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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공화국 문학 선언

  • 작성일 2026-10-01

  제6공화국 문학 선언1)

  ― 사변적/편집증적 한국문학 시론 ―


윤재민



1. 한국 문학사라는 유령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다. 아주 진부한 대목으로 운을 띄우며 글을 시작할 테니까. 심지어 다음과 같이 약간의 패러디까지 가미해서.


  하나의 유령이 한국 문학계를 떠돌고 있다. 한국 문학사라는 유령이.


  지금부터 관철하고자 하는 사안을 유령론만큼 적확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는 내가 문학과 관계하는 진부하면서도 일견 특수한 위치에서 나타난 ‘문학사적 충동’의 발로이다. 그것은 기존 문학사 서술에 대한 모종의 불만에 기인하는데, 그렇다고 문학사를 다시 쓰겠다는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기존 문학사와 전혀 다른 시간성에 한국문학을 내던지고 싶다는 충동에 가깝다. 

  내가 이런 독단적인 문학(론)을 욕망하게 된 계기는 아래의 대목에 사로잡히고 나서부터다.


  한국 문학사가 개별 문학이라는 의미는 한국 문학사의 기준이 한국사 총체 속에 있다는 사실의 소박한 인식을 뜻하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볼 때 이러한 진술은 편협한 지방성, 파행성의 노출로 오해되기 쉬우며 심지어는 배타적 독선적 쇼비니즘 내지는 문화의 보편성을 압살하는 사고방식으로 간주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체 민족의 행복에 감성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문화 파악력은 역사의 추진력이 될 수 없을 것이다.2)


  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1973)의 한 대목이다. 두 사람의 문학사 시도는 임화 이래 이식문학론의 성취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민족 공동체의 근대적 주체성을 한국문학 성립의 당위로 삼은 ‘총체적 민족 문학사’의 한 전범으로 남았다. 근대 맹아론으로 간편하게 정리되기도 하는 『한국문학사』의 총체적 관점은 이 시대에는 설명력의 한계가 뚜렷하다. 이식문학론이든 근대 맹아론이든 간에, 더 이상 한국문학에 대한 총체적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내가 『한국문학사』에서 매혹된 사안은 『한국문학사』의 서술 방법이 아니다. 문학사 서술의 당위를 ‘주체 민족의 행복에 감성적으로 작용하는 문화 파악력’에서 구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공동체의 행복과 역사 운동의 작동이 양립할 수 있는가. 위 인용문에 표명된 ‘행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두 사람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 모호한 대목에 사로잡혀, 그 의미를 내 식대로 번역해본다.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아도르노는 행복을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할 수 없는 가치로 본다. 폭력과 모순으로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가 억압되고 핍박받을(말 그대로 행복을 박탈당할) 잠재성이 상존하는 가운데, ‘현세의 행복’이란 이를 망각케 하는 허위이자 기만이라는 것이다.3) 그러나 아도르노 같은 현자가 아니라면 누가 ‘현세의 행복’을 쉬이 포기하겠는가. 그 양태가 허위이든 기만이든, 우리는 각자의 행복을 추구한다.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행복 나아가 존엄을 건 요구를 기만하는 방향이더라도 허위를 선택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전쟁과 학살 앞에서 주가지수를 걱정하듯이. 이런 자신에 대해 때때로 위화감을 느끼거나 반성하면서 살아간다.

  『한국문학사』에 표명된 ‘주체 민족의 행복’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한다. ‘현세의 행복’을 향한 이런 종류의 집합적 운동은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시대의 움직임에 일조하는 조건임이 분명해 보인다. 김현과 김윤식에게 ‘한국문학’이란,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감정의 문화적 형식이었는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의 ‘행복’이란 내가 선택하지 않았으나 이미 나의 일부가 된 공동체를 운동하게 만드는, 요즘 식으로 ‘정동의 총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운동의 기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제각각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투쟁한다.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든 혹은 타자에 대한 헌신이든 말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과 형태는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행복을 붙잡기 위해 도덕이나 윤리적 한계선을 넘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행복 추구는 타인의 그것을 침해할 잠재적 위협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우리의 행복을 위협할지 모를 잠재성은 우리 각자의 행복을 위해 이에 기꺼이 적대할 역량의 다른 말이다. 서로 다른 ‘행복’의 반목과 충돌의 집합적 정동은 공동체에 내재한 잠재적 운동 에너지이다. 『한국문학사』는 그 행복의 주체를 ‘민족주체’라는 단일한 총체성으로 포착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이미 끝났다. 나는 ‘행복’의 의미를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공동체의 연대와 적대에 따른 잠재적 운동성으로 번역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나의 기획은 서로 충돌하는 행복의 요구들이 빚어내는 집합적 운동이라는,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채 현전하는 유령에 의지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


