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 작성일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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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허병식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에 새로이 등장한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가 있다. 세계문학이란 세계화 혹은 지구화 이후 도래한 지구화시대 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 담론이지만, 그 시작은 이른바 괴테-맑스의 논의가 그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듯 근대의 전지구적 도래와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말한 “민족문학이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것과, “어느 한 국가의 정신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의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많은 민족문학과 지방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탄생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세계문학 담론의 기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괴테와 마르크스의 선언이 곧바로 세계문학을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이 제국주의와 식민의 결과라면, 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정련한 것이 각국의 민족문학이었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족문학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이 지니고 있는 ‘영향의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타자의 문화를 의식하게 된 순간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경험이 식민종주국과 식민피지배국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비교문학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지배의 승인이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시작했다. 비교문학과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식민지의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문화적 지배와 혼종성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포스트식민주의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개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응전으로 재귀한 것이 세계문학일 것이다. 괴테 이후의 세계문학의 전개를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문학이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비교문학이자 포스트식민을 경유하여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대항하는 문학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1세기 이후 ‘세계문학론’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이다. 그들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모레티와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이 강조하는 세계란, 일차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혹은 서로 진입하기 위해 각축하고 경쟁하는 세계문학 공간으로서 주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의 세계 개념은 문학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환경 내지 배경에 가깝다.1) 김용규는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와 그들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세계문학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정을 보면,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는 중심부의 영향력과 세계문학의 생산과 유통의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이 강한 데 반해 주변부의 입장에서는 개입과 기획, 실천과 같은 관점에서 기존 세계문학론에 대한 비판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2)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3)라고 묻는다면, 한두 마디로 그것을 정의하기 쉽지 않다는 곤경에 봉착하게 된다. 김용규는 세계문학이란 것을 정의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면서, 그것의 정의는 “그 구체적 실체보다는 그와 연관된 이론가들이 세계문학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즉 그 담론적 구성의 정합성과 설득력에 달려 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즉 세계문학에 대한 접근은 실재론적이라기보다는 유명론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정의하기 어려운 유령과도 같은 세계문학이 2000년대 한국문학장에 새로이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세계문학이 담론적 구성이고, 그것이 2000년대 이후 다시 한국문학의 중심에서 개진되었다면, 이는 ‘세계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어떠한 담론을 구성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근대 이후 한국의 문학자들이 개진한 세계문학에 대한 상상에 대해 살펴보고, 이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근대 이후 한국의 문학자들이 상상한 세계문학의 의미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조선문학과 세계문학 -보편에 대한 상상
근대 조선은 일본제국의 교통공간의 재편에 따라 식민지체제로 편입되는 동시에, 새로운 지리적, 해상적 경계를 근본적으로 재편성하였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제국에 의한 근대적 공간재편과 공간에 대한 표상시스템을 변화시킨 결과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인들의 ‘정치적 무의식’은 교통의 발달과 교통공간의 성립에 따라 주체의 공간감각 및 지각체험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 새로이 대면하게 된 것이 ‘세계’라는 교통공간이다.
