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정치경제학
- 작성일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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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정치경제학
- 정영수와 임솔아의 단편에 대하여
서희원
1. 메피스토펠레스는 많은 것을 말했다.
2025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스즈키 유이의 장편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에 등장하는 괴테 연구자 히로바 도이치는 홍차 티백 꼬리표에 달린 하나의 문장을 읽고, 그것이 평생 괴테를 연구한 자신도 모르는 괴테의 문장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티백 문장의 진위와 출처를 찾던 도이치에게 젊은 연구자 스즈키는 이렇게 말한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1) 스즈키에게 이러한 감탄을 이끌어낸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흥미롭게도 『파우스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담기진 않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오래 간직해도 좋을 의미 있는 말들이 가득하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인이라면 『파우스트』의 서사를 역노화와 건강,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삶의 열망을 잃은 학자 파우스트의 정확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절망, 즉 내면을 가득 채운 지적 충만, 육체와 재산의 결핍을 통해 계산하면 대략 오십 대 이후로 추정이 된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저 놀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늙었고,/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기에는 너무나 젊도다.”2) 이후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담보로 계약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 열망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은 마녀의 부엌으로 그곳에서 파우스트의 육신을 열정으로 타오를 수 있는 젊음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정체불명의 역겨운 액체와 신뢰하지 못할 마술이 탐탁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기 위한 좀 더 좋은 방법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요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이 다른 책에서 읽은 자연요법을 소개한다.
좋아요! 그건 돈도 안 들고,
의사나 마술도 필요 없는 요법이지요.
당장 저 바깥 들판으로 나가셔서,
괭이로 갈고 땅을 파는 일을 시작하시고,
당신의 몸과 마음을
극히 제한된 생활권 안으로 국한하고,
가공되지 않은 음식으로 몸을 보양하고,
가축과 더불어 가축으로 살면서, 추수할 밭에다
몸소 거름 주는 일을 약탈이라고 언짢게 여기지 마시오.
이것이 믿을 수 있는 최선의 요법이니,
팔십 고령에도 당신을 젊게 유지해 줄 것이요! (1권 115쪽)
메피스토펠레스가 알려주는 자연요법은 대체의학이나 스트레스를 만병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정신신체의학(심신의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솔깃할 그런 내용이다. 사실 『파우스트』의 서사는 두 가지 지식의 충돌이 생성하는 긴장감을 통해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나는 “철학”, “법학”, “의학”, “신학” 등에 통달한 파우스트의 지식이다. 중세 독일 대학의 네 개의 학부인 철학부, 법학부, 의학부, 신학부의 지식을 모두 깨우친 파우스트는 학위가 알려주는 것처럼 ‘박사’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를 창조할 때부터 존재했던 “빛을 탄생시킨 암흑의 일부분”(1권 89쪽)이며, 인간과 함께 수천 년을 살아온 “항상 부정하는 정령”(1권 88쪽) 메피스토펠레스의 자연사적 경험이다. “악마는 늙은이니까”(2권 141쪽)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은 절대 농담이 아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지식은 오랜 시간 축적된 그의 경험에서부터 나온다.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가 어느 책에서 읽었다고 말하는 자연요법(naturopathy)과 안분지족(安分知足)은 악마의 지혜답게 가장 중요한 절반의 진실은 감추고 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이것을 실천하는 데는 ‘돈’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궁핍한 인간은 절대 이러한 삶의 조건을 가질 수가 없다. 노동은 생활의 필요 때문에 언제나 과로로 초과하기 마련이고, 재화의 대부분은 몸과 마음을 보존할 제한된 생활구역 밖에 존재하며, 자연식은 가공식보다 몇 배나 비싸다. 현대의 인구등록 시스템에 기재된 인간 중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알려진 잔 루이즈 칼망(1875~1997)의 장수 비결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그 이유를 그녀가 물려받은 “부유한 경제적 환경”으로 꼽는다.3) 프랑스 남부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칼망은 좋은 동네에서 살 수 있었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며, 다양한 취미를 개인 교습을 통해 습득할 수 있었다. 가족을 건사하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에서 면제받은 칼망의 사회적 스트레스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고, 대부분의 일상은 여행, 취미를 위한 운동, 사교 행사로 채워졌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처럼 돈은 모든 것과 교환을 할 수 있는 물신이다. “가령 내가 여섯 마리의 말 값을 치를 수 있다면,/그놈들의 힘은 내 것이 아니겠소?/그러니 나는 스물네 개의 다리라도 달린 듯,/신나게 달릴 수 있는 당당한 사나이지요.”(1권 115쪽) 변주하자면, 내가 두 사람의 목숨값을 치를 수 있다면 나는 두 개의 심장, 네 개의 신장이 달린 듯 신나게 살 수 있는 건강한 인간이기도 하다.
