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돌린 김은자의 이미지와 무등산
- 작성일 202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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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돌린 김은자의 이미지와 무등산
김서라
1. 등 돌린 김은자의 사진
이미지는 그것을 표현하는 사물이나 사건 자체보다는 사물이나 사건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쉽게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에 동일시되기가 쉽다. 이 문제에 맞닥뜨린 근대 철학자들은 판단을 유보하기도 하고 인간의 지각 방식 자체를 문제시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론과는 별개로,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의 방식으로 이미지가 그 사물, 사건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 때문이다. 이미지는 그 사물이나 사건과 마주한 시간을 보존한다. 어렸을 때 그렇게 커 보였던 뒷산이 야트막한 산에 불과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미지의 역사는 사실이나 이념이 아니라 ‘낙차’나 ‘문턱’처럼 감각되곤 한다. 적어도 발터 벤야민은 낙차나 문턱의 감각으로 이미지 속의 역사를 파악한 바 있다. 지금도 그 방법은 유효하다. 어떤 사진이 주어진다면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의도나 피사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나 분석보다, 그 사진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진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그것이 ‘그때’나 ‘지금’을 사진보다 더 또렷하게 이미지화하기 때문이다.

1964년 4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 한 장이 있다. 흰 천을 쓰고 한복을 입은 듯한 여성의 뒷모습이 타원형 프레임 속에 있다. 마치 옛 초상 사진의 프레임 속에 수수한 차림의 여성의 모습이 담겼지만, 이 여성의 뒷모습만 가지고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사진 아래에는 작은 활자로 “무명옷을 입은 「어머니」 김 여사는 사진 찍기 마다고 흰 수건 쓴 머리를 돌려댔다.”고 쓰여져 있다. 이 사진이 함께 실린 기사는 그를 ‘어머니’로 소개하면서 등 돌린 뒷모습을 포착한다. 기사의 제목으로는 ‘숨은 나이팅게일’, 부제로는 ‘삼밭실의 무등원, 죽음을 이긴 새마을의 어머니’라고 달았다. 이 사진과 관련한 기사 내용은 이 무등원과 ‘김 여사’를 다음처럼 소개한다.
“광주 무등산 중턱 삼밭실 일대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2백30명에 달하는 폐결핵환자, 앉은뱅이, 간질병환자, 정신병자 등 불구자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진 38동의 집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의 영도자는 연약한 한 사람의 중년부인, 의지할 곳 없는 환자들에게는 어머니이자 누나요, 구세주이기도 하다.
···(중략)···
「가톨릭」 재단의 손으로 운영되는 제중병원은 가난한 결핵환자를 무료로 치료해왔으나 나을 수 없는 환자를 언제까지나 입원시킬 수는 없어 이들에게는 부득이 퇴원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병 때문에 패가망신이 된 환자들에게는 유리걸식밖에 할 길이 없었다. 이금자 양으로 인해 지어진 한 채의 움막은 곧 이들을 위한 안식처가 되기 시작했다. 그 해가 가기 전에 이 움막 신세를 진 환자는 10명이 넘었다.
···(중략)···
한국판 ‘나이팅게일’ 김은자 여사는 그 자신의 이야기에는 말문을 막는다. 머리에는 흰 무명의 수건을 드리우고 무명옷에 짚신을 신은 불구폐질자의 어머니는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말하며 「아직 한 사람의 목숨도 건지지 못했는데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환자들의 살아갈 길만을 걱정했다.”
<숨은 나이팅게일, 삼밭실의 무등원>, 《조선일보》, 1964.4.17.
