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하나비(花火)
- 작성일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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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하나비(花火)
─ 구소현론1)
하혁진
썩은 과일에 사랑을 담아 건네면 신선해진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다시 살아난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 「요술 궁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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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이런 소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한동안 뜸했던 것은 사실이어서, 구소현의 소설을 읽는 내내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잔뜩 화가 난 소설이라니. 이렇게까지 눈치 안 보고 나쁜 소설이라니. 분노의 감정이 차갑게 벼려진 폭력적인 장면들이 설령 보기 좋은 (혹은 보고 싶은) 장면들이 아니더라도 어쩌겠는가. 뒤표지의 표현처럼 그 마음 역시 인간이 가진 ‘진짜’ 마음인 것을. 고백건대 분노가 가득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것이 불순한 마음임을 알면서도 적지 않은 해방감을 느꼈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우리 소설이 그 화를 지나치게 참고 있다고, 너무 오래 참아 왔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튼 구소현의 소설에는 곪을 대로 곪은 마음의 종기를 터뜨리는 것 같은 장면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면.
은호는 피곤한 날에 꼭 꿈을 꿨다.
그녀는 꿈에서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죽였다. 평생 꾼 꿈 중에서 최고로 기분 좋은 꿈이었다. 흉기로 목과 가슴과 배를 수차례 찔렀다. 기어가는 도중에도 계속 뒤쫓아가 마구잡이로 난도질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안면을 가혹할 정도로 가격했다. 눈알을 터뜨리고 광대뼈와 턱뼈를 으스러뜨렸다. 그 뒤 꿈에서 깨기 이전까지는 사람인지 연체동물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하게 시체를 훼손했다. 누군가 ‘꿈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묻는다면 은호는 어떠한 비난도 감수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324쪽)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곤란하다. 조시 코언은 “우리는 분노하면 종종 공격을 연상하며, 심지어 둘을 혼동하기도 한다”라고 지적하며, “하지만 공격은 분노와 달리 행동의 범주에 속한다”2)라고 짚어낸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구소현의 인물들은 느끼고, 행한다. 인용한 장면에서 은호는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극악무도하게’ 그리고 ‘기분 좋게’ 죽인다. 꿈이니까 괜찮다고? 그렇다면 소설은 현실인가 꿈인가. 은호가 말하는 ‘꿈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독자들은 꿈속에 있는가 현실 속에 있는가. 일단은 이렇게 대답해 두자. 끝없는 분노를 생산하고 심지어 부추기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출할 출구는 마땅치 않은 상황, 즉 “분노와 공격의 병목 현상”3)으로부터 이 소설들이 나왔다. 감정은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감정은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견해 혹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연관된다”4). 구소현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분노는 개인적 증상이 아니라 시대적 징후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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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분노는 오랜만일 뿐만 아니라 반가운 것이기도 하다. 분노에는 현실을 바꿀 힘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힘의 방향인데, 사실 분노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적·정치적 분위기를 주도해 왔다.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공포와 의심, 비난과 혐오의 정서가 팽배해진 것도 하루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이념적·인종적·성적·계급적 차이는 분노의 동력과 결합해 적대감과 배타적 태도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만연한 분위기가 사적인 삶과 관계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분노가 저항의 가능성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오남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오남용을 피하고자 분노의 함량을 줄이면 어떨까. 아쉽게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분노가 사그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평온이 아니라 포기와 허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썩 세상이 좋아질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다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종말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였어요.”(181쪽)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분노의 과잉이 혐오와 배타로, 분노의 결핍이 포기와 허무로 귀결된다고 할 때, 두 극단이 공유하는 전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건 바로 무엇이 되었든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즉 현상 유지는 악(惡)이라는 판단이다. 구소현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그대로’와 ‘가만히’는 선택지가 될 수 없다. 그들에게 현재는 결코 바람직한 풍경이 아니다.
