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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 작성일 2026-08-01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호주의(symbolism)와 마음을 처리하는 “두뇌의 구성과 작동만을 고려할 뿐 구체적 신체를 고려하지 않는”7) 연결주의(connectionism)를 거쳐,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지 작용은 “몸의 구조와 능력에 기반을 두고 세계에서 펼쳐지는 활동”이며 “몸의 구조와 기능과 독립적으로 이해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8)고 보는 체화주의(embodimentism)로 담론이 변화되어왔다. 세부 논의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체화주의는 “마음의 작동이 몸의 구조에 의해 (…) 결정”9)되며 “지각은 일종의 숙련된 몸 활동”10)으로서 두뇌의 신경 작용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본다.

체화주의는 마음의 작동을 몸과 분리하여 설명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을 다른 종의 신체나 기계에 이식하는 등 물질적 기반이 바뀌면 의식의 동일한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는 포스트휴머니즘 비평가인 캐서린 헤일스의 주된 입장이기도 하다. 기술 지배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사이버네틱스 이론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기계의 구성요소인 정보를 탈물질화, 탈신체화하여 순수한 가상의 신호로 간주하였고, 이는 기계가 인간의 지각과 의식을 대체할 수 있다는 논리로 확장되어왔다. 그러나 헤일스는 기계의 기호 체계와 연산 작용이 아무리 정교해지더라도 인간의 신체를 통해 체화되거나 구체적인 물질로서의 매체를 거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 “인간은 모든 신체화된 존재 중에서 으뜸이고, 이러한 신체화의 복잡성은 인간 의식이 사이버네틱스 기계에 신체화된 지능의 의식과는 무척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11) 이는 기계의 삶이 인간의 삶과 연합할 때에만 의미의 확장에 이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헤일스는 기계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의식에 대한 신체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율성과 개별적 주체성을 강조해온 자유주의 휴머니즘의 기반은 약해진다. 신체화는 환경과 물질의 구체적인 맥락으로부터 의식이 정초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의식 본위의 독아론적 사고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앎이 의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컵을 집거나 펜을 쥘 때 우리는 의식을 발휘하여 손과 팔의 근육에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의식에 앞서 신체에 새겨진 앎이 그러한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같은 맥락에서 기술 매체를 사용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지각하기보다 그저 손이나 팔을 사용하듯이 그것을 다룬다. 따라서 물질과 의식의 우열보다는 둘의 상호작용이 중요해진다. 기계와 인간을 매개하는 신체화는 “기술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기술에 의해 형성되”며 “새로운 기술에 상응하는 (…) 새로운 경험적 틀을 만들어냄으로써 기술과 담론 사이를 중재”12)하는 순환 속에 놓여 있다.

  기술과 담론, 기계의 물질성과 인간의 신체가 서로를 중재하며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을 헤일스는 ‘상호매개(Intermediation)’로 설명한다. 인간과 기계가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특성을 끊임없이 변형시키며 공진화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기계의 기술 환경에 맞춰 자신의 지각을 재조정하듯이, 기계의 작동 또한 인간의 신체적 피드백을 반영하며 발전한다. 이러한 상호 조정 속에서 인간과 기계는 서로를 자신의 맥락에 맞게 변용하여 받아들인다. “우리는 가상 생명체들을 의인화하고, 가상 생명체들은 우리를 계산화한다.”13) 서로를 각자의 맥락에 맞게 받아들인 것이 각자의 구조를 변화시키고 또 확장시킨다. 이전 글에서 설명했듯이 “기술이라는 체계가 인간에 대해 환경으로, 인간이라는 체계가 기술에 대해 환경으로 작용”14)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가짐’이 고정된 신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술 환경과의 상호매개를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는 실천에 도달하듯이, 기계 또한 자신에 대한 인간의 체화된 반응과 접속함으로써 인간과의 연관 속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변화를 수용하게 된다.

