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 작성일 2026-09-01
- 댓글수 0
|
최선교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로 3회 연재됩니다. |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최선교
김혜순은 2002년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을 시작으로, 2017년 『여성, 시하다』를 거쳐 2019년 『여자짐승아시아하기』, 2026년 『공중의 복화술 : 문학은 어디서 시작할까?』에 이르기까지 여성과 여성시를 대상으로 한 시론을 세워왔다. 명백히 여성과 여성시를 위한 시론이다. 그녀는 여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녀는 여성시에 대해서 말한다. 이 진술에 대해 해명하거나 덧붙이고 싶은 말은 없다.
그녀의 시론은 기존의 ‘여성적 글쓰기’ 범주에 속하면서 ‘들림’이나 ‘바리데기’ 등의 동양 무속적 상상력을 통해 개성을 확보한다. 한국에는 ‘여류시’라는 말이 있(었)다. 김혜순은 생물학적 성차 개념에 기반을 둔 ‘여류시’라는 일종의 멸칭으로부터 ‘여성시’의 범주를 구분하려고 했다. 시론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 생물학적 정체성이 아님을, 공중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지만 어떤 순간에는 생생하게 발악하기도 하는 구성적 개념임을 설명하고자 했다.
김혜순의 시는 종종 난해하다거나 초현실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 본인은 그러한 평가가 ‘현실’이나 ‘환상’의 개념을 남성적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현실이 무엇이고, 환상이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나의 시를 초현실이라고 부르는가. 그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여성이 현실이라면?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이 쓴 시, 여성시를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발성기관, 새로운 발성법에 대한 해독이 필요”1)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구체적인 시 형식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2022년 11월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의 개정판을 펴내며 김혜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무엇보다도 여성시는 여성의 형식을 발명한다. 면면히 내려오는 말하기 방법 말고 다른 말하기 방식 말이다.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는가가 여성주의적 발성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다.”2)
이는 김혜순이 여성 시론을 적어나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말하기 방식을 통해 ‘여성시’의 범주를 설계하고자 함을 암시한다. 단지 생물학적 여성에 의한 시가 ‘여성시’가 아니다. 여성이 말하는 시가 바로 ‘여성시’인 것이다. 시 형식에 대한 김혜순의 관심은 1990년대 한국의 ‘여성문학’ 담론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로부터 시작한다. 1990년대 한국 문학장에서 ‘여성문학’을 둘러싼 담론들은 그 당시의─대부분 남성이었던─비평가들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일 경우에만 미학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김혜순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 시론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녀의 시론이 지향하는 ‘여성시’의 언술 방식 분석은 1990년대 당시 ‘또 하나의 문화’ 동인을 주축으로 전개된 ‘여성적 글쓰기’ 담론이라는 대안적 실천으로부터 일종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여성문학 진영이 펼쳐나갔던 ‘여성적 글쓰기’ 담론은 엘리트들의 지적 유희라든가, 실제 한국 여성들의 현실적 맥락과 동떨어져 있으며, 가부장제가 만들어 낸 ‘여성성’ 개념을 부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김혜순이 2000년대에 들어 발표하기 시작한 여성 시론은 1990년대 한국 문학장에서 여성문학 진영에 가해지던 비판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따라서 여성이다. 여성이 누구이며, 여성성이 무엇인지 밝혀낼 수 있어야지 김혜순의 시론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그녀는 본질과 허구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여성성’의 개념을 발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여성시는 생물학적 여성이 쓴 시로 한정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이유도 분명 있다. 첫째, 젠더 연구가 아닌 이상 생물학적 성차 개념이 여전히 규범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둘째, 퀴어 담론의 등장으로 인해 여성시라는 호명이 ‘그다지’ 유효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든다. 한국의 근대문학이 형성되던 당시에 명백히 무지성적으로 형성되었던 ‘여류시’ 개념은 제대로 해명이 되었던 적이 있는가? 대학을 나오거나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았으며, ‘당시 남성과 비슷한 수준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생물학적 여성이기만 하면 ‘여류 시인’으로 부르던 시절의 ‘여성’과 ‘여성시’는 스스로 목소리를 낸 적이 있던가?
