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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2)

  • 작성일 2026-10-01

최선교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로 3회 연재됩니다.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2)


최선교

  

  김혜순이 말하는 여성성과 그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 1990년대 여성적 글쓰기 담론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들어서며 민족민중문학의 하위 범주로 여성문학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은 1985년부터 2003년까지 총 17호에 걸쳐 발간된 여성문학 무크지이다. ‘또문’은 여성운동이 가시화되던 1980년대에 유학파이면서 사회과학 분야에 있던 여성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이지만, 동인의 구성원으로서 주부와 대학생까지 포함하면서 불평등한 성 문화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 문화를 실천하고자 한 단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또문』의 초기 호에서는 가사노동이나 육아 등 ‘여성’의 재생산 노동의 전면적인 재사유를 촉구하는 기획이 돋보인다.

  『또문』이 추진했던 여성적 글쓰기 담론의 의미와 한계를 살펴볼 때 김혜순 시론의 여성성 개념이 갖는 특이점이 드러난다. 1980년대 여성문학이 민족민중문학 진영의 하위 범주로 인식되었던 것과 달리, 1990년대에 들어서 여성문학 진영의 관심사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계급, 민족을 포함하여 정체성의 복합적 성격을 탐색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특히 『또문』이 여성적 글쓰기에 보인 관심은 남성중심적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문화적 실천 대안의 일종이었다. 1992년 발간된 『또문』 9호는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를 특집 주제로 내걸며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는 이 책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남성의 말과 전쟁을 벌이려고 남성의 말에 맞추는 것, 그 말로 많은 것을 말할수록 자신의 언어를 더욱 잃게 되는 그 자가당착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를 가두어 두고 싶지 않다. (...) 프랑스에서는 언어와 정신분석학을 연결하는 매우 이론적인 논의로 ‘몸으로 글쓰기’의 단어가 최근에 크게 부각되어 왔다. ‘몸으로 글쓰기’라는 것은 결국 기존의 언어가 여성의 체험을 풀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여성들이 해온, ‘머리’만도 아니고 ‘가슴’만으로도 아닌 온몸으로 쓰는 모반 행위라 할 수 있다.”1)


  이 글은 여성이 부당한 억압을 향하여 억울하다는 외치는 주장을 잠시 멈추고, 근본적으로 여성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재사유해보자고 주장한다. 여성이 남성중심적 권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경험을 재현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사용한다고 여겨지던 말들은 이미 남성중심적 의미 체계에 의해 오염된 것이므로, “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에서 발전한 여성적 글쓰기 개념의 목적을 계승하는 주장이다.

  『또문』 9호의 출간 목적에서 드러나듯이, 남성중심성에 의해 형성된 상징체계를 통해서는 여성이 자기의 몸과 정체성을 구현하는 작업이 불가능하다. 이때 출현하는 것이 바로 “결국 기존의 언어가 여성의 체험을 풀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이다. 인용문에서 ‘또문’이 프랑스에서 파생한 페미니즘 이론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며, 엘렌 식수가 고안한 여성적 글쓰기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김혜순 역시 거대 담론에 억압되었던 여성문학이 1990년대에 들어 여성적 방식의 미학적이고 지적인 승화 작업을 보여주었다고 판단한다. 1990년대 여성 시인들의 언술은 기존의 남성적 언어 체계를 경유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의 언술을 채택함으로써 여성의 육체성을 탐구하고 상징계의 언어로부터 탈각된 여성적 언어의 복원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억압적 시각은 90년대를 지나면서 억압된 것의 미학적, 지적, 여성적 승화 작업을 통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여성 시인들의 대부분은 남근적 힘을 추구하는 여성주의자가 아니라 억압에 대항하는 새로운 방식의 아방가르드적 언술을 개발해 냈다. 그들의 언술은 자신들의 육체성을 탐구하거나 아니면 근대가 버린 초월의 공간을 탐색하고, 복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2) 이를 통해 김혜순의 시적 인식과 『또문』의 문제의식 및 목적이 얼추 부합함을 알 수 있다. 