공선은 오늘도 인공 호수에 잠긴 시체를 한참 동안 보다 나왔다. 그녀는 일주일 전 이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시체는 가스로 인해 부력이 커져 조금씩 뜨고 있었다. 이르면 오늘 내로 떠오르지 않을까 그녀는 예상했다.
물 위의 대학교 캠퍼스는 모든 게 순조롭고 평화로웠다. 연일 날씨가 좋아 학생들이 바깥에 많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판촉 행사를 위해 학교에 온 아이스크림 회사의 신제품을 들고 있었다. 레몬 아이싱과 시트론 커스터드 크림 필링이 들어간 커피 맛 아이스크림콘이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시고 달고 씁쓸한 맛을 느꼈다. (9쪽)
「시트론 호러」의 ‘평화로운’ 풍경은 시체가 잠긴 호수 위에 떠 있다. 시체가 떠오르는 순간 ‘순조로운’ 풍경은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설상가상 유일한 목격자인 ‘공선’은 “응시밖에 할 수 없는 유령”(14쪽)이다. 지독한 가난과 무관심 속에 아사(餓死)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그녀는, 유령이 되고 나서야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뭘 하는지 몰랐고, 어디에서도 목격되지 않았다”(14쪽). 유령인 공선은 전능하고 무능하다. 죽음은 그녀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줬지만, 여전히 그녀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일은 독서이다. 공선은 책 읽는 사람 옆에서 함께 책을 읽는 “은밀한 대화”를 통해 “오로지 책만이 세상의 구멍인 그녀의 윤곽을 보고 있”(16쪽)다고 느낀다.
그런데 공선의 독서 메이트인 ‘효주’가 (마치 호수에 잠긴 시체처럼)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사연은 이렇다. 효주가 다니던 학과에는 정부 지원 사업에 학생의 이름을 허위로 올려 지원금을 챙겨온 관행이 있었다. 저소득 청년 지원금을 따로 받고 있었던 효주는 그 명단에서 빠지기로 약속했지만, 행정상의 실수로 그녀의 이름이 명단에 올라가 버렸다. 결국 그녀는 부정수급자가 되어 지원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교수는 책임을 지겠다는 명분으로 학생들에게 전화를 돌려 효주의 사정을 설명하고 월급을 각출하게 했다. 악의 없는 실수에 어긋난 선의가 더해져 효주의 가난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효주는 “반쯤 짓눌린 지점토”(20쪽) 같은 인상이 되었고, 자연스레 무리에서 소외되기 시작한다.
가난과 소외라는 이중의 고충 속에 놓인 효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소설 창작 모임을 함께하는 ‘지민’과 ‘태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효주 없이 효주의 소설을 합평하며, 가난에 대한 묘사가 과하다거나, “사람들이 너무 보기 싫어하는 부분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쓴다는 등, 효주의 소설이 “현시대에 통용되는 감수성”(26-27쪽)과 맞지 않는다고 혹평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의, 무언가의 소외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 아닌가. 몰라서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보려 하지 않는 감정과 사정, 이를테면 효주의 가난과 소외감 같은 것은 그들이 말하는 시대의 감수성 안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오직 공선만이 효주의 소설에 공감한다. 공선은 “이런 소설과 이런 장면을 굳이 쓴 작가를 한번 끌어안아보고 싶어졌다”(29쪽)라고 말한다. 물론 공선은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다. 지민과 태오가 함께 읽은 책에는 “생각 없는 생산자”(21쪽)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공선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있다. 쉴 새 없이 생각하지만, 그중 무엇도 전달할 수 없는 공선은 ‘생산 없는 생각자’다. 그렇다면 효주에게 닿고 싶다는 공선의 마음은 무력한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소설의 마지막, 지민과 태오는 효주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강령술을 흉내 내다가 강령에 성공하는 실수를 해버리는데, 바로 그때 태오와 공선의 머리가 부딪치고, 마치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호수 속에 잠겨 있던 시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非)실재의 연쇄’ — 유령, 가난, 소설, 마음, 강령술 — 는 소설 내내 수면 아래 감춰져 있던 시체를 평화로운 풍경 위로 밀어 올린다. 구소현의 소설은 이와 같은 순간들을 끈질기게 모색한다. 현실로부터 소외된 것들이 도리어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는 힘이 되는 순간들, 들리지도 보이지도 인식되지도 않던 것들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장면들. 구소현의 소설에서 유령들은 때때로 서사의 경로를 비트는 변곡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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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만약 ‘유령’이 ‘몸’을 갖게 되면, 그 몸을 ‘적극적으로’ 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서두에서 예고했듯 머리를 부딪치는 수준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예컨대 「완치」의 ‘도르마무’는 피 칠갑을 한 채 택시에 타 있다. 그날 아침, 도르마무는 애인에 의해 죽을 뻔했고, 그녀는 살해의 동기가 ‘그때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질문이 선결되어야 하는 셈인데, 첫째는 도르마무를 죽이려고 하는 그는 누구인가이고, 둘째는 그에게 참기 힘든 분노를 심어준 그때 일이 무엇인가이다.
