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작성일 2026-09-01
- 댓글수 0
[문학의 곁]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원고를 읽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yj.archive)
권예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파주로 향한다. 꼬박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파주출판도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평 남짓한 서재 책장 한편에는 유난히 가벼운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미국 페이퍼백이었는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그 옆으로는 규칙적으로 꽂힌 만화책들, 어린 손으로는 한 번에 들기도 버거운 역사책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종이 두께와 제본 방식의 차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어떤 책은 손에 착 감기고, 어떤 책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친구와 경쟁적으로 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만큼이나 표지의 질감이나 판형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까슬까슬 사포 같은 질감의 책도 있었다. 그렇게 직접 손끝으로 짚어보며,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낯설고 매력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취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안의 두 다른 감각이 우연히 겹친 순간부터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국어 시간과 미술 시간에만 눈을 반짝거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편식이 성인까지 쭉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내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매일 가슴이 뛰었다.
문학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디자이너에서 팀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편적인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내 디자이너였던 내게 주어진 일은 멋진 프로젝트가 아닌 중쇄 진행과 광고 작업이었고, 자리에는 전원을 켜면 ‘윙-’ 하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형 맥이 놓여 있었다. 중쇄 작업을 하려면 어김없이 그 요란한 전원을 켜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괜히 동료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버튼을 누르곤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집에서는 틈만 나면 단축키와 툴 사용법을 독학해야 했다.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내 퇴근 후 일상은 낯선 용어와 디자인 프로그램 튜토리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을 바라보며 불안한 밤들을 길게 지새우곤 했다.
밤마다 툴과 씨름하며 기본기를 쌓아가던 즈음, 드디어 첫 책을 온전히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때 맡았던 첫 소설은 3차 시안까지 줄줄이 반려되었다. 그럴듯한 이미지를 조합해 얹어보는 데만 골몰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문장을 차근차근 짚어 나가자 이전엔 보이지 않던 서늘한 오브제와 복선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고 속 진짜 이야기로 들어가 다시 짠 시안은 한 번에 통과가 되었다. 원고 속 이야기를 깊이 읽고 이해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비로소 제대로 된 책을 한 권씩 만들어내기 시작했을 때쯤, 대표님으로부터 “이제 1인분은 한다”는 짧은 인정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책을 작업하면서 느낀 가장 큰 기쁨은, 독자로서 좋아하던 작가들의 책을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유정, 손원평 작가처럼 애정해 마지않던 이들의 이름을 작업 파일 속 저자명으로 만나는 일은 매번 좋은 설렘을 안겨주었다.
디자이너라면 잊지 못할 작업을 하나쯤 갖고 있을 텐데, 내게도 그런 각별한 책이 몇 권 있다. 그중 하나가 2018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인 《작별》이다. 《작별》은 소설가 한강의 수상작을 비롯해 강화길, 권여선, 김혜진, 이승우, 정이현, 정지돈 소설가의 작품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 소설집이다.


2018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작별》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15분이면 읽는 짧은 단편인데도 여운이 상당히 오래갔다. 담담히 문장을 읽어 내려가다, 이내 묵직한 슬픔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눈사람이 된 여성, 그녀의 연인, 아들, 그리고 쓸쓸한 벤치… 이 책은 동시에 여러 가지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한 편의 꿈 같기도 하고, 몽상 같기도 한 분위기의 문장으로 쓰여진 이 글에 구체적인 이미지는 도리어 독자의 몰입을 깨뜨릴 것 같았다. 그래서 핵심 이미지를 생략하고 분위기만 남기기로 했다. 겨울이라는 계절만 드러내고, ‘작별’이라는 글자를 눈으로 형상화했다. 제목을 레터링한 이유는 주인공이 점차 녹아 없어지는 심상을 표지에 꼭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금을 곱게 갈아 흩뿌린 것 같은 눈을 글자 위에 한 땀 한 땀 홀로그램 박으로 새겨 넣었다. 띠지에는 펄 용지에 분홍색 그라데이션을 인쇄해 한 줄기 희망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사람이 되어버린 그녀가 부디 녹아 없어지지 않길 염원하는 마음으로. 원고의 결을 물성으로 번역해 내는 일은 늘 고민스럽지만, 그 상상이 구현되었을 때는 늘 설레는데, 이 책이 그 재미를 알게 해 준 책이다.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빼놓을 수 없다.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 작가로, ‘한 세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작가’라는 찬사를 받는 세계적인 거장이었지만 국내에는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표지 방향을 두고 대중성에 초점을 맞추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제목이 가진 직관성을 살려 소녀의 모습을 표지 중심에 등장시켰다. 이 소설은 영화적으로 느껴질 만큼 장면 묘사가 정교하고 아름다웠는데, 때마침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말없는 소녀》가 개봉을 앞두고 있었고, 운 좋게 영화를 먼저 접하면서 표지를 풀어가는 데 좋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양장본(하드커버) 작업을 좋아하는 편이다. 디자이너가 책을 입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나는 데다, 독자들에게도 좀 더 소장 가치가 높은 책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합지에 종이를 싸서 몸통(싸바리)을 만들고 커버를 씌우는 과정, 그리고 어울리는 헤드밴드와 가름끈을 고르는 일은 양장본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맡겨진 소녀》 역시 그 즐거움 속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싸바리에는 이국적인 아치형 창문을 포인트로 넣었고, 그 위로 원제 ‘Foster’와 저자명 ‘Claire Keegan’이라는 최소한의 정보만 남겨 두었다.
