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카르토그라피
- 작성일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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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서울프린스호텔]
빛의 카르토그라피
임택수
여행지의 호텔에 며칠 묵게 되면, 나는 꽃을 샀다. 야생의 빛 같은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방은 나를 밀어내듯 납작해졌다. 유리컵이든 값싼 꽃병이든 물을 담아 꽃을 꽂아두면, 방 안에 없던 높이가 생겼다.
오늘은 미모사 한 줄기. 만지면 부서지고, 멀어지면 공기 속으로 풀어질 것 같은 꽃송이들, 흩어지기 직전의 햇빛 알갱이 같다.
모네처럼, 아버지처럼 평생 정원을 가꾸며 살고 싶었지만 나는 여러 장소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주소는 자주 바뀌었고, 도착한 곳의 계절은 늘 막 시작되거나 막 끝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래 머무는 일보다, 잠시 머문 것들에 눈길을 주었다. 지나가는 빛이나, 금세 사라질 장면 쪽으로 조용히 서게 되었다.
서울프린스호텔에서 걸어서 오륙 분, 남산 초입에 모교가 있다. 언제나 열려 있는 정문, 비좁은 마당, 대극장의 파사드. 창의 배열과 입면의 분절이 만드는 리듬에 따라 시선을 옮긴다. 스물다섯에 입학한 학교는 경기도로 이전했고, 옛 건물은 부속 캠퍼스가 되었다. 오래전, 이 공간을 공유했던 사람들. 얼굴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담장에 바투 붙어 걷던 뒷모습 같은 것. 그리운, 스승의 방에서 흘러나오던, 주먹만 한 물방울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소리 같은 음악. 이해한 만큼 오해한 시간. 나는 입을 다문 채, 늘 바람 속을 걸어가는 사람 같다. 겨울이므로, 칼바람이 분다. 조금 더 늙은 기분이 든다. 뺨부터 천천히 지워지는 것 같다.
밤이 내려오자, 명동의 창들은 하나둘 불을 밝힌다. 머릿속에 펼쳐진 지도 위로 맥락 없이 떠올랐다 끊기는 장면들. 누구의 것도 아닌 시간이 잠시 눈앞에 머무른다. 어떤 기억은 슬픔으로 남는다. 그 기억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을지도 모른다. 십 대에 일했던 을지로입구 인쇄골목은 이미 지도에서 사라진 지 오래. 삼십 대의 직장과 디가 살던 충무로 적산가옥. 각각의 시절이 명동 주위의 위성처럼 가물거린다. 무력한 그리움. 명동이 아니라면, 나는 더 기꺼이 미쳤을 것이다. 저만치, 남산타워가 붉게, 느리게 깜박인다.
눈이 녹은 길 위에 염화칼슘이 뿌려져 있다. 큰길의 경사는 그대로인데, 안쪽 골목은 말끔히 정비되었다. 지워진 자리일수록 정돈된 얼굴을 하고 있다. 예술관은 기억보다 작게 보이고, 주변에는 게스트하우스가 눈에 띄게 들어섰다. 국적을 특정할 수 없는 얼굴들과 생소한 언어들이 궤도를 따라 떠다닌다. 어떤 식당에서는 히잡을 쓴 단체가 치킨을 먹고 있다. 닭을 볼 때마다 나는 김수영 시인을 떠올린다. 오래 머물지 못한 빛. 어쩌면 그가 남긴 짧은 밝음이야말로 우리가 통과한 벨 에포크였는지도 모른다.
네온이 쏟아지는 밤거리는 눈이 시리다. 불 꺼진 환전소 앞이 별안간, 환해진다. 눈을 떼면 사라질 것 같은 세 사람이 빛 속에 서 있다. 담배를 문 사람이 나를 똑바로 본다. 그의 두 눈에는 이미 끝이 와 있다.
현실은 늘 늦는다. 시는 그보다 먼저 간다.
그가 그렇게 말했는지, 내가 그렇게 들은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연기를 길게 빨아들인 뒤 내뱉지 않고 삼킨다.
늘 현재형이어야 한다. 과거로 가면 장식이 되고 미래로 가면 구호가 된다.
그는 온몸으로 문장을 밀어붙인다. 확신은 문장을 윤리로 만든다. 윤리가 되면 시는 안전해진다. 안전해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옆에 선 사람이 소리 없이 웃는다. 빛이 붙지 않는 프로필이다.