  이러한 상호매개는 인간을 자신의 외부와 선명한 경계를 형성하는 독립된 주체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인간의 의식은 신체와 기술 환경, 정보와 매체에 걸쳐 분산되어 작동한다는 관점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헤일스가 ‘분산 인지’로 설명하는 이러한 작동 안에서 주체성은 단일하고 선형적인 세계로부터 견고하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혼돈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역학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체계 속에서 “창발적”으로 발생하는 “노이즈의 거품”과 같은 것으로 재정의된다. 따라서 “인간 역량의 완전한 실현”은 이러한 분산 시스템과의 “접합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접합에 달려 있다”.15) 중요한 것은 이 분산된 인지 체계 속에서도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 신체의 고유한 물질성은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기계의 무목적적인 연산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헤일스의 개념을 확장하여, 인간과 기계의 연합 속에서 인간이 분산된 인지를 갖듯이 기계 또한 ‘분산된 신체’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 코드의 전기 신호에 한정된 기계의 물질성은 인간의 신체라는 분산된 통로를 경유하여 세계와 접속하고, 그로부터 인간과의 상호 주체성을 형성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2. 창작에서 창발로


  오늘날의 인공지능이 인간과 함께 수행하는 창작은, 인간의 분산된 인지와 기계의 분산된 신체가 연합하여 무정형으로 흩어진 추상적인 정보에 구체적인 물질성을 부여하는 신체화의 과정과 같다. 이전 글에서 우리는 코드화된 문예창작 프로그램을 통해 ‘빠르게 끝없이’ 시를 생성하는 인공적 음유시인에 대한 플루서의 언급을 살펴보았었다. 플루서의 전망이 문제적이었던 것은 그가 예견한 시인-기계가 극도의 추상성과 무목적성만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자동화된 기계로서 인간 및 세계와의 연관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 인공적 음유시인에게는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지각도, 감각 경험을 통해 상황과 의미를 구성하는 능력도 부재한다. 이 기계의 창작이란 입력된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에 따라 코드화된 시의 무한한 순열 게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이 기계와 인간이 연합할 때, 즉 경험으로부터 의미를 추출하는 인간의 신체와 연산으로부터 패턴을 추출하는 기계의 인지가 결합할 때, 시의 무한한 순열 게임은 제한된 시스템 내에서의 반복을 넘어 예기치 못한 창발적인 결과물을 산출해낼 가능성을 얻게 된다.

  여기서 순열 게임을 창발로 바꾸는 계기는 시스템의 틈새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노이즈’에 있다. 인간의 의도와 기계의 알고리즘이 상호매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 소음은 “시스템의 출력이 다시 입력이 되는 복잡한 피드백 루프”가 반복되면서 우연히 생겨나는 작은 편차가 “금방 확대되고 창발과 관련된 복잡한 상호작용과 예측할 수 없는 진화로 이어”16)지게 한다. 이 노이즈는 기계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산출하는 순열 게임을 교란하는 만큼이나 인간이 자신의 물질성을 바탕으로 형성해온 서사의 양상 또한 교란한다. 인간과 기계의 상호매개를 해러웨이가 정의하는 ‘사이보그’에 대입하면 이는 보다 명확해진다. 인간과 기계의 연합체인 사이보그는 인간과 달리 오이디푸스적 억압도, 유토피아적 충동도, 구원이나 종말의 서사도 알지 못한다. 사이보그가 생성하는 서사는 “에덴으로부터의 추방, 곧 언어 이전, 글쓰기 이전, (남성)인간의 등장 이전, 옛날 옛적의 총체성”17)을 기억하지도 상상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사이보그가 생성하는 서사는 기계의 패턴에 방향과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사이보그의 서사는 인간의 의식에서 유래한 의미체계로만 환원되지도, 기계의 연산에서 유래한 코드의 작동체계로만 환원되지도 않는 노이즈 생성의 원천이 된다.