  나는 이천십 년대 초부터 십여 년간 주류 한국 문학계의 중심과 그 언저리를 오가며 활동해 왔다. 여기서 말하는 ‘주류 한국 문학계’는 대략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 집단에 속한 활동 축의 교집합이다. 하나는 소위 한국의 메이저 문학 출판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서울 소재의 느슨한 문학-행위자 커뮤니티이다. ‘주류 문단’이라 뭉뚱그려 지칭되기도 하는 추상적인 집단이라 이해하면 편할 듯하다. 다른 하나는 국내 주요 대학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분과 출신의 학인이라는 정체성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안인데, 내가 속한 분과는 위에서 내가 속해 있다고 주장한 ‘주류문단’의 행위자 양성(재생산)의 주요 산실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나는 적어도 한국문학의 주류 제도와 무관한 주변인으로 자신을 서술하기 어려운 행위자다. 한국문학과 관계된 나의 경로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심’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 나의 공식적인 경력, 현재 직위 및 직책은 이를 명확히 반영한다. 한국 문학계에서 진정으로 ‘주변인’이었던 경험이 없다고 봐야겠다. 그것은 현재 나의 물리적인 생활반경 및 활동 영역 무엇보다 한국 문학계 주류·중심에 대한 나의 위화감과는 (아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지만) 다른 층위의 얘기다.

  CV나 작가 프로필에나 들어갈 부수적인 정보를 본문 안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현재 나의 위치 무엇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경로가 문학사에 대한 나의 유령적 충동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구체적인 상 없이 그저 단상에 불과했던 문학사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어떻게든 이를 언어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편집증으로 치닫고 있다.

  내 주위를 현전/배회하는 문학-유령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문학사를 서술할 구체적인 학술적 비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이는 나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연구·비평가들은 광의의 문학사적 어프로치를 거부하는 한편으로 이를 욕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모순이 교정해야 할 오류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되려 우리 시대 문학사 서술의 핵심적인 사안이라 생각된다. 기존 한국 문학사의 어프로치가 우리 시대의 문화 그리고 이에 따른 문학 인식과 욕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확연한 상황이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 시대’를 서술하려는 욕망 혹은 소명이 주어져 있는 것처럼 나는 느낀다. ‘우리 시대’를 결정적으로 서술할 역사적 어프로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말이다. 어쩌면 영영 그럴지 모른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기꺼이 이를 찾아 광야를 헤맨다. 한국 문학사 인식을 떠받치는 “문학적 사실에 대한 종합적 지식과 역사에 대한 일관적 관점”4)의 불가능성이 학계에 선언된 지 십여 년이 지났다. 당대 한국문학의 평자와 연구자들에 의해 각자(혹은 집단)의 시공간과 지평에 유의미한 차이와 시차의 문학사 서술, 이른바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가 만발하고 있다. 남성-엘리트 중심의 ‘민족 문학사’를 상대화하는 문학 연구의 문화사적 어프로치(『연애의 시대』)에서부터 당대 연구·비평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페미니스트 기획의 문학사(『원본 없는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문학사 기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문학사는 과거 한국 문학사의 단선적인 역사서술과 남성 중심의 단일 민족사 서술 이후의 ‘포스트 한국 문학사’라는 암중모색의 시대 인식의 척도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최근 시작된 『동시대 문학사』 시리즈는 이를 전적으로 승인하는 문학사 시도로 읽힌다. 『동시대 문학사』는 단선적 문학사 기획이 불가능해진 시대, 문학사를 다양한 관점이 경합하는 계보학의 ‘장소들’로 전환한다. 물론 공간의 점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때로는 수목적(arborescent)으로 때로는 리좀처럼 뻗어나가 얽히는 ‘역사적’ 흐름과 그 과정을 포착할 공통적인 시간 축이 필요하다.


  ‘현대문학사’ 대신 ‘동시대 문학사’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라는 시간적 구획은 중세와 근대를 넘어선 선조적인 시간대를 의미하지만 ‘동시대’는 과거적인 것이 잔존하는 채로 ‘현대적인 것’이 발생하는 비균질한 시간대를 의미한다. ‘동시대’ 안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교차하고 경쟁하며 뒤섞인다. 그곳에서 우리는 ‘현재가 개입된 과거’와 ‘과거가 잔존하는 현재’라는 시간의 혼융을 만나게 되며, ‘동시대’라는 이름 아래 비동시성을 사유할 수 있다.5)


  동시대성(contemporality)은 한국문학의 발생과 존재 양태를 오래 관찰해온 전문가 집단이 마련한 사려 깊은 대안적 문학사-시간축이다. 지금-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학적 흥망성쇠는 단선적 역사로 설명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과거와 현재 때로는 미래를 향한 무모한 기투의 상호작용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시대다.6) ‘한국문학’을 오래 그리고 깊이 들여다본 사람일수록 그럴 수밖에 없다. 물론 차이와 시차의 스펙트럼을 묶는 ‘연속 기획’이 진정 문학사 서술인지에 대한 의문은 정당하다.7) 그럼에도 학계와 평단에서 단일 공통성의 문학사 내러티브 서술의 불가능성이 팽배한 마당에 한국 현대문학을 동시대라는 시공간 축에 배치하는 작업은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시대에 시도해 봄 직한 역사적 실천이다.

