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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을 때

  • 작성일 2026-08-01

  [문학의 곁]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을 때

  ― 책 읽는 사회를 위한 <KBS 라디오 문학관> 


서현이


  1. ON AIR  

  스튜디오 출입문에 불이 들어왔다. 붉은색의 ‘ON AIR’ 글씨가 선명하다. 드디어 큐 사인이 떨어지고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다. 이제 소설 속 단어는 목소리 연기자 성우들을 만나 살아 움직일 것이며 쉼표ㅇ와 숨표는 호흡이 되어 깊이를 더할 것이다. 숨을 쉬기 시작한 문장은 음향효과를 만나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고 음악을 만나 날개를 달 것이다.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나면 또 하나의 생명을 얻게 된다.     


사진. KBS <라디오 문학관> 제작 모습


  2. 오프닝 혹은 여정의 출발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나기까지의 여정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전부터 시작된다. 1년 전부터 작품을 준비하는 경우는 특별히 의미가 있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작가의 탄생 100주년이라든가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 삼일절 특집 같은 기획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별한 기획이 아닌 경우 통상 3~4개월 전부터 준비한다. 

  라디오 드라마가 만나고 싶은 소설에 제한은 없다. 다만 어려운 점은 존재한다. 만남을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 요소는 2차 저작물 저작권료다. KBS 측에서 책정한 저작권료를 상대측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만남은 성사될 수 없다. 라디오 드라마와 소설의 만남을 방해하는 또 다른 장애물은 다시 듣기(=다운로드)다. 다시 듣기도 넓은 의미에서 저작권에 포함이 되겠지만 다시듣기만을 제한하는 곳도 있다. 이 경우 최대한 조정해 보지만 불발되면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는 만날 수 없다.


  3.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의 주파수 맞추기  

  라디오 드라마의 주파수와 잘 맞는 소설은 어떤 작품일까? 주파수를 궁합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 사이에 궁합이라는 게 존재할까? 당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궁합이 잘 맞는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 간단하게 정리하면 ‘소설을 읽었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서 쉽게 이해되는 작품’이다. 소설가들은 반문할지 모른다. ‘소설 문장은 서술과 묘사로 이뤄져 모든 상황을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다. 그리고 소설은 책을 덮은 후에도 깊이 사유하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게 소설의 힘이자 매력이다. 더구나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은 의미와 가치보다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경향이 뚜렷했고 그 결과 기발한 방법으로 형상화하는 소설들도 대거 발표되었다. 다양화된 소설 중에는 읽는 즉시 이해가 되는 작품도 있지만 두세 번 읽어야 하는 작품도 있다. 그런데 라디오 드라마 청취자들은 방송을 듣는 동시에 그림그리기를 원하고 듣는 즉시 이해하기를 원한다. 바로 그 차이, 읽는 소설과 듣는 라디오 드라마 주파수의 차이를 맞추는 게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방송 글의 기본은 구어체이면서 쉬워야 한다. 방송 진행자들이 하는 말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간혹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있을 때 진행자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설명한다. 같은 단어를 중복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중언부언도 용납된다. 그럼, 언제까지?  정답은 없지만 대중들이 이해할 때까지 해야 한다. 단, 지루하지 않게. 이왕이면 재미있게! 


  4. 라디오 드라마 각색의 비밀

  라디오 드라마 작가는 소설을 오디오 대본으로 각색하는 사람이다. 각색이 또 하나의 장르가 됐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TV 드라마나 OTT(Over-The-Top)의 활성화로 소설이 드라마로 각색되어 대중들을 열광시키는 사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일상화되었다. 소설을 각색할 때의 범위와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제목만 유지한 채 원작 전체를 재창작하는 방법도 있고 원작의 뼈대만 가져온 채 구성을 바꿔버리는 사례도 허다하다.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라디오 드라마의 각색은 어떻게 할까? 작가마다 차이가 존재하므로 개인적인 경험을 공개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할 때 몇 가지 원칙을 정해두고 있다. 

  우선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다. 원작자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최대한 살린다. 이때 가장 큰 어려움은 방송 시간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원작자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고 담기 위해서는 경중을 가려야 한다. 꼭 필요한 부분을 살리기 위해서는 아깝더라도 덜 중요한 곳을 버려야 한다. 동시에 청취자들이 지루해하면 채널을 돌리거나 꺼버리니까 재미도 고려해야 한다.

  그다음 소설가의 독특한 문장과 문체는 최대한 살린다. 소설은 문어체이고 방송은 구어체이다. 소설 문장 중에 메모해서 암기하고 싶은 문장일수록 문어체가 많다. 그 문장을 독백이나 내레이션으로 처리하면 문어체로도 소화할 수 있지만 대사 즉 구어체로 처리할 때도 있다. 간혹 성우들이 표현하기 어려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소설가를 빛나게 하는 문장이라면 그대로 살린다.

