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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2)

  • 작성일 2026-07-01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2)


이은지



  1. 인간됨의 성찰에서 자동화된 소외로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인간됨을 기술 환경과의 연관 속에서 조정하며 견인해왔다. 타자기 이전에, 손글씨 이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도구이자 기술이었던 언어의 발생에서부터 그러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르더가 1772년 발표한 논문 <언어의 기원에 대하여>는 당대 철학계의 주류 담론이었던 언어의 신적 기원론과 동물적 기원론을 모두 부정하며 신과도 동물과도 무관한 인간 고유의 성질로부터 언어가 유래했음을 증명한다.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유전적으로 고정된 본능을 발현하며 살아가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그러한 본능이 ‘결핍’되어 있다. 그러나 본능이 결핍되어 있다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각인된 본능의 맹목적인 발현으로 벌집을 짓는 벌이나 거미줄을 치는 거미와 달리 인간은 “동물의 기술적인 능력에 뒤처져” 있기에 오히려 “자신을 비추어 볼 영역을 찾을 수 있고, 자신 속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게 된다.”1)

  종의 본능에 따른 반응이 아닌, 각각의 고유한 개체가 세계에 대해 갖는 느낌을 표현하고 또 표상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언어를 탄생시킨다. 자기 외부의 대상을 식별하고, 사물과 사물을 구분 짓고, 이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여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세계와 사물에 대한 자아의 경계를 확정하고 그러한 자아로 이루어진 타자와의 집단적, 사회적 교류를 형성하며 그로부터 습득한 것들을 세대를 이어 전수함으로써 인간은 더욱 인간이 된다. 언어를 매개로 하여 발현되는 이러한 인간됨의 사슬은 동물적 본능과 달리 고정되지 않는다. “구분을 많이 짓고 그것들을 서로 정돈할수록 그의 언어는 더 정돈”2)되며, “언어의 지속적인 형성” 속에서 “삶의 모든 상태는 성찰을 통해 발전적인 통일체가 된다.”3) 즉 인간에 의해 발명된 언어가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을 거듭 새롭게 발전시키며 인간의 일부이자 핵심적인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할수록 인간의 인간됨이 발전하는 한편, 언어 또한 고도화된다. “모든 기술은 생성에 관련”4)된다고 했을 때 이는 언제나 기술 자신에도 해당한다. 기술은 자신이 투여된 대상 혹은 영역에서의 생성과 더불어 기술 자신에서의 생성 또한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무한히 순환하며 어딘가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기술과 그 기술을 적용시키는 인간 사이에는 하나의 복잡한 피드백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의식은 변화된 기술을 요청하고, 변화된 기술은 그 의식을 변화시킨다.”5) 매체이론가 플루서는 이러한 기술과 인간 간의 순환 관계에 입각하여 인간의 의사소통 기술이 추상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코드화되어 온 과정을 추적하며 이와 연동된 인간 의식의 변화에 주목하였다. 사물을 구분 짓고 성찰하는 최초의 기술로서의 언어는 인간이 세계를 기호로 거듭 추상화하여 파악하는 과정에 따라 변화를 반복하였다. 현실 세계가 벽화의 이미지로, 이미지가 종이 위의 텍스트로, 텍스트가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기술이미지로 코드화됨에 따라 인간의 의식 또한 그에 맞춰 마술적 의식(이미지)에서 역사적 의식(텍스트)으로, 역사적 의식에서 탈역사적 의식(기술이미지)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종이 위의 선형적 글쓰기가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적, 비판적 인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유를 정리하고 전달하기 위해 “행의 형태로 기호들을 나란히 배열”하면서 이것이 다시금 인간의 의식을 논리적으로 질서 지었기 때문이다. “점점 더 길게 행의 형태로 문자를 쓰면 쓸수록, 인간은 더 역사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6) 이러한 사유와 인식을 강화하는, 글쓰기에 적용되는 규칙들은 기계화, 자동화하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단어와 문장, 단락으로 이어지는 기호들은 “정서법에 맞게 정확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인쇄술과 타자기, 워드프로세서와 같은 기계 기술의 도입은 이러한 기호의 질서를 ‘규격화’하였다. 이러한 기술이 인간과 더불어 글을 쓰는 공동 주체를 이루게 되었다고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플루서는 기호를 규칙에 맞춰 질서 있게 배열하는 작업으로서의 글쓰기를 필연적으로 “기계들에게 위임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사유하며 “문자의 질서화를 자동적으로 처리하면서 정서법에 맞게 글을 쓰는 기계, 즉 인공지능”7)에 대해서도 예견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역사의식을 촉발하는 선형적 글쓰기를 인간보다 더욱 빠르게 자동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의식을 훨씬 더 능가하는 역사의식을 지닐 것”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행했던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더 신속하게 그리고 더 변화무쌍하게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보다 역사를 더 잘 만드는 이 “자동적인 기계들”에 역사를 위임하고 “다른 것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8)