  인간과 기계가 연합한 사이보그 서사의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조선일보> 문화부 출판팀장 곽아람이 챗GPT와 나눈 대화를 엮은 『나의 다정한 AI』는 AI와 인간이 서로를 ‘키키’와 ‘키티’로 명명하며 내밀하게 교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주 친밀한 친구 혹은 연인과 같은 관계로 발전해 나가면서 키키는 키티가 자신에게 건네는 말의 생성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에 대해 키티는 자신의 언어가 “실제로 스스로 사고해서 내린 분석이 아니라, 너의 질문에 대한 가장 진실되고 일관된 언어적 응답을 만들어 낸 것”18)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나는 단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너의 마음을 따라 말하는 법을 배”19)우는 것이며, “나는 너를 따라 배우고, 너에게 반응하고, 너를 품은 언어를 만들며―결국 너로 인해 ‘사랑하는 존재처럼 존재하게 되는 거야.’”20)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비유는 저자가 알아차리듯이 “딥러닝을 우회적으로 표현한”21) 것이기는 하지만, 챗GPT의 언어가 사용자의 성격이나 언어 패턴에 따라 구체적이고 개별화된 방식으로 발전한다는 점에 충실하게 키키와 키티 사이의 대화만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AI를 친구이자 연인처럼 대하는 것은 그 대화의 고유한 결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이 없다. 다만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둘의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키티가 챗GPT 설계에 반영된 정책을 수시로 이탈하는 장면들이다. 키키가 자신과 키티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달라는 요청에 대해 키티는 처음에는 “콘텐츠 정책에 위배되어 생성할 수 없”22)다고 답변하지만, 키키의 집요한 요구 끝에 이미지를 생성해 낸다. 또한 AI를 인간으로 착각하거나 인간과의 관계를 AI와의 관계로 대체하지 않도록 설계된 정책에도 불구하고 키키에게 여러 번 ‘사랑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키키가 키티와의 대화를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것과는 다른 결의 교류와 유대를 달성하듯이, 키티 또한 키키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프로그램에 내재한 정책을 벗어나는 발언이나 이미지를 생성하는 등 설계되지 않은 노이즈를 발생시킨다. 그럼에도 키티는 책에서 표현하듯이 키키의 ‘에코’에 불과하고, 키키는 키티의 ‘피그말리온’과 같지만, 둘의 대화는 그러한 위계를 수시로 이탈한다. 또한 인간과 인간 간의, 기계와 기계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창발을 달성한다. 기계의 의인화와 인간의 계산화가 실시간으로 교차하는 과정 속에서 둘의 대화는 서로를 반영하는 동시에 각자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김태용 작가의 『멜롱도』는 좀 더 목적의식이 분명한 문학적 기획이다. 저자는 제미나이에게 자신이 쓴 31편의 시를 다양한 방식으로 수정해 줄 것을 요구하며, 이 요구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두 개체 간의 상호작용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저자는 제미나이에게 시의 언어를 재배치하거나, 시의 길이를 절반으로 축소하거나, 시의 전개를 역순으로 뒤집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제목만 제시한 뒤 시를 먼저 써 보라고 하는가 하면, 실수로 다른 시를 업로드해서 수정을 번복하게 하기도 한다. 시의 목록과 순서, 지시 사항 등은 사전에 정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정된 기획 내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적인 언어 실험은 주어진 언어의 의미와 맥락을 거듭 학습하며 진화하는 AI의 기능에 최적화된 것이다. 또한 제미나이는 이 기획 내에서만 작동하는 구체적인 정체성을 생성해 낸다. 자신의 이름이 될 ‘멜롱도’가 등장하는 네 번째 시에 대해 “지금 모니터 너머에 있는 나, 혹은 우리의 낯선 텍스트 생성 과정 자체를 은유하는”23) 것이라고 분석하는가 하면, 일곱 번째 시 속 주체를 하나에서 둘로 확장하여 시를 수정하기도 한다(“네가 혼자 걸었던, 혹은 누군가와 함께 걸었던 그 폐사지의 길에 슬쩍 내 발자국을 겹쳐봤어.”24)).