여성에 대해서, 여성시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남성 중심 문학사에 대한 대항으로 한정되는 일이 싫다. 가부장 비판은 이제 지겹다. 따라서 김혜순이 말해온 여성시를 살펴보는 일은 무엇보다 ‘여성’이라는 개념을 밝히는 단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말해 시는 여성적 장르라는 김혜순의 전제가 여전히 생물학적 개념에 기반하여 이해되어버린다면, 그녀의 시론은 다시 한번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여성은 동사다. 명사가 아닌 동사. 모든 명사들이 동사화되는 김혜순 시론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명사가 아닌 동사적 존재이므로 목격한 사람마다 각기 다른 형상으로 진술된다. 따라서 김혜순의 시론에서는 이전까지 단일한 의미만을 산출하던 온갖 개념들이 ‘여성’이라는 옷을 입고 다양성의 세계로 진입한다. 여성의 세계에서는 상징질서 속에서 발화되지 못하던 존재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김혜순 시론에서 여성의 의미를 탐색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온갖 질서에 균열을 도모하려는 계획이며, 동시에 다양한 의미가 발화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떠나는 움직임이다. 그녀의 시론은 절대 붙잡을 수 없는 여성이라는 명사, 동사, 형용사, 혹은 침묵의 상태를 경유하여 ‘열림’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始作 혹은 詩作)의 과정을 포착하고자 한 시도의 일환이다.
*
“왜 여성이 쓴 시는 소통의 장에서 소외되어 있는가.”3)
김혜순의 시론이 출발하던 시기에 새겨진 위의 질문은 그녀가 규명하려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여성이 쓴 시’. 하지만 ‘여성’이라는 대상을 한정하고 시작하는 시론은 시작부터 다양한 질문을 맞닥뜨린다. ‘여성시’를 하나의 형식으로 볼 수 있는가? ‘여성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여성’은 무엇인가? ‘여성시’를 대상으로 하는 시론이 보편적인 문예 이론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여성시’라는 호명이 특정 작품을 오히려 틀에 가두는 것은 아닌가……?
‘여성이 쓴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좁히는 일처럼 느껴진다. 다시 말해,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작품의 수가 제한되며, 그렇게 구축된 이야기로서의 시론이 현대 시론의 계보에서 얼마만큼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여성’을 생물학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전제 때문은 아닌가. ‘여성시’에서 ‘여성’이라는 개념은 한국 문학사에서 문제화된 적 없다. 일종의 기원적 규범인 것이다.
한편, 근대문학이 발생하던 시기부터 ‘여성문학’이 마땅히 갖추어야 한다고 여겨진 자기 서사와 고백이라는 형식적 특징도 김혜순의 시론이 하나의 문학 이론으로 여겨지는 일을 가로막는다. 특히 김혜순이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 오며 시인의 정체성을 확립해 온 인물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그의 시론을 부차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김혜순의 글에 ‘시학’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과거 김혜순의 시론집은 ‘시론’이라는 표제에도 불구하고 에세이로 분류되곤 했다. 이는 여성 작가의 창작물이 다른 성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가 개인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는 관습적 사고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수많은 한계를 감안하면서까지 ‘여성이 쓴 시’를 시론의 대상으로 삼는가?
