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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마음

  • 작성일 2026-09-01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기다리는 마음


김홍(중화문학도서관 상주작가)



  내게 여행은 몇 권의 책으로 남는다. 이번 연수를 떠나는 길에도 트렁크 한켠에 책을 잔뜩 넣었다. 그중에 손이라도 한 번 닿게 되는 책이 몇 권이나 될는지 스스로도 궁금했다. 자기 전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줄여보려고 중고로 구입한 이북리더기에도 도서관 대출 범위가 허락되는 만큼의 책을 잔뜩 다운로드했다. 결론적으로 돌아보면 이번 연수에서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은 사람들로 남았고 나머지 시간은 꽤 많은 책을 읽었다. 

  정리해 보자면 애나 친의 <세계 끝의 버섯>을 주의 깊게 읽었고, 루리의 <긴긴밤>을 다 읽었다. <삼체> 1권을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의 책을 두 권 읽었다. 반 정도 남아 있던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완독하고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시작하고 끝냈다. 이 중 종이책은 <세계 끝의 버섯>이고 나머지는 전부 전자책이었다.

  이 과정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낭비가 존재한다. 가방에 넣어 가져간 종이책 5권 중에 실제로 읽은 것은 한 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4권의 책만큼의 무게가 바다를 건너는 동안 탄소 발자국은 간데없이 낭비된 셈이고, 가방을 밀고 다니면서 소모된 나의 열량에 관해서도 (적어도 책 4권의 무게만큼은) 최고의 효율을 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에게 더 많은 오차범위가 필요하고, 그걸 이해하고 용납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하고, 공공성이라는 것이 전부 그런 토대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번 연수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번 연수에서 말도 안 되게 새롭고 놀라운 것들을 잔뜩 보고 온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자주 한 생각은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예술 지원 정책에 있어 많은 부분은 우리가 이미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한국문학번역원, 한국출판문화진흥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등의 여러 기관을 통해 이미 시행하고 있는 내용들이었고, 충분히 검토되고 있는 내용이었다. 정책의 중요한 부분인 예산 규모에 있어서도 대체로 우리나라 기관들이 확보한 단위가 적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호주의 경우 문학 분야를 독립시켜 Writing Australia라는 기구 아래 통합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우리처럼 예술 전 범위가 통합돼 있다는 것에 비교해서 일장일단이 있을 것 같았다.

  도서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연수단이 방문한 주립도서관은 우리의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처럼 공공 납본을 받는 관내 열람 도서관이었고, 대출이 가능한 시립 도서관도 있었다. 장서량은 우리도 도서관마다 차이가 있는 만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조금 달랐던 부분은 주립도서관이 마치 공공 갤러리처럼 운영되는 것이었다. 다양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시민들 입장에서는 도서관에서 여러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점이 편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실정과는 맞지 않았다. 이미 우리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들은 책의 안과 밖에서 전천후 문화기획자로 활동하며 수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우리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개인적인 기회로 예술인복지재단과 함께하는 간담회에 참여한 일도 있고, ARKO의 신규 사업에 대한 자문에 목소리를 보탠 일도 있다. 그때 뵌 실무자 선생님들은 내가 작가로서 고민한 많은 부분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현실적인 제약들 속에서 실현 가능한 방안을 찾고 있었다. 이번 연수에 함께한 윤지현 차장님과 서유미 차장님의 꼼꼼하고 정성스러운 기획 또한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다른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마음이 달랐다. 성정이라고 해야 할까. 통역을 담당해 준 김민하 통신원이 이런 얘기를 했다. “호주 사람들은 좀 쿨해요. 이지 고잉하는 마인드가 있어요.” 정말로 좀 그런 것 같았다. 누군가 호주 사람들이 “No worries.”를 입에 달고 산다고 했던 이야기도 기억났다. 거시경제의 영향으로 호주의 경제 사정도 녹록지 않다고는 하지만 오랜 시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온 복지 제도의 영향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짧은 기간 마주친 몇 사람들과의 대화나 풍경으로 예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인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New South Wales 주립도서관에서 이뤄진 인터뷰였다.

  NSW 주립도서관은 펠로우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만난 Dr. Rachel Franks는 이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였다. 주로 역사학자들과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지원이 이뤄지는데, 검증된 작가와 신진 작가를 두루 선발해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차등화된 재원을 지급했다. 선정된 펠로우들에게는 도서관 내 전용 연구 공간이 제공되며 도서관에 머무는 동안 전담 사서(Private Librarian)가 배정되어 밀착 지원을 받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 간에 서로의 프로젝트를 돕고 소통하는 협력적인 공동체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유의해야 할 것은 연구 및 창작하는 주제가 도서관의 소장 자료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도서관의 컬렉션을 메인으로 활용해야 하며, 필요한 경우 다른 도서관이나 아카이브 자료를 보완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펠로우십을 하는 동안 작가는 대중 강연을 진행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도서관의 웹사이트나 매거진에 글을 기고하여 작업 과정 공유하는 것도 필요했다. 펠로우십이 끝나는 시점에 상세한 연구 보고서(Report)와 함께, 연구기간 동안 사용한 모든 도서관 소장 자료의 포괄적인 서지 목록을 제출하도록 함으로써 프로젝트와 도서관 자원의 연계를 확대하려는 노력도 보였다.



