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을 위한 유희
- 작성일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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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을 위한 유희
—황유원론1)
오경진
그는 불안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을 사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밤의 해변에서
저기, 꿈(夢·몽)과 환상(幻·환)을 물거품(泡·포)과 그림자(影·영)로 새겨넣으려는 시인이 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파도에 떠밀리듯 들려온다. 잠깐 여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죽어도 된다
우린 그날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에 앉아 있다가
안전요원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 밤바다로 뛰어들었지
…
잠들면 안 돼! 우린 여기서 밤새 놀다 가야 하니까
어차피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그 역(逆)이 아니라
…
내가 더 이상 해변에서 잠들지 않으므로
간혹 해변이 내 곁으로 와
쓰러져 잠드는 밤이 있고
그런 밤이면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어둔 밤의 해변을 홀로 거닐기도 했다
젖은 모래 위에 如, 夢, 幻, 泡, 影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써보며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다는 말
또 그림자 같다는 말을 문신처럼 새겨넣었다
우리 조금만 더 죽자
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
하고 기도하던 밤이 있었다
「여몽환포영」 부분,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신”(文身)처럼 새겨넣은 그것은 “어둔 밤의 해변”의 “젖은 모래 위” 하나의 형상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에는 지워지고 사라질 글쓰기. 꿈이 그렇듯, 허깨비가 그렇듯, 물거품이 그렇듯, 그림자가 그렇듯. 어른거리다가 없어지는 것. ‘있음’으로 피어올랐다가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것. 설령 그것이 진짜 문신이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몸은 어차피 스러지는 것, 몰락하는 것, 죽는 것. “진짜 죽음”이 오면 그것 역시 꿈처럼 허깨비처럼 물거품처럼 잊힐 것이다. 그러면 시 쓰기는 다 무엇일까. 저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조차도 결국 망각의 무로 돌아갈 것인데, 그 게송으로 시를 지어봤자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삶은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을 거니는 것과 같고, 시 쓰기는 어차피 파도가 들이쳐 지워 없어질 모래 위에 “여몽환포영” 하고 한 자씩 새겨 넣어보는 일이다. 세계의 무상(無常) 속에 스러질 것,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사는 절대적인 무(無) 앞에 선 인간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불안을 사랑하는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불안을 사랑한다. 불안의 포로인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시를 짓는다. 문학을 한다. “불안은 가능성에 앞선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현실성이다.”2) 무(無)에서 시작되어 무(無)로 흩어질 세계의 운명 속에서도 시인은 당당히 힘주어 시구를 아로새긴다. 어쩌면 그 빛나는 일필휘지가 무와 무 사이에서 유(有)를 샘솟게 하는 힘이다. 무에서 무로의 이행을 과감히 중단시키는, 강렬한 자유의 정념(情念). 황유원은 시 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를 쓸 때면, 쓰는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사라진다. 통편집된 것처럼. 황홀히 타오르는 백열(白熱)과 함께 잠시 사라지는 머리.”(「황유원의 편지」 부분, 『일요일의 예술가』)
“시짓기는 낱말에 의한 존재의 수립이다.”3) 하이데거는 ‘시짓기’의 본질을 직관하고 있다. 시짓기는 결국 낱말을 가지고 하는 ‘놀음’이다. 그 유희 중에 인간은 세계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는다. ‘없음’에서 ‘없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강력한 ‘있음’의 흔적. 무는 불안을 낳고 불안은 창조가 된다. 동물은 불안을 느끼지 못한다. 오직 인간만이 불안해한다. 백지(白紙) 앞에 선 인간의 불안. 시를 지으며 인간은 불안에서 벗어나 문명으로 향한다. 예술만이 오로지 인간적인 것이다.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아니다. 오로지 예술만이 ‘없음’ 가운데 불안을 느끼는 인간의 전유물이며 시짓기는 예술의 궁극에 있는 하나의 형태이다.