기사는 김은자 여사를 어머니, 누나, 구세주로 신성화한다. 이는 이 무등원과 연결되는 ‘가톨릭’의 종교성과도 물론 연관된 맥락일 것이다. 김은자 여사의 등 돌린 모습은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칭송하는 이러한 어휘 가운데 ‘죽음을 이긴 새마을의 어머니’가 모든 수식어를 흡수하고 있다. ‘새마을의 어머니’라는 부제가 뜬금없게 느껴지는 게 우연은 아니다. 이 기사가 1964년에 나왔음을 감안하면 ‘새마을’이라는 표현은 거리가 있다. 농촌 계몽운동으로서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불균등개발정책 아래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빈곤의 문제는 잘못된 정책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게으름이나 습속 탓이 되어 있었고, 정부는 이 습속의 개조를 국가적 과제로 여길 정도로 일방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새마을’은 이때 계몽과 습속 개조의 의미를 얻는다. 박정희 정부는 ‘재건국민운동’이라는 캠페인 하에 근면과 내핍생활을 강조했고, 그에 맞아떨어진 것이 기독교 정신이었다. 기독교의 근면과 내핍 정신, 그리고 계몽과 습속 개조의 의미를 연결시킨 것이 ‘새마을’이라는 말로 함축되어 간다. 이는 곧 1960년대 후반 사회 정화 담론,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의 틀로 지속되어 간다.1)
기사는 마치 김은자 여사의 행보를 개인적 헌신과 봉사정신, 그리고 이를 ‘죽음을 이긴’, 곧 ‘죽음을 불사한다’는 의미를 ‘새마을’과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이 의미하는 지배와 통치의 형식이 개인들에게 ‘죽음을 각오하는’ 일방적 방식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김은자 여사가 상징하는 헌신과 종교적 실천은 ‘새마을’과 접합되면서 새마을의 표현에 기독교적 내핍 정신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마을’ 정신을 조직하는 정부에 종교적 초월성을 주입하고 있다. 세속이 범접할 수 없었던 신성한 영역에 있던 초월성이 ‘새마을’이 접합되면서 부지불식간에 세속화되어 간다. ‘새마을’ 담론을 조종하고 유포하는 사회 지배 세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불사하게 하는’ 초월적 위치를 종교로부터 강탈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사회 지배 체제는 종교의 공식을 차용하여 그 외부, 초월적 영역에 위치함으로써 스스로 지도자와 구원자의 등식을 완성한다.
김은자 여사의 얼굴이 사진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심장할 수 있다. 이 제스처는 김은자 여사의 개인적 겸양의 표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김은자 개인의 인격이나 성격에 대한 정보일 뿐, 등 돌린 이 사진을 이미지로서 읽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이미지의 층위에서 보았을 때, 김은자 여사가 등을 돌린 이 사진은 ‘숨은 나이팅게일’, ‘죽음을 이긴 새마을의 어머니’라는 표제가 붙은 기사의 맥락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인다. 김은자 여사의 이미지는 이 등식의 구도로부터 회피하고 있다. 마치 종교적 신성을 세속적 통치의 도구로 찬탈당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 회피의 전략은 김은자 여사의 제스처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무등원’이 자리한 위치에서도 표출되고 있다.
2. 삼밭실의 무등원과 무등산
삼밭실의 무등원은 어떤 장소인지 알아보려면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삼밭실은 광주광역시 무등산의 지명이다. 무등산 정상에서 북서쪽의 능선으로, 인삼을 재배하던 곳이라 삼밭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곳이다. 지도를 보면 꽤나 산으로 들어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깊은 곳이다. 무등원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왔고 사람들은 이곳에 살아야 했던 것일까.