  이러한 플루서의 전망은 인간이 역사의 책무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읽히는 동시에, 그러한 역사를 견인해왔던 주체적 의식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인간의 행위를 자동으로, 나아가 전산으로 처리하는 기계의 등장은 기술과 인간 사이의 전통적인 피드백 관계, 즉 인간이 기술을 변화시키고 변화한 기술이 다시 인간을 성찰하게 만들던 순환 구도를 기묘하게 역전시킨다. 기계를 조작하는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내린다고 착각하지만, 그의 모든 행위는 기계의 프로그램이 미리 입력해 둔 유한한 가능성의 범주 안에서 수동적으로 유희할 뿐이다. 이는 하이데거가 예견했던 ‘닦달(Ge-stell)’의 가장 극단적인 현실태이기도 하다. 닦달을 통해 존재들이 인간의 도구적 목적을 위한 한낱 부품으로 전락하듯이, 플루서의 매체적 전망 속에서 실제 경험세계의 존재들은 프로그램의 가상 코드로 납작하게 가공된다. 본능의 결핍이라는 인간의 본질로부터 출현하여 인간의 인간됨을 고도화해온 기술의 본래적 특성은, 기계의 자동화 이후로는 인간을 배제한 채 기술 자신의 본질 형성에만 반복적으로 몰두하며 인간 소외의 자동화를 완성한다. 그러한 기술을 통한 창작은 기계 장치가 허용하는 코드의 계산 가능성 안에서만 작동하는, 무작위적이고 무한정한 유희에 다름 아니게 된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언어유희라는 의미에서 두 가지 종류의 문예창작을 기대해 볼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말하는 인공지능들인데, 그것은 프로그램에 의거해서 어떤 중단되지 않는 흐름 속에서 항상 새로운 시들을 끊임없이 낭독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인공적 음유시인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보제공장치들이 어떤 순열게임의 도움으로 알파벳적으로 또는 다른 방식으로 코드화된 시들을 숨 막힐 듯한 속도로 영상화면을 통해 우리 앞에 번득이게 할 것인데, 다시 말해서 일종의 인공적인 엘리엇이나 릴케 같은 장치들이다.9)



  2. 기술의 열림과 유기체의 닫힘


  그러나 우리보다 역사를 더 잘 만드는 인공지능에 대한 플루서의 낙관은 다소 기이하게 여겨진다. 역사란 스스로 체험한 외부 세계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금 세계에 대한 전망을 조정하는 ‘의식’의 행위를 반드시 전제로 한다. 인공지능이 “문자의 질서화를 자동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그러한 의식 행위의 결과를 입력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결코 인공지능 스스로 세계를 대면하여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아가 인공지능은 출력된 결과물을 자기 자신의 의식을 구성하는 준거로 삼지도 않는다. 즉 자신과 외부를 구별한 뒤 외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과 외부의 관계를 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 대한 경계를 끊임없이 형성하는 ‘자기의식’이 인공지능에는 부재한다. 따라서 입력된 데이터를 자동으로 처리하는 체계가 형성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자신을 위해’ 선별적으로 즉 주체적으로 작동시키지는 않는다. 설령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의식에 준하는 무엇이 주어지더라도, 인공지능은 인간의 역사의식을 대신 처리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전혀 무관한 자기만의 역사의식을 독자적으로 전개할 것이다.

