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 크리스마스
- 작성일 2026-03-01
- 좋아요 0
- 댓글수 0
베들레헴 크리스마스
김혜순
겨울, 잘생긴 죽음.
겨울, 몸속에서 나와 몸 바깥에서 살아가야 하는 추위.
우리 집이 한 꺼풀 좌악 벗겨진다. 집의 알몸이 드러난다.
차가운 바닷물로 지은 집에서 커피를 끓이는 일,
차가운 바람으로 지은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
차가운 어둠으로 지은 집에서 한숨을 데우는 일.
차가운 공기로 지은 집에서 열병을 만드는 일.
잘생긴 죽음이 비명을 지른다. 바깥을 처음 만난 거대한 신생아처럼. 탯줄이 끊어지고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겨울엔 그 비명 소리가 공기 중에 꽉 찬다. 여름에 묻어 버린 태풍의 울음소리 같다. 모자를 푹 눌러쓴 행인들이 그 비명을 참고 걸어가고 있다. 엄마 없는 거대한 아기. 영하의 라듐. 내 불면의 무한한 냉동. 눈사태처럼 나를 파묻는 이 감정. 흰 꽃들이 중추신경을 따라 만발한다. 눈송이들끼리 서로 치러 주는 이 만발한 탄생일의 장례식. 차가운 은제 식기들이 우울한 우라늄처럼 굴러다니는 하늘 아래 죽음이 말구유에 눈사람처럼 누웠구나. 동방박사들이 낙타를 타고 멀리 엄마가 아직도 처녀인 차가운 아기를 경배하러 오는구나.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1)그 유리병을 열지 마!
하늘 대신 흰 천 하나. 땅 대신 들것 하나. 너무 추운 이 항구 대신 빙하기의 자궁 같은 거대한 냉동 서랍 하나.
나는 막 태어난 엄마 없는 겨울 아기의 손을 꽉 잡는다. 차갑다. 더 꽉 잡으니 더 차갑다. 정말 이곳은 춥다.
1) Maria Salomea Skłodowska, 마리 퀴리의 폴란드 이름.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시
인노첸시오 8세의 불멸인노첸시오 8세의 불멸 김혜순 먼지로 흐린 유리창 때문에 밖의 나무도 흐리고 안의 남자도 흐리다 벌레의 주검들로 거무튀튀한 유리창 때문에 피아노 소리도 거무튀튀하고 방안의 남자도 거무튀튀하다 더러운 주전자에 물이 끓고 남자는 주전자가 타도록 일어나지 않는다 전화선은 늘어져 있고 주전자를 태우는 불꽃만은 싱싱하다 검은 연기 속에서 시간을 가득 먹은 파리가 날고 전국의 공중전화 박스들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흘러드는 연기로 폐는 쿨적거리고 눈물도 쿨적거리지만 그의 핵은 뛰고 있다 때 묻은 나무의 새로 돋은 이파리들은 방을 엿볼 생각이 없다 방의 남자도 밖을 내다볼 생각이 없다 태양이 거머리빛으로 창을 기어가면 창 안쪽에서 해파리들처럼 먼지구름들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인노첸시오 8세는 영원히 살아 있다 먼지로 흐린 유리를 열고 아무도 그를 방문하지 않지만 볼록한 배 검은 진주로 변한 눈동자 그는 나무였으나 기괴한 광물이 된 몸 안에 살아 있다 그의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고 그의 목을 조르는 형광타원형들이 계속해서 천정에서 떨어진다 인노첸시오 8세가 먹은 세 소녀의 피 창밖에 억울한 장미 세 송이 영원히 피어 있다 나는 그의 몇 번째 시녀인가 밤이 오면 등불을 끄고 집을 쪼개는 금들이 몰려드는 것을 그대로 둔다
- 김혜순
- 2026-03-01
문장웹진 시
결코후회하지않고사과하지않는육체를가진여자와 너무조용해서위로조차할수없는육체를가진여자와 주파수가다른곳으로떠난여자의 기원막대나선공명결코후회하지않고사과하지않는육체를가진여자와 너무조용해서위로조차할수없는육체를가진여자와 주파수가다른곳으로떠난여자의 기원막대나선공명*) 김혜순 결코후회하지않고사과하지않는육체를가진여자는 울고 싶은데 울어지지 않아서 화가 나. 화 다음 수가 나. 수 다음 목이 나. 목 다음 금이 나. 금 다음 토가 나. 나는 화수목금토 육체에재갈물린여자야, 그런다. 결코후회하지않고사과하지않는육체를가진여자는 상담실에 오자마자 모래상자 중앙에 모래언덕을 만들고 뱀 3마리를 상자에 놓고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소리친다. 