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 포기 : 남성적 돌봄의 주권을 반송하는 소설적 방법들
- 작성일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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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포기 : 남성적 돌봄의 주권을 반송하는 소설적 방법들
김건형
최근 소설장에는 가부장이 남긴 재산과 권력, 그리고 그에 딸린 ‘돌봄’의 형태를 상속할 것인가를 두고 머뭇거리거나 항의하는 소설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가령, 성해나의 「스무드」1)는 광장의 ‘아스팔트 극우’ 노인들과 낯선 조우를 통해 한국 사회 고유의 가부장적 희생과 돌봄이 어색한 형상으로 되돌아온 경위를 되살펴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와 평론의 주목을 받았다. 직접적으로 동시대의 광장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가 구축해 온 고유의 남성적 돌봄과 그 유산을 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후속 세대의 곤혹과 고민을 다루는 소설들이 연작에 가깝게 제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지난 계절의 소설에서 “남성의 몸이 시들시들한 수동으로 묘사되”는 “허약한 남성성”이 자주 탐구되고 있으나, 그것은 “서사적 분출구 없이 사실적이기만 한 재현”이었다는 날카로운 진단이 한 입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2) 어쩌면 그 수동적이고 허약한 남성들이 서사에서조차 분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 자체가 동시대의 젠더·정치적 풍경에 대한 적확한 발견일지도 모른다. 다만, 굳이 남성(성)의 분출구를 대신 찾아주는 것보다는, 그토록 서사적 분출, 즉 ‘건강한’ 해법을 찾을 수 없는데도 자주 발견되는 남성(성) 재현이라는 패턴에 주목하는 것이 증상적인 독해가 될 것 같다.
할아버지의 유산, 역사를 다시 마주하는 오싹함
서장원의 「뱀이 있는 곳」3)과 김지연의 「무덤을 보살피다」4)는 모두 사촌지간인 손자, 손녀들이 죄 많은 할아버지의 무덤과 적폐를 ‘파묘’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화자들은 모두 할아버지의 유산이 과연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실체적인 힘이 있는 것인지를 반신반의하면서도, 실은 그저 자신이 과민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도, 끝내 각자의 집안이 숨겨왔던 비밀의 핵심에 다가가서 그것을 기꺼이 파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지연된다.
「뱀이 있는 곳」은 할아버지의 유산이 있는 ‘솔잎산장’으로 가는 길 내내 “하진에게 잘못한 사람들”(183쪽)에 대한 생각을 하며 시작한다. 성폭력 무고죄로 고발당한 하진은 자신을 도와줄 직장 동료들의 증언을 기대하지만, 사람들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하면서 하진을 외면하고 있다. 이를 전해 듣는 정인은 “그런 비겁한 선택들이 세상을 망친다고 생각”(184쪽)하며 부아가 치민다. 명백한 성추행 혐의를 고발해도 이를 상업화하는 법조계 자본의 힘에 의해, 깔끔하게 무죄판결이 나고 마는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잘못한 사람들과 비겁한 선택들을 회상해 보면 그뿐만은 아니다. 사소하게는 대책 없이 낭만적이고 무능한 부모들도, 좋은 대학에 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는 기숙형 재수학원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그런 잘못과 비겁함의 리스트에 있다.
억울한 사정과 주변의 비겁한 외면, 부조리한 법조 자본의 논리가 얽힌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하진은 회사를 그만둬야 했고, 정인도 직장을 구하지도 못해서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답답한 마음에 하진의 어머니는 박수무당을 찾아갔다가 “집에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이 있지 않느냐고 호통을”(188쪽) 듣는다. “그거를 여태 끼고 있으니까 자손들이 다 안 풀리는 거라고”(189쪽) “시아버지가 담근 뱀술”(188쪽)을 몽땅 거두어 태우며 굿을 해야 한다는 신점을 받아왔다. 돈이 없으니, 굿은 못하더라도 뱀을 싹 묻고 나면 상황이 나아질 것 같다는 희망을 갖고 하진과 정인은 할아버지의 뱀술을 처리하러 가는 중이다. 할아버지가 남긴 뱀술에 원한이 남아 자손들을 저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악의 때문에 자손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인과는 어쩐지 그럴듯하다.