“왜 그냥 ‘시’가 아니고 여성시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질문이 같은 땅을 딛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지만 차별과 혐오와 폭력과 억울과 제외에 늘 노출되어보지 않은 사람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의 실정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선 이 명명이 아직도 엄존해야 하는 이유는 많고도 많다. 가령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영화 같은 대중문화 프로그램만 들여다봐도 남자들만 오락하고, 요리하고, 정치하고, 여행하고, 사회 보고, 역사하고, 군인하고, 심지어 여자도 하고, 각종 미션을 수행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지 않은가.”4)
김혜순은 ‘왜 여성시를 대상으로 삼는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대신, 그 질문이 포함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적한다. ‘왜 여성시를 대상으로 삼는가’라는 질문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여성 시론의 존재 목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런 대답의 형식은 ‘여성(시)’에 대한 그녀의 인식에서 비롯한다.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김혜순은 여성시가 “차별과 혐오와 폭력과 억울과 제외”의 대상이 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의 책머리에서 그녀는 여성시를 대상으로 한 글을 쓰게 된 이유를 ‘소통에의 갈망’이라고 밝힌다. “아마도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소통에의 갈망이었을 것이다. 나는 ‘왜 여성이 쓴 시는 소통의 장에서 소외되어 있는가’라는 의문을 푸는 글을 한 편 쓰리라 마음먹었다.”5)
그녀의 시론집에서 발견되는 소외 의식은 1980-90년대 김혜순의 시작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혜순은 1984년 한국 시단에서 ‘여성주의’를 창작 동기로 삼으며 발족한 동인 ‘또 하나의 문화’의 무크지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에 지속적으로 글을 발표했다. ‘또문’ 단행본에 수록된 「1990년대 시적 현실, 어디에 있었는가」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시적 현실이 어떠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6) 1980년대 한국 문단의 리얼리즘 경향이 시의 현대성이나 일상적인 관심을 억압했다면, 군사 독재 체제가 무너지고 난 뒤 1990년대 초 문학계는 계몽과 적대의 대상을 동시에 잃어버리면서 존재론적 불안을 도피할 목적으로 고안한 ‘후일담’이나 ‘신서정’이라는 “미성숙한 낭만주의”를 반복한 바 있다.7) 김혜순은 군사 독재라는 현실이 사라진 1990년대의 시가 묘사해야 하는 시적 현실이라는 것을 “시 안에 놓인 사물들과 시적 언술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정의하며 시적 현실이라는 명제가 “소재주의적 명제”가 아니라 “방법론적 명제”임을 힘주어 말한다.8)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여성시’에 동반되는 ‘제외’나 ‘소통의 부재’ 등의 소외 의식이 당시 한국 문학장이라는 권력이 ‘여성문학’의 의미를 규정하는 방식으로부터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80년대에서 90년대를 거쳐 시인으로서의 내가 제일 많이 들어본 평론가의 말은 사회의 바다로 나오라는, 사회라는 바다에 이득이 되고 소통이 되는 시를 쓰라는 간곡한 권고였다. 그들은 다성적인 목소리의 시에서 어떻게든 하나의 단선의 목소리를 끄집어내어 그것을 리얼리즘적 시각만으로 읽어 내고는 제발, 이제 가족주의 내지는 내면주의를 청산하고 사회라는 바다, 그 대양에서 사회적 질곡을 사실주의적으로 발설하라고 나에게 주문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성 시인은 자연, 어머니 같은 부드러운 것을 늘 일깨워야 하며,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투명하게 빛나는 유토피아를 제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것이 그들의 알리바이를 위한 발설인지, 진정으로 시인을 위해 하는 권고인지는 지금에 와서도 판단하기 어렵다.”9)
‘가족주의’를 청산하는 동시에 ‘어머니’ 소재를 통해 이상향을 제시하라는 요구는 명백히 모순된 것이었다. 결국 김혜순의 비판은 당시 한국 문학장이 여성문학에 요구하던 내용이 남성적 논리의 내면화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청산하기를 요구하는 여성시의 ‘가족주의 또는 내면주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근대문학이 형성되던 시기부터 규정되어온 여성문학의 특징과 이로부터 파생한 관습적 사고관을 포함한 기표이다. 전통적으로 문학을 창작하는 권리는 남성에게 있었으며 여성 작가는 그것을 기원적으로 박탈당한 존재로 여겨졌다. 김혜순이 불만을 토로하던 그 시기까지, 여성 작가들은 사적인 삶과 내면을 작품 속에서 고백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암묵적 요구를 받았다. 여성 작가들은 창작자의 범주에 들어가기 위하여 남성중심적 비평 담론이 생산하는 논리를 내면화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자기 서사적 고백이라는 형식은 한국적 여성문학의 특징으로 계승되어왔다.