2. 고독의 정치경제학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연과의 교감을 말하는 동시에 몸과 마음을 “극히 제한된 생활권 안으로 국한”할 것을 권유한다.4) “극히 제한된 생활권”의 권역을 어디까지라고 정할 수는 없지만, 괴테가 『파우스트』를 창작하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자면, 몸과 마음을 사회적 관계에서 자율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은 노동 시간이었고, 노동은 대부분 집단적이었으며, 가족은 하나의 공간에서 거주하였고 개인의 사적 영역을 보장하는 방과 벽은 없었다. 육체의 감각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집중하고, 마음을 바라보며 영혼을 견인할 수 있는 고독의 시간과 그것이 가치 있다고 알려주는 교양, 독서를 위한 시간적 여유는 저택 옆에 외부로부터 은폐된 비밀 정원이나 자신만의 서재를 가질 수 있는 왕족이나 귀족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사치’와도 같았다. 오리스트 레이넘에 따르면, 부르주아가 바라던 “내밀성의 공간들”을 만들어 낸 것은 근대의 건축가들이었다. “근대의 건축가들은 엘리트층의 주택 안에 새로운 사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전에는 단순한 가구였던 공간을 방으로 개조함으로써 공간의 수를 늘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유럽의 여러 언어들 가운데 가구를 상징했던 단어들이 서서히 서재(étude), 곁방(cabinet), 서가(bibliothèque), 집필실(écritoire)등 사적인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는 방을 지칭하는 단어로 바뀐 것이다. (…중략…) 사적 영역의 등장은 근본적으로 사색이나 비밀의 영역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작은 비밀 상자를 소유한 사람은 특별한 용도로 쓰이는 방들이 딸려 있는 저택을 소유한 사람과 똑같은 수준의 사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5)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 한 칸”이 필요한 것과 동시에 “일 년에 500파운드”의 고정 수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독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공간을 필요로 했으며,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근대적 발명품 중 하나인 ‘고독’의 의미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여기에 보편적 가치를 부여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루소이다.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첫 문장에서 자신이 처한 추방의 상태를 “이제 나는 이 지상에 혼자이다. 오직 나 자신뿐, 형제도 이웃도 친구도 사회도 없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마주한 고독을 통해 “내 생애의 말년을 내 자신에 대한 탐구와 나에 관한 대차대조표를 서둘러 작성하는 데 바치리라. 혼신을 다해 내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달콤함에 탐닉하리라”라고 쓴다.6) 이러한 “몽상”의 과정을 통해 루소는 자아의 내면을 탐구하는 동시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서 그것이 가진 본래의 의미, 즉 ‘풍경’을 발견한다. “숲속으로 도망가 봐야 소용없었다. 성가신 생각들이 가는 곳마다 나를 따라와 자연을 모두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온갖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연을 진정으로 되찾은 것은 오로지 사회적인 정념들과 그 정념들의 우울한 행렬을 모두 떨쳐버린 뒤였다.”(165쪽) 사회에 대한 열망과 원망, 개인적 추억과 타인과의 관계가 만든 혼란, 이러한 것들을 떨쳐내지 못하는 염려에서 벗어난 고독의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내면과 자연의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고 루소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7)
근대 이후의 문학과 인간을 사유할 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던 고독, 근대적 발명품인 동시에 부르주아의 사치품이었던 고독의 가치가 전도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적 발전과 도시에서의 삶이 일상의 전면으로 등장한 20세기 이후이다. 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며 성찰하던 루소적 산책은 도시의 아케이드를 거닐며 상품의 숲길을 방황하는 벤야민의 산책으로 대체되었다. 게오르그 짐멜은 화폐 경제와 대도시적 삶을 통해 정서적으로 외톨이인 동시에 주변에 냉담하고, 변화에 둔감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호감보다는 반감을 표출하는 현대 인간의 초상을 예견하였고, 그것은 정확했다. 짐멜은 이렇게 말한다.