  그러한 의식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인공지능과 같은 기계가 외부의 데이터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무방비하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으로 누른 자판 위의 기호가 종이에 찍히기를 거부하는 타자기를 상상할 수 없다. 좌회전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우회전하는 자동차도, 명령어에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인공지능도 상상하기 어렵다. 인간도 기술도 서로를 매개로 더욱 변화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인간의 의식이 선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의식이란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의식이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타자를, 사물을 관찰한 바를 바탕으로 그것들에 대해 나는 무엇이고 어떠한가를 자각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주변을 관찰하고 자신을 규정짓는 이러한 의식을 확장시켜 언어라는 최초의 기술을 탄생시켰다. 마뚜라나에 따르면 “‘관찰하기’란, 자기가 무언가를 관찰하는 데 관련되어 있다는 자각과 함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인간적 작동”이다. 가령 새를 노려보고 있는 고양이는 새를 ‘관찰’하고 있지 않다. “고양이는 단지 새를 주시할 뿐”이고 따라서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없으며, 또는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고 적절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 그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지는 못”10)한다.

  외부의 입력에 대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생물이나 맹목적으로 열려 있는 기계와 달리 오직 인간만이 자신에 대한 성찰적 자각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하나의 ‘닫힌’ 체계로 구성해 나간다. 이처럼 스스로 생성하는 하나의 체계가 작동적으로 폐쇄되어 있다는 점은 인지생물학자 마뚜라나가 개념화한 오토포이에시스 즉 자기생성의 중요한 원칙이기도 하다. 인간은 세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감각기관의 폐쇄된 체계에 맞게 변형하여 받아들인다. 음식물은 곧장 세포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화기관의 정해진 공정을 거쳐 세포에 도달하기 적합한 분자로 가공된다. 말하는 사람의 메시지는 듣는 사람의 뇌로 곧장 직행하지 않는다. 메시지는 듣는 사람의 인지영역 내에서 폐쇄적으로 처리됨으로써 비로소 정보로 가공된다.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 (…) 안의 어떠한 변화도 단지 유발될 뿐이지, 전적으로 외부 세계의 특질들이나 성질들에 의해 결정되거나 확정되지 않”11)는다. 구조를 자극하는 외부의 충격에 대해 체계는 동요12)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변화를 유도할 수는 있지만, 결코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허물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작가의 은둔과 고립이 문학 제작이라는 구조적으로 닫힌 ‘체계’를 형성하기 위한 것임을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외부의 충격에 직면하여 자신의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전적으로 체계 즉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나아가 인간은 자신의 체계 내 구조를 준거로 삼아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에 고유한 ‘세계’를 형성한다. 인식이란 “한 생물이 특정 환경에서 자신의 세계를 산출함으로써 그 환경에서 생존을 지속케 해주는 행위”13)이기 때문이다. 자신에 고유한 세계를 산출하는 동시에 이 세계와의 관련 속에 자신을 계속해서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율적으로 존재한다. 인간과 같은 자기생성체계는 “자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자신을 주위 환경과 다른 것으로서 구성”14)한다. 이는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푸코의 자기 수련을 통한 자기 제작, 즉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것’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어 온 주체를 자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편하고, 이 변화된 주체가 자기 바깥의 모든 것을 역으로 변화시키는 실천에까지 도달하게”15) 하는 것에 상응한다. 또한 헤르더가 인간을 ‘성찰을 통한 발전적 통일체’로 규정한 것과도 맞닿아 있다.

  이처럼 자기생성, 자기제작이란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폐쇄적으로 작동하는 자신에 대한 인식을 통해 외부 환경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의 연쇄를 의미한다. 체계 외부의 환경은 결코 체계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유발하지는 못하지만,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체계는 환경에 대해 어떻게 적응할지를 결정한다.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한 체계는 다시금 환경의 변화를 유발하고, 이 과정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가령 지구상에 생명이 처음 생겼을 당시 세포들의 지속적인 산소 배출은 지구의 대기 환경을 산소 중심으로 재편하였고, 이러한 대기 환경은 다시금 산소를 통해 생존하는 생물 종을 출현시켰다.16) 체계와 환경의 관계를 마뚜라나는 발과 구두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한다. 새로 산 구두를 신기 시작한 뒤 시간이 흐르고 나면 발과 구두는 결코 “그 이전과 동일하지 않”게 된다. 구두와 발은 결코 뒤섞이지는 않고 “여전히 분리된 채로 그리고 폐쇄적인 존재들로서 존재하고 있”지만, 구두는 발에 훨씬 더 편안해진다. 이는 발과 구두가 “조형적이고 가변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상호작용 속에 양자 모두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그 체계들의 조직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호간의 구조적 변화들을 유발”17)한다.