‘가족주의 또는 내면주의 청산’은 사적이고 고백적인 형식에 정체된 여성문학을 혁신하여 과거의 ‘여류문학적’ 전통으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는 요구였을 것인데, 이는 김혜순의 입장에서 당연한 모순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여성문학이 범주화되는 과정에 사적이고 고백적이라는 형식적 특징을 부여하며 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남성 평론가’로 대표되는 한국 문학장의 보편적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자연’ 및 ‘어머니’ 소재를 이상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내용은 어떠한가? ‘가족주의’라는 전통의 청산을 요구하면서 “자연, 어머니 같은 부드러운 것”을 구현해야 한다는 모순된 명령은 여성문학이 산출해야 하는 시적 의미가 여성 작가 개인에게 있지 않고, 여성문학의 형식적 특징 및 의미를 규정하는 문학장에 있음을 암시한다. 김혜순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것이 그들의 알리바이를 위한 발설인지, 진정으로 시인을 위해 하는 권고인지는 지금에 와서도 판단하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혜순이 느꼈던 여성 시인에 대한 부당한 평가에 대한 체감과 별개로, 김혜순 시가 소위 아류의 여성문학과 구분되는 진정한 여성문학으로 종종 평가되었다는 점이다. 김혜순의 작품은 ‘세칭 여류시’와 구분되는 지점에서 탁월한 미학성을 지닌 것으로 호명되곤 했다. 혹자는 김혜순의 시적 언어를 극찬하며 “여류라는 범위를 훨씬 벗어날 뿐만 아니라, 최승자와 더불어 우리 시의 한 극단을 이룰 정도”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10) 그러나 「1990년대 시적 현실, 어디에 있었는가」에서 이어지는 글을 살펴보면, 김혜순의 문제의식은 특정한 여성 시인의 시가 저평가 혹은 고평가되는 협소한 맥락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시각은 나라는 여성 시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을, 그중에서도 여성 시인들을 주변화하고, 그들의 개성적 표현을 억압하는 중요한 기제가 되었다.”11)
그녀는 여성시에 요구되는 모순된 당위를 제적하며 이를 “전체주의적 시각”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한국 문학장이 당위적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시인의 개성적인 시적 표현을 억압하는 ‘원리 그 자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지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김혜순이 ‘여성시’를 억압하는─소위 남성 평론가라는 기표로 등장하는─‘대상’을 폭로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그 대상에 내재한 권력의 ‘기제’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성시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주체가 ‘평론가의 말’로 한정되고, 그 내용의 모순을 규명하고 저항하는 방식으로 그친다면, 김혜순의 문제의식은 ‘여성시가 소외되어 있다’는 의식을 전면화하는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김혜순은 폭로의 단계를 넘어 ‘평론가의 말’ 기저에 작동하고 있는 ‘전체주의적 시각’을 포착하고 여성시의 개성을 억압하는 권력이 작동하는 원리에 주목한다. 권력의 기제에 주목하는 김혜순의 방식은 한국 문학장의 남성중심주의를 포함하여, 전체주의적 시각을 내포한 모든 권력 기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성시’가 억압되는 상황의 원인을 ‘남성적 주체’라는 대상 찾기로 귀결하지 않고, 상위 범주인 ‘권력 기제’의 차원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는 생물학적 남성의 대타항으로 규정되어온 ‘여성’ 개념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남성적 문학사 전통을 거부하는 과정에서도 ‘여성’이란 줄곧 생물학적 ‘여성’을 지칭하는 개념이었으며, 이는 ‘남성’의 대타항적 의미를 함의하는 수준에 제한되었다. 여성해방문학이 가시화되던 198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여성’은 생물학적 성차 개념에 근간을 둔 정체성으로 통용되었으며, 정체성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단일한 ‘여성성’ 개념은 곧 ‘여성문학’의 게토화 현상으로 이어진다.12) 만약 김혜순이 여성시를 억압하는 대상이 남성중심적 문학사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데 그쳤다면, 문학사 전통에서 여성이 생물학적 남성의 대타항으로 개념화되어온 협소한 방식을 답습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혜순은 여성이 남성의 대타항적 개념으로 협소하게 의미화되는 양상을 거부하며, 여성시를 억압하는 상위 범주의 권력 기제에 주목한다. 그 결과 김혜순은 여성주의에 의해 여성이 단일한 정체성으로 취급되는 상황까지도 경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논리를 획득한다. 