대도시의 둔감함의 이와 같은 생리학적 원천에는 화폐 경제에서 유래하는 다른 원천이 합세한다. 둔감함의 본질은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 증세이다. 그렇다고 우둔한 사람에게처럼 그것이 전혀 지각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물의 차이들이 지닌 의미나 가치, 나아가 사물 자체를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둔감해진 사람에게 그러한 차이들은 모두 똑같이 침침하고 음울한 색조로 나타나며 다른 것보다 선호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영혼의 이러한 심정은 철저하게 대도시 안에 침투된 화폐 경제에 대한 충실한 주관적 반영이다.8)
짐멜의 분석을 21세기 한국의 일상으로 가져와 보자. 가상 화폐로 발전한 화폐 경제는 돈을 건네고 받는 최소한의 손길마저 없애고 있다. 인터넷 쇼핑이나 키오스크 주문을 통해 우리는 누구도 대면하지 않고도 원하는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아파트, 오피스텔, 원룸, 빈민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층의 주거 공간이 된 고시원 등으로 구획된 개인의 공간은 굳게 닫힌 문으로 보호되고 문 앞에 서 있는 타인은 반갑기보다는 두렵다. 노인들은 경제적 계급에 따라 실버타운이나 요양원, 고시원, 슬럼의 단칸방에서 말년을 보내고 죽어간다. 고령화, 결혼 기피, 저출산 등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극히 제한된 생활권 안으로 국한”시킨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웨이터나 소믈리에와는 달리 저렴한 식당이나 패스트푸드점은 서빙 로봇이나 셀프서비스를 사용해 단가를 낮춘다. 경제적 여유가 없을수록 인간의 손길을 접할 기회는 사라진다. 도시의 풍경을 재현하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도시가 음울하고, 침침한 색조로, 주변의 인간은 다정하기보다는 냉정하며 잔혹하게 묘사되는 것은 장르적 클리셰가 아니다. 도시의 풍경에서 본연의 매혹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고독은 부르주아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가 아니라 타인을 만날 충분한 재화를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가난의 징표가 되었다.
3. 낙관주의자의 실패한 유크로니아_정영수 「미래의 조각」
정영수 소설가가 2023년 가을에 발표한 단편 「미래의 조각」은 자살을 시도한 어머니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중 화자는 둘째 아들인 ‘나’로 회사를 다니는 동시에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 형과 나로 이루어진 이 가족이 거주하는 방식이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형은 형의 집으로, 아버지는 아버지의 집으로, 내가 사는 곳은 차로 한 시간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나는 일단 어머니 집에 머물기로 했다.”9) 소설의 문장이 알려주는 것처럼 이들은 4인 가족이지만 각자 자기들만의 독립된 공간을 가지고 살아간다. 장성한 형이 먼저 독립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가 독립을 하였고, 부부 관계가 좋지 않기에 아버지마저도 거처를 구해 별거하게 된 터였다.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한 계절에 한 번 연락을 주고받거나 거의 소통을 하지 않으며, 그러한 무관심을 서로에 대한 존중이라고 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가족이지만 각자의 집에서 어떠한 정서적 연관 없이 개별적으로 살아간다.
단편이기에 형과 ‘나’, 아버지, 어머니의 현재가 어떠한 생활 방식과 노동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담겨 있지 않고, 형과 ‘나’의 개별적인 가정 관계에 대한 언급도 나오지 않는다. 이 선택과 생략은 작품의 후반에 화자가 경험한 어머니의 자살 시도를 소설로 썼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설명된다. 다음과 같이. “이 글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재구성되었으며, 실제 일어난 일에서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 이 글에는 나의 아내가 등장하지 않고, 이모들과 삼촌들이 등장하지 않고, 실제로는 많은 도움을 주었던 어머니의 오랜 친구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글에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길 때 있었던 크고 작은 트러블들과, 그에 대한 아버지와 형의 대응과, 폐쇄 병동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진료비와 기타 자잘한 선택 과정에서 일어났던 사소한 언쟁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글은 많은 부분 사실을 기록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어머니의 글처럼 역시나 하나의 가능성이다.”(35쪽)
화자가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이 소설에는 많은 것이 생략되었다. 아내, 이모들과 삼촌들, 어머니의 오랜 친구, 병실의 이동에 따른 트러블, 진료비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생략이 알려주는 것은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서사적 허점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족으로 묶여 있지만 가족이라고 부르기에는 약간은 서먹한, 서로가 가진 감정적 냉담함과 무덤덤함의 정서이며, 다른 하나는 화자가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부른 삶에 대한 “낙관주의”적 시선이다.