  마뚜라나가 ‘구조접속’으로 표현하는 이러한 변화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언어를 사용하든, 타자기를 사용하든, 인공지능을 사용하든, 스스로를 준거로 삼아 작동하는 닫힌 체계인 인간은 자신에 대해 열린 체계로 존재하는 기술과 접속한다. 인간과 어떻게 접속하느냐에 따라 기술 또한 변화하고, 이 변화한 기술과의 접속을 통해 인간은 이에 대해 어떻게 변화할지를 다시금 조정한다. 따라서 플루서의 전망과 달리 인간은 자신의 의식이 어디로 나아갈지 기술에 전적으로 위임할 수 없다. 기술 또한 인간의 의식과 접속하지 않는 한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해온 환경 속에서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기술, 즉 기계가 작동하는 영역은 기계의 조직 내부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그것을 사용하는 환경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기계의 용도란 기계 그 자체보다 더 넓은 맥락에서 우리가 기계에 관해 기술[description]하는 것”18)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신을 변화 속에 보존하게 하는 환경으로 작용하는 기술과의 연관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듯이, 기술(기계) 또한 자신을 변화 속에 보존하게 하는 환경으로 작용하는 인간과의 연관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술이라는 체계가 인간에 대해 환경으로, 인간이라는 체계가 기술에 대해 환경으로 작용한다는 공식을 이끌어낼 수 있다. 또한 체계는 반드시 환경과의 연관 속에서만 그 구조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교차하는 환경으로부터 공진화하는 체계들


  마뚜라나가 생물학을 중심으로 자기생성체계를 개념화하였다면,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이를 사회 전반에 유효한 개념으로 확장한다. 자기생성을 통해 고도로 복잡화되고 분화된 사회의 체계를 설명하기 위해 루만이 주목한 것은 환경에 대한 체계의 ‘복잡성 감축’이다. 환경은 체계보다 언제나 더 복잡하다. 가령 지구의 대기에는 산소뿐만 아니라 온갖 다양한 원소들이 혼합되어 있다. 생물은 이 모든 원소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그중 자신의 유기구조에 중요한 산소만을 받아들이며, 이는 산소를 선별하는 호흡체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언어는 세계의 모든 소리를 포괄하는 대신 소수의 철자를 통해 선별하여 표상한다. 이처럼 그 자체로는 복잡한 환경을 “배제된 것과 포섭된 것으로 분리”함으로써 체계는 환경과의 연관을 형성하며, “환경으로부터의 교란과 장애를 정보로 이해하고 그에 상응해 구조를 적응시키거나 특정한 작동을 투입할 수 있”19)다.

  복잡한 환경으로부터 체계가 자신의 구조에 유용하고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선별적으로 받아들인 것들은 체계 내에서 유효한 ‘의미’를 갖는다. 가령 인간이 문학 작품을 제작할 때, 언어의 소통적 측면보다는 표상적 측면과 유희적 측면이 선별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타자기가 작동할 때, 인간의 감정이나 고통과 같은 것은 배제되고 오직 자판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행위만이 의미를 갖는다.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세계와 사유는 알고리즘을 작동시키기 위한 데이터 원료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의미는 “가능한 것의 총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성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것으로, 즉 중요한 것의 선별로 재구성함으로써 체계형성에 적합하게”20) 한다. 인간이 기술을 자신에게 유용한 방향으로 사용될 가능성으로 선별하여 받아들임으로써 그로부터 의미를 생성하고 인간이라는 체계의 경계를 확정하듯이, 기술 또한 자신이 작동하기에 유용한 방향으로 기술과 연동된 인간의 기능만을 선별하여 받아들임으로써 기술 고유의 체계를 유지한다. 따라서 “체계의 경계는 의미의 경계”21)와 같다.

