는, 그런 기행동(奇行動) 같은 것을 말이다.
1) 이언 보고스트, 『단위조작』, 안호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25, 69쪽
2) 우리에게는 『삐딱하게 보기』라는 제목으로 좀 더 잘 알려져 있다.
3) 지젝은 피에르 바야르의 책 『Le Plagiat par Anticipation』(국내 『예상 표절』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속 "예상 표절"의 개념을 빌린다. 해당 책에는 모파상의 글에서 어떻게 프루스트의 특징이 드러나는지,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프루스트적으로 읽히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4) René Barjavel, 『Ravage』, 151~152쪽; 퀑탱 메이야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에서 재인용
5) 이 글에서는 2025년 9월 『자음과모음』에 소개된 「객체 지향 저자(성)」, 2024년 6월 『자음과모음』에 소개된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를 주로 다룬다.
6) 백지은, 「객체 지향 저자(성)」 (『자음과모음』, 2025년 가을호), 298쪽
7) 김미정, 「체현하는 비평: 백지은 작품론」 (『현대비평』, 2025년 여름호)
8) 티모시 모턴, 『어두운 생태학』,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4, 146쪽
9) 이원진, 「비인간 NPC 객체에 대한 존재론적 시론 -챗 GPT 등장에 따른 NPC(Non Player Character)의 주체 없는 객체론-,」 철학·사상·문화 no.42 (2023): 262쪽
10) 실은 그다지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게 제품 되어 사고 팔리는 시대에서 글은 유령의 집으로 남아있는 최후의 거처이기 때문에. 시대에 맞춰 그저 올 게 오는 것이고 이미 왔었고, 앞으로 더 많은 유령과 귀신이 방문할 테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12) Murray, Hamlet on the Holodeck, 143-144, [한용환·변지연 옮김(2001),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안그라픽스
13)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에서 등장하는 대사이다. NPC 눈사람이 말한다.
14) 비디오 게임 〈폴아웃〉에서 등장하는 대사이다.
15) 누르 힌디, 한제인 옮김, 「씨발 작법 같은 소리하네, 내 민족이 죽어가는 와중에」, 『팔레스타인시선집』, 2025
16) 이언 보고스트, 『단위조작』, 안호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25, 208쪽
17) 위의 책, 73쪽
18)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 오윤성 옮김, 도서출판 b, 210쪽
19) 이언 보고스트, 『단위조작』, 안호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25,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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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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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바디우는 외부에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으로 인해 존재에 내적 균열이 일어난다고 봄.(메이야수는 선조성 이론을 통해 사건의 물질화를 도모) 이는 편집증자의 심리 상태를 대변함. ------지젝은 환상 가로지르기를 통한, 공백에 도래하는 실재를 통한 상징계의 균열을 말함.(가브리엘 마르쿠스는 상징의 카테고리를 만듦으로써 상징의 실재화를 도모)이는 강박증자의 심리 상태를 대변함.-------들뢰즈는 강도적 흐름으로 인해 사건이 발생한다고 봄. (우연한 것들이 아다리가 맞으면 사건으로 발생된다는 것임. 그 아다리가 들뢰즈의 강도임.)이는 분열증자의 심리 상태를 대변함. ------------바디우는 들뢰즈와 가장 멀고 지젝과는 그보다 좀 더 가까우며 지젝은 바디우와 그렇게 멀지 않으면서도 들뢰즈와는 생각보다 가깝다.------------------- 이걸 보고 읽으시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이 글은 지젝에서 시작해서 바디우로, 마지막으로는 들뢰즈에 당도하는 궤적을 그리고 있습니다.--- 강박증자---편집증자---분열증자라는 로드맵으로 구성됨. 이것들은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이지 대립 관계가 아님을 유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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