소설은 형에게 온 전화로 시작된다. 곧 독자가 알게 되는 것처럼 이 전화는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사건의 위중과 목숨이 경각을 다투는 감정의 격랑이 담겼음에도 이 장면을 작가는 의도적으로 느리고 무덤덤한 감정 속에서 전개한다. 화자는 써지지 않는 소설을 쓰기 위해 카페에 앉아 있지만 ‘나’가 기껏 하는 것은 “아무 관계도 없는 고생대 수중 생물들의 진화 과정을 독파”(12쪽)하는 일이다. 형은 간단히 안부를 말하고, 어떠한 이유인지 밝히지 않고는 최근 엄마와 통화했는지를 묻는다. ‘나’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전화가 지난 계절의 일인 것을 기억하고 최근에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 형제는 대화에 서툰 사람처럼, 서로가 침범하지 말아야 할 영역이 있는 타인들처럼 가벼운 말들만 주고받고는 전화를 끊는다. “형에게 다시 전화가 온 것은 그날 밤 잠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13쪽)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한 “늦은 시간, 그리고 두 번째 전화”에서도 형은 “쓸데없고 사소한 질문”(13쪽)을 던진 후 ‘나’가 전화한 용건을 묻자 그제야 어머니의 자살 시도에 대해 말한다. “이것이 영화였다면 점프 컷으로 내가 불 꺼진 중환자실 앞 복도를 서성거리는 장면으로 연결되겠지만………”(14쪽)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나’가 보여주는 어머니의 사건에 대한 대응과 감정은 경각에 달린 어머니의 상태보다는 이런 일을 처리하는 형의 방식과 태도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하다. “전화가 끊어지고 나는 다시 안락한 어둠 속에 혼자 남겨졌다.”(15쪽) 이 문장에 사용된 “안락한 어둠”은 ‘나’가 살아가는 삶의 양태, 즉 그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고독’의 정서적 상태를 보여준다. 안락하지만 어두운.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 마치 배가 부른 상태로 마트에 들어가 식료품 판매대에서 물건을 고르는 슬기로운 소비자 같은 ‘나’의 태도는 이러한 상황과 자신의 심적 상태를 기술하는 다음의 문장에 정확하게 드러난다. “나는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 형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즉시 대충 옷가지를 챙겨들고 어머니를 볼 수 있든 없든 병원으로 향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낄 거라는 걸 알았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낄 거라는 것도, 그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문제였지만 나는 왜 ‘그들’과 얽히면 매번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지, 왜 형은―의도가 무엇이었든―어설픈 배려로 나를 이러한 시험에 빠뜨리는지 화가 났다.”(15~16쪽) “죄책감”과 “자괴감”, “나”와 “그들”, “문제”와 “시험”. 마치 타인에게 보이는 혹은 연기를 통해서라도 보여줘야 하는 ‘나’와 실제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충실한 ‘나’의 대차대조표를 써 가며 내면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기술하는 이 장면은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기보다는 오랜 시간 분리된 상태로 살아왔다는 것을, 타인처럼 인지되는 가족에 대한 반감을 직접적인 대화로 드러내지 않는 무덤덤한 태도가 정신적 삶의 형식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냉담함은 결코 ‘나’만의 것은 아니다. 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나’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은 과묵함이라기보다는 가족에게는 보일 수 없는 무관심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의 온도는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보여준 어머니의 유서는 “딱 한 줄”이다. “나는 나의 지난 삶에 죄를 지었다.”(19쪽) 이 문장에서 어머니는 둘로 분리된다. “나의 지난 삶”은 시간과 경험의 총합인 “나”로 완성되어야 하지만, “죄”는 살아온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었던 ‘나’로 괴리되며 그 갈등이 직접 자기를 살해하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죽음은 개인의 문제일 수 있지만, 죽음의 의례와 애도는 온전히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다. 그렇기에 유서는 자신이 아닌 자신의 시체를 마주하고, 충격을 받고, 슬퍼하며, 예법에 맞춰 처리해야 할 사람들에게 주는 당부의 문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유서에는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처분에 대해 말하는 듯한 냉정함만이 담겨 있다.