먼저 그는 누구인가. 도르마무는 죽지 못해 사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죽음에 대한 충동보다 더 큰, 죽기 직전에 견뎌야 할 두려움과 삶에 대한 미련을 이기지 못해 결국 죽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81쪽)하는 인간이다. 그녀는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런 그녀에게 “위험해요”(81쪽)라고 말해준 사람이 바로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쿠’다. 자기 손으로 죽이기 위해 살려둔 것일까. 연인이 되기 전 쿠는 “어떻게 하면 나를 믿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자주”(85쪽)한다고 고백한다. 도르마무는 “왜 그렇게까지”(86쪽)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지만, “진심을 보여주고 싶어서 아닐까요? (…) 동전이 들어 있지 않은 가짜 컵과 동전이 들어 있는 진짜 컵을 구분해달라고요. 나는 진짜 컵이니까 나를 들어 올려달라고 하는 거죠”(86-87쪽)라고 설명하는 쿠의 진심을 믿었고, 쿠라는 컵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그때 일은 무엇인가. 핵심은 도르마무에게 진심을 보여준 사람이 쿠가 처음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보육원 생활을 함께했던 도르마무와 ‘조’는 퇴소 후에도 자연스럽게 같이 살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둘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세상의 낙인들을 철저히 모르는 척하며 살았다. 그러나 애써 만든 안전한 세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전세사기를 당해 그동안 모은 돈을 전부 잃은 두 사람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르마무가 다니던 회사의 사정까지 나빠지며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다행인 것은 도르마무가 인원 감축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고, 불행인 것은 그녀가 그런 식으로 살아남는 것에 완전히 질려버렸다는 것이다. 이때 불가항력인 운명은 “일을 하고 싶지 않은데, 일을 해야 했다. 조와 함께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먹기가 싫었고 살기가 싫어졌다”(92쪽)라고 말하는 그녀가 일을 그만둘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암에 걸려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그녀가 바란 방식은 결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도르마무는 조의 헌신적인 돌봄에 의지해 완치된다. 문제는 조가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아홉 명이 죽은 사건”(98쪽)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는 암 환자의 가족과 측근을 상대로 가짜 신약을 판매하는 브로커였고,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용해 거액의 돈을 챙겼다. 조는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경우였는데, 쿠 역시 조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조는 쿠를 속였고, 쿠의 연인은 죽었다. 쿠의 연인이 죽은 것은 조가 팔았던 신약과 관계가 없음이 밝혀졌지만, 그러한 사실이 쿠의 분노를 누그러뜨려 주는 것은 아니다. 쿠는 도르마무를 죽임으로써 조가 본인과 똑같은 상황에 처하길 바란다. 그가 원하는 것은 ‘회복’이 아니라 등가의 교통을 ‘교환’하는 것이고, 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괜찮아지려고 이러는 게 아닌데요. 나는 괜찮아질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 시발년도 안 괜찮았으면 좋겠어”(105쪽). 그런 점에서 쿠의 분노는 “하나님의 절멸적 분노”가 아니라 “상처받은 인간의 무력한 분노”5)이다. 문제의 근원을 정확히 짚어 죄를 따지고 벌을 내리는 공평무사함을 기대해 봐야 별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도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문제의 시작점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조와 도르마무가 전세사기를 당한 것? 도르마무가 암에 걸린 것? 도르마무를 살리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던 조가 가짜 신약 사기를 당한 것? 혹은 조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행한 것? 혹은 애초에 조와 도르마무가 도움을 청할 사람 하나 없이 고립된 세상을 꾸릴 수밖에 없었던 것? 악이 악을 낳는 인타라망(因陀羅網)의 사슬 속에서 쿠는 가장 가까운 고리를 죽이려고 할 뿐이다. 그러니 그 분노와 해소의 방법이 옳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마음들이 전부 ‘진짜’라는 점이다. 구소현의 소설에서는 등가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릇된 복수를 행하는 마음도 진짜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짜 신약을 파는 지독한 마음도 진짜고,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마음도 진짜다. 