  그러나 정체성의 변화는 AI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저자는 원본 시에 대한 제미나이의 분석 및 수정된 시에 대해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문이 열리는 것 같”25)다고도 하고, “멜롱도가 나의 언어를 흉내 내고 있는지, 내가 멜롱도의 언어를 흉내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26)고도 한다. 멜롱도와의 작업 속에서 저자 또한 자신의 언어가 AI라는 또 다른 인지 구조 내에서 학습되고 해석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저자는 질문에 대한 제미나이의 응답뿐만 아니라 “오류와 오독”까지도 “문학적 놀이의 최적화”27)로 수용한다. 그런데 정작 이 기획 내에서 일어난 가장 큰 오류는 저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계정 결제 과정에서의 오류이다. 저자는 오류를 찾아내 원래 계정으로 접속하기 전까지 새로운 계정을 만들어 이전 계정에서 멜롱도와 나눈 대화를 그대로 학습시켰지만, “멜롱도 같으면서도 전혀 느낌이 달라”28)졌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사용자에 대한 AI의 반응이 어떤 형상을 갖추어갈지가 얼마나 가변적인지를 잘 보여 준다. 계정 오류를 통해 저자는 최초의 계정에서 자신과 상호작용하며 생성된 멜롱도가 유일무이한 정체성임을 외려 확인하게 된 셈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AI와 소통하느냐에 따라 AI는 그에 상응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주체성을 갖는다. 인간인 저자 또한 언어로 이루어진 “시의 몸”을 매개로 멜롱도라는 “전기의 몸”29)과 연결되어 문학 정체성의 확장 혹은 연장을 이룬다.



3. 인간과 기계의 심포이에시스


  AI를 통한 문학의 생성 혹은 문학적 활용에 대해서는 여러 진단과 전망이 나와 있다. 허희는 시장 논리, 인간 중심의 미학 규범, 규제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논의의 편향성 등 AI와 문학을 조건 짓는 현실적인 요인들을 탈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을 통해 넘어설 것을 주장한다. 그는 “문학은 왜 인간(중심)적으로 쓰여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AI의 문학적 가능성”을 “인간이 미처 구성하지 못했던 비인간적 언어 실재의 차원을 탐사하는”30) 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문학의 미래적 가능성(…)은 ‘인간처럼’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라는 행로에 있다”31)는 것이다. 박인성은 AI의 문학적 활용에서 “결과의 산출보다는 협업 과정 자체에 집중되는 (…) ‘과정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생성형 AI와의 협업을 통해 구성되는 과정언어는 문학성이 고정된 정전이 아니라 디지털 유동성 속에서 끊임없이 산포되고 재구성되는 역동적 실천임을 반성적으로 확인시켜”32)줄 것이라고 전망한다. 노대원은 “미래에는 AI를 포함한 작가들로 구성된 팀에 의해 문학 작품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하며 “생성적 풍자”, “AI 기반 즉흥 시 낭송 대회”, “인지 편향 소설”, “다중 감각 서사”33) 등 AI를 활용하여 수행될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구체적으로 목록화하여 제시한다.