  여기에는 우리 시대 이미 펼쳐진 차이와 시차의 성좌를 새 시대의 문학사 서술로 포획하는 ‘안정감’이라는 미덕이 있다. 이건 나 같은 한국문학의 인사이더에겐 하등 나쁠 게 없다. 차이와 시차가 무한히 만발하는 문학사적 시공간을 무한히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동시대 문학사’에 양가적 감정을 품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대 문학사는 일정한 자격요건만 갖춘 이들에겐 의심의 여지 없이 의미 있고 생산적인 시공간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문학에 대해 논하고 때때로 이를 딛고 각자 의미 있는 공간과 연결되어 더 나아갈 수 있다. 이렇듯 복수의 차이와 시차를 폭넓게 수용하는 『동시대 문학사』의 시공간은 그 차이들이 왜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함께 발생했는지, 그것들을 관통하는 집합적·역사적 동력의 형식이 무엇인지를 해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동시대 문학사’가 선사하는 ‘안정감’은 일견 모든 연결된 성좌를 포획하는 문학사의 허브공항-되기의 ‘비장소’ 선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차이와 시차의 공존을 승인하며 개념과 담론을 무한히 축적·목록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동시대 문학사』가 앞으로 포획할 모든 역사적 가능성을, 그것이 유의미하게 작동하는 한에서 무한히 심문하고 싶다. 


  2. 문학-행정의 템포


  이런 무모한 충동에 사로잡힌 원인에 대해 자문해보았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다. 주류 문학계의 ‘중심’ 행위자인 내가 한국문학의 영원한 현재를 수행하고 있다는 효능감과 안락함에 수반하는 불안감 탓이다. 

  지금부터 내게 이런 양가적 정동을 야기한 이 시대 문학 제도의 작동 양식을 문학-행정이라 부르겠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삶과 행복의 요구를 승인 가능한 개별 차이의 목록으로 변환하는 제도적 수행으로서, 달력상의 일정한 템포에 따라 반복되는 문학적 시간 형식이다. 문학-행정의 미덕이자 악덕은 아직 오지 않은 문학의 자리를 미리 마련하고, 미래를 현재와 동일한 시공간 형식으로 선취한다는 데 있다.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행위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반복의 시간에 동기화된다. 이를테면 각종 문예지나 학술지의 결정권자(편집위원, 이사, 기획위원, 동인 등)로서, 반드시 도래할 게 확실한 주기에 따라 ‘문학’의 미래를 집행하는 행위가 이에 포함된다. 나 역시 『문장웹진』 편집위원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그레고리우스력에 따라 일 년을 열두 조각으로 나눈 일정한 템포로 미래 ‘문학’의 목록을 수행하고 있다. 대내외적인 여러 변수로 인해 애초에 내가 집행했던 문학의 미래상이 헝클어지고 뒤틀리는 게 다반사다(실제로 이는 꽤 흔한 일이다). 하나 나는 이를 ‘봉합’하여 세상에 정상적으로 선보이는 데 끝내 ‘성공’함으로써, 주기적으로 보람과 효능감을 만끽한다. 월간 문예지의 약속된 주기에 따라 그 내용과 목록을 책임지는 수행자-주체로서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공정은 나를 기원으로 시작된 게 아니다. 나와 내 동료들은 우리에 앞서 성공적으로 이를 수행해 온 수십여명의 ‘선배’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2005년 2월부터 2026년 10월까지 총 261회의 문학-행정이 집행되었으며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이미 몇 개월 뒤 미래에 도래할 문학의 목록과 기획이 선취되어 있다. 이러한 미래의 목록 갱신이 일정한 템포에 맞춰 당분간 반복될 것이다. 나의 부재(이미 그 시점까지 예정되어 있다) 이후에도 누군가에 의해 계속될 예정이다.

  내가 느끼는 불안은 나라고 하는 주체가, 미래를 현재의 지속으로 전유하는 문학 (재)생산의 템포에 일조하고 있다는 감각의 소산이다. 문학-행정의 템포는 ‘나’라는 특이한 맥락을 통과하여 종래와 같은 형식으로 현재를 반복한다. 이런 형식을 지속 가능케 하는 특수한 맥락의 당사자가 반드시 나(혹은 당신)여야 한다는 필연성은 없다. 나는 앞으로 나타날 미래의 각 세목의 내용적 채색에 일정 부분 기여할 뿐, 미래를 선취할 템포를 반전시키기는 어렵다. 그런 사건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나 이미 제도적으로 완비된 안정적인 위치에서 선취되는 문학-행정의 템포는 생각보다 공고하다. 그것은 문학의 지위와 대중적 인기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문학-행정의 템포 나아가 이와 동기화된 이들을 경유한 문학의 미래적 선취는 차라리 기존 한국문학의 최후 보루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까지 느껴진다.