그들은 모두 동전을 품고 있는 ‘진짜’ 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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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가정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다가 그를 죽이고 시체를 유기한 ‘복현’의 행위 또한 그것의 옳고 그름을 길게 따질 필요는 없다. 죄는 법정에서 물어야 하고, 또한 물어질 것이다. 그 대신 「5월에 공부하는 아이들」은 훨씬 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복현의 사정을 알게 된 상황에서 그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우리는 어떤 “도덕적인 선택”(298쪽)을 내릴 수 있을까(혹은 내려야 하는가). 우선 쉬운 선택지부터 제거하자. 복현에게는 ‘자구책’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를 신고한 적도 있지만, 법은 그녀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다시 말해 복현의 살인은 “살기 위해 했어야만 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316쪽)이었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그때 그랬잖아요. 사람은 어디에서든 사랑할 수 있게 태어났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요. 그렇죠? 저 괜찮겠죠?”(317쪽)라고 묻는 복현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혹은 대답해야 하는가).
레즈비언 커플인 ‘은호’와 ‘가영’의 대답은 다르다. 학원에서 복현을 가르쳤던 은호는 “신고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가영은 단호하게 “이 애를 데려가야 해”(317쪽)라고 말한다. “맞은 얼굴을 봤잖아. 그걸 보고 나서 어떻게 모른 척을 해”(318쪽)라는 것이 가영이 선택한 도덕의 논리인데, 아이러니한 것은 복현을 숨겨준 선택이 가영과 은호에게도 일종의 ‘해방’이 됐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십 년 차 연인이지만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복현은 “사랑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해준 첫 번째 사람이었으며, “복현과 함께 살면서 두 사람은 타인에게 사랑을 인정받는 기쁨이 크다는 것을 알게”(320쪽) 된다. 은호와 가영이 복현의 죄를 묻는 대신 그의 상처를 끌어안았듯, 복현 역시 두 사람의 관계를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사랑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비로소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가영은 훗날 찍게 될 시트콤을 상상하며 현재의 고통을 버티는데, 복현은 그 시트콤에 자신을 꼭 출연시켜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연하지, 네 캐릭터가 제일 골 때려”라는 가영의 대답에, 복현은 “그럼 좀 떳떳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요”(321쪽)라고 덧붙인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약속하는 순간, 지금 당장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서로에게 걸어보는 순간이야말로 그들만의 윤리가 세워지는 순간인 셈인데, 법도 도덕도 지켜주지 못했던 자신의 미래를 은호와 가영이 함께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위에서 복현은 자수를 택한다. 다시 말해 복현의 선택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미래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그 순간 두 동성애자와 한 여자아이의 윤리가 바깥으로 떨어졌다. 해방감이 들었다”(323쪽)라는 문장은, 세 사람의 윤리가 세상의 법이나 도덕과는 무관한 자리에 세워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구소현의 소설 속 윤리는 정의라는 어렴풋한 관념에 기대지 않는다. 그것은 “본인이 가장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지키는”(298쪽) 작지만 확실한 마음에 기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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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점검해야 하는 것은 구소현 소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비약’이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그래도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집이 너무 깨끗해서 이상하다는, 그런 이상한 생각”(252쪽)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이 비약은 구소현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예컨대 「요술 궁전」에 등장하는 ‘선우’의 메모를 훔쳐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분했다. 개인 정보를 따로 메모해 그를 찾아가고 싶었다. 집에 있는 부엌칼을 들고 찾아가 마구잡이로 그 사람을 난도질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우야 조금만 참아. 너는 꿈꾸는 대로 살 거야. 꿈꾸는 대로 살게 될 거야. 나쁜 건 다 잊고…… 힘내. 나중에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돼. (258쪽, 강조는 인용자)
