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루발루의 작가견문록
- 작성일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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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구루발루의 작가견문록
오시은(인천광역시교육청중앙도서관 청소년문화공간 다누리 상주작가)
여행객들은 나를 까치라고 하더군. 이곳 사람들은 맥파이라고 하는데 말이야. 뭐라고 부르 건 내 진짜 이름은 따로 있어. 구루발루. 그게 내 이름이지. 가까운 친구들은 그냥 ‘발루’라고 불러.
나더러 “까치네.”라고 말하던 이들을 만난 곳은 포트 잭슨이었어. 언제나 여행자들이 넘쳐나는 항구 말이야. 파라마타강 하구 바닷가인데, 멋들어지게 생긴 공연장과 철재로 만들어진 아치교가 유명하잖아.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 솔직히 나도 그걸 보려고 갔던 거야.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을 만나러 갔구나 싶어. 아, 참고로 나는 운명 어쩌고 하는 걸 믿지 않아. 친구들이 점성술 하는 까마귀 집에 재미 삼아 몰려갈 때도 슬그머니 도망칠 정도니까. 그런 내가 그들을 운명이라고 여기게 된 건 좋아하는 게 같아서였어. 그들이 커피를 마시며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책과 작가들에 대해 말하더군. 실제로 그 중 몇은 작가라던데, 유독 눈길이 가는 이가 있더라고. 때때로 시선을 먼 곳에 두는 작가였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으려는 탐험가 같더란 말이야. 그때 감이 왔지. 그가 뭘 찾고 있는지 말이야. 이야기. 그것도 엄청나게 재미난 이야기.
나도 많이 해 본 일이라 금세 알 수 있었어. 그렇다고 나도 작가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야기를 사랑하는 건 작가 못지않다고 자부해. 쫄깃하고, 숨 막히고, 따뜻하고, 울컥하고, 기품 있는 언어로 가득한. 왜 있잖아, 시간을 잊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들. 참고로 내 둥지는 오래된 서점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에 있어. 이만하면 내가 책과 이야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겠지? 나는 먹는 거 다음으로 이야기를 좋아해. 재밌는 이야기 소리만 들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라고. 그래서 그날 포트 잭슨에서 결심했지. 여행객들, 아니 이야기를 찾는 작가를 따라다니기로.
그의 눈동자가 빛나던 순간이 기억나는군. 작가들을 지원하는 곳의 책임자를 만났을 때였지. 작가에게 상금도 주고, 한 명의 시인을 뽑아 국립 시인상도 주고, 여행 기금도 주고, 문화유산에서 작업할 기회도 제공한다는 설명을 들을 땐 고개만 끄덕이더라고. 하지만 도서관에 책이 비치되면 작가에게 보상한다는 대목에서 눈동자가 커졌어. 출판사와 작가에게 반반씩 보상하다가, 삼 년 후부터는 작가에게만 보상하는데, 유명 작가에게 쏠리지 않게 상한제를 둔다고 했지. 그 모든 게 법에 따라 지켜진다는 말을 듣는 그의 눈에 부러움이 흘러넘치더군. 나한테는 전혀 새롭지 않은 얘기라 그런 반응이 신기했지. 인간의 시간으로 치면 삼십 년도 더 된 일이라 고전이나 마찬가지였거든. 그토록 당연한 걸 부러워하는 게 흥미롭더라고.
다음으로 간 곳은 오페라 하우스 옆에 있는 로열 보타닉 가든이었어. 마침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던 차라 반가웠지. 말이 가든이지 여긴 원시 식물원이라고 봐야 해. 수백 년 된 거목들이 솟아 있는데, 그 중엔 공룡의 먹이였던 올레미 소나무도 있지. 그뿐인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고사리들이 나무처럼 자라서 밀림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알록달록한 야생화들이 철마다 피어나니 새들에게는 가든이 아니라 천국이나 마찬가지였지.
그런데 이곳이 작가들에게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었어. 천국과도 같은 이곳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창작하도록 기회를 주고 있다는 거였지. 마침 두 명의 작가가 지원받고 있어서 그들과 얘기를 나누더군. 이곳에서 어린이책을 쓴다는 작가는, 가든에 ‘작가의 오두막’을 만들고 싶댔어. 그 얘긴 나도 좀 솔깃했어. 멜버른 책방에 마련한 둥지처럼 ‘작가의 오두막’에 둥지를 짓고 싶었거든. 박제되지 않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을 기회를 얻는 건 꽤 매력적인 일이잖아. 그런 곳에서는 새들도 맑은 소리를 내는데, 사람이라고 다르겠어. 작가들이 멋진 이야기를 지을 장소로 보타닉 가든 만한 곳도 없지 않겠어. 암, 그렇다니까.