  김혜순이 『또문』 9호에 발표한 글에 주목해보자. 그전까지 김혜순은 『또문』에 여러 차례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대부분 자신의 시 작품이었다. 『또문』 9호에 실린 「페미니즘과 여성시」는 김혜순이 1990년대 당시 발전시키고 있었던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여성주의적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이 글에서 김혜순은 김승희, 최승자, 양선희, 이상희의 시를 인용하여 여성 시인들의 문체 전략을 소개한다. 글의 서두에서 김혜순은 한국 여성시의 특징적 요소를 부각하는 것을 목적으로 밝히며, 대화체의 사용, 고백체, 은유 구조와 구별되는 환유 구조 등으로 여성 시인의 문체 전략을 분석한다. 

  지금까지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시의 “독특한 어법, 심리학적 기제, 상징 세계, 문체론적 특징, 여성의 육체로서 글쓰기, 여성들만의 고유한 이니시에이션 드라마, 입장” 등이 여성시 분석의 개별적인 형식적 지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3) 이러한 김혜순의 진술은 앞서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과 ‘또문’이 표방했던 여성적 글쓰기 개념의 구축 목적을 일부 계승한다. 

  이 글에서 김혜순은 여성적 글쓰기가 저항의 대상으로 삼는 남성적 언어가 생물학적인 남성의 언어가 아니라, 여성 시인의 언술을 억압하는 언어임을 명시한다. 따라서 “모든 압제적 언어, 남근적 어원 발생학을 가진 언어, 여성 비하적 언어를 포함하는 언어”를 일컫는 남성중심적 언어체계에 저항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형식적 지표로 분석될 수 없는 양상으로 드러난다.4)

  주목할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여성적 글쓰기 개념의 본질적 한계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여성적 글쓰기 개념 자체는 귀납적이기보다 연역적이기 때문에 개념의 명확성을 밝히기가 힘들다. 기존의 언어 체계에 의해 지금껏 실현되지 못한 방식의 글쓰기를 주장하므로 여성적 글쓰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지극히 ‘모호한’ 대답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모호한 개념은 한국 문학장에서 여성적 글쓰기 담론의 변질과 이에 대한 비판으로 확산된다. 여성해방문학 진영에서 소위 ‘포스트 담론’을 수입하는 과정은 ‘여성적’이라는 수식어를 무비판적인 대안으로 사용하는 양상으로 이어진 바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몸, 에로스, 모성 같은 ‘여성적’ 요소들의 강조를 통하여 여성적 글쓰기 담론을 발전시키는 맥락은 오히려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구획을 계승하거나 ‘실체가 없는’ 지적 유희로 비춰지기도 했다.

  1990년대 제출된 일부 논자들의 비평에서도 여성적 글쓰기 담론의 비역사성과 무비판적 포스트 담론 수용 양상에 관한 비판이 관찰된다. 김영희‧이명호‧김영미는 「포스트모던 여성해방론의 딜레마」라는 글에서 여성문학비평 진영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 등의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이론을 호출하여, 프랑스 여성이론가들의 탈구조주의적 독해가 기호들의 ‘자유로운 유희’로 전락하고 ‘재현’이나 ‘현실’을 담론으로 환원시키는 양상을 비판한다. 이 글은 여성적 글쓰기를 차용하는 여성해방문학 진영의 논리 역시도 “남성적 시각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1990년대 ‘여성’중심비평에는 ‘여성적 시각’에 관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분석이 부재하여 종국에서는 ‘객관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회의주의적 인식론’이 관찰된다고 주장한다.5) 한편 여성중심비평이 포스트 담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현실과의 상호연관성에 관한 비판적 시각을 상실했으며 ‘재현의 불가능성’에 천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상경의 「한국 여성문학론의 역사와 이론」이라는 글은 1990년대 유입된 포스트 담론은 오히려 여성해방문학 진영이 한국 여성의 실제 현실에 무관심한 지적 유희로 전락했음에 주목한다. 이상경은 구체적으로 『또문』 9호에서 특집으로 다룬 여성적 글쓰기를 겨냥하여 “의미를 훼손하는 문학 텍스트를 ‘여성성’을 가졌다고 이름 붙이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해방적 혹은 ‘혁명적’이라는 가정은 부적절”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다.6)