참 좋다
주위를 둘러보면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 천지이지만
돌아갈 곳 아무 데도 없어도
집도 절도 없어도
돌아가고 나면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거
누구나 결국 돌아가고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거
어디로 돌아갔는진 모르겠지만
흔히들 하는 말처럼 그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
참 좋다
늦은 밤 장례식장 갔다 돌아와도 도무지
돌아온 것 같지 않은 기분인 그런 날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의 씨에서 싹이 돋아나
흙을 뚫고 청청하게 솟아오르는 상상에 젖다보면
어느새 세상모르고 다들
잠들어 있다는 거
「돌아가셨다는 말」 부분, 『하얀 사슴 연못』
“돌아가셨다”는 말. 그것은 우리가 ‘어딘가’에서 왔음을 상정한다. 그런데 그곳이 도대체 어디인가? 이 글이 거기에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뿐만 아니라 그 어떤 언어도 명쾌하고 시원하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황유원의 시는 다만, “참 좋다”고 한다. 살아서는 집도 절도 없는 이 역시 어딘가로 돌아간다. 터를 잃고 방황하는 이에게 머묾의 안식을 제공해 주는 것은 결국 말(言)이다.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의 씨”다. “오직 언어가 있는 곳에 세계가 존재한다”고 했던 하이데거는 언어가 오직 인간만의 “소유물”(Gut)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언어는 인간에게 “존재자의 열려있음(Offenheit) 한가운데에 설 가능성”을 승인해 준다.4) 언어가 있기에 인간은 자신의 잠재성을 현실화한다. 인간은 언어로써 ‘개방성’을 자신 안에 담는다. 이를 황유원의 시어에서 찾는다면 ‘씨’(種)다. ‘흙’에서 온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운명이다. 하지만 씨는 흙을 뚫고 올라와 “청청하게 솟아오른”다. ‘없음’과 ‘없음’ 사이의 세계에서 저의 존재를 주장한다. ‘없음’의 세계에서 언어는 ‘있었음’을 알리는 수단이다. 반복하지만, 이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거울과 변신
나는 오늘 세면대로 가서
승려가 세수하며 머리까지 씻듯
얼굴과 머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얼굴 밖을 씻은 김에
얼굴 안까지 씻어내는 기분으로
얼굴 전체를 씻어본다
물이 괸 양손을
얼굴에 좀 더 깊이 갖다 대며
차가운 물의 기운을
얼굴 저 깊은 안쪽까지
보내본다
…
다만 아침에 한차례 세수하러 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충분하다고
믿을 수 있다면
모든 게 충분해진 얼굴로
지금 문밖으로 걸어나가
거울 속 나를 보듯
너를 볼 수 있다면
「상선약수」 부분, 『하얀 사슴 연못』
“얼굴”과 “머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음’이다. 머리카락이 ‘없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얼굴과 머리 사이의 구분을 잊어버린다. “물”(水)의 속성도 그렇다. 물은 경계를 모른다. 인간이 애써 갈라놓은 것을 무너뜨린다. 문명이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인위적으로 물의 길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무한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물은 기어코 그 길을 무너뜨릴 것이다. 문명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질 것이지만, 그 위로 물은 도도하게 흐를 것이다. 황유원이 번역한 ‘물의 인류학’ 서문에서 앤 카슨은 이렇게 말한다. “물은 당신이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다.”5) 카슨이 쓴 이 글의 제목은 ‘잠수’다.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인 물에 우리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세수”는 그러한 물의 기운을 얼굴로 흠뻑 맞이하는 행위다. 찰나에서 무한을 느끼는 일이다. 하지만 이는 아직 시적 주체가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한차례 세수하러 가는 것만으로도/모든 게 충분하다고/믿을 수 있다면’에서 보듯 여전히 “믿어야” 하는 것이다. 물에 무한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여전히 그것을 붙잡을 순 없다. 여기서 시적 주체의 소망은 더욱 구체적으로 바뀐다. ‘모든 게 충분’해져서 “거울 속 나를 보듯” 너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거울”은 무엇인가. 나아가 “거울 속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거울은 어떤 현상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한 분장 도구가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냥 말하기 속에서 이미 말해진 것을 무한하게 만들고 소유할 수 없게 만들며 또한 텅 비게 만들기 위한 도구들이다.”6) 베르너 하마허의 말처럼 거울은 반복의 계기다. 거울을 보는 ‘나’는 거울 안에서 반복된다. 거울을 보는 이는 거울에서 무한을 본다. 거울의 표면은 무한으로 나아가는 경계(境界)다. 자신의 무한을 인식한 화자는 타자에게서도 그것을 보고 싶어 한다. 황유원의 시는 ‘나’에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이 다른 존재에게로 나아가고자 한다. ‘나’와 다른 존재 사이에 쳐진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꿈에 변신하는 자라를 보았다
육안으로 볼 때마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근처 사물들 중 하나로 변해
나는 그것이 자라인지 뻔한 사물들 중 하나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인해
그것이 본래 자라이며
어려서부터 완벽하게 익힌 은폐 엄폐술을 통해
끝없이 사물로 변해 가는 중이며
어딘가로 끝없이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변신한다는 건
본모습을 가린다는 것
…
