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문
- 작성일 20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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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김안
마음으로, 마음의 최대치로 만든 방 안에서 밤새도록 아이가 놀고 있다 아이의 놀이는 언제 끝날까 이 징그럽고 끔찍한 방 안에서 너와 나는 무엇을 만들어낸 것인지 붐비고 들끓고 징그러울 만치 하얀 폭설을 뚫고 도착한 책 더미들 속에서 나는 입부터 망하기 시작하지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무렴요 건강하셔야죠 전 진정 아무 일 없습니다 아, 옆에 아이가 있어서요 밤마다 천장에는 자꾸 구멍이 뚫리고 물이 떨어진다 아이야, 이 방은 안전하단다 이 방에만 있으면 우리 집은 떠내려가지 않을 거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쓸데없이 하얀 벽을 타고 벼락같은 수직처럼 천장으로 뻗쳐 올라가는 검은 곰팡이 내 입에서 말이 떠나고 아이는 그 사이사이마다 무지개를 그린다 그리고 말한다 찍어 줘 요즘 들어 아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제가 만든 성이나 제가 그린 그림 들을 찍어 사진을 남겨 달라는 것 찍어 줘 찍어 남기는 것 남겨서 기억하는 것 지옥의 습관처럼 최대치로 기억해 내기 위해 애쓰는 것 기억하여 바득바득 이를 갈며 후회하기 위해, 최대치로 기억을 끌어 모아 내가 받은 선의를 찾는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아직도 이 방 바깥에는 숨 쉴 공기가 남아 있다 파랗게 언 볼 위로 하얀 입김을 불어 본다 마음은 드물고 우리는 얼마나 더 오래, 함께, 가까스로, 미치지 않고서 흘러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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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원 일지식물원 일지 김안 죽은 사람들이 자꾸만 내게 길을 묻습니다 나도 살아 있는 것은 처음인데 생활을 잃은 사람들이 자꾸만 내게 조언을 구합니다 내게 무슨 생활의 자취가 있다고, 나는 그저 말을 조작하는 사람일 뿐인데 나를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피해 죽은 척 목을 꺾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제각기 다른 구호들과 찬송들과 춤들로 가득한 채, 제각기의 정의와 선의와 애국으로 곪아 가는 마음의 열도 그 속에서 어제 만난 친구와 그와 싸운 친구와, 그들을 말리던 친구와 엎어지던 식탁 옆에서도 평화롭게 곯아떨어진 강아지 한 마리 돌아보니 모두 죽은 듯 누워 있습니다 다 아무 일이 아니었다는 듯이 대체 왜 사냐고 물었던 이들은 내겐 가족이었고 대부분의 가족들도 왜 사는지도 모른 채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그저 내 몫의 부끄러움만을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부끄러웠던 일은 말하지 못합니다 그토록 진부하고 수많았던 사랑처럼 사랑이란 헛된 믿음처럼 처음으로 죄를 저질렀던 순간도 그것이 죄라고 내게 말했던 사람도 우리는 마주 보면서 여전히 선한 척 웃고 있습니다, 난 법 없이 살 수 있어요, 라고 말해 봤자 쓰러진 식탁과 깨진 유리 조각들과, 시뻘겋게 물든 고깃덩이 그래 봤자, 나는 지나치게 정상적입니다 내가 쓰는 시는 그게 문제지요 술도 덜 깬 채 집으로 돌아와 죽은 듯 눕습니다 아침이 오고 살아 있는 듯 일어나 처음 보는 딸아이에게 이끌려 놀이터로 나갑니다 더러운 비둘기들이 걸어 다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딸아이가 먹다 남긴 과자 부스러기나 던져 주다 보니 희망은 납작해집니다 과자 부스러기로 모여든 개미나 밟아 죽이면서 늙다가 늙어 곪다가 눈을 뜨니 깊이 없는 이승입니다 내가 쓰는 건 백지 위에 술이 덜 깬 채 누워 있는 징그러운 표정입니다
- 김안
- 2020-02-01
문장웹진 시
햇살의 노래햇살의 노래 김안 늦은 아침, 술 덜 깬 옛 애인은 늘 슬픔으로 몸이 둥글어지곤 했는데, 햇살은 그 둥긂 위에서 깨지곤 했는데,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아침, 말의 형태를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 말하지 못하는 비극과 말하지 않는 비겁 사이에서 그 많던 이데올로기의 우상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그 이름들이 내 기억 속에서 옛 애인의 몸뚱이를 지우며 걸어갈 때, 그 둥글었던 등에 그어지는 비극과 비겁 사이, 그 날카로운 틈을, 그것을 정의라 부를 수 있다면, 정의는 무슨, 그저 사랑이었다고 부를 수 있다면, 다행한 아침. 안온한 망각의 빛살. 이상하게 아름답고 이상하게 추악한 이 늦은 아침식탁에서 술 덜 깬 눈으로, 멸시와 극지 사이에서 달아오르는 눈으로 바라본 이 몸뚱이야, 헛된 소리만 내는 공장아, 의미 없는 소리라곤 하나도 없던 시절은 끝나고, 어느 사이에 나는 암사슴 같던 발도 없이 둥글어질 몸도 없이 우상도 없이, 그렇게 기다랗게 망각하며 망해 가고 있구나, 혀끝을 가르는 깨진 햇살의 노래를.
- 김안
- 201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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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꾹이는 삶딸꾹이는 삶 김안 일상을 대본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우스울까. 희극과 비극이 딸꾹질처럼 멎지 않고, 물 한 컵 들이켜고, 이불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선 이제 내게 닥쳐올 불행들의 목록을 생각해 보다가도, 다시 벌떡 일어나고. 하긴 유행 지난 철학서처럼 사는 삶을, 읽지 못해 무릎께만큼 쌓인 잡지들처럼, 결국에 버려질 삶을 굳이 옮겨 적을 필요야 하다가도, 하물며 시쯤이야 하다가도, 아빠, 바람 불어, 머리가 자라는 것 같아― 가을,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서 그 앞에 앉아 있는 둥근 등의, 둥근 머리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의 소리를 아, 나는 평생 벗을 수가 없겠구나, 이 몸뚱이에 붙은 작디작은 몸뚱이의 소리를, 말에 접 붙은 아직 문법 없는 말 아닌 소리를, 하다가도, 이건 내 몫이 아닌 것도 같고, 때론 다른 이의 삶만 같아서― 비겁하게 거룩하구나, 우리들의 잘 길들여진 분노와 행복처럼, 간만(干滿)처럼, 강박처럼. 그러니 삶, 저녁이면 딸꾹딸꾹, 세탁기 돌고, 보일러 돌고, 밥통 울고 살고 잘 뿐.
- 김안
- 201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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