뱀술은 “생각보다 더 끔찍”(187쪽)하다. 소름이 끼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은 반쯤 썩어가면서 악취가 진동한다. 뱀술과 같은 정력, 보신 문화는 한국 가부장 특유의 육식과 폭력의 문화를 응축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뱀술을 만들며 “완전히 자기밖에 모르는”(192쪽) “할아버지는 자신의 행동이 가족을 불편하게 하리라는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아마 그런 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끔찍했을지도 모르지만.”(193쪽) 그간 뱀을 잡아 술을 빚는 짓만 안 했더라도 할머니가 10년은 더 사셨을 것이라고 불평하면서, 하진은 할아버지가 기실 타인을 향한 특별한 악의가 없이 그저 자기 건강만을 위해 뱀술을 빚으며 살아왔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런 자기중심적 무감각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끔찍한 폭력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가부장 청산 혹은 장례 의식은 찜찜하고 애매하게 끝나고 만다. 뱀을 묻어 주는 의례에서, 알 수 없는 들짐승이 뱀 한 마리를 훔쳐 달아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대로 굿판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다. 기실 할아버지의 유산이란, 뱀술이라는 주술적 유산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바탕으로 일구어낸 아버지의 유산은 자신들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영리한 처세 덕분”에 “서울에서 직장을 잡고 자기 가족을 건사했”다는 “아버지의 자부심”(189쪽)은 특별한 악의나 의도가 없는 자연스러운 자부심이다. 정인은 자의식 없이 혼자 당당한 아버지의 기묘한 자부심이 “오만하고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일군 것은 자신도 나누어 받았다고 생각하면 할 말이 없었다.”(189-190쪽) 동생의 어려운 형편을 돕고, 하진의 변호사비를 대주기도 하는 아버지의 돌봄을 통해서도 할아버지의 유산이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정인은 그 명확한 사실을 짐짓 외면하면서 할아버지의 뱀술을 묻는다.
조부의 뱀술을 버리고, 희생당한 뱀을 묻어 주는 애도의 의례를 정성스럽게 행하면서도, 손녀들은 좀처럼 상쾌한 청산에 도달하진 못하고 있다. 뱀술을 담가 먹는 일이 징그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인은 매일 같이 고기를 먹는 자신의 생활은 뭐가 다를까 잠시 생각한다. “핏물이 남아 있는 스티로폼 접시를 버리다가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도 가끔 있었지만 대체로는 자기 식습관에 무감했다. 하지만 뱀을 묻고 소고기를 구워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194쪽) 소설이 뱀과 소 사이의 종 차별적 육식에 대한 문제에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할아버지의 유산에 대해서는 강렬한 적개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찜찜한 모습에 대해서는 무감하다는 이 대조를 예리하게 부조하는 것이다. 악의 없이 자기를 위한 뱀술을 빚은 할아버지와, 영리한 처세를 자부하는 아버지를 모두 문제 삼으면서도, 그런 가부장들의 돌봄과 유산으로부터 정작 자신은 정말로 무엇을 단절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찜찜함과 미진함, 그것에서 제대로 벗어나진 못했다는 불안이 소설 곳곳에 산포되어 있다.