자라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
넘어서지 못한 채
벽 앞에 선 채
사물처럼 굳어 가고 있다는 거
그런다고 감추고 싶은 과거가 숨겨질 줄 아는가
모든 착각이 일시적이길 바라며
영원한 이합집산에 그치고 마는가
내가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 자라는 계속 사물로 남을 것이다
그 상태를 죽을 때까지 유지할 것이다
「변신 자라」 부분, 『세상의 모든 최대화』
변신(變身)은 몸을 바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몸에 갇혀 하나의 생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존재가 되기를 욕망한다. 변신이 문학의 유구한 주제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꿈. 시적 주체는 여기서 ‘은폐’(隱蔽)의 욕구를 읽어낸다. 왜 다른 존재가 되려는가? “나”의 “본모습”을 가리기 위해서. “감추고 싶은 과거”를 숨기기 위해서다. “넘어서지 못”하고 “사물처럼” 굳어 가고 있는 “자라”에게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자라”와 세계 사이에 “사물”이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자라”는 자신을 넘어 세계의 무언가가 되고자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사물처럼” 굳어 가고 있다.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자라”는 절대로 무언가가 되지 못하고 사물로 남는다. “물속에서 나오려던 자라는 순간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느끼고는/낡은 질그릇 비슷한 무언가로 변해 다시 물속에 가라앉았고/내가 그걸 꺼내려고 손으로 집자/몇 조각 진흙으로 허물어지고 말았다”(「변신 자라」)
고정된 무언가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변신을 추구하는 것. 그러다가 “몇 조각 진흙”으로 허물어질지라도. 황유원의 시는 어느 하나의 상(相)에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되기’를 추구한다. “진흙”으로 허물어진 “자라”는 언젠가 “질그릇”이 되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또다시 무한히 근처의 사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로 돌아올 것이다. 넘어가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것. 그래서 변신은 영원한 꿈으로 남는다. 다와다 요코는 변신을 ‘공간’으로 사유했다. “시적인 변신은 죽음의 위험이 뒤따르는 동물로의 변신에 대한 동경과 인간으로의 변신에 대한 경악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입니다.”7) “동경”과 “경악” 사이에서 움직이는 변신의 꿈은 어느 하나에 멈추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갔다가 또다시 돌아오고, 다시 나아갈 채비를 한다.
유일한 통제자인 모든 존재 안의 아(我)는
한 가지 모습을 여러 가지로 만드는 것,
자신에 머무는 그것을 바라보는 현인들,
그들의 행복은 영원하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은 그렇지 않도다.
카타 우파니샤드
죽음, 황홀한 유한
사자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더 이상 포효가 없게 된다
죽은 사자 두개골로 물을 퍼마시면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갈증이 싹 가시겠지
다 쓰고 내던져진 사자 두개골은 햇빛 속에서 환히 빛나고
빗속에서도 환히 빛난다
사자 두개골로 물 마신 자는 이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고
그 발걸음에서는 사자 굴로 걸어들어가는 자의 결기가 느껴진다
바람에 휘날리는 그의 갈기는 쓸쓸하고
집에는 이제 그 말고는 아무도 없고
…
또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난 사자 굴에는
사자 꿈 대신
사자 한 마리 대신
사자 두개골만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된다
사자 두개골에 어둠이 한 바가지 고여
누구나 지나가다 들고 마실 수 있게 된다
「사자 두개골—HIC SVNT LEONES」 전문, 『초자연적 3D 프린팅』
백수(百獸)의 왕도 죽음 앞에서는 별수 없다. 늙음과 시간의 운명을 맞아들여야 한다. 생전 강렬하게 외쳤던 포효도 무로 흩어진다. “사자”의 “두개골”은 “물”과 “어둠”만이 깃드는 “바가지”가 된다. 한때 쟁쟁하던 “결기”도, “사자”의 얼굴 주위에서 그의 위엄을 높여주던 “갈기”도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꼭 살아서 위풍당당해야만 하는가. “두개골”로 남아 뭇 나그네의 “갈증”을 싹 가시게 해주는 물바가지가 되는 것 또한 좋지 아니한가. 살아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자기”를 비워낸 뒤 그 안에 “어둠”을 가득 품어내는 것. 이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무한을 꿈꿨던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죽음으로 스러진다. 영원을 사유할 수 있는 존재가 유한한 운명을 지녔다는 것은 몹시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초연할 수 있다. 어차피 사라져 없어질 것이니까. 한 사람이 태어나 시인으로 자라나서 시를 쓰고 시집을 출판한다는 것은 모두 우연의 소관이다. 대단히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더 가벼워져도 좋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 생을 자율적-원칙적으로 절대화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온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는 절대적 원칙에 비춰 보면 항상 과도하게 우연적이다.”8) 오도 마르크바르트의 말은 퍽 잔인하지만, 왜인지 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미 죽어서 백골이 된 “사자”의 ‘두개골’로 물을 마신다고 해서 ‘사자의 기운’ 같은 게 솟아나길 기대하는 건 어리석다. 그저 “갈증이 싹 가시”는 것, 그뿐이다. 삶은 우연한 일의 연속이고 죽음 역시 그중 하나다.