  어찌 보면 우리의 상주작가 프로그램과 다른 지원 제도가 조금씩 섞여 있는 모양새였다. 도서관에서 작업 공간을 제공받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보면 내가 작년에 이어 올해 계속 진행하고 있는 상주작가 활동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2020년도에 ARKO <예술 창작아카데미> 문학 분야에 참여한 일이 있는데, 그때 멘토링을 비롯한 다양한 지원을 받았고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며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발간물을 제작했다. 국적과 언어를 초월해 창작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공통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관련한 지원 프로그램도 비슷한 모양을 띠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료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단골로 등장한 고민의 연장이었다.


  “기간 내에 작업물을 완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요?”


  잘은 모르지만 내 경우를 비춰봤을 때, 마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미루는 작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물을 만들어 가는 것은 공산품을 제조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원하는 기간 내에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피치 못하게 발생한다. 물론 계약이나 지원금 사업과 관계 없이 자기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상황이라면 창작물을 완성할 때까지 자기만의 속도와 시간을 조절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그럴 때 가장 속이 타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작가 자신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결과 보고서나 지원금 사용 내역 정산 같은 행정적인 부분까지 미뤄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건 아주 중요한 약속이다. 나의 행정 처리는 내 사업을 함께 진행하는 담당자들의 소중한 업무이고 사업 전체의 완결성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나아가 이후에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다른 작가들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작가들이란! 정산도 제대로 안 하고 무책임하다니까 말이지! 하는 인식이 생겨버리면 곤란하다. 그런 경험을 한 기관은 새로운 사업을 만들고 추진하는 것까지 주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작업물은 그것과 어쩔 수 없이 별개인 측면이 있다. 작품은 언제나 시간에 쫓기기보다는 완성도와 진실성에 쫓기기 때문이다. Dr. Rachel Franks는 내 질문에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대답했다.


  “We wait patiently.”


  전혀 생각하지 못한 범주의 대답은 아니었는데 유난히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는 것이 언제나 필요하다. 물론 나는 나를 위해 참을성을 발휘해 준 많은 담당자 선생님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한다. 작가라면 누구나 생각나는 얼굴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얼굴에 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감사한 마음을 기억하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공공성에도 조금 더 기다려 주고, 인내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공공성에 대해 조금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최근에 갖게 됐는데, 따져보면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Wait patiently”하는 마음인 것 같아서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은 종종 ‘공공서비스만족도’와 혼동되는 것 같다.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책이나 서비스가 수용자의 만족도를 얼마나 높여주는지 여부를 공공성의 척도로 삼을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공공성은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공동으로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숙의를 바탕으로 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는 때로 비효율이 개입하기도 하고 정량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가 서서히 피어나도록 기다려 주는 시간 역시 요구된다. 작가를 위한 지원이든, 도서관을 확충하는 것이든 간에 그런 일은 일반적인 경제영역처럼 투입과 산출이 단기간에 확실하게 드러날 수 없다.



  Dr. Rachel Franks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상상해 보자. Dr. Rachel Franks가 New South Wales 주 정부의 정기감사에 출석한다. NSW 도서관의 펠로우십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서 주의원의 질문을 받는다. 3년 전 펠로우였던 Hong Kim 작가가 여전히 소설을 내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죠? 이 사업은 실패한 것 아닙니까? 공공의 재원이 낭비된 것 아닙니까? 이 작가의 소설가 면허를 (그런 게 있다면) 박탈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년 펠로우십 예산 절반으로 삭감해야 맞지 않겠습니까? Dr. Rachel Franks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할 것이다.


  “We wait patiently.”



  나는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긴긴밤>을 읽고 눈물 흘린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하품하는 척을 여러 번 했고, 밤마다 <세계 끝의 버섯>을 읽으며 송이버섯이 만들어내는 경제가 지역마다의 독특한 패치 형태로 엮여가는 과정을 따라갔다. Writing Australia에서 도서관 공공대출보상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시드니 달링 스퀘어 도서관에서는 현지인처럼 자리에 앉아 돌아가서 써야 할 단편소설의 얼개를 메모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 덜 빵빵거리는 차들을 보며 여유에 대해 생각하고, 작가와 도서관이 마음을 주고받으며 차근히 성과를 쌓아가던 모습을 기억하게 됐다. 그리고 내가 상주작가로 있는 중화문학도서관에 돌아와 후기를 쓴다. 나를 기다려 주는 마음에 오늘도 감사하고, 나 역시 조금 늦게 오는 것들을 오래 기다리고 싶다.




  문학상주작가지원사업 2025년 우수시설에 선정된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 강화를 위하여 호주 시드니작가축제 및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인 멜버른을 탐방하고 우수사례를 경험하였습니다.
  2026년 5월 16일부터 27일까지 7박 9일간 참여자들의 호주 국외연수 후기는 문장웹진-모색 9월호에서 총 6편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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