시드니 작가 축제도 꽤 인상적이었지. 옛 철도 차량 정비소를 개조한 캐리지 웍스에서 열렸는데, 거칠고 빈티지한 구조물들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더군. 어느 시대건 오래된 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가 동시에 읽히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
진실을 보여줘(SHOW ME THE TRUTH)가 이번 축제의 주제인데, 가짜 뉴스의 범람과 인공지능이 글을 쓰는 시대이니, 무엇이 진짜인지 문학으로 고민해 보자는 취지를 담았다고 하더군. 커다란 눈들을 그려 넣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지. 알고 봐서 그런지 눈들이 진실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어. 세계 5대 문학 축제 중 하나라 전 세계 작가와 사상가들이 참여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었지. 하지만 메인 축제장인 캐리지 웍스를 둘러 본 그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어. 그때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내가 똑똑히 들었지.
“우리 도서전보다 규모가 작네.”
축제 기간에 지역 서점과 연계해서 프로그램을 광범위하게 펼지는 건 주목할 만하지만, 메인 축제장의 규모와 열기는 자기 나라에서 열리는 도서전만 못하다는 얘기였지. 그 말을 들으니 불쑥 호기심이 일었지. 언젠가 그가 말한 도서전에 가보고 싶다는 의지도 솟고 말이야. 어쨌거나 그를 따라 참관한 <번역의 재발견 : 낯선 것과 익숙함의 경계를 넘어서>의 열기는 뜨거웠어.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두고 경청하는 자세도 놀라웠지. 새로운 것에 대한 인간의 지적 탐구심은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 덕에 이야기가 끝도 없이 만들어지니, 격려하고 싶더라고.
축제장 말고도 간 곳이 수두룩했어. 호주의 문화 박물관이자 아름다운 열람실을 가진 뉴 사우스 웨일즈 주립 도서관에 가고, 독립 서점들도 방문했지. 서점에 쌓여 있는 낡은 책의 향기를 맡으니, 내 둥지가 있는 멜버른의 책방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다음 목적지가 멜버른이라지 뭐야. 마음이 통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깍깍” 소리를 내고 말았다니까.
멜버른이야말로 예술의 도시지. 내 둥지가 멜버른에 있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야. 멜버른은 말이지, 도시의 외관은 물론 골목 구석구석까지 예술이 스며든 곳이라고 할 수 있어.
골목 담벼락이 거대한 도화지 역할을 하는 호저 레인이 있고,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과 국립 미술관이 있고, 문학의 심장이자 생각의 아지트인 휠러 센터가 있고, 백 명이 넘는 예술가의 스튜디오로 채워진 니콜라스 빌딩은 예술 공동체 역할을 하고 있지. 또 도시 곳곳에 있는 오래된 독립 서점들은 건강한 독서 생태계를 지켜내고 있어. 멜버른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유네스코 문학 창의 도시’가 된 데에는 이런 배경들이 한몫했지.
누가 뭐래도 멜버른의 자랑은 지역 서점이라고 할 수 있어. 런던 도서전에서 ‘올해의 인터내셔널 서점’ 상을 받은 적이 있는 독립서점 리딩스는 ‘리딩스 문학상’을 만들어 신인 작가와 로컬 작품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어.
어린이책을 전문으로 하는 리딩스 키즈는 일요일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였지. 그도 이 서점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마침 마녀 복장을 한 직원이 아이들과 바닥에 앉아 책을 읽어 주고 있더라고.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책 속으로 빠져들어 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지.
서점을 갈 때마다 그의 시선이 오래 머문 곳은 손 글씨로 적은 북카드였어. 서점 직원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에 대한 추천 글을 적어 놓은 건데, 그런 북카드가 서가 마다 붙어 있었지. 서점 이용자들이 믿고 고르는 Staff Pick이 있을 정도라니 이것 또한 독립 서점만의 고유한 문화라고 할 수 있지. 베스트셀러 목록보다는 누군가가 적은 손 글씨가 책의 온기를 더 잘 전하지 않겠어.
