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506호에서 기다린 것들

  • 작성일 2026-10-01

  [레지던시 일기 - 서울프린스호텔]


  506호에서 기다린 것들


권희진


  호텔 앞에서 어떤 외국인을 보았다. 중요한 약속이 있는 듯 옷을 차려입었다. 옆에는 커다란 트렁크도 있었다. 누구를 만나려는 걸까. 연인? 친구? 아니면 오래전에 한국 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만났던 누군가? 나는 여러 상황을 상상했다. 산책하기 위해 나왔을 때 그 사람은 여전히 호텔 앞에 서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상대는 약속을 잘 안 지키는 사람이군, 하면서 그 사람 곁을 지나쳤다. 저녁을 먹으러 나왔을 때도, 밤 산책을 위해 나왔을 때도 그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부터는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공항에 가려고 차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숙소를 잡지 못한 걸까.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고 산책을 나왔는데 그 사람을 다시 마주쳤다. 호텔 앞에서 밤을 지낸 모양이었다. 새벽에 조금 쌀쌀했는지 트렁크에서 얇은 겉옷 하나를 꺼내 입고 눈을 감고 있었다. 선 채로 졸고 있는 그 사람을 보니 어쩐지 조금 쓸쓸해졌다. 점심쯤에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을 잊지 않으려고 그림을 그렸다. 작은 메모지에 연필로 슥슥 소리를 내면서. 모종의 이유로 그 그림은 공개할 수 없다. 절대 못 그려서는 아니다. 지금도 이렇게 글로 그 사람을 남기고 있는 걸 보면 꽤 인상 깊은 이미지였던 것 같다.

  호텔을 나온 후에도 종종 그 사람이 생각났다. 왜일까.


  프린스호텔에서 내가 주로 한 일도 기다리기였다. 무언가 생각나기를 기다리고, 좋은 문장을 기다리고, 흔히 말하는 영감이라는 걸 기다렸다. 기다리는 일이 지루해지면 나는 썼다. 결국 다 지울 문장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조금 이상한 일이다. 문장이 오길 기다리면서도 계속 썼으니까. 

  내가 머문 506호는 트윈룸이었다. 침대 두 개를 하루씩 번갈아 썼다. 하나만 쓰면 괜히 아까운 느낌이 들어서 두 개를 다 사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침대 얘길 왜 하느냐고? 침대만큼 뭔가를 기다리기에 적합한 곳도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물론 침대에서는 생각도, 사랑도, 꿈꾸는 일도 전부 가능하다. 다만 나는 침대에서 무언가를 먹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시트를 더럽히면 다음 일이 골치 아파진다. 아무튼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냥 잠만 잤다는 얘기는 아니다. 침대에 앉아서 소설도 쓰고 책도 읽었다. 정말이다. 

  잠깐 빨래 얘기를 해보자. 호텔에 머물면서 총 여섯 번의 세탁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니까 아마도 맞을 것이다. 로비 구석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는데, 세탁과 건조가 진행되는 약 80분 동안 나는 로비의 테이블에 앉아 소설을 썼다. 정확히 말하면 뭐라도 떠오르길 기다렸다. 로비는 기다림에 어울리는 곳이니까. 프런트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직원들, 택시를 기다리는 관광객, 내 세탁이 끝나길 기다리는 투숙객, 그리고 주인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는 많은 트렁크들과 함께 기다렸다. 그래도 빨래는 80분이면 끝이 났다. 그러면 나도 손을 멈췄다. 그리고 건조기에서 바삭해진 옷들을 꺼내면서 생각했다. 역시 기다리길 잘했다고.

  우습게도 나는 그곳에서 비를 기다리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비를 기다리는 건 나의 오래된 습성이다. 낯선 곳에서 비를 보면 어쩐지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침에 씻지도 않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간 날이었다. 그날은 빵 한 조각과 수프, 샐러드와 베이컨을 먹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식을 먹는 시간대는 명동이 막 붐비기 시작하는 때인데, 비가 내려서인지 평소보다 덜 혼잡했다. 차분한 명동의 아침을 놓칠세라 나는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분명 눈으로 볼 때는 운치 있고 좋았는데 막상 사진으로 보니 그냥 평범한 명동 거리처럼 보여서 조금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그날 난 뭔가를 좀 썼던가. 비가 오는 날에는 항상 뭐라도 썼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진 않는다.

