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의 빛
- 작성일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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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빛
권기덕
나는 악역 배우다. 한때는 유명한 서부극 주인공이었다. 지금은 추락하는 중이다. 방금도 TV 시리즈 촬영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 쓰러진 것은 그래도 쓰여지는 것, 쓸모 있는 시절은 언제나 나 자신보다 빠르다. 나로부터 악마를 꺼내 어린이 앞에 마주하게 한다. 악마 또한 배우의 실감 나는 죽음을 기대한다. 배우는 삶에서 끊임없이 배우는 자다.
어느 날엔 세트장에 이상한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빛은 호텔 기둥에 매달린 밧줄에 한동안 머무르다 술통 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술통은 스스로 굴러 가기 시작했다. 술통에서는 어떤 여행자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울부짖는 짐승의 거친 포효가 들리기도 했다. 술통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 술통은 새가 되어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어떤 빛에 대해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다 그곳에서 길을 잃었다.
빛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불안했다가 섬세해졌다. 빛을 향해 대사를 던지니 그림자가 걸어왔다. 사라진 빛은 자유로웠고 나는 끊임없이 솟구치는 분노가 이 세트장을 불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불타는 세트장에서 대역 스턴트맨이 나 대신 죽고 영화는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나는 그제서야 이곳이 어린 여우와 대화를 나눴던 트루디 프레이저* 의자 앞이라는 걸 깨달았다.
빗속에서 빛이 다시 보였다. 빛을 따라 다시 걸었다. 개가 뿔 달린 인간의 다리를 물어뜯고 있었고 총에 맞은 히피족들은 머리가 없었다. 살인 영화를 보며 자란 살인자는 공중에 칼을 휘두르다 빛에 눈동자를 잃는다. 빛은 누군가에겐 빚이 되어 공공의 적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를 위해 추억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저 빛의 동작을 흉내 냈다. 가끔 빛이 내 안에 머물다 빠져나갔다.
그해 배우의 수영장에는 이웃에 사는 여우들이 밤새 술을 마시며 빛과 함께 놀곤 했다.
* 영화 〈원스 어 폰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등장하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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