  주류·중심 문단이나 문예지 제도의 행정과 템포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것이 내가 느끼는 불안감에 따른 문학적 충동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글에서 지시하는 문학-행정의 템포란 문학만의 특수한 문제로 볼 수 없다. 레거시 미디어(신문, 공중파 뉴스 등)부터 학계 저널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는 저마다의 행정의 템포로 지속 가능한 장을 형성한다. ‘매일/매주/매월 일정한 시기에 게재/실시/업로드’라는 사회적 약속은 이와 관련된 무언가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을 동기화한다. 어떤 분야에서 특정한 행정의 템포가 성공적으로 정착한다는 건 해당 분야의 미래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문제는 문학의 시장과 공론장이 축소될수록 작가와 연구자가 진입하고 생존할 수 있는 경로는 기존 문예지·공모·지원·학술 제도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학을 문학으로 승인하는 행정적 관문과 그것을 작동시키는 주기적 템포의 상대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다. 이 체계는 문학의 현재를 수많은 작품과 행위자의 목록으로 정교하게 포착한다. 그러나 각각의 차이를 독립된 항목으로 선정하고 승인하는 과정에서, 그 차이들이 동일한 역사적 국면 안에서 맺는 갈등과, 이를 추동하는 행복의 요구라는 집합적 운동성은 목록화 과정에서 쉬이 탈각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목록화가 갈등을 완전히 삭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차이를 서로 독립적으로 승인 가능한 항목으로 만들면서, 그것들 사이의 충돌을 개별적 성취의 병렬적 공존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행정의 템포가 모든 종류의 장을 설명하는 전가의 보도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행정적 템포를 중심으로 문화를 파악하면, 그 안팎에 만발하는 행정에 반하는 생성과 실천의 의의를 간과하거나 과장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국학’의 일환으로 학계에 의해 ‘보존’됨과 동시에, 대중문화로서의 아슬아슬한 위치에 놓인 한국문학과 같은 ‘레거시 문화장’을 구별 짓는 아비투스로서 행정의 템포는 이를 이해하는 데 유의미한 부분이 있다. 제 분야 ‘유력 학술지’의 출판 사이클, 신춘문예, 문예지 신인상을 비롯한 우리가 수행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문화적·지적 과업의 인정과 승인을 위해 우리는 해당 분야의 주류·중심에서 이루어지는 행정의 템포에 주목한다. 그렇게 한국문학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행위자 그리고 기성 문학을 일정한 템포로 목록화하여 축적해 나간다. 내년 신춘문예 및 각종 문학상 수상자가 누구일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올해와 작년 그리고 과거에 그랬듯이, 내년에 목록의 갱신이 반복될 것임을 어렵잖게 확신할 수 있다. 문학-행정 중심의 내부 수행자-주체인 나에게 이는 굳이 확신조차 필요치 않은, 어떤 측면에서는 반드시 도래할 현재이다. 

  상당 부분 문학-행정의 템포에 동기화된 나의 양가적 불안은 그와 무관하게 생성되거나 산발적으로 이어지는 적대적 템포의 아나키적 실천에 끌림과 동시에, 기성 문학사에 대한 불만족으로 이어진다. 문학-행정이 차이를 목록화한다면, 기존 문학사는 그 목록에 역사적 시공간을 부여해 왔다. 그 어느 문학사도 내가 느끼는 미래 선취의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다. 『동시대 문학사』뿐만 아니다. 한국문학에 대한 단선사적 인식을 넘은 조동일의 통사적 시도(『한국문학통사』) 혹은 ‘자민족 중심주의’의 한계를 인식한 탈식민·분단 극복의 문학사 기획8) 역시 마음에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논리적인 허점이나 윤리적 난점 탓이 아니다. 기성의 한국 문학사는 각 시대에 걸맞은 요청으로 출현한 것이다. 조동일의 통사는 근대 이후 과거와 단절된 채 남겨진 한국문학의 에피스테메를 더 높은 차원에서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민족문학’이라는 기대 지평의 연장선상에서, 탈식민 실천을 기획하는 ‘새시대 민족문학사’ 역시 마찬가지다. ‘동시대 문학사’도 그렇다. 문학사에 대한 나의 욕망은 문학사의 부재에 기인하지 않는다. 이미 너무 많은 문학사가 존재하는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다른 시공간을 욕망한다. 


*


  불특정 다수의 독자가 이 글을 접할 근미래에도, 여전히 나는 문학-행정의 템포를 수행하는 중일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 일정한 형식으로 반복되는 현재의 지속으로서 ‘문학의 미래’가 미리 감지된다. 자의식 과잉의 소지가 다분한 이런 감각은 내게 일정한 효능감과 무력감을 동반한다. 문학-행정의 템포와 동기화된, 나를 통과하여 반복되는 ‘문학적’ 수행에서 유의미한 차이와 적대가 출현하길 항상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출현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역량 문제도 있지만 실은 그 이상의 문제이다. 대체 누가 유의미한 적대와 차이를 예견하여 선택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일정한 리듬으로 반복되는 시간의 형식적 연쇄 한가운데 선 채로 ‘아주 무의미하지 않은 과업’을 수행하며 소박한 효능감과 불안 사이를 오간다. 

  이런 글을 쓰는 데 이르는 나의 기이한 충동은 문학-행정이라는 노동의 형식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욕망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 문학사의 공통적 역사성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시차와 차이를 긍정하는 현재의 지속·재창출과 그에 따른 현재가 무한히 연장되는 미래만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그래프턴 터너는 21세기 예술 비평에서의 유령론 테제를 “과거에 미래가 실패한 가운데 출현한 예술적 양태”9)라 정의한 바 있다. 나의 문학사적 충동을 ‘배회하는 유령’이라 서술한 이유와 통하는 서술이다. 문학-행정이라는 반복적인 노동 가운데, 기존의 방식으로는 쓰일 수 없지만 아직 다른 형식을 얻지 못한, 공동체를 운동케 하는 행복의 문학(사)을 욕망한다. 여기서의 행복은 이미 성취된 상태라기보다 각자가 포기할 수 없다고 느끼며 행하는 삶의 요구와 지향이다. 이러한 행복의 요구가 아직 형태를 갖지 못한 ‘부재한 채로 현전’하는 유령처럼 내 주위를 배회한다. 