최남선이 주재한 『소년』에 연재된 「풍길리(鳳吉伊) 지리공부」는 근대계몽기 근대적 지리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 연재물은 각각 ‘대한의 외위형체’(1908. 11.), ‘동․남․서해안 비교’(1908. 12.), ‘북극․남극이란 어떠한 곳인가’(1909. 3~7.)라는 제목 아래 조선 반도의 형태, 조선 해안의 비교, 북극과 남극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어 조선의 동해, 남해, 서해의 지형과 지세를 도표 형식으로 항목을 두어 비교하였다. 마지막으로 지구를 북반구와 남반구로 나누고, 경도와 위도에 의해 분할한 뒤 북극과 남극에 대해 설명하였다. 조선의 해안과 북극 남극을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고 설명하는 것은 ‘지리학’이라는 근대적 학문 체제로 습득한 지역과 공간에 대한 인식을 통해 조선을 세계 속에 위치시키고 세계의 지리 속에서 조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이라는 번역어를 통한 세계인식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최남선, 이광수, 안확과 같은 근대문학 초기의 작가들은 일본이라는 창을 통해 대면하였던 ‘문학’이라는 개념을 ‘세계문학’이라는 구성적 관점을 통해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주었다.4) 이들이 상상했던 세계문학이란, 식민지 조선이 일본이라는 제국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서 출구로 삼아야 했던 보다 넓은 세계, 문명한 세계의 이상이었고, 세계시민이 됨으로써 세계라는 무대에 조선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졌다. 근대의 조선문학자들이 상상했던 세계문학의 구체적인 의미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들이 세계문학이라는 이상적인 대지에 조선의 문학과 자신들의 이름을 등재함으로써 보편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광수가 ‘언문’으로 쓰인 조선문학이 조선인에게 위안과 열락을 제공한 것처럼 ‘호메로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세계 인류의 큰 보물로 인생의 사상과 감정과 생활을 논하고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기쁨을 안겨준다고 말할 때(「문학이란 하오」), 그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의 ‘대문학’은 조선문학이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지점으로 여겨졌던 것이 분명하다. 안확은 『조선문학사』에서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서구 유럽의 문학사를 일별하고 그 세계문학사의 하위에 조선문학을 위치시키고자 했다.5) 막 근대에 비자발적인 방식으로 진입하였던 조선의 문학자들은 하나의 보편적 지식체계로 상정하고 그 문명의 세계에 투신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향은 식민지 후반기에 해외문학 소개를 시도했던 ‘외국문학연구회’의 문학자들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민족문학’과 ‘계급문학’이 대립하고 있던 시기에 새로이 문학활동을 시작했던 이 해외문학 전공자들은 계급문학을 부정하고 민족문학의 틀에도 갇히지 않은 새로운 문학의 길을 세계문학을 통해 발견하고자 했다. 그들은 식민본국인 일본의 도쿄에서 잡지 『해외문학』을 창간하면서, 우리문학의 새로운 건설을 위하여 세계문학을 받아들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이 해외문학파들은 ‘세계문학’이란 용어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민족문학의 대타항에 설정했다. 김진섭은 세계문학을 광의와 협의의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 광의는 각국의 문학을 포괄하는 “세계의 문학”을 뜻하고, 협의는 괴테와 짐멜, 몰튼의 개념이 있다면서 괴테는 “도의적, 심미적 각 민족의 융합으로부터 발생하는 문학예술”을, 짐멜은 “인류 일반이 통일적 생활의 이상”을 말하는 문학을, 몰튼은 “예술의 통일”에 기인한 유럽문학사 중의 대표작들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정인섭은 외래문화를 소화해야 자국문화도 발전한다면서 번역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6) 그는 자국의 것이면서 동시에 세계인의 것인 문학이 세계문학이고, 그렇지 못한 문학은 지방문학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세계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이 창간한 『해외문학』의 창간사를 통해 해외문학파가 외국문학을 번역, 소개, 연구하여 우리 신문학을 건설하는 데에 기여하고 세계문학의 상호범위를 넓히고자 한 사상적 근거 내지 사유방식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국가적 개성” 혹은 ‘개별국가’는 “세계의지의 최고 종합” 혹은 ‘문명 세계의 모든 문화가치’ 보다 하위에 있고, 보다 협소하며, 보다 덜 세계적으로 공통적이라고 본다. 즉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세계적인 것과 한 국가적인 것과 사이를 다소(多小) - 광협(廣狹) - 상하(上下) 위계질서의 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각 국가의 국민문학이 세계문학이 되려면 보다 세계적으로 공통되는 무언가를 갖추어야 하고 그것을 갖추기 위해서는 낯선 외국문학 형식을 많이 모방하면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번역행위인 것이다. 세계문학의 기준이 오로지 자문화 바깥에 있으며 번역행위를 통해서 낯선 것을 안으로 들여오기는 하지만 그 구조가 “다소(多小) - 광협(廣狹) - 상하(上下)” 위계질서의 구조이기에 안의 것이 바깥으로 동시적으로 순환할 수는 없는 구조이다.7)
