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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

  • 작성일 2026-02-01

   팬덤


장수양


     옷장에서 너를 꺼내. 표정이 왜 그러니. 황당하단 표정. “네가 날 왜?” 너를 추궁하지 않아. 다만 가슴 위에 꾹 눌러. 이제 말해 봐. 입이 붙어 버린 너에게 나는 열려 있어. 나처럼 말해야 해. 안 그러면 도망치고 싶어.


   레지  이제야 솔직해지는군.


   우리가 싫어하는 옥색 건물 위에 불이 켜졌다. 노을이다. 해는 언제부터 노을로 승진할까. 궁금하지 않지만 물어는 본다. 답은 이미 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해는 노을의 지위를 얻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 배반자를 봐준다. 노을은 얼마나 순식간에 하루를 배반하는가? 반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반하지 못했다. 


   김 같은 밤하늘이 구워지고 있다.


     구운 김을 각별하게 요구하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야.


   레지  그럼 어느 나라 사람인데.


     팬 사람. 이렇게 말함으로써 시민권을 따내지.


   레지  지금 이 순간?


     명실상부한 이 순간. ‘지금’은 아니. 그것은 우리의 지갑에만 있어.


   레지  누구도 널 보증하고 싶지 않을걸. 잘 들어. 나는 결코 네가 이 하루를 떠나도록 허락하지 않으리. 


   팬  팬을 외면하는 거니?


   레지  넌 차라리 유승준이야.


   가슴은 수박밭이다. 대포 같은 수박이 영근다. 우리는 겨울에도 수영장처럼 찰랑거리는 화채에 뛰어들기를 원한다. 술 대신. 음. 거짓말이다. 우린 술병을 보석처럼 부수기를 원한다. 누구와 함께든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와 술을 나눈다는 것은 몹시 위험하다. 술을 원하기 위한 도구로 상대를 이용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짓은 이제 금지다. 


   팬과 레지, 우리는, 우리의 이 우아한 덤 앤 더머는, 고급 오피스텔에 살며 주차장 한 칸에 고객의 카니발을 주차해 두는 사람을 좋아했다. 항상 카모 바지와 카모 블루종을 입고 다니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그가 군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레지  카모 패턴을 각별히 즐겨 입는 사람은 군인이 아니야.


   옷장 속에는 여섯 개의 헤어드라이어가 있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헤어드라이어가 많은가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가 말하길 글쎄, 아무튼 그중 네 개는 엄청 비싸. 에스메랄다*) 귀걸이보다 비싸다고.


     편지를 쓸 때마다 생각해. 넌 날 반드시 비웃을 거라고. 그래서 보내지는 않아. 이런 일은 익숙해. 너는 지인들 중 누구도 만나기를 고대한 적이 없다고 말했어. 그것이 지인들이라고 말이야. 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만 누구를 만나고 싶어진다고 했지.


   레지  앞으로 날 부를 때마다 원하는 술과 안주를 캡처해서 보내요. 비비노(vivino)**)의 캡처를 보내도 좋아요. 동네에 주류 상점이 있으니까. 미리 주문을 해 놓을게요. 저번처럼 동물의 사진을 보내지는 마세요. 사람도 사양입니다. 구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는 길고양이를 그 집에 데려가고 싶진 않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할게요. 그 집은 고급 오피스텔이고 옵션도 멋지지만 드나드는 사람들은 돈만 주면 뭐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죠. 당신에게는 아무도 케어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 절취선 ==============



   우리는 다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직전의 대화는 재현에 불과했다. 웃는 악마가 잠시 그것을 틀어 놓았다. 아마 우는 천사***)의 공격을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비디오테이프를 클리너에 넣고 돌리며 DVD를 회상했다. 


   레지  천계영의 만화. 그걸 보며 울었어.


     누가 널 울렸지?


   레지  디디였지. 넌. 땀이었어?


     모두에게 언뜻언뜻 비치는 언플러그드 보이****)였죠.


   플러그 없는 문제. 우린 그것을 화단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아닌 사람이 살고 있는 저택의 긴 화단. 끝끝내 봄은 번성할 것이다. 우리의 소유가 되지는 않는다. 몰래 씨를 뿌리거나 물을 준다고 하여도. 매혹적인 연인들이 군집으로 자라난다고 하여도. 밀어 한 마디 나눌 수 없다.

 

   우리가 꽃다발을 안는다면 그것은 훔친 꽃다발일 것이다. 


   레지  편지는 잘 읽었어. 결코 비웃지 않았어. 맹세해. 잘 감췄지만 절취선 위에 앉아서 내가 졸고 있단 거, 모르지 않거든. 날 얕본 건 아니지? 휴! 그리운 기분이야. 넌 지금의 내가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려 줬어. 유일하게 어투를 바꿨더군. 당시 난 이미 너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풍부했지만 높임말을 쓰곤 하였는데.