  1990년대 여성해방문학 진영이 표방한 여성적 글쓰기 담론에 가해진 비판을 정리해보자면 첫째는 기존 가부장제 문화가 구획해 놓은 여성적 특징을 무비판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킨다는 것이고, 둘째는 포스트 담론의 무분별한 인용 과정에서 여성성에 관한 논의가 현실적 맥락과 유리된 지적 유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점은 앞서 김혜순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세 가지 유형의 ‘여성성’ 개념을 상기시킨다. ① 남성중심적 문학사의 자의적 논리를 내면화하지 않으면서 ② 페미니즘 담론에 의한 ‘여성’ 정체성을 수용하지도 않고 ③ 단일한 정체성을 거부함과 동시에 정체성의 폐기를 도모하려는 김혜순의 문제의식은 1990년대 여성문학 진영이 맞닥뜨린 딜레마로부터 기인했던 것은 아닐까. 

  특히 유형 ➂에 해당하는 여성성 논의는 여성적 글쓰기가 지적 유희로 전락하여 ‘여성’에 관한 논의가 재현 불가능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맥락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혜순이 ‘또문’과의 영향 관계를 통해 발전시킨 여성적 글쓰기 담론을 계승하면서, 어떠한 방식으로 1990년대 여성문학에 가해진 비판을 타개하는지 살펴보는 작업은 김혜순 시론의 의의를 제공하는 중요한 대목일 수도 있다.


*

  

  김혜순은 여성시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성’, ‘여성성’, ‘여성적’이라고 하는 개념에 관한 사유를 시론 전반에 삽입한다. 이는 가부장제 문화에 대항하는 여성문학의 실천이자, 여성문학 진영에 가해진 비판을 타개하려는 김혜순의 시도이며, 김혜순 시론의 여성성 개념이 어떠한 지점에서 앞선 세 가지 유형의 여성성과 구별되는지를 알려준다.

  우선 김혜순이 말하는 여성시란 생물학적 여성에 의해 쓰인 시로 한정되지 않는다. 김혜순에게 ‘여성’과 ‘남성’은 본질적으로 결정되는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혜순은 ‘모성(母性)’을 언급하며 “여성시인을 향해서만 모성 운운하지 마라. 진짜 시인은 다 어머니다. 시인은 모성을 요리하지 않고 시인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을 한다.7) 비유적인 표현임을 감안하더라도, 위와 같은 언급은 전통적으로 생물학적 여성에게 부여되던 모성 소재를 남성에게 확장하는 논법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어머니’는 생물학적 성별을 기준으로 배치되는 정체성이 아니다. “진짜 시인은 다 어머니다”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생물학적 여성의 정체성이 아니며, 오히려 “모성을 요리”하는 행위를 통해 획득되는 후천적 정체성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논법은 김혜순이 ‘여성’을 사유하는 방식으로부터 기인한다.


  “여자하기는 ‘여자이고자 함’이다. 타자와 감응하여 작고 낮은 것을 몸에 분포해야 한다. 여자이고자 함은 대립항인 남자라는 포지션이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함을 전제로 하기 이전에, 인간 각자가 스스로 여자라는 복수성, 내 안에 흘러넘치는 여성적 실재를 향해 여행해가야 함을 이른다. 또한, 나는 생물학적으로 여자이나 나의 에너지로 다른 사물들과의 연결과 접속 속에서 여자를 구현해가야 한다.”8)

 

  김혜순이 여성을 후천적 정체성으로 사유하는 방식은 첫 번째 시론집인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에서부터 『여자짐승아시아하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된다. 다만, 각 시론집의 특성상 서술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위의 인용문은 2019년에 발간된 세 번째 시론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에서 여성 개념을 사유하는 대목이다. 첫 번째 시론집이 동양 무속적 상상력을 통해 여성성 개념을 사유했다면, 『여자짐승아시아하기』에서는 여행 중에 경험한 사건들을 통해 여성성 개념에 관한 사유를 드러낸다. 