이 소설 특유의 오싹한 분위기와 불길함은 비단 징그러운 뱀의 이미지, 정력을 향한 한국 남성 특유의 갈망, 주술적인 저주와 인과응보의 가능성에서 오지만은 않는다. 특히 할아버지의 업보를 온전히 청산하기 위해서는 실은 자기 자신의 몫에 대한 처분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화자들이 짐짓 외면하면서부터5) 생겨난다. 다시 소설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착하고 사람 좋은 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정인아. 자기 것을 지키는 거. 그게 중요해.”(183쪽) 자신의 부모는 그동안 자기 것을 지키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하진은 앞으로 자신은 자기 것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겠다고 말한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하진은 할아버지의 유산을 처분하려고 하지만, 이미 자기 내부 안에 이미 포함된 유산은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할아버지의 유산을 정말로 온전히 묻어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뱀에게 원한을 사서 업보를 물려준 “할아버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199쪽)는 분노만큼, 자신이 물려받은 혜택이나 자신이 행하는 일상적 비겁함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의” 성범죄 분야 전문 변호인의 확신에 찬 홍보 문구처럼 “너무 많은 것이 누락되어” 있어 “무책임”하다.(191쪽) 그러니 분노에 가득 찬 채로 “최선을 다해 두 손을 맞잡고”(199쪽) 할아버지로부터의 상속을 거절하는 두 사람의 제의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
「무덤을 보살피다」 역시 할아버지의 돌봄을 계승한 사촌 남매가 그 기원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통해 가족사적 마음의 계보를 다루고 있다. 화수와 수동은 꿈에서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무덤을 방문한다. 특히 화수는 대학원 졸업 이후 취직을 계속 못 하고 잘 풀리지 않는 삶이 어쩌면 “생전에 할아버지와 맺힌 것을 잘 풀지 못했기 때문인지도”(139쪽) 모르겠다는 주술적 불안을 갖고 있다. 사실 화수는 할아버지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름이면 조부모의 집에서 보내곤 했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자전거 뒤에 화수를 태워 동네를 돌아다니며, 화수가 전교 일등을 했다며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손자인 수동만 자랑스러워하는 할머니같이 흔한 노년 세대와 달리, 유독 손녀를 자랑스러워하는 할아버지를 화수도 무척 사랑했다. 할아버지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보행 장애를 얻게 되었지만, 마약 투약 이력이 있어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했다. 화수는 마약까지 투약해야 했을 정도로 상처를 입은 할아버지의 전쟁 트라우마를 상상하며 할아버지를 더더욱 연민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을 그토록 아껴주는 사람이 선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도 있었”(140쪽)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 선한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와 연민은 할아버지에게도 있다. 할아버지는 대학 신입생이던 화수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소원”이니 이번 대선에는 “부모를 다 비극적으로 잃은 가여운 여자”(141쪽)를 뽑아달라고 부탁한다. “아낌없이 자신을 돌보는 가족과 친척들 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청소년기를 보냈고 정치 같은 것에는 별 관심도 없었지만” “그 가여운 여자를 꼭 뽑으라”(141쪽)는 가여운 할아버지의 부탁 때문에 화수는 박근혜에게 표를 주었다. 산업화 시대를 이끈 가부장을 상징하는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은, 자신 역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산업화 시대의 역군이었다는 할아버지의 자부심과 연동된다. 그리고 그것은 손녀를 향한 사랑과 돌봄(의 요구)로 계승된다. 그러나 그것은 화수의 친구들과 여자친구에게는 정치적 무지이자 배신으로 인식되고, 이로 인해 “뽑은 사람도 다 공범”(151쪽)이라는 말을 듣고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가해자의 위치에 자신을 서게 만든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152쪽)과 함께. “화수는 세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수록 기존에 자신이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 선했던 세계가 패배했다는 것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인정했다. 자신에게 그런 패배가 필요했음을.” (152쪽)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스스로를 비극적인 ‘가여운 여자’와 동일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정희를 위시하여 개발독재를 통해 일구어낸 한국의 산업적 성공은 기실 국내외적인 국가 폭력과 밀접하다. 특히 한국 특유의 국가-가족주의는 국가 폭력의 가해자/피해자로 하여금, 일생을 가족과 자식을 위한 자발적인 자기희생으로 번역하여, 강력한 자기 효능감을 생산하게 하도록 유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한강의 기적도 베트남전 없이는 불가능했다. 