  비를 제대로 맞았던 때도 있었다. 친구와 남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폭우를 만났다. 우산은 하나뿐이었는데 서로에게 우산을 기울이다 보니 결국 둘 다 거의 젖고 말았다. 창밖으로 바라보던 비와는 전혀 다른 비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비를 피하는 걸 포기했다. 그게 이상하게 후련했다. 506호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젖은 옷을 걸어두었다. 그리고 그 옷이 마르길 기다렸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눴던 어떤 관광객들도 생각난다. 사십 대 아버지와 십 대 아들이었다. DMZ에 가고 싶다는 아버지와 그곳은 지루해서 싫다는 아들. 내게 DMZ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들은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이 결국 DMZ에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 날 다시 마주치길 기대했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 기다리지 못한 순간도 있다. 복도에서 남자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벨튀’ 장난을 치려는 모양이었다. 어떤 아이가 “506호! 506호야”라고 외쳤고, 나는 아이들이 장난을 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갔다. 아이들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생각하면 모르는 척 벨이 울리길 기다렸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그랬다면 소설에 쓸 얘기가 하나 생겼을 텐데. 아직 난 관대한 어른도, 눈치 빠른 작가도 아닌 듯하다.

  어쨌든 나는 호텔에서 소설을 쓰려고 애를 썼다. 처음엔 간신히 80매를 썼다가 100매로 늘리기도 했고 나중엔 30매로 줄였다. 어떻게든 다시 분량을 채우긴 했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여전히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중이다. 퇴고가 끝나면 한 번쯤 506호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호텔을 떠나던 날, 택시에 오르는 내게 손을 흔들어 주던 직원분들의 얼굴도 함께 말이다.


  체크아웃을 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얼마 전 우연히 호텔 앞을 지나쳤다. 묵직한 트렁크를 끌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때 침대 위에서, 로비에서, 때로는 엘리베이터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던 일들이 떠올랐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초대한 친구를 기다리고, 와인을 마시기로 한 시간을 기다리던 그런 것들. 

  지금도 다음 문장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 한동안은 계속 그러지 않을까 싶다.



〈레지던시 일기〉는 문학 레지던시에 머문 작가들의 에세이입니다. 입주 기간 동안의 하루와 작업 과정,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마주한 감각과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작품 너머 창작의 현장과 작가의 내면을 함께 전합니다. 레지던시에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독자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모색

명동 산책

[레지던시 일기 – 서울프린스호텔] 명동 산책 도재경 몇 해 전 소설 창작 수업을 수강하던 한 학생에게 소설을 쓰지 않는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근사한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학생에게 허풍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솔직하게 답변한다는 게 고작 맥주를 마시며 놀 궁리를 한다는 거였다. 대답하고 나니 어쩐지 궁색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맥주를 마시며 노는 게 아니라 궁리를 하는 거라고……. 궁리를 한다고? 꼴에 선생이라고 자못 젠체한 듯해서 뒤통수가 가렵다.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동네를 어슬렁거리거나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 놓고 글을 끄적거릴 때면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져 종국엔 멍한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러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갈 때면 대체 온종일 뭘 했나 자책감이 들면서도 그러한 상태야말로 창작자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자세라고 합리화하곤 한다. 지난여름 명동에 자리한 서울프린스호텔의 ‘소설가의방’에 입주한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침구류는 새것처럼 빳빳해져 있었고, 물기 하나 없는 욕실에는 보송보송한 수건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허기질 일도 없었다. 늦잠을 자느라 곧잘 조식을 거르곤 했지만 호텔의 ‘이층서가’나 인근 식당에서 언제든 식사를 해결할 수 있고, 라운지에는 쿠키나 주스 등 간식도 가득했다. 그랬다. 분에 겨울 정도로 호사스러운 일상에서 부끄럽게도 불철주야 온갖 공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중 하나는 전기밥솥에 관한 거였고, 또 다른 하나는 돌멩이에 관한 거였다. 전자는 탈고를 앞둔 장편소설의 소재였고, 후자는 곧 쓰게 될 단편소설의 글감이었다. 퍽 다행스럽게도 호텔에서의 일상은 밋밋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친구와의 만남은 집필을 핑계로 죄다 퇴실 이후로 미루었고, 무더운 한여름에 호텔에서 머물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대부분을 객실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슬그머니 좀이 쑤실 때면 산책 삼아 호텔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호텔에서 남산초등학교로 이어지는 골목 초입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관광객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었는데 눈을 씻고 둘러봐도 특별할 게 없는 풍경이라 도리어 생경했다. 말없이 멍만 때리다 보면 입안이 퍼석퍼석해지기 마련인데 다행히 몇몇 동료 작가들이 입주해 있었다. 함께 식사하고선 소화를 시킬 겸 당구를 치며 각자의 공간에서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서로 위로 삼곤 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보니 어쩐지 반(半)백수의 삶과 다를 바 없는 듯해서 사족을 덧붙이자면 사회적 활동(?)이란 걸 하긴 했다. 7월 초에는 장흥에 계시는 한 원로작가님을 뵙고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7월 말에는 세종에서 특강을 하기도 했다. 그밖에는 딱히 이벤트랄 게 없었다. 어찌 됐든 소설을 쓰기 위해 입주했으니 모쪼록 심심한 날들만 이어지길 바랐다. 비가 그친 어느 날 오전이었다. 객실 창밖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연두색 사마귀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안