  위의 인용문은 김혜순 시론이 전제로 하는 두 가지 명제를 포함한다. 첫째, ‘여성’은 ‘남성’의 대립 개념이 아니며, 둘째, 여성성은 이분법적 성차 개념에 의해 파악되지 않지만 허구의 개념으로 폐기되지 않는다. 먼저 “대립항인 남자라는 포지션이 본질적이지 않”다는 서술은 성차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다고 하는 본질주의적 성 정체성을 거부하고, ‘여성’은 생물학적 ‘남성’의 대타항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김혜순의 성차관을 반영한다. 본질주의적 성차란 염색체, 생식기, 호르몬 등의 신체적 특징에 의해 여성과 남성이 구분되며, 성차의 구분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는 사회적 역할이나 위치, 행동 등을 근거로 여성과 남성을 지칭하는 ‘젠더’의 개념과 달리 생물학적 특징을 기준으로 삼는 ‘섹스’의 개념에 입각한 견해로 볼 수 있다. 물론 현재는 생물학적 성차라고 하는 섹스 역시도 젠더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9)

  인용문에서 드러나는 것은 이러한 성차관을 기반으로 할 경우, ‘여자이고자 함’이라는 ‘여성성’ 개념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으로 전제되기 쉽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에서 섹스와 젠더가 모두 후천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전제가 등장한 이후로, 본질적으로 ‘여성’과 ‘남성’을 구분할 수 없다는 논의는 ‘성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의 폐기로 귀결되었다. 후천적으로 획득된다는 젠더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하는 섹스마저도 문화적 구성물의 일부라는 논의의 전환으로 인해 ‘여성/남성’이라는 범주화 자체의 유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혜순은 성차 개념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여자라는 복수성, 내 안에 흘러넘치는 여성적 실재를 향해 여행”할 것을 요구한다. 여성은 ‘생물학적 개념’으로 사유되지 않고, ‘복수성’이라는 속성으로 치환된다. 구문상 “여자라는 복수성”과 “내 안에 흘러넘치는 여성적 실재” 사이에는 접속사가 부재함으로써 두 표현이 동일한 층위의 개념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 결과 ‘복수성=여성적 실재’라는 의미 구조의 형성을 통해 ‘여성적 실재’라는 말의 본질주의적 해석 가능성이 감소한다. ‘여성적 실재’라는 것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복수성’으로 치환될 때, ‘여성성’은 본질과 허구의 이분법을 초과하는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여성’을 ‘복수성’으로 사유하는 방식은 본질주의적 성차 개념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여성적 실재를 향한 여행’을 통해 미결정 상태의 ‘여성적 실재’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이처럼 김혜순 시론에서 여성은 생물학적 정체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허구적 정체성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이고자 함”의 여행을 통하여 ‘여성성’을 구현하기가 요청된다. ‘여성성’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므로 누구나 그것을 구현해낼 수 있다. 이때 ‘여성성’을 구현해야 하는 존재는 남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김혜순은 스스로가 “생물학적으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구현”해나가야 한다고 말하며,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사실이 ‘여성’의 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다음의 인용문에서는 세 번째 시론집에서 발견되는 ‘여성성’ 개념의 사유 방식이 첫 번째 시론집부터 견지되어 온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① 그러나 어쨌거나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나를 끊임없이 침범하는 생각 하나는, 시는 여성적 장르이고,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그/그녀는 사랑에 들리듯 여성성에 들린다는 것이었다.10)



  ② 희한하게도 사랑을 경험할 때 여자와 남자는 둘 다 여성성을 갖는다. ‘사랑’이라는 초자아의 함정에 빠진 육체는 느닷없이 여성인 것이다.11)

 