자살을 시도하기 위해 마신 농약의 비소가 성대를 파괴한 탓에 어머니는 퇴원 후에도 말을 하지 못한다. 필담으로 간단한 대화만을 나눌 수 있는 어머니를 위해 형은 몇 권의 공책과 볼펜을 사 오게 되고, 어머니는 공책에 무언가를 쓴다. ‘나’는 그것이 “제대로 된 유서”(32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며, 어머니가 잠든 틈을 타 그것을 읽는다. ‘나’는 어머니의 글이 자신의 예상했던 것―“나는 어머니가 말하자면 자기 치유의 행위로서 지나온 삶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일종의 회고록을 쓰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33쪽)―과 달리 “어머니가 살아온 삶이 담겨 있지 않”(33쪽)은 일종의 “실패한 유크로니아”(35쪽)란 사실에 당혹감을 느낀다. 공책에는 어머니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의 변주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글은 서울에 상경한 이후 아버지를 만나지 않는 삶으로 시작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무역 회사에 취직해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을 했던 친구에게 들은 인생 여정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떤 페이지에서는 생물학자가 되어 세계의 오지를 돌아다니며 동물을 연구하거나 로스앤젤레스에서 결혼하여 살다가 운전을 하며 사막을 통과한 후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와 아버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다정한 남자를 만나 두 딸을 낳는 또 다른 삶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어머니의 글은 조금씩 변주되며 여러 권의 공책을 거쳐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그 글의 형식이었다. 어머니 특유의 낭만성과 비장미가 느껴지는 문체는 여전했는데, 그 글들에는 시제가 섞여서 사용되고 있었다.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 미래 시제가 혼재되어 있었다. 할 것이다, 했다, 한다, 될 것이다, 되었다, 된다…… 어머니의 글은 마치 다중 우주를 그리는 미래의 일기 같았는데, 그것은 가능성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내가 쓰는(/쓰려는) 글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글은 어머니의 실패한 유크로니아였다. 낙관의 실패가 아니라, 구성의 실패. 어머니는 가능한 삶을 계속해서 써나갔지만 자유롭게 펼쳐진 자신만의 노트에서도 과거 속의 미래를 온전하게 재구성하는 데 끊임없이 실패하고 있었다. (34~35쪽)
화자에 따르자면, 낙천적인 사람과 낙관적인 사람은 다르다. “낙천적인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모두 괜찮다’라고 말함으로써 긍정성을 강화하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모두 괜찮을 거야’라고 말함으로써 그렇게 한다.”(24쪽) 낙천적인 사람이 현재를 긍정한다면, 낙관적인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긍정을 통해 현실의 부정과 모멸, 쓸쓸함과 고통을 견디는 것이다. 공책에 적힌 어머니의 글이 “내가 쓰는(/쓰려는) 글과 다르지 않았다”라는 화자의 설명이 알려주는 것처럼 어머니가 쓰고 있는 것은 소설이다. 소설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가능성”(35쪽)이다. 자기가 살아온 삶과 인식하는 자신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다는 극심한 괴리감, 목소리를 잃은 “침묵”의 상태에서도 어머니는 “낙관”의 가능성을 놓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낙관”이 고통스런 삶에서 간신히 견인한 정신의 방어기제이지 이것이 항구적인 정서적 안정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낙관주의자의 고독 속에서 미래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더 근사하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영수의 소설이 알려주는 것처럼.
