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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나라공화국의 이야기 요정을 보았니?

  • 작성일 2026-06-01

  [레지던시 일기 – 남이섬 호텔정관루]


  나미나라공화국의 이야기 요정을 보았니?


하신하


  편집회의까지 마치고 마감을 이미 한번 연기한 장편 동화의 원고를 머릿속에 짊어지고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에 올랐다. 배는 물길을 헤치고 유유히 남이섬으로 다가갔다. 나는 저 섬을 거나한 술판이 벌어지는 대학생 MT 장소로, 한여름의 활기와 젊음의 싱그러움이 가득 담긴 노래가 흘러나오는 강변가요제로, 또 유명한 드라마의 한 장면을 찍어 관광객이 북적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원지로 알고 있었다. 이후 남이섬에서 국제 규모의 어린이책 축제가 열린다는 유명세는 익히 들었지만, 직접 참여한 경험은 없었다.

  배 안에서 들리는 말들이 서로 다른 걸로 보아 아시아의 다양한 국적으로 짐작되는 낯선 관광객 무리 속으로 조용히 스며 들어갔다. 남이섬에 도착해 배에서 내렸을 때 나는 ‘나미나라공화국’이라는 소인국 안에서 눈을 뜬 거인 걸리버가 된 기분이었다. 언제나 함께하는 물리적인 몸의 무거움에 마감을 넘겼다는 마음의 무게까지 더해져 나는 이미 거인만큼 천근만근이었다.

  내가 지낼 숙소인 YUSOF 방의 문을 열자 말레이시아의 그림책 작가 유소프가 그린 코끼리들이 나를 반겼다. 나에겐 2주 안에 원고를 마무리해서 보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코끼리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에 벽을 가득 채운 코끼리 그림은 한없이 천진난만하게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여행의 즐거움에 들떠 남이섬 안을 훑고 다니는 관광객들의 무리에 속해있었던 터라 레지던시 숙소 근처의 한적함은 다른 시공간에 들어선 듯 낯설었다. 관광객들이 배를 타고 빠져나간 밤에는 침묵과 어둠이 숙소 주위에 깊게 내려앉았다.



  남이섬을 산책하는 새벽과 저녁 시간에 나는 거인국에 도착한 작디작은 걸리버가 되었다. 화려한 깃털로 있는 힘껏 자신을 뽐내는 공작과 내가 방문을 열고 나오면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와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견과류를 뺏어가는 토끼들. 일정한 동선으로 직원처럼 일하는 듯한 오리와 거위 무리. 뺏어갈 천적이 없는 듯한데도 무언가를 숨기느라 바쁘디바쁜 다람쥐와 청설모, 그리고 마감의 시간 또한 지나가리라며 천천히 흐르는 물과 이 모든 풍경을 내려다보며 감싸주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서 나는 작고도 작은 사람이었다. 자연의 한구석을 차지한 작은 걸리버는 조용하고 겸손하게 다른 생명체들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며 돌아다녔다.

  식당이나 카페, 도서관이나 미술관에는 최대한 관광객처럼 위장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있던 남이섬의 직원들이 “작가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며 반갑게 웃으며 다가온다. 어디를 가든 늘 한 사람쯤은 다가와 혹시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무리 속 위장술이 뛰어난 내가 관광객이 아니라 레지던시 작가라는 것을 남이섬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다. 직원들은 미소를 띠고 심리적 안정을 보장하는 일정한 사회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만, 내가 신호만 보내면 당장이라도 뛰어오겠다는 서비스직 특유의 친절함을 감추고 있다.



  주말이 되면 가족 단위로 찾아온 관광객의 숫자가 늘어난다. 유모차를 탄 어린이와 강아지들이 제법 눈에 많이 뜨인다. 자전거를 타며 이 시간과 공간을 즐기며 웃는 연인들의 미소는 눈부시다. 나는 눈맞은 강아지처럼 아이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웃음을 조금씩 채집한다. 피터팬은 웬디에게 아이들의 웃음은 수천 조각으로 쪼개져서 이리저리 통통통통 뛰어다니다 요정으로 변한다고 알려주었다. 동화작가에게 아이들이 웃음과 눈물은 이야기를 만드는 요정이기도 하다.

  남이섬을 제대로 즐기려면 아무리 올빼미 작가라 해도 잠시 아침형 작가가 되어야 한다. 올빼미보다는 아침새가 되어야 하루하루 바뀌는 풍경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눈에 담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주위가 온통 어둡고 조용해지는 저녁에는 올빼미도 잠들기에 안성맞춤이다. YUSOF 방에 걸린 그림 속 코끼리들이 밤만 되면 그림 밖으로 튀어나와 잠을 지키는 요정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남이섬에서 일주일이 지나자 산책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작업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작업을 위해서 산책을 하는 게 아니라 산책을 위해서 글을 쓰는 주객전도의 모양새로 바뀌었다. 3월 말의 남이섬은 아침과 오후가 다르게 꽃들이 여기저기에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아침에 보았던 꽃봉오리가 오후에는 조금 벌어져 있고, 다음날에는 더욱 몽글몽글하게 터질 준비에 들어갔다. 이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려면 작업을 서둘러야 했다.



  2주는 쏜살같이 지났고 나는 막 터지기 시작한 목련과 보랏빛을 머금은 벚나무들을 뒤로 하고 남이섬을 떠나야 했다. 소인국의 걸리버는 다시 평범한 걸리버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원고를 보냈기에 돌아가는 배에서 맞이하는 바람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남이섬의 새 소리와 나무 냄새가 한동안은 내 주위를 맴돌았다.

  서울에도 봄꽃이 활짝 핀 4월 말, 초록이 봄 햇살과 만나 눈이 부신 대학로에서 2024년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하인츠 야니쉬 작가와 한국의 어린이책 작가들의 대담회가 열렸다. 야니쉬 작가는 4월 초에 2주 동안 남이섬 레지던시에 머물렀다고 한다. 내 뒤를 이어 YUSOF 방에서 코끼리 요정의 요술 담요를 덮고 지낸 것이다. 야니쉬와 나는 코끼리 방에서 묶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내적 친밀감을 다졌다. 언어의 벽을 넘어 작가로서 가장 궁금한 것은 남이섬에서 얼마나 작업을 했느냐였다. 기다렸다는 듯 야니쉬는 남이섬에서 구상한 새 이야기를 자랑하듯 소개했다. 야니쉬는 아름다운 남이섬을 산책하며 거인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또 하나의 걸리버가 여행을 마치고 자기 배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5월에는 남이섬에서 세계책나라축제가 열렸다. 레지던시 참여작가로서 책나라축제에 함께 했다. 남이섬에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온 작가와 출판인이 벌이는 책 축제였다. 많은 어린이들이 책을 읽고 체험하며 웃음을 수천 조각씩 쪼개어 통통통통 날리는 모습을 눈에 담고 돌아왔다. 나에게 이제 남이섬은 넉넉한 자연 속에서 한껏 싱그러운 생명체들이 책과 함께 웃고 뛰노는 곳으로 남았다. 나의 경험은 기억으로 저장되어 다시 이야기로 태어날 것이다. 남이섬에서 만난 이야기 요정의 마법이 함께 하기를!




〈레지던시 일기〉는 문학 레지던시에 머문 작가들의 에세이입니다. 입주 기간 동안의 하루와 작업 과정,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마주한 감각과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작품 너머 창작의 현장과 작가의 내면을 함께 전합니다. 레지던시에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독자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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