아직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1950년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다리 밑에 살았다. 광주에는 광주역, 광주공원과 광주천 주변에 빈민, 고아, 걸인, 병든 자들이 모여 살았고, 특히 양림교와 부동교 아래는 오래전부터 걸인과 나환자들이 살았다던 장소다. 그중에 꼭 걸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광주천 변에는 성 프란치스코회의 김준호 선생이 걸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재단이 운영하는 제중병원에 입원한 후 결핵환자 청년을 만나 사정을 들었고 결핵환자를 위한 전용 병동을 만들게 된다.2) 그는 병동의 이름을 송등원으로 짓고, 초반에는 오방 최흥종 목사가 운영하던 동광원에서 사업을 펼쳤다. 하지만 전염성이 높은 결핵환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수용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주변의 민원이 있어 송등원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55년에 새 보금자리를 지산동으로 옮기고, 여성들을 위한 무등원은 1956년에 창설하고 무등산 기슭에 자리를 잡는다.3) 그곳을 맡던 사람이 김은자 마리아였다. 무등산에는 송등원과 무등원 외에도 결핵환자들의 요양소가 더 많았다고 한다.
도시 사람들로부터의 민원, 즉 혐오와 차별이 무등산 깊은 삼밭실에 병동을 만들게 된 큰 요인이 된 셈이다. 그러나 무등산의 역사를 보면 무등원이 아니더라도 무등산은 오래도록 도시의 혐오와 차별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도피처이자 대피소였다. 1953년부터 55년까지 무등산에 공비들이 숨어들었다고 하고,4) 감염병으로 인해 사람들과 접촉을 피해야 하는 환자들 외에 법적, 제도로부터 벗어난 자들도 한데 모여들고 향후를 획책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등산은 ‘빨갱이’들과 미지의 존재들이 모여 있던 무서운 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무등산이 호랑이가 출몰하는 장소였음을 감안하면,5) 이 산은 지금과 같은 안온하고 도시민들의 휴양 장소와 같은 이미지는 전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무등산에 숨어든 공비들과 병자들에게는 도시의 차별과 혐오, 법적, 제도적 포섭으로부터 은신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들에겐 도시가 호랑이가 사는 무등산보다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공비들을 일망타진한다는 기사가 1955년 7월에 실렸고6) 그로부터 2년 후 1957년, 무등산을 도립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발표된다.7) 광주상공회의소와 전남도 당국, 광주시의회에서 상호 협력하에 무등산에 전라남도 도립공원을 만들 계획이 수립되었다는 기사였다. 당시 광주상공회의소의 박인천 회장을 포함한 경제인들이 무등산 관광개발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1958년, 무등산 관광도로가 개통되었다. 이 사실은 단순한 도시 관광 개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1976년 『전일그라프』라는 지역 잡지는 무등산의 무당촌을 ‘사이비종교촌’으로 소개한다.8) 무등산이 예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던 역사가 있고, 때문에 무속신앙의 신도들이 가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문제화한 것은 70년대의 일이다. 이 잡지는 무등산에서 산신을 모시고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을 “산악정화운동에 역행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곳의 판자집들을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의 폐허처럼 찍어내어 ‘사이비 종교촌’으로 낙인찍으면서 도시 빈민들까지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한다. 무등산 관광 개발과 더불어 진행된 무등산 이미지에 대한 미화 작업은 무등산의 불순분자들과 움막을 짓고 살던 빈민들, 병자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리는 것과 같았다.
시기를 보면 김은자 여사의 사진과 무등원의 소개가 기사에 실렸던 1964년에 이미 무등산은 관광 개발 장소로 논의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은자 여사의 기사는 더 모순적이다. 김은자 여사의 봉사 정신을 한껏 드높이면서 정부의 ‘새마을’이라는 습속 개조 정책의 정신으로 삼는 한편, 그들이 터를 잡고 있던 무등산에서는 ‘산악정화운동’이라든가, 관광 개발을 명목으로 삼는 미화 작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등원과 송등원은 무등산이 도립공원이 된 1972년도에 철거 명령을 받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무등산 기슭에는 빈민들이 살았지만 1977년, 무당촌 철거 사건으로 인해 박흥숙이 범죄자가 되고 빈민들의 얼굴이 괴물화된 이후로는 누구도 더는 터전을 잡기 힘들어졌다.