문장이 너무 빨리 닳는 밤이다. 오늘을 아무렇게나 쓸 수 없다. 그의 넥타이는 지친 혀처럼 늘어져 있다.
거리의 음악이 서로를 밀어내며 부딪친다.
나머지 남자가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넨다. 미완성 스케치다. 여인 하나가 머리에 짐을 이고 걸어온다. 창가에 기대선 남자는 바깥을 본다. 둘은 서로를 보지 않지만 같은 시간 안에 있다.
제목을 묻자,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고 그가 말한다. 고통은 없다. 비극도 없다. 다만 되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만 있다. 나는 감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감정을 먼저 놓으면, 그림이 핑계가 돼. 그래서 너무 멀리 가지 않으려고.
나는 끝내 버티는 선을 본다. 끝내 홀로 남는 그림자를 본다.
영양센터 가서 삼계탕이나 먹읍시다. 내가 말한다.
시는 안 되는데, 삼계탕은 되겠네. 눌린 얼굴의 그 사람이다.
삼계탕은, 시대를 안 가리지. 이미 밤을 다 써버린 사람이 말한다.
나머지 한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웃는다.
명동에는 빛이 넘친다. 붉고, 푸르스름하고, 허옇게 질린. 나는 모든 불빛이 동시에 꺼지는 순간을 상상한다. 어둠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자유다.
귀와 코가 붉어진 채 호텔로 돌아왔다. 카드키를 대기 전, 문에 붙은 숫자를 잠시 바라본다.
금속으로 만든 입체 숫자, 505. 멀리서 보면 숫자라기보다 신호에 가깝다. 짧고, 길고, 다시 짧은 간격. 누군가를 부르는 방식이다. 조명이 비스듬히 떨어지면서 5의 곡선에 얇은 그림자가 걸렸다. 거의 S에 가깝다. 가운데의 0은 흔들림 없이 닫혀 있고, 양쪽의 5는 그 원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본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잠시 움직이지 않는다.
카드키를 댄다. 문이 열리고, 숫자는 남는다. 거대한 도시 속에서 반복되는 이 번호는 내가 돌아오는 자리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같은 번호로 다시 들어간다. 어느 순간, 그것은 나를 부르는 신호가 된다.

<사진. 서울프린스호텔에서>
방은 고립과 보호를 동시에 품는다. 바람이 없을 뿐, 방 안의 공기는 바깥만큼 냉랭하다. 코트를 입은 채 한동안 움직인다. 방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하다. 누군가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은 침묵이 어린다. 처음부터 꺼내지 않기로 한 말들. 그 말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천장에 박힌 스포트라이트가 커튼 위로 떨어진다. 주름과 주름 사이, 한 뼘 남짓 파인 골에 그림자가 고여 있다. 흰 시트를 씌운 침대 위에는 그림자가 없다. 평평한 눈밭 같다. 발자국 하나 없는 설원 같다.
문득, 디와 묵었던 트윈룸이 떠오른다. 비바크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그날. 우리는 이른 시각에 호텔에 들어왔다. 창가 쪽이 더 차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 자리를 먼저 골랐다. 몸에 열이 많다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바깥 공기가 천천히 들어와 커튼을 밀고 돌아갔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디는 몸을 웅크린 채 앓는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디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몸이 차가웠다. 자리를 바꾸자고 하자, 디는 망설이지 않고 내 침대로 넘어왔다. 등을 보인 채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나는 난방 온도를 조금 올렸다. 기계 소리가 낮게 울리고, 공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디의 뒤에 모로 누웠다. 서로의 체온이 고르게 퍼질 때까지, 조금씩 간격을 좁혔다.
디가 좋아하던 ‘All Alone’을 듣는다. 묵직한 피아노가 낮은 자리에서 반복된다. 음악은 앞으로 흐르지 않고, 같은 자리를 짚으며 한 걸음씩 옮겨간다. 음 하나하나가 서로 기대지 않은 채 떨어져 울린다. 볼륨을 낮춰도, 피아노 소리는 작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와의 거리가 줄어든다.
맬 월드론(Mal Waldron)은 한때 연주하는 법까지 잊어버렸다고 한다. 다시 시작할 때, 그는 복잡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몇 개의 음을 오래 붙들고, 그 사이를 반복해서 건넜다. 화려한 즉흥 대신, 가장 작은 단위에서 음악을 세우는 방식이었다.