할아버지에게 그건 분명 대한민국을 살리는 일이었다.”(141-142쪽) 그러한 가부장의 돌봄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후대의 보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가여운 여자’와 ‘가여운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선대는 자신의 생애를 가족을 위한 자발적 희생으로 번역하여, 후대에 보은과 효도라는 정동적 부채감과 사회적 죄의식을 유발한다. 이렇게 희생의 선행(善行‧先行)을 강조하여 선대는 시간적 특권을 확보한다. 따라서 연령주의 및 가족주의와 결합하여 ‘가여운 우리 (조)부모’에 대한 끝없는 반응을 요구하곤 한다. 이것이 최근 아스팔트 위로 나온 우파 정치의 세대론적 문법이자 정동적 자기 인식이기도 하다.6) 그렇게 “할아버지는 내내 강한 사람이고 싶어 했고 그게 할아버지를 점점 더 망쳤다.”(140쪽) 할아버지는 끝내 스스로 자신의 고독과 상처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말하지 않았고, 이 일방적인 돌봄과 보상의 요구는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와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된다. 임종 직전, 약에 취해 혼몽한 할아버지가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지만, 화수가 이를 끝내 수행하지 못한 것은 세대 간의 청산이란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할아버지의 선산에서 내려오던 화수는 길을 잃고 썩어가는 비린내로 가득한 양어장에서 헤매게 된다. 양어장을 운영하는 수상한 남자가 실은 집안에서 쉬쉬하던 골칫거리 막내 삼촌인 것을 알게 되지만, 역으로 “나는 이 집안의 피해자”일 뿐 “속죄할 게 없는 사람”(148쪽)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 수상한 삼촌이 실은 집안이 간직한 모종의 비밀스러운 폭력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개발독재 세대의 유산 혹은 빚에 해당하는 이 양식장은 더더욱 그로테스크하고 오싹하게 느껴진다. “먹이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검은 입들이 징그럽다고 생각”(136쪽)하면서 화수는 삼촌과 부모 세대가 자신에게 숨긴 유산-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이제부터 알게 될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화수는 “자신이 물려받은 세계가 한 번 더 패배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못내 기다려졌다.”(155쪽) 아마도 생존과 경쟁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을 앞선 세대의 징그러운 이야기일 것이다. 그것은 화수의 다정한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다시 무너뜨리고, 자랑스러운 손녀라는 자부심을 무너뜨리며, 화수를 다시 패배하게 만드는 이야기일 것이다. 명확한 사건의 인과를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소설은 산업화에 대한 가시화된 자부심과 그것이 일부러 비워둔 시공간이 있음을 명징하게 대조함으로써, 실은 그동안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조부 세대의 돌봄을 낯설고 생경하게 그려내고 있다. 산업화-베트남전의 경제 발전 효과 안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것들을 온전히 마주하지 못하고 명명하지 못했다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베트남전 참전 용사의 보훈 방안 같은 것이 아니라, 베트남전같이 산업화 세대의 가부장이 성취가 동반한 죄과에 대해서는 더 충분히 보는 것이라는 발견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청산을 확신하는 정인과 화진의 기도와 달리 패배를 자못 기다리는 화수의 겸허한 궁금함은 역사적 이야기를 위한 무대를 요청한다. 역사를 궁금해하기에 비로소 유산을 진정으로 청산할 일말의 가능성이 열린다.
두 소설은 상속의 매개를 둘러싸고 징그럽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다. 이는 화자 자신이 물려받은 가부장의 유산과 욕심이 끔찍하다는 거부의 태도이기도 하다. 또한 그렇게 조부를 거부하고 있다는 명확한 자의식과는 별개로, 그들 역시 어떤 지점에서는 이미 상속한 것이 자기 내부에 섞여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면서 생겨나는 자기 부정의 감정은 스릴러적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공포스러운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 소설들, 이 유산을 둘러싼 역사성을 다시 돌아보는 소설들이 더 등장할 시점이다.
입증하는 아버지의 유산, 왜곡된 남성성의 반송
윤현준의 「소작」7)과 정이현의 「증명하는 마음」8)은 모두 유약해진 아버지의 현재 모습을 마주하면서, 그들이 무기력하고 나약해진 기원을 추적하는 소설이다. 예전보다 훨씬 더 허약해진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은 갖고 있지만 그것은 기묘하게 미끄러지기만 한다. 화자들은 아버지를 향한 돌봄의 방법을 제대로 찾거나 전달하지 못한다. 이는 문학사에서 흔히 그렇듯 초라해진 아버지의 초상을 그림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잊힌 공로를 치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늙은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상황은 그들의 무기력함이나 악덕이 자신에게 유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을 토로하기 위함에 가깝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었던 돌봄을 역전시킨 현재의 이 구도에서 아버지의 남성성은 다시 생경하게 그려진다.