“사실에 있어, 아직 ‘최후의 심판’을 받지 못해 관곽 속에 누워 있는 ‘어떤’ 해골들은, 장차 ‘천사’들이 불어 제치는 나팔 소리에 잠을 깨일, 잠든 질료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들은 무(無) 속에, 죽음 속에 무상 속에, 침몰해버린 소멸이 아니고, 부활에의 희원으로 기다리고 누워 있는 암컷들임에 분명하다.” 죽음을 치열하게 사유했던 작가 박상륭은 여기에 이런 문장을 덧붙인다. “그러나 다시 살(肉)은 입지 마라, 그것은 고통인데, 살기뿐만이 아니라 죽기도 그렇다. 하지만 사번이로다.”9) 죽음은 해석에 따라서는 존재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오히려 ‘살’을 벗고 영원의 왕국으로,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일이 될 수 있다. 저 “사자 두개골”은 무엇인가. 그것 역시 종말의 천사를 기다리는 존재인가. 사번(事煩)한 육신을 마침내 벗고 천년왕국으로 들어 올려지길 학수고대하는, 여전히 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중생인가. 황유원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 다음 시를 보면, 시인은 유한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오히려 우리가 무한을 붙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쯧쯧쯧, 한심한 자여—
죽은 후의 일은 궁리치 말고
태어나기 전에 그대가 어디 있었는지나 궁리해 보거라
하고 피타고라스가 말했다
…
사는 일이 앞뒤가 막막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네 생은 앞뒤가 모두 뚫려 있구나
온몸에 힘을 주면 환생이고
온몸에 힘을 빼면 해탈이라는 생각에
잠시 힘을 빼고 한가로이 구름 위에 누워 있었는데
바야흐로 머릿속에 무한이 해방되었는데
깨고 나니 꿈이었고
어느새 다시 꿈속이었다
나는 끝없이 펼쳐진 긴 회랑을 끝도 없이 걷고 있었다
「무한대의 밤」 부분, 『초자연적 3D 프린팅』
음의 무한대에서
나는 마이너스의 음악 속에서
제로를 넘어 소멸을 넘어
마이너스 무한대로 쫄아드네
무한대로 낮은 곳까지 스며들어
질병처럼
고독사처럼
…
박쥐 똥 냄새로 뒤덮인 어두운 지하 동굴 아래로 추락하네
초고층 빌딩의 초고속 엘리베이터처럼!