지금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에 위치한 소화자매원의 전신이 이 무등원이다. 1980년대에는 5·18 항쟁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자 초대 5‧18기념재단 이사장인 조비오 신부가 이곳의 대표이사이기도 했고 지금은 조카인 조영대 신부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이곳의 역사가 전시된 작은 방과 역사 자료집 『소화 설립 50년사』9)에서 비로소 김은자 여사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사진 속 김은자 마리아 수녀는 커다란 안경을 쓴 얼굴에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다.
3. 무등산 자락의 알 수 없는 삶들과 ‘무등’ 퀴어 축제
국가는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도는 도망자, 빈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집단 수용시설로 몰아넣고 전반적인 ‘개조’를 하려고 했다. 사회적 구조의 문제를 이들의 게으름이나 무능의 문제로 낙인찍고 이들을 통제하고 강제했다. 이는 사회 정화라는 이름으로 삶과 생활을 식민화하고 효율적 자본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폭력적 방식이었다. 땅을 근대적 도시로 개발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공간으로 재현하기 위한 토건 정책들은 도시화와 관광 개발 등 여러 방식으로 자연을 정리하면서,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졌던 산은 ‘공원’이 되었고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했다.
사회는 걸인, 넝마주이, 빈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 온 사회적 약자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을 큰 위협으로 느꼈다. 근대적 도시는 노동이라는 생산 활동과 휴식이라는 재생산 활동, 그리고 휴식은 소비로 이어짐으로써 자본이 순환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한다. 하지만 걸인, 넝마주이, 빈민의 이름을 지닌 사람들의 삶은 그러한 구조를 지니지 않는다. 생산과 소비, 생산과 재생산의 구조에 속하지 않는 그들 삶은 차별해도 좋은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생존하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다. 도시로부터 추방당한 ‘호모 사케르’와 같았던 이들의 삶은 사람들이 드문 산골의 척박한 땅이나 강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무등산 자락에서 빈자와 병자들의 공동체가 구축된 과정은 자본의 논리와 도시 미화의 확장으로부터 도망치는 경로와 같았다. 동시에 그로부터 자신들의 어려운 삶을 지속해 나가는 미지의 무언가를 강탈당하지 않기 위한 무의식적 전략과도 궤를 공유한다. 그 미지의 것이 무엇인지는 도시 빈민 박흥숙의 사건 속에서 짐작해 볼 수도 있다. 그는 무당촌을 철거하러 온 용역들에 의해 자신의 집이 부서질 때까지도 분노를 참고 있다가, 거동하지 못하는 병든 이웃 할아버지의 집까지 재가 되는 모습에 그만 일을 저질렀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일화를 보면 아마도 처지를 공유하는 이웃의 존재가 그 삶을 지탱하는 비밀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도망칠 수 있는 장소가 고정된 형태로는 남아 있지 않지만, 간혹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지금의 일상은 그때 ‘광장’이 출현했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가 그러했고, 1년 전 광장에서 그런 장소가 출현한 것을 보았다. 