「소작」에서 화자는 ‘가부장이 아닌 아버지’를 근거리에서 관찰하고 있다. 소설은 “네 할아버지가 사람을 잘못 봤지. 장서방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는, 아버지에 대한 외할머니의 퉁명스러운 인물평을 내놓으며 시작한다. “아버지는 소작을 치던 농부의 아들”로 땅 주인이던 외할아버지의 눈에 들어 어머니와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딸만 가진 외할아버지를 도와 소작농을 관리하는 마름의 일을 해왔지만, 최근 그 땅이 모두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일을 잃고 주로 외할머니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걸 용납하지 못했다. 매일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으며 자주 할머니를 탓했고 그보다 가끔 토했다.” 한때 아버지에게는 외할아버지가 발견했던 모종의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 가능성은 모조리 사라지고 없다. 마름으로써 지주인 외할아버지를 충실하게 모시다 보면, 언젠가 그 땅을 물려받은 가부장이 될 수도 있었을 수도 있었지만, 이제 땅은 모두 농지가 아니라 신도시로 바뀌고 말았다. 전근대적 부계 상속의 권위가 남아 있던 시대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는 유산에 전권을 행사하며 부계 상속의 가능성을 모조리 빼앗았다. 자손들 위에 군림하며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가모장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집안 모두가 할머니의 시선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군식구에 불과한 데릴사위가 되어 외할머니를 모시고 있을 따름이다. 아버지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외가에서 불편한 식사를 할 때마다 남몰래 구토하고 있다. “그러나 식사를 거부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고개를 꼿꼿이 들고 그릇을 비웠다.” 마지막 남은 상속의 가능성까지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이 사실을 비밀로 남겨둔다. “불규칙적으로 들썩이는 어깨와 팔뚝을 타고 흐르는 타액. 그런 건 나만 알아야 하는 비밀이었다. 나는 종종 그걸 유대라는 이름으로 읽어냈다. 아버지는 종종 말했다. 이건 일종의 가보 같은 거라고, 누군가 알게 된다면 그건 아직 세상에 없는 네 아들이어야 할 거라고.”
아버지는 오직 나에게만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 그 신체 증상인 구토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자신이 이 모계 집안의 데릴사위로서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지를, 그럼에도 유산 상속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고집스러운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자신이 얻어낼 미래의 지위와 권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어떤 고생을 하는지를, 너만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자신의 고행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마지막 남은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입증하려 한다. 이 모계 집안의 유산을 부계로 다시 상속하기 위해서, 아직 세상에 없는 너의 손자까지 이어지도록 부계로 다시 상속하기 위해서, 지금 자신은 수치와 모욕을 참고 있다는 영광된 수난을 실시간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수치스러운 구토를 공유함으로써, 이를 미래의 부계 상속을 위한 가보이자 부자간의 비밀스러운 유대로 포장하려 하는 것이다. 권력을 계승하기 위하여 수난을 견디는 희생은 몰락한 가부장이 아들에게 전하는 유일한 돌봄의 방식이다. 현재의 수치를 참고 숨기는 능력, 그것을 공유하는 남자들 사이의 이 비밀스러운 유대는 모계 사회에서 가부장의 권한을 계승할 ‘가능성’을 굳건히 지켜내는, 몰락한 아버지만의 돌봄의 방식이다.