  또 하나, 청취자들이 원작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색한다. 소설의 특성상 그 의미를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 많다. 당연하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읽을수록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오는 게 소설의 힘이자 매력이다. 하지만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청취자들은 바로 들으면서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각색할 때는 남녀노소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게 각색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사람들이 소설 속 장면을 그릴 수 있도록 한다. 이 경우에는 음향효과를 최대한 살린다. 간혹 라디오 드라마 작가가 대사만을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오디오 드라마 대본 자체를 만든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소설 속 무대가 70년대 서울의 중산층 가정이라고 한다면 대본에는 음향효과에 대한 부분을 자세하게 적어야 한다. 전화기는 다이얼 전화기인지 주택은 단독주택인지 대문은 철 대문인지 방문은 여닫이인지 등등. 물론 ‘70년대 봄, 서울 중산층 단독주택, 마루, 밤’이라고만 적어도 음향효과 감독들이 알아서 표현한다. 70년대 봄 풍경 음을 깔고 서울 단독주택 마루에서 밤에 들을 수 있는 개소리나 새소리, 벌레 소리 등을 들리게 해 청취자들을 단숨에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음향 감독들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도록 표시하는 것 역시 라디오 드라마 작가의 몫이다.

  그리고 하나 더. 라디오 드라마 각색에 관심이 있어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오디오 각색의 비밀도 공개하겠다. 가장 기본적이면서 근본적인 공식은 딱 하나다. 들으면서 알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는 장면’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시나리오라면 별다른 대사 없이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클로즈업 하고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표정만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라디오 드라마는 그럴 수 없다. 오디오 대본에서는 먼저 음향효과를 정해줘야 한다. 된장찌개를 먹는 장소가 식당인지 가정집인지, 만약 식당이라면 테이블이 몇 개 정도 있는지, 손님들은 많은지를 적어둬야 음향효과 감독이 상황에 맞는 배경음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콕 찍어서 된장찌개라는 것’을 말로 해야 한다. 대사로 ‘이 집이 된장찌개 맛집’이라든지 ‘오랜만에 된장찌개를 먹으니까 엄마 생각이 난다’든지 그런 식으로 언급해야 한다. 보글보글 끓는 찌개가 된장찌개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5. 인공지능(AI) 시대 목소리 연기자 성우에게 희망은 있을까?

  라디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나만 꼽으라면 목소리 연기자인 ‘성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성우들을 만나면 ‘AI 때문에 위기’라는 말을 한다. 이러다 성우라는 직업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쏟아내고 있다. 실제로 성우들이 담당했던 안내 방송을 AI가 차지하는 사례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AI가 계속 발전하면 성우라는 직업은 사라질 것인가? 30년 넘게 성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라디오 드라마 작가의 대답은 ‘위협은 될 수 있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발음이나 발성에서는 AI가 성우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니니까 지치지도 않을 테고 상처받을 일도 없다. 감정기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며 목소리가 갈라지는 일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점,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AI가 유리한 그 점이 아이러니하게도 성우들한테 희망을 안겨준다고 생각한다. 그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현장은 라디오 드라마 연습실이다. 


사진. 라디오 문학관 연습실


  그날 배역을 맡은 성우들은 연습실에 오기 전 이미 대본을 충분히 숙지한 상태로 참여한다. 주요 배역을 맡았으면 원작도 읽고 온다. 그러니까 성우들은 이미 연습실에 오기 전부터 소설 속 인물로 살고 있다. 연습할 때는 치열하다 못해 경이롭다. 하나의 문장, 한 줄의 대사라도 그 속에 의미가 담겨 있다면 그냥 뱉지 않는다. 호흡에도 수십 가지가 있고 호흡의 길이를 몇 초 하느냐에 따라 감정은 달라진다. 망설임, 설렘, 떨림, 탄식, 절망 같은 감정을 표현할 때는 숨소리 자체가 달라진다. 웃음이나 울음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라디오 드라마 연습실에 참가한 성우들은 소설 속 인물이 되어 호흡하고 탄식하며 울고 웃는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하고 최선을 다해 목소리 연기를 했는데도 마이크가 꺼지면 성우들은 아쉬워한다.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 마음은 결코 AI가 흉내 낼 수 없다. 그래서 인공지능 시대에도 목소리 연기자 성우들에게 희망은 있다고 생각한다. 