예술가들의 문화 허브인 니콜라스 빌딩은 수동으로 문을 열고 닫는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거기에는 백 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미로 같은 복도가 나타나고, 복도를 따라 늘어선 문에는 그 방이 누구의 공간인지, 어떤 작업을 하는 곳인지 명패가 붙어 있었어.
그를 따라 들어간 방은 한 화가의 작업실이었지. 화가의 그림이 벽면을 따라 걸려 있는데, 그림이 없는 곳엔 나무틀로 고정된 격자창이 있었지. 창문 너머로 플린더스 스트리트 기차역과, 건물 입구에 걸려 있는 아날로그 시계들이 보였지. 그가 창밖을 내다볼 때는 기차역 광장에 오래된 트램과 새것처럼 보이는 트램이 교차하며 지나고 있었어. 트램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지. 낯선 공간에서 이국적인 풍경을 보는 여유를 느끼는 듯했거든. 그가 눈으로 좇고 있는 트램처럼 오래된 것과 새것이 같은 시간에 공존하는 것이 멜버른의 특징이지.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 그가 찾고 있는 이야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이야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말이야.
하루에 이만 보를 걷는 이들의 여정이 마무리된 곳은 사사프라스 마을이었어. 이거야말로 운명 같은 일이었지. 내 둥지가 있는 곳이 바로 거기거든. 마을 전체가 유칼립투스 숲과 거대한 고사리 군락이 이루어져 있어 공기의 질감부터 다른 곳이지. 시나몬과 생강 향이 나는 사사프라스 나무가 마을의 이름이니 더 말 안 해도 알만 할 거야.
하지만 사사프라스 마을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지. 그건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에 나오는 할머니 탐정 ‘미스 마플’의 집이 있기 때문이야. 당연히 미스 마플이 사는 진짜 집은 아니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 집을 보겠다고 사람들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책을 들고 오는 걸 심심찮게 본다니까. 그게 바로 이야기가 가진 힘이지.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자, 이제 나의 집이자 그가 들른 마지막 서점에 대해 말해야겠군. 빈티지 서점. 이름 그대로야. 여기는 낡고 귀한 책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점이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운 색조의 원목 서가가 공간을 채우고, 천정에는 클래식한 샹들리에가 노란빛을 뿜어내지. 주인장이 지키고 있는 낮은 책장은 유리로 만든 진열장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초판본이 놓여 있어. 주인장이 애지중지하는 책들 중 하나지. 내 둥지는 앨리스가 있는 책장 왼편에 있는 비밀 서고 안쪽이야. 거기 새 둥지가 있다는 걸 주인장은 모르지. 아마 꿈에도 생각 못 할 걸. 비밀 서고에서 바깥으로 연결된 통로가 있다는 건 우리 집안의 비밀이거든. 비밀이니 여기까지만 말하지.
서가를 둘러보던 일행이 하나둘 서점을 빠져나가고, 그가 마지막으로 문을 향해 걸어 나갔지. 그때 나는 근처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어. 그는 서점 입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지.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어. 나는 눈길을 피하지 않았지. 그도 그러더군.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바라봤지. 그의 까만 눈동자에 파란 하늘이 들어 있었어.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도 얼핏 스쳤지. 그 순간이었을 거야.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 것이. 늘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꽃이 피니 신기했지. 갑자기 그가 주머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더니 뭔가를 적기 시작하더군. 너무 멀어서 뭐라고 적는지는 알 수 없었지. 하지만 글씨를 쓰는 손의 움직임을 보니 알 것도 같았어. 마침내 원하던 이야기를 찾았다는 걸.
적은 걸 주머니에 찔러 넣은 그가 발걸음을 옮겼어. 그의 뒷모습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지 뭐야. 글쎄 아이처럼 겅중거리는 걸음으로 팔까지 휘휘 내젓고 있더라니까. 나는 그가 찾은 감정이 오래 지속되길 빌었어. 그래서 멋진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싶었지.
나는 그가 아주 작아질 때까지 지켜보다 둥지로 들어왔어. 여행이 좋은 건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 이제 그만 나도 쉬어야겠어. 이번 여행을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건 언제라도 늦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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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주작가지원사업 2025년 우수시설에 선정된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 강화를 위하여 호주 시드니작가축제 및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인 멜버른을 탐방하고 우수사례를 경험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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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석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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