  김혜순은 첫 시론집의 책 머리에서 ‘여성시’라는 별개의 형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 자체를 여성적 장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은 앞서 한국 문학장이 여성문학에게 요구하던 당위적 규범을 폐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시 자체가 여성적 장르로 파악될 경우에 여성시는 한국 문학장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인 ‘시’의 하위 범주를 벗어나게 되며, 이로써 여성시에게만 별도로 요구되는 남성성의 자의적 논리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혜순은 장르로서의 여성시를 포함하여 ‘시인’ 개념 자체를 ‘여성’과 병치하는 과감한 범주화를 감행한다. 김혜순의 시론에서 시인은 “여성성에 들린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개념으로 거듭난다. 이때도 역시 ‘여성 시인’이라는 개별된 범주화를 시도한다기보다, 보편적 의미의 ‘시인’의 범주 자체를 ‘여성적’으로 치환하는 방식이 사용된다. “그/그녀”라는 호칭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적’이라는 조건은 생물학적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으며 “여성성에 들린다”는 행위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두 번째 시론집인 『여성, 시하다』에서도 여성성을 규정하는 방식이 동일하게 견지된다. “희한하게도 사랑을 경험할 때 여자와 남자는 둘 다 여성성을 갖는다”는 표현은 첫 번째 시론집에서 등장했던 “그/그녀는 사랑에 들리듯 여성성에 들린다”는 표현의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으며 ‘여성 시인’이라는 호명이 생물학적 여성에게 국한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김혜순에게 여성성은 ‘여성적 실재’를 구현하기 위한 행위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므로 누구의 육체든지 “느닷없이 여성”이 되는 현상이 가능해진다. 김혜순은 2022년 첫 번째 시론집의 개정판을 출간하며 초판 책머리의 표현을 일부 변경한다. 초판의 “귀신에 들리듯 여성성에 들린다”는 문장을 “사랑에 들리듯 여성성에 들린다”는 문장으로 수정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의 수정은 시론집들 간에 ‘여성성’ 개념을 사유하는 방식의 논리적 유기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렇듯 김혜순의 시론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생물학적 차원의 대타항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으며, 오히려 ‘여성성’은 ‘시’와 ‘시인’이 필연적으로 충족해야 하는 조건으로 제시된다. 다시 말해, 모든 ‘시’와 ‘시인’이 ‘여성적 실재’의 구현을 통하여 ‘여성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두 인용문에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사랑’이라는 경험과 이 경험을 통해 ‘여성성’이 획득된다는 설정이다. 경험의 대상이 되는 ‘사랑’이라는 행위는 육체를 여성으로 변형시키는 계기이다. 김혜순의 시론에서 “영원한 미끄러짐”의 행위로 묘사되는 사랑은 행위자인 ‘나’가 대상인 ‘너’를 가둘 수 없음을 전제로 하는 사건이다. “너는 나로부터 달아나지만 나는 너로부터 달아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 있는 네가 영원히 내 안으로 오지 않을 것만 같다고 안달한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한 미끄러짐이다. 미끄러지는 사랑을 따라가는 몸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는 시가 몸이 쓰는 시다.”12)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행위를 경유할 때 여성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설정, 그리고 육체가 행위를 통해 변형될 수 있다는 전제이다. 본질주의적 성차 개념으로부터 여성이라는 개념을 분리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사유하는 방식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김혜순 시론에서 육체는 고정된 물질로서의 개념보다는 사건을 통해 변모하는 유동적 개념에 가깝다. 여성의 육체가 호르몬이나 생식기 등의 신체적 기준으로 규정되지 않고 사랑의 행위를 통해 획득된다고 설정함으로써 생물학적 기준에 의거하여 여성성을 규정하는 방식이 전면적으로 차단되는 것이다. 동시에 여전히 여성의 육체라는 구성적 실재를 긍정하면서 여성성을 허구의 담론적 개념으로부터도 구분한다. 결과적으로 김혜순 시론이 전제로 하는 여성성은 생물학적 정체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허구의 담론적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여성적 실재에 도달하려는 행위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 개념으로 거듭난다.

  김혜순의 시론은 1990년대 ‘또문’과의 영향 관계를 통하여 여성적 글쓰기 담론의 계보를 계승하는 한편, 여성적 글쓰기가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 여성성의 옹호나 허구적 담론으로의 여성성 폐기라는 한계를 극복한다. 다시 말해, 여성해방문학의 대안적 실천으로 제출된 여성적 글쓰기의 목적을 견지하면서 본질주의적 여성성 개념에 함몰되거나, 정체성의 폐기라는 담론적 유희로 나아가지도 않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론이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구사할 총체화의 폭력을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성화(無性化)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여성시의 언술과 여성적 현실의 적극적인 교합을 위함이다. 앞서 여성적 글쓰기 담론에 제출된 비판 중 하나가 여성성 담론과 실제 여성적 현실의 맥락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임을 상기할 때, 김혜순이 여성성을 개념화하는 방식은 1990년대 여성해방문학 진영이 실현하려고 했던 대안적 실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근거로 판단된다.