4. “그게 더 사랑 같다”_임솔아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
임솔아가 2024년 발표한 단편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특징은 장르적으로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흥미롭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206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풍경을 SF의 문법을 따라 서술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나’의 눈에만 보이는 ‘귀신’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묘사하는 오컬트 소설의 문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화자인 ‘나’로 그녀는 올해 81세의 노인이다. 소설은 시간적인 이질감을 느낄 수 없는 ‘나’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로 시작된다. 하지만 ‘나’의 외출이 시작되면 그녀가 걷는 공간이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곳과는 다르다는 것을 독자는 조금씩 읽어 나가게 된다. “아케이드를 따라 걸었다. 기둥 사이사이 설치된 유리벽 너머가 보였다. 우유처럼 뽀얗게 안개가 껴 있었다. 육십 년 전에도 이 거리를 걸었다. 내가 이 동네에 처음 이사 온 스물한 살 때부터였을 것이다.”10) 이 단편에 담긴 시간의 배경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2060년대 후반이다.11) 단편의 전반부는 과학적 사실에 맞춰 엄밀하게 서사가 전개되는 하드 SF가 아닌 사회적 배경이나 인간의 감정 같은 요소를 강조하는 소프트 SF이기에 어떠한 미래의 사건들이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풍경과 감정적으로 소통하지 않는 인간의 관계를 형성하였는지 정확하게 짐작하긴 어렵다. 다만, 2026년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예감하고 있는 인류의 미래, 어렵지 않게 예시하자면, 고령화와 출산율 감소에 따른 자연스러운 인구의 소멸, 점점 심각해지는 환경오염,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 이변, 인간의 탐욕에 기반한 전쟁과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 존속과 팽창 등이 초래할 예정된 파국이 사회적 해결 없이 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미래의 음울한 풍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나’와 연인인 윤미가 “스물한 살 때”(12쪽) 이사와 평생을 살았던 동네의 모습이다. 그곳은 처음에는 다세대주택과 빌라, 골목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상점들,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대화가 넘쳐나던 곳이었으나 이내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 단지가 되었고, 다음에는 “대학의 부속병원”이 아파트를 철거하고 들어왔으며, 지금은 ‘나’와 같은 노인들이 거주하는 “실버 센터”(13쪽)가 되었다. 이 모든 변화는 급격하게 이루어졌고, 그때마다 ‘나’는 윤미와의 아련한 추억을 통해 이 장소의 의미를 상기해 왔을 뿐 그곳은 과거의 모습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삭막한 주거지일 뿐이다. “골목은 걸어 다닐 수 있는 장소가 더 이상 아니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유해할 뿐인, 금지된 저편의 장소로 전락했다.”(13쪽)
‘나’가 거주하고 있는 도시의 잿빛 풍경 못지않게 소설 속 미래의 우울함을 잘 보여주는 것은 ‘나’가 강연자로 참여하고 있는 “아카이빙 프로젝트: 사랑”(14쪽)이다. ‘나’는 “구술 생애사 기록가들(14쪽)”에게 자신이 평생 쓴 일기장에서 세밀하게 고른 장면을 읽어주며 지금은 사라진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사랑 역시도 희생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거부감을 유발하는 기이한 정념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사랑을 지나간 시대의 낙후된 광기 정도로 여긴 지는 오래되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사랑하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옛날 노래의 가사에서만 들어보았을 뿐 직접 사용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사모한다’라는 말처럼,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애인’ 같은 유의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대가족이 붕괴해가던 시대에 ‘어버이날’이 제정되었듯, 사랑이 인간관계에서 소멸하기 시작하던 즈음 ‘사랑의 날’이 제정되었다. 지난 시대의 사랑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해두려는 움직임이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했다. (20쪽)