     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누가 나를 칼로 저미는 느낌이 든 적 있죠.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햇빛이 칼날 같단 생각, 해 본 적 있어요?


   난 다른 누군가에게 나를 제공하려고 하였는지 몰라요. 그러나 마음먹은 순간부터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없어지는걸요. 아무도 부여하지 않은 지위를 획득하는 거예요. 사과를 깎는 이유는 먹기 위해서예요. 그것은 토끼가 될 수도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어요. 사과로 하여금 통증을 익혀요. 그것이 통증인지, 가려움인지, 염증의 가능성인지, 예측해야 해요. 유보할 수 없어요. 당신은 사과의 어둠이 빨갛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잘 들어요. 사과의 어둠은―


   유방암 검사를 받으러 갔다. 의사는 우리의 가슴을 뒤적거렸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군. 당연히 불쾌하지 않았다. 의사잖아.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다양한 혹을 화면 위에 파랗게 보여 줬다. 아! 가엾은 혹부리 여인. 우린 하늘을 보았다. 천장은 곧 하늘이다. 아무것도 착각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가. 우리를 해부했던 과일에 대하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레지  사람의 살결을 닮은 과육이 있어요. 부드럽고 빛이 잘 바래며 당도는 알려져 있지 않아요. 지나치게 소중한 나머지 노출한 것만으로 망치기 십상. 당신은 갈색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죠.


     쓰레기를 따로 모아 두었다가 그에게 조공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만나서 멀쩡한 척할 수 있기 때문이야. 화장실에서 내장까지 다 게워도, 네가 나의 내장이어도, 내 힘으로 화장실 문을 닫고 나설 수만 있다면 너하고는 상관없지. 


   레지  난 네가 말한 대로 너를 저장하지 않았어. 봐, 쓰레기라는 말은 된소리 때문에 부적절해. 씨발이라는 말도 마찬가지. 그걸 떼어내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 나쁘게 느껴지지도 않고. 넌 언제나 술을 절제하고 싶다고 말했지. 넌 널 절제했어.


   레지  우리는 조제*****)를 배워야 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팬덤이 되어야 해. 하지만 너무 어려워. 팬덤에는 역사가 있지. 우리에게는 공적인 허밍이 없고 돈을 긁어모을 시즌 오프도 없으며 매진은커녕 매장될 뿐,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이타심조차 부릴 수 없어.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것 같아. 너의 옷장에는 왜 그렇게 많은 헤어드라이어가 있었는지. 그날 넌 오피스텔 창문을 반 뼘 열고 커피땅콩을 바깥으로 하나씩 떨어뜨리며 말했어. 야, 그게 궁금해? ···발··· 발··· 바다 같은 머리카락이 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하나로 되겠어?


   욕을 들어도 화나지 않았다. 그날의 날씨는 커피땅콩의 비극이었다. 대화 속에 호르몬과 오존층이 위협처럼 번득였다. 대자연의 비극이기도 했다. 늘 외치고 싶은 구호, 인간이 죽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친환경이다!******) 우리가 매 순간 이 말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베푼 조제심*******) 덕분이었을 것이다.


   레지  아무도 비웃지 않으려 했지만 섞여야 마땅한 소음이 있었다. 소음에는 패턴이, 패턴에는 규율이 있었고 귀 뒤에선 체크무늬 같은 조소가 비스듬히 도사렸다. 물론 변명에 불과하다. 지금 여기서 기질적으로 변명하는 존재. 스며들려고 할수록 무엇보다 더 악에 가까워지는 기분이었어.


   레지  나는 아주 우스꽝스러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가 없애고, 만들었다가 없앴습니다. 어느 순간 한국 계정이 아니었습니다. 너는 나에 대해서 절대로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난 기억해. 하지만 난 나를 써 달라고 한 것이 아니야. 내가 누울 포근한 절취선을 그어 달라고 했지. 파도처럼 넘실거려도 기꺼이 그 위에서 잠들고 싶었어. 그토록 애원했는데 넌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어. 지금도, 봐, 이건 결코 날 위한 것이 아니야. 


     옷장에 카모 바지가 몇 벌이나 있지요?


   레지  한 벌을 제외하면 전부 네가 사 준 거야.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어요. 


     궁금한 게 있어요. 카모 바지를 입었을 때, 그 무늬는 위장을 위한 것이므로 더 효율적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나요?


   레지  너 정말 웃기다.