피아노 한 대와 방 안의 공기. 그뿐이다. 컵 내려놓는 소리,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 소리, 의자를 바닥에 끄는 소리. 그리고 심장 박동. 그 사이로, 내 생각이 방 안을 걸어 다닌다. 월드론의 연주는 모든 소리가 들리도록 비켜 서 있다. 멍하니 듣고 있으면 슬그머니 옆에 와 앉는다. 디의 고양이처럼. 디는 고양이를 부를 때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 번 두드리곤 했다.
피아노는 손이 기억하듯, 글은 세계가 기억할 것이다. 내가 단어를 잊어버려도 언어는 사회 안에 남는다. 나른한 공기 냄새. 나는 콘솔 위 조명 버튼을 끄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새벽 세 시, 잠에서 깼다. 어둠 속은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 공기가 물처럼 가라앉아 있다. 심해를 떠다니는 해파리가 떠오른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어떤 것들은 느리게 움직일 것이다. 전원은 모두 꺼져 있다. 히터와 가습기, 냉장고와 공기청정기, 전기주전자, 스탠드, 노트북까지.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데, 벽을 따라 희미한 인기척이 흐른다. 무엇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고, 무엇이 남아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꿈에서 디를 보았다는 것. 이제 꿈에서 디를 보면 그게 꿈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문득, 디의 장례미사가 떠오른다. 연기도 보이지 않는데, 프랑킨센스 향이 방 안에 퍼진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 젊은 사제가 말했다.
죽음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죽음은 너무 외롭습니다.
죽음은 너무 차갑습니다.
빛이 없어도 피어나는 생명체가 있다. 일테면 부생식물이나 유령식물 같은 것. 태양의 문법을 배우지 않은 존재들. 보여짐을 목표로 삼지 않고, 침묵 속에 번식하는 리듬. 이름이 붙지 않은 감정과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사유도 그런 방식이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자라고 있는 것들. 매일 육백 명이 넘게 태어나고, 구백 명이 넘게 죽는다. 나는 아직 빛과 어둠을 다 말하지 못한다. 어둠이 있다면 빛이 있을 것이다. 디가 떠난 지 사십구일째, 명동성당에 다녀왔다. 오전 열 시 미사가 시작되기 전, 미사예물 봉투에 디의 이름을 적어 위령미사를 신청했다. 대니, 댄, 김다니엘. 너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그분뿐. 나는 제대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았다. 기도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채, 그저 앉아 있었다.
외국인 신부가 복음을 봉독한 후 원고를 꺼내 들었다. 한국어로 빠르게 읽었다. 몇몇 단어가 조금 뭉개졌지만, 문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창세기의 빛에 대해 말했다. 그 빛은 태양보다 먼저 있었고, 어둠을 없애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세계를 알아보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빛이 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빛이고 이미 소금이라는 말. 나는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수행 끝에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는 말. 자신을 등불로 삼아야 하는 일. 그 등불을 고요히 지켜보는 일. 파도는 끊임없이 출렁이고, 바람은 매번 방향을 바꾸지만 그럼에도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자리. 스스로 섬이 되는 방식.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떠났다. 실내는 어둑해지고, 나는 남아 생각에 골몰했다. 빛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는 과잉의 빛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때 빛이 들어왔다. 제대 왼쪽, 열한 시 방향.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상 위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었다. 여덟 장의 꽃잎으로 나뉜 장미창. 빛은 유리를 지나 색을 얻고, 그 색으로 성당 안에 닿았다. 퍼지는 빛이 아니라 도착하는 빛. 선택된 경로와 시간에 닿는 빛. 그 빛이 내 머리 위에서 잠시 멈췄다. 빛은 나를 위로하지 않는다. 다만, 나를 드러낸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명동 길바닥은 밀랍을 바른 것처럼 번쩍거린다. 어디선가 끝없이 상승하는 하프시코드 연주가 고막을 때린다. 눈이 멀 것 같아, 눈을 반개한 채 걷는다. 길을 걸으며 세상에서 가장 밝은 곳은 어디일까 생각해 본다. 눈부신 사막의 한낮. 태양은 지면을 곧게 내려치고 그림자는 발밑으로 짧게 웅크린다. 그러나 그 빛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사물의 표면을 스치듯 튕겨 오른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장소를 떠올린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리, 태양의 중심.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수만 년 전의 빛이 지금도 길을 찾고 있다. 아마 내 문장도 아직 그 길 위에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을지로 쪽으로 향했다. 이제는 사라진 을지로입구 인쇄골목. 지금은 SKT 타워가 들어서 있다. 새 건물들 사이에서 옛 골목이 있었을 법한 위치를 짐작해 본다. 열다섯의 나는 걸핏하면 철야 작업에 붙들려 오프셋 인쇄기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 인쇄된 종이 가장자리가 검게 번진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오른손이 체인에 끼였다. 검지와 중지 손톱이 으깨어졌다. 통증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파지가 된 인쇄물이었다. 어린 내가 눈물을 흘렸는지, 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침이 왔고, 나는 골목 어귀로 달려갔다. 약사는 내 손에 붕대를 감아주며 다행이라고,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말을 떠올린다. 다행이라는 말.