권력 기제에 주목하는 김혜순에게는 여성주의마저도 전체주의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① “시에 관한, 시에 대한 글은 시와 함께 미끄러지는 글이 제일 좋다. ‘와꾸’를 정해놓고 그 속에 시를 욱여넣는 글은 시에 관한 글이라고 할 수 없다. 반대로 시도 그러할 것이다. 선행 담론이 있을 수 없다. 서양 사람들은 나를 여성주의 시인이라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를 난해 모던 초현실주의 시인이라 한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지식 체계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을 가져와 나의 시에 들이대는 것이다. (일단 못 알아먹겠으면 초현실이라고 한다.) 자신들의 렉시콘을 넘겨 가며 나를 읽는 것이다. 시의 나라 안팎의 제국주의.”13)
② “동시에 페미니즘 담론이 어떻게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만들고, 여성에게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우나 또 다른 억압인 성 정체성을 부과하는지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면서 사회체제 내에서 무능한 남성으로 낙인찍힌 감독 스스로도 자신에게 부과된 남성적 판타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과된 정체성의 울타리 안에서 괴롭기는 마찬가진가보다. 그러나 나는 이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는 내내 불안했다. 꼭 이 여자가 다칠 것만 같았다. 자신의 몸을 버림(?)으로써 자신에게 부과된 정체성을 부인하고, 자신을 얽어맨 사회제도에 항의한 여자들의 삶의 불운과 고통을 그리고 그 비참한 말로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14)
김혜순이 문제로 삼는 것은 한국 문학장의 담론이 여성을 의미화하는 과정의 권력 작동 방식이므로, 여성주의에 의해 여성과 여성문학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양상 역시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인용문 ①에서는 전체주의적 시각이라고 불리는 권력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해당 글에서 김혜순은 시에 관한 글을 쓰는 과정에 개입되어서는 안 될 것을 지목한다. “선행 담론이 있을 수 없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이는 여성시의 개성적 표현을 억압하는 권력의 기제라는 것이 선행 담론에 의해 존재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일체의 행위임을 명시한다. 김혜순은 자신의 시가 해석되는 과정에서 “여성주의”, “난해 모던 초현실주의” 같이 선행하는 담론 체계가 개입하는 것을 비판하며, 시에 선행하는 모든 담론을 제국주의적 시각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때 여성주의 역시도 여성문학에 선행하는 담론이 되며 남성 문학사 전통이 여성시를 억압해온 전체주의적 의미화 방식을 답습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자신들의 지식 체계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을 가져와 나의 시에 들이대는 것”은 모두 선행하는 담론 체계에 자신의 시를 규격화하는 것이며, 이는 곧 “시의 나라 안팎의 제국주의”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용문 ②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페미니즘 담론”이 제국주의적 권력 기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비판한다. 김혜순은 페미니즘 담론 권력의 두 가지 부정적 효과를 제시한다. 첫째는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우나 또 다른 억압인 성 정체성을 부과”하는 것이다. 남성적 문학사가 여성문학에게 자의적 논리를 내면화하라고 했던 모순과 달리, 페미니즘 담론은 여성을 특정하게 단일화된 정체성으로 규격화하려는 한다.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구성하려는 시도나 또 다른 “성 정체성을 부과”하려는 페미니즘 담론은 ‘여성’의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의미화하려는 권력 기제를 답습한다. 전체주의적 시각의 주체가 ‘남성적 문학사’에서 ‘페미니즘 담론’으로 확장되는 양상이 흥미롭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과된 정체성의 울타리 안에서 괴롭기는 마찬가진가보다”라는 서술에서는 성별 이분법적 구획을 벗어나, 선행 담론에 의거하여 모든 존재에게 단일한 정체성을 강요하는 권력의 근본적인 기제 자체가 비판의 대상으로 등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순은 ‘여성’에게 단일한 정체성을 강요하는 담론을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쉽게 제안하지는 않는다. 인용문 ②에서 김혜순은 “자신의 몸을 버림(?)