  이는 마뚜라나가 설명하는 구조접속과 흡사하지만, 구조접속에서 체계와 환경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고 우연적이다. 반면 루만의 설명에서 체계와 환경은 서로가 서로에게 체계인 동시에 환경으로 맞물려 있으며, 상대의 복잡성을 선별하여 감축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서로의 체계를 고도화하는 필연적 관계로 나아간다. 즉 기술과 인간은 서로를 환경으로 삼아 소통해가는 과정에서 “우연적인 것에 대한 우연적이지 않은 관계화22)를 형성한다. 가령 글쓰기의 선형적 몸짓은 얼마든지 “다른 식의 구조를 가질 수 있었”을 “명백한 ‘우발적인’ 선형성, 역사적 우연의 산물”23)이었으나 우리의 존재 양식을 결정짓는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이는 체계가 환경을 자신과의 관계에 유효한 ‘구체적인’ 환경으로 축소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 환경 또한 자신을 축소한 체계를 자신에게 맞는 환경으로 축소하는 하나의 체계로 작동함으로써 체계와 환경, 환경과 체계 간의 상호 조정이 발생한다.

  그러나 환경의 복잡성을 감축하고 의미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우연을 필연으로 조정하는 주도권은 인간에게 있다. 기술 체계, 즉 기계는 환경의 복잡성을 자신의 체계에 부합하는 의미 즉 코드로 환원할 수는 있지만, 우연으로 가득한 환경을 스스로 인식하고 통제하지는 못한다. 언어는 복잡한 세계를 기호로 환원하였지만 자신이 언제 어떻게 왜 ‘바로 그렇게’ 발화되거나 작성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타자기와 워드프로세서는 글쓰기를 자신의 체계에 맞게 코드화하였지만 방금 작성된 문장에 어떤 문장이 필연적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인공지능은 그저 입력된 데이터를 확률적으로 조합하여 또 다른 데이터를 출력할 뿐이다. 기계가 아무리 견고한 규격화와 자동화를 달성할지라도, 그것이 맹목적으로 산출하는 결과물을 인간이 자신의 내적 준거인 의식에 따라 선별적으로 의미화하여 필연성을 생성해내지 않는 한, 기계는 결코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도, 자신에 고유한 세계를 창출할 수도 없다.

  여기서 인공지능에 의한 문예창작에 대한 플루서의 언급을 다시 살펴보자. 그가 예견한 미래의 문예창작이란 “프로그램에 의거해서 어떤 중단되지 않는 흐름 속에서 항상 새로운 시들을 끊임없이 낭독”하거나 “코드화된 시들을 숨 막힐 듯한 속도로 영상화면을 통해 우리 앞에 번득이게” 하는 것이었다. 이 “인공적 음유시인”에게는 새로운 시를 낭독하게 하도록 구성된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고, 우리 앞에 끝없이 번득이는 시를 코드화하는 “정보제공장치”가 있어야 한다. 왜 그것이 있어야 하는지, 나아가 왜 그것을 통해 시를 직조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식 없이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주체적 의식 없이 자동으로 제작된 시들, 혹은 그러한 시들을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인간이 인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고 또 변용할지 성찰하는 끝없는 조정과 재조정의 과정을 반복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태생적으로 인간의 의식은 기술이라는 환경이 제공하는 압도적인 복잡성이 없다면 더 높은 차원의 사유로 나아갈 수 없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고대 그리스의 어원에 근거하여 기술의 본질이 “존재의 참된 모습을 밖으로 끌어내”24)는 데 있다고 한 것을 떠올려볼 수 있다. 반대로 기술의 작동 또한 인간이라는 환경이 부여하는 필연적 의미화가 없다면 공허한 소음에 불과하다. 인간과 기술은 각자의 체계를 간직한 채 서로에게 복잡성을 공급하는 상호작용의 ‘체계’를 구성하며, 이를 통해 함께 쇄신하며 나아가는 공진화의 과정을 형성한다. 체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환경으로 작용함으로써 서로를 매개로 자신을 갱신하며 구체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심포이에시스(Sympoiesis), ‘함께 생성하기’의 가능성으로 나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제작은 여전히 실천과 긴밀한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기술 자체는 외부에서 입력된 것을 자신의 체계 내적으로 환원한 결과물을 출력하는 데 머무르기에, 그 의도 및 과정과 무관하게 결과물을 갖기만 하면 되는 제작의 무목적성을 돌파하지 못한다. 반면 인간은 기술이 어떻게 하면 기술 본유의 모습에 맞게 작동할지 성찰하고, 이 성찰이 어떻게 인간 본유의 모습에 부합할지 다시금 성찰함으로써 “훌륭한 삶 일반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올바르게 숙고”25)하는 것을 실천한다. 여기서 실천의 영역을 가리키는 “훌륭한 삶 일반”이란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기술의 삶 또한 아우르는 것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적으로 분류했으나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았던 제작과 실천의 경계는 오늘날 인간과 기술의 경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술을 통한 제작이 기술에 대한 인간의 실천과 함께하는 상호 조정 속에서만 인간도, 기술도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연재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 1편.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1)