아침은 언제나 눈 깜짝할 사이에 밝아진다. 시어 커튼 오른쪽 중간 높이에 달걀만 한 빛이 떠 있다. 커튼의 주름과 주름 사이, 그림자가 고여 있던 자리에 떨고 있는 빛. 나는 그 작은 빛을 바라보다가, 생각한다. 누군가는 빛을 진리라 불렀고, 누군가는 빛을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빛은 세계가 나에게 잠깐 나타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짧은 밝음 속에서 세계와 나 자신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본다.
체크아웃 시간을 앞당겼다. 그러나 나의 장례는 먼저 치렀다. 침대 시트 위에 남은 주름, 욕조 벽에 부착된 리트랙터블 빨랫줄, 커튼을 여닫을 때마다 달라지던 빛의 각도들. 나는 그것들을 정리하지 않았다. 정리된 것은 이미 죽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나는 이름을 가질 만큼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다만 매일 같은 복도를 걸으며 ‘지금 이것을 하고 있는 나’를 수 차례 만들어냈다가 지웠다. 프론트 데스크의 인사, 마흔한 번의 조식, 엘리베이터에서 스친 타인의 어깨, 거리를 점령한 수천 개의 트렁크와 거짓말. 누구도 내가 여기서 하나의 삶을 마쳤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장례는 울음도 꽃도 없다. 내일 저녁에도 명동은 여전히 명동일 것이고, 새 손님은 같은 방에서 다른 공기를 만들 것이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 끝 비상문 앞에 청소 카트가 멈춰 있고, 그 위로 아침 빛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나는 뒤돌아 문에 붙은 숫자를 본다. 금속으로 만든 입체 숫자, 505. 짧고, 길고, 다시 짧은 모스 신호. SOS. 이 신호에는 이름이 없다. 그저 누군가 여기에 있었다는 최소한의 흔적만 남는다. 나는 이 문을 수없이 드나들며 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들어가고 머물고 다시 나오는 동선 속에서 505는 어느 순간 객실 번호가 아니라 하나의 리듬이 되었다. 도시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나를 다시 나에게로 되돌려 보내는 작은 대칭. 내가 그 시간을 무사히 건너고 있다는 조용한 신호.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체크인에서 체크아웃까지 41박 42일이었다. 짐은 도착했을 때보다 조금 늘었다. 카드키를 반납했다. 프런트 직원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어느 호텔이든 프런트 직원의 작별 인사는 산뜻하다. 문을 나섰다. 명동의 빛은 이미 낮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잠깐 돌아보았다. 그러나 오래 보지는 않았다. 이 도시는 내가 떠난다고 해서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체류는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여기 있었다. 그리고 그 신호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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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는 문학 레지던시에 머문 작가들의 에세이입니다. 입주 기간 동안의 하루와 작업 과정,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마주한 감각과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작품 너머 창작의 현장과 작가의 내면을 함께 전합니다. 레지던시에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독자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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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산책[레지던시 일기 – 서울프린스호텔] 명동 산책 도재경 몇 해 전 소설 창작 수업을 수강하던 한 학생에게 소설을 쓰지 않는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근사한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학생에게 허풍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솔직하게 답변한다는 게 고작 맥주를 마시며 놀 궁리를 한다는 거였다. 대답하고 나니 어쩐지 궁색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맥주를 마시며 노는 게 아니라 궁리를 하는 거라고……. 궁리를 한다고? 꼴에 선생이라고 자못 젠체한 듯해서 뒤통수가 가렵다.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동네를 어슬렁거리거나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 놓고 글을 끄적거릴 때면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져 종국엔 멍한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러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갈 때면 대체 온종일 뭘 했나 자책감이 들면서도 그러한 상태야말로 창작자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자세라고 합리화하곤 한다. 