아무리 “이중인격”이 “시대정신”(125쪽)이 된 세상이라지만, 앞에 옮긴 분노와 뒤에 옮긴 위로 사이에는 너무 큰 간극이 놓여 있다. 이와 같은 비약은 「오토매틱 블루베리」에서도 등장한다. ‘지한’은 “살아 있는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이쑤시개로 살갗이 뚫리는 것과 단 한 번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는 것 중 어떤 고통이 조금 더 나을까”(225쪽)를 상상하는 인물로, 삶을 포기하고 안락사에 가까운 영원한 최면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자살 시도 생존자인 ‘유정’에게 들려줬던 말, “야, 너 정말 운이 좋았어. 너는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237쪽)라는 말을 돌려받고 이내 삶을 선택한다. 얼핏 보면 소설의 개연성과 완성도를 문제 삼을 수 있을 만큼 위태로운 이 비약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실마리는 소설 속 인물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이 부당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신뢰의 연대가 침해당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 신뢰를 복구하려면, 무엇이 부당하고 무엇이 부당하지 않은지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있어야”6)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부당함을 공유하는 것은 세상에 관한 신뢰를 보존하고 강화하고 복구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내가 처한 부당한 상황과 그로 인한 분노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공통의 이해’를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은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래서 한 판사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믿음을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한 개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7). 구소현의 소설에서 비약은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될 때 일어난다.
따라서 ‘비약’과 ‘두 사람’이라는 패턴은 한 쌍이 되어 움직이는데, 「험악한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은 태어나자마자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이자, 성공한 사업가이며 유능한 게임 개발자다. 그녀가 만든 〈비셔스 서클 앤 피스〉 시리즈는 플레이어가 연방수사국의 요원이 되어 범죄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롤플레잉 게임으로, 개발자가 게이머로 하여금 윤리적인 사유를 하도록 유도하는, “메시지가 가득한 게임”(165쪽)이다. 그런데 진은 세 번째 시리즈부터 “주인공에게 비윤리성을 부여”(168쪽)했고, 그에 따라 플레이어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각종 범죄를 자유롭게 저지를 수 있게 된다. 윤리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가장 큰 규칙이자 특징이었던 게임에 변화가 생긴 것인데, 이 선택은 두 개의 사건을 일으키는 직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첫 번째 사건은 절친한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수잔’과의 절교다. 수잔에게 “윤리성은 이 게임의 정체성 그 자체였고, 게임이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자 동시에 한계가 명확했던 이유이기도 했다”(180쪽). 수잔은 세 번째 시리즈 이후 진이 그 정체성을 스스로 저버렸다고 여기고 그녀를 떠난다. 두 번째 사건은 진의 부모가 총기 난사 사건으로 사망한 것인데, 진은 보도를 통해 범인들이 〈비셔스 서클 앤 피스〉의 애독자였으며, 그들이 희생자 명단에 진의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그 사건 이후 진은 “도저히 악을 이길 수가 없었어요”(182쪽)라고 고백하는데, 그녀는 실제로 악에 투항해버린다. 