  내가 점유한 위치에서, 현재의 지속을 도래할 미래로 반전할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문학-행정의 템포가 선취한 근시안적 미래상을 대안 없이 폐기하자고 주장하지도 않고, 이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면서, 나와 관계된 문학의 시공간을 새로운 형식의 미래로 열어놓고 싶다. 이런 편집증은 어쩌면 데리다가 말한, 헤게모니의 구조에 상존하는 신들림10)의 한 양태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자명하고 생산적인 문학적 시간 형식에 대한 적대로까지 기울어진다. 


  3. 문학사의 영점조절


  일본의 문학평론가 후쿠시마 료타는 헤이세이 시대 일본 소설을 다룬 비평집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운을 떼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이 책은 헤이세이 30년 동안(1989년 1월~2019년 4월)에 창작된 일본 문학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평론집이다. 하지만 ‘헤이세이’라는 섬나라의 지역적인 연호元号를 특별하게 다룬다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헤이세이 일본이라고 하면 정보화, 금융 자본주의, 테러리즘, 자연재해, 대중화, 저출산, 고령화, 리스크 사회 등의 키워드를 꼽지만, 이들은 모두 포스트 냉전기(1989년 이후) 선진국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일본 고유의 현상은 아니다. 더구나 일본인 대부분은 이미 자신들의 역사적 위치를 연호로 헤아리지 않는다. 헤이세이 10년대나 20년대라고 한들 어떠한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얄궂게도 서력을 쓰지 않고는 헤이세이를 총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리라. 일본에서만 사용되는 연호는 글로벌 현대 세계를 생각할 때의 지표로서 이제 거의 쓸모가 없어졌다.11)


  헤이세이라는 역사성에 대한 후쿠시마의 입장은 양가적이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전개할 일본 문학의 역사적 시간성의 의의에 회의적이다. 헤이세이 시대는 이전 연호 시대와 달리, 일본 고유의 공통적 시간성 및 역사적 감각을 선사하는 시간 인식이 아니다. 헤이세이 30년을 수놓은 공통적인 타임라인의 이미지는 연호 고유한 역사성이 아니라, 글로벌 시대 서구 선진사회의 그것에 동기화되었다. 헤이세이 시기 일본에서 아즈마 히로키 등의 포스트모던론이나, 메이지 일본을 기원으로 하는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 나아가 ‘제로년대’라는 서력의 상징적인 기표로 과거의 ‘일본’과 단절하는 담론(우노 츠네히로)이 활성화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후쿠시마는 사실상 글로벌 서력의 자장에 상당 부분 포섭된 헤이세이라는 역사 공간을 과거의 다이쇼라는 역사상을 거울삼아 반성하는 방법으로 준용한다.

  지역적 시공간 인식을 영토화하던 과거의 시간성 기표가 유럽 기독교 문명에서 발상한 그레고리우스력의 시간성으로 수렴하는 현상은 헤이세이 일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무도 그것의 적정성과 합리성을 묻지 않은 채 서력 ‘10년’(decade)이라는 템포는 물화되었다. 이미 “‘10년’이라는 기간은 인류가 발명한, 훨씬 더 복잡한 현실에 부과한 편리한 상징”12)이 된 지 오래다. 그리스어 ‘deka’에서 연원한 서력의 ‘10년’이라는 템포는 행성적 차원에서 만발한 21세기의 글로벌 시위는 물론이고 각 지역의 경제·사회·문화 전반을 규율하는 시간성의 단위로 작동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사가 완연한 ‘서력의 시대’에 편입된 이래, 10년 주기는 당대와 역사를 환기하는 주요한 담론적 장치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에 가까워질수록 그 강도가 심화하고 있다. 10년 단위의 역사가 보다 적극적으로 전면화된 역사상으로 생산되고 있다. 


*


  그레고리우스력 10년 단위의 ‘편리함’은 그것의 역사적 필연성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가운데, 십년대의 역사화는 공통의 통사가 붕괴한 이후의 한국문학에서 자연스러운 역사 창출의 형식으로 만발하고 있다. ‘문학사 쓰기의 불가능성’ 가운데, 10년 단위의 문학사 템포가 당대의 복수의 문학사들을 ‘객관적으로’ 관측하는 기능을 도맡는 경향이 이어지는 것이다. 

  십진법에 따라 일정 주기로 ‘-0년’으로 템포가 갱신되는 문학사적 인식을 지금부터 ‘문학사의 영점조절’이라 부르겠다. 이는 우리에게 통용되는 10년 단위의 문학사 인식/관습의 ‘자연스러움’을 상대화하기 위한 조어이다. 10년 단위 문학사가 단순한 서력의 측정표기가 아니라,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이후, 다시 말해 공통의 문학사가 불가능해진 가운데 나타난 문학사적 충동의 새로운 생산적 기표임을 드러내기 위한 형식이기도 하다.