지역을 불문하고 곳곳에서 나타난 광장은 그 곳곳이 모두 은신처이자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나타난 사람들은 더는 도망칠 수 없었던 취약한 존재들이면서도 더는 자신의 삶 속의 무언가를 강탈당하기 싫어 나타난 존재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그 미지의 것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존재들에게 의존하면서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2025년 11월 29일, 광주에는 ‘무등’이라는 이름으로 퀴어페스티벌이 열렸다. 무등이라는 이름은 등급이 없다는 ‘무등(無等)’이자, ‘무지갯빛 절대 평등’의 줄임말로 변용한 것이기도 했다. 퀴어페스티벌이 무등이라는 이름으로 열렸을 때, 개발 과정과 함께 미화된 무등산의 이미지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이름은 무등산 속으로 도망친 자들의 그 오랜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함께 살아온 삶의 내밀하고 본질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날 사람들은 수십 개의 깃발들 속에 파묻혀, 시내를 한 바퀴 빙 행진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를 외치고, 스피커로 울리는 가요를 듣다 보니 어느새 행진 대열은 금남로에서 광주천 변을 향하고, 옛 적십자병원 건물을 지난다. 익숙하게 걷던 거리였음에도 풍경과 경관은 사뭇 달랐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나부끼는 깃발들이 겹쳐진다. 무지개 깃발과 ‘성소수자부모모임’, ‘전국청소년노동조합’과 ‘윤석열 탄핵 내란정당 해체’ 깃발, ‘불꽃남자 정대만’ 깃발을 비롯한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작년과 올해의 겨울을 배경처럼 다시 데려온 가운데 저 멀리 무등산이 보인다. 그러니까 무등산은 누구나에게, 언제나 똑같은 산이 아니라, 이렇게 무지개 깃발들 사이로 보이는 산이었고 사람들 어깨너머로 보거나, 횃불들 사이로 보였던 산이었다.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만큼은, 이 깃발들이 지금의 무등산을 보는 방식이다. 그러니 퀴어들의 ‘무등’이라는 축제는 무등산을 저곳으로부터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5시 18분, 민주광장의 시계탑에서 종이 울리고 ‘임을 향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잠시 적막감이 든 후, 행진이 끝난 군중들이 노래를 부른다.
1) 박해남, <한국 발전국가의 습속개조와 사회정치 1961~1988>, 《경제와사회》, 비판사회학회, 2019년, 349~50쪽.
2) 사회복지법인소화자매원, 『소화설립50년사』, 심미안, 2006, 102쪽.
3) 같은 책, 103쪽.
4) “···이번 사건은 도청 소재지인 동시에 경찰국이 존재하고 있는 도심지대에서 야기된 사실과 그리고 동경찰국관하 무등산에 집거하고 있는 공비들로부터 칠월 초순경부터 수차에 걸친 위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책의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공비내습에 대책없나- 광주관하에 이개파출소를 피>, 《경향신문》, 1953년 7월 24일.
5) “21일 새벽 5시쯤 무등산 기슭 속 속칭 꾀재(시내 지산동) 이기태 씨 집 헛간에서 호랑이 새끼 3마리가 생포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 새끼 호랑이는 표범 종류로 이씨의 장남 판봉 군이 헛간을 치우다 발견했다 한다. 새끼 호랑이들이 잡힌 후 22일에는 어미 호랑이가 나타나 으르렁대는 바람에 인근 주민들이 잠을 못잤다고 한다.” <무등산 기슭 어떤 헛간에 -호랑이 새끼 3마리 농가서 생포>, 《경향신문》, 1964년 6월 23일.
6) “지난 오월 십팔일 전남영광해안에 상륙하여 경찰진의 포위망을 교묘하게 뚫고 방금 전남화순 무등산과 별산에 잠복해 있는 대남공작대 오(五)명은 유얼 이십일일 생포후 앞으로 일주일내에 일망타진될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지하당부재조직위해 월남>, 《경향신문》, 1955년 7월 8일.
7) <광주에 도립공원>, 《조선일보》, 1957년 1월 19일.
8) <무등산에 사이비 종교촌 –50여 개교 밀집 「제2의 계룡산」화>, 《전일그라프》 1976년 3월호 (통권 63호).