「골 때리는 아름다움—문제의 핵심」 부분, 『나는 이 왕관이 마음에 드네』
이제, 사라질 시간이다. 한바탕 즐거운 유희도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처음에 아무것도 없었듯이 이제 ‘없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시인은 어깃장을 놓는다. “제로”, 영(零)을 넘어 그 밑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마이너스 무한대”로 나아간다. “마이너스 무한대”로 나아간 시는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까. 일상의 언어로 이것을 붙잡기는 참으로 난망하다. 끝없는 무한대를 향한 사유를 벼렸던 시인은 단 몇 문장으로 정반대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이를 통해 시인은 ‘추락’을 다시 무한한 ‘상승’의 이미지로 변주한다. “박쥐 똥 냄새로 뒤덮인 어두운 지하 동굴 아래”에는 다시 “초고층 빌딩”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없음’의 이면으로 영원히 가라앉다가 보면 무한대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들은 무한을 향한 문학의 욕망을 직시한 바 있다. “참된 뮤즈의 환락을 아는 자는 이 도정에서 결코 극점까지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혹은 거기에 도달했다고 착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흘러넘치는 만족감 자체에서 끝없이 새롭게 생겨나는 동경을 결코 잠재울 수 없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이 말은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존재로서 시인의 운명을 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불행한가? 이 무위(無爲)한 글쓰기를 통해 “시간의 사라짐”을 경험한 시인의 말을 상기해 보라. 슐레겔은 이런 말을 덧붙인다. “시문학의 세계는 … 생동하는 자연의 풍성함과 마찬가지로 헤아릴 수 없으며 무궁무진하다. … 우리 인간 모두에게 영원히 언제까지나 모든 활동과 모든 기쁨의 대상과 소재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단 하나의 신성함의 시, 즉 대지이며 우리 또한 그것의 일부이자 결실이다.”10)
‘자연’이나 ‘대지’ 같은 거창한 단어로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방 안에서 “대왕가오리” 한 마리 무심히 관찰하는 것. 그것이 황유원의 태도와 가깝다. “침실이 전부인 방/나는 가만히 앉아 네가 한 마리 대왕가오리로 변하는/모습을 본다/이윽고 넌 방 안을 우아하게 헤엄쳐 다니며 여기저기/자유로이 배설하고/벌거벗은 채 쓰러진 너의 모습은 마치 포획된 한 마리/대왕가오리”(「대왕가오리의 고독」 부분,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방”이라는 유한한 공간에 갇혔지만, 그곳에서도 “우아하게” 헤엄치는 “대왕가오리”는 곧 시인이다. 그는 “자유롭게 배설”하듯 시를 쓰고 “벌거벗은 채 쓰러진”다. 하지만 그거면 된 것이다. 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침실이 전부인 방/앞으로 두 번 다신 없을/너와/나만의/완벽한 밤바다”
1) 이 글은 황유원의 시를 비평한다. 황유원의 시집 다섯 권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현대문학), 『초자연적 3D 프린팅』(문학동네), 『하얀 사슴 연못』(창비)에 『일요일의 예술가』(난다)에 실린 모든 시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시를 인용할 땐 작품명과 작품이 수록된 시집만 병기하고 쪽수는 적지 않는다.
2) 쇠렌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임춘갑 역, 다산글방, 2007.
3) Heidegger, Martin: 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Verlag Vittorio Klostermann, 1971. 번역은 『횔덜린 시의 해명』(신상희 역, 아카넷)을 참고했으나 원문과 대조하여 문맥에 맞춰 수정했다.
4) Heidegger, 앞의 책.
5) 앤 카슨, 「물의 인류학」, 『플레인 워터』, 황유원 옮김, 난다, 2025.
6) 베르너 하마허, 『문헌학, 극소』, 조효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7) 다와다 요코, 『변신』, 정항균 역, 세창출판사, 2025.
8) 오도 마르크바르트, 『늙어감에 대하여』, 조창오 옮김, 그린비, 2018.
9)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문학과지성사, 1986.
10) 프리드리히 슐레겔, 『시문학에 관한 대화』, 이영기 옮김,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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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 오웅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1) 박상현 1. 사랑할 수밖에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너의 나쁜 무리」, p. 95-6) 그 순간 나는 여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너의 나쁜 무리」, p. 112) “그런 세계”에 대한 이 고집스런 애착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에겐 ‘보통의 삶’에 대한 많은 서사적 자원이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반대편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험생활에 열중하다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고, 스펙 쌓기와 연애를 잘 병행하다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연상되는 보통의 삶에 한편,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작 자신이 왜 그토록 이런 삶에 집착하는지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염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아주 사소한 시절」, p. 71)던 이들에게 이 애착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 번쯤 보통의 삶이 주는 환희를 만끽해보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너의 나쁜 무리」, p. 94) 한다는 사실 뿐이다. 보통의 삶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정말이지 막연한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자신의 손녀(‘나’)에게 은밀하고 사소한 연애사들을 훌훌 털어놓고,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것 같다며 손녀에게 개평을 준 남자친구(‘현구 아저씨’)의 뺨을 때리는 ‘여사’는 누가 보아도 보통의 인간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차라리 아주 난잡하고 무람없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방식”(p. 110)이라고 정당화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좀처럼 보통의 삶에 대한 애착을 거두질 못한다. “나(=여사)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 박상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
- 이은지
- 2026-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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