  영점조절은 측정 장치를 0이라는 기준에 맞추는 행위다. 10년 단위 문학사 역시 이질적인 사건과 시간을 서력의 ‘-0년’에 정렬함으로써 하나의 관측 가능한 시대상을 재생산한다. ‘영점조절의 문학사’에 대한 나의 편집증적 문제의식이 시작된 기점은 몇 년 전 조남현의 『한국현대소설사』 시리즈를 탐독한 이후이다. 2012년, 당시 학계의 신진들에 의해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가 선언되던 바로 그해에 조남현은 통사 혹은 단대사(斷代史)로 분절된 문학사의 불가능성을 인식하면서,13) 1890년에서 1959년까지 10년 단위 템포의 한국 현대소설사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최대한 많은 작가·작품을’ ‘문학사적 맥락에 따라’ 10년 단위로 배치하는 조남현의 소설사는 서력의 십진법 템포라는 가장 ‘객관적인’ 시간축으로 총체적 문학사라는 불가능한 지평을 벌충한다.

  조남현의 ‘영점조절’은 총체적 현대문학사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선택된 실용적 해법에 가깝다. 오늘날 이 같은 문학사의 영점조절은 한국문학의 역사성 고찰의 ‘자연스러운’ 방편으로서 적극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각종 학술대회나 학위논문에서 ‘-0년대’의 만발을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대체 ‘1980년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많은 학자·비평가들이 이에 천착하여 생산적인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그 자체로 생산적이고 유의미하지만 반대의 질문도 던져보고 싶다. 어째서 우리는 문학사의 영점조절의 템포를 통해 말하는가. 더 나아가 이렇게도 의심해 본다. ‘-0년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담론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문학적 현재에 대한 담론적 효능감을 선사함으로써, 문학사의 영점조절을 자연스럽게 재생산하도록 하는 형식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런 의문은 오늘날 지극히 생산적이고 유의미한 문학(사) 담론의 생산자-주체의 수행을 다른 방향으로 환기한다. 이를테면 강동호의 1990년대 문학14) 담론이나 최근 안세진의 당대 문학의 ‘1970년대적 기원’ 같은 흥미로운 가설15) 같은 것들 말이다. 1980년대라는 ‘운동으로서의 문학’ 시대에 일상적 욕망을 추구했던 문학의 아웃사이더들이 ‘내부자가 된 외부자’가 된 1990년대적 상황에 대한 강동호의 ‘1990년대 문학’론은 1990년대 문학을 단선적으로 확정할 수 없음을 토로하면서도 ‘1990년대’라는 기표로 ‘1980년대 이후’의 다양한 문학적 흐름을 기입한다.16) 출판사 주도의 한국문학 시스템의 한 축으로서 초창기 민음사의 수행을 현재 한국문학계 주류를 형성한 ‘출판사-계간지-신인상-대학교의 순환구조’로 제시하는 안세진의 ‘1970년대적 기원론’도 마찬가지다.

  이런 논의들에 일차적으로 무슨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개별 논의의 설명력이 높을수록, 그것을 담론으로 재배치하는 십년대라는 구성적 기준은 오히려 객관적인 시대 단위처럼 자연화됨을 말하고 싶다. 강동호·안세진 등의 논의는 오늘날 문학계 중심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충동이 담론적으로 재배열/재생산되는 주요한 방식을 시사한다. 기존 문학사를 규율하는 공통 지평이 소거된 시대, 복수의 문학사 기획이 ‘-0년대’라는 기표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문학사의 영점조절 수행은 해당 시대에 대한 보다 정밀한 ‘측정’이라기보다, 각자(사실 ‘1980년대’나 ‘1990년대’는 이미 물화된 담론의 집단적 수행의 기표라 봐야 하겠지만)가 천착하는 중요한 문학(사)적 당위를 위한 봉합의 기표이다. 사실 문학사의 영점조절은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기보다, 자신의 가설을 동시대에 작동시키기 위한 일종의 화행적 수단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오늘날 문학사의 영점조절이 문학에 대한 현재의 각자 수행을 회집하는 가장 유력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현당대의 단절된 기원으로서 ‘1980년대’, ‘내부자가 된 외부자들’의 ‘1990년대’, 그리고 이제는 ‘1970년대적 기원’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문학사의 영점조절이 단순히 잃어버린 역사성을 물화하는 작업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문학계 중심/주류의 탁월한 학자·비평가들이 재생산하는 문학사의 영점조절에서 나는 이미 도래한 자명한 미래를 편집증적으로 엿볼 따름이다. 아직 시기적으로 도래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믿지 않을 수 없는 한국문학의 ‘-0년대’라는 미래.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뒤 한국문학과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지만, 이런 추세의 현재가 지속되다가 ‘2030년대 문학’이라는 시대명이 도래할 것임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어느 순간 ‘2020년대 문학’이 주어진 그 방식을 반복하며 말이다. 문학사의 영점조절이야말로 내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한국문학의 유일한 미래상이다. 


*


  문학-행정의 템포가 가까운 미래의 목록을 선취한다면, 영점조절의 문학사는 아직 오지 않은 시대의 이름을 선취한다. 나의 문학적 충동은 과거와 현재를 ‘너무나 유의미하게’ 해명하는 문학(사)적 형식과 수행에서 현재의 지속으로 결정된 미래를 감지하는 불안의 발로이다. 문학-행정의 템포에 따라 근시안적인 미래 선취가 끊임없이 지속됨과 동시에, 탁월한 ‘내부자들’에 의해 문학사의 영점조절이 반복되다가 ‘2030년대 문학’이 어김없이 도래할 미래를 예견하는 절망감.