뒤이어 선보인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원서 디자인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한글 제목을 비롯한 책의 전체 요소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고민 끝에 표지 그림에 등장하는 새 이미지를 싸바리까지 확장해 통일감을 더했고, 회색 바탕에 마른 나뭇가지를 넣었다. 쓸쓸하고 적막한 소설의 정서와 잘 맞아떨어지는 선택이었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다. 사실 소식을 접했을 때는 감이 잘 오지 않았는데, 서점 매대마다 빽빽하게 쌓인 책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 존재감이 피부로 와닿았다. 가족과 지인들까지 네가 만든 책이냐며 먼저 알아보고 연락을 해올 정도였다. 높은 판매량이 곧 좋은 디자인이라는 공식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고민해 지어낸 물성이 수많은 독자들의 삶 속에 스며들었다는 사실만큼은 디자이너로서 벅찬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이제야 《낭만 사전》
《낭만 사전》 인쇄 감리 현장
소설이 하나의 세계를 새로 짓는 일이라면, 에세이는 이미 펼쳐진 일상에 다정히 말을 건네는 일이다. 거대한 서사 속으로 독자를 이끄는 소설과 달리, 에세이는 언제든지 일상 속에서 부담 없이 펼쳐볼 수 있는 친근함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디자인 역시 원고마다 담긴 고유한 톤앤매너를 시각적인 물성으로 구현해 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가장 최근에 진행한 수풀림의 《꾸준함을 기르는 일》의 경우, 자기돌봄과 루틴, 기록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의 손에 가닿을 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손바닥에 착 감기는 단정한 판형을 정하고, 손맛이 느껴지는 서체로 본문을 앉혀 차곡차곡 디자인을 쌓아 올렸다. 반면 이제야의 《낭만 사전》은 '낭만'이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익숙한 이미지에 기대지 않기 위해, 내 안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새로운 감수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이름조차 생소한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을 무작정 찾아 듣는 것이었다. 출퇴근 길에 매일같이 들은 덕에 이제는 가사를 달달 외울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한다고 당장 영감이 샘솟아 디자인이 술술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과정은 나를 작업의 세계로 깊이 이끌고 몰입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져준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곁에 남을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마음. 종이책을 만들며 쏟아붓는 가장 확실한 정성이다.
하지만 그 정성을 실제 한 권의 책으로 구현해 내는 일은 매번 쉽지 않다. 책 디자인은 내용이라는 큰 축을 바탕으로 판형, 본문 구조, 색감과 물성, 최종 인쇄 감리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사고를 요구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끝없는 고민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한 끗의 차별성을 만들어 내고, 그 사이에서 전체적인 조화로움을 찾아가는 과정은 매번 새로운 숙제로 다가온다.
시안이 잘 풀리지 않거나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타협의 유혹이 찾아올 때면, 나는 원고에서 가장 마음에 남아있던 문장 하나를 메모장에 적어두거나 모니터 앞에 붙여둔다. 길을 잃을 때마다 그 문장으로 돌아가 처음 느꼈던 감정을 다시 짚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끙끙대기도 하고, 솔직한 피드백과 따뜻한 응원을 동료들과 주고받기도 하면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갈 힘을 얻는다.
특히 문학을 작업할 때마다 스스로 가장 경계하는 건, 디자이너로서의 욕심이 원고보다 앞서는 순간이다. 좋은 글일수록 나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나직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책을 펼쳤을 때 독자가 서사 속으로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주는 일.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는 여백을 남겨두는 것, 그것이 내가 책을 만들며 잊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다.
1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상은 더 복잡해졌고 끊임없이 자극적인 것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닿을 한 권의 책을 지어내는 이 일에 매료되어 있다. 쉽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누군가의 곁을 지킬 물성을 만들어내는 일. 원고에 담긴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그것이 내가 오늘도 모니터의 하얀 화면 앞에서 기꺼이 고민을 시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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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곁〉은 창작자뿐 아니라 문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하고 확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책이 독자에게 닿기까지 그 과정에 머무는 사람들, 문학과 독자 사이 어딘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번 문학의 곁에서는 사람과 책 사이에 가장 먼저 닿아 있는, 책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렬하게 전달하는 책 표지를 디자인하는 권예진 북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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