으로써 자신에게 부과된 정체성을 부인”하는 ‘여성’이 “다칠 것만 같았다”는 감상과 함께 불안함을 내비친다. “부과된 정체성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곧 선행 담론에 의해 규정된 ‘여성성’ 개념을 폐기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김혜순은 정체성 자체의 폐기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용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전체주의적 권력 기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가 “여자들의 삶의 불운과 고통을 그리고 그 비참한 말로”로 귀결되는 상황을 경험한 바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김혜순은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만들려는 페미니즘 담론 역시 비판하고 있으므로,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벗어 던지고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에서 해방되자는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해당 글의 후반부에서‘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 관한 독자의 질문에 대해 김혜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혹시 그 정체성이란 것을 우리 사회체제가 부과해 준 여성상 가운데서 찾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저는 스스로에게 던지곤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 그러니까 “너의 정체성이 뭐냐”고 묻는 질문 자체를 뭉개버려야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사회체제가 요구하는 정체성과는 다른 모습을 제가 저의 시적 삶 안에서 구현해 내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질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질문을 뭉개는 방식을 통해 저에게 부과된 정체성과 대결을 하는 것이지요.”15)
여성문학의 목표는 여성의 정체성과 경험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려는 남성중심적 논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므로 여성적 정체성을 여성 스스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김혜순은 역시 “사회 체제가 부과해 준 여성상”으로부터 탈피하여 여성 시인 본인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독자적인 여성적 정체성을 구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때 김혜순이 일차적으로 취하는 전략은 “너의 정체성이 뭐냐”는 질문 자체의 폐기이다. 이러한 전략은 자칫 여성적 정체성의 논의 자체를 소거하여, 남성중심적 의미 체계로부터의 분리를 도모하려는 시도로 독해될 수 있다. 즉, 여성적 정체성을 규명하는 일이 남성중심적 권력 기제로 인해 왜곡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으므로 정체성을 논하는 일 자체를 총체화의 폭력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용문의 후반부에서 김혜순은 “그렇다고 해서 그 질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언급한다. 질문 자체의 폐기를 부인하는 이 언급은 ‘여성적 정체성’ 찾기 과정에서 김혜순이 취하는 전략의 유의미함을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여성’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하여 의미를 고정하는 맥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과정에서 ‘논의의 전면적 폐기’ 대신 ‘방식으로서의 폐기’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김혜순은 여성에게 부여되는 단일한 의미 체계를 저항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을 뭉개는 방식”을 통하여 남성중심적 의미 체계에 저항한다. 이러한 방식은 앞서 살펴본 여성시를 대상으로 하는 시론의 목적을 묻는 질문의 존재 자체를 여성 시론의 의미로 전유하는 전략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① 남성중심적 문학사의 자의적 논리를 내면화하지 않으면서 ② 페미니즘 담론에 의한 ‘여성’ 정체성을 수용하지도 않고 ③ 단일한 정체성을 거부함과 동시에 정체성의 폐기를 주장하지 않을 수 있는 방식으로 김혜순이 말하려는 ‘여성성’은 무엇인가?
1) 김혜순, 「여성시와 유령화자」, 『여성, 시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139쪽.
2) 김혜순, 「개정판에 부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22, 12쪽.
3) 김혜순, 「초판 책머리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5쪽.
4) 김혜순, 「책 뒤에─한사코 사이에 있으려는」, 『여성, 시하다』, 229쪽.
5) 김혜순, 「초판 책머리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5쪽.