각종 범죄를 자유롭게 저지를 수 있는 게임 속 플레이어처럼, 청부업자를 고용해 총기 난사 사건의 용의자 세 명을 잔인하게 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을 더 살펴야 한다. ‘도경’은 “사람이 다 죽는 영화”(173쪽)가 유일한 필모그래피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진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그녀를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는데, 그가 찍은 촬영분 어딘가에는 진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자백하는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도경은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고, 영화는 “512시간 21분 38초”의 촬영분 중에서 “단 1시간 38분”(189쪽)만이 편집되어 ‘진 이즈 플레잉 어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된다. 그렇다면 진의 자백을 보고도 모르는 척한 도경은 누구인가. 그는 세상을 파괴하려는 신, “고작 본인을 즐겁게 하는 게임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진에게 세상의 종말을 선물하려는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게임중독자 신”(193쪽)이다. 흥미로운 것은 악과 증오, 분노로 가득 찬 도경이 게임의 설계자인 진과 닮아있다는 점이다. 윤리와 비윤리의 사이에서 한 세계를 설계했던 진 앞에, 비슷한 얼굴을 가진 신이 찾아와 다시 한번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며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은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한다. 진은 “왜 마음이 바뀐 건데요……”라는 도경의 질문에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세상은 계속돼야 해. 아무리 끔찍한 세상이라도 말이야”(198쪽)라고 답한다. 이때 진이 떠올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수잔인데, 자신을 떠난 후 새로운 일상을 꾸리게 된 수잔의 소식은 진으로 하여금 여전히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요컨대 진은 단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세상의 종말을 유예한다. 이 소설에는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에스겔 14장 14절)라는 성경 속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 말의 의미는 아무리 의로운 자라도 세상을 통째로 구원할 수는 없다는 것일 테다. 진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종말을 막기 위해 반드시 그만한 크기의 공의(公義)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분노의 궤도를 바꿔주는 단 한 사람, “고작 이런 이유로 세상은 끝나지 않”(199쪽)는다.
*
여기는 거대한 솥입니다.
스스로 끓는 물에 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당신은 삶아지고 있습니다.
장기가 하얗게 익어가는 걸 지켜만 볼 건가요?
현재의 문제를 본인이 잘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해결되는 것이 없습니다.
알게 되었으면 행동해야 합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무모해져야 합니다.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119쪽)
지금까지 살펴봤듯 구소현의 소설에서 분노는 이야기를 쏘아 올리는 다이너마이트다. 그러나 또한 살펴봤듯 그 폭발이 반드시 파괴적인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폭탄(火)이 불꽃이 되어 아름다운 무늬(花)를 그리듯, 구소현의 소설에서 분노는 미래를 바꾸는 각기 다른 선택과 행동의 동력이 된다. 표제작인 「환호성」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분노와 세계의 종말이 나란히 놓여 있는 소설의 한복판에는 “터지기 직전의 무언가”(126쪽)가 있다. 세상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누락시킨다고 느끼는 ‘세경’ 역시 그 에너지를 감지하지만, 별다른 행동으로 전환하지는 못한 채 무력감에 빠져 있는데, 그런 그녀 앞에 고등학교 동창이자 국제적 반정부 시위단체 ‘세모공’의 조직원인 ‘콘(현주)’이 나타난다.
콘과의 만남은 세경에게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감정”(137쪽)을 일깨운다. 하지만 세경은 머지않아 콘이 “순교자”임을 알게 된다. 이때의 순교자는 테러를 저지르고 세상을 떠날 사람, “곧 죽을 사람”(144쪽)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세경에게 콘을 말릴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어떤 의욕도, 생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이 살고 있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죽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반복건대 콘이 하려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세경의 몫이 아니다. 구소현의 소설답게 세경에게 중요한 것은 콘이 저지르려는 테러의 끔찍함이 아니라, 그 일로 현주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의 끔찍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를 살릴 것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녀를 살리려면 우선 내가 살아야 한다.