  동시에 나는 지각한다. 지금 이대로라면 결코 없을, ‘현재’가 끝난 이후의 미래가 그럼에도 유령처럼 내 주위를 배회하고 있음을 말이다. 따라서 아직은 희망이 있다. 나는 이 유령을 한국문학의 자명한 미래상을 거절하기 위한 새로운 시공간에 접속시키고자 한다.


  4. 문학의 새로운 신체, 제6공화국


  앞으로 나의 작업은 현당대 한국문학에 제6공화국이라는 구체적인 신체를 부여하는 수행이 될 것이다. 기존 문학사 서술의 한계를 뛰어넘을 대안적 문학사 서술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기서 제6공화국이란, 문학의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지속으로 재배열·선취하는 시공간을 거절할 수 있게 하는 사용성(affordance)17)의 형식이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헌정사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제6공화국의 말기적 증상을 감지하고 관련 사건을 목도한다. 대통령 단임제, 헌정주의, 양당 체제로 고착된 선거, 양극화 문제, 그리고 12·3 계엄 이후 폭발한 각종 광장의 목소리 등. 2026년 10월 현재 제6공화국은 수많은 모순과 병폐 가운데, ‘끝’을 향해 위태롭게 지속되고 있다. 제6공화국의 말기적 증상과 ‘다음’에 대한18) 활발한 논의가 그에 따라 도처에서 제기되고 있다.

  제6공화국이라는 시공간은 우리가 현재의 끝을 지각할 유효한 공통의 시공간이다. 제6공화국의 다음이 언제 도래할지 어떤 형태로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다음’이 제7공화국일 거라 확신할 수 있는가. 심지어 ‘다음 시대’는 이미 도래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까지 한다. 

  제6공화국 종결의 예감과 종결을 향한 열망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번지고 있다. 때때로 이런 정동이 불길함과 공포로 엄습하기도 한다. 언젠가 도래할 제6공화국의 끝이 각자가 희망하는 행복을 배반하는 미래로 현전하게 될지도 모르는 탓이겠다. 하여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연합하고 분열하며 무엇보다 누군가와 기꺼이 적대한다. 이 영원히 지속 중인 현재 ‘이후’를 우리의 적들에게 일방적으로 내어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제6공화국은 당분간 ‘현재와 같이’ 지속될 것이다. 나는 제6공화국에 팽배한 말기적 증상과 함께 나타나는, 이 시대가 반드시 종결되리라는 예감에서 비롯되는 우리 각자의 불안과 비관을 질료로 사용하는 문학론을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십년대가 달력에 따라 자동으로 갱신되면서 다음 시대의 이름까지 선취하는 형식이라면, 제6공화국은 종결의 시점과 그다음의 이름이 미정인 시간 형식이다. 그것은 보다 객관적인 문학(사) 서술을 승인하는 영점이 아니라, 자동 갱신되는 연대기적 미래를 거절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선택한 사변적 시간축이 될 수 있다. 제6공화국이라는 시공간은 1990년대·2000년대·2010년대라는 식의, 영점조절로 분절돼온 문학적 사건들을 민주화 이후 형성된 제도적 지속과 그 내부의 반복·파열이라는 하나의 문제로 다시 배열하게 한다. 동시에 ‘2030년대’ 같은 자명한 미래상을 교란한다.

 

*


  김윤식·김현의 ‘행복의 문학사’는 제4공화국으로 접어든 기점에 쓰였다. 명목상으로나마 4·19를 계승하며 위태롭게 이어지던 제3공화국의 최소한도의 정당성이 유신으로 무너진 시대, 두 사람은 ‘민족 주체의 행복과 역사적 추진력’을 문학사 서술의 당위로 표명한다. 『한국문학사』는 ‘주체민족의 행복’을 누군가의 수중에 온전히 바치지 않기 위한, 두 사람의 연대이자 유의미한 집합적 적대를 가시화하기 위한 문학적 수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기획은 어쩌면 이미 도래했을지도 모를, 우리 시대의 자명한 종말을 모색하는 사변적 수행이자, 현재에 대한 나의 불만과 스스로의 행복을 향한 미래 기획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 기획은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가 보여준 역사적 충동과의 접속을 모색한다. 그것의 성공 여부는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 공동체의 구성원 저마다가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의 요구들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운동성에 의지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나의 행복을 좌절시킬 누군가의 행복이 도래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악몽을 껴안고 나아가야 한다. 그 종착점이 언제 어디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신처럼 나 또한 나만의 ‘행복’을 포기할 수 없는 가운데, 도래할 ‘끝’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수밖에 없다.



1) 이 글은 저자의 단행본 『제6공화국 문학론』의 첫 번째 장이다.

2) 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2011, 39쪽. 강조는 인용자.

3) 테오도르 아도르노, 김유동 역, 『미니마 모랄리아』, 길, 2005, 163쪽 참조.

4) 천정환 외,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푸른역사, 2013, 14쪽.

5) 이광호 외, 『동시대 문학사 1: 나』, 문학과지성사, 2025, 6쪽.

6) 손유경, 「두 개의 감각: 이광호 외, 『동시대 문학사 1: 나』(문학과지성사, 2025)」, 『문학과사회』 154, 문학과지성사, 2026 여름, 319-327쪽 참조.

