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 박물관
- 작성일 2024-10-01
- 댓글수 0
자연사 박물관
박유빈
문장을 읽는다
끔찍하단 건 뭘까 나무 의자에 동여 묶인 육체가 늪에 엎질러지는 기분일까 그렇듯 말의 침몰은 세계가 끝장나는 때에 올 것이다
누군가 내게 벽만을 바라보게 한 다음 마지막 문장 남길 기회를 준다면 어쩌면 난 벽 아닌, 벽과는 다른, 벽보다는 무른 곳에 어떤 문장이든 텁텁한 글씨를 아로새길 것이다
내 것 아닌 숨
누구의 것도 아닌 멸망
호흡해야 한다
시가 하등 쓸모없는 숲에서도 호흡은 이어지고
열대림의 연속이거나 천장에 맺힌 문장부호들이거나 어느 것이든 높고 습하고 드넓게 뻗친 문장
말과 친밀한 세계라면······
말이 말과 사귀어 이렇게 작은 방에도 천장에 간신히 매달린 글자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말은 이끼다
이곳은 단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살과 무성생식을 반복하는
버려진 시들이 모여 사는 마을
이끼 숲에서 탄생은 곧 지워짐
언제까지고 상상해봄 직한 영원한 조형 세계
지워진다는 것은 우리의 말이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 것 벌벌 떨면서도 무작정 오염될 필요 없는 것 시가 돌아온다면 몸을 고쳐서 올 것이고
시를 읽으면 두 발은 잠긴다
나무 의자에 앉아 시가 몸을 휘적이며 이곳을 향해 산뜻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실루엣을 바라본다
즐겁다기엔 신비롭다
공들여 채집한 첫 곤충을 들여다보는 마음으로 시의 발끝을 살핀다
고개를 들면
뚝뚝
육신을 둘러싼 이끼 된 단어들
오래전 늪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다섯 손가락이 발목을 잡아끄는 감각
축축해라
끔찍하단 기분은 뭘까
눈을 감고 주위를 서성이는 언어들의 둔탁한 발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머리 위 느린 종소리
쌉싸래한 바람 맛
하나에서 쪼개진 이파리들의 들숨과 날숨
손을 건네면
언어들의 고민이 이어지는 내내 나무 의자에 앉은 나는 상상만으로도 가볍게 늪을 지나고 이끼 숲의 언어 교환에 훼방을 놓고 소음을 끼얹고
숲이 곧 숨인 것처럼
마음은 의자 위에 두고 가늘게 늘어뜨린 눈빛
찌르레기가 정말로 울고 있다
말을 되감아 올리며
감은 눈이 문장을 더듬는다
무언가 뒤바뀐 문장을 찾아낸다
유심히 지켜보는 상상 속의 눈
진득해진 기분의 낯빛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습한 뒤통수와 마주친 늪의 표면
호흡한다
다신 소망하지 못할 것처럼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