그러나 ‘나’에게 이 남계 상속에 대한 기대는 불확실하고 기묘하다.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어떤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서 봤던 가능성을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서 봤던 가능성이 무엇일지 상상한다. 어쩌면 외조부의 땅을 대신 관리하면서, 사돈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자신의 친부의 농작물을 친히 살펴보고,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는 친부의 팔을 뿌리치고 다음 밭으로 향할 수 있는 태도. 가부장의 권력을 모시기 위해 단호하게 가족을 뿌리칠 수 있는 강단을 입증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서 본 어떤 가능성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가족’을 뿌리침으로써 ‘지주-가부장’의 권력을 강화하고, 신분이 상승하게 되고 부권을 계승하는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소설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가부장이 되지 못한, 혹은 그럴 전망을 상실한 ‘아버지’의 상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부조해 낸다. 그는 가부장(의 계승 후보자)이 아닌 방법으로 ‘가족’을 대하거나 아버지 노릇을 하는 방법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는 가부장 외에는 다른 아버지의 상을 알지 못하고, 가족과 관계 맺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 의존해, 그 부산물의 자리라도 차지함으로써 존재하는 방법만을 알고 있다. 소설이 그것을 드러내자 순식간에 아버지라는 자리는 너무도 나약하게, 추레해지고 만다. 아들에게 그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면서 자신처럼 ‘마름’으로라도 가부장을 계승할 가능성을 전해주고 싶어하지만, 아들은 이제 그런 가부장의 자리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대신 “그를 위해 문을 당겨 열 것이다. 그런 뒤에 안락한 가정과 살찐 아이들이 있는 환한 거실”을 보여줄 것이다. 구토하는 아버지 없이도 “내가 잠시 비우고 나온 자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충분히 행복하고 다정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곳에서 ‘나’는 가부장의 상속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분한 ‘다른 아버지’의 상을 그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증명하는 마음」의 돌봄은 이와 정반대다. 아직은 아들을 보호하고 돌볼 권력이 충분했던, 아니 실은 과도했던 1990년대 아버지의 돌봄을 그리고 있다. 현재 성숙한 어른이 된 “수오는 걱정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358쪽) 그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우량주에 투자하면서, 적당한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한 성인으로 자랐다. 그러나 어린 시절 수오는 아버지에게 너무도 많은 걱정을 받던 아들이었다. 수도권의 화력발전소에서 설비 기술자로 일하던 조원은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고 늘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아들의 성장 과정에도 신경 쓰는 가정적이고 모범적인 아버지상처럼 보인다. 그는 어린 수오의 체격이 하위 5.8%에 해당한다는 소아과 의사의 말을 듣고부터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수오의 성장일기에 “1차 목표: 10% 달성”(360쪽)이라고 적고 “수오의 체격 키우기에 골몰”(360쪽)한다. 늘 소고기와 감자 요리를 해먹이고 밤마다 탕약을 고아 마시게 한다. 약을 남길 때마다 아들에게 마저 먹고 “둘째 줄엔 앉아야”(361쪽) 한다고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한다. “그 목소리가 너무 간절해서 협박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는, 밑도 끝도 없는 예감이 수오에게 있었다.”(361쪽) 더디게 자라는 수오의 몸은 아버지의 불안을 자극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어떤 “예기치 못한 위험 앞에 혼자 놓이지 않도록”(361쪽) 하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우산도 없이 서 있던 수오에게 한 아저씨가 다가와 “사내놈이 이쁘게도 생겼(363쪽)”다며 “가슴 좀 펴라”(364쪽)는 말과 함께 우산을 빌려주고 어깨를 두들겨 주는 일이 생긴다. 그 일을 들은 조원은 감히 누가 자신의 아들을 건드렸냐며 수오가 (성적) 폭행을 당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소설의 중반부는 그가 얼마나 집착적으로 범인을 찾는 데 몰두하는지, 찾아낸 범인의 별 뜻 없는 호의를 악의라고 입증하는데 얼마나 사력을 다하는지를 조명한다. 광적으로 범인을 찾고 범인을 확정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수오의 의사와 감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력하게 폭행을 당한 나약한 아들과 그런 그를 지켜주고 대신해서 복수해 주는 강한 아버지 자신의 이미지다. 