이들의 세계문학에 대한 논의는 문학의 중심부로 서구 유럽을 상정하고 한국을 문학의 주변부의 그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이광수 세대의 담론을 이어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들에게 민족문학이란 한낱 세계문학의 하위개념으로 그보다 작고, 협소하고, 아래에 있는 문학인 것이다. 이 엄정한 위계의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이른바 세계문학이고 그것이 놓인 자리가 바로 카사노바가 말하는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일 것이다. 해외문학파들은 이러한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에 도달하는 것을 당대 조선문학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방편으로 택한 것이 세계문학의 번역이었다. 그러나 그 번역은 일방향적인 것이어서, 서구 문학을 일본어 중역을 거치지 않고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 그들이 스스로 감당하고자 한 사명이었고, 주변부의 한국문학을 중심부 언어로 번역해서 중심의 인정을 받고 세계문학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에 대한 시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민족문학의 변신론(辯神論)
근대 초기의 문학자들과 해외문학파의 세계문학론을 살펴볼 때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들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이다. 이광수와 최남선이 당대의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였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민족적인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무기로 삼아 세계문학이라는 큰 바다로 나아가고자 했다. 해외문학파가 문학활동을 시작했던 1930년대는 이 민족문학과 카프로 대표되는 계급문학이 대립하고 있던 시기이다. 해외문학파는 계급문학에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주었지만, 자신들의 문학이 민족문학과도 분명히 구분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민족문학과 계급문학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두 문학론이 모두 애초에 외국문학의 수업과 번역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외문학파는 애초에 서구로부터 이식된 이 문학이라는 물건을 조금 더 잘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과제이고 그것이 바로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수행하고자 했던 작업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세계문학론이 다시 한국문학의 장에 돌아온 것은 ‘창비’의 ‘세계문학론’이다. 먼저 백낙청의 「세계화와 문학」을 살펴보자. 그는 이 글에서 세계문학이 괴테-마르크스주의적 기획이라는 것을 다시 거론하고 주로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 집중적인 논의를 보여주고 있다. 카사노바의 논의에 대해서 흔히들 서구중심적이라거나 반주변부의 문학에 대한 조명이 부재한다고 비판하는 글들을 인용하면서, 백낙청은 오히려 카사노바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여주면서 그녀의 논의가 여러 미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카사노바의 문학론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민족/국민문학의 특수성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세계문학을 모더니즘으로 설정하는 태도이다. 백낙청은 카사노바의 논의가 현대주의의 현대성에 보편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카사노바의 시야에는 근대 세계문학으로의 편입을 지향하면서도 자본주의적 근대 자체에 저항하고 그 극복을 시도해온 한국 민족문학 운동의 ‘근대극복과 근대적응의 이중과제’8)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창비의 세계문학론이 본격화하기 전부터 백낙청이 보여준 일관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1993년 발표된 「지구시대의 민족문학」에서 그는 괴테의 세계문학 개념을 거론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세계 각국의 고전들을 망라하는 어떤 이상적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물질적 여건의 변화를 토대로 이제부터 이룩해야 할 전혀 다른 차원의 실체, 특히 각국 지식인들의 상호교류와 연대활동을 통해 이룩해야 할 새로운 문학”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괴테의 문학론이 곧 이 지구시대 세계문학운동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민족문학운동과 부합하다는 설명을 이어나간다. 민족문학이란 곧 한반도의 현실을 지구적 관점에서 인식하는 하나의 모형으로 존재해 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개진한 리얼리즘론이야말로 곧 세계문학의 살아 있는 실천과도 같다는 것이다.9) 이는 리얼리즘론, 시민문학론, 제3세계문학론 등으로 이어져온 창비의 민족문학 담론이 곧 세계문학론이라는 설명인데, 그렇다면 그것에 따로 세계문학론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윤지관은 「지구화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에서 민족국가와 민족문화가 당면한 현실에 대한 고찰을 수행한 바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족국가가 세계체제의 한 단위이자 지구화를 수행하는 중요한 도구라는 점을 인정하고, 지구화의 위협에 맞서는 길이 민족국가라는 틀에 대한 옹호를 통해 가능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10) 그는 근대문학이 우리 민족 형성의 역사에서 지니는 특별한 지위를 강조하면서, 지구화라는 사태가 불러온 충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산과 이민이 불러온 잡종적인 존재양식이 민족국가의 와해를 불러왔으며, 이는 민족국가와 지구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데 중요한 맥락이라는 점을 거론하면서도 그로 인해 민족국가의 소멸을 말하거나 민족주의를 ‘악마화’하려는 시도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다. 