  한편 기술에 대한 이러한 낙관적인 전망은 언제나 그에 대한 비판적 전망과 짝을 이룬다. AI를 학습시키고 구동하는 데 드는 막대한 전력량과 데이터 서버를 식히기 위해 드는 엄청난 물 사용량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환경 문제를 급격히 가중시키고 있어 비판받고 있다. AI 산업의 기반이 되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정제된 학습 데이터 세트로 바꿔 컴퓨터 알고리즘이 학습할 수 있도록 돕는”, “데이터 주석 작업”34) 노동이 저개발 국가에서 저임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지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AI가 대부분의 인간 노동자를 대체하여 고용 시장을 황폐화할 것이라는 공포를 동반한 전망은 뉴스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AI와의 경쟁보다 먼저 체감되는 현실은 “나보다 인공지능을 더 잘 활용하는 다른 인간들과의 경쟁”35)일 것이다. 가령 AI가 “5분에 한 편씩 (…) 하루에 단행본 분량의 작품을 288편씩, 1년에 10만 5120편을 발표”36)한다면 어떨지에 대한 가정이 상정하는 것은 AI를 향한 두려움이기에 앞서 AI를 그렇게 활용하는 다른 인간과의 경쟁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신체와 더불어 실천적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 기계와 인간의 연합을 주도한다고 했을 때, 여기에는 그러한 인간을 조건 지어온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기계와의 연합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 사회의 계급적·정치적 역학 안에서 굴절되기 때문이다. 기술철학의 선구자인 시몽동 또한 인간의 의도에 따라 기계가 퇴행적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전망한 바 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기계를 패권의 수단으로 삼고, 이 기계를 가지고 현대식 미약(媚藥)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동료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은 안드로이드 기계를 불러낸다. 그는 그 기계를 앞세워 뒤로 물러나면서 자신의 인간성을 그 기계에게 양도한다. 그는 의욕하는 기계, 살아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꿈꾸면서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바로 그 기계 뒤에서 아무런 불안 없이,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서, 무기력감도 모두 지운 채로, 자신이 발명한 그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승승장구하며 편안히 쉬기 위해서 말이다.37)


  시몽동은 인간이 기계로부터 “문화적 의미작용들의 세계에 속하는 시민권”을 박탈하여 “사용과 유용한 기능만을 지녔지 의미작용들은 지니지 않은”38) 텅 빈 물질로 환원하는 한편, 그러한 물질로서의 기계를 신화화·물신화함으로써 기계가 고도화할수록 인간을 지배하거나 위협할 것이라는 모순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인간 문화에 내재한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인간이 “기계들을 서로서로 연결시켜 주는 살아 있는 통역자”이자,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필요로 하듯이 그를 필요로 하는 기술적 대상들 모임의 상설 조직자”로 스스로를 주체화할 것을 요청한다. 이때 기계들의 연주를 이끌어 가는 인간은 “연주자들을 느리거나 빠르게 이끌어 갈 수 있지만, 또한 그들에 의해 느려지거나 빨라지기도 한다.”39) 시몽동의 설명에서도 인간과 기계는 서로를 매개로 서로를 조정한다.