이를 위해 수오의 경험을 폭행을 당했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이를 재차 강요한다. 그리고 끝내 그 폭행을 행했다고 간주되는 범인을 집요하게 추적해 내고 지역 사회에서 그를 완전히 쫓아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사건의 진실이 아니었다. 경찰에게는 “아이의 상처가 워낙 커서 고민이라고”(377쪽) 말하면서도, 조원은 수오가 그날의 사실을 말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말하길 강요한다. “조원이 원하는 건 결국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379쪽) 그리고 “조원은 이것이 가족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임을 계속 강조”(377쪽)한다. 가족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고, 경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강하게 성장시키는 것이 조원이 자부한 아버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돌봄의 주체라는 역할을 반드시 증명해야 한다는 남성적 조건이 조원이 생각한 아버지의 중요한 요건이었던 것이다. 특히 “아이에게 ‘사내놈이 예쁘다, 계집애 같다’고 하면서 모욕감을 주지 않았”(375쪽)냐고 따져 물으며, 아들의 남성성을 훼손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분개한다. 아들의 남성성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자란 수오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조원이 세웠던 성장 목표를 초과 달성할 만큼 훌쩍 자란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보호의 대상에서 벗어나 조원과 멀어진다. “너랑 똑같은 새끼를 낳아 키워보라는 악담을 했지만 수오는 당연히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고 맞받아쳐서 다툼이 커진 날도 있었다.”(381쪽) 더 이상 아버지와 같은 돌봄을 재생산하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자란 것이다. 그렇게 자란 수오는 위급한 상황에 처한 아버지의 병문안을 가는 것도 최대한 미루고 있다. 그저 요양 병원비를 입금하는 선에서 “최소한의 의무는 저버리지 않았다는 구차한 증명”(373쪽)을 다할 뿐이다. “아버지가 오늘을 넘기지 못하더라도 하룻밤은 상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382쪽)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린다.
그렇다고 조원 개인이 대단히 악한 사람이었거나 아버지로서 대단한 단점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아버지도 아주 특별한 경우는 아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367쪽)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아버지의 돌봄이라 믿었던 것이 실은, 가족을 보호하고 지키는 자신의 자아 이상을 증명하려는 강박에 불과했다. 수오는 이 점을 직시하고 있다. 그런 아버지 됨을 재생산하고 계승하지 않겠다는 수오의 단호한 다짐은, 그렇게 ‘증명하는 아버지’가 시효가 완전히 끝났다는 인식이다.
두 소설은 가부장적 유산을 증명하려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시도를 서로 정반대의 방식으로 비추고 있다. 유약하거나 강압적인 아버지의 돌봄이라는 대조 속에서, 공통적으로 한국 사회의 남성(성) 서사에는 가부장적 가족 제도와 무관하게 아들과 일대일로 관계를 맺는 방식이 실은 부재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간 주로 딸의 입장에서 부권에 저항하던 한국 문학의 전통에서 비추어 보면, 이제 아들의 시점에서마저 부권의 승계를 거부하기 시작했다는 양상은 주목할 만하다. 이제 아들들은, 가족 제도에 의존하여 자신의 권좌를 승계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방식의 부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상속을 거부하고 있다. 이제는 다른 돌봄의 방식이, ‘돌보는 남성성’의 새로운 모델/서사가 필요하다는 후속 세대 남성 청년들의 자각인 것이다. 이제 가부장의 유산 상속 포기 이후의 삶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남성적 돌봄을 새롭게 발명하는 서사가 등장할 시점이다.
1) 성해나, 『혼모노』, 창비, 2025.
2) 김다솔·민선혜·안세진·정의정, 「계간평-몸의 소설, ‘하는’ 소설」, 『문학동네』 2026년 여름호, 423쪽.
3) 『문학과사회』 2025년 가을호.
4) 『자음과모음』 2025년 봄호.
5) 이소는 이 소설에서 “하나의 생명을 다른 생명과 맞바꾸는 삶과 죽음의 그물망이 여러 방식으로 가시화”되면서 뱀이 점차 오싹함의 기호가 된다고 말한다. “뱀을 죽인 죄”를 별개로 하더라도 스스로도 믿지 않는 뱀에 대한 기도를 올리는 것도 “뱀을 욕보인 죄”가 되어 으스스함의 정동을 만들어 낸다. 이소, 「구덩이에 떨어진 짐승처럼-수직과 죽음의 정동」,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6년 봄호, 60-61쪽.
6) 김건형, 「열린 사회와 그 시민들의 마음-새로운 광장의 시민문학론」, 『문학동네』 2025년 가을호.
7) 웹진 ‘주간 문학동네’ 2026년 3월호.
8) 『자음과모음』 202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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