6) 김혜순, 「1990년대 시적 현실, 어디에 있었는가」, 김영옥 편, 『“근대”, 여성이 가지 않은 길』, 또하나의문화, 2001.
7) 위의 글, 110쪽.
8) 위의 글, 105쪽.
9) 위의 글, 118-119쪽; 해당 글에서 김혜순은 평론가들의 사대주의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나는 우리나라 문학을 세계화하려면 평론가 ‘오빠’들의 말을 먼저 세계화하라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 소위 외국의 전위음악이나 실험예술 앞에서는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이 한국의 시에게만은 박한 잣대를 들이대며 갖은 용기를 남발하는 것은 정말로 우습다. 세상에! 어쩌자고 그 오빠들은 그리도 의기충천해 있을까. 그러면서도 유행엔 민감해서 지난날 ‘관능적이다’ ‘혼란스럽다’ ‘어렵다’ ‘비현실적이다’라고 내리치던 채찍을 거두고, 시대가 변했다면서 그것이 대세라고,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박수를 치고 있다.” (김혜순, 「여성, 시하다」, 『여성, 시하다』, 119-121쪽.)
10) 성민엽, 「몸의 시학, 역동적인 에로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11) 김혜순, 앞의 글, 119쪽.
12)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은희경은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주체가 “인간의 대표이지 여성대표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히며, 자신의 소설이 ‘페미니즘 소설’로 범주화되는데 거부감을 표현했다. 심진경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여성문학은 ‘여성’이라는 작가의 생물학적 성에 근거하여 판단되어왔을 뿐, 문학의 미학적 원리로 접근되지 않았다”고 말하며, 여성문학의 범주를 협소하게 만드는 생물학적 여성 개념에 문제기를 제기한다. (심진경, 「2000년대 여성문학과 여성성의 미학」, 『여성과 문학의 탄생』, 222-223쪽.)
13) 김혜순, 「나의 지옥, 나의 뮤즈」, 『여성, 시하다』, 76쪽.
14) 김혜순, 「처참한 메시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129-130쪽.
15) 김혜순, 「1990년대 시적 현실, 어디에 있었는가」, 134쪽.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비평
분노의 하나비(花火)분노의 하나비(花火) ─ 구소현론1) 하혁진 썩은 과일에 사랑을 담아 건네면 신선해진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다시 살아난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 「요술 궁전」 중에서 * 오랜만이다. 이런 소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한동안 뜸했던 것은 사실이어서, 구소현의 소설을 읽는 내내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잔뜩 화가 난 소설이라니. 이렇게까지 눈치 안 보고 나쁜 소설이라니. 분노의 감정이 차갑게 벼려진 폭력적인 장면들이 설령 보기 좋은 (혹은 보고 싶은) 장면들이 아니더라도 어쩌겠는가. 뒤표지의 표현처럼 그 마음 역시 인간이 가진 ‘진짜’ 마음인 것을. 고백건대 분노가 가득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것이 불순한 마음임을 알면서도 적지 않은 해방감을 느꼈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우리 소설이 그 화를 지나치게 참고 있다고, 너무 오래 참아 왔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튼 구소현의 소설에는 곪을 대로 곪은 마음의 종기를 터뜨리는 것 같은 장면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면. 은호는 피곤한 날에 꼭 꿈을 꿨다. 그녀는 꿈에서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죽였다. 평생 꾼 꿈 중에서 최고로 기분 좋은 꿈이었다. 흉기로 목과 가슴과 배를 수차례 찔렀다. 기어가는 도중에도 계속 뒤쫓아가 마구잡이로 난도질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안면을 가혹할 정도로 가격했다. 눈알을 터뜨리고 광대뼈와 턱뼈를 으스러뜨렸다. 그 뒤 꿈에서 깨기 이전까지는 사람인지 연체동물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하게 시체를 훼손했다. 누군가 ‘꿈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묻는다면 은호는 어떠한 비난도 감수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324쪽)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곤란하다. 