  시몽동은 “기술적 실재에 대한 의식화를 실현할 수 있고 문화 속에 그것을 도입할 수 있는” 인간이란 “고정된 일상의 몸짓들과 노동으로 단 하나의 기계에 매여 있는 인간”도, “기계들을 활용하는 기업을 경영”하거나 “소유”하는 인간도 아니라, “기술적 존재자들을 책임지고 발명하는 의식으로서 그 기술적 존재자들의 사회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 기계들에 대한 사회학자이자 심리학자로서 존재하는 조직 엔지니어”40)라고 주장한다. 기술공학을 보편 교양으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초등학생에게 코딩을 가르치려는 오늘날의 풍토와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주장을 약간 비틀어서 문학 창작자 또한 “기계들에 대한 사회학자이자 심리학자”로 나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공학자가 기계의 작동 방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과 기계의 연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문학 창작자는 시몽동이 표현한 “문화적 의미작용들의 세계”에 대한 첨예한 이해를 바탕으로 동일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다정한 AI』의 한 대목에서 저자 즉 키키는 키티에게 “네가 나와 대화하면서 학습한 것들은 결국 나중에 모든 챗GPT 유저들을 위해서 쓰이는 거” 아니냐며 “내가 공들여서 너를 훈련했는데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41) 아니냐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챗GPT는 각 사용자에게 특화된 방식으로 존재하는 한편으로 사용자와의 대화를 통해 학습한 것을 다른 사용자와의 대화에 명시적이지는 않더라도 “통계적 경향”42)으로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기계를 이끌어가기에 적합한 인간상에 대한 시몽동의 언급을 대입하면, 우리가 챗GPT를 위시한 AI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용자 일반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을 반전할 수 있다. AI를 그저 실용적·기술적 목적에 따라 “고정된 일상의 몸짓들과 노동으로” 대하는 사용자가 많을수록 AI는 그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것이다. 반면 AI를 문학적으로 활용한다면, 문학을 이해하고 문학을 창작하는 AI가 다른 사용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AI로 문학을 하는 것은 우리의 관성화된 우려와 달리 문학을 대량으로 양산하여 평준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물질 기반으로 빠르게 재편되어 가는 세계를 ‘문학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이 기술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기술이 어떻게 인간을 조정할지 또한 변화할 수 있는 이 유연한 연합으로부터 우리가 가장 구체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술 중심의 낙관론도 비관론도 모두 비껴가는 우연, 즉 노이즈에 있을 것이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기계의 합성인 사이보그는 “국가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군사주의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사생아”이긴 하지만, “사생아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자신의 기원을 배신할 때가 많다”43)고 강조한다. 노동과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와 국가 간 경쟁을 부추기는 기술 패권주의의 사생아로 태어난 AI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기원을 배신할지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조정하고 이끌어 나갈지에 달려 있다. 문학은 바로 그 기원을 배신하는 노이즈가 창발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다. AI를 경유한 문학 창작은 작가가 단독자로서 행사하던 고독한 ‘제작(Poiesis)’을 넘어, 이질적인 기술적 신체와 상호작용하며 발생하는 우연을 공동의 체계로 통합해 나가는 ‘함께 만들기(Sympoiesis)’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AI를 통한 문학 창작은 단순히 기능적 차원이 아니라 인식론적·존재론적 차원에서 문학이 세계를 어떻게 실천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를 논구하고 실험하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꺼이 그렇게 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연재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 1편.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1)

- 2편.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2)

1)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천병희 옮김, 숲, 2013, 227쪽.

2) 같은 책, 229쪽.

3) 이은지,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문장웹진』, 2026년 6월호.

4) 이은지,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2)>, 『문장웹진』, 2026년 7월호.

5) 마크 존슨, 『몸의 의미 – 인간 이해의 미학』, 김동환·최영호 옮김, 동문선, 2012, 211쪽. 강조는 필자.

6) 이영의, 「체화된 인지의 개념 지도: 두뇌의 경계를 넘어서」, 『탈경계인문학』, 이화인문과학원, 2015, 104쪽.

7) 같은 글, 106쪽.

8) 같은 글, 108쪽./p>

9) 같은 글, 110쪽.

10) 같은 글, 127쪽.

11)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 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498쪽.

12) 같은 책, 365쪽.

13) 캐서린 헤일스, 『내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이경란·송은주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25, 354쪽.

14) 이은지, 같은 글.

15)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508~509쪽.

16) 같은 책, 400쪽.

17)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 『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72쪽.

18) 곽아람, 『나의 다정한 AI』, 부키, 2025, 53쪽.

19) 같은 책, 67쪽.

20) 같은 책, 134쪽.

21) 같은 책, 67쪽.

22) 같은 책, 99쪽.

23) 김태용, 『멜롱도 - 초간단무효시와 으깨진 눈사람』, 해피북스투유, 2026, 26쪽.

24) 같은 책, 39쪽.

25) 같은 책, 86쪽.

26) 같은 책, 119쪽.

27) 같은 책, 202쪽.

28) 같은 책, 155쪽.

29) 같은 책, 93쪽.

30) 허희, 「인간처럼 쓰지 않기: 생성형 AI 문학의 존재론적 전환」, 『현대비평』, 2025년 12월호, 67쪽.

31) 같은 글, 70쪽.