이 소설에서 어떠한 연유로 미래의 인간들이 ‘사랑’의 감정과 의미를 상실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가 살고 있던 동네가 대단위 주거 지역에서 병원으로, 그리고는 서서히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스모그로 뒤덮인 장소로 변한 것처럼 피할 수 없었던 사회적 결과로 묘사된다. 생존한 다수의 노인 중 ‘나’가 강연자로 선정된 것은 “결혼과 출산을 전폭적으로 권장하던 시대”(20쪽)에 “권장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동성 간의 사랑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설명에 따르자면, ‘나’와 윤미는 “열여섯”에 처음 만났고 평생을 연인으로 지냈으나, 사람들은 그들을 “그저 룸메이트 사이”(21쪽)로 바라보았다. 동성혼이 합법화된 것은 윤미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윤미와 내가 사회로부터 부부로 인정받은 것은 우리의 오십여 년 중에 고작 일 년이었다.”(21쪽) ‘나’의 말처럼, 두 사람은 평생 사랑하였고, 그 감정을 통해 차별과 오해의 시간을 견뎌올 수 있었던 것인데, 그들은 사람들에 의해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단순한 “룸메이트” 관계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우리를 지켜온 것이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줄곧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과도 같은 피로 속에 살았다. 피로가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을 한 채 표면을 차지한 때도 많았다. 우리는 우리의 피로를 우리의 사랑만큼 사랑했다.”(21쪽)
여기서 소설의 제목인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이 무엇인지 작가는 알려준다. 그것은 “피로”이며, ‘나’와 윤미가 함께 “사랑을 찾아 헤매”였던 오랜 세월이다. “피로”라는 단어에서 지치고 고통스러운 감각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을 ‘나’와 윤미가 보낸 시간에 대한 총체적 부정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고통과 피로, 고독이 삶의 예외적인 순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전체를 가리키는 진실한 단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행복, 사랑, 기쁨은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감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생의 고통을 망각하기 위해 사용하는 진통제와 같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살아가는 것은 달콤하지 않다. “피로”는 아케이드 밖으로 나간 ‘나’가 바라보는 스모그가 자욱하고 이끼가 낀 풍경과 다르지 않다. 가득한 스모그와 이끼를 헤치고 간 곳에 윤미가 원하던 “벚꽃잎”(23쪽)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던 것처럼, “피로”의 얼굴에, 그 내면에 우리가 살아낸 인생이,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는, 영화로 치면 멋진 점프 컷 같은 장면 전환을 통해 진행된다. ‘나’는 자신의 강연이 구술 생애사 기록가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귀신하고 얘기하는 게 낫겠다”(24쪽)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나’의 일상이 펼쳐지고, 자연스럽게 그 공간으로 “귀신”이 들어온다. ‘나’가 묘사하는 귀신은 영화나 드라마에 재현되는 것처럼 구체적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뚜렷하기보다는 흐릿하며, 성별도 판명이 쉽지 않고, 크기나 모습도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나는 그를 밤에만 나타나는 반려 식물 정도로 받아들였다.”(33쪽) ‘나’는 특별히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것이 오랜 루틴이라도 되는 듯 귀신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처음 귀신을 만난 것은 윤미와 함께 고시원에서 살 때였다. ‘나’는 처음엔 꿈이라 생각했지만,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귀신의 서늘함은 그것이 실재하고 있다는 감각을 알려주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특별한 위해를 가하지 않기에 ‘나’는 귀신과 함께 고시원에 거주했던 것이다. 고시원에서 이사하며 작별을 고했던 귀신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은 윤미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예전처럼 다시 귀신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귀신의 등장은 사랑의 감정과 가치를 잃어버린 인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인류의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현재 인간의 예상 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귀신의 존재도 다양한 서사와 일상의 상상 속에 담겨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스모그와 유리벽으로 묘사되는 미래의 모습과 형체도 성별도 흐릿한 귀신의 존재가 이 소설에서 상호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는 과학적인 계산에서 출발한 예상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나 모닥불에 둘러앉아 나누는 이야기에서 기원한 상상임에도 이 둘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질적인 두 가지 소재는 윤미를 추억하며 살아가는 ‘나’의 쓸쓸한 일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외출을 준비하던 ‘나’가 바지 밑단에 걸린 윤미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섬세한 손길로 머리카락의 추억을 보관하는 “트링킷 박스”(11쪽)로 옮기다가 잃어버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예전보다 둔감해진 손가락의 감각을 되살리며, 바닥을 더듬는 세밀한 묘사는 윤미에 대한 그리움의 깊이를 알려주는 동시에 홀로 남은 ‘나’의 일상이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이런 일마저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고독의 상태란 것을 알려준다. 