또한 경계와 해체와 이산으로 발생한 ‘잡종화’를 지구화의 보편적인 특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헤게모니와 신식민지적 권력관계와 결합되어 고려되지 않는 잡종성 논의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글의 결론은 결국 민족의 해체가 리얼리즘의 쇠퇴와 연결된다는 논의에 대한 우려인데, 이 지구화와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가 이후 그와 창비의 세계문학론에 이어지는 대표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윤지관은 이후 세계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담은 몇 편의 글을 더 발표했는데, 대표적으로 「경쟁하는 문학과 세계문학의 이념」을 통해 그의 세계문학론을 좀 더 확인해 보자. 그는 세계문학론을 제기했던 괴테와 마르크스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하는데, 이 낙관적인 전망이란 그들이 근대 민족주의의 강화와 그 확장에 대해서, 그리고 식민지의 저항과 이를 이끈 민족문학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에 주요한 참조가 되고 있는 들뢰즈-가타리의 ‘소문학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카사노바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이후 그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른바 지구화의 특성인 잡종화를 옹호하는 호미 바바에 대한 논의를 거쳐서 진정한 세계문학인간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이어나간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 시대의 핵심적인 모순들과 씨름하는 문학”이 진정한 세계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19세기의 리얼리즘이나 20세기 한국의 민족문학이 곧 세계문학이라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백낙청과 윤지관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창비가 야심차게 전개한 세계문학론에서 진정 새로운 논의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은 21세기 이후 서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계문학론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으나,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진행해온 민족문학론의 위상과 의미를 다시 강조하는 내용뿐이다. 리얼리즘론과 제3세계론, 그리고 분단체제론 등 이름을 바꿔가면서 변신하고자 했던 민족문학론은, 이 지구화시대에 발맞추어 이제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문학의 변신이자 민족문학이라는 숭고한 대상에 대한 ‘변신론(辯神論)이다.
세계를 상상하는 문학
지난 백여 년의 한국문학에 등장한 세계문학 담론에 대해 거칠게 일별하여 보았다. 민족문학이 나아가야 할 최상의 자리가 세계문학이라거나, 가장 민족적인 문학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문학이라거나 하는 논의들은, 다시금 세계문학은 구성적인 것이고 담론의 문제라는 점을 확인하게 해준다.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면, 세계문학 또한 역시 저마다의 입장에서 발신되는 상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인문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의 문화와 우리의 언어, 우리의 명작의 가치를 애국적으로 칭송하는 것에 갇힌 인문주의는 진정한 인문주의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느끼는 것을 다시 확인해 공고히 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상품화된 형태로, 이미 만들어져 논쟁의 여지없이 무비판적으로 코드화된 확실성과 같은 것으로 제시된 것들ー여기에는 “고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모여 있는 걸작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ー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들에 소란을 일으키고 재정식화하는 방식입니다.”11)라는 사이드의 말은 세계문학에 대한 담론에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사이드는 구체적인 세계의 변화 양상에 대해 말하면서, 문학이 가정된 국가적/민족적 맥락 안에 존재한다고 보는 생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민족주의적 인문주의가 이전에 잘 작동했다면, 이제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많은 이유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진정성이나 토착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순수혈통중심의 문화 전통”이 명백한 오류라는 것,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외부인이며 거의 유사하게 내부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수자나 혜택 받지 못한 희생자든, 아니면 우세한 유럽중심적 문화전통의 구성원이든지 간에, 내부인은 특정 집단의 본래적 구성원이라는 미덕에 근거해 특정한 역사적 경험이나 진리를 대변하는 불가침의 권리를 갖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도록 한다고 말한다.