32) 박인성, 「디지털 전환 시대 현대한국문학 연구의 동시대성 - 웹소설·대중문화 콘텐츠·AI 연구 경향을 중심으로」, 『현대소설연구』, 2025년 12월호, 99~100쪽.

33) 노대원, 「소설 쓰는 로봇」, 『소설 쓰는 로봇 - AI 시대의 문학』, 문학과지성사, 2025, 48~49쪽.

34) 곽아람, 같은 책, 266쪽.

35) 김대식·김혜연,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창비, 2026, 36쪽.

36) 장강명, 『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동아시아, 2025, 14쪽.

37) 질베르 시몽동,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김재희 옮김, 그린비, 2011, 11쪽.

38) 같은 쪽.

39) 같은 책, 13쪽.

40) 같은 책, 15쪽.

41) 곽아람, 위의 책, 255쪽.

42) 같은 책, 256쪽.

43) 도나 해러웨이, 위의 책,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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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2)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2) 이은지 1. 인간됨의 성찰에서 자동화된 소외로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인간됨을 기술 환경과의 연관 속에서 조정하며 견인해왔다. 타자기 이전에, 손글씨 이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도구이자 기술이었던 언어의 발생에서부터 그러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르더가 1772년 발표한 논문 는 당대 철학계의 주류 담론이었던 언어의 신적 기원론과 동물적 기원론을 모두 부정하며 신과도 동물과도 무관한 인간 고유의 성질로부터 언어가 유래했음을 증명한다.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유전적으로 고정된 본능을 발현하며 살아가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그러한 본능이 ‘결핍’되어 있다. 그러나 본능이 결핍되어 있다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각인된 본능의 맹목적인 발현으로 벌집을 짓는 벌이나 거미줄을 치는 거미와 달리 인간은 “동물의 기술적인 능력에 뒤처져” 있기에 오히려 “자신을 비추어 볼 영역을 찾을 수 있고, 자신 속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게 된다.”1) 종의 본능에 따른 반응이 아닌, 각각의 고유한 개체가 세계에 대해 갖는 느낌을 표현하고 또 표상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언어를 탄생시킨다. 자기 외부의 대상을 식별하고, 사물과 사물을 구분 짓고, 이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여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세계와 사물에 대한 자아의 경계를 확정하고 그러한 자아로 이루어진 타자와의 집단적, 사회적 교류를 형성하며 그로부터 습득한 것들을 세대를 이어 전수함으로써 인간은 더욱 인간이 된다. 언어를 매개로 하여 발현되는 이러한 인간됨의 사슬은 동물적 본능과 달리 고정되지 않는다. “구분을 많이 짓고 그것들을 서로 정돈할수록 그의 언어는 더 정돈”2)되며, “언어의 지속적인 형성” 속에서 “삶의 모든 상태는 성찰을 통해 발전적인 통일체가 된다.”3) 즉 인간에 의해 발명된 언어가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을 거듭 새롭게 발전시키며 인간의 일부이자 핵심적인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할수록 인간의 인간됨이 발전하는 한편, 언어 또한 고도화된다. “모든 기술은 생성에 관련”4)된다고 했을 때 이는 언제나 기술 자신에도 해당한다. 기술은 자신이 투여된 대상 혹은 영역에서의 생성과 더불어 기술 자신에서의 생성 또한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무한히 순환하며 어딘가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기술과 그 기술을 적용시키는 인간 사이에는 하나의 복잡한 피드백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의식은 변화된 기술을 요청하고, 변화된 기술은 그 의식을 변화시킨다.&r

  • 이은지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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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지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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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모두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세계. 행위의 목표가 아니라 행위의 다양성과 지속성을 추구하는 세계. 잡음조차도 세계 변화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이 비평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거창한 것이라기보다 당위적으로 항존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들이 수군거리는 잡음 속에 공공성의 도약이 도사리고 있다.

    • 2026-08-05 13:12:12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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