지난여름 명동에 자리한 서울프린스호텔의 ‘소설가의방’에 입주한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침구류는 새것처럼 빳빳해져 있었고, 물기 하나 없는 욕실에는 보송보송한 수건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허기질 일도 없었다. 늦잠을 자느라 곧잘 조식을 거르곤 했지만 호텔의 ‘이층서가’나 인근 식당에서 언제든 식사를 해결할 수 있고, 라운지에는 쿠키나 주스 등 간식도 가득했다. 그랬다. 분에 겨울 정도로 호사스러운 일상에서 부끄럽게도 불철주야 온갖 공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중 하나는 전기밥솥에 관한 거였고, 또 다른 하나는 돌멩이에 관한 거였다. 전자는 탈고를 앞둔 장편소설의 소재였고, 후자는 곧 쓰게 될 단편소설의 글감이었다. 퍽 다행스럽게도 호텔에서의 일상은 밋밋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친구와의 만남은 집필을 핑계로 죄다 퇴실 이후로 미루었고, 무더운 한여름에 호텔에서 머물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대부분을 객실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슬그머니 좀이 쑤실 때면 산책 삼아 호텔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호텔에서 남산초등학교로 이어지는 골목 초입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관광객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었는데 눈을 씻고 둘러봐도 특별할 게 없는 풍경이라 도리어 생경했다. 말없이 멍만 때리다 보면 입안이 퍼석퍼석해지기 마련인데 다행히 몇몇 동료 작가들이 입주해 있었다. 함께 식사하고선 소화를 시킬 겸 당구를 치며 각자의 공간에서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서로 위로 삼곤 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보니 어쩐지 반(半)백수의 삶과 다를 바 없는 듯해서 사족을 덧붙이자면 사회적 활동(?)이란 걸 하긴 했다. 7월 초에는 장흥에 계시는 한 원로작가님을 뵙고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7월 말에는 세종에서 특강을 하기도 했다. 그밖에는 딱히 이벤트랄 게 없었다. 어찌 됐든 소설을 쓰기 위해 입주했으니 모쪼록 심심한 날들만 이어지길 바랐다. 비가 그친 어느 날 오전이었다. 객실 창밖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연두색 사마귀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안
- 도재경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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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호에서 기다린 것들[레지던시 일기 - 서울프린스호텔] 506호에서 기다린 것들 권희진 호텔 앞에서 어떤 외국인을 보았다. 중요한 약속이 있는 듯 옷을 차려입었다. 옆에는 커다란 트렁크도 있었다. 누구를 만나려는 걸까. 연인? 친구? 아니면 오래전에 한국 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만났던 누군가? 나는 여러 상황을 상상했다. 산책하기 위해 나왔을 때 그 사람은 여전히 호텔 앞에 서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상대는 약속을 잘 안 지키는 사람이군, 하면서 그 사람 곁을 지나쳤다. 저녁을 먹으러 나왔을 때도, 밤 산책을 위해 나왔을 때도 그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부터는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공항에 가려고 차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숙소를 잡지 못한 걸까.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고 산책을 나왔는데 그 사람을 다시 마주쳤다. 호텔 앞에서 밤을 지낸 모양이었다. 새벽에 조금 쌀쌀했는지 트렁크에서 얇은 겉옷 하나를 꺼내 입고 눈을 감고 있었다. 선 채로 졸고 있는 그 사람을 보니 어쩐지 조금 쓸쓸해졌다. 점심쯤에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을 잊지 않으려고 그림을 그렸다. 작은 메모지에 연필로 슥슥 소리를 내면서. 모종의 이유로 그 그림은 공개할 수 없다. 절대 못 그려서는 아니다. 지금도 이렇게 글로 그 사람을 남기고 있는 걸 보면 꽤 인상 깊은 이미지였던 것 같다. 호텔을 나온 후에도 종종 그 사람이 생각났다. 왜일까. 프린스호텔에서 내가 주로 한 일도 기다리기였다. 무언가 생각나기를 기다리고, 좋은 문장을 기다리고, 흔히 말하는 영감이라는 걸 기다렸다. 기다리는 일이 지루해지면 나는 썼다. 결국 다 지울 문장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조금 이상한 일이다. 문장이 오길 기다리면서도 계속 썼으니까. 내가 머문 506호는 트윈룸이었다. 침대 두 개를 하루씩 번갈아 썼다. 하나만 쓰면 괜히 아까운 느낌이 들어서 두 개를 다 사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침대 얘길 왜 하느냐고? 침대만큼 뭔가를 기다리기에 적합한 곳도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물론 침대에서는 생각도, 사랑도, 꿈꾸는 일도 전부 가능하다. 다만 나는 침대에서 무언가를 먹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시트를 더럽히면 다음 일이 골치 아파진다. 아무튼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냥 잠만 잤다는 얘기는 아니다. 