아빠가 뜨거운 물속에 나를 넣는 꿈을 꾸었어, 뜨거운 물속에서 새빨간 너를 낳아야 했어, 나는 융 학파들의 분석을 싫어해, 내 기억은 내가 모르는 짐승이 되어 버렸어, 그런다 내가 모래상자에 두꺼비를 놓으면 너는 이렇게 생각하지? 이 다음엔 물을 놓겠지! 아즈텍에선 두꺼비가 자궁 상징이야, 그런다. 내가 뱀을 놓았으니 벌써 분석을 끝냈겠지? 우로보로스, 설마 생각하는 거야? 나는 뱀이야, 양말 속에 눈알이 달렸어 하하. 그런다. 개구리 입에 뱀을 밀어 넣으려 하다말고 관람불가, 관람불가 쩍벌남과 다꼬녀, 그런다. 너무조용해서위로조차할수없는육체를가진여자가 결코후회하지않고사과하지않는육체를가진여자에게 너는 지금 욕설이 하고 싶은가? 왜 그렇게 위악적인가? 하고 묻자 잠시 후 얘네들도 그림자가 있네 죽은 부모의 사진 같은 내 그림자, 그런다. 너무조용해서위로조차할수없는육체를가진여자가 심리 테스트를 제안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것, 죽음, 네와 아니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의한 것, 죽음, 네와 아니오 결코후회하지않고사과하지않는육체를가진여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사람을 땅에 묻고 이렇게 우리가 앉아 있는 것, 공의인가, 그런다. 나는 결국 죽음을 순산할까, 난산할까, 제왕절개할까, 그런다 이 세상에 제일 냄새가 나는 색이 뭔지 알아? 흰색, 흰 새의 겨드랑이 냄새, 기저귀냄새. 우주 냄새 나는 옐로우에머랄드블루브라운그레이그린색이 좋아 울려고 하면 뇌압이 상승하고, 정전. 그 다음 응급실. 흰색 정면. 반복. 반복. 반복. 죽은 사람은 왜 죽어 있는 것을 멈추지 않지? 죽음이라는 부모님의 딸로 살아갈 수는 없어, 오늘은 수의 날. 눈물의 날이야. 오늘 내 밑바닥을 흐르는 지하의 강이 오도가도 못하네. 호스피스에서 엄마가 자다가 눈을 뜨고 나한테 그러더라 이것아, 왜 그렇게 다리를 꼬고 밤새도록 앉아 있니? 그러다가 네가 내 주민등록번호를 외우고 있으니 언제든지 날 찾으러 올 수 있겠지? 하더라. 그 날은 금의 날. 마음이 철창살이었어. 주파수가 다른 곳으로 떠난 엄마가 외치고 있어. 뻔히 보이는 데 죽은 자가 되어 계속 딸의 이름을 부르는 그 심정, 우린 모를 거야, 그 한을, 그런다. 결코후회하지않고사과하지않는육체를가진여자는 모래 위에 뱀 세 마리를 세 사람의 손목처럼 꼬아 놓는다. 왜 우리 셋이 껴안았는데 느낌이 안 나? 그런다. 내 맘이 사막이라서 그런가? 적막의 막막한 사막. 사막은 후회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아, 그
- 김혜순
- 2022-01-01
문장웹진 시
엄마 온 엄마 오프엄마 온 엄마 오프 김혜순 부엌에는 털실로 짠 냄비가 있다 저 냄비는 불에 올릴 수 없다 이제 저 부엌은 끝났다 안방에는 털실로 짠 가위가 있다 저 가위로 헝겊을 자를 순 없다 이제 이 집의 바느질은 끝났다 주전자는 말해서 무엇 하랴 저 털실 주전자에 물을 부을 수 없다 이제 차 마시기는 글렀다 주전자에서 털까지 자라니 주전자와 냄비가 부부라니 엄마는 털실을 끌고 온 사람 털실은 흡반 달린 촉수를 어디에나 뻗었다 집에는 늘 털실로 짠 물건들이 늘어났다 저것을 짜는 동안 몸이 알아챈 불안감을 재울 수 있었다고 엄마는 회상했다 저 숟가락은 끝났다 구멍이 뚫렸으니 게다가 저 숟가락에서 뿌리가 어마어마하게 돋아났으니 태어나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만 만들다가 6일만에 죽는 나방이 있다 나방의 꼬리는 털실로 땋은 머리처럼 길다*) 그 나방은 세상에 나올 때 이미 입이 없었다 나방이 떠나자 이제 집이 털실로 따 짜여졌다 금붕어 두 마리가 어항 밖에서 헤엄치며 털실로 짠 어항을 들여다본다 뭐 하는 물건일까 하는 표정으로 어항은 방치된 정신 병동처럼 뿌옇다 이 집은 끝났다 집이 털실 꽃병에 꽂혔으니 이 마을도 끝났다 집들이 전부 털실 꽃병에 잠겼으니 (엄마는 이제 아 방에 이렇게 진열되었습니다) 이 방에 불을 켜는 스위치는 털실 뭉치 안쪽에 숨겨져 있고 털실로 짠 이불을 들추자 그 안에 집 안의 칼들이 전부 눕혀져 있다 이제 칼을 찾는 숨바꼭질이 끝났다 게다가 털실로 짠 칼이라니 *) 장대꼬리산누에나방 Argema mittrel
- 김혜순
- 2021-12-3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