소설의 후반부는 “실버 센터”에서 강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입었던 옷을 정리하고, 차를 마시고,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목욕을 한 후 ‘나’는 귀신이 편하게 들어와 있을 수 있게 “집안의 불을” 끄고 “현관의 중문”(25쪽)을 여는, 느리고 긴 묘사로 시작된다. ‘나’와 밤의 일상을 함께하는 귀신의 모습이 두렵다기보다 다정하고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삶이 귀신마저 없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적막하고 쓸쓸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모든 구절에서 독자가 읽어낼 수 있는 고독의 기원은 ‘나’가 남들과는 다르게 귀신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나’와 윤미가 권장하지 않는 동성 간의 사랑을 했다는 것, 이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욕망하지 않”(37쪽)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포기한 욕망들이 포기한 이후에도 계속 우리 앞에 나타났지만 요일에 맞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듯 우리는 버린 것들을 또 버리기 위해 함께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서로를 돌봤다.”(37쪽) 그들은 사랑을 위해 단둘이 살아가는 가난한 삶을 선택하였다기보다는 단둘이 살아가지 않는다면 지켜낼 수 없는 쓸쓸한 사랑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제는 홀로 남아 하루의 절반은 이 세상에 없는 연인을 추억하고, 나머지 하루의 절반은 귀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이 절대적인 고독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임솔아는 이를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을 한 “피로”라고 부르고 있다. 열일곱 살의 윤미의 말을 빌려오자면, “그게 더 사랑 같다.”(16쪽)
1) 스즈키 유이,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이지수 옮김, 리프, 2025, 97쪽.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1』, 이인웅 옮김, 문학동네, 2009, 100쪽. 동일한 책에서의 인용은 간략히 권수와 쪽수만을 병기하겠다.
3) 조혜선 기자, 「세계서 가장 오래 산 122세 할머니, 뜻밖의 장수 비결」, 『동아일보』, 2023.02.28.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230228/118107601/2)
4) 『파우스트』의 다른 번역본에서 이 부분은 “당신의 몸과 마음을/아주 제한된 범위 속에 보존하시고”로 번역되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정서웅 옮김, 민음사, 1997, 112쪽.
5) 오리스트 레이넘, 「내밀성의 은신처」, 『사생활의 역사 3』, 필립 아리에스·조르주 뒤비 책임 편집, 이영림 옮김, 새물결, 2002, 279~280쪽.
6) 장 자크 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김중현 옮김, 한길사, 23쪽; 31쪽. 같은 책에서의 인용은 쪽수만을 병기하겠음.
7) 고독과 풍경의 발견에 대해서는 장 스트로뱅스키,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이충훈 옮김, 2012) 「제3장」에 잘 정리되어 있다. 또한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민음사, 1997)의 1장과 2장인 「풍경의 발견」, 「내면의 발견」도 유익하다.
8) 게오르그 짐멜, 「대도시와 정신적 삶」,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김덕영·윤미애 옮김, 새물결, 2005, 41쪽.
9) 정영수, 「미래의 조각」, 『2024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 미래의 조각 외』, 현대문학, 2023, 21~22쪽. 앞으로 이 책에서의 인용은 간략하게 쪽수만을 표기하겠다.
10) 임솔아,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 『2026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 외』, 현대문학, 2025, 12쪽. 앞으로 이 책에서의 인용은 간략하게 쪽수만을 표기하겠다.
11)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에 대한 산술은 소설 중반에 나오는 영화를 통해 추측하였다. ‘나’가 “열일곱 살 겨울”(14쪽)에 쓴 일기에는 윤미와 함께 본 영화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극장판에서는 연인이 이별을 하며 그나마 무난하게 끝나지만, 감독판에서는 주인공이 자살을 한다고 했다.”(16쪽)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는 그 영화를 당시 중국에서는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산당 정부의 방침에 따라 상영 금지했다는 사실과 불행을 자극적으로 전시한다는 이유로 평론가들로부터 받았던 혹평에 대해 언급했다.”(18쪽) 이러한 언급을 통해 추측하자면 이 영화는 2004년에 개봉한 <나비효과>로 이해된다. 미국에서 2004년 1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그해 11월 12일 한국에서 개봉하였고, 이미 미국에서는 극장판이 담긴 DVD가 11월에 발매된 상태였다. 2004년에 “열일곱 살”이라면 ‘나’는 1987년 생으로, 81세인 소설의 현재는 206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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