  6. 소리 마법사 폴리 사운드 음향효과 감독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 때 많은 스태프가 함께 한다. PD, 기술감독, 음향효과 감독, 음악감독까지. 모든 분야가 다 중요하지만, 라디오 드라마의 매력을 가장 잘 구현하는 분야는 폴리 사운드 아티스트인 음향효과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 문장이 폴리 사운드를 만나면 독자들은 곧바로 소설 속 공간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건 마치 마법과도 같다. 실제로 음향효과 감독이 소리를 만드는 과정은 마법과 같다. 그래서 음향효과 감독은 소리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할머니가 물끄러미 바다를 보고 있었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라디오 드라마 작가는 음향효과 감독들이 이 장면을 만들 수 있도록 지문을 적어준다. ‘가을, 해거름, 바람 약하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 

  음향효과 감독들은 이 대본을 넘겨받으면 본격적으로 소리 만들기에 들어간다. KBS 라디오 문학관은 3명의 음향효과 감독이 소리를 만드는데 그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원작과 각색 대본을 읽은 후에도 장면이 그려지지 않으면 수시로 소통한다. 바다가 동해인지 남해인지 서해인지, 주변에 숲은 있는지, 어촌마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등을 확인한다. 어느 바다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바다마다 파도의 세기가 다르고 갈매기의 여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숲을 확인하는 것 역시 나뭇잎에 따라 바람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이고 어촌마을의 규모를 확인하는 것도 현장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음향효과 감독은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할 때 성우들의 움직임에서 나는 소리도 만든다. 예를 들어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밥과 장아찌를 꺼냈다. 단출한 밥상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밥에 물을 부었다.’라는 지문이 있다고 해 보자. 이때 음향효과 감독은 할머니 배역을 맡은 성우와 함께 움직이면서 소리를 만들어 낸다. ‘할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올 때 여닫이문을 열고 들어와 밥솥에서 밥을 퍼 담고 냉장고를 열어 장아찌를 꺼내 앉은뱅이 밥상 위에 올린 다음 숟갈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은 후 일어나 물을 가져와 밥에 붓는’ 움직임을 모두 소리를 표현한다. 실제 소리보다 더 실감 나는 소리를 만들어 내는 음향효과 감독은 소리 마법사다.


  7. 소설에 날개를 달아주는 음악감독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면서 소설 속 인물이 눈물 흘릴 때 함께 가슴 아파했던 장면이 있는가? 소리 없는 안개가 펼쳐지는 장면에서 소설 속 장면이 떠올랐다면 그때는 어김없이 음악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라디오 드라마 음악감독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본과 원작 읽기다. 모든 음악감독이 대본을 숙지하겠지만 라디오 드라마의 음악감독은 ‘분석하고 연구한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깊이 들어간다. 그래야만 등장인물의 심리나 작품 속 배경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시대가 1930년대라면 그 시대에 유행했던 음악을 배경음으로 선곡한다. 주인공의 지적 수준도 고려한다. 필요에 따라 편곡도 하고 직접 연주한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간혹 여러 버전의 음악을 가지고 와 스태프들의 의견을 구할 때도 있다. 그만큼 완성도를 높이려는 것이다. 

  음악감독의 작업이 끝나고 음악이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을 때 소설은 빛을 발한다. 빛의 날개를 달고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다. 라디오 드라마 음악감독은 소설에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이다.        


  8. ON AIR에 불이 꺼진 후

  ON AIR에 불이 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여기저기 인사가 오고 간다. 라디오 드라마 제작이 끝났다. 하지만 소설 속 뒷얘기는 끝나지 않는다. 열린 결말이거나 오브제가 등장하면 더 길어진다. 최근 가장 열띤 토론을 했던 작품은 202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 김근희 작가의 「루빅스 큐브」를 제작한 후였다. ‘김현이 황치록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 무엇일까?’와 ‘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라디오 드라마 제작은 불이 꺼진 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셈이다.

  성우들과 제작진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라디오 드라마 스튜디오의 문이 닫혔다. 이제 각자의 위치에서 또 다른 소설을 만날 준비를 할 것이다.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나면 또 하나의 생명을 얻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KBS <라디오 문학관>

프로그램 편성 : 한민족방송, 일 18:10 – 19:00

다시 듣기(클릭)



〈문학의 곁〉은 창작자뿐 아니라 문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하고 확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책이 독자에게 닿기까지 그 과정에 머무는 사람들, 문학과 독자 사이 어딘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이번 문학의 곁에서는 국내 문학작품을 라디오 드라마로 재구성해 오디오북으로 전하는 KBS 〈라디오 문학관〉의 서현이 작가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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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inz Janisch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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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대훈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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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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