침대에 앉아서 소설도 쓰고 책도 읽었다. 정말이다. 잠깐 빨래 얘기를 해보자. 호텔에 머물면서 총 여섯 번의 세탁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니까 아마도 맞을 것이다. 로비 구석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는데, 세탁과 건조가 진행되는 약 80분 동안 나는 로비의 테이블에 앉아 소설을 썼다. 정확히 말하면 뭐라도 떠오르길 기다렸다. 로비는 기다림에 어울리는 곳이니까. 프런트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직원들, 택시를 기다리는 관광객, 내 세탁이 끝나길 기다리는 투숙객, 그리고 주인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는 많은 트렁크들과 함께 기다렸다. 그래도 빨래는 80분이면 끝이 났다. 그러면 나도 손을 멈췄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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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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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의 사계절 문학책장> 책장지기의 기록[문학의 곁] 책장지기의 기록 ― 문학이 동사가 되는 시간 하림 올해 초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일 년 동안 문학 행사를 함께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라는 이름의 행사였다. 노래와 이야기가 어우러진 문학 행사라는 설명과 함께 진행을 부탁했다.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문학 관계자도 아닌 내가, 북플루언서도 아닌 내가 이런 자리를 맡아도 될까 싶었지만, 노래라면 나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매 계절 나주로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3회차까지 마치고 처음으로 쫑파티를 제안했다. 요즘은 공연이 끝나도 쫑파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코로나 이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기도 했지만, 회식 자체를 권하는 일이 괜히 민폐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탓도 있는 것 같다. 우려와 달리 모처럼 모인 자리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동안 별다른 문제도 없었고, 무엇보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관객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작은 성공이 누구의 공인지 서로에게 돌리며 웃고 떠들다가, 그 자리에서 이 원고를 청탁받았다. 맥주 한 잔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흔쾌히 쓰겠다고 했다. 제안받은 글의 주제는 ‘문학의 곁’. 하지만 나는 문학의 ‘곁’에 있기보다는 문학의 ‘주변인’에 가깝다. 주변에 작가 친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을 향한 나의 애정도 친구들에 비하면 늘 부족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최근에는 꽤 많은 양의 책을 좋은 곳에 입양 보냈다. 작업실과 집 구석구석을 차지하며 무럭무럭 자라나던 책더미를 바라보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생긴 책장의 빈 공간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을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전자책도 많이 산다. 전자책은 공간에 대한 죄책감 없이 마음껏 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전자책은 특유의 손맛이 없어 정이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움이 될 팁을 하나 건네자면 서점에 들러 실물 책을 조금 만져보고 물성을 느끼고 나면 조금 나아진다. 어쨌든 언젠가는 내 스마트폰의 e북 앱이 SNS를 누르고 스크린 타임 1위에 오르는 날을 기대하고 있다. 책들을 대거 정리하고 달라진 점이 또 있다. 마치 편의점에 맥주 사러 가듯 도서관을 드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건강을 위해 종종 오전 러닝을 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동선에 구립 도서관이 포함되어 있다. 의미 없는 찬사와 자기과시로 점철된 술자리를 보낸 다음 날, 털려버린 영혼을 다시 채우고 전날의 죄의식을 씻어내 주는 곳은 천천히 달리는 하천가 산책로와 도서관이다. 땀에 젖은 운동복 차림으로 들어서는 것이 조금 쑥스럽고 미안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얼른 들어와 책장 사이를 가만히 걷다 보면 어느새 땀이 마르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늑한 골목 같은 서가에서 책등을 훑으며 거닐다 눈에 걸린 책 한 권을 들고 나온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이 마음에 들면 ‘득템’한 기분이 든다. 나에게는 조금 이상한 독서 습관이 있는
- 하림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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