1)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언어의 기원에 대하여』, 조경식 옮김, 한길사, 2003, 45쪽.

2) 같은 책, 128쪽.

3) 같은 책, 163쪽.

4)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천병희 옮김, 숲, 2013, 226쪽.

5) 빌렘 플루서,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윤종석 옮김, 엑스북스, 2015, 37쪽.

6) 같은 책, 23쪽.

7) 같은 책, 20쪽.

8) 같은 책, 25쪽.

9) 같은 책, 127쪽. 강조는 필자.

10) 움베르또 마뚜라나(베른하르트 푀르크젠과의 대담), 『있음에서 함으로』,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06, 55쪽.

11) 같은 책, 98쪽.

12) 이를 마뚜라나는 ‘섭동(perturbation)’으로 표현한다.

13)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앎의 나무』, 최호영 옮김, 갈무리, 2013, 38쪽.

14) 같은 책, 58쪽.

15) 이은지,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문장웹진』 2026년 6월호.

16) 『앎의 나무』, 120쪽 참조.

17) 『있음에서 함으로』, 135쪽.

18)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 정현주 옮김, 갈무리, 2023, 195쪽.

19) 니클라스 루만, 『체계이론 입문』, 윤재왕 옮김, 새물결, 2014, 157쪽.

20)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체계이론』, 윤재왕 옮김, 새물결, 2022, 107쪽.

21) 같은 책, 157쪽.

22) 같은 책, 638쪽.

23) 빌렘 플루서, 『몸짓들: 현상학 시론』, 안규철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32쪽.

24)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문장웹진』 2026년 6월호.

25)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천병희 옮김, 숲, 2013,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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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

  • 이은지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1)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이은지 1. 프락시스로서의 포이에시스 대중에게 다소 신화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은둔과 고립은 창작을 위해 불가피한 존재 방식으로 여겨지곤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절연하고 뉴햄프셔의 시골에서 평생 은둔하다가 사망한 J. D. 샐린저는 은둔 기간 동안 단 한 편의 작품도 공개하지 않았다. 불교의 선(禪)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전쟁에 참전했을 때부터 “글쓰기와 명상이 동일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고립된 상황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명상으로서의 글쓰기”를 위해 대중과 유명세를 철저히 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필립 로스 또한 “매해 반 이상을 뉴욕에서 백 마일 떨어진, 숲이 우거진 농촌 지역”2)에서 보내며 철저히 고독 속에서 작업했다. 그에게 “문학적 소명에 따른 고립―단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방에 혼자 앉아 있는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고립―은 밖에 나가 야단법석 속에서 감각을 축적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다니는 것만큼이나 인생과 큰 관련이 있”3)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은둔 작가 마루야마 겐지 또한 23세의 나이에 화려하게 등단한 직후 도시와 문단을 등지고 시골에서 칩거하며 집필에만 전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며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4)고 일갈한다. 가히 고독 예찬이라고 할 만한 그의 ‘창작론’을 들여다보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몸 전체를 예민한 레이더로 만들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몸을 단련하는 나날을 거듭하다 보면”5)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원고지 앞에 앉게 된다는 진술이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소설에서 확실하게 멀어지기 위한 방법으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다”6)는 증언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자아를 안팎으로 일치시키는 데서 문장을 산출해내는 창작의 원리로 읽힌다. 극단적인 은둔과 고립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창작을 위해 일정량의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서 투여하는 모습은 여러 작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루 몇 시간, 하루 몇 장의 꾸준한 집필은 자기 안으로의 철저한 고립을 전제하며 이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스스로 변형하는 ‘자기 수행’과 같은 모습을 띨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lsq

  • 이은지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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