9) 사회복지법인소화자매원, 『소화설립50년사』, 심미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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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비평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최선교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최선교 김혜순은 2002년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을 시작으로, 2017년 『여성, 시하다』를 거쳐 2019년 『여자짐승아시아하기』, 2026년 『공중의 복화술 : 문학은 어디서 시작할까?』에 이르기까지 여성과 여성시를 대상으로 한 시론을 세워왔다. 명백히 여성과 여성시를 위한 시론이다. 그녀는 여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녀는 여성시에 대해서 말한다. 이 진술에 대해 해명하거나 덧붙이고 싶은 말은 없다. 그녀의 시론은 기존의 ‘여성적 글쓰기’ 범주에 속하면서 ‘들림’이나 ‘바리데기’ 등의 동양 무속적 상상력을 통해 개성을 확보한다. 한국에는 ‘여류시’라는 말이 있(었)다. 김혜순은 생물학적 성차 개념에 기반을 둔 ‘여류시’라는 일종의 멸칭으로부터 ‘여성시’의 범주를 구분하려고 했다. 시론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 생물학적 정체성이 아님을, 공중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지만 어떤 순간에는 생생하게 발악하기도 하는 구성적 개념임을 설명하고자 했다. 김혜순의 시는 종종 난해하다거나 초현실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 본인은 그러한 평가가 ‘현실’이나 ‘환상’의 개념을 남성적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현실이 무엇이고, 환상이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나의 시를 초현실이라고 부르는가. 그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여성이 현실이라면?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이 쓴 시, 여성시를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발성기관, 새로운 발성법에 대한 해독이 필요”1)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구체적인 시 형식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2022년 11월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의 개정판을 펴내며 김혜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무엇보다도 여성시는 여성의 형식을 발명한다. 면면히 내려오는 말하기 방법 말고 다른 말하기 방식 말이다.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는가가 여성주의적 발성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다.”2) 이는 김혜순이 여성 시론을 적어나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말하기 방식을 통해 ‘여성시’의 범주를 설계하고자 함을 암시한다. 단지 생물학적 여성에 의한 시가 ‘여성시’가 아니다. 여성이 말하는 시가 바로 ‘여성시’인 것이다. 시 형식에 대한 김혜순의 관심은 1990년대 한국의 ‘여성문학’ 담론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로부터 시작한다. 1990년대 한국 문학장에서 ‘여성문학’을 둘러싼 담론들은 그 당시의─대부분 남성이었던─비평가들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일 경우에만 미학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김혜순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 시론을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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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01
문장웹진 비평
분노의 하나비(花火)분노의 하나비(花火) ─ 구소현론1) 하혁진 썩은 과일에 사랑을 담아 건네면 신선해진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다시 살아난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 「요술 궁전」 중에서 * 오랜만이다. 이런 소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한동안 뜸했던 것은 사실이어서, 구소현의 소설을 읽는 내내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잔뜩 화가 난 소설이라니. 이렇게까지 눈치 안 보고 나쁜 소설이라니. 분노의 감정이 차갑게 벼려진 폭력적인 장면들이 설령 보기 좋은 (혹은 보고 싶은) 장면들이 아니더라도 어쩌겠는가. 뒤표지의 표현처럼 그 마음 역시 인간이 가진 ‘진짜’ 마음인 것을. 고백건대 분노가 가득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것이 불순한 마음임을 알면서도 적지 않은 해방감을 느꼈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우리 소설이 그 화를 지나치게 참고 있다고, 너무 오래 참아 왔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튼 구소현의 소설에는 곪을 대로 곪은 마음의 종기를 터뜨리는 것 같은 장면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면. 