7) 손정수, 「‘복수의 문학사’의 시도 앞에 놓인 난관들: 이수형 외, 『동시대 문학사 4: 폭력』(문학과지성사, 2025)」, 위의 책, 346-348쪽 참조.

8) 민족문학사연구소, 『새민족문학사강좌 1』, 창비, 2012, 22-23쪽 참조.

9) 그래프턴 터너·나원영 역, 『웅얼대는 시체를』, 워크룸프레스, 2026, 77쪽.

10) 자크 데리다, 진태원 역, 『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린비, 2025, 88쪽.

11) 후쿠시마 료타, 안지영 역, 『나선형 상상력: 헤이세이 일본 문학의 문제군』, 리시올, 2024, 7쪽. 강조는 인용자.

12) 빈센트 베빌스, 박윤주 역, 『광장의 역설』, 진실의 힘, 2025, 22쪽.

13) 조남현은 서문에서, T.S 엘리엇, 노스럽 프라이, 르네 웰렉 등 서구의 문학사 방법을 살피면서 총체적 한국문학사의 불가능성을 인식한 가운데서 자신의 문학사 서술의 당위를 설명한다. 조남현, 『한국현대소설사 1890-1930』, 문학과지성사, 2012, 15-16쪽 참조.

14) 강동호, 「종언 이후의 사랑-1990년대 이후의 문학과 사랑」, 황종연 외, 『동시대 문학사 3: 사랑』, 문학과지성사, 2025, 159-212쪽.

15) 안세진, 「‘한국문학 시스템’의 1970년대적 기원-민음사와 『세계의 문학』, 그리고 김우창」, 『민족문학사연구』 90, 민족문학사연구소, 2026, 419-475쪽.

16) 김영찬, 「‘90년대’는 없다-하나의 시론, ‘1990년대’를 읽는 코드」, 『한국학논집』 59, 2015, 11-15쪽.

17) 원래 디자인 용어인 사용성(어포던스)은 “질료와 디자인에 잠재되어 있는 사용 가능성과 수행 가능성”을 의미한다. 레빈은 이에 착안하여, 서로 다른 모순적 작업, 다원적 상상력, 상황적인 것을 형식의 일환으로 포착하는 개념으로 사용성(어포던스)을 전유한다. 캐롤라인 레빈, 백준걸·황수경 역, 『형식들』, 앨피, 2021, 38쪽 참조.

18) 조형근 외, 『광장 비판』, 코라초프레스, 2026. 문학계에서도 이와 관련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강지희 외, 「대담: 광장의 문화정치」, 『한국문학 비평포럼』
https://munjang.or.kr/criticism/view.es?id=334&mid=a61000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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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①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① 윤재민 1. 이청준의 「퇴원」은 전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됐던 시기, 문학적 내면의 향방에 대한 알레고리를 시사한다. 소설의 화자 ‘나’는 유년 시절 아버지의 서열 정리로 ‘선생님’으로 모셔야 했던 동년배 ‘준’의 병원에서 세상의 변화와 상관없이 무위도식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가 입원한 준의 병원은 모든 시계가 고장 나 있는 채로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치료를 끝없이 받으면서 원인 모를 병으로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환자들과 생활한다. 그러나 ‘나’는 딱히 장기 입원할 이유가 없는 건강한 사람이다. 그 또한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다. ‘나’는 항상 병원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하며 언제든지 퇴원할 만반의 준비가 된 듯하다. 참다못한 ‘나’는 무의미한 치료와 단절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위궤양이라는 헛된 의학적 진단을 거부하며 항의한다. 그러자 간호사는 “위궤양이 싫으시담 더 멋진 병명을 붙여드릴 수도 있”1)다고 말하며 그의 퇴원 의지를 가볍게 기각한다. 간호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전역 직후부터 약 일 년여 간 이어진 ‘나’의 장기 입원이 실재하는 질병 때문이 아니라는 걸 폭로하기 때문이다. 현대 임상의학은 질병이 진단에 선행하는 전도를 용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질병 때문이 아니라 환자여야 하기에 질병이 부과되어 왔던 것이다. 수전 손택은 문학에서 질병은 사회와 지식에 부정적으로 예속된 신체의 은유라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나’와 질병의 문학적 관계는 손택식의 ‘은유로서의 질병’의 문제와는 차이가 있다. 신체를 규정·규율하는 임상의학이라는 특정한 지식과 관련된, 권력의 은유로서 임상의학의 문제에 가까워 보인다. ‘나’가 처한 ‘은유로서의 권력’의 문제는 단순히 신체를 속박하는 과잉 진료와 장기 입원에 국한되는 사항이 아니다. 애초 동년배인 ‘준’과 ‘나’의 서열을 정하여 ‘나’의 신체를 병원에 구속하는 원인을 제공한 부권(父權)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나’가 회고하는 부자(父子) 관계는 기묘하다. 아버지는 ‘친구 발바닥이나 핥으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붓는 폭력적인 서열 관계를 ‘나’에게 강제했다. 아버지의 냉혹한 훈육은 어렸을 때부터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자신의 내면에 중대한 상흔을 남기는 한 사건을 회고한다. 소학교 3학년 때 가을, 나는 그즈음 남몰래 즐기고 있는

  • 윤재민
  • 20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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