최선교 문학평론가의 연재 비평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 1편.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1)



1) 또하나의문화,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또하나의문화, 1992, 14-21쪽.

2) 김혜순, 「1990년대 시적 현실, 어디에 있었는가」, 119쪽.

3) 김혜순, 「페미니즘과 여성시」, 218쪽.

4) 위의 글, 219쪽.

5) 김영희‧이명호‧김영미, 「포스트모던 여성해방론의 딜레마」, 『여성과사회』 3, 1992, 73-74쪽.

6) 이상경, 「한국 여성문학론의 역사와 이론」, 『여성문학연구』 창간호, 1999, 32쪽.

7) 김혜순, 「여성, 시하다」, 『여성, 시하다』, 131쪽.

8) 김혜순, 「여자짐승아시아하기─책머리에」, 『여자짐승아시아하기』, 16쪽.

9) 마리 미콜라, 『섹스와 젠더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점들』, 강은교 외 옮김, 전기가오리, 2017, 10-13쪽.

10) 김혜순, 「초판 책머리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5쪽.

11) 김혜순, 「여성, 시하다」, 『여성, 시하다』, 128쪽.

12) 김혜순, 「사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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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비평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1)

최선교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1) 최선교 김혜순은 2002년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을 시작으로, 2017년 『여성, 시하다』를 거쳐 2019년 『여자짐승아시아하기』, 2026년 『공중의 복화술 : 문학은 어디서 시작할까?』에 이르기까지 여성과 여성시를 대상으로 한 시론을 세워왔다. 명백히 여성과 여성시를 위한 시론이다. 그녀는 여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녀는 여성시에 대해서 말한다. 이 진술에 대해 해명하거나 덧붙이고 싶은 말은 없다. 그녀의 시론은 기존의 ‘여성적 글쓰기’ 범주에 속하면서 ‘들림’이나 ‘바리데기’ 등의 동양 무속적 상상력을 통해 개성을 확보한다. 한국에는 ‘여류시’라는 말이 있(었)다. 김혜순은 생물학적 성차 개념에 기반을 둔 ‘여류시’라는 일종의 멸칭으로부터 ‘여성시’의 범주를 구분하려고 했다. 시론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 생물학적 정체성이 아님을, 공중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지만 어떤 순간에는 생생하게 발악하기도 하는 구성적 개념임을 설명하고자 했다. 김혜순의 시는 종종 난해하다거나 초현실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 본인은 그러한 평가가 ‘현실’이나 ‘환상’의 개념을 남성적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현실이 무엇이고, 환상이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나의 시를 초현실이라고 부르는가. 그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여성이 현실이라면?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이 쓴 시, 여성시를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발성기관, 새로운 발성법에 대한 해독이 필요”1)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구체적인 시 형식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2022년 11월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의 개정판을 펴내며 김혜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무엇보다도 여성시는 여성의 형식을 발명한다. 면면히 내려오는 말하기 방법 말고 다른 말하기 방식 말이다.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는가가 여성주의적 발성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다.”2) 이는 김혜순이 여성 시론을 적어나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말하기 방식을 통해 ‘여성시’의 범주를 설계하고자 함을 암시한다. 단지 생물학적 여성에 의한 시가 ‘여성시’가 아니다. 여성이 말하는 시가 바로 ‘여성시’인 것이다. 시 형식에 대한 김혜순의 관심은 1990년대 한국의 ‘여성문학’ 담론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로부터 시작한다. 1990년대 한국 문학장에서 ‘여성문학’을 둘러싼 담론들은 그 당시의─대부분 남성이었던─비평가들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일 경우에만 미학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김혜순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 시

  • 최선교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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