은호는 피곤한 날에 꼭 꿈을 꿨다. 그녀는 꿈에서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죽였다. 평생 꾼 꿈 중에서 최고로 기분 좋은 꿈이었다. 흉기로 목과 가슴과 배를 수차례 찔렀다. 기어가는 도중에도 계속 뒤쫓아가 마구잡이로 난도질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안면을 가혹할 정도로 가격했다. 눈알을 터뜨리고 광대뼈와 턱뼈를 으스러뜨렸다. 그 뒤 꿈에서 깨기 이전까지는 사람인지 연체동물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하게 시체를 훼손했다. 누군가 ‘꿈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묻는다면 은호는 어떠한 비난도 감수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324쪽)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곤란하다. 조시 코언은 “우리는 분노하면 종종 공격을 연상하며, 심지어 둘을 혼동하기도 한다”라고 지적하며, “하지만 공격은 분노와 달리 행동의 범주에 속한다”2)라고 짚어낸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구소현의 인물들은 느끼고, 행한다. 인용한 장면에서 은호는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극악무도하게’ 그리고 ‘기분 좋게’ 죽인다. 꿈이니까 괜찮다고? 그렇다면 소설은 현실인가 꿈인가. 은호가 말하는 ‘꿈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독자들은 꿈속에 있는가 현실 속에 있는가. 일단은 이렇게 대답해 두자. 끝없는 분노를 생산하고 심지어 부추기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출할 출구는 마땅치 않은 상황, 즉 “분노와 공격의 병목 현상”3)으로부터 이 소설들이 나왔다. 감정은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
- 하혁진
- 2026-09-01
문장웹진 비평
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 황석현 회색빛 갯벌, 우연히 스며든 사랑 박상영의 소설 세계 「대도시의 사랑법」 도입부에는 연인 규호와 연애를 시작한 지 200일이 지난 시점에서 규호가 홀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고영의 실수로 규호 홀로 떠나게 된 여행에서 고영은 공항철도 창밖을 바라보다, 감정의 리듬과 직면한다. “나 홀로 공항철도를 탔다. 창밖으로 회색빛 갯벌이 계속 이어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대도시의 사랑법」, 184-185면) 이 짧은 문장은 연인 규호와의 단절 이후의 감정을 '슬픔'이나 '외로움'으로 바로 치환하는 것이 아닌, 반복되는 비어 있음, 스스로를 검열하는 감정적 카메라, 종종 회색빛으로 필름이 씌워진 삶의 프레임으로 보여준다. 고영은 ‘갯벌’ 속에 발이 빠지듯 감정적 침몰을 겪으면서도 공허에 침전되지 않으며 곧이어 감정적 전환을 시도한다. 섹시한 팝가수 카일리 미그노 앨범과 립밤. 즉각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립밤을 찾는 행동은 감정을 파국으로 밀어 넣지 않기 위한 자기 정동의 능동적 복구 행위이다. 촉촉한 립밤을 바르며 감정의 표면을 다듬는 조심스러운 생존술로 읽을 수 있다. 입술은 말을 시작하는 신체 기관인 동시에 키스·식사·호흡 등 생존과 욕망의 경계 지점이다. 이는 사랑이 머뭇거리는 자리에서 지금 여기 다시 관계의 준비를 하는 미세한 제스처이다. 이는 관계를 살아낸 몸이 감정을 지속하려는 퀴어한 생존술이자 정동적 자기 조율 방식이다. 연인 규호와의 감정적 관계는 기계적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모르게 끝나가 보이지만, 여전히 감정은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은 도래하지 않을 듯도 보인다. 이 글은 그러한 지속 불가능한 단일한 감정의 리듬, 끊어졌으나 끝나지 않은 애착, 그리고 삶을 살아내기 위한 감정적 생존술을 퀴어 정동1)의 관점에서 따라가 보고자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가 보여주는 감정의 구조, 감각과 기억의 귀환, 기쁨의 부재가 어떻게 문학적 윤리로 전환되는지를 추적해본다. 로런 벌랜트는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에서, 우리가 삶을 지속하게 해주는 어떤 대상이나 관계가 오히려 그 삶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적 조건으로 변할 때의 정동 상태를 ‘잔인한 낙관’이라고 설명한다(윤조원·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24). 현대의 주체는 여전히 ‘좋은 삶(good life)’의 약속을 좇지만, 그 약속 자체가 자기착취적 생존을 강화하거나 정서적 고통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기도 한다. 박상영 소설 속 고영과 규호의 관계 역시 이러한 양가적 구조 안에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착을 통해 버티고 살아가지만, 그 관계는 사회적 제도와 생물학적 조건 속에서 점차 유지되기 어려운 형태로 변하며, 그럼에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내부에 잔존한다. 바로
- 황석현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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