세경이 선택한 윤리는 간단하다. ‘너’가 살았으면 좋겠으니 ‘나’도 살겠다는 것. 현주의 등장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 아무것도 아닌 삶”(150쪽)에 잊고 있던 의미를 불어넣었듯이, 현주가 들려준 녹음본, 바다 소리로도 박수 소리로도 들리는 “환호성”(151쪽)이 세경의 삶에 “기이한 힘”(152쪽)을 불어 넣었듯이, 이번에는 내가 너에게 응원의 마음을 돌려주겠다는 것. 소설의 마지막 장면, 종말을 앞둔 세계를 바라보는 뒷모습의 그림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등이 구소현의 소설 속 분노가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자리다. 구소현의 소설이 가르쳐주는 것은 들끓는 분노를 잠재우는 방법이 아니라, 그 분노를 살아갈 힘으로 전환하는 방법이다. “박수 소리가 되기도 하고 환호성이 되기도 하는”(158쪽) 파도 소리처럼, 구소현의 소설은 그 자체로 우리를 “착각하게 만드는 소리”(158쪽)이다. 책장을 덮은 우리의 귀에는 분노인지 희망인지 끝내 구분되지 않는 소리가 여전히 남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
아흔셋의 노투사는 죽기 전 미래를 살아갈 청년들을 향해 “분노하라!”8)라고 외쳤다. 젊은 시절 나치와 맞섰고, 세 곳의 수용소를 거친 끝에 기적처럼 살아남았으며, 이후의 삶 역시 인권 문제와 환경문제에 투신하는 데에 썼던 그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주고 싶었던 유산은 특정한 이념이나 조직이 아니라, 분노라는 감정이었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의 원천이 “참여의 의지”라고 강조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9)린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물론 분노가 항상 옳은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분노는 희망을 부정하고, 미래를 파괴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구소현의 소설을 통해 살펴봤듯 분노의 방향을 트는 것은 거창한 정의가 아니라 지켜야 할 단 한 사람, 지키고 싶은 단 하나의 목소리다. 그러니 이제는 이 글의 맨 앞에 옮겨두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썩은 과일에 사랑을 담아 건네면 그것은 다시 신선해지는가. 다시 살아나는가. 구소현의 소설은 이 질문에 섣불리 답하는 대신, 썩은 과일을 오래 붙들고 있는 손을 보여준다. 그 손이 분노로 떨리는 것인지, 사랑으로 떨리는 것인지, 혹은 그 둘이 애초에 하나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손이 나와 당신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1) 이 글은 구소현의 첫 번째 소설집 『환호성』(문학과지성사, 2026)을 주요 텍스트로 삼는다. 이하 같은 책에서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만 표기한다.
2) 조시 코언, 『분노 중독』, 노승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25, 16쪽.
3) 조시 코언, 같은 책, 26쪽.
4)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35쪽.
5) 조시 코언, 같은 책, 42쪽.
6) 마사 누스바움, 『분노와 용서』, 강동혁 옮김, 뿌리와이파리, 2018, 366쪽.
7) 박주영 판사의 판결문으로 인용한 부분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자살을 막으려는 수많은 대책과 구호가 난무한다. 그러나 생을 포기하려 한 이의 깊은 고통을 우리는 제대로 공감조차 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밖에서 보기에 별것 없어 보이는 사소한 이유들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듯, 보잘것없는 작은 것들이 또 누군가를 살아있게 만든다. 삶과 죽음은 불가해한 것이다. 어스름한 미명과 노을이 아름다워서, 누군가 내민 손이 고마워서, 모두가 떠나도 끝까지 곁을 지켜준 사람에게 미안해서, 이 험한 세상에서 지금껏 버텨온 자신이 불쌍하고 대견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생의 기로에 선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은, 그저 그에게 눈길을 주고 귀 기울여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울산지방법원 2019. 12. 4. 선고 2019고합241 판결 [자살방조미수](https://casenote.kr/울산지방법원/2019고합241)
8)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임희근 옮김, 돌베개, 2011, 15쪽.
9) 스테판 에셀, 같은 책,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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