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서랍
- 작성일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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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서울프린스호텔]
내가 만났던 서랍
하가람
2026년 2월 13일 체크아웃을 하고 탄 기차에서 내가 앉은 자리 대각선으로 전자책을 보고 있는 남자가 있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작가의 말’이고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만났던 서랍을 잘 잊지 못한다. 문득 던진 시선이 정지한다. 실눈을 뜨고 한참을 들여다본 후에야 내가 ‘사람’을 ‘서랍’으로 잘못 읽었음을 알아챈다.
내가 만났던 서랍.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나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글을 쓴다. 주로는 두어 개의 카페를 전전하지만 몇 년 전 팬데믹으로 카페가 폐쇄되었을 때는 호텔에 묵으며 작업하기도 했다. 집에서는 왜 글을 쓰기 어려울까. 언젠가 본 영상에서 한 요리사는 말했다. 국물이 들어간 음식에는 10시 1분의 맛과 10시 3분의 맛이 있다고.
나는 매일 그날 하루에만 쓸 수 있는 문장과 장면이 있다고 믿는다. 많은 날 나는 나룻배 위에 있다. 검은 호수의 수면은 잔잔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늘 무언가 부유하고 있다. 헤엄치는 물고기나 신발 한 짝, 썩은 과일 같은 것들이 내 주변을 흐른다. 검은 호수에서 나는 매번 다른 것을 건져 올린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변하는 것은 없건만 내 자세는 달라진다. 한 호수에 오래 머물다 보면 바짝 세웠던 허리가 굽어지고, 어제 잡은 물고기나 오늘 잡은 물고기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는 생각이 밀려들기 마련이다. 익숙한 공간은 나를 무르게 만든다. 몸이 고되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별수 없이 집에서 작업하지만 그럴 때조차 집을 낯설게 만드는 의식이 필요하다. 영국 성당이나 사찰 ASMR을 틀어 공간의 공기를 바꾸고 평소에 쓰지 않는 향수를 방 안에 뿌리기도 한다.
정작 호텔 같은 곳에 들어가면 나는 반대로 군다. 문고리를 돌려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마주하는 전경―빳빳한 침구와 가지런한 가구의 배치―은 처음 만난 이의 얼굴만큼이나 서먹하다. 나는 잠시 얼어붙은 채 그 얼굴을 응시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친밀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내 물건을 소개하는 것이다. 쪼글쪼글한 핸드크림과 아끼는 티백, 인공눈물처럼 사소한 것들을 그에게 나누어주기. 짐을 풀자마자 나는 차가운 서랍 속에 소지품을 집어넣는다. 내 속내를 내어 보이듯 그 방 곳곳에 손길을 뻗는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어떤 공간을 나는 원하는 걸까?
내가 만났던 서랍.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다 보면 꼭 서랍 속에 물건을 두고 오는 일이 생기곤 한다. 체크인 직후에는 맨 먼저 서랍을 열어 물건을 채워 넣으면서도, 체크아웃을 할 때는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서랍을 열어볼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물건만 챙기기에 급급한 것이다. 왜 떠나는 나는 도착하는 나보다 언제나 조금 더 무심할까. 대개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곳에 물건을 놓고 왔다는 것을 알아챈다. 아니,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사라졌던 시기를 돌이켜보며 아마도 그곳에 두고 왔겠거니 짐작할 따름이다. 개중에는 엽서도 있었다. 어떤 기념일도 아니었던 평범한 아침, 어느 지방으로 향하던 기차역에서 그 애가 건넨 것. 검은 잉크로 빼곡한 엽서를 나는 어쩐지 서랍 속에 뒤집어두었고 숙소에 머무르는 내내 읽지 않았다. 그리고 잃어버렸다.
6주간 머물렀던 서울프린스호텔에서는 거울이 달린 화장대 앞에 앉아 작업했다. 매일 거울 속 나와 마주하며 글을 쓰는 일은 좀체 익숙해지지 않았다. 처음 거울 앞에서 노트북을 폈을 때는 작게 소스라치기도 했다. 작업을 하다 딴청을 피우는 내가(참 희한하게 생겼군) 체조를 하는 내가(정말 몸치군) 서랍 속에 손을 뻗는 내가(또 뭘 찾니) 그때그때 비쳤다. 화장대 서랍은 양쪽에 있었다. 왼쪽에는 내 소지품이, 오른쪽에는 초콜릿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언젠가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을 때 직원이 디저트 코너에 비치된 초콜릿이 맛있다며 내 양손 가득 쥐여준 것이 시작이었다. 솔티 캐러멜 맛. 달고 짠 초콜릿을 하나씩 까먹는 일은 갈수록 어떤 과업처럼 느껴졌다. 작업하는 동안 부지런히 먹어 치우고 다음 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면 직원은 어김없이 초콜릿 한 움큼을 다시 건네주었다. 나는 또 초콜릿을 먹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그 방을 떠날 때까지 초콜릿을 모조리 먹어 치워 서랍 속을 비워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거울에는 무해한 호의를 거절하지 못한 이의 난처한 얼굴. 한 줄을 적고 까고, 한 줄을 적고 먹고. 입천장이 까지고 혓바늘이 돋아날 때까지 적고 까고 먹으며 서랍 속 남은 초콜릿의 개수를 셌다. 하나둘셋열. 하나둘셋스물. 하나둘셋…….
해가 지는 기차의 창밖은 여전히 2월 13일. 전자책을 읽던 남자는 꾸벅꾸벅 졸고 잠이 오지 않는 나는 그가 읽던 ‘작가의 말’을 생각한다. 이번 호텔에서 나는 모든 것을 챙겨 나왔다. 초콜릿 한 알도 두고 온 게 없다고 믿어. 그렇지? 이내 터널을 통과하는 기차가 까만 유리창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을 밀어 올린다. 집요하게 나를 따라다니는 저 얼굴. 눈을 감는다. 눈꺼풀 너머로 남자가 읽던 문장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그 오독으로부터 문장은 다시, 내가 만났던 서랍.

서울프린스호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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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는 문학 레지던시에 머문 작가들의 에세이입니다. 입주 기간 동안의 하루와 작업 과정,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마주한 감각과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작품 너머 창작의 현장과 작가의 내면을 함께 전합니다. 레지던시에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독자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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