사이드의 논의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면서도 다른 경험들과 세속적 맥락을 공유하는 집단의 경험에 대한 표현은 특정 집단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세속성이야말로 사이드가 거듭 강조하고자 했던 것인데, “세속성은 정확히 문화적 차원에서 모든 텍스트와 모든 재현은 세계 안에 있으며 세계의 숱한 이질적 현실들에 지배된다는 것”(75면)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는 ‘분단극복’이나 ‘6.15 선언의 실현’ 같은 것이 특정한 민족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 세계를 상상하도록 권유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과제가 내부의 어떤 구성원들에게는 지극히 이질적인 현실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숱한 이질적인 현실들에 대한, 이질적인 재현의 방식에 대해 논의해야 하지 않을 것인가. 가장 고립되어 있는 텍스트도 언제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특정한 민족의 문제, 특정한 재현의 방식이 따로 세계문학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세계문학은 근대 이후 저마다의 민족문학이 제각각 하나의 위기에 처한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근대적 세계에서 소통하는 문학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요청이 세계문학을 호명하였다. 그리고 이후 탈근대의 시대, 지구화의 시대가 전개되면서 세계문학이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요구와 이에 대한 응답들이 전개되고 있다. 그 속에서 전개될 세계문학이 어떠한 존재방식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이지만, 텍스트가 언제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세계문학은 텍스트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가능성의 영역 속에서, 텍스트의 내부에서 겨우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이거나 계시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극히 세속적인 작업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허병식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저서로 『교양의 시대』, 『지연되는 임종』 등이 있다.
1) 김용규, 「존재로서의 세계문학: 지구화와 세계형성」, 『비평과 이론』, 2017년 가을호, 18면.
2) 위의 글, 14면.
3) 위의 글, 9면.
4) 김동식‧송민호, 「세계문학의 상상적 좌표들(1)-식민지 초기 문학론에 내재된 ‘세계문학’이라는 계기와 그 잔여들」, 『상허학보』 64집, 2022. 참조.
5) 김동식, 송민호, 앞의 글, 27면.
6) 김미영, 「청천 김진섭의 수필세계 1-외국문학의 영향을 중심으로」, 『한국문화』 83. 2018, 47면.
7) 김연수, 「조선의 번역운동과 괴테의 ‘세계문학’ 개념 수용에 관한 고찰-해외문학파를 중심으로」, 2007, 137면.
8) 백낙청, 「세계화와 문학」, 『안과밖』, 2010년 하반기, 28면.
9) 백낙청, 「지구시대의 민족문학」, 『창작과비평』, 1993년 가을호.
10) 윤지관, 「지구화에 대한 한 고찰」, 『안과밖』, 2000, 18면
11) 에드워드 사이드, 『저항의 인문학』, 김정하 역, 마티, 2012,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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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 오웅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1) 박상현 1. 사랑할 수밖에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너의 나쁜 무리」, p. 95-6) 그 순간 나는 여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너의 나쁜 무리」, p. 112) “그런 세계”에 대한 이 고집스런 애착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에겐 ‘보통의 삶’에 대한 많은 서사적 자원이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반대편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험생활에 열중하다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고, 스펙 쌓기와 연애를 잘 병행하다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연상되는 보통의 삶에 한편,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작 자신이 왜 그토록 이런 삶에 집착하는지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염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아주 사소한 시절」, p. 71)던 이들에게 이 애착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 번쯤 보통의 삶이 주는 환희를 만끽해보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너의 나쁜 무리」, p. 94) 한다는 사실 뿐이다. 보통의 삶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정말이지 막연한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자신의 손녀(‘나’)에게 은밀하고 사소한 연애사들을 훌훌 털어놓고,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것 같다며 손녀에게 개평을 준 남자친구(‘현구 아저씨’)의 뺨을 때리는 ‘여사’는 누가 보아도 보통의 인간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차라리 아주 난잡하고 무람없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방식”(p. 110)이라고 정당화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좀처럼 보통의 삶에 대한 애착을 거두질 못한다. “나(=여사)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 박상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
- 이은지
- 2026-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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