  • 도재경
  • 2026-10-01

문장웹진 모색

<하림의 사계절 문학책장> 책장지기의 기록

[문학의 곁] 책장지기의 기록 ― 문학이 동사가 되는 시간 하림 올해 초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일 년 동안 문학 행사를 함께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라는 이름의 행사였다. 노래와 이야기가 어우러진 문학 행사라는 설명과 함께 진행을 부탁했다.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문학 관계자도 아닌 내가, 북플루언서도 아닌 내가 이런 자리를 맡아도 될까 싶었지만, 노래라면 나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매 계절 나주로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3회차까지 마치고 처음으로 쫑파티를 제안했다. 요즘은 공연이 끝나도 쫑파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코로나 이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기도 했지만, 회식 자체를 권하는 일이 괜히 민폐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탓도 있는 것 같다. 우려와 달리 모처럼 모인 자리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동안 별다른 문제도 없었고, 무엇보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관객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작은 성공이 누구의 공인지 서로에게 돌리며 웃고 떠들다가, 그 자리에서 이 원고를 청탁받았다. 맥주 한 잔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흔쾌히 쓰겠다고 했다. 제안받은 글의 주제는 ‘문학의 곁’. 하지만 나는 문학의 ‘곁’에 있기보다는 문학의 ‘주변인’에 가깝다. 주변에 작가 친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을 향한 나의 애정도 친구들에 비하면 늘 부족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최근에는 꽤 많은 양의 책을 좋은 곳에 입양 보냈다. 작업실과 집 구석구석을 차지하며 무럭무럭 자라나던 책더미를 바라보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생긴 책장의 빈 공간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을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전자책도 많이 산다. 전자책은 공간에 대한 죄책감 없이 마음껏 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전자책은 특유의 손맛이 없어 정이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움이 될 팁을 하나 건네자면 서점에 들러 실물 책을 조금 만져보고 물성을 느끼고 나면 조금 나아진다. 어쨌든 언젠가는 내 스마트폰의 e북 앱이 SNS를 누르고 스크린 타임 1위에 오르는 날을 기대하고 있다. 책들을 대거 정리하고 달라진 점이 또 있다. 마치 편의점에 맥주 사러 가듯 도서관을 드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건강을 위해 종종 오전 러닝을 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동선에 구립 도서관이 포함되어 있다. 의미 없는 찬사와 자기과시로 점철된 술자리를 보낸 다음 날, 털려버린 영혼을 다시 채우고 전날의 죄의식을 씻어내 주는 곳은 천천히 달리는 하천가 산책로와 도서관이다. 땀에 젖은 운동복 차림으로 들어서는 것이 조금 쑥스럽고 미안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얼른 들어와 책장 사이를 가만히 걷다 보면 어느새 땀이 마르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늑한 골목 같은 서가에서 책등을 훑으며 거닐다 눈에 걸린 책 한 권을 들고 나온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이 마음에 들면 ‘득템’한 기분이 든다. 나에게는 조금 이상한 독서 습관이 있는

  • 하림
  • 2026-10-01

문장웹진 모색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문학의 곁]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원고를 읽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yj.archive) 권예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파주로 향한다. 꼬박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파주출판도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평 남짓한 서재 책장 한편에는 유난히 가벼운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미국 페이퍼백이었는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그 옆으로는 규칙적으로 꽂힌 만화책들, 어린 손으로는 한 번에 들기도 버거운 역사책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종이 두께와 제본 방식의 차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어떤 책은 손에 착 감기고, 어떤 책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친구와 경쟁적으로 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만큼이나 표지의 질감이나 판형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까슬까슬 사포 같은 질감의 책도 있었다. 그렇게 직접 손끝으로 짚어보며,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낯설고 매력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취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안의 두 다른 감각이 우연히 겹친 순간부터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국어 시간과 미술 시간에만 눈을 반짝거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편식이 성인까지 쭉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내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매일 가슴이 뛰었다. 문학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디자이너에서 팀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편적인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내 디자이너였던 내게 주어진 일은 멋진 프로젝트가 아닌 중쇄 진행과 광고 작업이었고, 자리에는 전원을 켜면 ‘윙-’ 하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형 맥이 놓여 있었다. 중쇄 작업을 하려면 어김없이 그 요란한 전원을 켜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괜히 동료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버튼을 누르곤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집에서는 틈만 나면 단축키와 툴 사용법을 독학해야 했다.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내 퇴근 후 일상은 낯선 용어와 디자인 프로그램 튜토리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

  • 권예진
  • 2026-09-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