 


============== 절취선 ==============



   많은 일이 있었다. 한 가지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롤로노아 조로********)처럼 동료를 위한 거였다면 확성기를 대고 소리쳤을 것이다. 침묵은 한 번도 우리의 명예를 위해 쓰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양심을 위한 도구가 있다면 혀를 자르다 피범벅이 된 손을 교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버터칼에 비춰 본 얼굴은 버스를 수십 번 잘못 갈아타고 머릿속이 하얘진 것처럼 어리둥절해 보였다. 


   만약 우리에게 우리가 없다면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손거울을 주머니에 넣고 세상 끝을 향해 달리는 전철에 탑승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생각하면 어쩐지 자세가 흐트러진다. 우리를 믿으면 이 세상의 나쁜 것을 함께 믿는다. 쇼윈도에 내걸린 나쁜 스타일의 옷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훔쳐 달라고 말할 때까지. 그걸 걸칠 만한 어깨가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어루만질 만한 어깨가 있기에 움츠리고 걷는 밤도 있는 것이다. 


   밤을 초음파 검사해 보았는가? 크고 작은 혹이 존재한다. 움트고 있다. 여지없이 죽음을 향하는 주제에 성실하기 그지없는 작은 혹들. 그것이 바로 우리일 것이다. 



*) 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의 주인공.

**) 라벨을 찍으면 와인의 별점을 보여 주는 어플리케이션.

***) BBC 드라마 〈닥터 후〉 뉴 시즌3 에피소드10에 나오는 외계인. 관측될 때는 천사 모양의 석상이지만 관측되지 않을 때는 살아 움직인다.

****) 천계영의 또 다른 만화책. 『DVD』는 『언플러그드 보이』가 언뜻언뜻 비치는 마지막 작품이다.

*****) 調劑. 여러 가지 약품을 적절히 조합하여 약을 지음. 또는 그런 일. (표준국어대사전)

******) 와카스기 키미노리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에서. 요한 크라우저 2세.

*******) 친구에게 약을 조제해 주려는 마음.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없는 말이니까). 절제심의 변형.

********) 이건 그냥 꽃장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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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사나이와 사보이

사나이와 사보이 장수양 아름다운 피자를 훔친 사나이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달아났습니다. 낮은 언덕들이 나이야, 하고 여러 번 불렀습니다. 사나이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닷새가 지난 어느 날 나는 우연한 계기로 사나이의 주소를 알아냈습니다.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의 이름은 사보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나의 자매가 되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이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자매란 뭐든 서로 안다고 전해집니다. 사나이, 아직 나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름다운 피자를 먹지 않았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러한 이해관계를 상습적으로 파악하는 교집합 속에 당신과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나이는 나에게 사진을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나이는 아름다운 피자를 둘둘 말아서 들고 다닙니다. 사람들이 버스킹하는 거리, 맞은편에서 피자를 깔고 누워 있습니다. 펠리컨이 다가와 큰 부리로 피자와 사나이를 이리저리 찌르며 삼킬 수 있는지 알아봅니다만, 피자도 사나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진은 부리에 올리브 하나 묻힌 펠리컨이 사나이의 뺨에 뽀뽀하는 순간입니다. 사나이는 아름다운 피자를 하늘 높이 돌립니다. 피자의 날씨를 만들어 냅니다. 별도, 달도, 밤도 피자의 토핑이 됩니다. 그리하여 피자의 명예를 드높입니다. 사진 속 사나이는 헬터 스켈터의 모자를 쓴 것 같습니다. 사나이의 생일인 모양입니다. 아름답지만 조금 낡은 피자 위에 촛불만큼의 사나이가 올라갔습니다. 이런, 우리는 나이가 같습니다. 쌍둥이는 서로 텔레파시가 통한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여전히 사나이를 잘 모릅니다만 사진을 찍을 때면 언제나 웃고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서른 해가 지났습니다. 찌그러진 주방장 모자를 쓴 이가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어두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소. 평생을 바쳐 만든 아름다운 피자를 사나이가 훔쳐 달아났다오. 무구한 피자 도우의 지옥 속에 서른 해를 보냈소. 수소문 끝에 이렇게 찾아왔소. 당신이 그의 소식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오. 자, 사나이가 있는 곳을 말하시오. 나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깊숙이 눌렀습니다. 군데군데 밀가루가 묻은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갑시다. 그가 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구겨진 모자를 곱게 펴는 동안 나는 사나이가 보낸 사진들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썼습니다. 자매여, 마지막 편지입니다. 앞으로는 당신이 아는 주소 끝에 사진을 받아 볼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나는 이제부터 절대로 당신을 만나지 않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마세요. 나만은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압니다. 당신이 얼마나 멋진 일을 하고 있는지.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보이로부터 편지를 부친 나는 반듯한 모자를 쓴 이와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낮은 언덕들이 보이야, 보이야

  • 장수양
  •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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