조시 코언은 “우리는 분노하면 종종 공격을 연상하며, 심지어 둘을 혼동하기도 한다”라고 지적하며, “하지만 공격은 분노와 달리 행동의 범주에 속한다”2)라고 짚어낸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구소현의 인물들은 느끼고, 행한다. 인용한 장면에서 은호는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극악무도하게’ 그리고 ‘기분 좋게’ 죽인다. 꿈이니까 괜찮다고? 그렇다면 소설은 현실인가 꿈인가. 은호가 말하는 ‘꿈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독자들은 꿈속에 있는가 현실 속에 있는가. 일단은 이렇게 대답해 두자. 끝없는 분노를 생산하고 심지어 부추기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출할 출구는 마땅치 않은 상황, 즉 “분노와 공격의 병목 현상”3)으로부터 이 소설들이 나왔다. 감정은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
- 하혁진
- 2026-09-01
문장웹진 비평
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 황석현 회색빛 갯벌, 우연히 스며든 사랑 박상영의 소설 세계 「대도시의 사랑법」 도입부에는 연인 규호와 연애를 시작한 지 200일이 지난 시점에서 규호가 홀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고영의 실수로 규호 홀로 떠나게 된 여행에서 고영은 공항철도 창밖을 바라보다, 감정의 리듬과 직면한다. “나 홀로 공항철도를 탔다. 창밖으로 회색빛 갯벌이 계속 이어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대도시의 사랑법」, 184-185면) 이 짧은 문장은 연인 규호와의 단절 이후의 감정을 '슬픔'이나 '외로움'으로 바로 치환하는 것이 아닌, 반복되는 비어 있음, 스스로를 검열하는 감정적 카메라, 종종 회색빛으로 필름이 씌워진 삶의 프레임으로 보여준다. 고영은 ‘갯벌’ 속에 발이 빠지듯 감정적 침몰을 겪으면서도 공허에 침전되지 않으며 곧이어 감정적 전환을 시도한다. 섹시한 팝가수 카일리 미그노 앨범과 립밤. 즉각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립밤을 찾는 행동은 감정을 파국으로 밀어 넣지 않기 위한 자기 정동의 능동적 복구 행위이다. 촉촉한 립밤을 바르며 감정의 표면을 다듬는 조심스러운 생존술로 읽을 수 있다. 입술은 말을 시작하는 신체 기관인 동시에 키스·식사·호흡 등 생존과 욕망의 경계 지점이다. 이는 사랑이 머뭇거리는 자리에서 지금 여기 다시 관계의 준비를 하는 미세한 제스처이다. 이는 관계를 살아낸 몸이 감정을 지속하려는 퀴어한 생존술이자 정동적 자기 조율 방식이다. 연인 규호와의 감정적 관계는 기계적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모르게 끝나가 보이지만, 여전히 감정은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은 도래하지 않을 듯도 보인다. 이 글은 그러한 지속 불가능한 단일한 감정의 리듬, 끊어졌으나 끝나지 않은 애착, 그리고 삶을 살아내기 위한 감정적 생존술을 퀴어 정동1)의 관점에서 따라가 보고자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가 보여주는 감정의 구조, 감각과 기억의 귀환, 기쁨의 부재가 어떻게 문학적 윤리로 전환되는지를 추적해본다. 로런 벌랜트는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에서, 우리가 삶을 지속하게 해주는 어떤 대상이나 관계가 오히려 그 삶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적 조건으로 변할 때의 정동 상태를 ‘잔인한 낙관’이라고 설명한다(윤조원·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24). 현대의 주체는 여전히 ‘좋은 삶(good life)’의 약속을 좇지만, 그 약속 자체가 자기착취적 생존을 강화하거나 정서적 고통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기도 한다. 박상영 소설 속 고영과 규호의 관계 역시 이러한 양가적 구조 안에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착을 통해 버티고 살아가지만, 그 관계는 사회적 제도와 생물학적 조건 속에서 점차 유지되기 어려운 형태로 변하며, 그럼에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내부에 잔존한다. 바로
- 황석현
- 2026-09-01
문장웹진 비평
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 오웅진
- 2026-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